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705 #시라는별 46 

부러짐에 대하여 
- 정호승 

나뭇가지가 바람에 뚝뚝 부러지는 것은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짓는 새들을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고 그대로 나뭇가지로 살아남는다면 
새들이 무엇으로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겠는가 

오늘도 거리에 유난히 작고 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져 나뒹구는 것은 
새들로 하여금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집을 집게 하기 위해서다
만일 나뭇가지가 작고 가늘게 부러지지 않고 마냥 크고 굵게만 부러진다면 
어찌 어린 새들이 부리로 그 나뭇가지를 물고 가 
하늘 높이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만일 내가 부러지지 않고 계속 살아남기만을 원한다면 
누가 나를 인간의 집을 짓는 데 쓸 수 있겠는가 


2007년에 출간된 정호승 시집 <<포옹>>은 시인의 아홉번 째 시집이다. 시인의 말에서 정호승 시인은 흙으로 사발을 만드는 도공처럼 언어로 ˝시집이라는 사발˝을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릇은 비어 있음으로 그 쓸모를 완성하듯, 시집이라는 사발 또한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말로 지은 음식을 채워 그 쓸모를 다하리라.

<부러짐에 대하여>도 그와 비슷하게 빈틈의 유용함을 이야기하고 있다. 꼿꼿하지 말고 유연하기, 고집부리지 말고 고개 숙이기, 욕심부리지 말고 내려놓기. 빡빡하게 굴지 말고 허허실실 웃기. 그렇게 허점이 있어야, 공터가 있어야 내 안에 다른 사람을 들일 수 있는 법이다. 그래야 새들이 작고 가는 나뭇가지로 집을 짓듯 그 사람도 가벼운 나로 ˝인간의 집˝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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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05 10: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시도 너무 좋네요. 부러짐에 대해, 느슨함에 대해 생각하게 하네요. 사진은 더 예술임~!! 정호승 시인님의 시 너무 좋은거 같아요. 예전에 봄길 이라는 시 좋아했었는데 😊

행복한책읽기 2021-07-05 11:00   좋아요 4 | URL
ㅋ 3월에 봄길 올렸더랬어요^^ 정호승님은 이제 전국민이 시 한 편쯤은 아는 시인이 되신 듯요. ^^

scott 2021-07-05 10:4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 꼿꼿하지 말고 유연하기, 고집부리지 말고 고개 숙이기, 욕심부리지 말고 내려놓기. 빡빡하게 굴지 말고 허허실실 웃기. 그렇게 허점이 있어야, 공터가 있어야 내 안에 다른 사람을 들일 수 있는 법]
오늘의 밑줄 쫘악!✍️
‘진정한 리더‘의 조건과 덕목을 행복한 책읽기님이 집어 주셨네요!
전, 그럼 오늘 하루 부러지게 일해도
걸을때 넘어지지 않귀!( *ฅ́˘ฅ̀*)

행복한책읽기 2021-07-05 11:02   좋아요 5 | URL
윽. 저 덕목을 진즉 깨달았다면 리더가 되어 있었겠죠.^^;; scott님 부러질 만큼 일하심 아니 되옵니다. 님은 북플계 독보적 존재. 몸을 귀히 보살펴주소서~~~~~^^

얄라알라 2021-07-07 18:23   좋아요 2 | URL
오호! 저도 지금 막 복사 붙여넣기 하려던 문구! scott님 밑줄에 묻어갑니다!

mini74 2021-07-05 14: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새들이 집을 짓게 하기 위해서다.ㅠㅠ 가벼운 나로 인간의 집을 짓는다니 너무 좋은 표현이에요 !!! 우중충한 장마의 시작, 초록나무들로 눈이 다 시원하네요.

행복한책읽기 2021-07-05 21:24   좋아요 2 | URL
그죠. 신록이 짙어지는 7월이 욌어요. 저는 5.6월의 연두빛 초록을 더 좋아하지만 익어가는 초록에도 맘을 줘볼까 합니다. 션한 여름을 만들어 보아요.^^

2021-07-07 18: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7-08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21-07-10 0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태풍이 지나가고 나면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땅에 떨어진 게 생각나기도 하네요 세찬 바람이 아니어도 나뭇가지는 부러지기도 하겠습니다 그건 새한테 집을 지으라고 나눠주는 거였군요 사람도 그러면 좋을 텐데 싶기도 하네요 푸른 나무 시원하게 보입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7-10 09:43   좋아요 1 | URL
세상 이치가 다 이유가 있고 쓸모가 있고 그런가봐요.^^
 

20210701 #시라는별 45 

바닥 
- 박성우 

괜찮아, 바닥을 보여줘도 괜찮아 
나도 그대에게 바닥을 보여줄게, 악수 
우리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위로하고 위로받았던가 
그대의 바닥과 나의 바닥, 손바닥 

괜찮아, 처음엔 다 서툴고 떨려 
처음이 아니어서 능숙해도 괜찮아 
그대와 나는 그렇게 
서로의 바닥을 핥았던가 
아, 달콤한 바닥이여, 혓바닥 

괜찮아, 냄새가 나면 좀 어때 
그대 바닥을 내밀어봐, 
냄새나는 바닥을 내가 닦아줄게 
그대와 내가 마주앉아 씻어주던 바닥, 발다닥 

그래, 우리 몸에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박성우 시인의 <<자두나무 정류장>>은 가문 날의 단비처럼 읽히는 시집이다. 메마른 땅에 방울방울 떨어져 푸석해진 흙들을 촉촉히 적셔주는 단비 같다. 시인은 시를 쓰기 위해 멀리, 에둘러 가지 않는다. 자신이 발 딛고 사는 세상의 이모저모만 이야기할 뿐이다. 그 세상은 시인의 고향이자 시골 내음 풀풀 풍기는 전북 정읍이다. 그 세상 속 주인공들은 노루, 고라니, 닭, 소, 딱따구리, 오리알, 누에, 물까치, 이팝나무, 자두나무, 감나무, 해바라기, 참깨, 마늘밭, 살구나무, 목단꽃, 애호박, 풀과 소똥 같은 자연과 한천댁, 청동댁, 구복리댁, 윗집할매, 늙은 작부, 청암양반 같은 동네 사람들이다. 이 풍경을 그려내는 시인의 시선은 따스하고 정감 있다.

