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04 #시라는별 62 

편히 잠들려면 몸을 바꿔야만 해 
구름에게 배운 것 
- 김선우 

구름이면서 구름들이지 
지금의 몸을 고집하지 않지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스미는 일에 
머뭇거림이 없지 

두려움 없이 흩어지며 
무너지고 사라지는 게 즐거운 놀이라는 듯 
다시 나타날 땐 갓 태어난 듯 기뻐하지 
그게 다지 
곧 변할 테니까 

편히 잠들기 위해 몸을 이동시키는 법을 
나는 구름에게서 배웠네 
모든 것이 지나간다는 것도 

그러니 즐거이 변해가는 것 
내가 가진 의지는
그게 다지 


한 권의 시집을 한 달 넘도록 들여다보는 일은 잘 없는데, 김선우 시인의  『내 따스한 유령들』 은 다 읽고도 자꾸 들춰보게 된다. 그만큼이나 좋다. 지천명에 이른 김선우 시인은 이 시집에서 날선 비판과 둥근 포용이 어떻게 어우러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비판의 칼날은 무뎌지지 않은 반면 포용의 품은 넓고 깊어졌다. 시인은 자본의 무한 욕망을 한탄하고, 인간의 끝간 만용을 책망하고, 기후와 생태 위기를 경고하고, 인권과 동물권 수호를 외친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이런 참혹한 세상이 굴러갈 수 있는 것은 ˝작고 여리고 홀연한˝ 존재들의 ˝고통에 연대하는 간곡한 마음들˝ 때문이라고 시인은 노래한다.

˝고통에 연대하는 간곡한 마음들˝ 중 하나가 변화에 대한 열망이지 않을까. 지구라는 생명체와 지구에 의지해 사는 생명체를 죽이려 드는 삶의 존재 방식을 바꾸는 것. 그것이 어려운 일일 수는 있으나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바람결 따라 쉬이 몸을 이동하는 구름처럼, ˝이 몸에서 저 몸으로 스미는 일에 / 머뭇거림이˝ 없는 구름을 닮을 수 있다면, 우리네 또한 ˝즐거이 변해˝갈 수 있으리라.

3개월만에 가을맞이 가족 산행을 다녀왔다. ˝저 나이 되도록 엄마아빠랑 같이 다니는 아이들 두신 거 복이랍니다.˝라는 장사꾼의 말에 어깨 으쓱해진 산행이었다. 덕유산 정상과 도마령 정자와 귀갓길 고속도로에서 구름들을 바라보다 팔을 하늘까지 길게 뻗어 ˝구름 버튼˝을 눌러 보고 싶었다.
​ 
​​오늘은 없는 날 
행복하고 싶어서 
구름 버튼을 눌러 당신 목소리를 들어요
나야, 바람이 좋아 
나와 함께 당신이 살아 있어 이렇게나 좋아 
더 많이 아낄 수 있어 더 없이 좋은 날 
사랑하는 일 말곤 아무것도 안 할래 

어제도 내일도 없는 오늘 
많이 행복해서 
당신과 함께 산으로 가요 
없는 날의 자유 
푸른 바람 속을 무한무한 걷고 달려요 (<오늘은 없는 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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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1-10-04 02:2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벌써 단풍 든 나무가 있군요 산이어서 그런가 봅니다 단풍은 위쪽에서 아래로... 그런 거 생각하면 재미있기도 해요 김선우 시인 시집을 한달 동안이나 보시다니, 그렇게 봐서 더 깊이 보셨겠습니다 좋아서 여러 번 보셨겠지만... 식구들과 산에 가서 즐거웠겠습니다 식구가 다 같이 산에 가기 어렵기도 하잖아요

구름은 여러 가지로 바뀌고, 그렇다고 그게 안 좋은 건 아니네요 물도 자기 모습을 잘 바꾸죠 자연은 다 이어지고 어우러져 사는군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10-05 01:11   좋아요 2 | URL
네. 이 시집 참 좋네요. 문제의식도 사유도 시구도^^ 산 정상은 가을이 성큼 와 있더군요. 희선님도 가을하늘 만끽하세요~~~^^

