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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421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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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5 #시라는별 14

기파랑을 기리는 노래
- 이성복

언젠가 그가 말했다, 어렵고 막막하던 시절
나무를 바라보는 것은 큰 위안이었다고
(그것은 비정규직의 늦은 밤 무거운
가방으로 걸어 나오던 길 끝의 느티나무였을까)

그는 한 번도 우리 사이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내색하지 않았다
우연히 그를 보기 전엔 그가 있는 줄 몰랐다
(어두운 실내에서 문득 커텐을 걷으면
거기, 한 그루 나무가 있듯이)

그는 누구에게도, 그 자신에게조차
짐이 되지 않았다
(나무가 저를 구박하거나
제 곁의 다른 나무를 경멸하지 않듯이)

도저히, 부탁하기 어려운 일을
부탁하러 갔을 때
그의 잎새는 또 잔잔히 밀리며 속삭였다
ㅡ아니 그건 제가 할 일이지요

어쩌면 그는 나무 얘기를 들려주러
우리에게 온 나무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무 얘기를 들으러 갔다가 나무가 된 사람
(그것은 우리의 섣부른 짐작일 테지만
나무들 사이에는 공공연한 비밀)


이성복 시인의 일곱 번째 시집 #래여애반다라(來如哀反多羅)의 발문을 쓴 나무 조각가 홍경님은 이 시집을 관통하는 하나의 맥락을 소세키의 문장을 빌어 표현한다. ˝용케 여태까지 무사히 지내오셨소. / 예, 그럭저럭 어쨌든 무사히 지내왔습니다. / (그러나) 그 마음 또한 그 얼굴처럼 주름이 접혀 파삭파삭 메말라 있지 않을까, 하고도 생각한다.˝(<<유리문 안에서>>, 김정숙 옮김, 민음사 pp. 100, 149)

그렇다. 이 시집을 읽고 있으면 이승에서 60년의 삶을 산 시인이 독자인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잘 지내십니까, 고단하시지요, 그래도 오늘 하루 용케 견디셨군요. 삶이 겨울 같지요, 그러나 언제고 봄은 온답니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 홍경님처럼 나도 ˝여든두 편의 시와 함께 미소짓고 어깨 토닥이고 한숨 쉬고 손 잡아주고 눈물 글썽이고 쓸쓸해하고 다시 미소 짓기를 반복˝했다.(p 145)

‘오다, 서럽더라‘의 뜻으로 해석되는 <<래여애반다라>>는 나처럼 인생을 반백 년 이상 산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시집이다. 우리 인간은 ‘응애‘ 소리와 함께 이 세상에 던져진 그 순간부터 ˝뜻 없고 서러운 길 위의 / 윷말˝ 같은 존재다.(‘죽지랑을 그리는 노래‘ 중) 목적지향을 꿈꾸나 인생은 결국 정처가 없다. 어찌할 도리가 없다. 그렇기에 생은 속절없지만, 인생 초입엔 ˝우리를 받아들인 세상에서 / 언젠가 소리 없이 치워질 줄을 /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는다.(‘식탁‘ 중) ˝속속들이 바람 든 순무˝처럼 어리석어도 괜찮다. ‘來​(오다)의 시기다.

이어 남들과 같아지려고 분투하는 ‘如(여)‘의 시기가 온다. ˝어제도 많이 힘들었겠지만, / 내일 걱정을 다 쓸어 담을 만큼 / 두개골의 용적은 충분하다.˝ 아직은 팔팔하다. 그러다 슬픔이 차오른다. 슬픔은 ˝갈가리 찢긴 암컷의 아랫도리˝에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알들˝(‘뚝지‘ 중)처럼 무더기로 우리 몸 구석구석에 들어찬다. ‘애哀‘의 시기다. 슬프고 애달프고 허물어지고 ˝무언가 안 되고˝(‘극지에서‘ 중) 있지만 그래도 ˝어린 다람쥐처럼 이 생의 저변을 콩닥거리며 뛰어다˝닐 여력이 아직은 남아 있다. ‘반反(맞서다)‘의 시기다. 이제 맞서 대드는 것도 지친다. 하여 돌아보게 되는 것은 돌과 물과 나무와 어둠과 연과 소멸과 남지장사와 북지장사 같은 삶의 면면들이다. ‘다多(많은 일을 겪다)‘의 시기다. 그렇게 50년을 보내고 60에 이른 나는 이런 모습이다.

