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06 #시라는별 55 

몸이라 불리는 장소에 관하여 
미야자키 하야오풍의 질문 
- 김선우 

낡아가는 거라고 생각했지. 늙어보기 전의 일이지. 팔십 년쯤 살아보니 알겠어. 늙을수록 이 장소가 좋아지더라고. 여기는 절벽. 한해 한걸음씩만 허락되는 정직한 장소라네.

열개의 손가락으로 움켜잡은 당신이라는 절벽, ˝뛸까, 우리?˝ 말하곤 하지. 꽃이 지는 느낌으로 아니, 막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느낌으로 나는 대답하곤 해. ˝걸어요, 우리.˝ 하루를 느리게 살아낸 뒤 쓰다듬어줄 수 있는 이 장소가 있어 얼마나 고마운지. 한해 한해 한걸음이
갈수록 소중해지는 때라네. 그래, 충만하지.

알지 않나? 어떤 시간과 장소는 아주 낡은 채 불쑥 다가와 아예 드러눕기도 하거든. 무례하지. 하지만 이 장소는 낡지 않아. 늙을 뿐이지. 고통도 허기도 늘 새롭게 당도한다네. 내가 자네 나이 땐 깊게 패는 주름이나 검버섯 같은 게 무척 신기하더라고. 경험해보지 않은 새것들이니까. 아직도 새로 도착하는 낯선 것들이 여전히 있어. 궁금하지, 늘 궁금해. 이 장소가 말이야.

낡지 않고 늙을 수 있는 장소에 대해 자네는 얼마나 알고 있나? 낡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워지는 곳, 몸이라 불리는 장소에 관하여. 


김선우 시집 『내 따스한 유령들』 을 절반쯤 읽었다. 책을 볼 짬이 나지 않는 9월 첫 주 주말을 보내다 겨우 허락된 두어 시간 평화의 시간을 가졌다. <몸이라 불리는 장소에 관하여>는 늙어가는 몸을 달리 보는 시각 전환을 안내한다.

˝한 해 한 걸음씩만 허락되는 정직한 장소˝, ˝하루를 느리게 살아낸 뒤 쓰다듬어줄 수 있는˝ 장소, ˝낡지 않고 늙을 수 있는 장소˝, ˝낯선 것들이˝ ˝˝늘 새롭게 당도하는˝ 장소, ˝낡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로워지는 곳.˝

늙어가는 몸을 팔십 년쯤 살아본 이 화자처럼 궁금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꽃이 지는 느낌˝이 아닌 ˝막 새로운 꽃이 피어나는 느낌으로˝ 오늘 하루도 느리지만 어떻게든 살아낸 자신의 몸을 쓰다듬으며 수고했다 토닥이고 대견했다 칭찬할 수 있을 것 같다. 내 늙어갈 인생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가기를 바란다. 그러나 . . . . . .

하고많은 시들 중 이 시가 오늘 내 몸으로 쑤욱 들어온 것은 늙어가기보다 낡아가는 내 어미의 몸뚱이를 보고 만지고 온 탓이었다. 어미의 몸이 점점 말라간다. 이주일 사이 어미의 몸은 살점들이 녹아내린 듯 살의 거죽만 뼈에 붙어 있으려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내 어미는 풍채가 좋은 여인이었다. 한창 시절엔 저 멀리서 물동이 이고 오는 모습만으로도 광채가 난다고 동네 어른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 처자였고, 내가 만난 중년의 어미도 신수 훤하고 건장한 여인이었다. 그랬기에 자그마한 나는 늘 고양의 앞의 생쥐 꼴이었는데(물론 엄마의 기억은 다르다), 이제 어미는 작아지고 작아져 자그마한 내가 어미를 내려다보게 생겼고, 약해지고 약해져 내가 힘껏 부축해야 버티고 선다.

양쪽에서 거들어도 자꾸만 주저앉으려 하는 어미를 보면서 늙어가는 몸은 중력의 열기에 녹아내리는 하드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녹아내린 자리에 가느다란 나무 조각만이 남는 하드. 그리 단단했던 살덩이가 어떻게 저리 흐물흐물해질 수 있을까.

내 어미는 팔순을 기점으로 그렇게 악착같이 부여잡고 있던 생의 의지를 조금씩 놓기 시작했다. 이 시의 화자는 ˝팔십 년쯤 살아보니˝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가 좋아지더라고˝ 말하지만, 내 어미는 그 나이 이후로는 이전까지 곧잘 내뱉곤 하던 ˝내가 5년만 젊었어도˝ 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았고 당신 몸을 돌보지 않았다. 나는 많은 자식이 그러하듯 안일했고 소홀했다.

‘피골이 상접한‘이라는 몸을 책 속의 활자가 아닌 실물로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 날과 젊은 날엔 징글징글하게 미워했던 어미였지만, 어쨌든 내 어미여서, 어쨌든 저 몸뚱이로 날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했던 어미여서, 말라서 더욱 아픈 앙상한 다리를
˝열개의 손가락으로 움켜잡는˝ 어미의 앙상한 두 손이 자꾸만 어른거려 시를 읽다 몇 번이나 눈시울이 불거졌다.

