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608 

작년 11월부터 시작한 매일 인증 일곱 번째 책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이다. 51일간 읽을 예정이다. 

서문을 읽던 중 이 구절에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아가 분열된 한 인간이 여기에 있다. 하나의 육체를 놓고 두 마음이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이란 원래 이 같은 상황을 뜻하는 말이다. 이 두 마음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관을 갖고 있다." (15)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는 아홉 살 때 아이큐가 170이었다고 한다. 천재형 인간들이 대개 그렇듯, 피어시그도 순탄치 않은 삶을 살다 서른두 살 때 심각한 우울증을 앓기 시작했다. 정신분열 진단을 받고 2년간 정신병원을 들락날락거리며 전기충격요법 치료까지 받았다. 


몇 년 후 우울증에서 회복된 피어시그는 마흔 살의 나이에 아들 크리스와 함께 모터사이클 여행을 떠난다. 여행의 경로는 미니애폴리스에서 샌프란시스코이다. 그 결과물이 이 책이다. 


출간 이후 이 책은 비평적 찬사와 상업적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고 한다. 프랑스 태생의 비평가 조지 스타이너는 피어시그의 작품을 도스도예프스키, 헤르만 브로치, 마르셀 프루스트, 베르그송과 비교하며 "이 책의 주장은 유효하며, 모비딕과 유사하다"라고 말했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사물을 바라보는 느낌에 대한 피어시그의 통찰은 내가 산행을 할 때 경험하는 느낌과 거의 정확히 일치한다. 그 촉감. 피부로 전해지는 그 전율. 이 책을 여행하는 동안 그런 느낌을 종종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모터사이클을 타고 휴가를 가다 보면 전혀 다른 각도에서 사물들을 바라볼 수 있다. 차를 타고 가면 항상 어딘가에 갇혀 있는 꼴이 되며, 이에 익숙해지다 보면 차창을 통해서 보는 모든 사물이 그저 텔레비전의 화면을 통해 보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일종의 수동적인 관찰자가 되어, 모든 것이 화면 단위로 지루하게 지나가는 것을 바라보게 될 뿐이다. - P25

모터사이클을 타고 가다 보면 그 화면의 틀이 사라지고, 모든 사물과 있는 그대로 완벽한 접촉이 이루어진다. 경치를 바라보는 수동적인 상태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완전히 경치 속에 함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때의 현장감은 사람들을 압도하게 마련이다. 발아래 12~13센티미터 지점의 윙윙거리는 콘크리트 바닥은 발을 딛고 걸을 수 있는 실재하는 그 무엇, 실제로 바로 발밑에 있는 그 무엇으로 살아난다. 달리는 중이기 때문에 정확히 초점을 맞추어 바라볼 수는 없더라도 어느 때건 발을 내딛고 그 촉감을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으로 살아난다. 말하자면, 모든 사물과 모든 체험은 즉각적인 의식과 결코 격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로 존재한다. - P25

여행을 하기에 가장 좋은 길은 항상 아무 곳도 아닌 곳과 아무 곳도 아닌 곳을 연결하는 길이며, 좀더 신속하게 어딘가에 도착하고자 할 때 택할 수 있는 길은 따로 있게 마련이다. -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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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08 08:2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51일간 읽을 예정이라니 놀랍네요. 검색해보니 800쪽~!! 리뷰 보니 너무 재미있은거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6-09 06:43   좋아요 1 | URL
하하. 제 취향이더라구요. 즐독을 예상하고 있어요^^

얄라알라 2021-06-17 14:58   좋아요 1 | URL
휴우...800쪽이라면 손목이 벌써 욱신이네요^^ 51일간 나눠 읽으시면 손목은 안 아프실듯.

아이큐170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어떠했을까, 이 책 읽으면 궁금증이 풀리려나요?^^ 부러워서 엉뚱한 소리를

Falstaff 2021-06-08 09:0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인상깊게 읽은 책이 서재 화면에 보이면 참 반갑습니다.
즐기시기 바랍니다. ^^

행복한책읽기 2021-06-09 06:45   좋아요 2 | URL
어머 감사해요. 이 책 검색하다 폴스타프님 리뷰도 봤습니다. 님은 책먹는 여우 같으시던데요^^

초딩 2021-06-08 10:5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51일간 800쪽.
우리가 굉장히 두꺼운 모비딕 등의 책과 친해지는 아주 좋은 방법이네요 ^^ ㅎㅎㅎ
두꺼운 책 잡으면 안달나고 또 지치고 부여잡고 또 읽고 그러기를 반복하는데..
느긋하게 하루에 조금씩 읽기 넘넘 좋은 것 같아요 ^^

행복한책읽기 2021-06-09 06:46   좋아요 2 | URL
ㅎㅎ 모비딕도 언제고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매일 인증하니 두꺼운 책 별로 겁이 안나게 됐다는. 응원 감사해요^^

scott 2021-06-08 11:0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홉 살 때 아이큐가 170! 천재들이 겪는 우울증과 일반인들이 겪는 우울증은 다르겠죠.