˝허옇게 삭은 새끼줄 목에 감고 버팀대에 기대 선 저 나무는 / 제 뱃속이 온통 콘크리트 굳은 / 반죽 덩어리라는 것도 모르고˝(‘來如哀反多羅 1‘ 중)

뱃속이 콘크리트처럼 굳어 나는 마치 ˝남의 순간을 사는˝(‘來如哀反多羅 3‘ 중) 존재 같고, 내가 ˝어떤 누구인지˝(‘來如哀反多羅 6‘ 중) 헤아릴 길이 없다. 그런데도 더 살아야 하나. 더 살아 무엇하나. 살아 있음의 속절없음, 하고 있음의 부질없음이 내 속을 박박 긁는다. 그러나 ˝수의처럼 찢어지는˝ ˝걸으며 꾸는 꿈˝(‘來如哀反多羅 7‘ 중)에 불과하고 ˝애초에 잘못 끼워진˝ 단추 같고 ˝장난기 가득한˝(來如哀反多羅 9) 생일지라도 우리는 끝끝내 살아야 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다들 그렇게 살았고, 살고 있고, 살 것이기에. 이 깨달음 앞에서 나는 ‘羅라‘, 비단처럼 펼쳐질 수 있다.

아메리칸원주민들에게 나무는 ‘서 있는 사람‘을 뜻한다고 한다. 주목나무는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사는 나무이다. 우리의 생도 어쩌면 그러할지 모르겠다. 한 생은 짧지만 그 생의 앞과 뒤를 잇는 역사성을 생각하면 이 생이 결코 짧은 생이 아닐 수 있겠고, 그렇기에 무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여하튼 여기까지 살아낸 우리 모두에게 박수를!

나는 올해 이성복 시집을 모조리 읽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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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25 1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의 순간을 사는 존재 같고, 내가 ˝어떤 누구인지 헤아릴 길이 없다.]
이 문장은 인생의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하는 문장
아메리칸원주민들에게 나무는 ‘서 있는 사람‘ 천년이 지나도 나무, 천년이전의 세계에서도 나무
코로나 질병으로 인간의 수명을 확 줄이거나 사라져버리게 만든
지구 생태계를 위협한 인간의 오만함에 대한 자연의 무섭운 섭리, 생명을 존중하라는 깨우침이라는것,,,,


행복한책읽기 2021-03-01 09:21   좋아요 1 | URL
제 생각엔 스캇님이 저보다 시 읽는 눈이 밝아 보이십니다. 읽기 도사 같으심 ㅋㅋ

희선 2021-02-27 02: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성복 시인 시집 다 보시기로 하셨군요 즐겁게 만나시기 바랍니다

가끔 사는 게 덧없고 뭔가 하는 게 무슨 뜻이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할 수 없겠지요 그게 사람이 아닌가 싶기도 해요 부질없고 덧없다 해도 사는 동안은 괜찮겠지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3-01 09:21   좋아요 0 | URL
즐겁게 만나려 했는데 급 좌절 중이요 ㅡㅡ

라로 2021-03-01 0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멋진 결심이에요!! 응원합니다!! 빠샤~~~

행복한책읽기 2021-03-01 09:23   좋아요 0 | URL
라로님 응원에 힘입어 꿇은 무릎 다시 세워보지요. 영차!!! 감솨!!!^^
 















20210224 메그웨치  

상반기가 아직 한참 남았지만(물론 금세가 되겠지만) 로빈 월 키머러의 #향모를땋으며 는 2021년 상반기 독서목록 최고 책이 될 것 같다. 한 번도 듣지 못한 북아메리카의 창조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 눈에서도 키머러 교수의 학생들처럼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24) 그 불꽃은 책을 덮고서도 꺼지지 않았고 내 안에서는 이런 목소리의 터져 나왔다. 어쩔. 이리 흥미로워도 되는겨. 이리 아름다워도 되는겨. 이리 뜨거워져도 되는겨. 

