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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7 매일 시읽기 70일 

그릇 
- 안도현 

1
사기그릇 같은데 백년은 족히 넘었을 거라는 그릇을 하나 얻었다 
국을 담아 밥상에 올릴 수도 없어서 
둘레에 가만 입술을 대보았다 

나는 둘레를 얻었고 
그릇은 나를 얻었다 

2
그릇에는 자잘한 빗금들이 서로 내통하듯 뻗어 있었다 
빗금 사이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빗금의 때가 그릇의 내부를 껴안고 있었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나라는 그릇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동안 금이 가 있었는데 나는 멀쩡한 것처럼 행세했다 


안도현 시인의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를 짬을 내 두어 편 읽었다.

<그릇>은 구도자의 길을 노래한 시 같다. 61년생 안도현 시인은 올해로 예순이다. 반백년에서도 십 년을 더 산 사람이 ˝자잘한 빗금˝이 수없이 나 있는 그릇을 보며 나의 ˝허물˝을 읽는다. 금 투성이 주제에 멀쩡한 백자 흉내를 내고 살았느냐며 조용히 스스로를 훈계한다.

˝버릴 수 없는 내 허물이 / 나라는 그릇˝임을 볼 줄 아는 자는 이미 도통해 있다. 시인의 그릇은 허물은 있을지언정 적어도 작아 보이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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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6 매일 시읽기 69일 

귀띔
- 안도현 

길가에 핀 꽃을 꺾지 마라 
꽃을 꺾었거든 손에서 버리지 마라 
누가 꽃을 버렸다 해도 손가락질하지 마라 


안도현 시인이 8년 만에 낸 시집의 제목은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이다. 시집의 3부 <식물도감> 의 한 부분에서 이 제목을 따왔다.

능소화가 어떤 꽃인가 찾아 보니, 여름에 곧잘 눈에 띄던 주황색 꽃이다. 왕의 성은을 입은 궁녀가 두 번 다시 자신을 찾지 않는 왕(이런 왕이 어디 한둘이었을까)을 그리워하다 기다리다 병이 들어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그가 묻힌 자리에 꽃이 피어 담장을 타고 오른 것이
능소화라고. 간절한 그리움은 그렇게 타고 오르게 만든다. 이 전설로 능소화의 꽃말은 그리움과 명예, 기다림이 되었다고. 그리움과 기다림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명예에는 고개가 갸웃해진다.

안도현 시인은 시를 쓰지 못한 기간 동안 왕을 기다리는 궁녀처럼 자신에게 오지 않는 시를 그리워만 했던가 보다. ‘시인의 말‘이 조금 아프다.

˝갈수록 내가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닌 것 같다. 나는 누군가 불러주는 것을 받아 적고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을 대신 말하는 사람일 뿐, 내가 정작 말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걸 깨닫는다. 대체로 무지몽매한 자일수록 시로 무엇을 말하겠다고 팔을 걷어붙인다.˝

˝시로 무엇을˝ 말하려 하지 않겠다면 시를 대체 왜 쓰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가, 시인의 속뜻은 우러나는 시가 아닌 쥐어짜는 시를 쓰지 말라는, 시인 스스로에게 하는 경고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귀띔>은 안도현 시인을 유명하게 만든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를 연상시키는 잠언 같은 시다. 두 시는 시인이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를 담고 있다. 그 무엇도 함부로 대하지 말라!

<시인의 말> 마지막 문장이 인상 깊다. ˝나무는 그 어떤 감각의 쇄신도 없이 뿌리를 내리지 않는다.˝ 안도현 시인이 이 시집에서 ˝어떤 감각의 쇄신˝으로 시의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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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4 매일 시읽기 67일 

소란 
- 새얼백일장 중등부 시 차상 

왁자지껄 소란함도 잠시 
선생님께서 전체 무음을 누르시면 
화면 속의 친구들은 
차츰 턱을 괴고 점점 엎드리고 
화면 속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발표 시간이 되어 
선생님께서 전체 무음 해제를 누르셔도 
화면 속의 친구들은 
여전히 무음 속에 갇혀서 
좀처럼 소란함을 찾기 힘들다 

난리 법석 쉬는 시간이 그립다 
화상 수업 쉬는 시간이 되면 
화면 속의 친구들은 
이름이 쓰여진 검은 화면을 띄운 채 
무엇을 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코로나 19 시대의 수업 풍경이, 한 단면이 선히 보인다. ˝난리법석 쉬는 시간이 그립다˝는 구절에서 안타까움이 밀려왔다. 

우리는 대개 소란으로부터 달아나고 싶어 한다. 세상에 나와 있으면 시끌벅적하니 아무도 없는 공간으로 잠적해 오롯이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기를 소망한다. 코로나 대유행은 전세계인들에게 그런 시간을 강제로 제공했다. 다만, 우리집은 아이들이 거의 집을 떠나질 않아 소란스러울 때가 많다. 밥 먹어! 핸드폰 그만! 숙제 해! 이런 독촉에 이어지는 대답들은 거의 비슷하다. 10분만! 이것만 하고! 아이 진짜! ㅡㅡㅡ나야말로 아이고! 으으으!

