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남은 자의 아픔 - 투신자살한 아우슈비츠 생존작가의 시집
프리모 레비 지음, 이산하 엮음 / 노마드북스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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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은 시집. 인간의 가장 밑바닥을 경험한 자(레비)의 고백과 그 비슷한 지점에 닿아본 자(이산하)의 감정 이입이 아름답다. 울컥한 만큼 따듯해서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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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 신데렐라
리베카 솔닛 지음, 아서 래컴 그림, 홍한별 옮김 / 반비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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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닛다운 신데렐라 변신 이야기였다. 도움이 필요하니? 마법은 요술봉이 아닌 진솔한 대화로부터 일어난다. 나다운 사람이 되었니? 그럼 너와 같던 사람들을 반겨주고 먹여주고 안아주렴. 친구가 되어주렴. 남을 돕는 길이 해방의 길이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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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7-15 05: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좋으네요! 해방의 길로 향하는...진솔한 대화.환대.친구.친절한 손길. 이 모든 것들의 앞서...나 다운 사람이 되었니?의 물음이 크게 다가오네요.
 

20210712 #시라는별 48 

생각하지 않은 죄 
ㅡ 아돌프 아이히만에게 
- 프리모 레비 

바람이 평원을 가로질러 자유로이 불어오고 
거센 파도가 끊임없이 해변으로 몰아친다. 
인간은 땅을 비옥하게 만들고 
땅은 그에게 꽃과 열매를 선사한다. 
인간은 고된 노동과 기쁨 속에 살아가고 
희망과 공포 속에서도 고귀한 자손들을 남긴다. 

그런데 어느 날 우리의 저승사자인 그대가 나타났고 
짐승처럼 우리들은 죽음의 쇠사슬에 묶여버렸다. 
우리가 만난다면 그대는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여전히 신에게 하소연이라도 하겠는가? 
그럼 어느 신에게 말인가? 
또 기꺼이 무덤에라도 뛰어들 것인가? 
아니면 오히려 미완성의 작품을 아쉬워하는 예술가들처럼 
아직 살아있는 1300만의 생명에 대해 통탄이라도 할 텐가? 
오~ 죽음의 화신이여 

우리는 그대에게 결코 한 순간의 죽음을 바라지 않으며
그 어느 누구보다도 오랫동안 장수하기를 바란다. 
단지 500만 년 동안만 불면으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그리고 가스실에서 숨져간 모든 이들의 신음과 비명소리가 
매일 밤 그대를 방문해 강한 위로를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살아남은 자의 아픔>>은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가 쓴 시들을 제주 4.3 사건의 진실을 폭로한 장시 <한라산>의 저자 이산하가 편역한 시집이다. 이 시집은 얼마 전 율별엠제이님의 읽은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이제야 안 것이 적잖이 아쉽다. 나는 프리모 레비의 <<이것이 인간인가>>를 몇 년 전 읽다 내려놓았다. 그가 겪은 참혹한 현실을 대면하기 힘들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책이 잘 읽히지 않아 책장을
덮어버린 걸로 기억한다. 시간이 흘러 레비는 이렇게 시로 내게 다시 왔다.

총3부로 구성되었고 59편의 시가 실려 있다. 여러 시에 저자 자신이나 편역자의 주석이 곁들여져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나는 저자와 비슷한 일을 겪은 이산하 시인이 프리모 레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궁금해 해설을 먼저 읽었다. 여느 평론가들이 쓴 시평들과 차원을 달리한다. ˝피가 뜨거운 24살의 한 이탈리아 청년˝이 겪은 아우슈비츠에서의 생존담을 영화처럼 그려내며 읽는 이의 가슴을 때리고 적신다. 좋은 해설이란 이런 거겠구나 하는 느낌이다.

<생각하지 않은 죄>에 대해 이산하 시인이 쓴 주석으로 내 감상을 대신한다. 프리모 레비의 글처럼 편역자의 주석도 절제되어 있고 담담하다. 