<바닥>은 이 시집의 첫 시다. 읽자마자 아, 이런 ‘괜찮아‘는 정말 괜찮아 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닥을 보일 수 있는 사이는 흔하지 않다. 대개는 가족일 터이고, 이따금 친구일 터이다. 때론 그 반대일 수도 있겠다. ˝바닥을 죄 보여주˝게 하는 것은 ˝사랑˝,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러나 마음 바닥을 여과 장치 없이 드러내게 하는 것은 분노인 것 같다.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이야 ˝보여주고 감쌀 수˝ 있겠다만, 마음 바닥은 어디까지 보여야 할까. 얼마나 감쌀 수 있을까.

내가 요즘 산책할 때 눈여겨보는 바닥은 땅바닥이다. 7월. 빛은 더욱 강렬해지고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는 계절. 빛과 그림자의 어울림이 도드라지는 계절. 빛과 그림자가 바닥을 쳐서 사랑의 무늬를 그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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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7-01 07: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괜찮아라는 말은 언제나 위로가 되는 좋은 말 같아요. 7월 시작의 시로 너무 좋아요 😊

행복한책읽기 2021-07-01 10:33   좋아요 4 | URL
그래서 7월 첫시로 올렸어요. 새파랑님 지맘 들여다보신 듯. 우리 7월도 즐겁게 신 나게 읽고 써요~~~~^^

독서괭 2021-07-01 10: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시 정말 좋은데요! 안 그래도 해체주의적(?) 시에 지치신 폴스타프님이 이 시집 좋다 하셔서 담아뒀는데^^ 땅바닥 사진도 멋집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7-01 14:42   좋아요 4 | URL
ㅋ 지두 폴스타프님 리뷰 보고 냉큼 주문했답니다. 마음이 훈훈해지는 시집이네요^^

미미 2021-07-01 10: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 페이퍼 사진이 눈에 확 들어왔어요~♡ 걷기좋은 흙바닥
나무들이 뿌리박은 생의 바닥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라니!! 오우 쎈데요?😊

행복한책읽기 2021-07-01 14:44   좋아요 4 | URL
<나무들이 뿌리 박은 생의 바닥> 캬!!! 미미님 속엔 시성이 가득하군요.^^

라로 2021-07-01 12:4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길가를 수놓는 것은 발바닥의 몫”이라는 오은 작가의 싯구도 생각나게 하는 시네요. 좋은시 잘 읽었어요. 올리신 사진도 글과 어울려 멋지고요. ^^

행복한책읽기 2021-07-01 14:47   좋아요 5 | URL
크아~~~~ 오은 시인이 저런 멋진 시구를. 게다가 라로님은 기억을. 놀라워요. 오은 시집 읽은 적 없사와 냉큼 검색 들어감다. 고마워요~~~~^^

scott 2021-07-01 17: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7월 첫날의 시작은 행복한 책읽기님이 읽어주시는 시 구절로 합니다.
[우리 몸에 세 개의 바닥이 있지
손바닥과 혓바닥과 발바닥,
이 세 바닥을 죄 보여주고 감쌀 수 있다면
그건 사랑이겠지,
언젠가 바닥을 쳐도 좋을 사랑이겠지 ]
행복한 책읽기님의 사진
땅바닥!
흙먼지가 일어나도 거센 비바람에 휩쓸려도
땅속에 박힌 단단한 돌멩이 처럼!
견디기, 버티기
행복한 책읽기님
7월 건강하고 행복하게!٩( ᐛ )و



행복한책읽기 2021-07-02 11:35   좋아요 3 | URL
견디기. 버티기. 건강하기. 행복하기. 네네 네네네!!!^^ scott 님 응원 힘 듬뿍 받음요^^

붕붕툐툐 2021-07-02 11: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와~ 시 넘 따뜻하다!! 손바닥으로 하이파이브 한 번 해용!🙏
7월의 좋은시 넘 감사해요~😍

행복한책읽기 2021-07-02 11:36   좋아요 3 | URL
🙏🙏🙏 하이파이브 세번. 툐툐님과 저는 바닥을 친 사이. 우헤헤. 7월에도 즐독해요~~^^

붕붕툐툐 2021-07-02 22:23   좋아요 1 | URL
😍😍😍😍😍

mini74 2021-07-02 15: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림자들도 색을 가지는 것 같아요. 자세히 보면 다 다른 색들. 시가 위로를 사진이 시원함을 주네요 *^^*

행복한책읽기 2021-07-02 16:23   좋아요 2 | URL
역쉬. 그림 좋아하는 미니님은 그림자 색도 다 다르다는 걸 단박에 알아채시네요. 시간대별 빛과 그림자 관찰도 산책의 묘미 중 하니더라구요. 위로와 시원함을 드릴 수 있어 기쁩니다^^

초딩 2021-07-03 0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괜찮아 정말 괜찮아에 저도 큰 공감합니다~
 

20210629 근데 엄마, 지식이랑 지혜가 뭐가 달라? 