"나는 과학의 '드러냄'에 뿌리 내리고 토박이 세계관에 기반한 이야기의 렌즈를 길잡이로 삼는 세상을 꿈꾼다. 물질과 영혼에 고루 목소리를 부여하는 이야기 말이다."(504) 

"모든 존재의 사람됨이 중요"하다는 전제 아래 동식물을 표기할 때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기를 고집한 식물학자의 이야기 덕분에 이들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아주 커졌다. 나는 교인이 아니다 보니 식사를 하기 전 감사 기도 의례를 갖지 않는다. 그저 '잘 먹겠습니다' 라는 말만 한다. 이 책의 완독을 얼마 남겨 두지 않은 날, 아들과 아침을 들기 전(딸은 늦게 일어난다)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쏟아졌다.

"밥님 감사합니다. 미역님 감사합니다. 배추님 감사합니다 .시금치님 감사합니다. 브로콜리님 감사합니다. 고기님 감사합니다." 

아들이 재미 있어하며 따라했다. 저녁 때 이 과정을 빼먹고 내가 숟가락을 들려고 하자 아들이 일러주었다.

"엄마, 그거 빠졌잖아요."

"응? 뭐가?"

"그니까, 아침에 했던 거, ~님 감사합니다."

"아, 그렇구나. 그럼 이번에 니가 해봐."

아들은 상에 차려진 메뉴를 차례차례 호명하며 감사를 드린 후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 맛있는 것들을 차려준 엄마에게 감사합니다." 

아호. 감동의 쓰나미. 이 책을 읽으면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이런 감사의 마음이 자연스레 솟구친다. 메그웨치 키네 게고(어떤 말로도 충분히 감사할 수 없어요). 나는 이 의례를 계속 해나갈 생각이다. 또하나의 감사의 말을 덧붙여. "이 맛있는 것들을 먹을 수 있게 일해주시는 아빠에게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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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24 10: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들 최고네요 밥님 브로콜리님 미역님 ㅋㅋㅋ편식안하는 착한 아들 행복한 책읽기님 신사임돵 이셨어 ^ㅎ^

행복한책읽기 2021-02-24 22:58   좋아요 1 | URL
편식합니다. 각종 채소는 엄마 몫이라죠. ㅋㅋ

막시무스 2021-02-24 16: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반지의 제왕도 잘 버텼는데, 사람을 감사하게 만드는 이 리뷰에는 버틸수 없네요!ㅎ 땡투 드리고 구매완료입니다! 즐건 하루되십시요!ㅎ

행복한책읽기 2021-02-24 23:01   좋아요 2 | URL
와. 막시무스님 낚이셨다요. 작전 성공 ㅋ 이 책 넘 좋아요. 지속 가능한 개발이란 인간 중심적 사고를 조용히 나무라며 지속 가능한 공존을 제시합니다. 머리도 때려주고 가슴도 적셔주는 고마운 책이었어요^^

얄라알라 2021-02-24 19:1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막시무스님! 제가 알라딘 서재를 좋아하는 이유!! 이렇게 서로 좋은 글로 살찌우고, 지갑은 얇게 만드는^^ 으쌰하며 책사랑 나누는 분위기! 즐독하세요

막시무스 2021-02-24 19:28   좋아요 3 | URL
살은 지금도 충분히 찌워진 상태라서 정중히 사양하지만, 맘속의 살은 근육으로 튼튼허니 만들고 싶네요! ㅎ

일단, 3월달에 내기 테니스는 무조건 이겨서 밥값, 치맥값 등의 손실을 최소화하는 전략으로 얇아진 지갑은 최대한 방어해 보겠습니다.ㅎ

즐건 저녁 시간 되십시요! 북사랑님!ㅎ

행복한책읽기 2021-02-24 23:05   좋아요 2 | URL
와우. 저 오늘 이래저래 바빠 이제야 북플 들어와 보는데 두 분 여서 대화나누시는 모습 넘 좋습니다요. 막시무스님 댓글은 진짜 센스가 넘치심요. 테니스로 몸근육 맘근육 탄탄한 막스(마르크스?? ㅋ)라 불러드리겠슴요^^