*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유태인 대학살 총책임자였다가 종전 후 1급 국제전범으로 수배되자 아르헨티나로 도피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15년 간의 끈질긴 추적으로 1960년에 체포된 그는 예루살렘 나치전범 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1962년 처형되었다. 법정 최후진술에서 아이히만이 말했다.
˝나는 단지 명령을 따랐을 뿐이며, 저 신 앞에서는 유죄지만 이 법 앞에서는 무죄다.˝ 
검사가 사형을 구형하며 말했다. 
˝의심하지 않은 죄, 생각하지 않은 죄, 그리고 행동하지 않은 죄 . . . 그것이 피고의 진짜 죄다.˝ 
미국 ‘뉴요크‘ 특판원으로 참관한 방청석의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다.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대로 산 것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가장 큰 죄다.˝ 
이날, 프리모 레비는 아이히만의 재판에 참관하려다 끝내 가지 않고, 혼자 조용히 이 시를 썼다. 


날마다 누군가가 죽어 나가는 ˝도축장 같은 수용소˝에서 스물네 살 청년 프리모 레비는 살아남기 위한 한 방책으로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읽은 책들은 주로 고전이었고, 책을 읽은 후에는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하루의 삶을 되새기고 존재의 의미를 물었다고 한다. 그 참담한 죽음의 수용소에서 그리 꼿꼿이 살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었을까.

그리스로마신화 
단테의 신곡 
호머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왕 
루소의 참회록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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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07-12 00:3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어제 새벽에는 우울한 기사를 봤습니다 친구라고 하면서 두 사람이 한사람을 가두고 괴롭히다 죽게 한 거였어요 한 친구는 학교 다닐 때도 죽은 사람을 괴롭혔다고 하더군요 그런 게 학교를 마치고도 이어지다니... 왜 그 사람들은 남을 그렇게 괴롭히고 죽음에 이르게 해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거 여러 번 본 듯합니다 조금 다른 이야길지 모르겠지만, 자신이 하는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어떻게 느낄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것 같기도 합니다

행복한책읽기 님 새로운 주 즐겁게 시작하세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7-12 15:05   좋아요 3 | URL
ㅠㅠㅠ 정말 우울한 기사네요. 저런 일은 결코 없어지지는 않나 봐요. 희선님 말대로 자신이 하는 행동이 상대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아야죠. 그래야 세상이 좀더 살만해질 거잖아요. 그죠. 희선님도 이번 주 즐겁게. 활기차게.^^

미미 2021-07-12 00:3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 이 페이퍼도 훌륭하고 프리모 레비의 시도 무척 좋으네요! 자정넘어 책 찜하게 하시다니😭👍
굿밤 되세요~ 💕

행복한책읽기 2021-07-12 15:06   좋아요 3 | URL
찜하게 만들었다니 뿌듯. 저는 도서관에서 대출해서 읽다 바로 구매해버렸습니다. 제게는 소장용 소장용.^^

scott 2021-07-12 00:4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페이퍼 훌륭!!
[ 자기 생각 없이 남의 생각대로 산 것과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관심한 것이 가장 큰 죄]
이런 죄를 짓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읽고 세상을 예의 주시 하며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 하지 말기!!

행복한 책읽기님 페이퍼 읽은 1人!
의심하지 않고 생각하지 않은 채 곧바로 페이퍼 속에 담긴 책 장바구니로 ~@@@,(전,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만 안읽어 봤네요. 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7-12 15:08   좋아요 4 | URL
역쉬 scott님. <태양의 나라> 외 다 읽으셨다니. 그저 감탄 감탄. 이따금 scott님 머릿속에 들어가 보고 싶습니다. 얼마나 많은 책과 정보가 굴러다닐까 궁금해서리. ㅋㅋ

새파랑 2021-07-12 09: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역시 책읽기님의 시 사랑은 전 세계 글로벌하네요~!! 프레모 레비의 <생각하지 않은 죄> 이 시는 아픔이 적나라하게 느껴지네요 ㅜㅜ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7-12 15:11   좋아요 4 | URL
어머. 무슨 말씀. 글로벌은 새파랑님이죠. 전세계 소설들을 섭식 중이시잖아요. 번역 시는 좀 읽기 힘든데, 이 시집은 잘 읽힙니다. 편역자 이산하 시인의 내공 덕인듯 해요.

