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 천연균과 마르크스에서 찾은 진정한 삶의 가치와 노동의 의미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 더숲 / 201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착취당할 대로 착취당한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부당하게 속았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안타깝게도 그것은 참으로 정당한 거래의 결과다. 그 어디에도 부정은 없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았다. 자본가는 가격대로 노동력을 샀고 그것을 자유롭게 사용했을 뿐이다.˝

- 와타나베 이타루의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인간은 걱정의 동물이다.
요즘 주변에서 많이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인생이모작`이라는 단어다. 경제가 불안하고 미래가 불투명하기에 나온 단어겠지만 내심 씁쓸하다. 진로적성교육이 한창인 요즘에 이 무슨 해괴망측한 소린가.
얼마전 SNS에 전공불문하고 결국에는 모두 치킨집을 하는 것으로 진로가 결정되는 그림을 보고 웃은 적이 있다. 대기업을 다니는 사람이라고 다르지 않다.

이 불안의 시대에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2008년 리먼 사태이후 마르크스의 자본론 읽기가 붐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에는 작고하신 서울대학교 고 김수행 교수님이 돌아가시기 직전에 자본론을 재출간하실 정도로 자본론은 우리에게 다시 각광받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자본주의 경제의 `보이지 않은 손`이라는 마법은 더이상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이러한 전통적인 경제학을 부정한다.

이런 불황의 원인과 해법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 경제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진짜 혼란은 화폐의 이상한 행동과 가격의 대폭락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게다가 또 원인이 된 것은 금의 결핍이며, 금의 결핍은 어느 선까지는 세계의 수요에 채굴량이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도 기인하고있다.
그런데 아직도 다른 모든 혼란은 고율 관세를 부과함으로써 국제 무역을 저해하는 경제 민족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경제학자도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과학 기술의 발전이 노동자의 수요를 감소시킨 결과, 실업이 증대한 것이야말로 진정한 원인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이들의 견해와 또 다른 여러 가지 견해 또한 제각기 근거는 있을 것이고, 이런 세계의 질환을 야기한 역할을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들어보면 하나같이 불황에 대한 결과일 뿐이지 원인은 아니다.

그러면 진정한 불황의 원인은 무엇인가?
채사장의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에 보면 과잉 생산이 재난의 원인이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는 말이다. 몇백만의 사람들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물품조차도 부족해서 고생하고 있는 때에 과잉 생산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아프리카에서는 몇억의 사람들이 제대로 입을 옷조차 구하지 못하는 상태인데, 월가에서는 성과급과 보너스를 엄청나게 뿌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한 정확한 설명은, 사람들이 그런 물건을 사기에는 너무나 가난하다는 것이지 그들이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대중에게 돈이 없다는 의미다.


이와 같은 화폐의 결핍은 세계 민족간의 화폐의 배분이 변화했으며, 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 즉 부의 분배에 불평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에서는 부의 과잉이 있고, 그 소유자들은 그것을 어떻게 이용할지를 모른다.

하지만 빈부차이는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존재해 온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경제 공황의 원인이 되었다는 말은 왠지 납득하기 어렵다.
봉건시대에 사람들의 삶은 거의 정체되어 있거나 변화의 폭이 적었다. 반면 거대한 기계와 세계 시장을 수반하는 자본주의는 동적이어서, 개인과 집단이 부를 축적함에 따라 급격한 변화가 나타났다. 부의 분배에서 불평등의 증대는 다른 약간의 요인들과 결부되어 여러 공업국에서 노동과 자본의 새로운 대립을 유도했다. 이들 여러 나라의 자본가들은 식민지나 후진 지역을 착취한 돈으로 노동자들에게 양보 - 임금 인상이나 생활 조건의 개선 등을 함으로써 긴장을 완화했다. 이런 식으로 서유럽이나 북아메리카의 여러 공업국들은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 그리고 동유럽을 착취해 부를 축적했지만, 노동자에게 준 것은 겨우 한 줌의 몫에 불과했다.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서구 열강의 세력이 확대되는 동안 서양에는 많은 공황이 있었다. 어떤 나라는 너무 많이 축적했기 때문에 일어났고, 또 다른 어떤 나라는 쓸 수 있는 돈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일어났다. 그러나 이러한 공황은 자본가들이 잉여 자금을 가지고 계속 후진 지역을 개발하고 착취했기 때문에 모면할 수 있었다. 즉, 새로운 시장이 개척되고, 상품의 소비가 증가했기 때문에 공황을 모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본주의에서 성장은 더이상 없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경고하고 있다. 그래서 다시 마르크스 열풍이 불고 있는 것이다.


