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lastmarx > 학습을 위한 책 소개(2007년 1월)

학습을 위한 책 소개(2007년 1월)

2004년 12월에 <학습을 위한 책 소개>라는 글을 발표한 적이 있다.
http://blog.naver.com/lastmarx/60008213975
몇 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책들을 더 읽었다. 돌아보면 그 글에서 추천한 책 가운데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들도 발견하고 새로 읽은 것 가운데 꼭 추천하고 싶은 책들도 생겼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글을 읽었기에 늘 추가할 것과 제외할 것을 재정리한 새 목록을 작성하고 싶었다.
‘학습’의 주제와 대상은 맑스, 맑스주의, 공동체주의(Communism) 등이다. 내가 읽은 책들이며 한국어로 출판된 것들이다. ‘전기, 교양서, 철학과 사상, 정치경제학 비판, 참고서와 맑스의 주요 작품들’ 등으로 분류해서 소개한다. 각 책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고 순서에 특별한 의미는 없다.

1. 전기
1) Jonathan Wolff,『WHY READ MARX TODAY?』(2002) /『한권으로 보는 마르크스』(책과함께, 2005)
2) Francis Wheen,『Karl Marx』(1999) /『마르크스 평전』(푸른숲, 2001)
3) Isaiah Berlin,『Karl Marx : His Life and Environment』(1939) /『칼 마르크스』(평민사, 1982 / 미다스북스, 2001)
4) Heinrich Gemkow,『Eine Biographie über Karl Marx und Friedrich Engels』(1984) /『맑스 · 엥겔스 평전』(시아출판사, 2003)
5) Robert Service,『Lenin: A Biography』(2000) /『레닌』로버트 서비스 (시학사, 2001)
6) Isaac Deutcher,『The Prophet Armed, Trotsky 1879-1921』(1954) /『트로츠키』(두레, 1985 / 필맥, 2005)
7) Edmund Wilson,『To the Finland Station』(1940) /『인물로 본 혁명의 역사』(실천문학사, 1990)

 

 

 

 

 2. 교양서
1) Walter Benjamin,『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민음사, 1983)
2) Thomas More,『Utopia』(1516) /『유토피아』(서해문집, 2005)
3) Niccolò Machiavelli, 『Il Principe(The Prince)』(1513, 1532) /『군주론』(까치, 1994, 2003)
4) Paul Lafargue,『The Right to be Lazy』(1883) /『게으를 수 있는 권리』(새물결, 2005)
5) C. Douglas Lummis(2000),『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녹색평론사, 2002)
6) Leo Huberman,『Man’s Worldly Goods - The Story of Wealth of Nations』(1936, 1968) /『자본주의 역사 바로 알기』(책벌레, 2000)
7) Dietrich Schwanitz,『Bildung - Alles, Was Man Wissen Muss』(1999) /『교양 -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들녘, 2001)

 

 

 

 

3. 철학과 사상
1) Georg Lichtheim,『From Marx to Hegel』(1971) /『마르크스에서 헤겔로』(문학과지성사, 1987)
2) Karl Löwith,『Von Hegel zu Nietzsche』(1939) /『헤겔에서 니체에로 : 19세기 사상의 혁명적 결렬 ― 마르크스와 키아케고어』(민음사, 1985, 2006)
3) Howard P. Kainz,『An Introduction to Hegel: The States of Modern Pilosophy』(1996) /『헤겔 근대 철학사 강의 - 근대 철학의 문제와 흐름』(이제이북스, 2005)
4) Agnes Heller,『Bedeutung und Funktion des Begriffs Bedürfnis im Denken von Karl Marx』(1974) /『The Theory of Need in Marx』(1976) /『마르크스에 있어서 필요의 이론』(강정인 옮김, 인간사랑, 1990)
5) Louis Althusser, 『Pour Marx』(1965) /『맑스를 위하여』(백의, 1996)
6) 가라타니 고진,『TRANSCRITIQUE-KANTO TO MARUKUS』(2001) /『트랜스크리틱』(한길사, 2005)
7) Karl Löwith, (1932) /『베버와 마르크스』(문예출판사, 1992)

 

 

 

 

4. 정치경제학 비판
1) Roman Rosdolsky,『Zur Entstehungsgeschichte des Marxschen ‘Kapital’; Der Rohentwurf des Kapital 1857-58』(1968) /『The Making of Marx’s ‘Capital’』(1977) /『마르크스 자본론의 형성』(백의, 2003)
2) Ben Fine & Alfredo Saad-Filho,『Marx’s Capital』(1970년대 초, 2004) /『마르크스의 자본론』(책갈피, 2006)
3) Louis Althusser,『Lire le Capital / Reading Capital』(1968) /『자본론을 읽는다』(두레, 1991)
4) Robert L. Heilbroner,『The Worldly Philosophers』(1953, 1999년 개정 7판) /『세속의 철학자들』(이마고, 2005)

 

 

 

  

5. 참고서와 맑스의 주요 작품들
- Tom Bottomore,『A Dictionary of Marxist Thought』(1983) /『마르크스 사상사전』(청아, 1988)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박종철출판사, 총 6권)
- 맑스 읽기 Ⅲ : 맑스의 작품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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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이상한 나라 쿠바의 비밀과 저력

이상한 나라 쿠바의 비밀과 저력
[민주-진보의련 쿠바연수보고] "또다른 세계는 있다"

1. 안타까움, 분노, 감동의 첫 방문

지난 2006년 여름, 멕시코시티, 상파울루, 아바나를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멕시코시티와 상파울루의 그 악명 높은 대기오염을 2주간 몸소 체험하면서 얼굴에는 뾰루지들이 화려한 군무를 펼쳤지만 그건 아무런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나에겐 ‘생태도시’ 아바나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맑은 공기와 푸른 바다, 초록색 도심 농장이라면 그깟 뾰루지쯤은 하룻밤 사이에 사라질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밤늦은 비행기로 아바나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 로뻬즈 선생님을 따라 아바나 구도심에 진출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찜통 같은 무더위 속에서 50년도 넘은 고물차들이 내뿜는 시커먼 매연은 멕시코시티와 상파울루를 잇는 완벽한 공해 3종 세트를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저기요, 여기가 생태 도시?” 이어진 일주일 동안의 아바나 체류는 무척이나 복잡한 심경을 자아냈다.

훌리아의 하숙집에서 만난 한인 3세 루드밀라는 아바나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더운 여름, 그녀가 살고 있는 동네에는 사흘째 물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남편, 세 살 난 아들과 함께 살고 있는 다섯 평 남짓의 단칸 아파트에 말이다. 그녀는 체념한 듯, 처음 있는 일도 아니라고 했다.

   
  ▲ 서점과 기념품 가게에 넘쳐나는 체 게바라
 
생태시스템 연구소는 혁명 전 대통령 관저를 개조해 만든 곳으로, 일반인에게 공개되지 않는 그곳 보존실에는 쿠바와 라틴 아메리카 지역의 주요 생태표본들을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건물은 심하게 낡았고 항온/항습 장치는 고장난 지 오래라, 라틴 아메리카에서 하나밖에 없다는 파충류 표본은 ‘그냥’ 알코올 표본병에 담겨 선반 위에 놓여 있었다.

혁명박물관에는 혁명 이전의 사회상을 보여주는 사진들이 여러 장 전시되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길거리 성매매 여성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이 있었다. 이날 동행한 엘리자베쓰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아마도 혁명 이후, 지금이 성매매가 가장 많을 거예요. 저도 길을 지나다가 외국 남자들한테 성매매 제안을 받고 거절한 적이 여러 번 있어요.” 그녀는 아바나 대학에서 생태학 과정으로 석사까지 마친 재원이다.

브라질의 아이들이 호나우두를 꿈꾸며 축구에 빠져든다면, 쿠바의 아이들은 춤에 빠져든다. 춤을 즐기는 문화 탓이기도 하지만 춤꾼이 되어 유명 무대에 서고 해외 공연을 하거나 외국 관광객에게 춤을 가르치는 것은 답답한 삶을 탈출하는 확실한 지름길 중 하나기 때문이다. 재능 있는 춤꾼들 목에 걸린 MP3 플레이어나 최신 기종의 노키아 휴대전화가 이를 증명한다.

이러한 광경들은 나의 안타까움과 분노를 자아냈다. 이러한 물질적 어려움을 야기한 미국의 무자비한 금수조치에 화가 났고, 이제 한낱 낭만주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체 게바라를 열심히 팔아먹는 쿠바인들에게 화가 났다. 그리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하지만, 인구 수백 명의 작은 마을에 자리하고 있는 작은 진료소와 마을 도서관, 그리고 동네에서 우연히 마주친 안과의사 마리셀의 바리오 아덴뜨로 이야기는 분명 또 다른 세상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침 휴가차 왔다가, 내일 다시 베네수엘라 진료소로 돌아가는 길이라면서, 그 곳에서는 몰려드는 환자 진료와 방문 진료, 마을 주민 교육과 자료 정리, 의대생 실습 교육까지, 매일 새벽 한 두시까지 일한다는 마리셀의 이야기는 도무지 불평인지 자랑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처음 방문한 내게, 쿠바는 정말 이상한(?) 나라였다.

 

 

2. 다시 찾게 된 쿠바

지난 2월, 남들 평생 한 번 가기도 쉽지 않은 쿠바를 두 번째 찾게 되었다. 민주노동당 진보의료연구회가 기획한 캐나다와 쿠바의 보건의료 탐방 프로그램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지난번의 방문이 개인 여행으로 쿠바 사람들의 실생활을 가까이 볼 수 있는 기회였다면 이번에는 좀 더 체계적으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공식 프로그램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이는 그동안 민주노동당에서 고민해오던 ‘무상의료’ 의제를 좀 더 발전시키고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점들과 대안들을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즉, 조세를 통해 건강보장 재원을 마련하지만 서비스 제공은 비영리 민간 부문이 주도하는 캐나다, 재원과 서비스 전달을 모두 국가에서 맡은 쿠바의 체계를 살펴보면서 우리 사회에 적합한 개혁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고 준비하는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것이었다.

이 글은 그 유명한 쿠바의 보건의료 체계와 현지 상황들을 소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또 다른 세계가 가능할 뿐 아니라 현존하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할 것이며, 한편으로 그 성공과 실패, 역경의 경험들 속에서 한국사회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 Sierra del Rosario 산골 마을회관에 위치한 공공도서관

 

 

3. 건강 올림픽, 쿠바

평균 수명을 기준으로 국가별 순위를 나타내는 ‘건강 올림픽’ 결과는 발표 때마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미국과 쿠바의 순위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는 했다. 다소 어처구니없는 일 아닌가? 세계 최고 부국 미국과, 바로 미국의 코앞에서 금수조치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쿠바가 순위 경쟁을 벌인다는 것이?

   
  ▲ 건강 올림픽 2004 결과표
 

쿠바의 건강성과를 몇 가지만 들여다보자. 쿠바는 1962년에 세계 최초로 소아마비를, 1996년에는 홍역을 퇴치한 나라이며, 세계보건기구에서 인정한 고혈압 관리와 치료가 가장 잘 되고 있는 나라들 중 하나이다. 하지만 쿠바의 1인당 국내 총생산은 미국의 1/10도 채 안 되는 수준이며 한국의 1/6 정도에 불과하다.