늙고 병들어가는 어미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비도 내리지 않은 맑은 가을 하늘에 무지개가 떠 있었다. 가족 구성원 모두 탄성을 질렀고, 딸은 핸드폰을 챙기지 못한 엄마를 대신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나는 저런 아름다운 풍경을 앞에 놓고 엄마와 행복에 젖어본 적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혼자 목이 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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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9-06 06:2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와 “한 해 한 걸음씩만 허락되는 정직한 장소” 표현 너무 좋네요. 행복님 힘든 시기를 겪고 계시군요.. 글을 읽으며 저도 덩달아 목이 메입니다. 잘 견뎌내시길 빕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1:33   좋아요 4 | URL
괭님. 고마워요. 올것이 오려는 건가? 이런 맘이 들고 있지만 힘들지는 않아요. 다만 이 나이에도 고아 되는 건 두려운 거 있죠.^^;;;

막시무스 2021-09-06 07:3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저도 격을 시간이 얼마남지 않아 마음이 너무 무겁네요!ㅠ 어머니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손 많이 잡아드리세요! 행복한 한주되시구요!ㅎ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1:35   좋아요 3 | URL
손 많이 잡아드리고 싶은데. 집에 모시지를 못해서. ㅠㅠ 막시무스님도 비슷하신거예요? 그럼 같이 손 잡아 드려요.

얄라알라 2021-09-06 08:2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확 들어와 사진 먼저 보고, 글을 나중에 읽었는데 풍경을 같이 보는 따님과 어머님의 모습을 상상하며 저 역시 목구멍이 뜨끈해집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1:37   좋아요 3 | URL
풍경이 넘 예뻐서 더 저릿했던가봐요. 같이 뜨끈해주셔 고마워요 북사랑님^^

페넬로페 2021-09-06 08:4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한 해 한걸음씩만 허락되는 정직한 장소
라는 문장이 왜이리 먹먹하고 씁쓸한지요~~행복한책읽기님의 어머님과 함께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건강하고 편안하연 좋겠습니다.
하늘 속 무지개처럼 우리 인생의 모든것이 일회적이지 않고 늘 행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1:48   좋아요 2 | URL
그죠. 저 시구, 정직한 말이어서 씁쓸하죠. 늙어가는 건 순리라, 그저 받아들이고 있어요. 저는 할머니 엄마를 볼 수 있는 것도 복이라 여긴답니다. 이만큼 나이 든 모습으로 제 곁에 있어 주셔 감사해요. 저에겐 엄마가 그 어떤 책보다 귀한 숨쉬는 책이셨거든요^^

2021-09-06 0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07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파랑 2021-09-06 09:1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이네요 ㅜㅜ 잘 보살펴 드리길 바랍니다. 시처럼 거꾸로 생각해보면 낡아가는게 어저면 새로워지는 거라고 할 수 있을거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1:43   좋아요 2 | URL
그렇습니다. 우린 늙음을 저런 시선으로 바라보며 살아요. 물론 어렵겠지만^^;;

2021-09-06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07 11: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9-06 12:2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이잉~ 마지막에 울컥..ㅠㅠ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2:00   좋아요 3 | URL
죄송해요. 플친들 울리려던 게 아닌데^^;;

초딩 2021-09-06 23:5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 사진이 모두 너무 몽환적이고 예뻐요!

초딩 2021-09-06 23:53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ㅜㅜ 어머니랑 오래 살다가 어머니가 내려가 계신데
너무 보고 샆은데 오랜만에 보면 도 늙으셨을까봐 슬프고 그래요.
코로나 때문에 왕래가 요즘 뜸해서 .. 그래도 보고 싶고 ㅜㅜ

행복한책읽기 2021-09-07 12:06   좋아요 3 | URL
초딩님 어머님과 오래 함께 사셨군요. 저도 엄마랑 삼십해 넘게 살다 독립했더랬어요. 코로나로 저도 요양원 계신 엄니를 자주 못뵜어요. 지금은 건강이 안 좋아지셔서 ㅡㅡ 보고 싶으실 때 달려가세요. 저는 늙어가는 부모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작은 복 중 하나라 생각해요. 우리의 거울이잖아요.^^

희선 2021-09-08 02: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머님 만나고 돌아가는 길이 마음 아팠겠습니다 그 길에 해무리를 만나셨군요 그게 조금 마음을 낫게 해주었기를 바랍니다 좋은 걸 함께 보는 것도 기쁜 일이죠 어머님하고 못한 거 따님하고는 많이 하세요


희선
 

20210902 #시라는별 54 

작은 신이 되는 날 
- 김선우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내가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당신을 향해 
사랑한다
말할 수 있어 
말할 수 없이 찬란한 날 

먼지 한점인 내가 
먼지 한점인 당신을 위해 
기꺼이 텅 비는 순간 

한점 우주의 안쪽으로부터 
바람이 일어 
바깥이 탄생하는 순간의 기적 

한 티끌이 손잡아 일으킨 
한 티끌을 향해 
살아줘서 고맙다 
숨결 불어넣는 풍경을 보게 되어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날 


9월의 첫 시집은 김선우의 최신작 『내 따스한 유령들』 을 집어들었다. 2012년 시집 『나의 무한한 혁명에게』 에서 

​지금 마주본 우리가 서로의 신입니다 
나의 혁명은 지금 여기서 이렇게

라고 말했던 시인은 이 시집에서 그 생각을 더 넓고 더 깊게 파고 들어간다. 우리 모두는 ˝우주먼지로 만들어진˝ ˝티끌˝처럼 작은 존재지만, 한 티끌이 스러지려는 또 한 티끌을 일으켜 주려 손을 내미는 것, 그런 것이 혁명이고 아름다움이라고 시인은 읊조린다. 나는 김선우 시인의 이런 시선이 참 좋다. 이 시인에게선 언제나 사람 내음이 풀풀 난다. 우리가 우리 속의 비루함들을 조금이나마 털어낼 길, 그 길을 시인은 ‘연대‘로 본다.

