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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 네 번째 편지
- 오세영의 시 "나를 지우고"를 읽으며 든 생각들


나를 지우고


오세영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
너를 지운다는 것,
밤새
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
초롱꽃처럼
이슬이 이슬을 지우면
안개가 되고,
안개가 안개를 지우면
푸른 하늘이 되듯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이상하게도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착 가라앉아 버립니다.
마치 내 안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반성문을 쓰고 있는 듯이...

늙은이에게 젊은이는 더이상 아무 것도 배우려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나이 먹은 교수는 그저 나이 먹은 교수일 뿐 그가 평생을 쌓아온 학문적 업적 같은 것은 쇠락해버린 초가에 덩그마니 얹힌 박 같이 허울만 좋은 이름일 뿐 특별한 권위는 바랄 것도 없고, 존경은 더할 말이 없는 시대입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경쟁력이 으뜸인 시대에 고려장 지낼 날이 멀지 않다는 증빙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너희들도 언젠가 늙을 것이란 말은 충고도, 선언도 아닌 악담인 게지요.

내가 아직 '문학은 나의 힘'이라 외치며 술잔을 높이 들던 시절, 아직 고왔고 아름다운 시인이자 나의 은사에게 "시인은 늙기 전에 죽어야 합니다."라며 호기롭게 떠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시인이었던 은사는 여전히 살아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머리가 많이 새었지만 여전히 멋있을 겁니다. 1942년생인 시인 오세영의 시를 읽습니다. 당신의 이 시를 읽노라니 문득 『장자(莊子)』 「달생(達生)」에 나오는 ‘목계지덕(木鸂之德)’의 고사가 떠오릅니다.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중국의 어느 왕이 투계를 몹시 좋아하여 기성자란 사람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구해 최고의 투계로 만들도록 합니다. 기성자란 인물은 당시 최고의 투계 사육사였는데, 왕이 맡긴지 십일이 지나 기성자에게 “닭이 싸우기에 충분한가?”라며 묻습니다. 기성자는 단호히 대답하길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강하긴 하나 교만하여 아직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다시 십일이 지나 왕이 또 기성자를 불러 물었습니다. 그러자 기성자는 “아직 멀었습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의 소리와 그림자에도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라 했습니다. 왕은 다시 십일이 지나 기성자에게 묻습니다. 기성자는 역시 “아직 멀었습니다. 조급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그 눈초리를 버려야 합니다.”라 답합니다. 다시 십일이 지나 왕이 또 묻자, 기성자는 그제야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상대방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나무와 같은 목계가 되었습니다. 어느 닭이라도 이 모습만 봐도 도망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는 고사입니다.

얼마 전 케이블 TV에서 해주는 영화 <미션>을 다시 보았습니다. 오래전 문망의 영화 코너에 글을 올린 적도 있었던 영화입니다. 그 사이 내가 늙어 유순해진 것인지 어렸을 적엔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 신부보다 로드리고(로버트 드니로) 신부가 더 좋고, 더 잘 이해되었었는데 이번엔 가브리엘 신부의 마음도 알 것 같더이다. 누군가에 대해 잘 알기 위해선 그 사람이 있는 곳보다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에 대해 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운명이란 것도 때로는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곳보다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이루어질 때가 더 많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듯합니다.

시인 오세영은 늙었고, 나는 아직 젊습니다. 그 말은 내가 더 진보적이란 말이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배울 것이 더 많다는 뜻이란 걸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이란 걸 알 것 같습니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란 구절에서 나는 나무가 홀로 나무일 때는 결코 숲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의 존재를 지울 때만 비로소 숲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배웁니다.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전부 알 수는 없겠으나 내 나름으로 살아가며 더 깨우칠 일이겠지요.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고서야 어찌 밀밭을 이룰 수 있을까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말이 또한 이와 흡사하겠지요. 말 그대로 해석하면 빛을 감추고 티끌 속에 숨어 있다는 뜻이지만 이때의 진(塵)이란 속세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겸손하란 뜻도 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자신이 지닌 능력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이를 내세우지 말고, 세상의 속된 사람들에게 눈높이 맞추란 뜻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말은 오늘날 고립되어 가는, 위기에 처한 진보, 좌파를 자임하는 (저 같은)사람들이 귀담아 들을 만한 구절이란 생각이 듭니다. 리저호우(李澤厚)는 『고별혁명(告別革命)』이란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개량으로 혁명을 대체한다」는 글을 썼습니다.