국민 1인당 보건의료에 지출하는 총 비용은 251달러로 미국의 6,102달러에 비하면 4% 남짓.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균 수명은 미국과 거의 비슷하며, 심지어 영아사망률은 미국보다 낮다. 비슷한 소득 수준을 가진 라틴 아메리카 이웃 에콰도르의 영아사망률은 23에 가깝고,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OECD에 가입된 멕시코의 영아사망률이 19.7이나 된다는 점은 쿠바의 성적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를 말해준다. 

   
  ▲ * 자료원: 1) MEDICC. Cuba Health Profile 2007, 2) OECD. OECD Health Data 2006, 3) CIA. The World Facts Book 2006
 
그렇다면 쿠바인들의 건강수준이 이렇게 높을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타고난 체력? 아니면 쿠바에만 서식하는 신비의 약초 때문에?

1959년 쿠바 혁명이 일어나기 전, 대부분의 피식민 독재국가가 그렇듯이 그렇듯 쿠바인들의 삶은 처참했다. 특히 농촌지역의 상황은 더욱 열악해서, 먹을 것이 부족하고 글을 배울 학교가 없었으며, 아프면 찾아갈 병원이 없었다.

혁명이 일어난 후에도 고통은 지속되었다. 1959~1967년 사이 전체 의사 6,300명 중 3천명이 쿠바를 떠났으며, 인구 6백만의 섬나라에 단 한 개의 의과대학, 16명의 교수들만이 남아 있었다.

혁명의 적들은 대부분 미국으로 도망갔지만, 그들이 남기고 간 것은 높은 실업률과 문맹률, 파괴된 자연, 식민지형 사탕수수 농장들뿐이었다. 게릴라 전투에서 성공한 쿠바 민중들에게 이제 더 어려운 과제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4. 쿠바 보건의료체계의 발전

혁명전쟁 중에도 임시 막사에서 학교와 병원을 열었던 전통을 이어, 쿠바는 처음부터 교육과 보건의료를 국민들 누구나 누려야 하는 권리이자 국가의 책임이라고 규정하였다. 1960년대에 쿠바는 농촌 지역에 50개의 병원을 세우고 도시 지역에 160 여개의 지역사회 클리닉을 개설했으며 처음으로 어린이 국가예방접종 사업을 실시했다.

물론 의과대학을 설립하여 의사를 양성하는 데에도 큰 노력을 기울였다. 70년대에 들어 종합병원 설립과 제약 산업 투자가 늘어나는 한편, 포괄적인 일차의료를 강조하는 지역사회 클리닉 기능도 강화되었다. 이러한 성과들은 세계보건기구를 비롯하여 국제적인 관심을 얻게 되었으며, 1980년대에는 3차 전문 의료기관과 생명공학 연구에 중점을 두게 된다.

1986년에는 의사-간호사가 팀을 이루어 지역사회에 함께 살면서 지역사회 건강을 책임지는 가정의 프로그램이 도입되었고, 90년대 초반에 이르면 95% 이상의 주민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에서 주치의 진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가정의들은 약 150 가구 (600~800명)를 맡아 돌보고 있으며, 지역사회에서 발생하는 건강 문제의 80% 이상을 해결하고 있다. 이들이 전형적인 의사의 역할인 질병 치료는 물론 질병 예방과 건강증진, 지역사회 발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있는 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 진료소(consultorio)에서 가정의가 진료하는 모습

   
  ▲ 아바나 골목에 자리한 허름한 외관의 진료소 입구
 

한편, 쿠바의 제약/생명공학 연구 기술은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국내에서 사용하는 약제의 80%는 자체 생산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1981년 이후 인터페론을 자체 생산하여 세계 2위의 생산국으로 자리 잡기도 했다.

또한 항체를 이용한 각종 진단 키트와 백신 개발에도 성공을 거두어 쿠바 어린이들은 13종의 백신을 기본 접종으로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이웃의 가난한 남미국과들에게도 도움을 주고 있다. 국가기본예방접종조차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생명공학을 21세기 노다지쯤으로 여기고 있는 한국의 모습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5. 보건의료, 그 이상의 무엇?

하지만, 쿠바인들의 높은 건강수준은 보건의료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허름한 치과진료소 벽면과 나름 조화를 이루고 있는 역시 허름한 도표가 보여주듯 건강 결정요인 (determinantes de salud)은 생활습관과 사회적 요인들까지 보다 광범위한 조건들을 포괄하고 있다.

   
▲ 치과진료소, 관할구역의 지도와 손으로 그린 ‘건강 결정요인 (determinantes de salud)’ 도표가 붙어있다.
 
그 중에서도 교육이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 중 하나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성의 교육수준이 높아질수록 영아사망률이 낮아진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혁명 전 성인의 1/4이 문맹이었지만, 혁명 직후 광범위한 문맹퇴치 운동은 혁혁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현재 12년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대학까지 무상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의과대학도 예외가 아니다.

그 대신 대학을 졸업한 사람들은 의무적으로 2년 동안 사회 서비스를 해야 한다. 지난 여행 때 생태연구소 방문을 도와준 엘리자베쓰도 그 연구소에서 ‘의무 복무’를 하는 중이었으며, 끝난 후에도 그 곳에 계속 남아서 연구 활동을 하고 싶어 했다. 의대생 같은 경우, 성적이 가장 좋고 뛰어난 학생일수록 산간 오지에 파견을 보내고, 성적이 나쁜 학생들은 교수들의 추가 지도가 가능하도록 학교 인근 지역에 배치한다고 했다.

쿠바 사회의 저력은 90년대 이후 오히려 본격적으로 드러났다. 80년대 후반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해체, 때마침 이루어진 미국의 비인간적 금수조치는 쿠바인들에게 엄청난 시련을 안겨다 주었다. 2년 동안 교역의 85%가 감소했고 경제규모는 35% 감소했으며 의약품과 장비 구입에 필요한 통화는 70%나 감소했다.

연료가 없어 대중교통이 멈추고 그 열대 기후에 16시간씩 전기 공급이 중단되거나 급수가 중단되는 사태가 이어졌다. 미국의 금수제한 조치는 그야말로 ‘인종학살(genocide)’ 수준이어서, 식량과 의약품 원조마저 심각한 제한을 받았다.

놀라운 점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건강 수준은 그리 나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 국민의 건강은 국가 정책의 최우선 순위를 차지했다. 보건 관련 예산의 절대 액수가 2/3나 감소하기는 했지만, 이는 군사비와 다른 행정비용을 희생시켜 얻은 것이었으며 이 어려운 시기 동안 꾸준히 증가했다.

소련으로부터의 물자 지원이 끊기면서 농약과 비료를 사용할 수 없게 되자 이전부터 준비해온 유기농업 방식을 도시 생태농업으로 정착시키면서 ‘지속가능한’ 개발의 모범을 창출하기도 했고, 의약품 부족을 만회하기 위해 제약/생명공학 산업에 더욱 집중했다.

IMF 방식대로라면 공적 투자를 대폭 축소시키고 보건의료를 사유화시키며, 시장을 완전 개방했어야 했다. 하지만 쿠바의 대응 방식은 달랐고, 이는 또 다른 사회적 가치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6. ‘노동자의 낙원’은 없다.

쿠바가 ‘노동자의 낙원’이라는 표현에는, 한편으로 환상, 그리고 또 다른 한편에는 비아냥이 숨어 있다. 하지만 40년 넘게 쿠바의 생태, 농업 프로그램에 자문을 해온 하버드 대학의 레빈스 교수는 이를 두고 따끔하게 지적한 적이 있다.

쿠바에서의 사회변혁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쿠바인들이 자기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그 좌절과 갈등을 직접 경험하거나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감히 ‘낙원’이라는 말을 쓸 수 없다는 것이다. 쿠바가 그동안 놀라운 성공을 보여준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의 상황이 위태롭고 어렵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물자는 여전히 부족하다. 훌리아가 가정의한테 받아왔다는 처방전은 부조화 그 자체였다. 종이가 부족해서 따로 처방전 용지를 만들지 못하는지라, 의사는 이면지를 접어 침을 발라 찢은 후에 볼펜으로 약 이름을 적어주었다.

거기 적힌 약 이름만 본다면 21세기 진료실 풍경을 연상할 수 있다. 하지만 환자가 진료실을 나설 때마다 의사가 종이 접어 침 바르고 있는 장면을 상상하노라면, 요즘 말로 ‘안습’이 아닐 수 없다.

그 뿐이랴? 의료용품 공급이 원활치 않아서 당뇨 환자들이 비합법적인 경로를 통해 주사기를 개인적으로 조달하는 경우들도 드물지 않단다. 제약 산업의 자생성이 높다고 하지만 원 물질은 여전히 수입에 의존해야 하고, 이는 미국의 금수조치 때문에 심각한 제한을 받고 있다.

50년 된 자동차들과 싸구려 기름에서 발생하는 매연 덕분에 생태도시의 이름은 무색해지고 있다. 이중 통화 경제 속에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부업을 해야 하고, 적지 않은 이들은 비합법의 영역을 넘나들고 있다.

아이들에게 물건을 파는 교사가 생겨나는가 하면, 관광객에게 가짜 시가, 가짜 럼주를 팔기도 한다. 론리플래닛의 여행 안내서에는 경제적 보상을 노린 쿠바인들의 성적인 접근을 어떻게 조심해야 하는지 친절한 설명이 달려있기도 하다. 외국 관광객을 접할 수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의 경제적 불평등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쿠바의 혁명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고, 지금까지 극복해온 것보다 몇 배나 더 어려운 과제가 남아 있다.

   
  ▲ 오리엘비스 부모님의 부업, 돼지 키우기
 

 

7.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할 뿐 아니라 현존하고 있다.

이라크처럼 석유가 달려 있는 것도 아니고, 이란이나 북한처럼 핵을 두고 대립하는 것도 아닌데, 미국은 그 작은 나라 쿠바에 대해 왜 그토록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 이는 아마도 ‘정치적’인 이유 때문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주류 세계와는 다른, 미국적 질서가 강요하는 방식과는 또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것을 쿠바가 현실에서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쿠바의 상황을 전할 때면, 상황을 지나치게 미화했다거나 혹은 한국과는 상황이 너무 다르기 때문에 별로 도움될 것이 없다는 비판의 목소리를 듣기 마련이다.

특히 이미 자기 돈으로 교육 문제니 의료 문제를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계층의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쿠바의 제도가 절실하게 다가올 이유가 없으며 그저 실현 불가능한 포퓰리스트적 발상이거나, 현실화된다면 질의 하향평준화를 가져올 불합리한 체계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많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이는 절박한 꿈일 수 있으며, 쿠바 의료서비스의 질은 이미 정평이 나 있다.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고 했다. 국민소득이 한국의 1/6 밖에 안 되고, 미국의 앞마당에서 허덕이는 쿠바가 하는 일을 우리가 ‘절대’ 하지 못할 이유가 과연 있을까?