불황에 대처하는 방법이 과연 무엇일까를 고민하던 끝에 제일 먼저 만난 책.
바로 와타나베 이타루의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이다. 시원한 콜라같은 청량감을 준다.

천연균을 연구하고 사람을 이해한 탓에 일주일에 4일만 일하는 빵집을 운영하는 저자는 마르크스가 꿈꾸던 사회를 가게에 실현한 독특한 사람이다.


빵집 수련 시절의 나는 누군가의 강제에 의해 내 노동력을 팔지는 않았다. 나 자신의 의지로 사장에게 노동력을 제공했다. 그리고 빵을 만드는 기계와 재료, 즉 생산수단을 하나도 소유하지 못한 상태였다.
거꾸로 말하면 자신의 노동력을 떼어 팔기 싫다면 자기 소유의 생산수단을 가지면 된다. 그 점을 깨달은 나는 제빵 기술을 익혀 내 가게를 열고, 생산수단인 믹서와 오븐 등의 기계를 갖추었다, 또 가급적 근처 농가에서 재료를 구입하여 불안정한 시장에 좌우되지 않고 재료를 구하는 방법을 실천했다.

천연균에 빠져사는 이타루씨에게 요즘은 발효균이 말을 건넨다고 한다. 무언가 하나에만 몰입하면 도달하는 경지에 이르기까지 시골의 작은 가게를 힘들게 운영하는 이 사람을 지탱한 것은 바로 마르크스의 철학이었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기술혁신은 결코 노동자를 풍족하게 만들어주지 않는다. 자본이 노동자를 지배하고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즉, 기술혁신의 결과물이 고스란히 인간에게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타루씨의 예를 살펴보자.
상품의 가격은 교환가치에 의해 정해진다. 중요한 것은 노동시간이다. 기술혁신의 전과 후를 비교했을 때, 1시간당 만들어지는 빵의 양이 2배가 되면 빵 하나당 교환가치는 반으로 줄어들기 마련이다.
그래서 기술혁신 후의 빵 가격은 기술혁신 전의 반인 50엔이 되어야 옳다.
그런데 어떤 조건하에서는 기술혁신 후에도 그 이전과 같은 가격으로 상품을 팔 수 있다. 새로 개발된 기술을 한정된 특정 자본가만 사용하면 된다. 교환가치의 크기는 세상 일반의 표준적인 기술 수준을 토대로 정해진다. 이 말은 세상의 대부분의 빵집이 1시간에 10개의 빵을 만드는 기술만 보유한 상태라면 남들을 앞질러 기술혁신에 성공한 빵집은 기술혁신 전의 가격대로 땅을 팔 수 있으니 커다란 이윤을 남길 수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자본주의는 경쟁사회다. 자본가들끼리 보다 많은 이윤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한다는 말이다. 새로운 기술을 획득한 자본가는 더 많은 이득을 얻으려고 가격을 조금 낮춰서 시장을 공략할 수도 있다. 빵을 1개당 80엔에 파는 것이다. 뒤쳐진 경쟁 자본가가 이 상황에 제대로 맞서지 못한다면 자연히 도태되어버릴 것이다. 필사적으로 달려들어 기술 수준을 따라잡았다고 해도 상대는 반격하기 위해 가격을 50엔으로 더 낮출지도 모른다.


그 결과 상품은 드디어 교환가치대로 팔리게 되고 이윤은 기술혁신 전의 수준으로 돌아간다.

인류는 지원개발을 위해 환경을 파괴하고, 폐기물과 배기가스를 배출해 공해를 일으키며, 안전성이 완전히 증명되지 않은 농약 과 화학비료, 식품침가물, 유전자 변형작물을 시용한다. 게다가 원자력 발전처럼 인간이 절대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하는 위태로운 기술까지 만들었다. 방사성 폐기물은 장차 몇 만 년이나 생명을 지속적으로 위협할 것이다(이 부분도 `부패하지 않는` 범주에 넣을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전 세계에서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런 사태를 더욱 부채질하는 것이 통화량 늘리기다. 재정정책(적자국채 발행)과 금융정책(제로금리정책•양적완화)을 통해 돈을 마구 풀어서 시중에 돈이 넘쳐나게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부패하지 않는` 돈이 자본주의의 모순을 낳는 주범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돈과 경제를 `부패하게` 만들어버리면 어떨까? 이것이야말로 이타루씨가 발효의 힘을 빌려 발효와 부패 사이에서 빵을 선택한 원동력이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에 보면 두 가지 책이 자주 언급된다.
마르크스의 `자본론`과 히라카와 가쓰미의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이다.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게 된 계기도 사실 이 책 때문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를 읽었다. 가쓰미씨는 일본의 원전폭발과 동일본대지진 사고 이후에 자연의 거대함을 깨달았다고 한다. 인간이 만든 제도인 자본주의를 다시한번 살펴보는 것이 저자의 의도이다.