이번 달은 '느린 학습자의 엄마' 페이퍼를 쉬고 딸과 함께 상반기에 읽은 책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나의 딸은 북한군도 무서워 차마 남하하길 꺼리게 만든다는 중 2다. 그러나 사춘기 특유의 틱틱거리는 말투와 온 방을 어지럽히는 난잡함을 제외하곤 이 친구는 엄마아빠 앞에서 아직도 쫑알거리기 좋아하는 수다 소녀다. 

작년에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으로 학교를 가지 못하는 상황이 길어지자 딸이 내게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를 읽고 싶다고 말했다. 중딩 녀석이 고전을 읽어낼 수 있을까 반신반의하며 책을 건넸는데, 놀랍게도 줄거리 요약을 나보다 잘하는 것이 아닌가.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은 재밌다며 두 번을 읽었고 다음에 또 읽겠다고 했다. 그 후로 나는 내가 읽고 좋았거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 생기면 딸에게 던져주고 선택권을 주었다. 앞부분을 읽고 흥미가 당기거든 계속 읽으라고. 














1. 배삼식 <<1945>> (6월) 

얼마 전의 일이다. 딸이 몸을 둥글게 말고서 침대에 딱 달라붙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 시간이 얼마나 많은지 아무래도 몇 마디 해줘야겠다 싶어 딸을 식탁으로 불러앉혀 대화를 시작했다. 

ㅡ 딸아, 엄마가 저번에 한 말 있지? 

ㅡ 또 잔소리야 하는 표정으로) 뭔 말 말이야? 

ㅡ 네 나이가 지혜가 발달하는 시기라고. 14살부터 25살까지 형성된 지혜의 힘으로 이후를 살게 된다고 말이야. 그런데 그렇게 핸드폰만 자꾸 하고 있으면 지혜가 만들어질까? 

ㅡ 근데 엄마?

ㅡ 응?

ㅡ 지식이랑 지혜가 뭐가 달라? 

ㅡ 오호. 굿 퀘스천. 완전 좋은 질문인 걸. 우리가 얼마 전에 <1945>라는 작품을 읽었잖아.

ㅡ 응. 그랬지.

ㅡ 1945년에 무슨 일이 있었어?

ㅡ 우리나라가 해방됐지.  

ㅡ 맞아. 그건 지식이야. 그런데 해방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모두 행복하디? 

ㅡ 아니. 

ㅡ 그지. 해방이 되었다고 사람들이 다 행복해지지 않았지. 여전히 할 일이 있고, 극복해야 할 애로가 있고, 사람들 간의 갈등도 심했어. 그렇게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는 거, 해방이 누구에게나 좋은 것만은 아니었구나를 깨닫는 것, 그런 게 지혜야. 알겠니?

ㅡ 으흠. 쪼옴.  

이 대화를 나눈 후 딸은 줄거리 요약만 한 독서기록장에 느낀 점을 추가로 써넣었다. 

"해방 이후 모두가 행복할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깨닫게 해준 책. 이 책은 나에게 새로운 눈과 귀를 붙여 주었다." 














2. 김초엽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2월) 

딸도 나도 재미있게 읽은 소설집이다. 이야기와 과학이 얼마나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표본 같았다. 딸은 각 작품마다 한줄평을 썼다. 나는 리뷰를 쓰지 않았다. 


"소피는 아마 슬렌포니아에 도착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녀가 자신의 목적지를 확신한다면 그녀가 슬렌포니아로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생가한다. 나는 언젠가는 나만의 슬렌포니아를 찾고 싶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재경은 어쩌면 그 무수히 많은 기대와 시선들 속에서 도망치고 싶었던 걸까? 잘은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목숨 걸고 볼 만한 풍경은 아니네"라는 문구에서 솔직히 조금 웃기기도 했다. 그치만 나도 재경처럼 바다에서 인어처럼 살고 싶은 마음도 있다. 김초엽은 어린 나이인데도 사람을 움직이는 글을 쓰는 것 같아 대단하다.(<나의 우주 영웅에 대하여>) 















3. 서현숙 <<소년을 읽다>> 

이 책은 내가 읽고 너무 감동하여 딸에게 배경 설명을 해준 뒤 꼭 읽어볼 것을 권했다. 너와 다른 환경에서 다르게 사는 소년들도 있다는 사실을 딸도 알았으면 했다. 이런 책을 읽는다고 해서, 읽고 감동했다고 해서(딸도 감동했다), 딸의 행동이 달라지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않다. 다만 이 친구의 마음에 큰 파도는 아니더라도 잔잔한 출렁임은 있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딸은 소년원 친구들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그 글에서 나의 눈을 사로잡은 문장은 이것이었다. 


"앞으로는 사회에 나가서 너희가 하고 싶은 일이랑 공부를 했으면 좋겠어.(물론 범죄는 빼고) 그리고 나가서도 책은 꼭 가까이 해줬으면 해. 솔직히 나도 인정하긴 싫지만 책은 의외로(?) 배울 점이 정말 많거든." 















4. 박완서 <<엄마의 말뚝>> (2월, 5월) 

나는 박완서 소설을 몇 권 읽었다고 자부하고 살았는데, 올해 이 책의 존재를 몰랐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이 책은 알라딘에 10주년 기념판이 뜨자마자 딸과 같이 읽어야겠다 생각했고 그림이 곁들여진 맑은소리 판본을 구입했다. 딸에게 소설 속 엄마와 너거 엄마가 누가 더 억세냐고 물었을 때 딸이 한 대답은 "오십보백보"였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 어미의 말뚝에 대해 생각했다. 내 어미를 억척스럽게라도 살게 했고 나를 키우게 했던 것을. 또한 내 딸이 엄마를 회상할 때 떠올리게 될 말뚝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것은 필시 책일 것이다. 