행복한책읽기 2021-06-09 06:47   좋아요 2 | URL
그죠. 확실히 농도가 더 짙어 보여요.

얄라알라 2021-06-17 15:00   좋아요 1 | URL
언어천재 scott님도 왠지피어시그(?) 이 분 잘 이해하실 수 있을 듯.
전 올리버 색스 팬인지라, 이 분 책으면 도대체 IQ가 얼마나 높을지 항상 궁금했는데, 적어도 제가 읽은 책에서는 IQ언급은 없었던 것 같아요. 색스도 중독의 터널을 지나왔으니 피어시그처럼 순탄하지만은 않았네요

mini74 2021-06-08 13: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51일간의 여행이 행복하고 즐거우시길 *^^* 파이팅! 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6-09 06:47   좋아요 3 | URL
미니님 응원 감사해요. 화이링~~~~^^

희선 2021-06-09 03: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51일 동안 보실 거군요 저는 예전에 며칠 동안 보고 썼는데... 그때 보기는 했는데 잘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니 이 책 다음에 나온 책은 안 봤겠지요 오래 천천히 보면 더 잘 보시겠습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6-09 06:48   좋아요 3 | URL
네. 오래 천천히. 이 말 좋네요. 음미하며 읽어보려구요^^
 
사피엔스 (무선본) - 유인원에서 사이보그까지, 인간 역사의 대담하고 위대한 질문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조현욱 옮김, 이태수 감수 / 김영사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20210504 

매일 인증 다섯 번째 책 <<사피엔스>> 완독. 2021년 4월 15일 시작 2021년 5월 4일 종료. 


<<호모데우스>>보다 재미있었고 <<호모데우스>>만큼 유익했다. <<호모데우스>>와 달리 아주 강렬하진 않아도 몇 번의 도끼질이 있었고 몇 번의 뭉클함이 있었다. 그래서 별 다섯 개를 주저없이 쏜다. 

두 권의 책을 읽고 든 생각은 하라리는 명료한 문장의 대가 같다는 것이다. 문장의 명료함은 생각의 명료함을 일컫는다. 닮고 싶은 지점이다. 하라리가 인류에 대해 알려준 것들 중 내 머리에 콕콕 박힌 것. 

1. 뒷담화는 필요악이다. 

2. 우리의 부엌은 고대 농부의 부엌과 크게 다르지 않다. 

3. 호모사피엔스는 산업혁명 이전부터 동식물을 멸종으로 몰아갔다. 

4. 식물이 인간을 길들여 인간은 등골이 휘게 되었다. 

5.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다. 

6. 사람은 저마다 다르게 진화했다. 평등한 창조는 없다.

7. 사피엔스는 '우리'와 '그들'로 나눠서 생각하도록 진화했다.

8. 지구촌 세상을 이끈 것은 상업, 제국, 보편 종교였다. ​

9. 프랑스 혁명의 실체는 왕실의 빚 때문이었다. 

10. 세금은 꺼리지만 투자는 기꺼이 한다.

11. 국가의 등장으로 폭력이 감소했다. 

​12. 오늘날의 평화는 평화의 배당이익 덕분이다. 

13. 가족간의 유대는 예나 지금이나 행복과 관련이 크다. 

14. 특정 감정을 추구하지 않으면 지금 이 순간을 누릴 수 있다. 

뒷담화는 악의적인 능력이지만, 많은 숫자가 모여 협동을 하려면 사실상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 사피엔스가 약 7만 년 전 획득한 능력은 이들로 하여금 몇 시간이고 계속해서 수다를 떨 수 있게 해주었다. 누가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에 대한 믿을 만한 정보가 있으면 작은 무리는 더 큰 무리로 확대될 수 있다. 이는 사피엔스가 더욱 긴밀하고 복잡한 협력 관계를 발달시킬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 P47

인지혁명 이후, 사피엔스는 이중의 실재 속에서 살게 되었다. 한쪽에는 강, 나무, 사자라는 객관적 실재가 있다. 다른 한쪽에는 신, 국가, 법인이라는 가상의 실재가 존재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상의 실재는 점점 더 강력해졌고, 오늘날에는 강과 나무와 사자의 생존이 미국이나 구글 같은 가상의 실재들의 자비에 좌우될 지경이다. - P60

인지혁명이 일어날 즈음 지구에는 몸무게 45킬로그램이 넘는 대형동물 약 2백 속이 살고 있었다. 농업혁명이 일어난 즈음 이들 중 남은 것은 약 1백 속에 지나지 않았다. 호모 사피엔스는 바퀴, 문자, 금속도구를 발명하기 한참 전부터 지구 대형동물의 절반가량을 멸종으로 몰아갔다. - P115