새파랑 2021-10-04 08: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일단 편해지려면 나를 바꿔야 하는 걸까요? ㅎㅎ 가족과 함께 산으로 가는 책읽기님 행복해 보여요. 사진도 멋짐~!!😄

행복한책읽기 2021-10-05 01:12   좋아요 1 | URL
구름에 달 가듯이 유유히 변해가면 편하지지 않을까요. ㅋ 간만의 가족산행이 여유롭고 평화로워서 참 감사했어요^^

막시무스 2021-10-04 10:2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두번째 사진에서는 저 햇살사이로 최후의 심판같이 절대자가 마차타고 강림할 것 같은 분위기네요!ㅎ 단풍보니 가을을 실감합니다! 즐건 휴일되십시요!

행복한책읽기 2021-10-05 01:15   좋아요 1 | URL
찌찌뽕. 막시무스님 저도 딱 그렇게 느꼈어요. 아폴로 머리칼처럼 보이기도 하더라구요.^^ 막시무스님 새로운 한주도 잼나게 보내이와요.^^

초딩 2021-10-04 14:2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냇물 같은 하늘 서진에 마지막 사진은 또 알록 달럭 예빠요~

행복한책읽기 2021-10-05 01:16   좋아요 0 | URL
냇물 같다 하셔서 다시 봤어요. 아, 그렇게도 보이는구나. 가을하늘은 요술쟁이 같아요. 그죠.^^

mini74 2021-10-04 20: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에서 시도 느껴지고 가을도 느껴져요 ~~

행복한책읽기 2021-10-05 01:17   좋아요 0 | URL
역쉬 미니님. 사진에서 시와 가을을 동시에 느낄 줄 아는 감성 갑!!^^

scott 2021-10-04 21: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구름에게 배운것!!
한 순간도 같은 모양, 크기도 없이 쉼없이 움직이며 흘러 간다는 건!

10월의 가족 산행!
단란한 가족의 산행 모습!
행복한 책읽기님이 담으신 덕유산 자락의 가을 정취!!

오늘은 시보다 행복한 책읽기님의 산행 흔적이 담긴 사진이 더! 좋습니다 ^ㅅ^




행복한책읽기 2021-10-05 01:19   좋아요 1 | URL
히히. 그런가요. 사진 더 방출하고 싶은거 자제했는데, 마구 뿌려요??^^;;

얄라알라 2021-10-08 0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진 너무너무 좋습니다!!!!!!

자제분들이 같이 움직이는 가족 산행....산책도 안 따라가려는 요즘 꼬마님들^^ 행복한 책읽기님 복 많이 받으시는 거 맞네요^^

덕유산 이름도 좋고 느낌도 너무 좋아요

2021-10-08 00: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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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 네 번째 책. 결혼을 앞둔 커플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나는 혼전에 지금의 남편과 역할 분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러나 아이가 생기고, 집에 들어앉는 순간부터 합의는 사라지고 가사와 육아에 파묻히는 주부와 엄마만 남는다. 이 책은 그 점을 낱낱이 고발하고 경고한다. ‘섹스도 집안일이 되어 버렸다‘에서 폭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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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10-01 16:3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늘 제가 올린 음악 포스팅의 작곡가 세실도 결혼전의 남편이 적극적으로 창작 활동 하는걸 지지해주어서 믿고 결혼 하고 나니 남편은 결혼 하지마자 즉각 자신이 있던 사회의 자리로 돌아 갈 수 있었지만 세실은 결혼과 동시에 육아로 창작 생활을 중단 해야 했습니다 여전히 사회는 여성에게 일과 가정 두가지를 선택하라고 하는 제도와 구조로 속박하고 있죠