mini74 2021-07-12 10:4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프리머 레비ㅠㅠ 그 곳의 지옥보다 살아남은 자의 아픔이 더 힘들었던걸까 그런 생각도 드네요. 주기율표는 쉽게 넘어갔는데 저도 이것이 인간인가는 읽기가 힘들었어요 ㅠㅠ 좋은 글 고맙습니다 *^^*

행복한책읽기 2021-07-12 15:16   좋아요 3 | URL
레비는 수용소라는 하나의 지옥을 통과하고, 수용소 밖이라는 또하나의 지옥에 들어선 것 같아요. 지옥을 경험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여생이 대개가 그런 듯해요. 슬프고 아프게도 말이죠. 이런 비극들이 정말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얄라알라 2021-07-12 17: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 님, 몇 년의 공백을 걸쳐 다시 프리머 레비를 만났을 때는 시로 만나신 거네요. 저는 아직 입문전인데 제가 이 시집을 읽는다해도 행복한 책읽기님처럼 해설 먼저 볼 것 같아요. 이산하 시인이 편역의 적임자였을 거라는 생각이 이 리뷰 읽으며 드네요

행복한책읽기 2021-07-13 12:16   좋아요 1 | URL
네. 레비가 적임자를 만나, 독자들은 청년 레비를 정말 실감나게 만날 수 있어요. 북사랑님 레비 입문을 이 시집으로다^^
아, 글고 솔닛의 신데렐라는 벌써 읽는 중이요. 딸과 같이 읽고파 주문해버렸어요^^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일러스트와 함께 읽는 세계명작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하비에르 사발라 그림, 이현우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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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서야 읽었다. 19세기 러시아판 내로남불 단막극을 본 느낌. 체호프를 ‘세계 최고의 단편작가‘라 일컫던데, 이 작품만으론 모르겠다. 다만 문체가 정갈하고 세련되고, 군더더기가 없어 좋다. 달콤함의 내일을 모를 것이 인생임을 말하는 열린 결말이 젤 마음에 든다. 그림은 좀 의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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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09 12:0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전 민음사에서 나온 체호프 단편선 완전 애장하는데 ㅋ 이 단편은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 하네요 ㅜㅜ 제목은 완전 낯익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7-10 09:47   좋아요 2 | URL
귀여운 여인이랑 쌍벽을 이루는 단편이더마요. 새파랑님이랑 스캇님 땜에 체홉 질렀어요. 이제야 입문인데, 내용은 둘째치고 문체가 좋네요. 단편의 미덕인 응축된 간결함이 물씬.^^

미미 2021-07-09 12:2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는 군더더기가 많은 편이라 군더더기 없는 거 좋아합니다ㅋㅋㅋ정갈,세련,열린결말이라니 바로 찜~♡ 로쟈님 번역이네요!오!😳

행복한책읽기 2021-07-10 09:53   좋아요 2 | URL
로쟈님 번역도 완전 깔끔해요. 이분이 러시아어 전공자라는 것도 이제야 알았어요. 역자 해설도 알토란 밤 같다는.^^

페넬로페 2021-07-09 14:5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직까지 체호프를 만나지 못해 많이 부족한 저 입니다~~어서 만나야 할텐데 맘이 급하네요^^^
열린 결말이 많은 의미를 주어 좋지만 독자한테는 어렵기도 한데 행복한책읽기님의 결론은 어떨지 궁금해요^^

행복한책읽기 2021-07-10 09:59   좋아요 2 | URL
ㅎㅎ 지두 이제야 첨 읽었어요. 이 책은 체호프 입문용으로 짱인 듯요. 빨리 읽는 분은 한 시간 안 걸리겠더라구요. 열린 결말은, 제가 좋아하는 결말이에요. 뒷얘기를 독자들에게 떠넘기잖아요. 니들도 생각해봐, 나아가 써봐 라고 작가가 약 올리는 것 같거든요. 체호프의 다른 작품도 그런지 천천히 볼라구요. ^^
 
포옹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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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708 #시라는별 47 