오히려 한국 사회에서라면 무상의료를 최종 목표로 두기보다, 이를 기본으로 전인적이고 통합적인 지역사회 보건의료 체계를 구축한다는 좀더 원대한 구상을 해야 하는 것 아닐까?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원대한 구상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냉철한 분석과 구체적인 대안,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러한 노력을 가능하게 만드는 다수의 의식 변화가 아닐까 싶다. 또 다른 세계는 가능하다.

2007년 04월 26일 (목) 15:00:00 김명희 / 을지의대 예방의학과 교수 redian@redia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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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thirsty > 언어와 번역의 한계를 묻는다 – 피네간의 경야 엿보기
피네간의 경야(經夜)
제임스 조이스 지음, 김종건 옮김 / 범우사 / 2002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나라의 미야타 교코를 기다리며

 

우리는 이제 이 연속물의 우리들 애인들 사이에 확급擴及하고 있나니 (그대에게! 당신에게!) 농弄나이팅게일의 노포露包의 노래를 (알리스! 알리스델시오 미녀여!) 그들의 은신처로부터, 장미경薔薇景의 건초 속에 숨어, 매력림魅力林의 헤더 측구側丘 위에, 성聖 존 산山, 지니(신령神靈)땅, 우리들의 동료는 무어 마루공원으로부터 황혼박黃昏箔에 의하여 어디로 날랐던고, 스위프트(급急) 성소聖所를 찾아서, 일몰 시우時友 뒤를 (오보에! 여기저기에! 가위 휘청대는 점보点步! 나는 대쉬돌突해야 하나니!) 그들의 평화를 부분음部分音에 쏟아 붓기 위해 (프로프로 프로프로렌스), 달큼하고슬픈 경쾌하고유쾌한, 쌍이雙二조롱노래구애저求愛低. 한 피치의 모든 소리를 공명共鳴속에 조용히 보관할지라. 흑인까마귀, 갈가마귀, 첫째 및 둘째 그들의 셋째와 함께 그들에게 화가 미칠진저. 이제는 넘치는 류트 악기, 이제는 달시머, 그리하여 우리가 페달을 누를 때(부드럽게!) 그대의 이름을 골라내고 모음母音을 더하기 위해. (이 책, 359.31-360.6)* (이하 경야 經夜**).

* 여기 역문의 페이지와 글줄은 페이버 앤드 페이버(Faber and Faber)(런던) 출판사의 1939년 피네간의 경야의 원판본(세계 유일의)의 페이지를 그대로 따랐는데, 이는 독자는 물론 원본과 역본을 대조하는 연구자의 편의 도모를 위한 배려이다. (위 책, 역자 서문, p.28)

** 우리말로는 밤샘의 개념이 wake와 가장 가깝기는 해도, 우리 풍습과 서양 풍습이 1:1로 대응하는 것은 아니므로, 경야(經夜)라는 한자말을 쓰는 것으로 보이며, 이는 역자의 선택이라고 본다.

 

 

세상에서 가장 난해한(또는 가장 번역이 어려운) 문학작품이라고 할만한, 제임스의 조이스의 이 소위 Black Book은 세계적으로 번역본이 불어본, 독어본, 일어본 3종밖에 없었는데, 2002년 위 책이 나옴으로써 우리도 4번째로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위 글의 추천사 및 서문). 노학자(老學者)의 반세기에 걸친 그야말로 필생의 노작(勞作)에 대해, 아직 율리시스도 잘 모르는 비전문가인 아마추어가 왈가왈부한다는 것은 온당치 못한 일인 줄은 잘 알지만, 작품의 난이성과 연관하여 언급하거니와, 우리에게 외국문학은 결코 외국문학이 아니요, 원전은 우리의 자국문학으로 번역되어야 한다. 여기 역자의 노력은 보통의 독자들을 위한 가능한 한의 보편화를 위한 것이다(위 책 작품 소개, p.652)에 힘입어 진짜 보통 독자 입장에서 서평을 쓴다.

* 5년이 지난 지금은 이태리어, 스페인어, 네덜란드어, 헝가리어 등 다른 언어 번역본이 추가된다.

 

 

위의 번역문에 해당하는 원문의 꼭지를 보자.

 

 

We are now diffusing among our lovers of this sequence (to you! to you!) the dewfolded song of the naughtingels (Alys! Alysaloe!) from their sheltered positions, in rosescenery haydyng, on the heather side of waldalure, Mount Saint Johns, Jinnyland, whither our allies winged by duskfoil from Mooreparque, swift sanctuary seeking, after Sunsink gang (Oiboe! Hitherzither! Almost dotty! I must dash!) to pour their peace in partial (floflo floreflorence), sweetishsad lightandgayle, twittwin twosingwoolow. Let everie sound of a pitch keep steel in resonance, jemcrow, jackdaw, prime and secund with their terce that whoe betwides them, now full theorbe, now dulcifair, and when we press of pedal (sof!) pick out and vowelise your name. (359.31-360.6)*

* Finnegans Wake(이하 Wake)는 1939년 런던 Faber and Faber에서 출판된 이래 재편집된 적이 없어, 그 이후 모든 판본의 페이지 및 줄이 원래 책과 똑 같다. 그래야만 연구자들이 서로 같은 곳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위의 표시는 359페이지 31행부터, 360페이지 6행에 걸친 텍스트라는 뜻이다. 필자의 인용은, 위 Faber and Faber (London)의 1939년본과 동시에 미국에서 나온 Viking 판을, 1999년 다시 찍은 Penguin판에서 나왔다.

 

 

위의 두 단락 각각의 의미는 고사하고라도, 그들 둘 사이의 필연적인 대응성을 발견할 수 있는 사람은 정말 대단한 사람일 것이다. 필자 같은 범부(凡夫)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다. 더구나 역자가 연구자들을 위해 한국어번역판을 원본과 페이지, 줄까지 그대로 맞춘 것을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다(이 부분은 뒤에 다시 언급하겠다).

 

 

여기서 다음 해설(guide)을 한번 보자. 좀 길기는 해도 이 서평의 논리상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우리 같은 아마추어 독자들이 모인 독서모임 장면을 생생하게 그리는 방법으로 경야를 엿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편안히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Derek Attridge*, Reading Joyce, in Derek Attridge ed. The Cambridge Companion to James Joyce, 2nd edition 3rd print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6, pp.10-17)

* 데렉 애트리지는 영국 요크대학(the University of York)의 영어교수로 유명한 조이스 학자이다. 번역은 필자가 직접 한 것이며, 괄호 속 해설에 필자 표시가 있는 것은 필자가 단 것이고, 표시가 없는 나머지 괄호 안 설명은 원래 있는 것이다.

 

 

경야를 꼭 처음부터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제 일군(一群)의 독자들이 있어, 다른 부분보다 다중(多重)의 의미가 덜 빼꼭 찬 부분부터 읽기로 했다. 그 중 한 사람이 자원해서 위의 부분을 큰 소리로 읽는다. 그러면 반응은, 계속되는 명백히 말도 안되는 소리에 대한 썰렁함과 아무리 우습든 일말의 센스가 보인다는 데 대한 낄낄거림이 섞인 것이리라. 괄호와 현란한 수식에 의해 방해를 받기는 하지만, 구문의 문법적 뼈대는 아주 단단해서, 1인칭 복수(we)의 화자(話者)가 2인칭 청자(聽者)에게 무언가를 선언하며 명령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면, 이해를 위한 발판이 확보된 것이다. We are now diffusingthesongs of the naughtingalesfrom their sheltered positionswhither our allies wingedto pour their peaceLet everie sound of a pitch keep stilland when we press of pedalpick out and vowelise your name(우리는 퍼뜨리고 있다나이팅게일의 노래를그들의 보호된 위치로부터그곳에서는 우리 동맹들이 날아올랐다그들의 평화를 쏟아 붓기 위해한 음조의 모든 소리를 조용하게 하라그리고 우리가 페달을 밟을 때골라내서 네 이름을 말하라).구문의 안정성경야의 특징이며, 단락의 의미를 풀어냄에 있어서, 이 풍부한 말 잔치가 매달려 있는 뼈대의 구조를 추적하는 것을 종종 도와준다.

 

이 독서그룹의 멤버들이 다음으로 언급하기 시작한 것은 서로 관련된 용어들이 모여 있다는 것이며, 그 중 어떤 것들은 말장난(pun)과 합성어(portmanteau)에 반쯤 숨겨져 있다. 이들 집합 중 가장 뚜렷한 것은 와 관련이 있다. 모든 이들이 naughtingelsnightingales로 들었고, 텍스트를 보지 않고 듣기만 한 사람은 lightandgayle에서도 똑 같은 단어를 들었다고 한다. (누군가가 경야를 읽어줄 때는 책을 내려놓은 것이 종종 도움이 되는데, 시각적으로 모습을 그리다 보면, 청각적인 울림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단서에 이어, 이탈리아어를 아는 한 회원은 이상한 단어 twosingwoolow가 이탈리아어 usignolo를 잘못 발음한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이 단어를 영어로 번역하면 역시 nightingale이 된다. 이 집합에, winged(날아올랐다), swift(칼새), bird sanctuary(조수 보호구역)의 의미인 sanctuary(금렵구), crow(까마귀), jackdaw(갈가마귀), 이런 단어를 덧붙이는 데는 암호 해독이 필요 없으리라. 또 누군가가 Hitherzither이란 아마도 칼새 같은 새들이 여기저기(hither-and-thither) 비행하는 모습을 묘사한 것 아니냐는 의견을 내놓을 수 있다. 어쨌든 독서그룹은, 새들이 내는 소리에 중점이 주어져있다는 사실과, 많은 반복어구들이 새들의 울음소리에 대한 전통적인 표현을 생각나게 한다는데 동의한다. 즉, to you! to you!to whit!(짹짹 새소리 필자) to whoo(부엉이 같은 후우우 울음 소리 필자)!를 반영하는데, 이 사실은 나이팅게일에 더해서 또 다른 밤새인 부엉이의 존재를 나타낸다. 그리고 twittwin짹짹거리는(twittering) 새 울음을 암시한다. 다른 구절도 역시 비슷한 방법으로 만들어진 것 같은데, Alys! Alysaloe!floflo floreflorence가 그것들이다. 누군가 이 단락이 songtwosingwoolow에 숨겨진 sing 양쪽을 다 포함하고 있으며, 나이팅게일의 울음에는 가끔 pour(to flow in a stream. 쉴새 없이 떠들다, 노래하다)라는 표현이 쓰인다는 것을 지적한다. 이제 구문의 구조로부터 점점 의미 형태가 갖춰지고 있지만, 그 의미는 영어문법의 어순에 의해 제한되는 가능성을 훨씬 넘치기 시작한다. 이해 불가능한 것들이 갑자기 의미를 드러내고, 모순되는 것들이 어떤 패턴을 드러내기 시작할 때마다, 이 발견들은 뭔가 드러내주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만족을 주는가 하면 괜히 들뜨게 만들기도 한다.