행복한책읽기 2021-10-02 00:59   좋아요 3 | URL
그러게요. 둘 중 하나가 아닌 둘다이면 좋겠는데, 해보니 사실 많~~~이 버거워요. 그래서 저는 가사노동자이자 양육노동자인 주부(남녀를 떠나)에게 월급을 주어야한다고. 진심으로 바라고 그런 세상을 꿈꾼답니다^^;;

붕붕툐툐 2021-10-01 17: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섹스가 집안일이라니~ 전 왜 슬프죠?ㅠㅠ

행복한책읽기 2021-10-02 01:02   좋아요 2 | URL
제가 툐툐님을 슬프게 했군요. 우째요. 근데, 저는 저 대목에서 에르노 여사에게 너무나 강렬한 유대감을 느끼고 말았답니다.^^;;

초딩 2021-10-02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로젝트에서 쓰는
일감 관리 도구를 써야할 판이에요.
그래서 정량적으로 평가해서 누가 얼마나 많이 했는지..
그리고 가용한 시간대비 일은 얼마나 했는지 ㅎㅎ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10-02 17:59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왠지 초딩님이라면 능히 하실 수 있을 것 같아요. 정리 대마왕이시잖아요^^
 

20210929 #시라는별 61 

천문의 즐거움 
- 김선우 

하늘을 오래 바라보다 알게 되었다 
별들이 죽으면서 남겨놓은 것들이 
어찌어찌 모여서 새로운 별들로 태어난다는 거 
숨결에 그림자가 있다는 거 
당신도 나도 그렇게 왔다는 거 
우리가 하나씩의 우주라는 거 

수백억광년의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른 
빛의 내음 
소리의 촉감 
온갖 원자들의 맛 

지구에서 살아가는 나는 가끔 
죽은 지 오래인 별들의 임종게를 발굴해 옮겨 쓴다 

그대들이 세상이라 믿는 세상이여, 나를 받아라. 내가 그쪽을 먼저 사양하기 전에. 

오늘 아침 닦아준 그림자에서 흘러나온 말
임종게가 늘 탄생게로 연결되는 건 아닐 테지만 
가끔 유난히 아름다운 탄생의 문양들이 있어 
우주가 지나치게 쓸쓸하진 않았다


16년만에 설악 산행에 나섰다. 이 여행길에 배낭에 끼워 간 책은 김선우의 『내 따스한 유령들』 느릿느릿 아껴가며 읽는 시집이다. 이 시를 읽고 모르는 낱말이 있어 찾아 보았다.

임종게(臨終偈)는 고승들이 입적할 때 수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을 후인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말이나 글이다. 
탄생게(誕生偈)는 석가모니 부처가 태어났을 때 외쳤다고 하는 게송을 일컫는다. 부처님의 탄생게는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다.

˝죽은 지 오래된 별들의 임종게를 발굴해 옮겨 쓰˝는 김선우 시인의 이 시는 내게 ‘천문의 즐거움‘ 뿐 아니라 ‘산행의 즐거움‘까지 물씬 느끼게 해주었다. 하늘이든 무엇이든 ˝오래 바라보다˝ 보면 전에 모르던 것들을, 알 수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것들을 알게 된다. 16년 전 겨울 설악에서 나는 바람의 무늬가 새겨진 눈밭을 ˝오래 바라보다˝ 우주를 발견한 적이 있다. 소금밭 같기도 설탕밭 같기도 한 하이얀 눈밭은 우주와 이어져 그 속으로 나를 빨아들이곤 했다.