희선 2021-02-25 01: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무 말도 안 하고 먹어요 여러 가지에 고마운 마음을 가져야 할 텐데... 일본 사람은 늘 밥 먹기 전에 ‘잘 먹겠습니다’ 해요 세상에는 고맙게 여길 게 많은데 거의 생각하지 않고 사네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2-25 09:10   좋아요 0 | URL
그럼 오늘부터 잘 먹겠습니다 시작해요~~~^^

han22598 2021-02-25 07: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eing...존재 자체에 대한 가치,소중함을 인식하고 표현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일인 것 같아요. 저는 기독교이라서..이러한 마음이야말로 신이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선물...이 책 한번 읽어보고 싶어요 ^^

행복한책읽기 2021-02-25 09:15   좋아요 0 | URL
격하게 동의합니다. 그러나, 신은 감사할 줄 아는 마음도 선물해 주셨으나 증오하는 마음과 해하는 악까지 주신 것 같아요. ㅠㅠ 이 책은 참 좋아요. 이 저자 같은 맘과 행동으로 사는 사람이 많으면 세상이 더욱 평화로워질거에요^^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 에밀리 디킨슨 시선 1
에밀리 디킨슨 지음, 박혜란 옮김 / 파시클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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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22 #시라는별 13

군함 없이도 책 한 권이면 돼
- 에밀리 디킨슨 Emily Dickinson

군함 없이도 책 한 권이면 돼
우리를 멀리 대륙으로 데려다주지
군마 없이도 한 페이지면 돼
시를 활보하지ㅡ
이런 횡단이라면 아무리 가난해도 갈 수 있지
통행료 압박도 없고ㅡ
인간의 영혼을 실을
전차인데 이다지도 검소하다니ㅡ

There is no Frigate like a Book
To take us Lands away
Nor any Coursers like a Page
Of prancing Poetryㅡ
This Traverse may the poorest take
Without oppress of Tollㅡ
How frugal is the Chariot
That bears the Human Soulㅡ


파시클 출판사에서 2018년에 출간한 에밀리 디킨슨 시선집 첫 권 <<절대 돌아올 수 없는 것들>>을 거의 한 달 만에 다 읽었다. 디킨슨의 시는 거의가 짧아서 맘 잡고 읽으면 몇 시간만에 완독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아 느릿느릿 쉬엄쉬엄 읽었다. 이 시집에는 총 56편의 시가 실려 있다. 번역가이자 파시클 출판사 대표인 박혜란님은 디킨슨의 시들 중 자신이 특히 좋아하는 시들을 첫 권에 담았다고 한다. 또한 독자들에게 ˝에밀리 디킨슨을 읽는 즐거움에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해줄 것으로 기대되는 시들을 골랐다고. 그런 점에서 절반은 성공한 듯하다. 기존에 출간된 디킨슨의 시집들에 소개되어 있는 시들이 많아 낯설지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원문도 함께 수록돼 있어 영시로 읽기를 원하는 독자는 디킨슨의 시가 가진 군더더기 없는 응축의 정수를 십분 맛볼 수 있다.

내가 절반의 성공이라 한 것은 번역의 아쉬움 때문이다. 시는 사실 번역이 가능한 것인가에 의문 부호가 붙을 수밖에 없는 영역 같다. 산문 번역과 달리 운문 번역은 내용 전달 뿐 아니라 운율도 살려야 하는 애로가 따른다. 박혜란 번역가는 디킨슨만의 줄표 기호와 간결함을 잘 살려 번역했다. 이렇게 다듬기까지 얼마나 노고가 컸을지 나는 짐작도 할 수 없다. 내용 번역은 대체로 깔끔한데, 아주 가끔씩 오역이 보인다. 저번에 올린 ‘희망은 한 마리 새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가 그랬다. 물론 시란 읽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읽힐 수 있고, 번역가의 말대로 읽는 맥락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원문을 실은 건 번역가에게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 아니었을까. 나처럼 이런 딴지를 거는 독자가 없지 않으리라 예상하지 않았을까. 예상했을 것이고 그럼에도 용기를 발휘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좋아한다. 대학원 시절 디킨슨의 영시를 읽고 차암, 좋다, 고 생각은 했지만 생활에 치여 다른 관심사에 쫓겨 시중에서 볼 수 있는 시집 외에 다른 것을 일부러 찾아 읽거나 하진 않았다. 그래서 파시클 출판사에서 에밀리 디킨슨의 시를 계속 출간해 주고 있어 기쁘고 고맙다. 디킨슨 시 전집 첫 권인 이 책은 시인의 주관에 입각해 여덟 개의 소제목으로 나눠 시를 소개한다. 파트별로 나름의 주제가 있다.

