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23 매일 시읽기 25일

김선우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는 제목 아래 ˝2011년을 기억함˝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2011년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시인은 그 때의 풍경이 내면에 그려낸 풍경을 시로 담았다.

이 시를 읽고 나면 곁에 있든, 멀리 있든, 우리 모두가 ˝서로의 신˝이라는 근사한 사실을 깨닫게 된다. 신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으니 우리는 사람 인 처럼 서로 기대고 살아야 한다. 모든 태어나는 것은 그 순간부터 죽어가야 하지만, 지금 살아 숨쉬며 살아간다는 그 사실이 ‘혁명적‘인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니 혁명은 무한할 밖에.

저기 먼 데, 거창한 무엇으로 존재할 것만 같은 ‘혁명‘을 시인은 우리가 내딛는 걸음 마다마다에 존재하는 ‘이웃‘으로 당겨왔다. 멋지다. 

이 시를 읽고 새삼 느낀 점. 글로 마주하는 여기 사람들도 ‘서로의 신‘이다.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2011년을 기억함 
- 김선우 

그 풍경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신을 만들 시간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의지했다 
가녀린 떨림들이 서로의 요람이 되었다 
구해야 할 것은 모두 안에 있었다 
뜨거운 심장을 구근으로 묻은 철골 크레인 
세상 모든 종교의 구도행은 아마도 
맨 끝 회랑에 이르러 우리가 서로의 신이 되는 길

흔들리는 계절들의 성장을 나는 이렇게 읽었다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마른 옥수수댓 끝에 날개를 펴고 앉은 가벼운 한 주검을 
그대의 손길이 쓰다듬고 간 후에 알았다 
세상의 모든 돈을 끌어모으면 
여기 이 잠자리 한 마리 만들어낼 수 있나요?
돈으로 여기 이 방울토마토꽃 한 송이 피울 수 있나요?
오래 흔들린 풀들의 향기가 지평선을 끌어당기며 그윽해졌다 

햇빛의 목소리를 엮어 짠 그물을 하늘로 펼쳐 던지는 그대여 
밤이 더러워지는 것을 바라본 지 너무나 오래되었으나 
가장 낮은 곳으로부터 번져온 수많은 눈물방울이 
그대와 함께 크레인 끝에 앉아서 말라갔다 
내 목소리는 그대의 손금 끝에 멈추었다 
햇살의 천둥번개가 치는 그 오후의 음악을 나는 이렇게 기록했다 
우리는 다만 마음을 다해 당신이 되고자 합니다 
받아줄 바닥이 없는 참혹으로부터 튕겨져 떠오르며 
별들의 집이 여전히 거기에 있고 

온몸에 얼음이 박힌 채 살아온 한 여자의 일생에 대해 
빈 그릇에 담기는 어혈의 투명한 슬픔에 대해 
세상을 유지하는 노동하는 몸과 탐욕한 자본의 폭력에 대해 
마음의 오목하게 들어간 망명지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이다 
사랑을 잃지 않겠습니다 그 길밖에 
인생이란 것의 품위를 지켜갈 다른 방도가 없음을 압니다 
가냘프지만 함께 우는 손들 
자신의 이익과 상관없는 일을 위해 눈물 흘리는 
그 손들이 서로의 체온을 엮어 짠 그물을 검은 하늘로 던져올릴 때 
하나씩의 그물코, 
기약 없는 사랑에 의지해 띄워졌던 종이배들이 
지상이라는 포구로 돌아온다 생생히 울리는 뱃고동 
그 순간에 나는 고대의 악기처럼 고개를 끄덕인다 
태어난 모든 것은 실은 죽어가는 것이지만 
우리는 말한다 
살아가고 있다! 
이 눈부신 착란의 착란, 
이토록 혁명적인 낙관에 대하여 
사랑합니다 그 길밖에 

온갖 정교한 논리를 가졌으나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옛 파르티잔들의 도시가 무겁게 가라앉아가는 동안 
수만개의 그물코를 가진 하나의 그물이 경쾌하게 띄워올려졌다 
공중천막처럼 펼쳐진 하나의 그물이 
무한 하늘 한녘에서 하나의 그물코가 되는 그 순간 
별들이 움직였다 
창문이 조금 더 열리고 
두근거리는 심장이 뾰족한 흰 싹을 공기 중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의 가녀린 입술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나는 들었다 처음과 같이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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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창비시선 344
김선우 지음 / 창비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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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2 매일 시읽기 24일

어른이라는 어떤, 고독
- 김선우

좁은 골목길 언덕에서 소녀가 칼등을 잡고 햇빛을 자르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반달칼을 손톱에서 꺼내 허공을 긋던 소녀가 소년을 안는다 비닐봉지가 부푼다 흘러내리는 새싹들, 부서지는, 일종의 꿈들

있잖아 난 결국 너랑 자지 않을 거야
어제 배운 그 시 기억 나?
응 그림자를 팔아먹은 지 오래되었어
응응 그림자가 없으니 어른이 되어도 우린 함께 자지 못할 거야

침묵이 엄마인 검은 바람의 말, 담장 밑 깨진 화분에 가득 고인 소음들, 잃어버릴 집도 돈도 부모도 가진 적 없는 꽃씨들, 떠도는, 일종의 방패인 칼들

그림자가 없는 소녀와 소년이 한낮 골목길 언덕에서 시를 이야기하는 것이 다행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나는 그애들에게 들릴지 어떨지 알 수 없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이렇게 인사한다

미안해 . . . . . . 나도 . . . . . .사생어른이야 . . . . . .