만 가지 경치가 올려다보이고 내려다보인다는 만경대(922.2m)에 앉아 ˝수백억광년의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른 / 빛의 내음 / 소리의 촉감 / 온갖 원자들의 맛˝을 오감으로 느꼈다. 하여 알게 된 것들

소나무 잎은 두 가닥, 잣나무 잎은 다섯 가닥 
마가목 열매 바닥에는 별이 박혀 있다 
둥글둥글한 돌 속에는 수정이 숨어 있다 
진달래는 아래서부터 거북이처럼 올라가고 
단풍은 위에서부터 내달리듯 내려간다
설악에는 ˝유난히 아름다운 탄생의 문양들이 있어˝ 
쓸쓸함을 느낄 겨를이 없다. ^^ 

사진 방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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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29 07:0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와 설악산 사진보니 시원시원 하네요 ^^ 저 높은 절벽같은 곳에 올라가시다니 대단합니다. 무서움이 없는 책읽기님~!!

행복한책읽기 2021-09-30 12:52   좋아요 4 | URL
벌벌 떨면서 올라갔어요. 사진 남길라구요^^;; 설악은 기기묘묘 암벽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답니다^^

미미 2021-09-29 09:5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온갖 원자들의 맛~♡ 암벽도 잘 타시나봐요! 사진 모두 훌륭한데 돌 사이에 핀 꽃 예술입니다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9-30 12:54   좋아요 3 | URL
암벽 못 타요. 겨우 올라갔어요. 무서워서 서 있지 못하고 앉아있었다는^^;; 돌 사이에 핀 구절초. 정말 기특하죠. 놀라운 생명력이에요^^

막시무스 2021-09-29 09:5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16년 전 겨울 설악에서 나는 바람의 무늬가 새겨진 눈밭을 ˝오래 바라보다˝ 우주를 발견한 적이 있다. 소금밭 같기도 설탕밭 같기도 한 하이얀 눈밭은 우주와 이어져 그 속으로 나를 빨아들이곤 했다.> 크~~~눈발 날리는 설악을 너무나 멋지게 그려낸 이 표현은 완전 시인 같으심요!ㅎ 등단하셔도 될 듯 합니다. 덕분에 설악산 구경 잘했네요! 즐건 하루되십시요!ㅎ

행복한책읽기 2021-09-30 12:55   좋아요 2 | URL
등단할까요?? 막시무스님이 물주 되어주심 생각해 보겠어라ㅋ 9월 마지막날도 즐겁게 보내시와요~~~^^

붕붕툐툐 2021-09-29 10:0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히야~ 저같은 등린이에게 꿈의 산인 설악산! 바위 위의 자태가 넘나 멋지심다~~
시도 참 좋네용~ 당신도 나도 그렇게 왔다~ 우리가 하나씩의 우주다!

행복한책읽기 2021-09-30 12:58   좋아요 2 | URL
툐툐님 곧 설악을 밟을실 것으로 예상됩니다. 등린이라는 표현 넘 좋네요. 툐툐 등린이 화이링~~~^^

scott 2021-09-29 12:0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수백억광년의 과거로부터 오늘에 이른
빛의 내음
소리의 촉감
온갖 원자들의 맛 ]

행복한 책읽기님은 플친님들에게 설악상의 풍경을 선물로 주셨네요
가을은 분명 인간이 하늘과 가장 가깝게 맞닿을 수 있는 순간인 것 같습니다.
^ㅅ^

행복한책읽기 2021-09-30 13:00   좋아요 2 | URL
네네. 정말 가을 하늘은 자연을 더욱 찬양하게 만들어요. 우주도 성큼 다가오는 느낌이구요.^^

얄라알라 2021-09-30 23: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야, 행복한 책읽기님 덕분에 제대로 호강 하네요. 구절초 사진에 아찔한 고도의 청량감에


16년만의 산행, 제대로 하셨는걸요^^ 기분 끝내주셨겠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10-01 09:59   좋아요 1 | URL
네에 정말 좋았어요. 설악 입구부터 든 생각이 16년간 뭘하느라 이제야 왔지?? 물음표를 던졌는데. 아아들을 키웠더군요. 이제, 저도 독립을 할까 생각 중^^;;

2021-10-01 1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0-01 15: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1-09-30 2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 지인과 점심대화하다가 천문학자들이 겸손할 수 밖에 없는 이유, 이런 이야기했는데, 시를 읽어보니 다시 낮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이 단어를 몰라서, ˝계˝의 오기인가 할뻔했네요^^

좋은 밤 되세요. 행복한 책읽기님!