인간이 만든 세상의 참혹함

그럼에도 존재하는
어떤 아름다움들

​고통에 연대하는 간곡한 마음들.

작고 여리고 홀연한 그 아름다움들에 기대어
오늘이 탄생하고 내일이 기다려집니다.

고맙습니다. 세상의 무수한 스승들이여. (<시인의 말> 중)

김선우 시인이 지난 1년간 많이 아팠던가 보다. 자신의 건강을 염려해준 독자들에게 응답을 하는 마음으로 이 시집을 엮었다고 한다. 그에게 시인의 책무란 ˝시로 눈물과 기쁨과 위로와 아름다움이 되는 자리를 돌보는 일˝이기에.

김선우 시인을 누나라고 부르는 박준 시인의 추천사는 부러운 정겨움을 담뿍 담고 있다.  

<『내 따스한 유령들』 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사실 나는 시인의 시를 이야기할 수 없다. 다만 언제나 그랬듯 읽을 뿐이다. ‘너 무슨 일 있지‘ 하고 안부를 물어주는 시. ‘나도 무슨 일 있어 그런데 이제 괜찮아‘ 하고 말해 오는 마음. 그리고 이 끝에서 들려오는 깔깔.>

깔깔. 웃음소리가 가장 아름다운 사람. 김선우. 아침저녁 날은 스산해졌지만 이 시집으로 마음은 더욱 따스해질 듯하다.

더불어, 글로만 마주하는 당신들, 그대들도 나의 신이자 스승이자 내 따스한 유령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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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02 10: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1등!💓ㅅ💓

행복한책읽기 2021-09-02 15:23   좋아요 4 | URL
감솨~~~^^

scott 2021-09-02 16:47   좋아요 3 | URL
행복한 책읽기님이 북플에서 시를 읽어주시는 날에는
그 시를 읽은 저는 하루 죙일 올려주신 시 구절을 마음에 품고 있습니다

비록 전 북플에서 티끌 같은 존재 이지만
저에게 행복한 책읽기님의 시와 사진이 담긴 포스팅은
우주 만큼 깊고 생태계의 생물 처럼 모르는 시와 시어들을 배우며
티끌에서 솜뭉치로 조금씩, 배워갑니다 ^ㅅ^

행복한책읽기 2021-09-02 22:08   좋아요 2 | URL
무슨 말씀. scott님은 북플계 독보적 거목이에요. 저야말로 scott님에게서 넘 많은걸 배우는걸요. 그렇다면 플친들은 상부상조하는 사이로군요. 제겐 여기가 참 새로운 세계입니다. ^^

초딩 2021-09-03 00:30   좋아요 1 | URL
정녕 올 1등입니다 ㅎㅎ

미미 2021-09-02 10:3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따뜻한 시집들을 찾아내는 책읽기님이야 말로 인간미 풀풀 글에서도 정겨움 줄줄~^^*♡

행복한책읽기 2021-09-02 15:25   좋아요 4 | URL
어. 제 인간미가 북플 바람 타고 미미님 계신 곳까지 날아간 겁니까. 아싸. 시 내음을 만방에 퍼뜨리겠습니다.^^

새파랑 2021-09-02 12:2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행복한책읽기님은 큰 신 입니다 😆 작은 신이 되는 날 너무 좋네요. 시가 아름다워요~!!

행복한책읽기 2021-09-02 15:27   좋아요 4 | URL
와우. 새파랑님 덕에 이 작은 사람 졸지에 큰 신으로 승격했네요. 9월 경사입니다. 감사해요^^

라로 2021-09-02 12:45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우주의 먼지에서 시작한 제가 이제는 우주의 덩어리,,ㅎㅎㅎㅎㅎㅎㅎ
암튼 시 좋고요, 늘 시를 소개해 주시는 책님도 좋고요 제가 좋아하는 책이 두 권이나 보여서 좋아요.^^(코스모스와 티끌같은 나)

행복한책읽기 2021-09-02 15:29   좋아요 4 | URL
코스모스를 읽은 덕에 이 시가 더 와 닿았어요. <티끌 같은 나>는 아직 안 읽었으나, 라로님이 이 책 읽고 느무느무 좋았다고 올린 글이 생각 나, 이 시랑 넘 어울려 같이 올렸답니다. 북플의 파워!! 라로님은 우주의 덩어리!! ^^

초딩 2021-09-03 0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래서 그 티끌이 되어도 서로 느끼고 알기를 바랍니다 :-) 너무 좋네요

