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반조 > 나무 속에, 파도 속에, 구름 속에, 모든 사물들 속에 — C.G. 융의 자서전을 읽고

“나의 생애는 무의식이 그 자신을 실현한 역사이다”(17)로 시작되는 «회상, 꿈 그리고 사상»(이부영 옮김; 집문당 1990)은, 당대의 혹독한 편견과 냉대를 무릅쓰고 극도로 고독한 자리에서 무의식의 세계를 대면하면서 인간의 내면, 자기 자신을 탐구했던 정신의학자 C.G. 융의 자전적 저술이다. 이 책은 융의 전집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일부분은 융이 집필하고 나머지는 융이 말한 것을 조력자 아니엘라 야훼가 정리한 일종의 자서전이다. 여기에서 융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내적인 체험들을 중시하고서 그의 생애를 회상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의 꿈과 환상과 명상, 그리고 체험이 주 내용을 구성한다. 나보다 앞선 세대의 번역이어서 그런지 번역어가 낯선 면이 있지만 요즘 소장학자들의 상투적인 번역어(독한사전 수준의 한글)에 많이 지쳐 있는 나는 오히려 무척 반가웠다. 다만 번역어에 대응하는 독일어를 일일이 확인하기가 어렵고(가령, 심혼, 영혼, 귀령, 영, 정신, 마음, 자아, 나 등등) 가끔씩 비문과 엉뚱한 번역어가 튀어나와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정말 잘 읽히는 문장이다. 나의 이 글은 이 책에 대한 소개서라기보다는 이 책을 통하여 알게 된 융의 감동적인 생애에 대한 약간의 안내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에서 자기 자신을 탐구했던 수많은 인물들을 알고 있지만, 그 탐구 결과를 융처럼 학문적인 세계로 옮겨놓은 이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즉, 자기 자신을 탐구하여 ‘앎’에 이르렀던 이들은 그것을 像이나 언어로 옮기기를 꺼렸으나, 융은 그 ‘앎’, 그 ‘경험’을 어떻게든 像으로 옮기려고 노력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과연 그 앎, 그 경험이라는 것이 무엇일까?

서양의 전통에서 그 앎을 표현하는 가장 정확한 언어는 ‘그노시스’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역사는 ‘그노시스’를 영지주의의 언어로 간주하여 배척하는 바람에 어두운 언어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언어 대신에 ‘성스러움’이라는 대단히 지적이고 신학적인 용어가 사랑받았다. 그러나 ‘성스러움’은 더 이상 ‘계시’가 불가능한 시대에 계시가 가능했던 시대의 경험을 추억하는 세련된 언어가 아닐까? 그것은 하느님 경험이 불가능하다고 선언된 도그마 시대의 산물이 아닐까? 루돌프 오토가 «성스러움의 의미»(분도출판사 1987)라는 책을 통하여 ‘누멘’을 등장시킨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러니까 그는 그 책에서 라틴어 ‘누멘numen’이란 용어를 ‘성스러움’으로 탈바꿈 되기 이전의 사태를 뜻하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 이후로 ‘누멘’, 혹은 ‘누멘적인 것’(번역서는 ‘누미노제적인 것’으로 옮기고 있다)이라는 용어는 기독교 세계관에 포섭되기 이전의 ‘성스러운 경험’을 함의하게 되었다.

그 ‘누멘’, ‘누멘적인 것’이 인간에게 다가오면 그 인간은 필연적으로 위험하다. 그것은 선악이 없다, 아니 선악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그 ‘누멘’의 경험들은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줄까?

그러한 경험들은 도움을 주거나 파괴적인 영향을 인간에게 준다. 그는 그것을 이해하거나 파악하거나 지배하지 못한다. 그는 그 체험에서 빠져나올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을 비교적 압도적인 힘으로 느낀다. 그 체험이 그의 의식의 인격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올바른 인식을 할 때 그는 그 체험을 마나Mana, 데몬Dämon, 혹은 신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과학적인 인식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제공하고 있다.(380)

융은 ‘무의식’이라는 용어를 마나니 데몬이니 신이니 하는 개념과 동의어로 간주하고 사용한다. 무의식의 탐구는 곧 자기 자신의 탐구인 것이다. 그는 어떻게 해서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게 되었을까? 융 스스로가 평생에 걸쳐 그 누멘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니체 역시 그러한 경험을 했다. 그러나 니체는 자신의 경험에 대하여 세상이 어떤 반응을 내보일지에 대한 아무런 전략적 고려 없이 그 경험을 세상에 쏟아내고 말았다. 융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니체가 경험한 바와 같은 것을 이미 어린시절에 경험했던 터였다:

어느 한순간, 나는 마치 짙은 안개 속에서 방금 빠져나온 것 같은 엄청난 감동에 사로잡혔다. 동시에 지금 여기에 내가 존재한다는 의식을 느꼈다. 나의 등 뒤에는 마치 안개의 壁과도 같은 것이 있었다. 그 안개벽 뒤에서 나는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서 나온 순간, 나에게 가 생겨난 것이다. 에도 나는 존재했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저 우연히 일어났을 따름이다. 그러나 지금 나는 가 여기 있다. 여기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다. 에는 그것이 나와 함께 行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가 하고자 했다.(45-46)

안개 속에서 빠져나와 自我를 확립한 순간부터 神의 통일성, 위대함, 그리고 超人性은 내 환상을 자극하기 시작했다.(53)