5. 메리 W. 셸리 <<프랑켄슈타인>>(3월) 

나는 이 책을 2016년 여름에 읽었다. 이 책을 한 달 내내 끼고 살 때 당시 초딩 3학년인 딸이 내게 재밌냐고 물어 줄거리를 말해주고 몇 대목을 읽어주기까지 했다. 마지막 장면,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죽고 괴물이 북극 탐험가에게 자신의 심경을 토로하는 대목을 읽다 울컥했더랬다.

ㅡ"나는 사랑과 우정을 갈망했고 여전히 배척당했고. 그건 부당하지 않은 거요? . . . 나, 흉측하고 버림 받은 이 기형아는 멸시당하고 따돌림 받고 짓밟힐 운명이고, 그 부당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피가 끓어오르오."(289) . . . . . . 

ㅡ 엄마? 엄마? 울어? 목소리가 이상해. 

ㅡ 으으응. 괴물이 너무 불쌍해서 . . .

책을 덮은 뒤 나는 딸에게 이렇게 말해 주었다. 괴물이 사람을 죽이는 진짜 괴물이 된 건 프랑켄슈타인 박사 때문이었다고. 낳기만 하면 안 된다고. 낳았으면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고. 그게 어른이라고. 그 날로부터 5년이 흐른 지난 3월, 딸은 이 책을 읽고 다음과 같이 썼다. 


"책의 구성을 이야기 형태가 아닌 편지 형태로 구사한 것이 흥미로웠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피조물'이라는 단어가 고급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빅터도 불쌍하고 괴물도 불쌍한 베드, 세드 엔딩이 안타까웠다. ㅠㅠ" 














6. 조지 맥도널드 <<공주와 고블린>> (3월) 

어슐러 K. 르 귄의 <<찾을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읽을 겁니다>>에서 리뷰를 읽고 너무 좋아 자전거를 타고 도서관으로 달려가 냉큼 대출해 읽은 책이다. 딸이 먼저 읽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공주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에 대한 '각성', 막다른 골목에 처했을 때의 선택의 이야기로 읽었는데, 딸의 시선은 조금 달랐다. 


"보통 공주 이야기하면 공주와 왕자가 대부분인데, 공주와 고블린이라는 주제가 신선하였다. 그리고 . . . 커디의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을 응원한다. 크흠 . . . 그리고 공주의 할머니가 부러웠다. 나도 공주의 고조할머니 같은 할머니가 계셨으면 좋겠다."














7. 김흥모 <<홀>> (4월) 

내가 먼저 읽고 딸에게 건넸다. 딸은 이 책의 줄거리를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4월 16일에 썼다. 딸과 내가 우리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 똑같아서 신기했다. '나라면 과연 김씨 아저씨처럼 할 수 있었을까' 누군가를 돕는 길이 그와 그 가족의 삶을 망치는 길이 되지 않게 하려면 국가와 사회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8. 도리스 레싱 <<다섯째 아이>>(5월) 

내가 이 책에 등장하는 부모에 대해 분개한 것과 달리 딸의 태도는 덤덤했다. 다섯째 아이 벤이 정말로 무섭고, 진짜 악마 같았다면서 이렇게 덧붙여 썼다. 


"벤은 한편으로는 악마 같지만 또 한편으로는 사랑받지 못하는 불쌍한 아이를 표현하고 있다. 벤의 이러한 행동들은 마치 프랑켄슈타인을 연상케 한다. 그로 인해 나를 포함한 독자들은 더욱 깊은 공감과 공포심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인 것 같다." 














9. 태 켈러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5월) 

자기 또래가 등장하는 데다 우리의 전래 동화 <해님달님>을 소재로 쓴 소설이어서 그런지 딸은 이 책을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10점 만점 9점을 주었다. 내 경우에는 어릴 적 동네 친구들, 언니오빠들과 밤에 무서운 이야기를 나누며 소리 질렀던 추억을 소환시켜준 책이었다. 무엇보다 이 책은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 특히 딸과 엄마의 관계가 시간과 더불어 어떻게 바뀌어가는지를 들여다보게 해주었다. 

"릴리, 나랑 할머니 관계는 끝난 게 아냐. 변했을 뿐이지." 

"나는 뭐든 안 변했으면 좋겠어." 

엄마가 내게 꼭 이해했으면 좋겠다는 듯 나를 골똘히 쳐다본다. 

"릴리, 모든 게 변해. 그건 정상이지. 우리 사이가 변했다고 해도 내가 네 할머니를 그만 사랑한 적은 없어. 그래서 우리가 여기 살러 온 거야. 내가 우리 엄마를 아주 많이 사랑하니까. 우리 모두가 할머니를 사랑하고. 그리고 할머니가 병 때문에 잠깐 보이시는 행동들이 무서울 수 있다는 거 알지만, 할머니도 너희 사랑하셔. 그 잠깐씩의 낯선 모습들, 할머니가 아니고 할머니 병이야."(255쪽) 














10. 르 클레지오 <<황금 물고기>> 

잠자냥님 리뷰를 보고 냉큼 구매했으나 바쁜 일로 딸에게 먼저 던져주었다. 좀 무리한 독서가 아닐까 염려했는데, 역시나 웬걸 이번에도 줄거리 요약을 쌈박하게 해놓았다. 그런데 제목이 왜 '황금 물고기'냐고 물었더니 너무나 쿨하게 "나도 몰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으이그. 하여 역자 해설을 읽어보라 권했더니, 기억에 남는 글귀를 해설에서 그대로 베껴 옮겨 놓은 것이 아닌가. 또 으이그. 딸은 내게 스포일 수 있으니 줄거리를 읽지 말라 했으나 나는 스포를 이겨낼 줄 아는 독자인지라 결말을 알고서도 재미나게 읽고 있다. 르 클레지오는 처음 접하는 저자인데, 강렬한 첫문장을 시작으로 이야기 전개가 박진감이 넘친다. 다 읽고 나서 꼭 리뷰를 쓰고 싶은 책이다. 