‘파시클 fascicle‘은 분할 간행되는 책의 한 권을 뜻하는 말이다. 에밀리 디킨슨이 생전에 발표한 시는 7편 정도에 불과하다. 그녀의 시는 당시의 문학계에서는 수용하기 힘든 파격성과 도발성을 띤 실험시들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디킨슨은 평단에서 외면 당한 후 자기 스스로 평단을 외면했다. 그러나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일만큼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니, 그 누구보다 열심히 읽고 날마다 썼다. 그녀가 글을 쓰는 시간은 매일 새벽 세 시부터 아침 식사 준비 전까지였다. 그렇게 쓴 시들을 40여 편씩 묶고 바느질로 엮어 책자를 만들었다. 그런 책자를 ‘파시클 fascicle‘이라고 부른다. 디킨슨이 이렇게 만든 시집은 모두 44권이었고 시의 수는 무려 1800여 편에 이르렀다.

에밀리 디킨슨은 1830년 12월 10일에 태어나 1886년 5월 15일에 눈을 감았다. 인생 후반부에는 ‘신경쇠약‘으로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녀의 신경증은 오래 전부터 내재되어 있던 질환이었을 것이고, 어느 순간 통증이 격발했을 것이다. ˝나를 피곤하게 하는 것은 오랫동안 쌓여온 슬픔이야. 그게 전부야.˝(<<진리의 발견>> 586쪽) 라고 디킨슨은 한 친구에게 말했다. 마리아 포포바는 고작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에밀리 디킨슨을 삶을 두고 많은 사람이 안타까워하는 것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나는 달랠 길 없는 슬픔을 품은 채 그토록 오랫동안 살기 위해서는 영웅적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라고 느낀다. 에밀리 디킨슨은 가장 사랑하는 친구, 통렬할 정도로 가장 가까웠던 친구를 36년 동안 자신의 온 존재를 다해 사랑했다.˝(<<진리의 발견>> 609쪽)

달랠 길 없는 슬픔. 디킨슨이 사랑한 사람은 친구이자 오빠의 아내였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대상을 먼 발치서 바라보며 그녀는 ˝달랠 길 없는 슬픔˝을 시로 달랬다. 그 위안이 얼마나 컸을까만은 55세까지 버틸 수 있는 힘을 줄만큼은 되었다. 오랜 세월 시인은 분명 뼈가 깎이는 고통을 겪었을 테지만, 깎인 뼛가루에서 ‘시‘라는 사리가 탄생했다.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수천 개가. 그 구슬들은 하나같이 반짝거렸다.

에밀리 디킨슨은 이십 대 후반부터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았다. 그녀는 두 개의 창이 있는, 햇살 잘 드는 작은 방에서 가로세로 대략 45센티미터의 책상에 앉아 세계를 누볐다. 책이라는 ˝군함˝을 타고 시라는 ˝군마˝를 타고 대륙을 넘나들며 사랑과 상실,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아름다움과 추함, 읽기와 쓰기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디킨슨의 시를 읽는 것은 그 노래를 듣는 것이다. 이 노래에는 다운로드 비용이 들지 않는다. ˝아무리 가난해도˝ 들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 노래를 매일 들어볼까 일단 생각만 해본다.^^;;;

If I read a book and it makes my whole body so cold no fire can warm me I know that is poetry. If I feel physically as if the top of my head were taken off, I know that is poetry. These are the only way I know it. Is there any other way?
내가 읽은 책 한 권이 내 온몸을 어떤 불로도 데울 수 없을 만큼 싸늘하게 만든다면, 그게 시예요. 마치 정수리부터 벗겨지는 느낌이 들게 한다면, 그게 시예요. 나는 시를 이렇게밖에 알지 못해요. 다른 방법이 있나요?
ㅡ 에밀리 디킨슨이 토머스 웬트워스 히긴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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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2-22 09: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군함이란 단어보고 처음에 응?뭐지 했다가 감탄했네요! 시에 있어서의 번역. 전에 팔스타프님이 한국의 어떤 시를 올려주셨는데 그걸 보니 그 문제가 보다 더 와닿더라구요.
‘작은 방에서 세계를 누비다 ‘이 말도 너무 좋으네요!!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2-23 10:01   좋아요 1 | URL
ㅎㅎㅎ 미미님은 글을 넘 잘 읽어주셔 참 고마워요. 디킨슨은 시의 압축미를 가장 잘 표현한 시인 같아요. 어려운 말로 식자연하지도 않아요. 제가 좋아하는 이유^^