지난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개량주의자’란 지적을 마음 한 구석에선 치욕처럼 느낍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제 개량주의자였음을 자백하는 고해성사를 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혁명가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그와 같은 현실이 슬픈 사람입니다. 리저호우는 “1895년, 갑오해전에 패배한 이후로 중국은 줄곧 ‘혁명의 길’과 ‘개량의 길’ 사이의 논쟁에 휘말려 있었다. 전자는 ‘돌변突變’ 즉, 계급투쟁이라는 극단적인 방식(폭력수단)으로 국가기구를 전복시켜 역사의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점변漸變’ 즉, 계급협력의 비폭력 수단으로 국가적, 사회적 자아의 경신을 추구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좌파와 진보를 단순히 민주노동당이나 참여연대, 민주노총 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나마 가장 대표적인 집단인 건 사실이겠지요. 이들 중 누구도 ‘혁명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주류 좌파(진보)는 모두 개량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제가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이들 중 누구도 솔직하게 개량주의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그 사실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여기기에 말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미 수차례 말했는데 저만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이 어찌되었든 우리나라의 좌파들, 진보들은 아직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선 개량주의에 대한 혐오와 혁명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 보입니다. 이건 남의 이야기라 하기 좋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저 자신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 끝에 나온 말입니다. 그것이 ‘돌변’이든, ‘점변’이든 추구하는 바를 리저호우의 말에서 빌리면 결국 국가적, 사회적 자아의 경신에 있습니다. 대체로 국가적 자아의 경신에 실패하는 경우, 국가와 지배계급이 택하는 손쉬운 해결책은 역사 이래 전쟁이었던 경우가 많았고, 피지배계급이 택하는 해결책은 폭동이나 혁명이었습니다. 전쟁은 자본가들의 혁명, 우파들의 혁명인 셈이지요. 역사가 한 개인이나 집단의 공과를 심판한다는 믿음을 버리고 났을 때, 역사는 그저 냉정하고 잔인한 기술(記述) 방식의 하나일 뿐입니다.

저는 중국식 유물론의 효시를 관자(管子)로 봅니다. 그는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고, 후세 제갈량이 닮고 싶다고 말했던 관중(管仲:?~BC 645)입니다. 관중하면 우선 “관포지교(管鮑之交)”만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관중은 제나라 민중들이 영웅처럼 떠받들던 재상이기도 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마치 일종의 제왕론을 펼친 사람으로만 오해되는 것처럼, 관중 역시 그와 흡사한 사람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관자(管子)』 「목민편(牧民篇)」에 이르길 “광에 먹을 것이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榮辱)을 안다(倉凜實則 知禮節, 衣食足則 知榮辱)”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유물론의 본질을 지극히 천한 것으로 끌어내린다는 오해를 감수하고라도 말하자면, 결국 유물론은 인간이 정신만으로 살 수 없다는 현실주의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예수의 말에 반대하는 주의, 주장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깝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은 빵만으론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다’가 우선인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급진은 명분이 아니라 개량주의자들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은 아닐런지요. 아니, 명분만 내세운 채 거짓희망을 주느니 차라리 보다 철두철미한 개량의 길로 가는 것이 도리어 급진의 길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비판의 말만 앞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개량의 길로 질질 끌려갈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앞서 성찰하고, 개량하고, 개혁하고, 보수하여 실현가능한 희망, 급진을 실천해내는 것이 좀더 효과적인 전략이 아닐까 고민하게 됩니다.