행복한책읽기 2021-10-01 10:02   좋아요 1 | URL
저도 저런 단어가 있는 줄 몰랐어요. ^^ 저 백신 2차 맞고 해롱대다 이제 좀 정신을 차리는 중이요. 몸살기가 제법 오래가네요.ㅡㅡ 북사랑님 10월의 가을을 같이 만끽해 보아요~~~^^
 

20210924 #시라는별 60 

여행으로의 초대 L‘invitation au voyage 
-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내 소중한, 내 사랑아, 
꿈꾸어보아요. 
그곳에서 함께 사는 달콤함을! 
한가로이 사랑하고 
죽는 날까지 또 사랑할 테요. 
그대 닮은 그곳에서! 
흐린 하늘의 촉촉한 태양이 
내 마음 매혹시키네, 
못 믿을 만큼 
신비로운 그대 눈동자에
스치듯 반짝이는 눈물로. 

그곳엔 오직 질서와 아름다움, 
풍요와 고요 그리고 쾌감뿐. 

세월의 광택으로 
빛나는 가구들로 
우리 침실을 장식하리라. 
진귀한 꽃들 
그 향기와 어우러지는 
은은한 호박향 
호화로운 천장 
깊숙한 거울 
동방의 찬란함 
그 모든 것이 들려주리라. 
내 영혼에 은밀하게
정겨운 그대의 고향 언어를. 

그곳에 오직 질서와 아름다움, 
풍요와 고요 그리고 쾌감뿐. 

저 운하 위에 
잠든 배들을 보아요.
방랑벽에 젖은 채로 
그대 소망 아주 작은 것까지 
채워주려 
세상 끝에서 왔답니다. 
ㅡ 저무는 저 태양이 
물들이고 있어요. 저 벌판과 
운하와 도시 곳곳을, 
보랏빛과 금빛으로. 
이제 세상은 잠들 거예요, 
따뜻한 햇빛 속에서. 

그곳엔 오직 질서와 아름다움, 
풍요와 고요 그리고 쾌감뿐. 


아니 에로느의 『얼어붙은 여자』 에서 보들레르를 만났다. ˝뜨거운 사랑이 나타나기까지 어쨌든 살아야 한다. 누군가 손을 잡게 내버려둬요, 나의 사랑 나의 누이여.˝(111쪽) ˝나의 사랑 나의 누이여˝가 등장하는 시의 제목은 보들레르의 <여행에의 초대>라고 주석이 달려 있다. 그래? 나는 보들레르를 더러 읽었건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여 읽던 책 잠시 내려놓고 소장하고 있던 보들레르의『악의 꽃』​ 을 꺼내 찾아 보았다.

민음사 번역과 문예출판사 번역은 꽤 다르다. 시적 리듬에선 민음사에 손을 들어 주고 싶고, 번역 자체로는 문예출판사 쪽이 더 잘 읽힌다. 이 시는 보들레르가 Marie 라는 젊은 여배우를 향한 사랑을 노래한 것이다. 스물다섯에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땐, 나 역시 시인처럼 사랑의 달콤함과 영원함을 믿으며 사랑하는 이와 ˝따뜻한 햇빛˝ 속을 거니는 꿈을 꾸었으리라. 시인의 말처럼

[그곳엔 오직 질서와 아름다움
풍요와 고요 그리고 쾌감]

이 가득하리라 생각했을 테니까. 그러나 살아온 만큼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고 이 시를 읽으니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죽는 날까지 또 사랑할 테요˝는 무슨! 나는 저 시행을 이렇게 바꿔 읽었다. ˝죽는 날까지 또 읽을 테요.˝ 왜냐하면 책들은 언제나 나를 여행으로
초대하고(코로나 이후 더해졌음) 나는 책속에서 ˝질서와 아름다움 / 풍요와 고요 그리고 쾌감˝을 가장 짙게 느끼기 때문이다. 오래 전 읽은 자비에르 드 메스트르의『내 방 여행』도 생각나는구나. 지호에서 2001년 출간되었던 이 책은 2016년 유유 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 ​