중2 딸은 피아노 학원 외에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하여 다른 아이들에 비해 책 읽을 여유가 있는 편이다. 엄마의 강압으로 하루 15분은 만화책 이외의 책을 읽고 일주일에 한 편은 독후감을 쓴다. 이 페이퍼를 쓸 생각으로 딸이 올 상반기에 읽은 책을 정리해 보았다. 글을 후다닥 대충 읽는 편인데, 그렇다 해도 어쨌든 기특한 중2다.  


1월

은하철도의 밤 / 미야자와 겐지 / 햇살과 나무꾼 / 비룡소

필경사 바틀비 / 허먼 멜빌 / 한기욱 / 창비

용과 시인 / 미야자와 겐지 / 이선희 / 바다출판사

핑크트헨과 안톤 / 에리히 캐스트너 / 이희재 / 시공주니어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1~2) / 조앤 K. 롤링 / 김혜원 / 문학수첩

2월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 / 조앤 K. 롤링 / 김혜원 / 문학수첩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김초엽 / 허블

소년을 읽다 / 서현숙 / 사계절

엄마의 말뚝 1 / 박완서 / 맑은 소리

3월

프랑켄슈타인 / 메리 W. 셸리 / 오은숙 / 열린책들

회색 인간 / 김동식 / 요다

공주와 고블린 / 조지 맥도널드 / 최순희 / 네버랜드 클래식

4월

1984 / 조지 오웰 / 박경세 / 오픈북스

홀 / 김흥모 / 창비

그리운 메이 아줌마 / 신시아 라일런트 / 햇살과 나무꾼 / 사계절

5월

엄마의 말뚝 2,3 / 박완서 / 맑은소리

다섯째 아이 / 도리스 레싱 / 정덕애 / 민음사

호랑이를 덫에 가두면 / 태 켈러 / 강나은 / 돌베개

6월

1945 / 배삼식 / 민음사 ​

황금물고기 / 르 클레지오 / 최수철 /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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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1-06-29 05: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짜 기특한 중2네요! 게다가 글씨도 너무 잘쓰네요. ^^ 저는 손글씨가 너무나 엉망이라서 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3:50   좋아요 1 | URL
오호. 잘 쓰나요? 저는 니 글씨는 정갈하지 않다고 타박놓는데. ㅋ 기특한 중2 맞습니다요~~~^^

새파랑 2021-06-29 07:5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중2가 저래도 되는건가요? ^^ 너무 멋진거 같아요. 저보다 글을 더 잘쓰는거 같아요 ㅜㅜ
지식과 지혜에 대한 책읽기님의 설명 너무 와닿네요 😄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3:52   좋아요 1 | URL
에이. 과한 칭찬입니다. 새파랑님 따라가려면 부지런히 걸어야죠. 지식과 지혜, 저도 말해놓고 혼자 우쭐해했어요. ㅋㅋㅋ

잠자냥 2021-06-29 09: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고야, <황금 물고기> 줄거리 완전 쌈박하게 잘 했습니다요! 따님이 왠지 황금 물고기 뜻도 이미 알고 있는 거 같은데 엄마한테만 안 알려주는 거 같은데요? ㅎㅎㅎㅎ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3:54   좋아요 2 | URL
아닙니다. 진짜 몰랐던걸요. ㅋ 이 책 추천한 사람이 잠자냥님이라고 딸에게 말해줄게요. 플친들이 어떤 댓글을 달지 무지 궁금해하거든요 ㅋ

페넬로페 2021-06-29 09: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정말 중2 따님이 저런 책을 같이 읽는다고요????? 언빌리버블!!!!!!!
넘 대단하네요~~
저렇게 감상문까지^^
정말 감탄하는 사람이 있다고 꼭 전해주세요**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3:56   좋아요 2 | URL
네. 꼭 전해줄게요. 이 페이퍼가 그 친구에게 자극제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썼거든요. 페넬로페님 감탄을 전하면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딸 어깨가 치솟겠어요. 고마워요^^

scott 2021-06-29 1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진정 ! 중학생의 독서 일지가 이정도라니!
페스트 동물농장 을 중학생이 읽고 !
박완서-김초엽-클레지오로 이어지는 독후 일지
진정 SNS세대의 귀하고 소중한 손글씨!!

엄마와 함께 읽는 중학생의 독서 일기
이토록 소중한 순간
까칠하지만 책읽기를 좋아하는 중딩!!
행복한 책읽기님은
코로나 시대 신사임돵!!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4:00   좋아요 2 | URL
scott 님 훨씬 어려운 책 읽고 독후 감상 수준 아닌 논술문 써내는 중딩도 있다 들었어요. ㅋ 저는 이 친구의 자발성 내에서 견인 역할을 하려 합니다. 물론 때론 화를 동반하면서요^^;; 글구. 저 5만원권에 입성한 건가요 ㅋㅋ

2021-06-29 20: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6-30 1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1-06-29 12: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와... 아이와 함께 책읽고 이야기 나누기. 제가 꿈꾸는 미래예요~ 전 중2 때 만화책만 읽은 것 같은데 ㅋㅋ 이런 책들을 읽고 독후감까지 쓰다니 놀랍고 기특하네요. 그렇게 이끌려면 엄마도 부지런해야하는데.. 과연 전 할 수 있을지^^;; 배워 갑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4:03   좋아요 2 | URL
어머나. 저도 중딩때 거의 만화책만 봤어요. 도서관은 멀고 만화방은 가까웠거든요. 독서괭님, 꿈 꾸시면 몇 퍼센트는 이루어집니다. 이 친구 크니까 같은 책 읽고 얘기 나눌 수 있어 젤 좋더라구요. 독서괭님 꿈 응원할게요. 화이링~~~~^^

syo 2021-06-29 14: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syo가 중2때 저렇게 훌륭한 아이였으면 지금쯤 훨씬 더 훌륭한 어른이 되었을텐데.... 좋겠어요. 읽기님도 따님도. 🤩