일본판 제목이 `소상인의 권유`인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는 대기업 의존적인 구조를 지양하고 개인 사업자로서 살아갈 것을 제안한다. 성장중심의 경쟁사회의 비인간성을 고발하고 인간중심의 사회로 살아가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먹거리를 마련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상인인 것이다. 이타루씨의 사례는 이 책에서 설명하는 소상인의 가장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한다.

소상인이란 비즈니스의 규모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사업 방식, 사원 한 사람 한사람이 만들어낸 팀워크, 회사가 지향하는 방향, 경영자의 신념이 소상인적인 휴먼 스케일을 축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말한다.

제품 하나하나를 소중하게 정성껏 만들어내는 생산 라인, 그것을 고객에게 보내 신뢰와 만족도를 피드백시키는 시스템이다. 확대보다 지속을, 단기적인 이익보다 현장의 한 사람 한사람이 노동의 의미나 기쁨을 음미할 수 있는 직장을 만드는 것, 그것이 삶의 긍지로 이어져 날마다 노동 현장에서 작은 혁명이 일어나는 회사 말이다.
참으로 멋진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책에서는 여기까지만 언급되어 있다. 구체적인 방안이나 사례는 아쉽게도 나와있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휴먼 스케일이란 인간 혼자서 해낼 수 있는 규모를 말한다.



경제학자들에 따르면 경기는 호황과 불황의 반복이라고 한다.
어찌보면 우리 인생 자체가 그런지도 모른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기 마련아닌가.

어떤 강대국도 천년만년 태평성대를 누린 경우가 없다. 전 세계적으로 선진국들은 계획된 자본주의라든가, 후진 지역 개발을 위한 국제 협력 따위를 논의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논의의 배후에서는 국가 간의 대립과 세계 시장을 차지하기 위한 서구 열강의 전쟁이 더욱더 치열해지고 있다.

무엇을 위한 계획인가? 남의 희생을 통한 어떤 자의 이익을 위해서인가? 자본주의의 동기는 개인의 영리이며, 그것의 표어는 경쟁이다. 그리고 경쟁과 계획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 이외에도 현대의 여러 조건하에서 자본주의의 능력을 의문시하고 있는 지식인이 적지 않다,

제레미 러프킨은 그의 책 `노동의 종말`에서 노동자의 노동 시간을 주 당 40시간으로 단축함으로써 한꺼번에 실업을 완화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것을 실행하게 되면, 몇백만 명의 노동 예비군이 취업할수 있어 그만큼 실업이 감소될 것이다. 노동자의 대표자들은 모두 이것을 환영했으나, 영국 정부는 여기에 반대하고 독일과 일본을 꾀어서 이 제안을 봉쇄할 공작을 폈다.
공황과 불황은 세계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 대책도 국제적이고도 세계적인 정책이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각국은 협력해서 어떻게든 이것을 타개하려고 시도했으나, 현재까지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총체적으로 볼 때 이들의 사정은 부문적이고 일시적인 안정을 낳을 수는 있어도, 실제로는 세계 전체로서 보면 사태를 더욱 악화시길 뿐이었다. 그것은 국제 무역을 감퇴시켰을 뿐만 아니라 부의 분배의 불평등을 유지시키고 증대시켰다. 어떤 나라는 관세를 인상함으로써 끊임없이 상대국과 분쟁을 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말 그대로 `관세 전쟁` 이다. 세계 시장이 더욱 좁아지고 더욱 보호 정책이 가해짐에 따라 경쟁이 점점 더 격화되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경쟁하기 위해 고용주는 노동자에게 임금을 인하할 것이라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리하여 불경기는 한층 더 심각해져서 실업자 무리는 늘어날 뿐이었다. 임금이 인하될 때마다 노동자들의 구매력은 메말라 가기만 했다.