나희덕의 시를 계속 읽고 싶은 마음을 잠시 내려놓고 김선우의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창비/2012)를 꺼내 들었다.

김선우의 시들은 아주 쉽게 읽히진 않는다. 곱씹어야 조금 알겠고, 곱씹어도 도통 모르겠는 시구들이 꽤 많다. 시집은 산문집보다 분량이 적은데도 한 권을 다 읽어내기가 녹록치 않다. 시를 등에 업고는 달음질을 칠 수가 없다. 등딱지 업은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걷게 된다.

이 시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는 표제작인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이지만 오늘 내 눈에 띈 시는 '어른이라는 어떤, 고독'이었다.

좁은 골목길에 있는 소년과 소녀. 그림자가 없어 어른이 되어도 같이 자지 못할 거라는 소년과 소녀. 둘이 어제 배운 시를 들먹인다.

시인이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건가 물음표를 간직한 채 시를 읽다 마지막 시구에서 '철렁'했다 '뭉클''하게 된다. "미안해 . . . 나도 . . . 사생어른이야 . . ."

소년과 소녀는 어른 세상이 딱지붙인 사생아인가 보다. '사생아'의 사전전 의미는 '법률적으로 부부가 아닌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이다. 이 아이는 우리나라의 경우 누군가의 호적에 오르지 못한다. 그림자가 없다. 이런 아이들이 필히 겪는 수모들이 있다. 그리 태어난 것이 아이의 잘못이 아닌데도, 이들은 손가락질 당하는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이런 소년소녀를 시인은 "잃어버릴 집도 돈도 부모도 가진 적 없는 꽃씨들, 떠도는, 일종의 방패인 칼들"이라고 말한다.

어른된 자로서 이들에게 미안해서 시인이 뽑아든 시어가 "사생어른"이다. 사생아 이전에 '사생어른'이 있었으니 잘못은 어른들에게 있다. 시를 빌려 아이들에게 이런 식의 사과를 할 수 있다니, 멋지지 않은가.

이런 어른이 되기란 쉽지 않고, 그래서 어른의 길에는 제목처럼 '고독'이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걸 게다.

김선우는 시인의 말에서 독자들이 이 시집을 "처절하고 명랑한 연애시집"으로 읽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처절함과 명랑함까지는 모르겠으나 김선우의 시를 읽고 있으면 미안함을 넘어 유대감을, 연민을 넘어 연대를, 공감을 넘어 공생을 꿈꾸는 시인이라는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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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1 매일 시읽기 23일 

탱자 꽃잎보다도 얇은 
- 나희덕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바람이 와서 자꾸만 살을 저며 간다 
누구를 벨 수도 없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칼날을 베고 잠들던 날 
탱자꽃 피어 있던 고향집이 꿈에 보였다
내가 칼날을 키우는 동안 
탱자나무는 가시들을 무성하게 키웠다 
그러나 꽃도 함께 피워 
탱자나무 울타리 아래가 환했다 

꽃들을 지키려고 탱자는 가시를 가졌을까 
지킬 것도 없이 얇아져가는 나는 
내 속의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는데 
탱자 꽃잎에도 제 가시에 찔린 흔적이 있다 

침을 발라 탱자 가시를 손에도 붙이고 
코에도 붙이고 놀던 어린 시절 
바람이 와서 탱자가시를 가져가고 살을 가져가고 

나는 어제보다 얇아졌다 
나는 탱자 꽃잎보다도 얇아졌다 
누구를 벨지도 모르는 칼날이 
하루하루 자라고 있다 


나희덕의 <<그곳이 멀지 않다>>를 계속 읽는다. 시들이 좋아서 당분간 이 시집만 뒤적거릴 듯하다. 

노랗게 익은 동글동글한 탱자, 시큼 떱떠름한 맛이 나는 탱자. 내가 아는 탱자나무는 이게 전부였는데, 이 시를 읽고 탱자나무는 하얀 꽃을 피운다는 것, 하얀 꽃잎들은 여리다는 것, 가지에는 가시가 뾰족뾰족 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탱자나무 가시는 꽃잎의 수호자인 듯, 위협꾼인 듯 날을 세우고 있다. 때론 꽃들을 지키고 때론 꽃들을 벤다. 

내 속에도 탱자나무 가시 같은 칼날이 있다. 바람이 툭하면 내 살을 저미고 지나가지만 그에 대항하듯 화자의 속에서는 ˝칼날˝이 자란다. 허나 그 칼날은 아직 누구도 벨 수 없다.