1987년 이후 20년이 흘렀고, 1997년 이후 10년이 흐르고 있습니다. 프란츠 파농은 “민중에 대한 아첨을 경계하라”고 말했는데, 오늘 이 땅의 지식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여전히 민중에 대해 아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1980년대를 휘감았던 민중주의는 역사와 민중을 지혜로운 심판자, 추상적인 진리로 추어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 때 말하는 민중이란 언제나 결국 각성한 민중으로서의 소수자였을 뿐임을 이제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절차적 민주화라고 현재의 민주주의를 폄하하지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입니다. 지금 돌변의 방식을 택하자고 외치는 진보도, 좌파도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좌파는 여전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개량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으며, 도리어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 더 많은 존경이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토록 많은 이들이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들, 민주노총에 등을 돌리고 있을까를, 아니 지지하지 않는 것일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어째서 민중들이 자신의 계급을 배신하는가, 지지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론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체제, 교육, 언론 등 수많은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것이 모두 타당하다는 사실은 아마 아는 이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좀더 솔직하게 고백할 때입니다. 1980년대의 분열을 오늘까지도 그대로 끌고 왔으며, 우리들의 현실을 비판하는 일에 능숙한 반면, 현실적인 대안이나 희망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그간 얼마나 서툰 존재들이었는지 말입니다. 거기에 더해 과거 전대협 의장을 비롯한 학생운동권 중 상당수가 결국 아무런 명분도 없이 현실정치에 투항해버렸고, 민주노총은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으며, 시민단체들은 정권교체 이후 하나둘씩 체제내화 되는 과정에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민중에게 아무런 희망도, 비전도 주지 못한 채, 과거와 같은 방식의 운동, 명분이 옳으니까, 정치적으로 올바른 싸움이기 때문에 혹은 우리가 언제는 언론의 지지를 받고 싸운 적이 있냐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교만이고, 자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지우고 나무, 숲, 산이 되는 희생, 싸우지 않고 이기는 나무 닭의 덕,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는 대신 자신을 낮춰 세상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겸손, 관자의 실용주의, 태산과 같은 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미FTA 타결 이후 평소 조용하기가 산과 같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허세욱 선생이 분신을 하고, 예천에서는 농민 한 분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마을 사람들에게 공기총을 쏘았습니다. 사는 건 앞으로도 힘이 들겠지요. 하긴 우리 네 사는 세상이 한 번이라도 살기 좋았던 적은 없습니다. 오늘 아니면 내일, 내일 아니면 모레가 더 좋은 세상 만들어보자고 다들 고생하시는 거 압니다. 다만 마르크스주의는 고정된 말씀에 얽매이는 종교가 아니라 언제나 변화하는 세상에 가장 적절하게 대응해온 철학이기도 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전에 제가 썼던 글을 반복하는 것으로 이 지루한 고해성사를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독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방어할 힘도 없는 가엾은 사람을 뭉개버리는 인간들은 누구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른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이다.” 사회주의는 양심의 기억이자, 동시에 패배의 기억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회주의는 우리들의 양심이 늘 손쉽게 욕망에 굴복할 수도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건 어제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불행히 미래에도 그럴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의 희망이 저 멀리, 지금은 비록 그 길이 보이지 않으며 우리가 향하는 길 양 편으로 무수한 무덤들이 실패를 증명하지만, 그 길이 우리의 양심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인 이상 그리로 갈 수밖에 없겠지요. 그 길 위에서 외로운 한 명의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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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드팀전 > 비와 남인수,이난영과 보아
오빠는 풍각쟁이야 - 대중 가요로 본 근대의 풍경
장유정 지음 / 민음인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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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이다.음악학자 강헌의 대중음악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강헌은 약속 시간보다 30분 이상 늦었다.떡진 머리에 술냄새를 풀풀 풍기며 강의실에 들어왔다, 전날밤 세게 돌렸던게 분명하다.그 정도 몰골이라면 경험상 새벽 3시는 넘겨야 나올 수 있는 자세였다.그런데 강의실에서는 별로 탓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그가 늦은 30분은 청강생들에게도 주독을 날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맨정신의 강사가 들어왔으면 강의실 내에서 나는 감냄새를 눈치챘을 것이다.하지만 강사와 학생들은 술 먹은 자들이 함께 공유하는 '침묵의 카르텔'로 지난 밤의 기억은 묻어두었다.