​새얼백일장은 1986년 제1회 백일장을 시작으로 전국 최대 규모로 성장한 순수문예백일장이라고 한다. 제35회 백일장은 코로나 19로 야외가 아닌 우편을 통한 비대면 작품 공모 방식으로 진행되었다고.고등부 장원과 차상 수상자에겐 학업장려금도 제공되고 수시 전형대학 특별 전형 혜택도 주어진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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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린
김지하 지음 / 아킬라미디어 / 2016년 5월
평점 :
품절


20201203 매일 시읽기 66일  

그 소, 애린 50 
- 김지하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바람이거나 구름이거나 귀신이거나간에 
변하지 않고는 도리없는 땅끝에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물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1986년 실천문학사에서 첫 출간된 김지하 서정시집 <<애린 1,2>>는 90년대 솔출판사에서 재출간되었다가 품절되었다. 현재는 아킬라미디어에서 2016년 1,2권을 묶어 출간된 판본이 있다. 2016년도 판은 개인적으로 겉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애린‘이 대체 무슨 뜻인가 했더니, 1권 <간행에 붙여> 에서 시인이 친절히 설명해 준다. 

˝모든 죽어간 것, 죽어서도 살아 떠도는 것, 살아서도 죽어 고통 받는 것, 그 모든 것에 대한 진혼곡이라고나 할까. 안타깝고 한스럽고 애련스럽고 애잔하며 안스러운 마음이야 모든 사람에게, 나에게, 너에게, 풀벌레 나무 바람 능금과 복사꽃, 나아가 똥 속에마저 산 것 속에는 언제나 살아 있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매순간 죽어가며 매순간 태어나는 것을. . . . / 아직도 바람은 서쪽에서 불고, 아직도 우리는 그 바람결에 따라 우줄우줄 춤추는 허수아비 신세, 허나 뼈대마저 없으랴. 바람에 시달리는 그 뼈대가 울부짖는 소리 그것이 애린인 것을. . . . . . / 애린은 한 권의 시 묶음이기도 하다. 부디 모두 애린이어라!˝

<<애린>>은 아린 마음들을 노래하고 있기에 읽는 독자도 덩달아 마음이 애린다. 몸도 마음도 어디 딱히 둘 곳이 없을 때, 그래서 삶이 참 외롭고 쓸쓸하다 싶을 때, 펼치면 좋은 시집이다. 슬픔은 슬픔으로, 외로움은 외로움으로. 애린(愛悋)의 한자어 뜻은 아깝게 여김이다. 시인이 이 의미로 썼는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나를 아깝게 여기고 사랑하라! 이건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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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2 매일 시읽기 65일 

그 소, 애린 4 
- 김지하 

외롭다 
이 말 한 마디 
하기도 퍽은 어렵더라만 
이제는 하마 
크게 허공에 하마 
외롭다 

가슴을 쓸고 가는 빗살 
빗살 사이로 언듯언듯 났다 저무는 
가느다란 햇살들이 얕게 얕게 
지난날들 스쳐 지날수록 
얕을수록 
쓰리다 
입 있어도 
말 건넬 이 이 세상엔 이미 없고 
주먹 쥐어보나 
아무것도 이젠 쥐어질 것 없는
그리움마저 끊어진 자리 
밤비는 내리는데 

소경 피리소리 한 자락 
이리 외롭다. 


어제 메리 올리버의 <정원사>를 읽다 떠오른 김현 선생의 문장, 더 정확하게는 김지하 시인의 문구 때문에 내 집 책꽂이에 꽂혀만 있던 김지하 서정시집 <<애린>> 둘째권을 펼쳤다. 이 시집은 김지하 시인이 마흔여섯 되던 해인 1986년에 출간되었다. 나는 이 시집을 길에서 발견했다. 누군가 이사하며 폐품으로 쌓아올려 놓은 책들 사이에서 찾아냈다. 언젠가 읽으리라 생각하며. 그 언젠가가 오늘이 되었다.

<<애린>> 둘째권은 <소를 논함> <그 소, 애린> <그런데 저쪽에서> 총 3부로 구성되어 있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그 소 애린>은 50편의 연작시이다. 그 중 몇 편을 읽었는데, 흠, 물리적 감옥을 나온 시인이 마음의 감옥에 갇혀 있는 느낌이다. 김현 선생은 이 시집을 두고 ˝마음의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보여주는 일기˝라고 썼다.(<<행복한 책읽기>> 105쪽)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쓰리다. 누구에게도 고백하기 어려워 더 쓰리다. 들어줄 이가 마땅치 않아 시인은 ˝외롭다˝고 허공에 대고 말한다. 허공을 바라보니 ˝가느다란 햇살들이˝ 허한 속을, 쓰린 속을 칼날처럼 베고 지나간다. 아, 더 아프다. 인생 중반이 넘어가면 삶은 참 헛헛해하고 쓸쓸해진다. 시인의 말따나 ˝아무것도˝ 딱히 쥐어지지 않고 ˝그리움마저˝ 끊어지곤 한다. 중년의 쓸쓸함을 나는 다음 시에서 더 진하게 느꼈다.

<그 소, 애린> 6
아내는 이미 오래 전부터
날 우습게 알기 시작했고
아이들마저 이제는 말 대답이 느리다
아무런 노여움도 슬픔도 없이
머얼건 애들
눈자위 건너다보는
내 눈자위에 걸린 머얼건
저 낮달
한낮 이 머얼건 쪼각달.

조각달이 아니고 ˝쪼각달˝이라니. 시인의 마음이 쪼각쪼각 찢겼나 보다. 찢긴 속을 무엇으로 꿰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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