이런 점에서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와 `골목길에서 자본주의의 대안을 찾다`는 노동자에서 소상공인으로의 방향전환을 제시한다. 인생이모작시대에 발맞추어 이제 우리도 스스로를 고용할 시점이 온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세계사 편력 1 - 아버지가 딸에게 들려 주는 세계사 이야기, 개정판 세계사 편력 1
자와할랄 네루 지음, 곽복희 외 옮김 / 일빛 / 2004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벅찬감동 이외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하랴.

그러나 애서가로서 한가지 아쉬운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네루의 세계사 편력 내용과는 무관한 오히려 출판사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책을 읽으면 바깥 표지는 잘관리해서 함께 소장하는 편이다.

이 책은 그럴수 없었다.
5년전 을지로의 북스 리브로 중고코너에서 산 책은 원래부터 표지가 없었다. 서점도 없어져서 하소연 할 곳도 없다. 원래는 세 권 다 껍데기를 벗겨놓을까 생각했었다. 표지에 몇가지 책에 대한 정보도 있고 저자소개도 표지에만 있는 것이다. 그러니 1권의 겉 표지가 없는게 눈에 심하게 거슬릴수 밖에... 세권의 세트감이 안생기고 아쉽다. 5년전만해도 이 세권을 모두 다 읽으리라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얼마전 출판사에 연락을 했다. 상냥한 여직원이 반품들어오면 연락주겠다고 했는데 그것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과연 연락이 올까 궁금하기도 하다. 안오겠지... 어쩌면 내 연락처도 잊었으리라..

이 책 표지만 구할 수 없을까 하는 아쉬움과 더불어 문득 왜 책 위에 종이 책표지를 덮어씌웠는지 궁금해진다.

비단 이 책뿐만이 아니다. 껍데기 벗긴 하드커버는 너무 안이쁘다. 왜 이렇게 만드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 책이 5년간 책장에서 얌전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못생긴 하드커버였으리라 강력하게 추정하는 바이다. 아름다운 2, 3권의 표지를 보면 단언할 수 있다.

부디 일빛출판사가 나를 잊지 않기를 바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6-01-18 23: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겉표지가 같이 있어야 마음이 편합니다. 알라딘 중고점에 사고 싶은 양장본이 있는데, 겉표지가 없으면 사지 않습니다. 그 책이 구하기 힘든 절판본이라면 겉표지가 없어도 삽니다. ^^;;
 
파블로 네루다 자서전 - 사랑하고 노래하고 투쟁하다
파블로 네루다 지음, 박병규 옮김 / 민음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최초의 탄환이 스페인 기타를 관통하고 거기서 음악 대신 피가 솟구쳐 나오자 내 시는 인간의 절망이 널브러진 길 한가운데서 유령처럼 서성거렸고, 시에서는 무수한 뿌리가 생겨나고 피가 강물처럼 흘렀다.

그때부터 내 길은 다른 사람들의 길과 합류하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고독이라는 남쪽에서 민중이라는 북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나 자신을 보게 되었다. 내 보잘것없는 시는 민중에게 칼이 되고 손수건이 되어, 무거운 고통으로 흘린 땀을 닦아 주고 빵을 위한 투쟁의 무기가 되기를 열망했다.”

이 책은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칠레의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유년기부터 생을 마감하기 직전까지의 삶을 기술한 회고록이다. 사후 출간되서 그런지 솔찍한 내용이 많아서 인간적인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네루다의 팬이라면 매우 좋아할 듯. 다만 나는 네루다를 잘 알지 못하기에 그저 대단하다는 경외감 뿐이다.

낭만적인 연애 시인에서 위대한 민중 시인으로 거듭나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인간적인 공감보다는 타고난 실력을 바탕으로 운까지 따른 천재의 멋진 인생에 대한 부러움이 더 크다.

이 부러움이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으로 바뀌지 않도록 오늘도 최선을 다해본다.

단순한 흑백인데 표지가 너무 예쁘다. 최근이 본 책표지 중 가장 맘에 든다.

한가지 더.
평전과 자서전은 외형적으로는 비슷하지만 실질은 많이 다르다. 평전은 아무래도 주인공을 영웅화하는 비장함이 있다. 그만큼 교훈도 크다. 자서전은 영웅을 친근한 인간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이 책은 스콧니어링 자서전처럼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 볼 수 있어서 추천한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건 재밌다는 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노동의 이유를 묻다 주니어 클래식 6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08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고 싶은걸 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면
왜 우리는 매일 아침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일터로 나가야 하는가!