보들레르의 <여행에의 초대>는 여러 작곡가가 곡을 붙여 가장 애송되는 시이기도 하단다. 다음은 그 중 하나인 프랑스 작곡가 앙리 뒤마르크가 작곡한 가곡이다. (1870년)

​​https://youtu.be/o-d2KXgpaS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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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9-24 08: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보들레르 예전에 시집(?)도 있었는데 어데로 갔는지 모르겠어요 ㅜㅜ
다시 한번 찾아봐야 겠어요 😄

행복한책읽기 2021-09-24 14:24   좋아요 3 | URL
퇴근 후 찾아, 보고해 주십시오^^

미미 2021-09-24 10:1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진을 어쩜 이렇게 찍으세요?! 항상 감탄ㅎㅎ~♡ 문예출판사는 번역 믿고 보는데 앙리 마티스 그림 때문에도 끌려요!😉

오거서 2021-09-24 10:22   좋아요 5 | URL
미미 님의 말을 흘려듣지 말아야지 ^^

미미 2021-09-24 10:25   좋아요 5 | URL
오거서님ㅋㅋㅋㅋㅋ😆

오거서 2021-09-24 10:31   좋아요 4 | URL
저 자신을 타이르는 거에요. ^^;

행복한책읽기 2021-09-24 14:27   좋아요 4 | URL
사진이야 자연이 주시는 거라서요.^^ 이 시집 마티스 그림 땀시 구매한거였어요. 소장용소장용 ㅋㅋ 마티스가 보들레르 찐팬이었대요.^^

행복한책읽기 2021-09-24 14:28   좋아요 4 | URL
오거서님. 지두 따르겠습니당^^

오거서 2021-09-24 14:48   좋아요 3 | URL
행복한책읽기 님의 말도 흘려듣지 않아야죠~ ^^

scott 2021-09-24 18: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우와 구름이 구름이!!!!
보들레르는 시어로 여행으로 초대 했지만
행복한 책읽기님은 푸른 하늘 구름위로 플친님들 초대 하쉼!!

행복한책읽기 2021-09-24 22:03   좋아요 2 | URL
가을하늘은 정말 마술을 부리는 듯해요. 하늘 바라보기 여행도 참 좋아요~~~^^

희선 2021-09-25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는 날까지 읽겠다, 저도 그러고 싶네요 책을 보려면 아프지 않아야 할 텐데 말이죠 아프면 책 읽기 조금 힘들기도 하잖아요 어지러운데도 책 본 적 있지만... 가만히 책만 보면 어지럽지 않고 시간이 가고 괜찮아졌어요 아프다고 오래 누워 있으면 더 아프니 일어나 앉아 있기라도 하는 게 나을 듯합니다 그것도 못하면 누워 있는 게 낫겠지만...


희선
 

20210923 박물지, 드디어

책을 가까이할 수 없는 연휴를 보내고 도서관에 왔다.

플리니우스 《박물지》가 희망도서 신청 한 달 열닷새 만에 내 품에 안착. 물론 2주간만. 물론 정독하지 않을 예정. 일단 수박 겉핥기만.^^;; 아무튼 기다리고 기다리던 책과 만나니 기분이 조으다.