 

잠시 쉰 뒤, 누군가 Florence가 또 다른 Nightingale이라는 걸 알아차리고(유명한 간호사 Florence Nightingale - 필자), 곧 이어 19세기의 유명한 소프라노 Jenny Lind(여기서는 분명히 지명을 나타내는 Jinnyland로 바뀌어져 있다)가 영국에서 스웨덴의 나이팅게일(the Swedish Nightingale)(여기서는 sweetishsad lightandgayle로 되었다)로 불렸다는 걸 기억한다. 신화학에 관심을 가진 다른 멤버가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지만 동의를 얻지 못한다 - 혹시 terce Tereus가 Philomela를 강간한 것(그리스 신화에서 나쁜 형부 Tereus, 언니 Procne, 동생 Philomela를 둘러싼 치정 및 복수극 필자)과 관련이 없는지? 필로멜라 역시 나이팅게일로 변했다. 새 울음에 관련된 집합은 인간의 노래로, 여자에게로, 아마도 육체적 욕망까지로 급격히 늘어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새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생각되는 lovers, 그럼 오페라와 다른 인간의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 또는 성적 의미에서의 연인들이 아닌가? 이 점에 대해서는 다시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모든 해석들이 글과의 관련하에서 주장되어질 수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 모든 가능성을 하나의 유기적인 전체로 통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떤 미묘한 성조(聲調)도, 어떤 상상된 인간의 상황도 이 모든 의미를 동시에 유효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 같다. 경야는 언어가 의미를 지니기 위해서는 단일한 의도와 주관성에 복종해야 한다는 믿음을 깨뜨린다.

 

이제 그룹이 인간의 노래에 주목하게 되자, 새로운 용어들의 집합이 나타난다. 한 사람이 아까부터 마음에 걸리는 rosescenary haydyng가 가장 다산(多産)한 오페라 작곡가 중 두 사람인 로시니(Rossini)와 하이든(Haydn)을 가리키는 것 같다고 한다. 다른 사람이, twosingwoolow가 연인의 슬픔을 나타내는 노래인 sing willow(애인의 죽음을 슬퍼하는 노래. 옛날 버드나뭇가지나 고리를 가슴에 달고 그 뜻을 나타냈다고 한다 - 엣센스 영한사전. 필자)의 버전을 포함하는 것 같다고 지적하며, 오셀로(Othello: 세익스피어의 희곡 필자)에서 데스디모나(Desdemona)의 Willow Song, 다시 새들로 돌아가서, 미카도(The Micado: 영국의 작곡가 아서 S. 설리번(Arthur S. Sullivan)의 오페라- 필자)에서 자살하는 곤줄박이류 새에 관한 코코(Ko-Ko)의 노래를 인용한다. 세 번째 사람은 서구 교회(로마 카톨릭 교회 필자)의 전통에 익숙한데, prime(아침기도)terce(3시경)가 각각 성무일도(聖務日禱) 중 처음 두 기도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그는 또 vowelisevocalise와 비슷하여 영어동사로서는 sing의 뜻을, 불어의 명사로서는 노래하는 것(또는 노래연습)이라는 의미를 가진다고 덧붙인다. 토론이 계속됨에 따라, 인간의 노래에서 음악과 소리에까지 점차 보편적으로 확대되어 간다. pitch(음조)resonance(공명)은 분명히 이 집합에 속하며, 사전을 찾아본 누군가가 sequence에는 곡조의 반복 외에도 서구 교회의 영창 또는 악곡의 뜻이 있다고 알려준다. 또 partials에는 화음의 고성부(또는 부분음部分音)라는 뜻이 있다는 것도. 이들은 곧, 글에 있는 약간 낯선 오케스트라 악기를 찾아내기 시작한다. gang에는 gong(벨, 공)이, Oiboe에는 oboe(오보에)가, Hitherzither에는 zither(치터: 기타 비슷한 현악기 필자), theorbe에는 theorbo(일종의 류트)(중세 현악기 - 필자)가, dulcifer에는 덜시머(현을 때려 소리를 내는 악기로 피아노의 원형 필자)가, 그리고 암시적으로 pedal(sof!)에는 피아노가 들어 있다. 그리고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종류의 조직적 소리가 Almost dotty! I must dash!에 이해 드러나는데, 바로 모스부호이다. (모스부호는 점(dot. 단점短點)과 대시(dash. 선 또는 長點)로 이루어져 있다 필자).

 

다음으로 (sexuality) 문제가 다루어져, 이것 역시 일련의 연결된 의미로 이끄는지 볼 필요가 있다는 제안이 들어온다. 여러 멤버가 naughtingelsnightingales뿐만 아니라, naughty girls(행실 나쁜 계집애들)(또는 영국 상류층 발음을 빌면 gels) (『더블린 사람들』의 “하숙집(The Boarding House)”에서, 딸 폴리 무니는 이렇게 노래한다. “I’m a naughty girl. You needn’t sham: You know I am.” – 필자)가 포함되어 있다고 같이 지적한다. 또 다른 의견도 나오는데, waldalure에는 allure(유혹하다)는 단어가 숨어 있고(그리고 성적 유혹이 공중에 떠 있다면, 아마 lure(미끼))(낚시 장면을 상상하라 필자), twosingwoolow에는 woo(구애, 구혼)이 있다. 여자 이름은 매력과 욕망의 내포(connotation)을 위한 그럴듯한 보고(寶庫)가 아닌가? 그래서 그룹이 Alys! Alysaloe!에 주목하는 것도 당연한데, 이는 allies(동맹국)에 의해 뒷받침되어, Alice의 존재를 의미한다. 그 때 누군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 in Wonderland)의 작가(루이스 캐럴. Lewis Carroll - 필자)가 어린 소녀들과 놀아주고 사진 찍어주기를 즐겼다는 걸 기억한다(바로 이 사람이 portmanteau word(합성어)라는 말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그러자 극장 쪽에 밝은 사람이 1930년대 무대 스타 중에 Alice Delysio가 있었고, Gaby Delys라는 프랑스의 현장 미술가도 있었다고 전한다. 바로 이 시점에서 한 회의주의적 참가자가 어떻게 조이스가 이 모든 의미를 텍스트 속에 집어넣는 것이 가능했겠느냐?고 반박하자, 두 개의 대응이 나온다. 하나는, 우리는 어떤 특정한 (단어의) 경우라도 조이스가 그렇게 의도적으로 집어넣진 않았다고 확실히 말할 수 없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설사 우리가 (조이스가 그런 의도로 이 단어를 사용하진 않았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 하드라도 달라질 것은 없는데, 왜냐하면 어쨌든 조이스는 그가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의미를 자아내는 힘을 가진 텍스트를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토론이 진행되는 동안, 그룹의 한 멤버는 격리(seclusion)(특히 자연환경 속에서의)와 어둠의 의미에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나이팅게일 집합과 성적인 타락 둘 다에 관련이 되는 것이다. Dewfolded는 밤과 둘러 막는 것 양쪽을 의미한다(dew = 밤에 내리는 이슬, fold = 접다, 포개다; 둘러싸다 필자). sheltered position(보호된 위치)은 그대로 알 수 있는 말이다. rosescenery haydyng은 이미 앞에서 발견한 작곡가 이름과 더불어 장미정원에 숨겨졌다는 느낌(hiding in rose scene 필자)을 준다. 그리고 other은 적절하게 heather(히스꽃)으로 바뀌어져 있다(on the heather side of가 on the other side of라는 영어표현에서 왔다는 말 필자). 독일어를 할 줄 하는 사람이 의 독일어인 waldwaldalure에 있다고 하고, 프랑스어를 아는 사람은 duskfoil이 어둠이 내리는 것(the fall of darkness) ( = dusk 어둠+ foil 얇은 판, 막, 박箔 필자)과 잎들(leaves = 프랑스어 feuilles)을 결합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Mooreparque에는 분명히 park(공원, 보호구역, 숲 속의 평지 필자)가 있으며, 그 뒤에는 앞서 말한 sanctuary가 따른다. 그리고 일몰(sunset), 즉 Sunsink가 있으며, Sunsink gang에는 똑 같은 현상을 독일어로 표현한 Sonnenuntergang이 메아리치고 있다. 어둠에 관한 제안은 그룹의 관심을 어둠(blackness)을 나타내는 단어로 돌린다. 즉, Moor(오셀로와의 연상작용을 다시 일으키는) (오셀로가 바로 베니스의 무어인(흑인)이 아닌가? 필자), pitch(피치, 역청. 콜타르 비슷한 것), crow(까마귀), jackdaw(갈가마귀)뿐만 아니라 Jim Crow(19세기 중반 미국에서 흑인 얼굴로 노래 부르던 코미디언에서 유래되어, 흑인 차별법안을 Jim Crow laws라 함. Jump Jim Crow, or Jim Cuff. 필자)에 대한 암시도 있다. 사전을 찾아보니, 이는 20세기의 인종 차별주의와 관련이 되기는 해도, 19세기 초 (미국의) 플랜테이션 농장에서 부르던 흑인 노래였다. 그러자 그룹은 이 사실이 gang(갱단, 무리), pick(목화 따기), (whoe에 있는) hoe(쟁기)같은 단어들과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본다. 물론 일단 단서가 포착된 이상, 그럴 수도 있다. 이 발견이 그냥 즐기고 끝나는 막다른 골목인지, 또 다른 의미를 드러내는지는 책을 계속 읽어봐야만 한다. 때로는 이와 같이 작은 단서가 수년간 잠자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다가 이것이 장(chapter) 또는 책 전체를 통해 흐르고 있는 연결된 용어 패턴의 부분이라는 걸 문득 깨닫기도 한다.

 

이때 누군가 말한다. 나는 자꾸 이 글이 전투와 관련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지적할 수 있는 예는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에 관한 것뿐이지만. 그녀는 크림전쟁에서 유명해졌잖아. 다른 사람들이 거든다, “‘peace(평화)라는 단어가 저기 보여. 그리고 allies란 동맹국이란 뜻이고. 앞에서 나왔던 모스부호는 어떻고? 군사 신호를 말하잖아. 이 새로운 발견에 주의하여, 전체가 텍스트를 몇 분간 검토할 때, 새로운 빛이 문득 보인다 이런…’waldalure는 워털루(Waterloo)가 틀림없어! 그러자 그 전투에 관해 좀 아는 친구가 이어받는다. 맞아, 워털루가 틀림없어. 왜냐하면, Mount Saint Johns Mont St Jean으로, 그 전쟁터 가까이 있던 마을이름이며, 영국군들이 이 이름을 사용했거든. 그들은 나중에 거기다가 워털루 기념관까지 세웠거든. 그리고 이제야 allies라는 단어의 중첩된 뜻을 알겠네. 유럽대륙에서는 이 워털루 전투를 그 가까이 있던 다른 마을 이름인 La Belle Alliance라는 이름으로 부르거든. 누군가가 덧붙인다, 아까 그 글을 읽을 때 말이야, sound of a pitch가 내 귀에는 son of a bitch로 들렸는데, 어떻게 연관이 있는지 몰랐거든. 근데 지금 보면, 그 용어는 군대 연병장에서는 자주 들을 수 있는 그런 말이지. 그러면 pick out and vowelise your name우렁차게 관등성명을 밝혀라는 명령으로 볼 수도 있잖아.