행복한책읽기 2021-09-03 00:41   좋아요 3 | URL
그죠. 이곳은 티끌들이 북적대며 끌어주고 당겨주고 밀어주는 곳^^

희선 2021-09-03 01: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시집 나온 걸 보고 행복한책읽기 님이 보시지 않을까 하는 생각했는데, 구월에 보시는군요 저는 그냥 스치듯 봐서 내 따스한 유령들이 뭔가 했습니다 좋은 뜻이군요 사람은 우주 먼지 같죠 그걸 잊지 않아야 할 텐데 그러지 못하네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9-06 18:15   좋아요 2 | URL
네. 김선우 시인 좋아요. 이번 시집은 오랜만이어서 더 반갑답니다^^

han22598 2021-09-05 13: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티끌같은 존재이지만,..티끌이기만 하지 않은 존재.
심져 때로는 위대한 티끌이 되게 만들어 주는 티끌들.
아. 김선우 작가님...시 너무 좋네요. 행복한님 덕분에 알게 되어서 장바구님에 담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9-06 18:17   좋아요 1 | URL
ㅎㅎㅎ 한님도 시의 마력에 빠지실듯^^

얄라알라 2021-09-05 23: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따뜻한 유령이 기꺼이 되겠습니다^^ 따뜻한 글 기분 좋게 읽고 갑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9-06 18:17   좋아요 1 | URL
이미 유령이십니다. 신기하죠. 글에도 온기가 있다는 것이^^
 

20210819 #시라는별 51 

악의 평범성 2
- 이산하 

˝불교 승려들이 숲을 지날 때 혹 밟을지도 모르는 풀벌레들에게 
미리 피할 기회를 주기 위해 방울을 달고 천천히 걷는다는 말에 
난 아주 깊은 감동을 받았다. 
우리는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얼마나 많은 생물들을 밟아 버렸던가.˝ 

득음의 경지에 이른 어느 고승이나 성자의 얘기가 아니다. 
유대인 학살을 총지휘한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히믈러의 말이다. 
전 친위대원을 술과 담배를 하지 않는 채식주의자로 만들고 
가난하고 소박한 생을 최고의 삶으로 꿈꾼 사람이기도 했다. 
악의 비범성이 없는 것이 악의 평범성이다. 
우리의 혀는 여기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 

악의 평범성 3

몇 년 전 경주와 포항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그때 포항의 한 마트에서 정규직은 모두 퇴근하고 
비정규직 직원들만 남아 헝클어진 매장을 수습했다. 
밤늦게까지 여진의 공포 속에 떨었다. 
대부분 아르바이트 학생들과 아기 엄마들이었다. 
목숨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차별받는 세상이다. 
지진은 무너진 건물의 속살과 잔해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간의 부서진 양심과 잔인한 본성까지도 보여준다. 
정말 인간은 언제 인간이 되는가. 
불쑥 영화 <생활의 발견>에 나오는 대사가 떠오른다. 
˝우리 사람 되는 거 힘들어. 
힘들지만 우리 괴물은 되지 말고 살자.˝ 


놀라운 발견. 이산하 시인이 22년 만에 펴낸 시집  『악의 평범성』은 자우메 카브레의  『나는 고백한다』 를 시로 읽는 느낌이다. 아우슈비츠와 제주 4.3 사건과 오늘날의 평범한 악이 교차 편집되어 있다.

이산하와 동지들은 제주 4.3사건을 ˝가스실 없는 한국판 아우슈비츠˝로 불렀다. 이산하의 <한라산>이 당대 정권에 던지는 ‘폭탄‘이 된 것은 아우슈비츠가 여전히 현재형이었기 때문이다. <한라산>의 문제의식을 현재화한 이산하의『악의 평범성』은 아우슈비츠의 역사적 사례들을 시적으로 재구성한다. 주된 방식은 나열과 병치이다. (김수이 문학평론가 해설 중)

시들이 우리가 몰랐던, 혹은 모르고 싶었던 숨은 본성을 일깨운다. 인간은 상황만 달라지면, 누구나 악해질 수 있다. 그렇기에 반성과 고찰이 중요하다. 이산하 시인의 시들은 읽기가 쉽지 않다. 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찌릿찌릿 가슴을 찔러서이다. 시로 읽는 역사이고, 외면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들이다.

놀라운 발견 2. 어제 scott님이 올린 알마 로제의 오케스트라 이야기를 극화한 시도 있다. 제목은 <아우슈비츠 오케스트라>

시인의 말도 서늘하다. 