이들 식물이 호모 사피엔스를 길들였지, 호모 사피엔스가 이들을 길들인 게 아니었다. - P124

역사의 몇 안 되는 철칙 가운데 하나는 사치품은 필수품이 되고 새로운 의무를 낳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일단 사치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이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다음에는 의존하기 시작한다. 마침내는 그것 없이 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 P135

진화는 평등이 아니라 차이에 기반을 둔다. 모든 사람은 얼마간 차이 나는 유전부호를 가지고 있으며, 날 때부터 각기 다른 환경의 영향에 노출된다. 그래서 각기 다른 특질을 발달시키게 되며, 그에 따라 생존 가능성에 차이가 난다. 따라서 ‘평등한 창조‘란 말은 ‘각기 다르도록 진화했다‘는 표현으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 P164

돈은 거의 모든 것을 다른 거의 모든 것으로 바꿀 수 있게 해주는 보편적인 교환수단이다. - P247

3세기에 걸친 모든 박해의 희생자를 다 합친다 해도, 다신교를 믿는 로마인들이 살해한 기독교인은 몇천 명을 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이후 1,500년간 기독교인은 사랑과 관용의 종교에 대한 조금 다른 해석을 지키기 위해 다른 기독교인 수백만 명을 학살했다. - P307

상업, 제국 그리고 보편 종교는 모든 대륙의 사실상 모든 사피엔스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지구촌 세상으로 끌어들였다. - P336

과학연구는 모종의 종교나 이데올로기와 제휴했을 때만 번성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는 연구비를 정당화한다. 그 대신 이데올로기는 과학적 의제에 영향을 미치고, 과학의 발견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결정한다 - P389

지난 5백 년간 진보라는 아이디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미래를 점점 더 신뢰하게 만들었다. 신뢰는 신용을 창조했고, 신용은 현실 경제를 성장시켰으며, 성장은 미래에 대한 신뢰를 강화하고 더 많은 신용을 향한 길을 열었다. - P439

자본주의 윤리와 소비지상주의 윤리는 동전의 양면이다. 이 동전에는 두 계율이 새겨져 있다. .부자의 지상 계율은 "투자하라!"이고, 나머지 사람들 모두의 계율은 "구매하라!"다. - P493

상상의 공동체가 부상한 사례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국민과 소비 공동체이다. 국민은 국가가 만든 상상의 공동체다. 소비 공동체는 시장이 만든 상상의 공동체다. - P512

현대 자본주의 경제체제에서 대외 교역과 투자는 매우 중요해졌다. 그러므로 평화는 훌륭한 배당이익을 낳는다. 중국과 미국이 평화를 유지하는 한, 중국인들은 미국에 제품을 팔고 월스트리트에서 거래하며 미국이 투자를 받아서 번영할 수 있다. - P528

만일 행복이 기대에 의해 결정된다면, 우리 사회를 떠받치는 두 기둥ㅡ대중 매체와 광고 산업ㅡ은 지구의 만족 저장고를 생각지 않게 고갈시키는 중일 수도 있다. - P542

일단 당신이 특정한 감정에 대한 추구를 멈추면 어떤 감정이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쩌면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공상하는 대신에 지금 이 순간을 사는 것이다. - P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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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5-04 12: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명료함이 인상적이었나봐요! 흡수력 장인답게 정리도 명료,강렬하게 남기셨어요~♡
몇번의 도끼질ㅋㅋ인정인정!👍

행복한책읽기 2021-05-06 13:08   좋아요 2 | URL
네. 하라리 명료한 문장들 외우고 싶어요. 몇 번의 도끼질, 미미님도 인정하시는군요. ㅋㅋ

새파랑 2021-05-04 13:5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명확한 정리~!! 인류에 대해 알려준 것들하고 밑줄 좋네요^^

행복한책읽기 2021-05-06 13:09   좋아요 3 | URL
인류사 정리를 넘 잘해놓아서 중딩 딸한테, 이건 필독서다 같이 읽자 했더니, 손사레를 치며 달아나더군요.^^;;;

북다이제스터 2021-05-04 20: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하라리가 도서관 한 채를 통채로 읽었다고 하는데, 맞는 것 같습니다. ^^
좋은 리뷰 잘 읽었습니다. ^^

행복한책읽기 2021-05-06 13:12   좋아요 3 | URL
어머나. 도서관 한 채를 통째로 읽었다고요. 대 ~~~~~ 박. 어찌 이리도 박식하고 어찌 이리도 명료하고 어찌 이리도 정리를 잘하나 했더니, 그런 비결이. 아니아니, 비결 아니고 열정 플러스 노 ~~~~ 력 이라고 해야겠지요. 그런 열정과 노력도 누구에게나 오지는 않나 봐요. 저는 읽은 것만도 그저 뿌듯하답니다.^^

붕붕툐툐 2021-05-04 22: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별 다섯개 쏴주셨네요! 빵야빵야~🔫 저랑 읽은 순서 똑같. 저는 호모데우스가 더 재미났었어요!ㅎㅎㅎ 깔끔 정리 넘 멋지심다~👍👍

행복한책읽기 2021-05-06 13:14   좋아요 2 | URL
어머 툐툐님은 호모데우스가 더 재밌었군요. 역시 책은 저마다 다르게 읽히나 봐요. 정리는 더더더 잘하고 싶었는데, 시간도 딸리고 역량도 딸려 딱 저기까지만. ^^;;
 
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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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8 뭔가 해보고 죽자고! 