▨ 월요병이 생기는 이유

과연 우리는 왜 일하는 것일까?
이 시점에 오래전에 막스 베버라는 선각자께서 이미 써놓은 책이 등장한다. 이름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돼겠다.

책의 제목을 보고 지례 겁먹는 분들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직장인 모두가 앓는 병이 있다. 바로 `월요병`이다. 막스 베버는 당신의 월요병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자발적으로) 직업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반면 우리는 (강제적으로) 직업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


`왜 일하는가` 라는 물음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월급쟁이 선배들은 데모를 참 많이 했다. 대학가에 불온 서적도 존재했는데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대표적이다.
그 유명한 마르크스와 대척점에서 노동의 윤리를 설명한 사람이 바로 막스 베버다.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의 이론가라면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의 대표선수 쯤으로 평가 받은 모양이다. 막스 베버는 칼뱅과 마르틴 루터를 통해서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직업윤리관을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의 사상을 쉽게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경제적인 동물로 파악하고 있다. 경제적인 동기가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주요 원인이다.
막스 베버는 인간의 행위 내면에 놓인 문화적 주관성의 영역에 관심을 둔다. 베버의 입장에서 노동은 경제적인 행위이자 문화적 행위이다.


`월요병`이 생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그다지 노동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노동을 사랑한다면 주말이 가까울수록 일할 수 없다는 두려움때문에 금요병이 생기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막스 베버는 일에 대한 문화적 동기를 부여하여 우리에게 최면을 건다.
`노동에 좋은 점이 있는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지금부터 노동의 미덕에 대해서 알아보자.



▨ 노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등장하기 전에 노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래서 모두 귀족이 되고 싶어했고 가진자들은 철학과 사상을 향유할 시간이 많았다. 서양 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역사시간에 교과서에서 조선시대 때는 하나같이 상인을 괄시하고 기술일 천시했다고 배워왔다.

세종이나 정조 때 가서야 기술자들의 이름이 하나 둘 씩 등장하던 기억이 난다.

막스 베버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무위도식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상이 처음 우리에게 퍼졌다고 이야기한다. 이른바 프로테스탄티즘의 시작이다. 이때 마르틴 루터가 제창한 `천직`이라는 개념의 출현한다.

드디어 인간의 역사에서 노동이 중요해진 것이다.

루터는 ˝각 개인의 구체적 직업은 그 개인에게 신의 섭리가 지정한 구체적 위치를 충족시키라는 신의 특별한 명령˝이라고 해석했다. 천직 개념이 등장하면서 노동은 더 이상 시지포스의 징벌로 이해되지 않게 된다. 노동이라는 ˝세속적 의무의 이행은 모든 경우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것만이 신의 뜻이며, 따라서 허용된 모든 직업은 신 앞에서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정당화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확대 발전시킨 개신교의 대표적인 이론가는 리처드 백스터 목사였다. 백스터 목사는 재산을 모은 자가 부를 향락하여 태만과 정욕을 낳고 특히 거룩한 삶에 대한 추구에서 이탈하는 것을 비난했다. 이때부터 노동하지 않는 부자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에서 본 것처럼 라다크 같은 원시적 생계 경제 속에 사는 사람들은 도시인들처럼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오래된 미래`를 통해서 우리는 라다크 사람들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노동에 관한 강박은 시장경제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동에 대한 강박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시장 경제 체제에 인간들이 적응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인 것을 증명한 셈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경제적인 원인은 바로 돈 때문이다. 여기에 강한 동기부여로 등장한 문화적인 단어가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만들어진 `근면`이다.

자본제적 공장은 근면성을 가르치는 근대의 학교였다. 이 학교는 노동자는 신성한 노동을 위해 집으로 돌아간 뒤, 지나친 쾌락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새로 주입된 생활 습관을 통해 전근대적인 사람들은 노동 중심 윤리를 내재화한 근대적인 인물로 변하게 되었다. 근대적 현실 원리가 전근대적 쾌락 원리를 압도하는 대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지루하고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계실거 같다. 이 시점에서 요약 정리 한번 하고 가자.


마르크스는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노동의 이유를 설명했다. `인간 = 경제적 동물`
막스 베버는 문화적 조건 즉, 노동의 가치에 대한 신성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함께 고려한다. 근면한 사람에 대한 높은 평가가 노동의 이유라는 거다. `인간 = 경제적 동물+문화적 동물`





▨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베버는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을 분석하려 한다.

