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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평점 :
20201001 매일 시읽기3일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오늘은 음력 8월 15일 한가위. 코로나19 257일째. 요양원 면회 금지 하염없는 날째.
'엄마 걱정'은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이라는 시집에 실려 있다. 이 책이 출판된 해는 1989년이고, 내가 기형도란 시인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1989년이다. 그러나 내가 이 시집을 산 해는 1995년 9월이다.
기형도의 <<입 속의 검은 잎>>은 스무 살 중반부터 서른까지 내 암울했던 삶의 길동무 같은 존재였다. 시인은 이미 삼도천을 건너가고 없었지만, 그의 시는 살아, 나처럼 세상이 적막강산 같아 허우적거리는 젊은 영혼들에게 쓸쓸함이라는 유대감으로, 아니러니하게도 시인이 놓아 버린 생을 붙들고 살 수 있게 했다. 적어도 내게는 그랬다.
<엄마 걱정>은 오늘 문득 떠오른 시다. 코로나 19로 요양원에 계신 엄마를 보러 가지 못해서, 며칠 전 겨울옷들을 정리하다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할 엄마옷을 주섬주섬 챙기다 왈칵 눈물이 터졌던 기억이 나서.
엄마가 되어 보니 '엄마'는 확실히 '아빠'보다 존재감이 세다. 이 강력함은 어찌할 수 없는 면이 있다. 나의 어미는 전혀 살갑지 않은 엄마였는데도, 엄마로 살다 보니 살갑든 살갑지 않든 엄마는 어쨌거나 독립적인 나를 있게 하기까지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고, 더 나아가 살리는 존재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기에 나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기의 내 어미를 내 경험으로, 내 상상으로 그려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내 어미를 존중하고, 어미의 삶도 껴안는다.
'엄마 걱정'이란 제목은 의미심장하다. 예전에는 막연한 감으로 느꼈고, 이번에는 확실히 알았다. 엄마 걱정은 나에 대한 걱정이다. 언제 오실 지 모를 엄마, 혹여라도 안 오시면 나는 어떻게 되나,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걱정이다. 시인의 말대로 그런 상상은 무섭고 두렵다.
나 또한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이였다. 그 아이는 쉰이 넘은 지금도 내 속에 틀어앉아 있다. 이런 걸 심리학 용어로 '내면아이'라고 한다지.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그 아이는 이제 웃기도 잘한다는 것이다.
얼마 전 엄마 없는 집에서 형제가 라면을 끓여 먹다 집에 불이 났다지. 3주째 중환자실에 있다지. 산호호흡기 단 채 추석을 맞았다지. 그 아이들이 엄마가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을지, 불이 났을 때 얼마나 무서웠을지, 그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 이런 아이들이 부디 조금이라도 적어졌으면 좋겠다.
기형도의 시들은 아픈 영혼들을 위한 시다. 쓸쓸함은 때로 쓸쓸함으로 달래 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