알라알라북사랑님이 올린 글 보고 '내게 필요한 책'이라는 느낌이 확 들어 도서관으로 자전거 페달을 밟게 만든 책. 느낌은 정확했다.
여든 개의 여름과 일흔 다섯 개의 여름을 본(아메리카 원주민들의 표현 같다) 늙은 언니들이 어찌나 맘에 쏙 드는지 'ㅈㄴ 멋있어,' 'ㄱ 멋있어' 라고 마구마구 말해주고 싶을 정도다. 알래스카의 윤여정 같은 걸크러쉬 언니들. 
고려장을 당하듯 부족민들에게 버림 받기 전의 이 언니들의 모습은 딱 뒷방 노인네들이었다. "끊임없이 여기가 아프다. 저기가 쑤시다고 불평을" 하고 "자신들이 늙고 약하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언제나 지팡이를 짚고 다녔다."(17쪽) 
늙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겨져, 아니 그보다 거추장스런 짐짝으로 여겨져 부족민들은 두 여인만 남겨 놓고 떠났다. 그것은 죽음을 선고하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사람은 궁지에 몰리면 생각지도 못한 투지가 솟아오르기도 한다지. 일흔다섯 개의 여름을 본 '사(별이라는 뜻)'는 이대로 주저앉고 싶지 않아, 주저앉을 수 없어 하는 마음이 솟구쳐 여든 개의 여름을 본 '칙디야크(박새라는 뜻)'에게 뜻밖의 다부진 제안을 한다.
"친구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게 아니란 말이야."(29쪽) 
그리하여 예전보다 더한 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알래스카에서 두 노인의 겨울나기 투쟁이 이어진다. 생존투쟁은 지난날의 기술을 기억해내는 것에서 시작된다. 모닥불 피우기, 작나무를 네 조각으로 잘라 가죽끈과 연결해 눈신발 만들기, 올가미와 토끼 덫 만들기, 다람쥐 사냥하기, 가슴팍에 가죽끈을 묶어 썰매 끌기, 연어 껍질로 말린 물고기 담을 주머니 만들기 등등등. 두 여인은 자신들이 지팡이 없이 여러 마일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한다. 그러나 . . . . . .그들의 몸은 노쇠하다. 잠을 자고 난 아침이면 몸뚱이가 천근만근이고 두들겨 맞은 듯 여기저기 쑤시고 결리는 것을 넘어 통증이 뼛속 구석구석 파고든다. 누운 이 자리서 몸을 까딱하지 않고 그만 딱, 눈을 감아 버리고만 싶다. 그러면 딱, 행복할 것만 같다. 
그런데 . . . . . . 이제 그만 생의 끈을 놓아도 되겠다 싶은 순간 찾아든 절박한 소피 마려움.  
"그녀는(칙디야크) 그 욕구를 무시하려 애썼지만, 방광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끙 소리를 내며 그녀는 소변을 참았다. 금방이라도 오줌이 나올 것만 같았다. 겁에 질린 그녀는 튕겨지듯 자리에서 일어나서는 깜짝 놀라는 친구의 시선을 받으며 버드나무로 다가갔다."(68쪽)
사느냐 죽느냐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하게 만든 것은 위대한 사상도, 중대한 결심도 아닌 고작 생리적 현상이었다. 방광의 묵직함은 팔순 노인의 뻣뻣한 몸뚱이도 벌떡 일으켜 세웠다. 이 장면은 읽는 순간에도, 글로 옮겨 쓰는 순간에도 큭큭거리는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이 작품의 최고 명장면!!! 
여러 우여곡절 끝에 겨울을 무사히 넘긴 두 늙은 여인은 다시는 맛보지 못할 줄 알았던 인생의 감미로운 순간을 음미한다. 나중에 자신들의 부족민들을 만나 함께 지내게 된 후로도 지나친 도움을 사양하고 "새로 발견한 독립성"(161쪽)을 끝까지 즐기며 산다.  
만나면 얼싸안고 싶은 이 늙은 언니들을 보면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첫째, 무조건 몸을 움직여야 해. 둘째, 친구를 곁에 두어야 해. 부지런히 수다를 떨어야 해.' 두 언니 덕에 좀 살 것 같다. ^^  늙어가는 모든 이들에게, 우울이 몰려드는 이들에게 읽기를 권한다. 