scott 2021-02-22 10: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랑과 상실, 삶과 죽음, 순간과 영원, 아름다움과 추함, 읽기와 쓰기의 즐거움을 노래했다. 디킨슨의 시를 읽는 것은 그 노래를 듣는 것]
˝아무리 가난해도˝ 들을 수 있는 시,에밀리 디킨즈가 우리에게 남기고 간시네요.
저도 매일 라이브러리 오더블에서 에밀리의 시 한편씩 들어야겠네요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Emily Dickson



˝Hope˝ is the thing with feathers
That perches in the soul
And sings the tune without the words
And never stops - at all

And sweetest - in the Gale - is heard
And sore must be the storm
That could abash the little Bird
That kept so many warm

I’ve heard it in the chillest land
And on the strangest Sea
Yet - never - in Extremity,
It asked a crumb - of me

희망은 날개가 달린 것



에밀리 디킨슨



희망은 영혼 속에 앉아 있는

날개가 달린 것이다.

가사 없는 노래를 부르며

결코 그 노래를 멈추지 않는다.



거친 바람 속에서 가장 달콤한 노래 부른다.

아무리 매서운 폭풍일지라도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따스하게 감싸준

그 작은 새를 당혹하게 할 수는 없으리라.



나는 가장 추운 땅에서도,

가장 낯선 바다에서도 그 노래를 들었다.

그러나 어떠한 극한상황 속에서도 결코

그것은 내게 빵 한 조각 달라고 하지 않았다.


행복한책읽기 2021-02-23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scott님의 영역은 무궁무진하신 듯. 라이브리리 오더블. 지는 아직 전자책과 오더블 세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어요. 그저 종이책이 좋아서리. 암튼. 같이 읽거나 듣게 돼 좋아요~~~~^^
 
향모를 땋으며 - 토박이 지혜와 과학 그리고 식물이 가르쳐준 것들
로빈 월 키머러 지음, 노승영 옮김 / 에이도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문체는 호수처럼 일렁이고 내용은 양분처럼 스며든다. 토박이 식물학자 시인이 들려주는 식동물 이야기는 삶의 지혜로 가득하다. ˝생명에 반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생명과 한편이˝ 되어 나눔의 경제를 요구할 용기를 준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메그웨치 키네게고(감사하고 또 감사). 강강강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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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7 #시라는별 12 

그리고 겨울, 

- 이규리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 

끝을 모른다는 것 

길 저쪽 눈부심이 있어도 가지 않으리라는 것

가지 못하리라는 것 

그저 살아라, 살아남아라 

그뿐 

겨울은 잘못이 없으니 

당신의 통점은 당신이 찾아라 

나는 

원인도 모르는 슬픔으로 격리되겠습니다 

위험을 무릅쓰고 옹호하겠습니다 

이후 

저는 제가 없어진 줄 모르겠습니다 

2021년 2월 16일 화요일. 또 눈이 내렸다. 이번 겨울에는 눈이 잦다. 자주 보니 점점 시큰둥해진다. 그래도 눈이 내려 세상이 설탕 가루 뿌린 듯 눈부심의 향연을 펼치면 언제나 설렌다. 이번에는 작은 눈송이들이 비처럼 떨어졌다. 소리 없이. 소리 없이 나려 눈이 오는 줄도 몰랐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 창밖 풍경은 초록과 하양의 앙상블. 눈이 그친 뒤 이어질 불편함과 더러움은 잠시 잊자. 아름다움에 취하자. 

눈이 오면 이제는 백석의 나타샤보다 이규리의 첫눈입니까가 먼저 떠오른다.

나는 잠깐씩 죽는다.

눈뜨지 못하리라는 것.