행복한책읽기 2021-06-29 19:27   좋아요 1 | URL
내 보기에 syo님은 충분히 훌륭하오..그대는 쓰시기만 하면 된다니까요.^^ 글고 넘들한테 비치는 건 빙산의 일각이라우. 자식 새끼는 일단 애물단지라는 ^^;;; 연애하는 syo가 백배 좋다요.

라로 2021-06-29 19: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거슨 실화입미꽈??? 책님의 따님은 제 막내둥이가 아닌 저와 비교해도 대단한 독서력을 갖고 있군요!!!! 그엄마에 그 딸이군요!!!! 리스펙트~~~!!!

행복한책읽기 2021-06-29 20:15   좋아요 1 | URL
실화이긴 한데. . . ㅋ 이 친구 대충 빨리 읽어요. 언능 읽고 핸폰 볼라구요. ^^;;;

희선 2021-06-30 0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행복한책읽기 님과 따님이 함께 책을 보신다니 무척 좋을 것 같네요 저는 중학교 2학년 때 책 하나도 안 봤어요 벌써부터 책을 봐서 앞으로도 보겠습니다 독후감 쓰기도 한다니, 멋지네요 혼자가 아니고 엄마랑 함께 해서 즐겁지 않을까 싶습니다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6-30 09:57   좋아요 2 | URL
ㅋ 엄마랑 함께한다고 썩 즐거워하진 않아요. 오히려 귀찮아 하지요. 뭘 자꾸 시키는 엄마라고 싫어하기도 하구요.^^;;; 어쨌거나 책은 쭈욱 ~~~~ 가까이 끼고 살 것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6-30 10:0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플친 여러분~~~~~ 여러분이 달아준 감탄과 칭찬과 격려 댓글들 중2 딸에게 읊어주었습니다. 이 친구 내색은 별루 안 했지만 기분 업됐을 겁니다. 아마도 친구들에게 자랑질을 하지 않을까 싶어요. 감사감사. 책을 더 읽고 싶게 하는 동기 부여 확실히 됐습니다요. ^^

초딩 2021-06-30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ㅜㅜ 노트 실물로 보고 싶어요! 우아

행복한책읽기 2021-06-30 23:56   좋아요 0 | URL
ㅎㅎ 지는 초딩님 노트가 보고파요. 노트 정리 왕이심^^
 

20210628 #시라는별 44

어떤 품앗이 
- 박성우 

구복리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한천댁과 청동댁이 구복리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구년 뒤, 한천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청동댁이 한천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다시 십일년 뒤, 청동양반 돌아가셨다 그만 울어, 두말없이 
구복리댁과 한천댁이 청동댁 집으로 가서 몇날 며칠 자줬다 

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자는 게 전부라고들 했다 

자식새끼들 후다닥 왔다 후다닥 가는 명절 뒤 밤에도 
이 별스런 품앗이는 소쩍새 울음처럼 이어지곤 하는데, 

구복리댁은 울 큰어매고 청동댁은 내 친구수열이 어매고
한천댁은 울어매다 


박성우 시인은 내게 <아홉 살 마음사전>을 비롯 ‘아홉 살 사전‘ 시리즈로 먼저 알게 된 작가이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 국어 교과서에는 마음 알기 단원이 등장하는데, 학년이 올라갈수록 상황과 감정의 폭이 넓어진다. ‘아홉 살 사전‘은 그런 이유로 기획된 시리즈 같다. 내 경우에는 어휘 습득이 더없이 더딘 아들 때문에 이 시리즈를 몇 권 구매했다. 나는 출판사의 상술이 대놓고 보이는 책이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다행히
아들은 5학년인 지금도 이 사전 시리즈를 이따금 들춰 보며 진지하게 읽는다. 무엇보다 그림이 정말 귀엽다.

내 마음을 알고 남의 마음을 알아주는 일을 책으로 배워야 한다는 데서 나는 씁쓸함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장르만 다를 뿐 많은 책(특히 소설)을 통해 인간이 가진 숱한 갈래의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지 않았던가.

박성우 시집 <<자두나무 정류장>>은 마음을 따뜻하게 적시는 푸근한 시집이다. 첫 시 <바닥>부터 마지막 시 <종점>까지 휘리릭 읽고 든 첫 느낌은, 뭐 이리 착한 시집을 보았나, 시인의 눈이 사슴 눈을 닮았더니 시인이 착한가 보네였다. 글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니.

<어떤 품앗이>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아는 세 여자의 ˝별스런 품앗이˝를 노래한 시다.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살자고 약속했던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저 세상으로 먼저 가버렸다. 이 세상에 남은 한 사람이 ‘난자리‘의 공허함과 쓸쓸함에 잠못 이룰 것을 염려한 다른 두 여인이 그 자리의 공백을 채워주러 밤이면 ˝두말없이˝ 그 집에 찾아와 같이 드러누웠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돌아가며 세상을 등졌고, 그때마다 세 여인은 ˝몇날 며칠˝을 같이 잤다.