강헌의 이야기 중 핵심적인 것은 '대중음악 자생론'과 '대중음악 이식론'의 문제,그리고 '일제시기 대중가요에 나타난 친일성'등 이었다.강헌이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는 술이 깰 때쯤 알콜기운과 함께 머릿속에서 증발해버려서 알 수가 없다.그 중 유독 기억나는 것은 '감격시대'( 거리는 부른다/환희에 빛나는...)의 친일성에 대한 강헌의 비판이었다.강헌이 직접 피아노를 치며 당시 일본군의 행진가와 비교하며 들려주었기 때문이다.그 때 까지만해도 '해방의 기쁨'을 표현한 노래로 알고 있던 가요가 '친일가요였'다니....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비분강개하다가  술기운에 또 졸았다.

가수가 되지 못한 한을 품은 저자 장유정은 <오빠는 풍각쟁이야>에서 1930년대 대중가요의 형식과 텍스트를 분석한다.강헌이 술 먹고한 강의에서 다루었던 주제와 겹치는 부분이 많다.강헌이 어떤 입장이었는지는 아직도 생각나지 않는다,다만 그가 김창남,노동은,이영미등과 비슷한 선상에 서 있다고 추론한다면 저자는 조금 다른 입장에서 대중가요를 바라본다.물론 위의 저자들 역시 조금씩 입장의 차이가 있을 것이며 그 내용을 내가 잘 알지도 못한다.단 <대중가요 이식론>과 <대중가요 자생론>의 구분으로 거칠게 나누어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먼저 <대중가요 이식론>은 일제 강점기의 대중가요가 전통과 단절된 책 일본 음악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계보를 따져보면 '창가-유행창가-유행가'라는 도식을 그릴 수 있다.일본 번안 창가가 일본 자본과 손을 잡으며 유행가로 흡수된다.이 유행가는 왜곡된 현실 인식을 조장하고 현실 순응,현실 도피를 그 목적으로 삼는다.저자는 <대중가요 이식론>과 <대중가요 자생론>이 다른 층위를 서로 연구하고 있다고 전제한다.그리고 비판의 화살을 '이식론'쪽으로 던진다.우선 '이식론'은 대중을 단순히 수동적인 소비자로 보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는다.'이식-주입'이라는 대중문화 접근에 대한 원론적인 지적이다.저자는 비판의 대상이 된 30년대 트로트를 분석하면서 그것이 단순히 지배이데올로기의 강화내지는 순응을 위해서만 작동한 것이 아님을 밝힌다.트로트 가사에 나타나는 애상미,허무감,상실감,수동성 등이 ('목포의 눈물', '황성의적' 등) 소극적 저항으로서 초극의 의지를 갖는 민요의 '한'의 정서와 연을 맺는 다고 말한다.또한 일제 강점기에 나타다는 '기쁨과 희망'의 정서 ( '감격시대' 등의 노래) 역시 일제를 칭송한다기 보다는 '좌절된 미래'에 대한 '웃음으로 눈물 닦아내기' '희망으로 삶을 버텨내기'라고 읽는다.저자는 대중 가요가 대중의 삶과 관계 맺는 진정성에 촛점을 맞춘다.