자기를 처형하라는 글이 쓰인 것도 모른 채 
봉인된 밀서를 전하러 가는 ‘다윗의 편지‘처럼 
시를 쓴다는 것도 시의 빈소에 
꽃 하나 바치며 조문하는 것과 같은 건지도 모른다. 
22년 만에 그 조화들을 모아 불태운다. 
내 영혼의 잿더미 위에 단테의 <신곡> 중 이런 구절이 새겨진다.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 

이산하 시인은 『악의 평범성』으로 ‘제18회 이육사詩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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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8-19 07:14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악의 평범성 글 보니 무섭네요. 가장 무서운게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05   좋아요 2 | URL
ㅠㅠ 맞아요. 사람은 진짜 무섭워요. 근데 또 아름다운 것이 사람이어서. 그런 두 바퀴로 사람 세상이 굴러가나 보다 생각하게 돼요.^^

페넬로페 2021-08-19 09:2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시인이 단테의 신곡 구절을 인용할 정도로 이 시집을 읽으면 마음이 암울할 것 같지만 외면하지 말고 꼭 읽어봐야 할 책인것 같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10   좋아요 3 | URL
네에. 적극 추천하고 싶지만 조심스럽기도 해요. 인간의 어두운 면을 들여다보는 건 유쾌하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럼에도페넬로페님이 꼭 읽어보시겠다 하니 든든해요.^^

mini74 2021-08-19 19: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가스실없는 한국판 아우수비츠 ㅠㅠ 전 현기영작가님 통해 처음 알게 됐어요.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던 시대도 있었지요 ㅠㅠ 참 맘이 아파요 ㅠ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12   좋아요 2 | URL
맞아요. 입밖에 낼 수조차 없던 시대도 있었잖아요. 여기까지 오는 데 많은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려구요.

scott 2021-08-19 20:03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목숨도 정규직
비규정직 ㅠ.ㅠ

아우슈비츠 오페라
저만 ㅋㅋ 알고 있었던게 아니였네요
알마 로제 시인은 어떤 시어로 남겼는지
행복한 책읽기님에게 땡!🤞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15   좋아요 2 | URL
올해 scott님께 배우는 게 참 많습니다. 님 페이퍼 아니었으면 레비나 이산하 시집이 이만큼 읽히지 않았을 거예요. 앎과 느낌도 서로를 증폭시킵니다. 늘 감솨!!!^^

붕붕툐툐 2021-08-20 00:4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흐음~ 꼭 읽어봐야할 시집이네요. 4.3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아직도 많이 아픈 역사죠... 「나는 고백한다」와의 연관성도 너무 궁금하고요!!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17   좋아요 2 | URL
네. 툐툐님껜 적극 추천이요. 읽어주세요. 샘이시잖아요.^^

희선 2021-08-20 02:3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시집 나온 것만 보고 별로 관심 갖지 않았군요 가끔 어떤 시집이 나왔는지 보기도 해요 정규직과 비정규직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싶네요 다 같이 해야 할 텐데, 그것보다 그날은 모두 돌아가라고 해야지...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19   좋아요 2 | URL
그죠. 재난에도 취약한 것이 취약계층 ㅠㅠ 저 글 읽으면서 넘 속상하더라구요. 직위 높은 사람들이 더 책임을 져야하는 일인 것을.ㅡㅡ

얄라알라 2021-08-20 03:1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행복한책읽기님 시선으로 세상보기!
포항경주지역 지진 이후, 아직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하신 분들의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 당시 수습인력에 누가 남아 동원되었는지는 궁금해본적도 없었어요. 시를 통해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요 행복읽기님^^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22   좋아요 3 | URL
저도 궁금해본 적도 없었어요. 그래서 또 부끄럽더라구요. 그래서 또 시인에게 고맙더라구요. 북사랑님 말처럼 말해지지 않아,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를 꺼내 주어서 말이죠. 지두 북사랑님께 감솨!!^^

han22598 2021-08-20 05:5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사람 목숨 값도 차이가 있는 세상 ㅠㅠ 슬퍼요. 사람 되기는 언감생심. 괴물이 되지 말아야지 ㅠㅠ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24   좋아요 2 | URL
목숨에 값을 매기지 않는 세상을, 우리 같이 꿈꾸어요 한님^^

라로 2021-08-20 09: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책님! 저 <시녀 이야기> 다 읽고 <증언들>이틀 전에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지금 안 읽으면 올해는 못 읽을 것 같아서요. 다른 책 다 던지시고 얼릉 <증언들>집어 드시와요. (죄송해요. 제 세끼줄에따라 막무가내로 떼쓰는;;;) 엄청 재밌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8-22 14:26   좋아요 2 | URL
헐. 라로님 내쳐 <증언들> 집어들었다니. 아으. 우짜든가 짬을 내 달려보도록, 아니 거북이 걸음이라도 걷도록 해볼게요. 더 재밌단 말이죠. 아. 벌써 다 읽으셨을 수도 ㅡㅡ
 

20210816 #시라는별 50 

인생연감 
- 프리모 레비 

무심한 강물은 하염없이 돌지만 결국은 바다로 흘러가고 
거대한 빙하는 표류하면서도 끊임없이 정착을 하려다가 
한순간에 미끄러져 어린 생명의 숲들을 지우기도 한다. 
바다는 풍요로울수록 더욱 탐욕을 내며 싸우고 
태양과 별과 행성들은 언제나처럼 자기궤도를 유지하며 
지구별 역시 정교한 우주의 이치대로 돌고 돈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아니다. 
반란의 씨앗에다 지능까지 높다는 그 멍청한 인간들은 
항상 불안하고 탐욕스런 나머지 마구 짓밟고 파괴해왔다. 
조만간 울창한 아마존 숲과 삶이 꿈틀거리는 이 세상 
그리고 마지막엔 따뜻한 인간들의 가슴까지 
모조리 황폐한 사막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 이 시는 1987년 4월 11일, 프리모 레비가 자살 직전에 쓴 마지막 작품이다. 따로 남긴 유서가 없으므로 이 시가 결국 유서가 된 셈이다. 강물과 빙하는 디아스포라를 연상시키며, 자연과 우주는 특별한 사태 없이 질서정연하게 움직이는데, 유독 인간만은 다르다. 68세에 그는 결국 인간에 대한 희망의 단서를 찾지 못하고 완전히 절망한 것처럼 보인다.(이산하)