자본주의 정신은 ˝윤리적 색채를 띤 생활 관리의 방법˝이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정신은 개개인의 일상을 규제하고 바꾸어 놓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자본주의 정신은 ˝인간에 의해 집단적으로 유지될, 일종의 세계관˝이다.

일반적으로 전통주의의 영향권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열심히 일해야 할 내적 동기가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 자본주의 정신을 지닌 사람은 부의 추구를 자랑스러워한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노동 윤리의 최고선은 모든 향락을 엄격히 피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다.

우리가 노동을 천시하는 전통주의자가 되느냐 아니면 합리적 자본주의 정신의 소유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부의 추구와 노동의 의미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막스 베버는 `성경(Bible)`에서 전통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과 자본주의 정신에 따라 강조될 수 있는 내용이 동시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두 내용 중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노동의 의미와 부의 축적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주장한다.
˝돈에 대한 걱정은 마치 `언제든지 벗어버릴 수 있는 얇은 외투`처럼 성도들의 어깨위에 걸처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운명은 이 외투를 쇠사슬로 만들어버렸다. 금욕주의가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이 세계의 돈에 대한 걱정은 점증하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자동화 시스템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말이다. 심지어는 아이도 간접공정을 통해 컨베이어 벨트에서 태어난다. `멋진 신세계`의 연호는 포드의 자동화 시스템에서 따왔다. 당시 포드 자동차 회사가 T자형 자동차를 출시했던 1908년을 기원 1년으로 정한다. 자동화 시스템을 통한 비인간화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시작한 포디즘은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 소비를 위해 열심히 노동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윤리를 지닌 인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라파르크`는 1883년 자신의 저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노동윤리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담론에 불과하다고 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열심히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막스 베버의 이론을 쉽게 풀어 쓴 노명우 선생님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노동의 이유를 묻다`에 이런 글이 있다.

˝종교개혁은 근대인들에게 전례없는 외로움을 남겼다.
가톨릭 교도들과 달리 프로테스탄트들은 고립된 존재였다.
가톨릭 신자들은 사제의 도움으로 신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제의 도움을 거절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종교개혁에 참여한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했다.
칼뱅주의자들은 이전에 사제에게 의존했던 은총의 확인을 혼자 해 나가야 했다.
가톨릭의 낡은 세계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용기 있는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용기가 두려움까지 제압할 수는 없었다.
두려움을 이겨 내기 위해 그들은 노동했다. 칼뱅주의는 노동만이 유일하게 은총을 확인 할 수 있는 수단이라 했다. ˝

이 부분을 통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 소개된 `대심문관`편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대심문관은 인간이 노동의 고통을 받는 이유는 예수때문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것이 아니라는 너의 말 한마디로 인해 인간들은 노동해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많이 희석된 요즘은 근면의 추구보다는 소비를 하기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막스 베버가 주장한 자본주의와 현대의 자본주의가 달라지게 된 이유일 것이다.
이제 막스 베버의 결론을 정리해보겠다.

1, 프로테스탄트들은 스스로 직업 인간이 되기를 희망했다.
2. 그러나 우리는 직업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속에 살고 있다.
3. 그러니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막스 베버의 결론을 요약하면 ˝프로테스탄트가 주장했던 자본주의와 지금의 자본주의는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히 좋은 의도에서 노동을 장려했다. 지금은 시스템이 인간을 집어삼켰기때문에 소비가 노동을 장려하는 기이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잠깐 일을 멈추고, 왜 일을 하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보론: 프로테스탄티즘의 분파들과 자본주의 정신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21
막스 베버 지음, 김덕영 옮김 / 길(도서출판) / 201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고 싶은걸 하면서 사는 것이 행복한 인생이라면
왜 우리는 매일 아침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일터로 나가야 하는가!


▨ 월요병이 생기는 이유

과연 우리는 왜 일하는 것일까?
이 시점에 오래전에 막스 베버라는 선각자께서 이미 써놓은 책이 등장한다. 이름하여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돼겠다.

책의 제목을 보고 지례 겁먹는 분들 계실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직장인 모두가 앓는 병이 있다. 바로 `월요병`이다. 막스 베버는 당신의 월요병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프로테스탄트들은 (자발적으로) 직업 인간이 되기를 원했다. 반면 우리는 (강제적으로) 직업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다.˝


`왜 일하는가` 라는 물음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의 월급쟁이 선배들은 데모를 참 많이 했다. 대학가에 불온 서적도 존재했는데 마르크스의 `자본론`이 대표적이다.
그 유명한 마르크스와 대척점에서 노동의 윤리를 설명한 사람이 바로 막스 베버다.