알래스카 아타바스칸족 토박이인 저자 벨마 월리스가 들려주는 엄마 이야기도 참 따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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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4-28 11: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친구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게 아니란 말이야]
오늘의 밑줄 쫘악~५✍⋆*
사느냐 죽느냐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모면하게 만든 것은 위대한 사상도, 중대한 결심도 아닌 ㅎㅎㅎ
SO피 마렵소 ㅎㅎㅎ
우와 이책 매력적임
알래스카의 두여인의 생존!생로 불사의 스토리
이런책 발굴하신 북사랑님도 멋지고
재치 만점 행복한 책읽기님
리뷰도 재미 만점!!

행복한책읽기 2021-04-28 13:21   좋아요 2 | URL
네. 이 늙은 언니들 넘 멋져서 감동이었어요. 현대판 고려장 당하기 전까지 열나 움직여!!! 그렇게 말해주는 것 같았어요^^ 아 근데 pc로 썼더니, 북플에서 문단 나누기가 전혀 안 되어 있군요. 꺼이~~~~

얄라알라 2021-05-01 0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행복한 책읽기 님께서 올려주신 이 멋진 리뷰를 5월에 읽다니요! (그래봤자 이틀 지각)

˝알래스카의 윤여정˝ 키야!!! 카피라이터하셨음, 최고연봉 받으실듯.

콕, 딱, 집어 표현해주셨네요

만족스럽게 읽으셨다니, 괜히 뿌듯합니다. 감사합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5-02 12:59   좋아요 0 | URL
이런!! 이 멋진 댓글을 이제야 발견하다니 ㅋ 지두 이틀 지각. ㅋㅋ 두 언니들 느무느무 좋았어요. 저자가 쓴 원주민 이야기 더 읽고프던데 번역된 책이 이것뿐이더라고요. 아쉽아쉽. 숨어 있는 책들 계속 공유해주세용~~~^^

2021-05-01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5-02 13:05   좋아요 3 | URL
저는 이 언니들의 생존투쟁을 보고 아무리 풍족해도 봉양받는 삶을 거부해야겠다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할일 없을 때 투덜이 할머니들이었잖아요. 자신들이 고생고생해 모은 넉넉한 식량을 부족민들에게 나눠줄 때 이 언니들의 당당한 모습이 얼마나 짜릿하던지. 중요한건 물질이었어!!! 라고 결론내리게 되었다는^^;;; 저희 엄니가 일을 딱 놓은 그 순간부터 급속도로 늙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일의 귀함을 알아요. 저는 이 언니들처럼 때로 힘들게, 때로 즐겁게 일하다 죽을라구요 ㅋㅋ

얄라알라 2021-05-02 13: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올 초, 방태산 화타라는 분이 쓰신 건강 에세이 5권 읽고 배운 걸 한 줄로 요약하라면, ˝걸을 힘 있다면 걷고 일해라.˝였어요^^ 행복한 책읽기님의 댓글보니 새삼, 그말이 정녕 맞는가벼.^^ 이런 생각 드네요^^
 
어제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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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어제>>를 몇 시간만에 다 읽었다. 이로써 한국에 출간된 이 작가의 책은 다 읽은 셈.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워낙 강렬해 이후 세 작품에선 큰 감흥을 못 느꼈다. 순서를 달리 읽었다면 느낌이 달랐을까. 아무튼, 크리스토프는 자신의 첫 작품을 능가하는 작품을 쓰지 못하는 것에 자괴감은 느끼지 않았을까.

<<어제>>를 읽으면서 왠지 그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가 지망생이자 공장노동자인 주인공 토비아스 호르바츠가 내게는 작가의 분신처럼 보였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사춘기 소년 같고 답답하기만 한 호르바츠가 대체 어떤 답을 찾을지 궁금해하며 읽었는데, 마지막 문장에서, 아! 하는 탄식이 터져 나왔다. 

"어제는 내내 무척 아름다웠다. 숲속의 음악, 내 머리칼 사이와 너의 내민 두 손 속의 바람, 그리고 태양이 있었기 때문에." 

소설에 들어가기 전 문장이다. 지나간 시간들은 왜 아름다워 보일까. <<어제>>에 묘사된 오늘은 전혀, 조금도, 눈꼽만치도 아름답지 않다. 인생이 너~~~~무 구질구질해 보인다. 망명자들의 삶이 다 그러했을까만, 어쨌든 읽는 내내 고구마를 삼키는 마냥 목이 멨다. 꺽꺽. 

이 책에서 내게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들은 이것이었다.

베리는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죽었음이 판명되었다. / 로베르는 욕조에서 동맥을 끊고 죽었다. / 알베르는 "너희는 내 똥이나 먹어라"라고 우리말로 적은 쪽지를 남기고 목매달아 죽었다. / 마그다는 감자와 당근 껍질을 까고 나서 바닥에 앉아 가스벨브를 열고 오븐에 머리를 밀어넣은 채 죽었다. (60-61쪽) 

이들의 죽음은 과연 자살 시도의 결과였을까. 그보다는 "저는 다만 쉬고 싶었을 뿐입니다."(17쪽) 라는 주인공의 말처럼, 더는 이 삶을 지속하고 싶지 않은 피곤함 그리고 무력감의 결과 같았다. 