이산하 시인이 편역한 시집 『살아남은 자의 아픔』 은 가슴을 쿡쿡 찌르거나 저릿하게 만드는 아픔이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들여다보게 된다. 이산하 시인이 쓴 편역자 해설은 프리모 레비의 68년 인생을 수용소 경험을 중심으로 영화처럼 그려 보여 읽고 또 읽게 된다. 문장은 간결하고 내용은 풍성하다.

프리모 레비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지낸 기간은 1년 10개월이었다. 스물넷에 체포되어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스물다섯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 후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살아 있는 43년 동안 그가 한 일은 수용소에서 겪은, 믿고 싶지 않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그 참혹한 일들을 기록으로 증언하는 것이었다. 회고록도 쓰고 소설도 쓰고 시도 썼다. 이산하 시인의 말처럼 ˝추억이 고통이고 기억이 고문˝인 사람이 상처
투성이인 그 기억들을 일일이 끄집어내 어떻게 쓰고 또 쓸 수 있었는지, 생각만으로도 아프고 또 아프다.

나는 전태일 평전을 읽기 전까진 ‘자살‘에 비판적인 사람이었다. 그러나 청년 전태일이 그 앞길 창창한 삶을 내려놓겠다 결심하기까지 있었던 숱한 사건들을 읽으면서 나는 누군가의 죽음에 대해 함부로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을 처음 깨달았다. 저리 살아보지 않고서, 저리 처절해보지 않고서, 감히 무슨 말을 할 수 없는 선택이라는 것을. 프리모 레비의 죽음 또한 그렇게 받아들여진다. 레비의 자살을 이산하 시인은 이렇게 해석한다.

˝1987년 4월 11일, 프리모 레비는 투신자살을 했다. 그는 죽음으로써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다시 들어간 것이다. 지난번에 타의였고 이번엔 자의였다. 인간의 본질에 대한 회의를 끝내 떨치지 못한 그의 마지막 항변에 나는 거듭 동의하면서도 거듭 절망한다.˝

이산하 시인은 프리모 레비의 작품들이 ˝잎이 무성한 여름나무보다는 간명한 겨울나무˝ 같다고 했다. 나는 막바지로 접어드는 여름의 찬란한 빛과 뜨거운 열기가 스며든 숲에서 ˝간명한 겨울나무˝로 추운 계절을 버틴 뒤 살아남을 여름나무의 무성함을 오감으로 즐겼다. 이 또한 인생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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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8-16 01: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요즘 전 아우슈비츠에서 희생당한 여성들의 삶 읽으며 레비의 작품 항상 곁에 두고 수시로 펼쳐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끝까지 갔던 이들 지옥에서 살아 돌아와도 고통속에 살아 간다고 ㅠ.ㅠ 인간들은 이제 마스크 없는 세상 꿈꾸지 못하고 있는데 행복한 책읽기님이 포착하신 하늘은 세상에서 가장 투명하게 빛나는 블루, 분명 행복한 책읽기님 눈은 자연을 포착하는 [眼]

행복한책읽기 2021-08-16 14:41   좋아요 3 | URL
scott님의 독서 지평은 역시 넓군요. 그 여성들의 삶을 언제고 페이퍼에 담아주시겠죠. 마스크 없는 삶. ㅠㅠ 그 삶이 이렇게나 요원해질 줄 몰랐네요. 증말 속상합니다. 백신 맞으신 scott님 무리 마시고 쉬엄쉬엄 하세요. ^^

새파랑 2021-08-16 08:0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일주일만에 보는 책읽기 님의 시네요 😄 그에게 있어서 수용소의 기억은 평생 고통이었을 거라 생각이 드네요.

저도 자살에 대해서 예전에는 왜 그렇게 하지? 생각했는데 요즘에는 얼마나 괴롭고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행복한책읽기 2021-08-16 14:45   좋아요 3 | URL
애들 방중이라 이래저래 뺏기는 시간이 많네요. 주에 두 번은 시 포스팅을 하려건만. 더 노오력!!!^^;;;

mini74 2021-08-16 20: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기록하고 증언하기 위해 아물지 않은 상처를 갖고 살아내는 느낌을 받았어요. (추억이 고통이고 기억이 고문인 사람. )이란 문구가 참 슬프네요 ㅠㅠ

행복한책읽기 2021-08-17 09: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죠. 사람에게 그런 고통과 고문을 주는 것도 인간이라, 정말 인간이 무엇인가를 자꾸 묻게 돼요. ㅡㅡ

희선 2021-08-19 0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지금도 사람은 불안하고 탐욕스럽고 마구 짓밟지 않나 싶네요 그게 사람인가 싶기도 하고... 여러 가지 안 좋은 게 많기는 해도 사람을 믿고 싶기도 하네요 프리모 레비는 아주 힘들어서 그게 어려웠겠습니다


희선
 

20210809 시라는별 49

플리니우스의 유언
- 프리모 레비

벗들이여
저 불안과 공포에 떠는 폼페이 시민들이 보이지 않느냐.
그러니 더 이상 나를 잡지 말고 떠나도록 내버려두게.
난 베수비오산 화산폭발로 폼페이 전체를 뒤덮은
저 구름 같은 검은 재의 신비한 원인을 찾기 위해
단지 좀 더 가까운 건너편 해변으로 갈 뿐이라네.