위로의 말보다 더 큰 위로는 ‘같이 있어주기‘가 아닐까. ˝연속극 켜놓고 간간이 얘기하다 자는 게 전부˝라지만, 그 함께하기가 ‘내, 그 마음 안다‘를 별말없이 드러내는 정겨운 위로가 아니겠는가. ‘너는 혼자가 아니야‘를 온몸으로 전하는 뭉클한 위로가 아니겠는가.

이 시를 읽으면서 나는 세 여인의 호들갑 떨지 않는 우정이 참으로 부러웠다. 너에게 그런 사람이 있니 라고 묻기 전에 너부터 그런 사람이 되어 보자라고 생각했다.


덧붙여. 폴스타프님께 감사. 덕분에 미소를 잔뜩 짓게 하는 시집을 만났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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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6-28 00: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홉살 사전 꾸준히 읽는 착한아들 박성우 시인은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시선으로 시어를 짓는것 같습니다 혼자가 아니야 함께 가기 ! 행복한 책읽기님 한주 시작 건강하게 ^♡^

행복한책읽기 2021-06-28 19:43   좋아요 3 | URL
하하. 꾸준히는 아니고 어쩌다 봅니다. 박성우 시인은 scott님 말씀에 완전 공감이요. 알라딘 서재서 플친들과 함께 가기, 좋아요. scott님도 건강히 한 주 보내요~~~~^^

희선 2021-06-28 01:0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박성우 시인 시집 오래전에 나온 《거미》라는 시집 한권 보고 그 뒤로 하나도 못 봤네요 그것도 대충 봤겠지만... 《아홉살 마음 사전》은 있다는 것만 알았습니다 <어떤 품앗이>는 시 좋네요 가까이 있는 사람을 보고 시를 썼네요 슬플 때는 함께 있어주기만 해도 좋을 듯합니다

유월 며칠 남지 않았네요 행복한책읽기 님 새로운 주 즐겁게 시작하세요


희선

행복한책읽기 2021-06-28 19:45   좋아요 3 | URL
《거미》도 읽어보려구요.^^ 저 시 좋죠. 슬플 때나 기쁠 때나 함께 있어주는 일이 맘처럼 쉽지 않지만. 애써 볼 밖에요. 희선님도 새로운 한 주 알차게~~^^

새파랑 2021-06-28 06: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읽기님의 시 소개는 언제나 좋네요. 글은 마음을 담는 그릇이 맞는거 같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6-28 19:47   좋아요 2 | URL
늘 좋다해주는 새파랑님 덕에 늘 어깨 으쓱. 기분 우쭐해짐요. 새파랑님 마음 그릇은 늘 따뜻합니다요^^

얄라알라 2021-06-28 08: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홉살 사전 작가님께서 시인이시군요^^ 행복한책읽기님.말씀듣고 보니. 인성, 배려..책으로 배워가는 아이들. 코로나로 운동장에 모여놀기 어려우니 더욱 그렇게 되나봐요 .

행복한책읽기 2021-06-28 19:50   좋아요 1 | URL
ㅋ 초딩 교과서 보고 있음 우리 때도 이런걸 책으로 배웠던가 하는 도덕들이 꽤 있어요. 근데, 뭣보다 교과서 내용이 의외로 어렵답니다. 제 아들은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Falstaff 2021-06-28 09: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저까지 거론해주시니 황망하네요. ^^;; 그래도 기분 좋습니다. ㅋㅋㅋㅋ

행복한책읽기 2021-06-28 19:52   좋아요 3 | URL
폴스타프님은 재기와 유머 넘치는 글 올려주셔 참 좋아요. 기분 좋아지셨다니 제가 오늘 한 건했네요.^^

붕붕툐툐 2021-06-28 23: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왕~ 행복한 책읽기님 페이퍼 오랜만이에용~!^^
시 너무 좋아요~ 저런 친구 없다고 서운해 말고, 저런 친구가 되어줘야겠죵?^^

행복한책읽기 2021-06-28 23:51   좋아요 2 | URL
우왕~~~ 이리 반갑게 맞아주니 정말 기분 좋네요. 이게 알라딘 서재 마력인가봐요. 은근 그립더라구요. ㅎㅎㅎ
 

20210610 #시라는별 43 

영속永續- 백은선 

아니다 그렇다 괜찮다 괜찮지 않다 보인다 보이지 않는다 빛이다 어둠이다 포옹이다 밀침이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본다 한낮의 나무 한낮의 섬
한낮의 그림자

ㅡ돌아본 사람은 영영 잃어버리게 된대
ㅡ어째서 사랑은 손보다 더 손이 될까 

돌아본다 한밤의 어둠 속 웅크린 심장을 
한밤의 두근거림 
펄럭이는 커튼 아래 놓인 심장을 

ㅡ한번 잃을 것을 다시 잃는 게 뭐 
ㅡ한 번도 가진 적 없는 것을 소유한다는 게 좋지 

늘어난 소매를 물어뜯으며 기린은 어떻게 울지 생각하다가 세상에는 침묵의 동물도 있다고 결론지었다 
모든 게 너무 빨라서 기린의 리듬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나무가 있어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물속에서 숨 쉬는 법 얼음이 녹는 동안 불어나는 것들을 헤아리며 기도 위에 기도를 놓고 다시 허무는 방식으로 허물어진 자리에 다시 다시

놓고 허물고 놓고 허물고 놓고 허물고 

손을 대봤어 뜨거웠다 그것을 마음의 열도라 한다면 

ㅡ계속할 수 있겠니
ㅡ두 개의 손은 열 개의 뿔이었대 

괜찮지 않아 괜찮지 않아 부러지는 것들 숨을 참으며 매일 침묵을 연습하며 어떤 백색증은 몸의 가죽이 아니라 내부에서 생겨난다

죽은 몸을 가르면 모든 것이 하얗다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세포는 하나씩 어둠을 잃는다고 


백은선 시인의 <<도움받는 기분>>은 읽으면 읽을수록 사람들에게 추천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이 시집은 내가 정의한 대로 ‘시로 쓴 고발극‘이 맞다. 시인은 이 세상의 부정하고, 부당하고, 어이 없고, 그래서 슬프고 아픈 일들을 직접적으로 혹은 은유적으로 까발린다. 시인의 마음을 가장 뒤흔든 사건은 세월호 참사였던 듯하다. 곳곳에서 그 참혹함과 싸늘함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들이 발견된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시인은 이런 말로 자위를 한다.

