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xml-stylesheet href="https://blog.aladin.co.kr/blog/rss/rssUserXSL.aspx" type="text/xsl" media="screen"?><rss version="2.0"><channel><title>환상이라는 돌림병 (eEe 서재)</title><link>https://blog.aladin.co.kr/ula007</link><language>ko-kr</language><description>부산에서 삽니다</description><copyright /><generator>Aladdin RSS(Alss) v0.9</generator><lastBuildDate>Sun, 12 Jul 2026 19:10:24 +0900</lastBuildDate><image><title>eEe</title><url>https://image.aladin.co.kr/Community/myface/PA_001.gif</url><link>https://blog.aladin.co.kr/ula007</link><width>100</width><height>100</height><description>eEe</description></image><item><author>eEe</author><category>마이리뷰</category><title>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 - [이데올로기 브레인 - 우리 안의 극단주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title><link>https://blog.aladin.co.kr/ula007/17373525</link><pubDate>Sat, 04 Jul 2026 16:43: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ula007/17373525</guid><description><![CDATA[<table width="100%" height="30" border="0" align="center" cellpadding="0" cellspacing="0"><tr><td width="14"><img src="https://image.aladin.co.kr/img/blog/trans.gif" width="14"></td><td width="85"><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92038710&TPaperId=17373525" target="_blank"><img src="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36/83/coveroff/k092038710_1.jpg" width="75" border="0" class="box1"></a></td><td valign="top"><A href="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SBN=K092038710&TPaperId=17373525" target="_blank" style="color:#386DA1;font-weight:bold">이데올로기 브레인 - 우리 안의 극단주의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a><br/>레오르 즈미그로드 지음, 김아림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04월<br/></td></tr></table><br/>“이 백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예요”<br>&nbsp; 넷플릭스 &lt;레이디 두아&gt;에서 주인공은 일하던 백화점에 전시돼있는 명품 앞에서 이 말을 읊조린다. 누군가에게 어울리는 백이 아니라, 이 백에 어울리는 사람이라니! 이 말은 명품을 가벼이 걸칠 수 있을 정도로 재력 있는 상류층으로 올라서겠다는 계층 상승 욕구 이상의 무언가를 품고 있다. 여기서 명품은 부와 사회적 지위를 가리키는 기호에 그치지 않고, 자신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만들어내고 대상화한다. 이처럼 사람에게 미치는 힘, 그리고 욕망을 조직하는 권력까지 물건이 지니게 될 때 사물에 신과 같은 속성이 깃들였다 하여 물신성이라 부른다. &lt;레이디 두아&gt;는 신적 권능과 같은 물신성에 휘둘리고 비틀어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br>&nbsp; 정말 신에게서 비롯한 게 아니라면 물신성의 실체는 무엇일까? &lt;레이디 두아&gt;는 끊임없는 거짓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거짓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것처럼 물신성은 거짓에 의존한다. 