또한 저자는 <이식론>이 1920년까지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전통가요의 배제했다는 점등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식론'은 1930년대 대중가요를 일본음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던 '트로트'(유행가)로만 한정하기 때문에 당시 대중들과 관계 맺고 있던 다앙한 장르의 '대중음악'의 면면을 살피지 못하고 있다고 말한다.1920년대까지 지배적이었던 '전통가요'(가사,시조,민요 등등)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문화와 접목되면서 '대중가요'에 그 주두권을 내주게 된다.저자는 '트로트'가 가장 많은 사람을 받았지만 '1930년대의 대중가요=트로트'라는 공식에는 부정적이다.저자는 '트로트' 역시 당시 '대중가요'의 하위 장르 중 하나였다고 말한다.'전통가요'가 밀려난 30년대 조선의 대중음악 시장은 '재즈송,신민요,만요,트로트'가 서로 각축을 벌이는 문화경쟁의 장이었다.

장르별로 보면 '재즈송'은 서구 팝음악에 영향을 받은 곡이다.주로 번안곡이 중심이된다.'재즈송'은 1930년대 도심을 중심으로 형성된 모던보이/모던 걸 등으로 상징되는 '근대성'과 관련이 있다.주로 도시의 향락과 퇴폐적 정서가 주를 이룬다.이난영의 <다방의 푸른꿈>의 경우 직접 들어보면 블루노트계열이 쓰인 도시적 블루스의 느낌이 강하다는 것을 쉽게 알아 차릴 수 있다.'재즈송'은 1940년대 일본이 연합국과 전쟁을 시작하면서 적성국의 음악이라하여 금지된다.

'신민요'는 '대중가요의 자생론'에 가장 큰 힘이 될 만한 장르이다.('우리 것을 추구하던 생산자와 우리 것을 갈망하던 수용자가 만들어낸 자생적인 대중가요'라고 한다.)'신민요'는 말 그래도 민요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창작자가 있는 가요이다.(예를 들면 김세레나가 리메이크한 <갑돌이 갑순이>같은 노래다.)주로 경기소리의 영향을 받았으며 악기 편성에 있어서 과거보다 다양한 경향을 갖는다.대개  전통가요 창법을 연수받았던 기생들 음반 취입을 많이 했다고 한다.

'만요'는 '웃기는 노래'이다.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오빠는 풍각쟁이' 또는 서영춘이 리메이크해서 기억하고 있는 '서울구경' (시골 영감 처음타는 기차놀이에..차표파는 아가씨와 실랑이하네..) 등이다.(오빠는 풍각쟁이야도 개그맨 이성미가 개그 코너화 한 적이 있다.) '만요'는 '시대성'을 핵심으로 하여 '해학'과 '풍자'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김대행은 이 웃음이 '웃음으로 눈물닦기'라고 말하며 삶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언어적 해결로서의 성격을 갖는다고 말한다.희망이 없는 시대에 웃음으로 카타르시스를 구한것이 '만요'의 역할이었다는 것이다.

'트로트'는 1930년대 최고의 인기장르였다.다른 모든 장르를 함한 것 만큼의 음반녹음이 남아있으며 위의 장르 중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장르이다.트로트는 일본의 엔카에서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그러나 저자는 일본음악 역시 서구 음악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것으로 본다.그렇기 때문에 '트로트=왜색'이라고 쉽게 단언해서는 곤란하다고 말한다.그 기원에서는 일본의 영향이 있지만 오히려 '문화의 다양한 교류'에 의해 발생하고 토착화하여 성장한 장르로 보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트로트의 발전과정을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트로트의 가사는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하나는 '시대성'을 반영한 곡,그리고 다른 하나는 '보편성'을 반영한 곡이다.저자는 1930년대에 불려져서 아직도 애창되는 곡들은 후자에 해당한다고 본다.'시대성'을 반영한 두 목숨의 저승길'(1930년대 사랑지상주의가 불러온 동반자살을 소재로 한 곡)등은 당시에는 인기를 끌 수 있었겠지만 그 시대가 바뀌면 보편적인 대중의 관심에서 벗어나게 된다.'시대의 풍자'를 토대로 하는 '만요'가 수명이 짧은 것도 그 이유에서이다.반면 최초의 대중가요라고 할 만한 <황성의 적>(황성 옛 터에 달이...) <타향>(타향살이 몇 해 런가) <애수의 소야곡>(운다고 옛 사랑이..)등은 우리 민족이 갖고 있던 '임의 부재에서 생기는 정서' 에 보편적으로 편승하기 때문에 현존할 수 있는 것이다.트로트가 현재까지 사랑을 받는 것을 설명하는데 유의미하다고 보여진다.물론 '임의 부재에서 생기는 정서'(김소원의 '진달래꽃'같은 정서이다.) 를 현 시대에도 우리민족의 '보편적 정서'라고 할 수 있을 지는 모르겠다.'보편적인 정서'라는 것도 '문화교류'에 의해 어느정도 재편되는 것이라고 본다면 말이다.또한 '보편적정서'라는 것의 실제에 대해서도 의문이 생기기는 한다.(경험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편이긴 하지만 말이다.)