 

그룹 중 한 멤버에 의해 다른 의문이 제기된다. 이런 행위들을 모두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그런 특정한 장소가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는 데 모두 동의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단락은 수많은 국가를 무대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이스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던 독자들은 아일랜드, 특히 더블린이 항상 조이스 글에서 특별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율리시스를 읽은 적이 있는 사람이 Dunsink Time(Dunsink 관측소에서 정해지는 더블린 지방시각)에 관한 레오폴드 블룸의 명상을 기억하고, 그 모습이 Sunsink gang에서 어렴풋이 드러난다고 한다. 누군가 시간secund(식물의 잎이나 꽃이 줄기의 한쪽에서만 생기는이란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시간의 단위인 second(초秒) 또는 두 번째란 의미와 관련 있다. 스페인어로는 segundo 필자)에서도 보이고, 정시과(定時課: canonical hours)인 primeterce에도 있다고 덧붙인다. 또 다른 아일랜드와의 연관이 swift에서 지적되는데, 그러자 이 swift는 칼새도 아니고, 속도를 나타내는 형용사(빠른, 신속한 필자)도 아니며, 아일랜드 출신 작가인 Jonathan Swift(걸리버 여행기의 작가 필자)가 된다. 백과사전은 한 때 스위프트가 일했던 영국의 장원 이름이 Moor Park였다는 정보를 전해 준다. 그룹은 스위프트가 almost dotty(살짝 돈)였다는 사실을 떠올린다(스위프트는 말년에 정신병을 앓았다 필자).

 

dewfolded라는 단어 역시 코멘트를 불러 일으킨다. 앞에서 dewfolded가 각각 단락의 주제와 관련되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을 했지만, 이 두 단어를 합친 합성어는 아직 설명이 필요하다. 마치 dewfoldedtwofold와 연관되는 느낌을 주고, 이는 독서그룹이 따를 수 있는 또 다른 실마리를 제공한다. 이 단락에서 감탄문(새소리를 상기시키는 것?)은 모두 쌍으로 되어있다. to you! to you!, Alys! Alysaloe!, Oiboe! Hitherzither!, Almost dotty! I must dash!, 그리고 floflofloraflorence에도 중복이 있다. 또 twittwin은 중복이 될 뿐만 아니라 twin(쌍둥이)라는 말까지 포함하고, 바로 뒤에 two도 따라온다. 이 단락에는 둘 다 나이팅게일인 두 명의 유명한 여성인물이 나온다. 그러나, 비록 betwidesbetweenbeside 사이에서 왔다갔다할 뿐만 아니라, -twi-에서 아직 이중성을 암시함에도 불구하고, prime and secund with their terce that whoe betwides them에는 분명히 삼중(三重)의 원칙이 작용한다. 두개인 것들(twos)하나의 셋(a three)의 패턴은 중요하게 보이지만, 이 독서그룹으로서는 이 패턴이 책의 다른 부분을 가리키지 않는 한 더 이상 밀고 나갈 밑천이 없다.

 

이 단락은 이제 상호연관된 의미들로 빛나고 있지만, 합성어 중에서 설명이 안된 것도 여럿 있다. 어떤 단어에서 설명이 되지 않는 요소가 남아있는 한 더 생각할 여지가 있다 (그렇다고, 모든 변형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해도 끝난 것이 아니다). 곤혹스런 합성어로부터 우리에게 익숙한 표현을 몇 개 찾아낸 뒤엔, 왜곡/변형 그 자체도 설명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는 참 쉽다. 예를 들어, Mooreparque에서 Moor Park를 찾아낸 후에도, 왜 이런 전환을 거쳤는지를 여전히 질문해야만 하는 것이다. parque의 철자는, 워털루를 다루는 부분과 명백한 연관이 되어 프랑스를 떠올리게 하지만, 불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또, 그 말의 의미인 fate(운명)whoe betwides them에 있는 woe betide them(그들에게 재앙이 있을진저!)라는 경고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누군가가 Mooree가 있는 것이 아마도 아일랜드의 시인 Thomas Moore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낸다. 이 의견은 full theorbe, now dulcifer에서 무어의 시 제목인 Fill the Bumper Fair(당당히 잔을 가득 채워라)를 발견하자, 받아들여진다. (이제 우리는 두 나이팅게일 외에도 두 명의 아일랜드 시인을 찾았다.) 그룹은 아직까지도 Oiboe(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은 아마도 의견이 있을 것이다), everie, sof!의 철자에 대한 설명을 찾지 못했다. 또 in partialimpartial인지, in resonancein residence의 반영인지도 모른다. 한편 jemcrowjemmy(영국에서는 jimmy라고 쓰며, 짧은 쇠지레, 즉 a short crowbar를 말한다 필자)와 crowbar(작업 현장에서나 도둑이 쓰는 큰 쇠지레), 그리고 단락 끝쯤에 나오는 pick(곡괭이, 쪼는 기구)로부터 연장(도구)의 집합도 생각할 수 있는지는 아직 미정이다.

 

그러나 이제 잠시 멈추고 다시 정리해보자. 이 단락은 어두운 숲 속 은신처로부터 들리는 나이팅게일 울음을 묘사하는 화자의 목소리를 제시한다. 우리 독자(또는 청자聽者)들은 조용히 할 것을, 그리고는 노래에 같이 참여할 것을 요구받는다. 분명히 이 내용 자체로는 더블린 사람들과 달리 재미가 없다. 그렇지만, 이 목소리의 위로는 중첩된 다른 의미들이 가득 차 있는데, 우리는 이를, 일직선적인 단순성을 가진 보통 말로는 도저히 성취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그 텍스트의 하나의 요소로 취급해야만 한다. (아마도 두 마리의) 나이팅게일은 박명(薄明), 밤, 그리고 어둠을 연상시키는 다른 새들 부엉이, 칼새, 까마귀, 갈가마귀 과 관련이 있고, 또 이를 넘어 여성들과도 관련이 있는데, 특히 노래하는 여성, 전통적으로 성적 유혹을 표상하는 여성(그들은 아마도 오셀로의 여주인공 데스디모나처럼 죄가 없겠지만)과 연결된다. 이 모든 것들이 국제적인 맥락에서 일어나는데, 사용된 복잡한 언어와 지리적 언급은 우리를 스웨덴, 독일, 이탈리아, 프랑스, 벨기에(워털루), 영국, 미국 남부, 크림반도로 안내한다. 이 자유시장 개념과 많은 종류의 음악에 대한 주의 환기는 국제간 협력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전쟁의 소리, 노예제의 암시, 최후의 심판(doom)에 대한 경고 역시 탐지할 수 있다. 성적인 차이(sexual difference)가 국가간의 차이 위에 중첩되고 있으며, 군사적 차이 위에 덧씌워지기도 한다. (또는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하는데, 경야에서는 무엇이 문자 그대로이고, 무엇이 비유인지 확실하지 않다.)

 

(중략)

 

(이 글이 나오는 전체 74페이지에 달하는 장면이 어딘지 모를 더블린 바에서 TV와 라디오 방송과 떠들썩한 잡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면) 이 글이 라디오 방송과 관련되어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모스부호가 이를 암시하며, broadcast(방송)을 프랑스에서는 diffusion이란 용어를 쓴다는 것도 그렇다. 1930년대 영국 BBC방송의 인기 프로그램 중 하나가 나이팅게일 노래 소리를 생방송으로 내보내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구체적인 역사적 배경이 드러난다.

 

(이하 생략)

 

 

긴 인용이었지만, 어떻게 감이 오시는지(Does that ring a bell?). 애트리지는 이 부분이 그리 복잡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했는데, 그럼 진짜 어려운 부분은 어떨지 과연 짐작이 가시는지? 이 소설이 2차 세계대전 전야인 1939년에 완성되었다는 것, 그가 당시 프랑스 파리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그래서 조이스 가족이 전쟁을 피해 남부 프랑스로 스위스로 옮겨 다니게 된다)을 고려하여 위의 해설에 한 가지 덧붙이면, 필자 귀에는 Sunsink gang에서 해를 가라앉힌, 세상을 어둡게 만든, 암흑의 독일 나찌스 친위대 SS 무리, Hitherzither! Almost dotty! I must dash!에서 히틀러! 저 미친 놈! 해치워버려야지!라는 소리가 들린다.

 

 

1939년 이 소설이 발표되자 평단이나 독자들의 반응은 무관심이었다고 한다. 누가 이렇게 골치 아픈, 알 수 없는 책에 신경을 쓰겠는가? 2차대전이 막바지인 5년 뒤, 1944년 미국의 (당시 40세의) 젊은 신화학자(神話學者) 조세프 캠벨(Joseph Campbell: 1904-1987)은 시인이자 소설가인 헨리 로빈슨(Henry Morton Robinson)과 함께 첫 번째 가이드를 내놓는데, 그것이 바로 지금도 이 책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필수적인 A Skeleton(해골) Key to Finnegans Wake: Unlocking James Joyces Masterwork라는 책이다. 집단의 꿈이라는 신화와 중세문학을 연구한 사람이 처음으로 이 암호를 해독한 사람 중 하나라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Tavern Brawl(술집에서의 말다툼)이란 부제가 붙은 이 장면을 캠벨의 일상적인 말로 옮겨보자.

 

Radio Announcement:

   You have just been listening to an excerpt from (중략)

Attention: Stand at!! Ease!!! [The three soldiers.] (attention: 차려, stand at ease 쉬어. 둘 다 군대에서 쓰는 구령이다 필자)

 

   We are now broadcasting to our lovers of this sequence, the twofold song of the nightingales [the Two Girls], from their sheltered positions, hiding in rose-scenery on the hither side of the alluring grove. Silence all! Let every sound keep still; and when we press the pedal pick out and vowelize your name.