넘어짐에 대하여 

- 정호승 

나는 넘어질 때마다 꼭 물 위에 넘어진다 

나는 일어설 때마다 꼭 물을 짚고 일어선다

더이상 검은 물속 깊이 빠지지 않기 위하여 

잔잔한 물결 

때로는 거친 삼각파도를 짚고 일어선다 

나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할 때만 꼭 넘어진다 

오히려 넘어지고 있으면 넘어지지 않는다 

넘어져도 좋다고 생각하면 넘어지지 않고 

천천히 제비꽃이 핀 강둑을 걸어간다 

어떤 때는 물을 짚고 일어서다가 

그만 물속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럴 때는 아예 물속으로 힘차게 걸어간다 

수련이 손을 뻗으면 수련의 손을 잡고

물고기들이 앞장서면 푸른 물고기의 길을 따라간다 

아직도 넘어질 일과 

일어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일으켜세우기 위해 나를 넘어뜨리고 

넘어뜨리기 위해 다시 일으켜세운다 할지라도

정호승 시인의 아홉 번째 시집 <<포옹>>에는 총 66편의 시가 수록돼 있다. 정 시인의 시들은 아주 난해하지도, 그렇다고 아주 쉽지만도 않은데, 이 시집은 일단 잘 읽힌다. 모든 시가 마음에 차는 건 아니지만 몇 편에 한 번씩, 혹은 연달아 아, 하는 탄성을 지르게 한다. 

산다는 것은 결국 

낡은 의자 하나 차지하는 일이었을 뿐

작고 낡은 의자에 한 번 앉았다가 

일어나는 일이었을 뿐 (<낡은 의자를 위한 저녁기도> 중) 

정호승 시인은 1950년생이다. 이 시집은 시인의 나이 58세 때 출간되었다. 지천명을 넘어 예순을 바라보는 시기.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을 때 찾아드는 감정이 있다. 지금껏 무엇을 하고 살았나. 산다고 살았는데 왜 손에 쥔 것이 없나. 그런 마음을 시인은 이렇게 표현한다.

내가 걸어온 길과 걸어가야 할 길이

너덕너덕 누더기가 되어 밤하늘에 걸려 있다 (<다시 자장면을 먹으며> 중)

"누더기" 인생에 남은 것이라곤 "부러진 나무젓가락과 먹다 만 단무지와 낡은 칫솔 하나뿐"이지만, 그럼에도 시인은 "다시 자장면을 먹으며 살아봐야겠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아무렴. 황천길도 식후사(食後事)가 아니겠는가. 

배는 부르나 늙어가는 것은 어찌할 도리가 없다. "늙으면 밥이 똥이 되지 않고 돌이" 되곤 한다. 똥을 못 눠 관장약을 항문 깊숙이 밀어넣어야 하는 늙은 아비를 보며 시인은 늙음의 처량한 현실을 직시한다.

사람이 늙은 뒤에 또다시 늙는다는 것은

밥을 못 먹는 일이 아니라 똥을 못 누는 일이다 (<노부부> 중) 

"똥을 못 누는" 나이가 되도록 살고픈 이가 누가 있을까마는 저승길은 내가 정할 수 있는 길이 아니다. 사는 데까지 살다 갈 생이 그리 길지 않을 때 찾아드는 또 다른 감정은 이런 것이 아닐까.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누구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 되어야 한다 

오늘도 포기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지 말고 무엇을 이루려고 뛰어가지 마라 

아무도 미워하지 않게 되기를 바라지 말고 가끔 저녁에 술이나 한잔해라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중) 

움켜쥔 손을 놓기. 환갑을 앞둔 중년의 시인이 얻은 혜안이다. 젊은 날엔 무엇이든 붙잡으려 애를 쓴다. "나를 가방 속에 구겨넣고"서라도 (<가방>) 날마다 출근 도장을 찍고 "남들이 가진 것을 다 가지려" 아등바등한다.(<옥산휴게소>) 그렇게 나를 향해, 오직 나를 위해 쓰이는 손가락을 시인은 어느 순간 가차없이 잘라버리고 하나는 "불국사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 또 하나는 땅에 심는다."( <손가락>) 잘린 두 개의 손가락이 썩어 문드러질지, 새로운 생명으로 탄생할지는 알 수 없지만, 잘려서 비게 된 자리에 우리는 나 아닌 다른 것을 들일 수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늙어가는 일이기도 하지만, 마음 한 켠에 타인의 자리를 내주는 일이기도 하다. 연민의 자리를 말이다. 