저자는 결론에서 과거 대중가요 연구의 주를 이루어온 전통가요의 단절론에 대해 반기를 든다.즉 '우리나라의 음반사가 전통의 일방적 쇠퇴와 새로운 양식의 대체라는 비극적 성격을 띠고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대중가요의 주요기능은 계몽이라기 보다는 삶의 위안이었다.이를 무시하고 대중가요에 진지함이 없다며 가벼운것 만을 비판하는 것은 대중문화의 속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본다.하지만 저자는 1930년대 트로트의 예를 들어서 대중가요가 '삶의 진정성'을 살피는 방향으로 모색되어야만 한다고 본다.(현대 트로트는 진정성은 탈취되고 퇴폐,향락의 정신만 남았다.)그 근간에 민요가 가진 '건강성과 진정성' 이 있다. 이를 바탕으로 타인과 나를 하나로 묶어주는 대중가요만이 시대를 건너 살아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결론은 좀 모호하다.민요의 텍스트가 가진 장점을 대중가요에 반영하자는 취지이지만 저자의 전공을 너무 살려버린 느낌이 강하다.사이버 문화가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있는 시점에서 대중음악에서 민족음악의 성격을 어떻게 반영할지에 대한 문제는 저자의 몫은 아닐게다.대중음악의 성공에 저자가 말하는 텍스트의 문제 역시 중요하긴 하지만  부차적인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대중음악의 성공은 곡이 가진 특성에 기대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윤도현의 <아리랑>을 대표적인 예로 든다.<아리랑>을 락으로 편곡한 것 말이다.이것은 단지 월드컵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민족적 정서가 과도하게 분출될 수 있는 장이 펼쳐져 있어서 가능한 성공이었다고 보여진다.텍스트에 '건강성과 진정성'을 찾는 노력은 현재 노래운동을 중심으로 했던 포크가수들이 그 맥을 있고 있다.(모던락 하는 친구들도 가끔 그런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병적인 우울이 선뜻 선뜻 보인다.)그렇지만 대중음악계에서의 위치는 미미하다.소수의 음악인 셈이다.(..이럴때면 김광석이 아쉽다.) 문제는 '건강성'을 담보한 음악이 어떤 실험과 혁신을 통해 대중들에게 회자되게 하느냐 하는 점이다.이것은 역시 가수가 되지못한 학자보다는 가수가 되어버린 딴따라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크다.

*** 신나라에서 유성기로 듣는 가요사 라는 형태의 유성기 복각음반집을 발간했다.다행히 그 음반이 회사 자료실에 있어서 틈틈이 주요 곡들을 들을 수 있었다.(하지만 이건 순전히 내 운이다.)30년대 가수들의 창법은 순수하다.꺽기가 트로트의 필수처럼 받아들여지는 현실이지만 30년대 가수들은 지금 같은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다.이 책같은 경우 유성기 복각음반 컴필레이션CD같은 것이 하나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이애리수의 <황성의적>은 어떠했는지...얼굴없는 가수 미스 리걸의 목청은 어떠했는지...기생가수 왕수복,선우일선은 또 어떠했는지.. 비용부담이 있었겠지만 그 정도 기획은 할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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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퍼온글] * 스피노자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 담론비평(2007. 4. 4)  / "상상적 관계가 인간의 사회적 삶의 기초다"