(캠벨, 위의 책, New World Library, 2005.10, p.231)

 

 

조이스는 경야율리시스에 비해서도 훨씬 난해하다는 불평에 대해 사람들은 그것이 암난(暗難이겠지요? 필자)스럽다고 한다. 그들은 그걸 율리시스와 비교한다. 그러나 율리시스의 행동은 대낮에 주로 일어났었다. 나의 새 책의 행동은 주로 밤에 일어난다. 밤에는 만사가 불명확한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번역서, 작품 소개, p.631). 해설의 그 장황한 더듬거림도 밤중 꿈 속 잠깐 사이에 스쳐간 생각을 어떡하든 되살려보려는 안간힘에 불과하다고 보면, 왜 이 책의 언어를, 율리시스에서 시도한 의식의 흐름(flow of consciousness)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의식(또는 잠재의식)의 흐름이며 꿈의 언어(language of dream)(앞의 책, pp.629-630)이라 하는지 충분히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러나, 역자의 번역 및 원문(각각 10줄에 불과)과 그 아래 해설을 비교해 보면, 과연 언어와 번역의 한계는 어디까지이며 언어와 번역의 관계는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 책이 특별히 예외적인 만큼, 그에 대한 답을 일반화시킬 생각은 없으며, 이 책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해도 좋다. 애트리지의 해설처럼 구구절절 늘어놓으면 그것을 번역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원문이나 번역문 또는 캠벨의 해골만 남은 1차 암호해독문처럼 던져 놓으면, 도대체 어떤 보통 독자(특별해 봤자 마찬가지리라)가 이를 소화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좋은 번역의 기본 조건은 독자들이(그들이 누구이든) 알 수 있어야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또 최대한 원본을 반영해야 하며, 형식과 내용이 물론 조화를 이루면 최상이겠지만, 부득이 한 충돌의 경우에는 형식이 내용에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입장에 서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원본과 페이지, 줄 수를 맞추기 위해 역자는 아마도 끔찍한 노력을 했을 것이며, 이로부터 혹간 형식을 위해 내용을 희생하기도 했을 것이라는 추측은, 뒤에 나오는 여러 가지 역자의 말로 미루어봐도 억측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역자는 하루 평균 7~8시간을 매일 원전原典의 반 쪽 또는 한 쪽, 심지어 한 단락을, 페이지당 100회 이상 각종 사전들을 뒤져야 하고, 수많은 참고서들을 섭렵涉獵해야 하는, 때로는 분통 터지는 노동은 율리시스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성싶었다기나긴 세월 동안 참으로 인고忍苦에 다름 아니었으며, 영상靈想이 떠오르면 밤중에도 발작적으로 일어나야 했던 반半광증, 그것은 정녕코 수도승修道僧의 단말마적斷末魔的 고행과도 같은 경험이었다고 토로하고 있다. (역자 서문, p.27)

 

역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조이스 역시 경제적 어려움과 전쟁의 음울한 그림자 속에, 녹내장(필자는 젊은 시절 아니 어린 시절부터의 방탕으로 인한 매독梅毒(syphilis)이 원인이라고 보는 입장에 기운다)으로 인한 10여 차례의 눈수술로 거의 실명에 가까운 상태에서(이게 이 책이 흐릿한 책이 된 원인은 아닐까?), 딸의 정신병 발작에 따른 괴로움 속에서도, 무려 17년에 걸쳐 이 작품을 썼다고 하니(평균 1페이지를 쓰는데 9일 걸렸고, 방금 우리가 본 단락 하나 쓰는데 3일이 걸렸다고 한다. Derek Attridge, 위의 글, pp.18-19), 우리가 이를 접근조차 하기 힘들다든지, 또는 암난하지 못하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리라.

 

개그맨처럼 언어에 재치가 있는 사람이면 말을 다룰 때 언어에 내재한 의미의 다중성(多重星)을 이용하여 중의성(重義性: ambiguity)을 지닌 단편적인 말장난(pun)을 할 수는 있겠지만, 600페이지가 넘는 대작 소설 전체를 다의적多義的(polysemantic), 다성적多聲的(polyphonic), 60여 개가 넘는 다언어적多言語的(polylingual)인 언어(이를 역자는 경야어라 부른다, 역자 서문, p.25)로, 거기다가 온갖 인류의 꿈, 신화를 다져 넣어 쓸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는가? 필자도 위의 해설을 보기 전엔 조이스의 성취에 대해 반신반의했었다. 언어라는 매체媒體(medium)가 이렇게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다중의 뜻을 실을 수 있다니! 수많은 결(channel)을 갖추고 그 결마다 다른 언어와 뜻을 실을 수 있는 조이스의 언어는 요즘 말로 하면 광대역廣帶域(broadband)이자 음성다중방송에 틀림없겠다. 이는 물론 영어와 나아가서 언어의 장인匠人(master)이자, 치열한 문학정신을 가진 천재(天才) 조이스만이 가능했던 일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역자의 우공이산(寓公移山)의 노고에도 불구하고, 번역의 의미와 한계에 관련된 보통 독자로서의 아쉬움은 해소되지 않는다. 원본이나 해설서 없이 이 번역본만으로 과연 경야원본만큼 즐길 수 있을 것인가? 필자의 대답은 아무리 애를 써봐도 안된다는 것이다. 짤막한 위의 원본 해설 예에서 우리가 실제 경험했던, 수많은 언어들과, 그 의미의 중첩, 그 울리는 음성의 반향을 우리가 번역본에서도 대등하게 맛볼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주관적인 생각 또는 자만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역자로서 최선의 등가물(等價物)을 찾았다 말을 의심하자는 것은 아니다.

 

 

잠깐 앞의 상황으로 되돌아가보자. 번역본이 원본의 뜻을 해설만큼 잘 전해주던가? 혹시라도, 번역본이 오히려 원본의 이해에 지장을 준 것은 아닌가? 이 단락에 대한 여러 해설을 이미 본 입장에서 쉽게 말해, 원문이 쉬웠는가, 번역본이 쉬웠는가? 이에 대한 대답도 딱 정해져 있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독자의 영어/언어(우리말, 한자) 이해도나 지식은 천차만별일 테니까. 물론 이것도 필자의 주관적 판단이지만, 필자에게는 원본-해설 쪽이, 번역본-원본-해설을 거치는 쪽보다 훨씬 쉬웠다. 번역본-해설의 직접 연결은 (그 missing link로 인해) 필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의 지난한 것으로 보인다. 번역을 통해 한 꺼풀 벗겨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 겹이 덧씌워진다면, 도대체 번역의 의미는 무엇이란 말인가?

 

 

물론 역자도 원저의 시청각성, 음의音義의 동시적 효과에 대해서는 진작부터 주의했고(번역본, 작품 소개, pp.641-642), 또 나름대로 성과가 있다는 걸 우리 역시 직접 볼 수 있지만, 이 번역본의 울림이 원본의 울림과 동일 또는 등가(等價)라고 한다면 이 역시 필자처럼 주관적인 판단이 아니겠는가? 산을 옮긴 결과물은 역시 산이로되, 원래 그 산이 아니더라고 하면 비유가 될지 모르겠다. 더구나 한자를 점점 멀리하는 사회풍조인지라 세월이 지난 후 젊은 사람들이 이 번역본을 보면, 그 자체로 원본만큼 아득하게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의 아쉬움은 이 책이 another, low-profile Wake가 아닌가 하는 점이다.

 

 

필자의 생각이 기우(杞憂)가 아닌 것이, 이 번역본으로부터 5년 후의 역자는 이런 말을 한다. (제임스 조이스, 율리시스, 김종건 옮김, 3정 최종개정판, 생각의 나무, 2007. 3).

문체와 기법, 언어의 모방은 이질적 문학 작품의 번역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숙제. (위의 책, p.11)

역문의 가독성(可讀性)을 위해 언어의 다기적(多岐的) 변덕성(polymorphous perversity)을 가끔 어쩔 수 없이 해체하기는 했다 이것이 작품의 산문성을 넓혀 독자의 이해를 돕는 것은 사실이나, 텍스트의 본질 또는 정신을 망가뜨리기 일쑤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위의 책, p.11)

 번역상, 복잡한 내용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하여 형식을 파괴하는 일은, 조이스 작품에 관한 한 결코 이상적인 해결책이 못 된다. (위의 책 p.12)

조이스는 언어의 대가이며, 이 언어적 주술의 아수라장을 번역하는 역자라면 이런 경험을 토대로 『율리시스』에도 그와 대등한 언어유희의 묘미와 취지를 살리고자 애쓰리라.” (위의 책, p.12)

한글과 한자의 응축을 통한 이런 언어감각이 당분간은 생소할지라도, 시간이 흐르면서 쌓이는 친밀감을 통해 작품을 한층 고양시킬 것이요, 그 현란한 (言) 맛은 이내 고전이 되고 역사가 될 것이다. (위의 책, p.13)

 

위의 말들은 앞서 말한 필자의 언어와 번역에 대한 생각과는 정반대 입장으로 보인다. 이질적(異質的)인 문학의 번역에서 내용이 아니고 형식이 우선이 될 수 있을까? 이질적이라는 의미는 뭘까? 성질이 다르다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 다르다는 것이리라. 내용을 따르자니 형식이 울고, 형식을 따르자니 내용이 울 판인 어려움이 있을 때, 어떤 번역물의 독자가 전적으로 폐쇄적인 일군(一群)의 전문독자가 아닌 바에야, 5년 전 말대로 어떻게 보통 독자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지 계속 염려해야 하는 것이 번역 아닐까 하는 것이 필자의 뇌리를 떠나지 않는 물음이다.

 

필자가 보건대, 역자가 정말 본보기가 되는 존경할만한 학자라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부득이 내용까지 희생한 형식미의 전달에 있어서도 그만큼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번역가로서도 그런가? 다시 말해 역자의 언어유희는 성공하고 있는가? 그런데 과연 그것이 역자의 언어유희인가? 조이스 언어유희의 번역인가? 역자가 나름으로 정의한 번역의 의미는 정당한가? 라는 물음에 대한 보통 독자로서 필자의 답은 회의적이며(정당한 문학사적 평가는 필자의 능력 한참 밖이다), 괴물(monster) 번역이 아직은 우리 보통 독자에게는 과분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이는 보통 독자의 개별 사정이 아니라, 우리말, 우리 번역, 우리 문학의 역사와 내용, 기법, 나아가 우리 문화와 지식 수준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도 역시 우리와 사정이 비슷하다. 이 책의 70년이 넘는 장구한 번역 역사에도 불구하고 1991년부터 1993년 사이 처음으로 완간된 야냐제 나오키의 번역본이, 조이스의 언어실험을 그대로 도입하여 해체하고 합성한 일본어를 만들어 번역한데다가, 문학적 격조를 유지하는데 성공했다고 하여 일본 영문학계의 지지를 받았지만, 일반 독자들은 그 난해함(esoteric nature)에 고개를 돌리게 되고*, 2004년 6월 미야타 교코라는 여류 번역가에 의해서 원본의 절반 분량인 축약번역본(그런데 주석까지 포함하면 흥미롭게도 원래 책과 같은 분량인 628페이지라고 한다) 이 나왔는데, 이는 신조어 없이 평이한 일본어를 사용 가독성을 높이고 어려운 설명은 각주로 처리했다는 데서, 일반 독자의 접근이 쉽고, 반응이 좋다고 한다. 아래 글에 우리나라의 구세대 영문학자라고 할 수 있는 나영균 교수(이화여대 명예교수)는 나오키의 번역을 극찬했다는 내용과, 신세대 영문학자라고 할 수 있는 전은경 교수(숭실대)는 교코의 방식이 일반독자에게 접근 가능한 방식이라고 호감을 표시했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도, 필자의 지금 생각과도 비슷한 간극(間隙)을 보여준다.

* Ito Eishiro: he even translated Joyce's style into Japanese. Yanase's translation is a novel in its own right and a great masterpiece of Japanese literature. However, his translation is too esoteric for the general reader: only a very limited number of academic and patient readers could finish it.

from Two Japanese Translations of Finnegans Wake Compared:Yanase (1991-1993) and Miyata (2004)

- 이 논문은 2004년 11월 한국제임스조이스학회가 서울에서 개최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되고, 위 학회가 발간하는 James Joyce Journal(JJJ) 2004년 12월호에 실렸다고 되어 있는데, 위 학회 홈페이지(www.joycesociety.or.kr)에서 다운받을 수 있는 자료를 보면, 제목에는 나오는데 내용은 빠져있다(pp.117-162 missing). 이는 아마도 판권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 내용은 아래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것이며, 판권이 있는 자료(copyrighted material)이다. 지금 일어번역과 관련된 내용은 다 이 자료를 참고하였다. 필자는 일어 능력이 없다.