헝가리 혁명의 여파를 피해 스물한 살의 나이로 갓난아이를 안고 국경을 넘은 아고타 크리스토프는 2011년 스위스 뇌샤텔의 자택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76세였다. 


이제 나에게는 희망이라곤 거의 없다. 전에는 그것을 찾아서 끊임없이 이동했다. 나는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을? 나도 몰랐다. 그러나 인생은 있는 그대로의 것,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인생은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이어야 했고 나는 그 무엇인가를 기다리고 찾아다녔다. / 나는 이제 기다릴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방안에서 의자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 바깥세상에는 그럴듯한 어떤 인생이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내 인생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 P41

저녁에 공장을 나서면 장을 보고 저녁 먹을 시간밖에 없다. 다음날 아침 일찍 일어나 공장에 나오려면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가끔 내가 일을 하기 위해 사는 것인지 살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인지 자문한다. - P47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무엇이든 해보려고 시도했다. 무력감이 감정 중에 제일 무서운 것이다. - 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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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4-27 12:5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와 신기하네요 저는 방금 ‘문맹‘ 리뷰 썼는데 ㅎㅎ 전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만큼은 아니어도 ‘어제‘도 나름 좋았었어요, 근데 ‘거짓말‘이 워낙 엄청나서 ^^ 책읽기님의 기분이 뭔지 알거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4-28 09:42   좋아요 3 | URL
ㅋ 맞아요. 거의 같은 시간대에 리뷰를 올린 듯했죠. 저도 <어제> 나쁘지 않아요. 근데 요즘 좀 우울 모드라 책을 읽는 동안 주인공이랑 같이 다운돼 미치는 줄 알았슴요.^^;;;

미미 2021-04-27 13:0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도 강렬함에 있어선 <존재의 세가지..>가 최고인듯. 각 작품 어떤 순서로 쓰였는지 찾아봐야 겠어요.🤔

행복한책읽기 2021-04-28 09:43   좋아요 3 | URL
그럼 지는 미미님이 찾아봐 주는 순서 낼름 받아먹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ㅎㅎㅎ

초딩 2021-04-27 20: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존재의 세가지
그것을 넘을 작품을 쓸 필요도 없을 만큼
그 책은 충분히 강렬한 것 같습니다 ㅎㅎ
어제는 그래도 보고는 싶네요 :-)

행복한책읽기 2021-04-28 09:45   좋아요 3 | URL
초딩님. 우문현답이심요. ‘뛰어넘을 작품을 쓸 필요도 없을 만큼 충분히 강렬하다‘에 오른손 번쩍!! ^^ 크리스토프 작품은 국내 출간된 게 몇 권 없으니 무조건 다 읽는 걸루다 ^^

붕붕툐툐 2021-04-27 22: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냥 기대를 놓고 읽어야겠어요. 그럴만큼 충분히 매력적인 작가잖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4-28 09:49   좋아요 3 | URL
맞아요 맞아요. 충분히 매력적인 작가에요. 저는 이분이 그 많은 일 겪고도 저 나이까지 살아내신 것에 감탄했어요. 어쩌면 어린아이 같기만 한 문체를 고수한 것은, 늦게 배운 외국어로 쓰는 탓도 있겠지만 마주하기 힘든 사건들과 거리 두기를 하고 싶어서이기도 했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부끄러움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아니 에르노 지음, 이재룡 옮김 / 비채 / 2019년 4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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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14 부끄러움의 뿌리는 어디일까 

내가 읽은 아니 에르노의 세 번째 작품. <<남자의 자리>>와 <<한 여자>>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을 전기 형식으로 재현한 것이라면, <<부끄러움>>은 저자 자신에 관한 인류학적 보고서다. ​나는 아니 에르노의 작법이 참 마음에 든다. "경험하지 않은 것은 쓰지 않는다." 원칙 아래 소설과 자전의 경계가 모호한 글쓰기를 지향하는 작가. 그의 글은 단순하고 꾸밈이 없다. 수사는 꺼져! 라고 외치는 건조한 문장들로 가득하다. 그러니까 일체의 수사를 배제한 채 사실을 충실히 따라가는 딱딱한 문체이다. 그래서 날카롭고 그래서 아프다. 거칠게 때론 묘하게. 

<<부끄러움>> 은 1940년생인 저자가 열두 살에 겪은 한 사건을 계기로 불쑥 찾아든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의 자취를 따라가는 이야기다. 첫문장이 무섭게 강렬하다. 