 

진태원 박사,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 시도

 

리뷰팀 review@dambee.net

 

   
▲ 스피노자(네덜란드, 1632~1677). 그는 1673년 하에델베르크 철학교수직을 제의받았으나 철학의 자유를 지킨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에티카'의 철학자 스피노자를 해석하는 방법은 범신론적 해석과 역량론적 해석 두 가지였다. 독일 관념론 이래로 스피노자 철학은 범신론으로 해석되어 왔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스피노자의 실체는 아무런 부정성도 포함하고 있지 않은 실정적인 절대자이며, 역동성을 결여한 부정적이고 정태적인 존재이다.

그리고 유한 양태들로 지칭되는 자연 안의 실체들은 독자적인 개체성이나 실재성을 결여한 채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절대적인 일자로서 실체에 포섭되어 있다. 이에 따라 스피노자 철학에는 인간의 개체성이나 재유를 위한 여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지난 1960년대 이래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새로운 스피노자 연구는 이러한 범신론적 해석을 비판하면서 스피노자 철학의 진면목을 드러내주었다. 역량론적 해석이라 불리는 이것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근본적으로 역동적인 실재라고 주장했다. 곧 실체는 무한하게 많은 방식으로 무한한 실재들을 생산하는 절대적인 역량을 지니며, 자연은 실재들의 생산과 변화, 소멸의 운동이 지속적으로 이뤄지는 역동적인 장이라고 파악했다. 이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투쟁) 개념이다.

   
▲ 코나투스 본능을 설명하고 있는 스피노자의 친필.
이러한 존재론적인 역량은 개인들이 예속적인 실존 조건에서 벗어나 자유를 달성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 마르샬 게루, 질 들뢰즈, 알렉상드르 마트롱, 피에르 마슈레 등과 같은 스피노자 연구자들의 작업에 기반을 둔 역량론적 관점은 스피노자 철학이 지닌 이론적 독창성을 잡아내고 이를 실천적 의의로 연결시켰다는 점에서 스피노자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역량론은 여전히 스피노자의 진면목을 충분히 드러내지 못한 점이 있다. 피에르 마슈레의 스피노자론을 국내에 번역 소개하고, 관련 논문을 발표해온 진태원 서울대 강사가 최근 스피노자에 대한 자신의 논의를 박사논문으로 완성해 발표했다.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관계론적 해석'(2006, 서울대학교)이 그것이다.

 

 

 

 

 

박사는 이 논문에서 스피노자의 존재론과 인간학의 8가지 주제를 검토하면서 관계론적 해석의 가능성과 타당성을 보여주고 있다.

1. 스콜라철학에서 데카르트에 이르는 용법과 비교해볼 때 스피노자의 자기원인 개념의 독창성은 이 개념을 탈신학화했다는 점에 있다. 곧 자기 원인 개념은 부동적인 절대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실체의 절대적인 역량으로 한정될 수도 없으며, 자연 전체를 '자기'의 재귀적 구조와 분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2. 스피노자의 실체는 인격적이고 초월적인 절대자가 아닐 뿐 아니라, 속성들보다 존재론적으로 상위에 있는 어떤 통일적 기체(基體)도 아니다. 곧 그것은 무한하게 많은 속성들을 통해 구성되고 표현되는 무한한 인과연관의 동일성이다. 이런 의미에서 스피노자의 실체는 탈실체화된 실체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3. 실체와 양태 관계는 인과관계로 일의적으로 표현된다. 스피노자의 인과성 개념의 독창성은 갈릴레이가 설립한 운동의 상대성 개념과 유한 양태들의 인과 역량이라는 개념을 결합했다는 점에 있다. 곧 타동적 인과성과 내재적 인과성은 두개의 상이한 인과관계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의 동일한 변용의 연관을 가리킨다.