더불어 대출한 책들, 읽고프나 읽을 수 있을까 싶은 책들.ㅡㅡ

온종일 책만 읽는 날은 왜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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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9-23 18:1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와 박물지! 표지가 멋지네요~ 두께도 으마할 것 같고^^;
<딸에 대하여> 반갑네요. 저는 꽤 좋았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9-23 23:50   좋아요 1 | URL
네. 표지가 재질도 넘 좋아요. 자꾸 만지고 싶어요. 두께는 생각보다 안 두껍답니다. 주석까지 고작(ㅋㅋ) 600페이지에요. 독서괭님 <딸에 대하여> 읽으셨군요. 책 좋아하는 동생이 김혜진 소설이 너무 좋다고 강추를 해주었어요. 저, 대출만 벌써 세 번째. 이번엔 꼭 읽어야지 이러면서.^^;;;

새파랑 2021-09-23 18: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읽기님만의 휴가가 필요합니다~!! 온종일 책 휴가 ^^

행복한책읽기 2021-09-23 23:51   좋아요 1 | URL
ㅠㅠㅠ 새파랑님 감격해서 눈물 나요. 맞습니다. 저에겐 온종일 책 휴가 절실해요. 제 진정한 휴가는 책과 떠나기 ^^

mini74 2021-09-23 18: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신청했는데 ㅠㅠ 무슨 이윤지 모르겠지만 ( 아마 비싸다고 아닐까요 가격제한이 있더라고요 )취소 당했어요 ㅠㅠ 넘 예쁩니다 ~~

얄라알라 2021-09-23 23:06   좋아요 2 | URL
제가 신청하는 도서관은 5만원 미만으로 제한을 두었는데
신청한 도서가 취소당하면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행복한책읽기 2021-09-23 23:56   좋아요 1 | URL
아니 세상에. 미니님 정말 속상했겠어요. 가격 제한을 두는 도서관이라니요. 공공 도서관의 본분은 아닌 듯합니다. 저는 이런 경우, 계속 건의를 해대는 좀 피곤한 이용객입니다. 제가 이러는 데는 <쇼생크 탈출>의 쥔공이 그러는 걸 봐서요.^^;;;

2021-09-23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9-23 23:59   좋아요 0 | URL
네. 정말 이 책 보자마자 그런 느낌 딱 들었답니다. 책을 펼치면 더욱 그렇습니다. 플리니우스 시대의 식물, 동물, 사람이 독자를 반겨요. 글은 아직 못 읽었는데, 플리니우스의 문체가 어떤 느낌일까 몹시 설레하고 있습니다. 즐독 응원 감사!!^^

오거서 2021-09-23 20: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2020년 6월 신간 목록을 정리할 때 본 책이 있군요. 즐독하시길!

행복한책읽기 2021-09-24 00:01   좋아요 1 | URL
우와. 오거서님은 신간 목록 정리도 하시는군요. 하긴 오거서 뜻이 다섯 수레 책 맞요? 오거서님은 책수레를 끌고 밀고 타고 다니시는 중인 거죠.^^

2021-09-23 21: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24 0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얄라알라 2021-09-23 23:0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800번대 100번대 골고루 골고루^^ 행복한 책읽기님 손에 가장 먼저 들어온 <박물지>, 즐독하시기를^^

행복한책읽기 2021-09-24 00:06   좋아요 1 | URL
800번대가 압도적 우위. ^^ 저 북사랑님이 추천해준 만화책 딸이랑 넘 잼나게 읽었어요. 딸의 감상을 곧 올려드릴게요.^^

희선 2021-09-23 2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기다리던 책을 만나셨군요 책만 봐도 기분 좋을 듯합니다 읽기도 하면 더 기쁘겠네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9-24 00:07   좋아요 1 | URL
그럼요. 책만 봐도 기분 좋더라구요. 읽어서 더 기뻐지면 좋겠다 바라고 있어요. 희선님 고마워요.^^

얄라알라 2021-09-24 00: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톤 다운된 오렌지빛, 그리고 파인애플 무늬.... 저자가 인생의 참 부모였던 할머니 할아버지께 품은 큰 애정을 생각하면, 책은 반납했어도 눈물은 계속 제가 가지고 가네요^^ 따님이 재밌게 읽으셨다니 저도 아주 기쁩니다요. 행복한 책읽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