거짓은 참의 외양을 둘러쓰고 나타나며 자신에 대한 믿음을 만들어내고, 이 믿음이 유지되는 한 힘을 잃지 않는다.<br>&nbsp; 아마도 최초의 물신성 비판은 우상숭배에 대한 거부였을 것이다. 신의 형상을 빚어 만든 물건에 절을 하며 모시는 숭배 행위는 그 물건이 정말 특별하다는 믿음에 의존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숭배하기 때문에 특별해지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우상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면 우상은 그저 물건에 불과하며, 숭배를 받을 가치와 자격이 당초부터 없었다는 걸 깨닫는다. &lt;레이디 두아&gt; 속의 명품은 우상과 다를 바 없다.  &nbsp;  &lt;독일 이데올로기&gt;<br>&nbsp; 마르크스는 거짓된 신이 깃드는 대상을 우상과 명품 같은 대상으로 한정하지 않았다. 그는 우상숭배와 같은 현상이 종교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체제에 대해서도 일어난다고 보았고, 한 시대의 지배적인 사회체제를 옹호하는 거짓된 관념들을 이데올로기라고 불렀다. 그리고 알다시피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br>&nbsp;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함께 쓴 &lt;독일 이데올로기&gt;에서 이데올로기 비판에 대한 독특한 관점을 발전시켰다. 거짓의 힘을 약화시키고 몰아내기 위해서는 진실을 밝히는 방식의 비판만으로는 비판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고 보았다. 물질의 변화를 이끌지 못하는 관념은 공허하다. 그래서 &lt;독일 이데올로기&gt;에서 마르크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식을 변화시키라는 이러한 요구는 결국 현존하는 세계에 대한 해석 방식을 변화시키라는, 즉 다른 해석 방식을 통하여 세계를 승인하라는 요구로 귀착된다.”<br>&nbsp; 이러한 관점은 역사유물론에서 파생된 것인데, 역사유물론은 사람들은 먼저 먹고, 일하고, 소유하고, 교환하고, 지배받고, 지배하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경제, 사회적 토대 위에 국가와 법, 이데올로기 등의 상부구조가 형성된다. 사회를 바라보는 토대-상부구조 관계를 의미하는 가장 유명한 언명이 바로 “의식이 생활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활이 의식을 규정한다”이다.<br>&nbsp; 따라서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은 생활세계의 변혁을 통해서만 완수될 수 있다. &lt;레이디 두아&gt;와 같은 작품들이 명품의 세계를 무수히 조롱하더라도 명품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소득과 자산의 격차, 불평등한 위계, 과시적·모방 소비행태 같은 사회 현실들의 옆에는 항상 명품도 나란히 존재할 것이다.   &nbsp;  &lt;이데올로기 브레인&gt;<br>&nbsp; 물신성이 사회 현실의 산물이라면, 이데올로기는 그러한 현실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인지적 장치이기도 하다.&nbsp; 뇌에 대한 연구의 발달로 전통적인 다양한 주제들로 신경과학이 연구영역을 넓히고 있는 게 최근 지식 동향 중 하나이다. 책 &lt;이데올로기 브레인&gt;은 신경과학자가 쓴 이데올로기에 대한 최근의 대중서다. 책의 내용에 따르면 인간의 뇌는 두 가지 근본 원리로 특징지을 수 있다. 바로 예측과 소통이다. 생존의 필요성에 의해 뇌는 끊임없이 예측하고 소통해야 한다. 그리고 “이데올로기는 예측과 의사소통 문제에 대해 뇌가 내놓은 군침도는 해답이다.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질문, 우리가 따를 대본, 우리가 속할 집단이 무엇인지에 대한 손쉬운 해결책을 제공한다. 생각과 행동을 안내하는 이데올로기는 세상을 이해하고, 다시 나 자신도 이해받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을 충족해주는 빠른 지름길이다.”