마르크스가 사회주의의 이론가라면 막스 베버가 자본주의의 대표선수 쯤으로 평가 받은 모양이다. 막스 베버는 칼뱅과 마르틴 루터를 통해서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직업윤리관을 설명하고 있다.

마르크스와 막스 베버의 사상을 쉽게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마르크스는 인간을 경제적인 동물로 파악하고 있다. 경제적인 동기가 인간의 행동을 좌우하는 주요 원인이다.
막스 베버는 인간의 행위 내면에 놓인 문화적 주관성의 영역에 관심을 둔다. 베버의 입장에서 노동은 경제적인 행위이자 문화적 행위이다.


`월요병`이 생기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그다지 노동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노동을 사랑한다면 주말이 가까울수록 일할 수 없다는 두려움때문에 금요병이 생기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막스 베버는 일에 대한 문화적 동기를 부여하여 우리에게 최면을 건다.
`노동에 좋은 점이 있는건 아닐까?` 하고 말이다. 지금부터 노동의 미덕에 대해서 알아보자.



▨ 노동에 대한 인식의 변화

종교개혁으로 프로테스탄티즘이 등장하기 전에 노동은 노예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그래서 모두 귀족이 되고 싶어했고 가진자들은 철학과 사상을 향유할 시간이 많았다. 서양 뿐 아니라 우리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는 역사시간에 교과서에서 조선시대 때는 하나같이 상인을 괄시하고 기술일 천시했다고 배워왔다.

세종이나 정조 때 가서야 기술자들의 이름이 하나 둘 씩 등장하던 기억이 난다.

막스 베버는 1517년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하면서 무위도식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사상이 처음 우리에게 퍼졌다고 이야기한다. 이른바 프로테스탄티즘의 시작이다. 이때 마르틴 루터가 제창한 `천직`이라는 개념의 출현한다.

드디어 인간의 역사에서 노동이 중요해진 것이다.

루터는 ˝각 개인의 구체적 직업은 그 개인에게 신의 섭리가 지정한 구체적 위치를 충족시키라는 신의 특별한 명령˝이라고 해석했다. 천직 개념이 등장하면서 노동은 더 이상 시지포스의 징벌로 이해되지 않게 된다. 노동이라는 ˝세속적 의무의 이행은 모든 경우 신을 기쁘게 하는 유일한 방법이며, 그것만이 신의 뜻이며, 따라서 허용된 모든 직업은 신 앞에서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정당화되었다.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확대 발전시킨 개신교의 대표적인 이론가는 리처드 백스터 목사였다. 백스터 목사는 재산을 모은 자가 부를 향락하여 태만과 정욕을 낳고 특히 거룩한 삶에 대한 추구에서 이탈하는 것을 비난했다. 이때부터 노동하지 않는 부자는 비난의 대상이 된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 에서 본 것처럼 라다크 같은 원시적 생계 경제 속에 사는 사람들은 도시인들처럼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는다. `오래된 미래`를 통해서 우리는 라다크 사람들을 통해서 현대인들의 노동에 관한 강박은 시장경제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동에 대한 강박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라 시장 경제 체제에 인간들이 적응하면서 나타난 새로운 현상인 것을 증명한 셈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노동의 경제적인 원인은 바로 돈 때문이다. 여기에 강한 동기부여로 등장한 문화적인 단어가 바로 프로테스탄티즘에 의해 만들어진 `근면`이다.

자본제적 공장은 근면성을 가르치는 근대의 학교였다. 이 학교는 노동자는 신성한 노동을 위해 집으로 돌아간 뒤, 지나친 쾌락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새로 주입된 생활 습관을 통해 전근대적인 사람들은 노동 중심 윤리를 내재화한 근대적인 인물로 변하게 되었다. 근대적 현실 원리가 전근대적 쾌락 원리를 압도하는 대전환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여기까지 쓰고나니 지루하고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계실거 같다. 이 시점에서 요약 정리 한번 하고 가자.


마르크스는 경제적인 조건만으로 노동의 이유를 설명했다. `인간 = 경제적 동물`
막스 베버는 문화적 조건 즉, 노동의 가치에 대한 신성시하는 사회적 분위기도 함께 고려한다. 근면한 사람에 대한 높은 평가가 노동의 이유라는 거다. `인간 = 경제적 동물+문화적 동물`





▨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베버는 자본주의 자체가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을 분석하려 한다.