어린 조카여
나와 함께 가고 싶지 않느냐?
그렇지 않으면 여기 남아서 책을 읽어라.
어제 내가 준 문장들도 다시 곰곰이 음미하여라.
넌 저 숨 막히게 쌓여가는 잿더미까지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느니라.
우리 인간은 이미 걸어다니는 한줌 재가 아니더냐.
그리고
신들은 인간과 세상을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으니,
너무 신을 믿지 말라고 한 인간평등주의 철학자인
그리스의 에피쿠로스를 항상 기억하여라.
자, 모두 서둘러 어서 배를 준비하여라.
아직도 캄캄한 밤이지 않느냐.
여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대낮 속의 밤이니라.

내 유일한 가족인 누이여
난 뜨거운 진실의 불씨를 지펴야하는 대 로마의
문인이며 역사학자이자 또한 과학자가 아니더냐.
그러니 나를 위해 너무 슬퍼하거나 애태우지 말거라.
내가 살아온 수많은 세월이 헛되지 않았듯
저 장엄하고도 비장한 모습을 자세히 관찰하며
또한 후세를 위해서라도 난 마땅히 돌아올 것이니라.
그러나
만약 저 유황가스에 질식해 돌아오지 못한다면
넌 내 족적들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책을 남겨다오.
자ㅡ 이제 선원들은 일제히 내 말을 따르라!
어서 돛을 올리고 저 거친 바다로 배를 저어가자!


프리모 레비의  『살아남은 자의 아픔』에 실린 시들에 편역자 이산하 시인이 단 주석은 정말이지 군더더기가 없는 깔끔한 글이다. 독자인 내게 무슨 말을 더 보태고 싶지 않게 만든다. 정보와 상상과 해석을 적절히 배합해 독자의 입맛을 한층 끌어올려 놓는다. 씹을수록 달되, 뒷맛은 언제나 쓰다. 삶의 씁쓰레함 탓일 게다.

* 라틴어사전에 ‘화산‘이란 단어가 없을 만큼 네로황제 당시의 로마는 화산에 대해 무지했다. 폼페이 최후의 날, 시민들이 불안과 공포에서 벗어나도록 화산폭발의 원인을 찾아 위험한 불길 속으로 온몸을 던졌던 플리니우스(AD23~79)는 결국 돌아오지 못했다. 그와 함께 갔던 일행들은 모두 도망쳤고, 그 혼자만 화염과 유황가스에 질식해 숨진 것이다.
이 시는 그래서 그의 유언이 되고 말았다. 진실은 어디에나 있고, 또 어디에서나 진실이 되어야 한다. 그것을 밝히려다가 이처럼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세계 역사에 얼마나 많겠는가. 모두 뒤로 가거나 제자리에 멈춰 있을 때 홀로 앞으로 가는 자, 그를 우리는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우리가 흔히 위선이나 참회의 비유로 쓰는 ‘악어의 눈물‘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인 ‘오델로‘가 아니라 고대세계의 과학백과사전이라 불리는 플리니우스의 방대한 저서 『박물지』​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가 사람을 집어삼키며 눈물을 흘리는 나일강의 악어를 본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얼굴신경 마비후유증의 하나로 ‘악어눈물 증후군‘이란 의학용어도 있듯 악어는 턱뼈신경과 눈물샘 신경이 거의 같은데다 잉여염분 배출의 필요성 때문에 큰 먹이를 삼킬 때마다 눈물을 흘린다. 말하자면 악어의 눈물은 짠 소금물일 뿐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플리니우스가 다른 동물들을 마다하고 굳이 악어에 비유한 것은 수면 아래에 매복하다가 전광석화같이 공격해 집어삼킨 다음 눈물 같은 노폐물을 배설하는, 그런 잔인한 악어의 습성을 닮은 비열하고 위선적인 정치모리배들을 경멸하고 조롱하기 위함일 것이다.


이 글을 읽고 궁금하여 플리니우스의  『박물지』를 검색해 보았다.  『박물지』​는  총 37권으로 되어 있고 1077년에 완성되었다. 로마시대 최대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이 책에는 천문학, 수학, 지리학, 민족학, 인류학, 생리학, 동물학, 식물학, 농업, 원예학, 약학, 광물학, 조각작품, 예술 및 보석 등과 관련된 약 2만 개의 항목이 상세하게 수록돼 있다고 한다. 플리니우스는 단순히 문헌 참조에 그치지 않고 로마 총독을 지내는 동안 여러 곳을 다니면서 관찰한 자연과 풍속에 근거하여 각 항목을 상세하게 기술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 그는 책상머리 학자가 아닌 발로 뛰는 학자였던 것이다.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불리는 이 중요한 문헌이 지난 7월 드디어 한국어 편역본이 출간되었다. 지르고 싶었으나 책값이 비싸 일단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 두었다. 완전 기대된다. 후세를 위해서라도 돌아오겠다던 플리니우스는 방대한 저술로 그 약속을 지켰다.