<br>&nbsp; 즉 이데올로기는 거짓과 허위의식만이 아니다. 이제 이데올로기는 뇌가 과부하에 걸리지 않고 세상을 효율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인식 수단이다.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과 극복의 관점을 발전시켰던 전통 이론과 달리 신경과학은 인지적 경직성에 주목한다. 인지적 경직성은 새로운 정보나 상황 변화가 생겨도 기존의 해석과 판단, 신념을 잘 수정하지 못하고, 기존의 틀에 고정해 판단하려는 경향이다. <br>&nbsp; 몇 가지 인지테스트들을 통해 밝혀진 바에 따르면 경직적인 사람일수록 극단적 이데올로기에 고착될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 극단성이란 좌파이든, 우파이든 정치적 스펙트럼의 양 끝에 위치해있는 걸 의미한다. 극단적 이데올로기들이 사회갈등을 심화시키고 있다면, 사회구성원들의 인지적 유연성을 직접 키워주려는 노력(유연성을 향상하는 인지훈련은 실제로 가능하다)도 대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의 뇌가 경직되는 데에는 불안정한 노동, 경쟁, 지위 불안, 소속 욕구, 미래에 대한 공포 같은 사회적 조건들도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경직된 믿음에 매달리게 만드는 생활세계의 조건을 함께 겨냥해야 한다.  &nbsp;  물신성에서 벗어나기<br>&nbsp; 사실 물신성에 대한 최상의 논의는 일찍이 &lt;자본론&gt;에서 전개된 바 있다. 마르크스는 개별 경제주체들의 의지와 행위를 초월하여 작동하는 경제법칙(시장논리)들이 규제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특성을 사물이 인간을 지배한다는 의미의 물신성으로 개념화했다. 그래서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건 사물의 인간 지배를 끊고, 인간이 연합한 공동체로서 스스로를 규율하는 자유의 세계로의 이행이기도 하다.<br>&nbsp; 그런데 우리는 사물의 지배를 사물 자체의 성질에서 비롯하는 것으로 인식하곤 한다. 상품이 가치를 갖고, 화폐가 가치 저장과 축적의 기능을 하며, 자본이 이윤과 이자를 낳는 건 상품과 화폐, 자본의 본성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회사와 시황, 경기가 안 좋으면 임금이 깎이거나 해고되고, 일터가 사라지는 건 자연법칙처럼 여긴다. 이러한 구조조정에 적응하지 못하는 게 문제지, 구조조정은 일어날 수밖에 없고, 때로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br>&nbsp; 그러나 경제법칙과 그 운동을 만들어내는 상품과 화폐, 자본은 인간이 노동하는 과정에서 맺는 사회관계의 산물이며, 이 질서는 인간의 실천에 의해 변화하거나 사멸할 수 있다고 &lt;자본론&gt;은 설명한다. &lt;레이디 두아&gt;에서 노동자는 가짜를 만들어내고, 자본가는 가짜를 명품으로 판다. 그리고 “진짜와 구별할 수 없는데, 가짜라고 볼 수 있나요?”라는 노동자의 물음은 폭력의 분출로 이어진다. 명품이 사람을 만드는 세계에서 명품을 만드는 노동은 불경한 실체이다.<br>&nbsp; 화폐가 권력을 갖고, 자본이 스스로 이윤을 낳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에서 자유는 사물의 힘을 숭배하지 않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사물의 배후에 있는 인간의 노동, 지배, 계급관계를 다시 보는 데서 시작된다. 이데올로기로부터의 자유란 우리가 숭배하던 사물의 힘이 사실은 인간들이 맺은 관계의 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그 관계를 다시 조직할 수 있다고 믿는 데서 시작된다.]]></description><image><url>https://image.aladin.co.kr/product/36236/83/cover150/k092038710_1.jpg</url><link>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362368331</link></image></item><item><author>eEe</author><category>마이페이퍼</category><title>이란 전쟁이 가리키는 불안한 미래</title><link>https://blog.aladin.co.kr/ula007/17373523</link><pubDate>Sat, 04 Jul 2026 16:41:00 +0900</pubDate><guid isPermaLink="false">https://blog.aladin.co.kr/ula007/17373523</guid><description><![CDATA[2026.04.23. 