눈뜨지 않으리라는 것.

어떤 선의도 이르지 못하리라는 것.

불확실만이 나를 지배하리라.

죽음 안에도 꽃이 피고 당신은 피해갔다. (시인의 말) 

<<당신은 첫눈입니까>>는 시인의 말 속에 들어 있는 저 "못함"과 "않음" 사이, 생의 불확실성을 껴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의 슬픔과 의지를 이야기하는 시집이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그리고 겨울'은 이 시집의 마지막 시다. "이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든 "시작에 불과"하고 "끝을 모르"겠는 것이다. "눈부심"이 있는 무엇이나 화자는 거기까지 "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에 가지 않겠노라 선수를 쳐버린다. 그리고 당부하듯 훈계하듯 선언한다. "그저 살아라, 살아남아라"

인생에 답이 있나? 있을 리가 없지. 다만 희노애락은 있지. 그 중에서도 '애哀'는 넘치도록 있지. 넘쳐나서 내 속에 담을 수 없는 슬픔, "원인도 모르는 슬픔"은 어떻게 해야 하나? 화자는 슬픔에 허우적대는 대신 "슬픔으로 격리"되는 길을 택한다. 인생은 아무리 알려 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이기려 해도 이길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생의 잘못이 아니다. "겨울은 잘못이" 없다. 잘못 없는 겨울을 탓해 무엇하리. 그러니 당신은 당신의 아픈 곳, 온몸에 퍼져 있어 외부 자극에 쑤시듯, 찔리듯, 눌리듯 아파오는 그곳, "통점"을 찾는 일에 힘써라. "위험을 무릅쓰고" 삶을 "옹호하라." 그렇게 살다 "이후 / 저는 제가 없어진 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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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2-17 10: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누군가 어렵게 꺼낸다

끝까지 간 것의 모습은 희고 또 희다

종내 글썽이는 마음아 너는,



슬픔을 슬픔이라 할 수 없어

어제를 먼 곳이라 할 수 없어

더구나 허무를 허무라 할 수 없어

첫눈이었고



햇살을 우울이라 할 때도

구름을 오해라 해야 할 때도

그리고 어둠을 어둡지 않다 말할 때도

첫눈이었다



그걸 뭉쳐 고이 방안에 두었던 적이 있다



우리는 허공이라는 걸 가지고 싶었으니까

유일하게 허락된 의미였으니까



저기 풀풀 날리는 공중은 형식을 갖지 않았으니



당신은 첫눈입니까


코로나로 부터 격리된 삶, 우리모두 누군가의 첫눈,,, 유일하게 허락된 공중 위를 풀풀 날리는 자유~
행복한 책읽기님 ‘슬픔으로 격리‘라는 문구에 가슴속에 콕!

시보다 더좋은 행복한 책읽기님에 리뷰 ^0^

행복한책읽기 2021-02-17 12:04   좋아요 2 | URL
오래 참아서 뼈가 다 부서진 말. 이 표현 넘 멋있죠. 시인들은 정말 좋겠어요. 근사한 말들이 막 춤을 춰대니. scott님은 내게 알라딘이 선사한 첫눈^^

미미 2021-02-17 1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시를 꾸준히 읽으셔서 글에 시적 감성이 묻어 있는 듯해요! 잘 읽었어용^^♡

행복한책읽기 2021-02-17 12:10   좋아요 2 | URL
히히히. 미미님, 제가 작년에 잘한 일 중 하나가 시 읽기랍니다. 까짓 함 읽어봐, 하는 즉흥적인 기분으로 시작했다가 점점 좋아져서 그럼 죽기 전까지 읽어봐? 하는 맘까지 이르렀다는^^ 같이 읽어줘 고마워요~~~~^^

희선 2021-02-19 02: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사는 곳에도 눈 왔어요 어제 새벽에도 왔는데, 낮에는 많이 녹았더군요 예전에는 눈 오면 맞고 다녔는데, 이번 겨울에는 눈 올 때 밖에 나가지 않았습니다 미국에도 눈이 오고 아주 춥다고 하더군요 저는 그런 거 보면서 지구를 걱정했네요 겨울이어도 살아야죠 이젠 곧 봄이 오겠습니다 마음에도 봄이 올지...


희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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