이 시에서 바람은 삶의 고난으로 읽힌다. 바람의 종류가 다양한 만큼 바람에 베는 상처의 깊이도 때마다 다를 것이다. 바깥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살지 않으려면 무장을 해야 한다. 어떻게? ˝내 속의 칼날˝을 키우는 것이다.

˝내 속의 칼날˝은 탱자나무 가시처럼 수호자이자 위협꾼이다. 나를 무장하고자 키운 칼날에 ˝마음을 자꾸 베이˝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시가 묻고 있다.

나희덕 시인의 산문집 <<반 통의 물>>에 ˝내 유년의 울타리는 탱자나무였다˝라는 제목의 산문이 실려 있다고 한다. 오호라. 일단은 대출하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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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0 매일 시읽기 22일 

그곳이 멀지 않다 
- 나희덕 

사람 밖에서 살던 사람도 
숨을 거둘 때는 
비로소 사람 속으로 돌아온다 

새도 죽을 때는 
새 속으로 가서 뼈를 눕히리라

새들의 지저귐을 따라 
아무리 마음을 뻗어보아도 
마지막 날개를 접는 데까지 가지 못했다 

어느 겨울 아침 
상처도 없이 숲길에 떨어진 
새 한 마리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나는 그 작은 성지를 덮어주었다 


나희덕의 시집의 해설을 맡은 황현산 선생님(나는 이분을 이렇게 칭한다)은 나희덕의 시를 ˝착하다˝고 표현한다. 표제작인 <그곳이 멀지 않다>를 읽으면 그 말이 확 와닿는다.

어느 겨울 아침, 새 한 마리가 숲길에 쓰러져 있다. 녀석은 숨을 쉬지 않는다. 이제 더는 숨이 쉬어질 것 같지 않을 때, 그냥 딱 숨이 넘어갈 것만 같을 때 생명이 남아 있는 것들을 어찌하나. 시인의 생각은 거기에 이르러 뻗어 나간다.

사람들 밖을 떠돌던 사람도, 새들 밖을 떠다니던 새도 임종에 이르러서는 ˝사람 속으로,˝ ˝새 속으로˝ 돌아온다고 시인은 말한다. 귀향 본능.

내가 나희덕의 시를 아무튼, 좋다고 했지만, 그의 시를 읽노라면 만물을 향한 시인의 연민과 더불어 아, 하는 깨달음의 순간을 만나게 되어서 참 좋다. 아, 하는 탄성에 이어 나도 시인처럼 생각의날개를 편다.

죽음은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길이다. 어떤 죽음을 맞을지는 누구도, 본인 자신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죽음 이전에 우리는 죽어가는 이가 저승길에 오를 때 같이 가주지는 못해도 손이라도 잡아주고 싶어 한다. 홀로 가야 할 ˝그곳˝이지만, 맞잡은 손에서 느낀 온기라도 품고 가길 바란다. 물론, 누구에게나 그런 행운이 주어지진 않는다.

시인은 열심히 달려 보았지만 새가 ˝마지막 날개를 접는˝ 지점엔 이르지 못했다. 새는 덩그러니 차가운 바닥에 떨어져 있다. 싸늘한 죽음. 온기를 미처 전하지 못한 산 자가 할 수 있는 일, ˝넓은 후박나무 잎으로˝ 작디작은 몸뚱이를 덮 어 준 다. 이것밖에 할 수 없어 참담하나 이거라도 할 수 있어 다행이다.

나는 나희덕의 시를 ˝따뜻하다˝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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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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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20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아니, 이런 멋진 여인을 어찌하여 이제야 알게 되었단 말인가. 그것도 사후 18년 만에 알게 되었다고? 럴수럴수.

<<명랑한 은둔자>>를 읽으면 읽을수록 나를 지배했던 생각이었다. 그녀를 좀 더 일찍, 그러니까 때로 당당하게, 때로 구질구질하게, 때로 처참하게 솔로 생활을 했을 때 그녀를 알았더라면 내 많은 번민을 그녀와 머리 맞대고 나누었을 것이다.

모든 여성 솔로들에게, 솔로를 지향하고 지향했던 이들에게, 솔로의 삶을 접었으나 여전히 그 삶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이 책을 강추한다. 같이 낄낄거리다, 같이 훌쩍거리다, 같이 서운해 하다, 같이 화해하다, 같이 즐거워하다, 같이 분기탱천 하게 된다.

에세이의 정수를 맛본 느낌. 아주, 아주 맛깔스럽다. 톡톡 튀되 경박하지 않고, 진지하되 묵직하지 않다.

번역도 완전 깔끔하다. 소제목들을 어찌나 잘 뽑았는지. 아이디어의 출처가 원작자인지, 번역자인지, 편집자인지 궁금하다.

책은 대개 그렇지만, 이 책은 태평양을 사이에 둔 먼나라 여성 솔로의 이야기지만, 우리네와 별반 다를 것 없는 경험들, 그 경험들에 따르는 정서들이 우리네와 얼마나 닮았는지 깜짝깜짝 놀랄 때가 많았다. 우리 모두는 저마다 다르지만 '사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다.

생각거리, 애깃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책. 조 으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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