작성<br>&nbsp; 2026년 3월 1일(이란 기준, 한국 시간 3월 2일) 미국과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시작된 ‘이란 전쟁’이 우리 삶을 뒤흔들고 있다. 전쟁의 원인을 따라가다 보면, 정치자도자의 선택을 넘어 미국의 중동 개입 역사가 낳은 역설과 제국주의적 경쟁의 문제가 드러난다.     &nbsp;  이들을 어찌하오?<br>&nbsp; 전쟁이 트럼프 대통령의 독단에서 비롯됐다는 건 복수의 언론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이다. 트럼프가 대표하는 MAGA 프로젝트가 얼핏 해외문제 불개입으로 읽힐 수 있는 미국 우선주의(국내문제 우선)를 내세워왔다는 점에서 마두로 납치와 쿠바 위협, 이란 공격의 최근 연이은 결정들은 자기모순으로 보인다. 상호관세에 대한 대법원의 위헌 판결, 그리고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계속 낮아지는 지지율 추이 같은 정치적 위기 상황을 일련의 군사적 모험으로 타개하려 한 동기가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트럼프 일가가 이란 전쟁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고 있다는 의혹도 일고 있다.<br>&nbsp; 트럼프의 변덕스러운 의사 결정 과정에서 이스라엘 네타냐후 총리의 설득이 유효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네타냐후부터가 뇌물 수수와 배임 혐의로 인한 사법적, 정치적 궁지를 모면하기 위해 전쟁을 이용해왔다는 비판을 받는 정치인이다. 2023년 하마스 전쟁부터 헤즈볼라와의 충돌과 이란 공습에 이르기까지, 폭력을 멈추기보다는 ‘저항의 축’을 완전히 부러트린다는 위험한 도박으로 이스라엘을 거칠게 몰아 왔다. 도박에 걸린 판돈에 자신의 사면까지 포함돼있다는 듯이 말이다.<br>&nbsp; 트럼프가 전 세계에 충격적인 결정을 내리고 고집하는 동안 미국 의회가 어떤 제동도 걸지 못했다는 사실 또한 충격적이었다.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위태한 민낯이 드러났는데, 얼마 전 계엄 선포를 겪은 한국에서는 더 의미 있게 다가오는 장면이다. 국가에 대한 민주적 통제의 복원과 확장이라는 의제가 다시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nbsp;  성공이 실패를 부르다<br>&nbsp; 미국의 중동 개입 역사의 한 축이 이스라엘 건국으로부터 시작한 네 차례의 중동 전쟁과 팔레스타인 문제라면, 다른 한 축은 이란-이라크이다. CIA 공작에 힘입은 친위쿠데타 이후 권위주의 통치를 이어왔던 팔레비 왕조가 1979년 호메이니 혁명으로 몰락하면서, 이란은 반서방 이슬람 공화국 체제로 전환되었다. 이를 틈탄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기회주의적 공격으로 1980년부터 8년 동안 이란-이라크 전쟁이 지속됐다.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미국은 겉으로는 이라크를 지원하면서 비밀히 이란도 지원했는데, 균형 유지를 통해 신뢰할 수 없는 양면을 함께 약화시키려 했던 것 같다. 미국의 의도대로였는지 오랜 전쟁으로 약해진 두 국가가 자신의 취약성에 대응하기 위해 행한 결정들이 이들의 운명을 결정했다.<br>&nbsp; 사담 후세인은 8년 동안 잃어버린 판돈을 한 번에 되찾으려는 듯 다시 쿠웨이트를 침공했다가 아버지 부시에게 패배하고, 12년 후인 2003년에는 아들 부시에게 이라크를 빼앗기고 처형당했다. 후세인이 사라진 이라크에서는 중앙정부가 힘을 잃으며 IS가 준동하고, 시아파 민병대는 독자적인 친이란 세력을 이룬다.<br>&nbsp; 반면 이라크와의 전쟁 및 혁명 수호 과정과 이어진 미국의 경제 제재에 맞서 이란은 사회를 더 옥죄는, 군사화되고 경직된 국가로 변모해왔는데, 경쟁하던 이라크가 부시 부자에 의해 붕괴된 공간에서 미국과 이스라엘에 적대하는 이슬람주의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이란으로부터 시작해 이라크 시아파 민병대, 지금은 몰락한 시리아 아사드 정권, 레바논 헤즈볼라, 가자지구 하마스, 예멘 후티 반군으로 이어지는 ‘저항의 축’이 형성됐다.