(http://p-www.iwate-pu.ac.jp/~acro-ito/Joycean_Essays/FW_2JapTranslations.html)

 

 

필자가 이 책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변죽만 울리고 있는 형편에(사실 다른 방법이 없기도 했다) 서평을 쓰는 만용을 부리는 것은, 필자가 발견한 이 책의 비밀을 여는 키 중의 하나를(물론 키는 하나가 아니라 무수할 것이다)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이며, 이 책과 같이 나온 "김종건, 피네간의 경야 안내, 범우사, 2002. 3"을 다시 사야 하는 고민과 함께, 우리나라에서도 일반 독자를 위한 미야타 교코 같은 번역자가 나올 수는 없나 기대를 가져보기 때문이다.

 

 

 

 이 책을 다 읽을 능력도 없고 번역에 대한 기본적 입장마저 다른 처지에, 무슨 서평을 쓰며, 게다가 만점 평점까지 주느냐 욕할 사람도 있겠지만, 필자로서는 이 큰 산을 옮긴 노교수의 정열에는 이의(異義)가 없으며, 앞으로 이 위에 연구성과가 계속해서 쌓이는 것을 보고 싶은 것이다. 관점이 다르다고 그 존재와 의의마저 부정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의 더 큰 부분을 놓치기에 딱 좋은 방법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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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반조 > 선어록 한문독해를 위한 지침서
선어록 읽는 방법
추월용민 / 운주사 / 1996년 5월
평점 :
품절


«무문관으로 배우는 선어록 읽는 방법»(운주사, 1996)은, 그 제목만 놓고 보면, 꼭 무슨 선어록 해설서 같은 짐작이 든다. 나 역시 이 책을 서점에서 처음 접했을 때 제목만 보고 쓸데없는 고칙 해설서이겠거니 하고 아예 들춰보지도 않았다. 나중에야 도서관에서 이 책을 접하고 내용을 살펴보니, 이것은 해설서가 아니라 당송의 선어록 한문독해를 위한 책이었다. 이 책의 의의를 살피자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漢文’에 대한 선이해가 필요하다. 마침 저자는 이에 대하여 간략하게 설명하고 있다:

[한국과] 일본에서 ‘漢文’이라 하고 중국에서 ‘古文’이라고 하는 것은, 周秦시대의 말하기 단어를 기본으로 하여 만들어진 일종의 쓰기 단어이며, 그밖에 후대의 작가가 그러한 고대의 쓰기 단어를 흉내내서 쓴 文語文(擬古文)도 포함하고 있다. 戰後까지는 그것을 일본의 고전으로서 보통교육의 ‘國語’科 안에서 가르쳐 왔다. 그 흐름에 따라 오늘의 고등학교의 ‘漢文’교육은 일본어의 ‘古文’을 기준으로 가르치는 것으로 주로 ‘先秦의 고전어’로서, 말하자면 ‘사서오경’을 비롯한 ‘당송팔가문’ 등으로 일컬어지는 ‘擬古文’을 읽는 한문인 것이다. 따라서 당송의 구어를 자유로이 사용한 ‘禪宗語錄漢文’을 읽기에는 그대로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273-274면)

저자 아키즈키 료민(秋月龍珉)의 설명처럼, 우리가 중국고전을 읽기 위해 배우는 한문은 ‘고문’ 내지 ‘의고문’에 해당한다. 그러나 선어록 고칙은 대부분 스승과 제자간에 깨달음에 이른 인연실화를 바탕으로 성립된 것으로서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문자로 가득하다. 따라서 당송의 구어체가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는 만큼 기존의 고문 문법만으로는 선어록 독해를 하기가 아주 어렵다. 더구나 그 정신세계의 층위가 전혀 다른 만큼 제아무리 고문에 능통한 학자라도 선어록 앞에서는 물러설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무문관으로 배우는 선어록 읽는 방법»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타개하기 위해 나온 저작이다. 다시 말해, 선어록은 당송의 구어체로 이루어져 있는 만큼 고문이나 의고문의 문법이 아닌 새로운 문법이 필요한데, 그 문법의 초석을 놓기 위해 이 책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은 전형적인 문법책은 아니다. «무문관» 48칙을 한 구절 한 구절 전부 번역하고 구문과 문법을 설명하였으며, 책 말미에는 학습문법(school grammar) 수준의 문법을 종합정리해서 실어놓는 방식을 취했다. 그래서 이 책은 «무문관» 번역본이기도 하고, 무문관 및 선어록 독해를 위한 문법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내가 판단하기에, 번역이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고 정확하다.

물론 학자 특유의 고집이 드러나는 대목들이 있긴 있다. 한 예로, 제9칙 대통지승불 대목을 읽어보자:

흥양의 청양화상은 어느 스님이 “‘대통지승불은 십겁이라는 오랜 시간을 좌선했지만 불법은 현전하지 않아 불도를 성취하지 못했다’라고 하는데 왜 그렇습니까.”라고 물으니, 화상은 “그 질문은 과녘을 정확히 맞추었구나.”라고 했다.

그 스님은, “도량에서 좌선하고 있었다고 한다면 어째서 불도를 성취할 수 없다는 것입니까.”라고 (거듭) 물었다. 청양화상은 말했다. “그것은 저 분(대통지승불)이 스스로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80-81면)

저자는 마지막 문장 “爲伊不成佛”을 “그것은 저 분이 스스로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로 옮겼지만, “그대가 성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로 옮겨야 한다. 이 공안은 임제의 “부처는 作佛하지 않는다”는 평으로 깨끗이 끝나는 것이어서 더 이상 토를 달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저자는 나름의 신념이 있어서 “나는 ‘그것은 저 분이 대비천제의 마음에서 스스로 성불하지 않는 까닭이다’라고 풀이하고 싶은 독자적인 견해를 갖고 있다”(78)고 밝혔던 것이다. 이 신념 때문에 결국 (내가 보기에) 오역을 했지만, 사실 이런 대목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즉, 저자가 자신의 독자적인 해석을 극도로 삼가고 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 구문, 문법에만 치중할 뿐 이러한 독자적 해석이나 토달기는 아주 예외에 속한다.

이러한 겸허한 자세는 그가 선어록 독해를 배움에 있어서 여러 스승들을 거쳤던 과정에서 나온 것이리라. 그는 일반 학자들뿐만 아니라 수행자로부터 선어록 독해를 배웠다, “그런 식으로 읽는다면 조주화상이 우시겠지” 하는 핀잔도 들으면서.


«무문관»은 «벽암록» 100칙의 절반쯤 되는 48칙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험준하기로 유명한 공안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다.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책이 아닌데도 국내에 «무문관» 48칙에 관한 해설서가 이미 출간되어 있다. 한형조의 «무문관, 혹은 너는 누구냐»(여시아문, 1999)가 그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을 탐탁치 않게 생각한다. 물론 선불교의 역사와 해설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읽히는 맛이 있긴 하지만, 그 해설이라는 것이 의리선에 치우쳐 있어 얼토당토 않는 결론에 도달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그의 해설들은 수행과는 하등 관계가 없다. 또한 선불교의 역사나 일화는 «선의 황금시대»(경서원, 1986)에서 원용한 바가 많아 그 내용이 새로울 것도 없다. 번역 역시 저자의 개성이 톡톡 튀는 발랄한 번역이다.

«무문관»을 읽으려면, 오히려 이 책, «무문관으로 배우는 선어록 읽는 방법»을 추천한다. 특히 당송시대의 한문선어록을 독해하고자 하는 분들은 반드시 이 책을 거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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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바람구두 > 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 네 번째 편지

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 네 번째 편지
- 오세영의 시 "나를 지우고"를 읽으며 든 생각들


나를 지우고


오세영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나를 지운다는 것은 곧
너를 지운다는 것,
밤새
그리움을 살라 먹고 피는
초롱꽃처럼
이슬이 이슬을 지우면
안개가 되고,
안개가 안개를 지우면
푸른 하늘이 되듯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


내 마음의 모래바람에게...
이상하게도 당신에게 편지를 쓰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착 가라앉아 버립니다.
마치 내 안의 거울을 들여다보며 반성문을 쓰고 있는 듯이...

늙은이에게 젊은이는 더이상 아무 것도 배우려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나이 먹은 교수는 그저 나이 먹은 교수일 뿐 그가 평생을 쌓아온 학문적 업적 같은 것은 쇠락해버린 초가에 덩그마니 얹힌 박 같이 허울만 좋은 이름일 뿐 특별한 권위는 바랄 것도 없고, 존경은 더할 말이 없는 시대입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경쟁력이 으뜸인 시대에 고려장 지낼 날이 멀지 않다는 증빙이 되었습니다. 이런 시대에 너희들도 언젠가 늙을 것이란 말은 충고도, 선언도 아닌 악담인 게지요.

내가 아직 '문학은 나의 힘'이라 외치며 술잔을 높이 들던 시절, 아직 고왔고 아름다운 시인이자 나의 은사에게 "시인은 늙기 전에 죽어야 합니다."라며 호기롭게 떠들었습니다. 아름다운 시인이었던 은사는 여전히 살아 제자들을 가르칩니다. 머리가 많이 새었지만 여전히 멋있을 겁니다. 1942년생인 시인 오세영의 시를 읽습니다. 당신의 이 시를 읽노라니 문득 『장자(莊子)』 「달생(達生)」에 나오는 ‘목계지덕(木鸂之德)’의 고사가 떠오릅니다. 다들 잘 아시는 내용이겠지만, 중국의 어느 왕이 투계를 몹시 좋아하여 기성자란 사람에게 최고의 싸움닭을 구해 최고의 투계로 만들도록 합니다. 기성자란 인물은 당시 최고의 투계 사육사였는데, 왕이 맡긴지 십일이 지나 기성자에게 “닭이 싸우기에 충분한가?”라며 묻습니다. 기성자는 단호히 대답하길 “아닙니다. 아직 멀었습니다. 닭이 강하긴 하나 교만하여 아직 자기가 최고인 줄 알고 있습니다.”라 했습니다.

다시 십일이 지나 왕이 또 기성자를 불러 물었습니다. 그러자 기성자는 “아직 멀었습니다. 교만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의 소리와 그림자에도 너무 쉽게 반응합니다.”라 했습니다. 왕은 다시 십일이 지나 기성자에게 묻습니다. 기성자는 역시 “아직 멀었습니다. 조급함은 버렸으나 상대방을 노려보는 눈초리가 너무 공격적입니다. 그 눈초리를 버려야 합니다.”라 답합니다. 다시 십일이 지나 왕이 또 묻자, 기성자는 그제야 “이제 된 것 같습니다. 이제 상대방이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아무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이제 완전히 마음의 평정을 찾았습니다. 나무와 같은 목계가 되었습니다. 어느 닭이라도 이 모습만 봐도 도망갈 것입니다.”라고 답했다는 고사입니다.