자본주의 정신은 ˝윤리적 색채를 띤 생활 관리의 방법˝이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 정신은 개개인의 일상을 규제하고 바꾸어 놓는 힘을 지니게 되었다. 자본주의 정신은 ˝인간에 의해 집단적으로 유지될, 일종의 세계관˝이다.

일반적으로 전통주의의 영향권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서는 열심히 일해야 할 내적 동기가 발견되지 않는다. 반면 자본주의 정신을 지닌 사람은 부의 추구를 자랑스러워한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라 오히려 선한 행동으로 간주된다.


노동 윤리의 최고선은 모든 향락을 엄격히 피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다.

우리가 노동을 천시하는 전통주의자가 되느냐 아니면 합리적 자본주의 정신의 소유자가 되느냐 하는 것은 부의 추구와 노동의 의미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 전적으로 달려있다. 막스 베버는 `성경(Bible)`에서 전통주의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내용과 자본주의 정신에 따라 강조될 수 있는 내용이 동시에 담겨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두 내용 중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노동의 의미와 부의 축적에 대한 신학적 해석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주장한다.
˝돈에 대한 걱정은 마치 `언제든지 벗어버릴 수 있는 얇은 외투`처럼 성도들의 어깨위에 걸처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운명은 이 외투를 쇠사슬로 만들어버렸다. 금욕주의가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이 세계의 돈에 대한 걱정은 점증하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한다. 자동화 시스템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말이다. 심지어는 아이도 간접공정을 통해 컨베이어 벨트에서 태어난다. `멋진 신세계`의 연호는 포드의 자동화 시스템에서 따왔다. 당시 포드 자동차 회사가 T자형 자동차를 출시했던 1908년을 기원 1년으로 정한다. 자동화 시스템을 통한 비인간화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지금 우리 현실에서도 포드 자동차 공장에서 시작한 포디즘은 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었고 그 결과 소비를 위해 열심히 노동하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윤리를 지닌 인간을 만들어 낸 것이다.

마르크스의 사위인 `라파르크`는 1883년 자신의 저서 `게으를 수 있는 권리`에서 노동윤리란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담론에 불과하다고 해석했다. 그에 따르면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열심히 노동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에 대한 강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막스 베버의 이론을 쉽게 풀어 쓴 노명우 선생님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 노동의 이유를 묻다`에 이런 글이 있다.

˝종교개혁은 근대인들에게 전례없는 외로움을 남겼다.
가톨릭 교도들과 달리 프로테스탄트들은 고립된 존재였다.
가톨릭 신자들은 사제의 도움으로 신의 은총을 얻을 수 있었다.
하지만 사제의 도움을 거절한 프로테스탄트들은 종교개혁에 참여한 대가를 혹독히 치러야 했다.
칼뱅주의자들은 이전에 사제에게 의존했던 은총의 확인을 혼자 해 나가야 했다.
가톨릭의 낡은 세계를 거부했다는 점에서 그들은 용기 있는 자들이었으나, 그들의 용기가 두려움까지 제압할 수는 없었다.
두려움을 이겨 내기 위해 그들은 노동했다. 칼뱅주의는 노동만이 유일하게 은총을 확인 할 수 있는 수단이라 했다. ˝

이 부분을 통해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에 소개된 `대심문관`편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대심문관은 인간이 노동의 고통을 받는 이유는 예수때문이라고 비난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사람이 빵으로만 살것이 아니라는 너의 말 한마디로 인해 인간들은 노동해야 하는 벌을 받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많이 희석된 요즘은 근면의 추구보다는 소비를 하기 위해 노동을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막스 베버가 주장한 자본주의와 현대의 자본주의가 달라지게 된 이유일 것이다.
이제 막스 베버의 결론을 정리해보겠다.

1, 프로테스탄트들은 스스로 직업 인간이 되기를 희망했다.
2. 그러나 우리는 직업 인간이 될 수 밖에 없는 구조속에 살고 있다.
3. 그러니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막스 베버의 결론을 요약하면 ˝프로테스탄트가 주장했던 자본주의와 지금의 자본주의는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분명히 좋은 의도에서 노동을 장려했다. 지금은 시스템이 인간을 집어삼켰기때문에 소비가 노동을 장려하는 기이한 세상에서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잠깐 일을 멈추고, 왜 일을 하는가에 대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