4. 스피노자의 개체는 분할 불가능한 원자가 아닐뿐만 아니라,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에서 독립하여 성립하는 존재론적 기초 단위도 아니다. 그것은 개체 자신의 부분들이 서로 맺고 있는 운동과 정지의 관계를 통해 구성되며, 따라서 항상 이미 다른 개체들과의 관계를 자신의 본질 안에 포함하고 있다. 이는 인간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5. 스피노자에서 인간의 사회적 삶의 자연적 기초를 이루는 것은 상상적 관계다. 상상적 관계는 변용의 질서와 연관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인간의 삶의 자연적 기초이면서 목적론적 편견과 미신의 인간학적 뿌리를 이루고 있다.

6. 스피노자에게는 인식론이라는 독립된 분과는 존재하지 않으며, 인식의 문제는 항상 윤리의 문제의 관점에서 다루어진다. 여기서 중심 쟁점은 인간의 인식과 삶을 구속하는 상상적, 예속적 관계를 어떻게 개조하여 적합한 인식을 얻고 자유를 획득하느냐에 있다. 이는 공통 통념들의 형성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7. 스피노자 인간학의 또다른 축은 정서 개념이다. 스피노자는 정서 개념을 통해 수동성과 능동성이라는 개념, 그리고 수동성에서 능동성으로의 이행이라는 문제를 새롭게 재기한다. 스피노자의 독창성은 수동과 능동을 관계론적 개념으로 개조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8. 스피노자의 자유 개념의 특징은 자유를 관계론적 범주로 규정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곧 그에게 한 개인의 자유는 다른 개인의 자유와 분리될 수 없으며, 한 사람의 능동화는 다른 사람들의 능동화를 촉진한다. 이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신을 향한 사랑과 신의 지적 사랑이라는 개념이다.

진 박사는 이상의 8가지로 스피노자 철학의 독창성을 좀더 명쾌하게 해석하고, 그 현재성을 평가하고 응용하기 위한 이론적 지침을 제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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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누아 > 외경읽기-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고정희(돌바람님)

외경읽기-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고정희


무덤에 잠드신 어머니는
선산 위에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말씀보다 큰 여백을 걸어두셨다
석양 무렵 동산에 올라가
적송밭 그 여백 아래 앉아 있으면
서울에서 묻혀온 온갖 잔소리들이
방생의 시냇물 따라
들 가운데로 흘러흘러 바다로 들어가고
바다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 것은 뒤에서
팽팽한 바람이 멧새의 발목을 툭, 치며
다시 더 큰 여백을 일으켜
막막궁산 오솔길로 사라진다

오 모든 사라지는 것들 뒤에 남아 있는
둥근 여백이여 뒤안길이여
모든 부재 뒤에 떠오르는 존재여
여백이란 쓸쓸함이구나
쓸쓸함 또한 여백이구나
그리하여 여백이란 탄생이구나

나도 너로부터 사라지는 날
내 마음의 잡초 다 스러진 뒤
네 사립에 걸린 노을 같은, 아니면
네 발 아래로 쟁쟁쟁 흘러가는 시냇물 같은
고요한 여백으로 남고 싶다
그 아래 네가 앉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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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이누아 > 그리스도 폴의 강-구상(니르바나님)

그리스도 폴의 江

                  -具     常-

 

그리스도 폴!
나도 당신처럼 강을
회심의 일터로 삼습니다.
허지만 나는 당신처럼
사람들을 등에 업어서
물을 건네주기는커녕
나룻배를 만들어 저을
힘도 재주도 없고
당신처럼 그렇듯 순수한 마음으로
남을 위하여 시중을 들
지향도 정침도 못 가졌습니다.

또한 나는 강에 나거서도
당신처럼 제상 일체를 끊어 버리기는커녕
속정의 밧줄에 칭칭 휘감겨 있어
꼭두각시 모양 줄이 잡아당기는 대로
쪼르르, 쪼르르 되돌아서곤 합니다.

그리스도 폴!
이런 내가 당신을 따라
강에 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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