얼마 전 케이블 TV에서 해주는 영화 <미션>을 다시 보았습니다. 오래전 문망의 영화 코너에 글을 올린 적도 있었던 영화입니다. 그 사이 내가 늙어 유순해진 것인지 어렸을 적엔 가브리엘(제레미 아이언스) 신부보다 로드리고(로버트 드니로) 신부가 더 좋고, 더 잘 이해되었었는데 이번엔 가브리엘 신부의 마음도 알 것 같더이다. 누군가에 대해 잘 알기 위해선 그 사람이 있는 곳보다 그 사람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에 대해 들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들의 운명이란 것도 때로는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곳보다는 우리가 볼 수 없는 곳에서 이루어질 때가 더 많다는 걸 이제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알듯합니다.

시인 오세영은 늙었고, 나는 아직 젊습니다. 그 말은 내가 더 진보적이란 말이 아니라 내가 당신에게 배울 것이 더 많다는 뜻이란 걸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산에서/ 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은/ 산이 된다는 것이다.”이란 걸 알 것 같습니다. “나무가 나무를 지우면/ 숲이 되고,”란 구절에서 나는 나무가 홀로 나무일 때는 결코 숲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자신의 존재를 지울 때만 비로소 숲을 이룰 수 있다는 걸 배웁니다. “숲이 숲을 지우면/ 산이 되고,/ 산에서/ 산과 벗하여 산다는 것은/ 나를 지우는 일이다.”라는 당신의 가르침을 전부 알 수는 없겠으나 내 나름으로 살아가며 더 깨우칠 일이겠지요.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않고서야 어찌 밀밭을 이룰 수 있을까요.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에 나오는 말로 ‘화광동진(和光同塵)’이란 말이 또한 이와 흡사하겠지요. 말 그대로 해석하면 빛을 감추고 티끌 속에 숨어 있다는 뜻이지만 이때의 진(塵)이란 속세를 뜻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이 말은 겸손하란 뜻도 되지만 다른 한 편으론 자신이 지닌 능력이 제 아무리 뛰어나도 이를 내세우지 말고, 세상의 속된 사람들에게 눈높이 맞추란 뜻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 말은 오늘날 고립되어 가는, 위기에 처한 진보, 좌파를 자임하는 (저 같은)사람들이 귀담아 들을 만한 구절이란 생각이 듭니다. 리저호우(李澤厚)는 『고별혁명(告別革命)』이란 책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개량으로 혁명을 대체한다」는 글을 썼습니다.

지난 80년대를 치열하게 살아온 사람들은 누구나 ‘개량주의자’란 지적을 마음 한 구석에선 치욕처럼 느낍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이제 개량주의자였음을 자백하는 고해성사를 하려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혁명가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사실, 저는 그와 같은 현실이 슬픈 사람입니다. 리저호우는 “1895년, 갑오해전에 패배한 이후로 중국은 줄곧 ‘혁명의 길’과 ‘개량의 길’ 사이의 논쟁에 휘말려 있었다. 전자는 ‘돌변突變’ 즉, 계급투쟁이라는 극단적인 방식(폭력수단)으로 국가기구를 전복시켜 역사의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고, 후자는 ‘점변漸變’ 즉, 계급협력의 비폭력 수단으로 국가적, 사회적 자아의 경신을 추구하자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좌파와 진보를 단순히 민주노동당이나 참여연대, 민주노총 만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이들이 그나마 가장 대표적인 집단인 건 사실이겠지요. 이들 중 누구도 ‘혁명의 길’을 가야 한다고 주장하진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대한민국 사회에서 주류 좌파(진보)는 모두 개량주의자들입니다.

그러나 제가 답답하게 여기는 것은 이들 중 누구도 솔직하게 개량주의자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니, 어쩌면 모두가 그 사실을 암묵적으로 알고 있다 여기기에 말하지 않을 수도 있고, 이미 수차례 말했는데 저만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지요. 그것이 어찌되었든 우리나라의 좌파들, 진보들은 아직 마음속 저 깊은 곳에선 개량주의에 대한 혐오와 혁명에 대한 동경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듯 보입니다. 이건 남의 이야기라 하기 좋아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저 자신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려는 시도 끝에 나온 말입니다. 그것이 ‘돌변’이든, ‘점변’이든 추구하는 바를 리저호우의 말에서 빌리면 결국 국가적, 사회적 자아의 경신에 있습니다. 대체로 국가적 자아의 경신에 실패하는 경우, 국가와 지배계급이 택하는 손쉬운 해결책은 역사 이래 전쟁이었던 경우가 많았고, 피지배계급이 택하는 해결책은 폭동이나 혁명이었습니다. 전쟁은 자본가들의 혁명, 우파들의 혁명인 셈이지요. 역사가 한 개인이나 집단의 공과를 심판한다는 믿음을 버리고 났을 때, 역사는 그저 냉정하고 잔인한 기술(記述) 방식의 하나일 뿐입니다.

저는 중국식 유물론의 효시를 관자(管子)로 봅니다. 그는 춘추시대 제(齊)나라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였고, 후세 제갈량이 닮고 싶다고 말했던 관중(管仲:?~BC 645)입니다. 관중하면 우선 “관포지교(管鮑之交)”만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지만 관중은 제나라 민중들이 영웅처럼 떠받들던 재상이기도 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통해 마치 일종의 제왕론을 펼친 사람으로만 오해되는 것처럼, 관중 역시 그와 흡사한 사람으로 오해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는 『관자(管子)』 「목민편(牧民篇)」에 이르길 “광에 먹을 것이 차야 예절을 알고, 의식이 족해야 영욕(榮辱)을 안다(倉凜實則 知禮節, 衣食足則 知榮辱)”는 말을 했습니다. 제가 유물론의 본질을 지극히 천한 것으로 끌어내린다는 오해를 감수하고라도 말하자면, 결국 유물론은 인간이 정신만으로 살 수 없다는 현실주의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한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예수의 말에 반대하는 주의, 주장은 아닙니다. 도리어 그 반대에 가깝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은 빵만으론 살 수 없지만 빵 없이는 살 수 없다’가 우선인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급진은 명분이 아니라 개량주의자들임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일은 아닐런지요. 아니, 명분만 내세운 채 거짓희망을 주느니 차라리 보다 철두철미한 개량의 길로 가는 것이 도리어 급진의 길은 아닌지 생각해봅니다. 비판의 말만 앞세우면서도 실제로는 개량의 길로 질질 끌려갈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앞서 성찰하고, 개량하고, 개혁하고, 보수하여 실현가능한 희망, 급진을 실천해내는 것이 좀더 효과적인 전략이 아닐까 고민하게 됩니다.

1987년 이후 20년이 흘렀고, 1997년 이후 10년이 흐르고 있습니다. 프란츠 파농은 “민중에 대한 아첨을 경계하라”고 말했는데, 오늘 이 땅의 지식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의식적으로 여전히 민중에 대해 아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1980년대를 휘감았던 민중주의는 역사와 민중을 지혜로운 심판자, 추상적인 진리로 추어 올렸습니다. 그러나 이 때 말하는 민중이란 언제나 결국 각성한 민중으로서의 소수자였을 뿐임을 이제 인정해야 할 때입니다. 절차적 민주화라고 현재의 민주주의를 폄하하지만,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입니다. 지금 돌변의 방식을 택하자고 외치는 진보도, 좌파도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보와 좌파는 여전히 고립되어 있습니다. 저는 우리 모두가 개량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지 않으며, 도리어 그렇지 않은 분들에게 더 많은 존경이 돌아가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그토록 많은 이들이 민주노동당과 시민단체들, 민주노총에 등을 돌리고 있을까를, 아니 지지하지 않는 것일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어째서 민중들이 자신의 계급을 배신하는가, 지지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수많은 이론들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이데올로기와 체제, 교육, 언론 등 수많은 이유가 있다는 것, 그것이 모두 타당하다는 사실은 아마 아는 이들은 다 알고 있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가 좀더 솔직하게 고백할 때입니다. 1980년대의 분열을 오늘까지도 그대로 끌고 왔으며, 우리들의 현실을 비판하는 일에 능숙한 반면, 현실적인 대안이나 희망을 제시하는데 있어서는 그간 얼마나 서툰 존재들이었는지 말입니다. 거기에 더해 과거 전대협 의장을 비롯한 학생운동권 중 상당수가 결국 아무런 명분도 없이 현실정치에 투항해버렸고, 민주노총은 도덕성에 상처를 받았으며, 시민단체들은 정권교체 이후 하나둘씩 체제내화 되는 과정에 있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민중에게 아무런 희망도, 비전도 주지 못한 채, 과거와 같은 방식의 운동, 명분이 옳으니까, 정치적으로 올바른 싸움이기 때문에 혹은 우리가 언제는 언론의 지지를 받고 싸운 적이 있냐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교만이고, 자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를 지우고 나무, 숲, 산이 되는 희생, 싸우지 않고 이기는 나무 닭의 덕, 세상 사람들을 가르치려 하는 대신 자신을 낮춰 세상 사람들과 눈높이를 맞추는 겸손, 관자의 실용주의, 태산과 같은 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미FTA 타결 이후 평소 조용하기가 산과 같고, 사람 좋기로 소문난 허세욱 선생이 분신을 하고, 예천에서는 농민 한 분이 평소 친하게 지내던 마을 사람들에게 공기총을 쏘았습니다. 사는 건 앞으로도 힘이 들겠지요. 하긴 우리 네 사는 세상이 한 번이라도 살기 좋았던 적은 없습니다. 오늘 아니면 내일, 내일 아니면 모레가 더 좋은 세상 만들어보자고 다들 고생하시는 거 압니다. 다만 마르크스주의는 고정된 말씀에 얽매이는 종교가 아니라 언제나 변화하는 세상에 가장 적절하게 대응해온 철학이기도 했다는 걸 말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예전에 제가 썼던 글을 반복하는 것으로 이 지루한 고해성사를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독일의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물을 닦아줄 수 있는데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방어할 힘도 없는 가엾은 사람을 뭉개버리는 인간들은 누구든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선량하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그저 단순하게 선량하다는 것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 아우른다. 이것은 어떤 지성보다도, 옳다고 주장하는 우쭐함보다도 더 우월한 것이다.” 사회주의는 양심의 기억이자, 동시에 패배의 기억입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회주의는 우리들의 양심이 늘 손쉽게 욕망에 굴복할 수도 있음을 상기시켜 줍니다. 그건 어제도 그러했고, 현재에도 그러하며 불행히 미래에도 그럴 것 같습니다. 비록 우리의 희망이 저 멀리, 지금은 비록 그 길이 보이지 않으며 우리가 향하는 길 양 편으로 무수한 무덤들이 실패를 증명하지만, 그 길이 우리의 양심이 손가락질하는 방향인 이상 그리로 갈 수밖에 없겠지요. 그 길 위에서 외로운 한 명의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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