넘어지고 일어서기를 반복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넘어지지 않으려 애쓰기보다는 덜 아프게 넘어지는 법을, 넘어지더라도 더 가뿐히 일어서는 법을 체득하는 것이 나으리라. 그러니 넘어질 때는 꺼끌꺼끌한 시멘트 바닥이 아닌 말랑말랑한 "물 위로" 넘어질 것이며, "물을 짚고 일어서다" "물속에 빠질" 것 같으면 물고기처럼 힘차게 물을 차고 나아가면 될 일이다. "아직도 넘어질 일과 / 일어설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시인의 말처럼 "큰 축복"이 되려면 시들어갈 일밖에 없는 나와 너를, 장차 뼈만 남게 될 나와 너를, 신석기 시대의 한 부부처럼 꼭 껴안아주면 되지 않을까. 그렇게 너와 내가 서로 포옹하고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삶은 결국 이런 것일 테니. 

사람 사는 일

누구나 마음속에 절 하나 짓는 일 

지은 절 하나 

다시 허물고 마는 일 (<지하철을 탄 비구니>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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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7-08 09:1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구절 좋은데요?! 짓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허물고 말기에‘ 더 절절하고 와닿는 느낌😊

행복한책읽기 2021-07-08 12:13   좋아요 3 | URL
미미님은 마지막 구절 콕! 짓고 허물기를 반복하는 것이 삶인가봐요. ^^

새파랑 2021-07-08 09: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넘어짐에 대하여> 시 정말 좋네요~!! 넘어지는 것보다는 다시 일어난다는게 중요한게 맞는거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7-08 12:16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은 넘어짐에 콕!! 새파랑님은 닉넴 탓인지 밟혀도 꿋꿋하게 고개 쳐들고 파릇함을 뽐낼 것만 같아요. 북플의 새싹이시더니 어느새 여름숲을 이루심 ㅋ

페넬로페 2021-07-08 10: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 요증 시 계속 읽으시네요. 시가 참 좋은데 이상하게 손이 가질 않아요. 한번씩이라도 시를 읽고 마음을 정화시켜야할것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7-08 12:19   좋아요 4 | URL
시를 읽는 시간이 좋아요. 작년에 제가 찾은 마음의 안식이었거든요. 글고 얇잖아요. 손에 쥐기 편하다는 ㅋ

얄라알라 2021-07-08 11:0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낡은 의자에 한 번 앉았다 일어나는, 그런 무심한 경지... 제게서 스르륵 빠져나간 의욕, 활기도 무심함의 경지로 끌어올리고 싶네요^^ 이 또한 욕망인가요?^^

행복한책읽기 2021-07-08 12:22   좋아요 5 | URL
아. 그런 욕망이라면야. 바래도 되지 않을까요. 또한 욕망해야 무심핝경지 근처라도 가보지 않을까요. 북사랑님 손잡고 앉았다 일어나드리겠음. 여~~~엉~~~차!!!!^^

scott 2021-07-08 11:4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이 목요일에 읽어주시는 시!
이 시를 읽으며
저는 오늘 하루 제마음 속에 시집을 짓고

절대로 허물지 않을 겁니다.
(*Ü*)ﻌﻌ💓💓💓💓

행복한책읽기 2021-07-08 12:24   좋아요 4 | URL
ㅋ 마음에 절대 허물지 않을 시집을 짓겠다니. scott님은 능히 그러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읽기 무섭게 곧장 글귀들이 허물어지고 만다는 ㅡㅡ^^;;

희선 2021-07-10 00: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설 힘이 있을 때는 괜찮겠습니다 나이를 많이 먹으면 넘어졌다 다시 일어나지 못하기도 한다잖아요 그렇게 넘어져서 병원에 갔다가 그 길로... 거의 그렇게 갈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거 생각하면 슬프기도 하네요 넘어지지 않고 가고 싶기도 합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7-10 09:42   좋아요 1 | URL
맞아요. 나이 들수록 넘어졌다 일어서기가 점점 힘들어져요. 그래서 넘어지는 거 자체가 무서워지나 봐요. 우리 가능한 넘어지는 횟수를 줄여보고 잘 넘어지는 법도 터득해 가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