신이 아픔을 몰라서 
아픔을 줄 수 있다고 

그렇게 믿자고 시에 썼습니다. (<해피엔드> 중) 

신이라고 썼지만, 실은 인간의 다른 이름이다. 아픔을 모르는 인간은 아픔을 주는 줄도 모르고 아픔을 줄 수 있다. 

‘괜찮다‘라는 말도 그렇다. ‘괜찮다‘는 나쁜 뜻의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에게 어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혹은 타인에게는 사소해 보이지만 내게는 결코 사소하지 않은 일이 일어났다. 그럴 때 우리는 흔히 ˝괜찮아? 괜찮아요?˝라고 묻는다. 좋은 의도의 말인데, 이 질문은 이상하게도 ‘응, 괜찮아.‘라고 대답을 해야 할 것만 같은 중압감을 준다. 내 마음이 절대로 괜찮지 않은 순간에도 말이다.

아이가 넘어지거나 어디에 부딪히거나 했을 때 예전에는 ˝괜찮아?˝라고 먼저 물었다. 지금은 몸부터 달려가 ˝아이쿠, 어떡해, 아프겠다˝라고 먼저 말해준다. 그러니까 아이의 고통이 가라앉아 아이 스스로 ‘괜찮다‘고 느끼게 될 때까지 그 말을 유보하는 것이다. 아픔에 반응해주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그래야 아파서 뜨거워진 ˝마음의 열도˝가 식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괜찮지 않은데 괜찮다고 말해야 하는 것은 숨을 참고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과 비슷할 수 있다. 그런 일이 반복됐을 때 우리의 속은 백색증에 걸려 어둠을 잃고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할 수 있다. White lie. 선의의 거짓말도 켜켜이 쌓이면 독이 된다.

백은선 시인이 알고 싶어 올해 3월 채널예스와 가진 인터뷰를 찾아 읽었는데, 산문집도 읽고 싶어졌다. 남편의 카드 빚을 갚기 위해 계약한 책이었다니. 백은선은 현재 남편과 이혼했다.

“파편이 내 삶의 숙명 같아요. 엄마로 시인으로 작가로 가사노동자로 선생으로 살면서 매일 갈기갈기 찢어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게 숙명이라면 파편의 대마왕이 되고 말 거야.”​


별처럼 생긴 식물은 돌나물과에 속하는 섬기린초.
흰색 꽃은 개망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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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10 07:5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시 너무 좋네요. 뭔가 힘이 나는거 같아요. 나에게 하는 괜찮아 괜찮다는 말은 위로가 되는거 같아요 ^^

행복한책읽기 2021-06-10 15:24   좋아요 3 | URL
새파랑님 맘에 드신다니 뿌듯뿌듯.^^ 백은선 시인은 파고들고 싶네요. 자기 위로, 맞습니다. 넘 필요합니다.^^

미미 2021-06-10 11:55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니 남편 카드빚ㅠㅇㅠ
위로 라는거 배려 라는거
이게 진짜인지, 제대로 마음이 전달 되는지 갈수록 신경 쓰이더라구요. 🤔

행복한책읽기 2021-06-10 15:27   좋아요 5 | URL
근데 이혼 후에도 남편이랑 의절하지 않고 산대요. 이혼하면 인생 끝장나는 줄 알았더니 해보니 살 만하다네요. 생계형 저자의 삶이 만만찮을 텐데, 시보다 산문이 돈이 더 되는데도 시를 더 쓰고 싶다고 합니다. 천상 시인^^

mini74 2021-06-10 12:2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픔에 반응하는 것이 먼저 란 말 참 좋아요

행복한책읽기 2021-06-10 15:28   좋아요 5 | URL
와우. 미니님 찰떡같이 캐치하심요. 이런 공감이 저는 참 좋습니다.^^

scott 2021-06-10 16: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카드빚을 아내가 왜? 갚아야 하는지 ㅜ.ㅜ
개망초 꽃말은
화해 ,,,,

행복한책읽기 2021-06-10 16:22   좋아요 3 | URL
그래서 서류상으로만 이혼하는 부부도 꽤 있어요. 월급을 차압당하거든요. 우씨.
scott님 개망초 꽃말, 감솨!!!^^

붕붕툐툐 2021-06-10 19: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괜찮아?라고 물을 때 괜찮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 중압감이 넘 와 닿네요. 저도 괜찮아?를 버려야겠습니다~

행복한책읽기 2021-06-11 00:45   좋아요 1 | URL
하하. 버리지는 말고 봐가면서 쓰는 것이. . . .^^;; 저런 생각은 부모 집단 상담 때 배웠어요. 많은 부모가 넘어진 아이에게 괜찮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당황한대요. 아픈데 괜찮아야 하는 건가? 울고 싶은데 못 울게 된다고요. 자기 감정을 억압하는 기제가 된다고. 진짜 그런가 지금도 계속 확인해 본답니다^^

희선 2021-06-11 03: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람이 살아온 게 달라서 누구는 아픈 말인데 누구는 아무렇지 않은 말도 있더군요 그렇다 해도 자신이 아프면 다른 사람도 아프다는 걸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테니...


희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