"6월 어느 일요일 정오가 지났을 무렵, 아버지는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다."(23)

어두컴컴한 지하실. 아버지가 엄마의 어깨인지 목덜미를 움켜쥔 채 낫을 쳐들고 있다. 이어진 것은 지하실에 쩌렁쩌렁 울펴 퍼지는 비명소리와 울음소리. 이 장면과 소리는 저자에게 '지금까지의 나'와 '앞으로의 나'를 분명하게 가르게 만든 일대 사건이다. 이 일이 얼마나 충격적이고 공포스러웠던지, 저자는 4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서야 일기에도 쓰지 못한 이야기를 처음으로 글로 옮긴다고 말한다. 그런데 털어놓고 보니, 자신이 겪은 이 극적인 사건이 자신의 가정만이 아니라 의외로 "자주 다른 가정에서도 벌어지는 평범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27) ​

그렇다. 나는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를 읽었을 때 이국만리의 낯선 엄마가 아닌 나와 몇십 년을 동고동락한 내 어미를 대하는 듯한 기시감을 무시로 느꼈다. <<아버지의 자리>>를 읽을 때는, 내 아비가 살아서 나와 같이 지냈다면 겪고 느꼈을 법한 감정, 혹은 내 딸이 제 아빠에게 느끼고 있고 앞으로 느낄지 모를 감정을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었다. <<부끄러움>>도 마찬가지였다. 

"그 일요일은 나와 이전의 나에 대한 모든 것 사이를 가르는 어떤 장막처럼 남게 되었다."(29)

열두 살의 저자는 이 사건으로 엄청난 도덕적 혼란을 겪는다.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는 어머니를 제거하려" 했다니.(29) 제 두 눈으로 보았지만 도무지 믿을 수가 없고 믿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날의 경악은 수시로 가슴을 짓누른다. 나를 더 답답하게 만드는 것은 이 일을 누구에게도, 심지어 자신에게조차 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에게 진짜 비밀이 생겼다. 그럴 때 찾아드는 감정, 그 마음도 부끄러움이 아닐까. 

내 경우에는 엄마의 직업이 나를 가장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었다. 학년초면 실시되는 가정환경 조사에서 답을 쓰기 어려운 칸이 직업칸이었고, 친구 부모님을 만났을 때 얼굴을 화끈거리게 하는 질문이 '너그 엄마 뭐하시노?'였다. 나는 나를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몰고가는 엄마가 정말 미웠다. 이 엄마는 내가 원하지 않는 엄마였고, 저자의 표현대로 나의 "불행을 벌어"놓는 자였다.(25) 그런 감정을 느끼고 그런 인지를 하게 된 시점이 내 경우에도 열두 살 즈음이었다. 

열두 살. 사춘기가 시작되는 시기. 내가 누구인지를 묻게 되는 시기. 나를 둘러싼 세계가 어떤 곳인지 보게 되는 시기. 내가 자리한 세상이 내가 꿈꾸고 바라는 세상이 아니라고 여겨질 때 우리는 대개 탈출을 꿈꾼다. 속으로 주문처럼 되뇌인다. 나는 절대로 엄마아빠같이 살지 않을 거야! 나는 당신들보다 더 나은 세계로 진출해 더 나은 삶을 살 거야! 다행히 저자가 살았던 1950년대, 내가 살았던 1980년대에는 그 탈출이 가능했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던 시절이었다. 다행히 저자는 똑똑한 유전자를 물려받아 자신이 잘하는 '공부'로 그 탈출을 도모할 수 있었다. 그러나 . . . . . . 

'나'에게 학교를 다닌다는 것은 하층 노동계급의 주택과 언어, 그 관습으로부터 벗어나 중상층 부르주아의 세계로의 편입을 의미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 아니 에르노는 이 편입이 자신에게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을 가져다주었다고 회상한다. . . . . 사립학교를 '우리'로 인식하는 순간, '나'는 자신이 거처해온 '우리 동네'와 자신의 존재의 기원인 '우리 가족'을 다시는 '우리'로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 . . . . . 그것은 비로소 자신을 둘러싼 친숙했던 세계가 '천박함'이라는 이름에 어울리는 세계에 불과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라고 할 만하다. 그 순간 "우리 존재의 모든 것이 부끄러움의 표식"으로 변한다. . . . . . . '부끄러움'은 이런 식의 계급적 인식과 더불어 찾아온다. '나'는 이제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의 동요 없이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버린 것이다.(15-6쪽 문학평론가 신수정의 <작품 소개>  중) 

그랬기에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추적한다. "나 자신의 인류학자"(48)가 되어 1952년의 6월의 그 일요일로 돌아가 "활자화된 글로"(40) 자신의 삶을 복원한다. 이런 시도는 저자의 말대로 "단숨에 모든 것을 노출하는 위험을 무릅썼다는"(40) 의미이다. 저자에겐 위험한 시도였으나 독자에겐 고마운 시도였다. 에르노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장소의 말들을 되살려 그가 산 세상을 보여준다. 어떤 언어를 사용하느냐가 그 사람이 사는 세계, 그의 생활수준을 짐작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