<br>&nbsp; 저항의 축이 견고해지고 이스라엘이 하마스 및 헤즈볼라와 상시 분쟁을 겪으면서, 이와 같은 이란발 안보 위기를 이란을 직접 타격함으로써 최종 종식시킨다는 게 이스라엘의 전략이 되었다. 한편 미국은 불량 국가가 튀어 오르면 이스라엘을 앞세우거나 직접 나서서 두드린다는 해묵은 습관을 이번에 다시 꺼내든 셈인데, 지난 역사에서 보듯이 미국의 개입은 단기적으로 성공할지라도 결국은 새로운 적들과 저항에 부딪쳐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단기적 성공조차 거두지 못할 것 같다.  &nbsp;  제국주의 전쟁<br>&nbsp; 미국은 왜 중동에 개입해왔을까? 이 질문에 대한 전통적인 답변은 보통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스라엘 로비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네타냐후와 트럼프의 오래된 친교가 암시하듯 이스라엘과 미국내 유대인 사회의 미국 정가에 대한 영향력은 상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로비설을 음모론 정도로 치부할 수 없는 게 국제정치학 내에서도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이루어져 온 주제이며, 국제정치이론 중 공격적 현실주의의 대가인 미어샤이머 교수가 공저한 &lt;이스라엘 로비&gt;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제기된 연구 중 하나다.&nbsp;&nbsp;&nbsp; 다른 설명은 미국의 석유 통제 야망이다. 석유는 현대 경제의 가장 중요한 에너지원이자 플라스틱과 비료의 원료이다. 저렴한 석유는 경제성장에 필수이다. 또한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친서방 중동 왕정국가들이 달러로만 석유를 팔고, 벌어든 달러로 미국 금융시장에 투자하는 페트로달러 시스템이 미국 패권에 크게 기여해왔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이라크 점령과 이란 제제는 페트로달러 시스템의 유지와 확장이라는 목적에 논리적으로 부합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경제가 탈제조화·금융화되고, 셰일혁명에 힘입어 에너지 생산이 증가하면서 중동 석유의 중요성이 감소한 까닭에 이란 전쟁은 석유 통제의 목적 때문이 아니라는 평가가 있다. 하지만 이런 평가를 반박하면서 더 포괄적인 관점이 있는데, 제재를 우회하여 중국으로 값싸게 팔려나가는 베네수엘라와 이란의 석유를 미국이 통제할 수 있을 경우 중국의 에너지 수입망을 손에 쥐고 압박할 수 있다는 기회에 주목한다.<br>&nbsp; 트럼프의 최근 일련의 군사 행동을 미중 패권 경쟁이라는 맥락으로 읽다 보면 불안한 미래로 이어진다. 중국의 부상을 저지하기 위해 미국은 관세와 공급망 분리에 이어 군사력 사용으로까지 수단을 넓혀가고 있다. 상대가 우위를 점하는 지역으로 침투하고 세력권을 넓히려는 패권 경쟁이 혈투로 번질 가능성은 상존한다. 그곳은 대만이 될 수도, 한반도가 될 수도 있다.<br>&nbsp; 레닌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 전쟁으로, 식민지와 금융자본의 세력권을 분할·재분할하기 위한 전쟁으로 규정했었다. 제국주의는 자본 가운데서 지배적인 지위에 있는 금융자본(금융을 매개로 산업자본이 결합하여 독과점적 지위에 도달한 자본 형태를 말한다)의 이해관계를 보장하는 팽창적·군사적 국가체제이다. 그래서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이 자본을 멈추고 조국을 뒤엎으라고 했다. 이러한 접근법이 현재에도 유효할지는 단언할 수 없다. 다만 단일 패권이 저물고 경쟁하는 강대국들이 충돌하는 지금의 세계는, 과거의 제국주의 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불안을 남긴다. 이 불안과 혼란을 조금이나마 붙잡아 보려 할 때, 몇 권의 책이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박노자의 &lt;전쟁 이후의 세계&gt;, 존 리즈의 &lt;새로운 제국주의와 저항&gt;, 니콜라이 부하린의 &lt;세계경제와 제국주의&gt;, 그리고 알렉스 캘리니코스의 &lt;제국주의와 국제 정치경제&gt; 같은 책들이다. 이 책들이 당장의 답을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조금 더 또렷하게 바라보게 해준다.]]></description></item></channel></rs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