야마자키 마리와 토리 미키 두 일본 만화가의 합작으로 완성한 역사 전기 만화  『플리니우스』가 있다. 5년 전 출간되었는데 벌써 절판이다. 지역 도서관에도 없다. 너무 아쉽다. 꺼이~~~~

여름숲은 박물의 보고(寶庫). 동안에 찍은 여름산. 오늘 만난 대벌레 사진 방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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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08-09 00:4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최초의 백과사전. 너무 궁금한데요. 가격이 ㅠㅠ 저도 살쩍 희망도서에 한 번 올려봐랴겠어요. ㅎ. 행복한책읽기님도 좋은 꿈 꾸세요 *^^*

행복한책읽기 2021-08-09 00:52   좋아요 6 | URL
네. 신청하세요. 저 박물지는 도서관 필수소장도서라 여겨집니다. 미니님도 굿밤~~~^^

붕붕툐툐 2021-08-09 00:57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우와~ 행복한 책읽기님 덕분에 시도 읽고, 좋은 책 정보도 읽고, 여름산의 다양한 사진도 보고~ 종합선물 세뚜네용~
시 번역에 대해 깊이 있게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시는 시라서 잘해내기가 훨씬 어려울 거 같아요~ 새삼 번역가의 위대함을 느낍니다~👍
「플리니우스」 저도 검색해 봐야겠어용~ 「박물지」도 신청하고요!(따라쟁이 툐붕이~)

행복한책읽기 2021-08-09 01:01   좋아요 6 | URL
ㅎㅎ 이런 따라쟁이가 서재의 힘이겠죠. 박물지 뒤늦게나마 편역본이라도 출간돼 넘 다행. 전국 도서관에 다 배치해 봅시당!!!^^

새파랑 2021-08-09 08: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시도 좋고 사진도 청명하고~!!
시 너무 반갑네요 좀 어렵긴 하지만 😆

행복한책읽기 2021-08-10 00:22   좋아요 3 | URL
어려워요?? 저보다 어려운 소설들 척척 읽으시는 열독자께서. 반가워해주실 줄 알았으나, 반갑다 말 들으니 넘 좋네요. 감솨!!^^

미미 2021-08-09 12: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끝에서 두번째 사진도 대벌레인가요??😳 아무리봐도 나뭇가지로 보여요!ㅎㅎㅎ
프리모 레비~♡♡ 시라는 별♡♡

행복한책읽기 2021-08-10 00:24   좋아요 3 | URL
그죠. 애들이랑 저도 나뭇가진줄로만 보다 움직여서 얼마나 놀랐는줄 몰라요. 요맘때가 대벌레 세상이래요. 미미님도 산책하다 눈 크게뜨고 찾아보세요. 무지 많아요^^

scott 2021-08-09 14:5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행복한 책읽기님의 [시라는 별] 포스팅 기다렸습니다!!

7월의 열탕을 견딘 저 나무들의 푸른빛깔!!
자연의 위대한 생명력이 느껴집니다

실제로 베수비오에서 요즘도 조금씩 분출되고 있는 화산재! 때문에 대기질이 안좋다고 하네요

박물지 클릭 해보니 겉표지와 뒷표지만 미리보기 서비스로 보여주네여 ㅎㅎㅎ
플리니우스 만화 찜!!👆👆👆

행복한책읽기 2021-08-10 00:26   좋아요 2 | URL
scott님 기다려주실 줄 예상!!^^ 참 기분 좋습니다. 이런 환영사. 시로 플리니우스를 새롭게 알게 될 줄 몰랐네요. 이분 인생사가 궁금해졌어요. 레비 덕에요.^^

희선 2021-08-09 23: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플리니우스 어디선가 이름을 들어봤는데, 제가 예전에 읽은 책에 나왔군요 편지 이야기가 담긴 《투 더 레터》에 ‘플리니우스의 편지’라는 꼭지가 있습니다 그 글은 잊어버렸지만, 화산 이야기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박물지를 썼다는 건 예전에 스치듯 봤던 것 같습니다 그 책이 이번에 처음 한국말로 나온 거군요 일본에서 나온 만화책 <플리니우스>는 찾아보니 2021년 7월에 11권이 나왔네요 그 책 아직 안 끝났습니다 5권까지만 한국말로 옮기고 아예 안 나오게 하다니... 잘 안 팔려서 그랬을까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8-10 00:29   좋아요 1 | URL
머라구요?? 11권!!! 시상에 그럼 완간이 아닌 책을 번역하다 말았다는?? ㅠㅠㅠ 진정 안 팔려서 그럴까요? ㅠㅠㅠ 일본어판 지도 찾아봐야겠어요. 까막눈이지만. 희선님 정보 감사해요~~^^

얄라알라 2021-08-10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야! 소개해주신 시가 시공을 왔다리갔다리 하게 하다가, 마지막 대벌레 사진보고 2021년 하늘 맑은 8월의 현실로 돌아왔습니다! 멋진 리뷰, 이달의 당선작 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