1950년대 프랑스 소도시 노동계급의 생활상과 인간 군상은 내가 살던 1980년대 대한민국 지방 소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다르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너무나 흡사해서 깜짝 놀랄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지점은 '그때 그들'의 관습과 대화를 이 시대에도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남의 행동거지를 관찰하고 숨겨져 있는 아주 조그만 습성을 분석했고, 그런 것들을 모아 해석을 붙이면서 한 사람의 역사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각자가 조그만 말 한마디씩 덧붙여서 만들어지는 집단 소설 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가게나 술집에 모여 앉아 "그자는 쓸 만한 사람이야"라든지 "그 여자는 싸구려야"라는 식으로 요약을 하곤 했다."(70) 

참으로 익숙한 풍경이지 않은가. 일명 뒷담화가 만들어내던 거짓 역사가 지금은 뉴스와 각종 SNS가 만들어내는 가짜 역사로 이전되었을 뿐이다. 에르노의 이 인류학 보고서에 등장하는 이런 류의 시시콜콜한 재현들은 사람 사는 거, 참, 거기서 거기네 하는 동질감을 느끼게 한다. 연민을 거둬낸 거리 두기 작법이 아이러니하게도 보잘것없는 인간들에 대한 짙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세상 모든 없이 사는 사람들, 소외 당하며 사는 이들의 고독과 고통과 슬픔을 아픔을 돌아보고 공감하게 만든다. 내가 에르노의 글을 좋아하는 지점이고, 그의 책을 찾아 읽는 이유이다. 

'부끄러움' 보고서를 작성하기 전 아니 에르노는 자신에게 글쓰기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정의한다.

"내게 글쓰기는 헌신이었다. 나는 글을 쓰면서 많은 것을 잃었다. 하지만 글쓰기가 없다면, 실존은 공허하다. 만일 책을 쓰지 않았다면 죄책감을 느꼈을 것이다." (21)

이 보고서 덕에 저자는 죄책감을 덜어냈을 것이다. 내가 궁금한 대목은 이것이다. 열두 살의 그 일요일 이후 부끄러움이 삶의 방식으로 장착돼 몸에 배어버렸다고 말한 저자가 이 책을 쓰는 동안 '부끄러움'에서 놓여 났는지 말이다. 

나? 나는 어떨까. 너무 창피하고 수치스러워 차마 입에 담지 못했던 엄마의 직업을 10년의 침묵을 깨고 공개적으로 말했던 그 순간, 나는 '부끄러움'에서 해방되었고 안도감을 느꼈다. 그때 내가 느낀 또하나의 감정은, 말을 하면 무겁다고만 느껴지던 일이 가벼워진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별 거 아닐 수 있구나 하는 가벼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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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4-14 15:4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아니 에르노 언젠가 읽어야지×30 했었는데 솔깃하네요!
학교에서도 심지어 이력서에도 왜들 부모님 학교,직업이 그리 궁금한지..요즘엔 거의 안그런다는데 참.. 쓸때마다 ˝왜 궁금해 어디 쓸껀데?˝ 혼자 이러고 질문했어요.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4-15 00:03   좋아요 2 | URL
이 작가에 대한 미미님의 리뷰 궁금함요. 이 분 책은 짧아서 날 잡아 몇 권 몰아쳐 읽을 수도 있어요. ˝왜 궁금해 어디 쓸껀데?˝ ㅋㅋㅋㅋ 학창시절에 미미님 같은 친구 있었음 엄청 든든했을 것 같아요. ^^

scott 2021-04-14 16: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의 글쓰기는 단순한 자전적 서사를 넘어서는 존재론적 고민까지 담은 한인간의 내밀 보고서,,
나를 낳아준 부모라는 존재를 부정 할 수 없듯이
인정 하고 싶지 않은 존재가 결국에는 내 자신이라는것

행복한 책읽기님
맞습니다 별거 아닌것

이런저런것 꼬치꼬치 캐묻는 인간들
당신부터 말하시오 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4-15 00:09   좋아요 2 | URL
˝존재론적 고민까지 담은 한 인간의 내밀 보고서˝ 역쉬 scott님. 아니 에르노도 이미 섭렵하셨군요. 저는 올해 이 작가를 만나 참 좋아요. 북플 친구들 덕에 알게 된 작가였음요. scott님도 학창시절 제 친구였음 한층 따봉이었겠어요. 미니님과 더불어 좌청룡우백호^^

희선 2021-04-15 01: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에르노 이름은 알아도 책은 한권도 못 봤네요 자신한테 일어난 일만 쓴다고 해서 그런 건지... 저는 그런 거 안 쓰고 싶기 때문에... 말하지 않아서 무거운 것보다 말해서 가벼운 게 더 좋을지, 어쩌면 자신은 못해도 아니 에르노가 대신 말해줘서 좋아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4-15 11:46   좋아요 0 | URL
자신에게 일어난 일 뿐 아니라 저자가 살았던 시대상도 잘 보여주어요. 사는 모습이 우리나라와 별 다르지 않아 재밌어요. 사람들 뒷담화 하는 모습도 진짜 비슷해요.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말로 털어버려 가벼워지는 게 있어요. 희선님도 경험해 보시면 좋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