하늘의 별세계와 끝없는 공간에서 오는 입김이 나에게 와닿는 것 같은, 혹은 어떤 영혼이 눈에 띄지 않게 방안으로 들어선 것 같은 느낌, 아득히 지나간 과거의 것, 그러나 언제나 존재하며 超時間的인 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현존하는 듯한 영혼의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82)

열두 살에 처음 겪었던 이런 부류의 경험들은 그 누구와도 이야기 나눌 수 없는 것이었다. 그의 주변세계는 모두 “신학적 종교”로 굳어져 있었고 그의 체험은 그런 종교에서 용인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영적인 아이였고, 그 영적 체험을 어느 누구와도 나눌 수 없다는 사실마저 일찍부터 알았다:

거기에 관해 누구와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어디서도 접촉할 만한 구석을 찾지 못했을 뿐 아니라 나는 다른 사람들이 불신과 두려움을 가지고 나를 대하는 것처럼 느꼈으므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80)

그리하여 내가 아는 어느 신학자도 “어둠을 비치는 빛”을 자신의 눈으로 본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 그랬다면 그들은 결코 “신학적 종교”를 가르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신학적 종교”를 가지고는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신의 체험에 상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112)

나는 사람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진 것을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일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점에 천진난만한 사람은 사람이 누구에게 그가 모르는 것을 말할 때 그것이 그 동료에게 얼마나 모욕이 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124)

이러한 누멘의 체험, 그리고 그 체험에 따른 외로움 속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융이 대학시절 처음 니체를 읽었을 때 몹시 흥분했음은 당연하다. 그리고 그는 그 누구보다도 니체의 위험을 잘 간파했다:

나는 끝없이 열광하였다 . . . 강렬한 체험이었다 . . . 니체는 자기의 제2호를 그의 생애의 후기, 그러니까 중년 이후에 가서야 발견했다. 이에 대하여 나는 제2호를 이미 이른 청소년기부터 알고 있었다. 니체는 순진하고도 경솔하게 이 arreton, 이름붙일 것이 아닌 것에 관해서 마치 모든 것이 잘 되어 있는 것처럼 말했다 . . . 그는 그의 제2호를 거침없이, 아무 생각도 없이, 그런 것을 전혀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계에 꺼내 보인 것이다. 그는 그의 忘我境을 함께 느끼고 “모든 가치의 전도”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있으리라는 어린애 같은 기대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나 그는 다만 교양있는 속물을 찾았을 뿐이고 비극적 희극인 것은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처럼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 . . 모두 연관성을 잃은 지식에 마음이 팔린 이 세상에 알리고자 하는 부질없는 시도를 한 것이다. 게다가 그 — 줄타는 사람은 그 자신을 넘어서 버렸다. 그는 이 세상에서의 처신을 알지 못했다.(123-124)

선불교에서도 자신이 경험했던 경계를 누구에게도 드러내지 말라고 가르친다. 설사 목숨을 나눈 도반일지라도 그 경계를 드러내서는 안되며 오직 선지식에게만 드러내어 점검을 받아야 한다. 제자가 그러한 점검을 무시한 채 전면에 나선다면 매우 위험한 상태에 이르를 수도 있다. 이른바 ‘마구니’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깨달음의 종교에는 예외없이 이런 비의성이 있다. 이 비의성은 누멘의 강렬한 경험 이후 그 경험자 자신이 자칫 파괴환상으로 내달리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이기도 하거니와, 이 비의성이 지켜지지 않으면 이 누멘의 경험을 알지 못하는 일반인들을 혼란과 위험에 빠뜨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경험자나 경험을 전달받는 자나 누멘의 경험은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은 성스럽고 위험한 것이다.


융은 니체의 경험이 자신의 경험과 동일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간파했으며,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두고 거리낌없이 “복음전달자”라고 칭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는 어린시절부터 인간세계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니체처럼 팽창(Inflation)을 하지는 않았다. 그는 소년시절부터 정신의로 활동하던 초기시절까지 자신의 경험을 누구에게도 전달하지 않았고 또 전해 줄 만한 사람을 만나지도 못한 채 조용히 연구만 했다.

그런 그는 당시 정신의학의 추상화된 진료방식에 만족할 수 없었다. 그는 “진정한 치료[는] . . . [환자의] 개인적인 역사를 탐색하는 데서 시작되는 것”(139)임을 확신하였으며, 그리하여 환자의 개인사와 심리적 비밀들을 토대로 진료하면서 “피해망상과 환각이 하나의 의미의 핵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우리는 . . . 정신병에서 인간 존재의 바탕을 만나는 것이다.”(149) 이를테면, 정신병 환자는 인생사에서 비극적 사건을 겪은 적이 있으며, 그 사건에 따른 멸시감과 모멸감을 代償하기 위해 현세 외적인 환상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특별히 그 환상은 단순히 개인적인 의미에 국한되지 않고 때로는 집단적 무의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관찰하였다.

만년의 융
융은 “인간의 원초적인 감정에 어울리는 주거”를 위해 호숫가에 손수 집을 짓고 살았다

융은 그 스스로도 꿈과 환상을 자주 접한 보기드문 인간형,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거의 “영매”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가 자서전에서 이야기하는 꿈과 환상들은 우리에게는 상당히 기묘하고 이질적이다. 그러나 그는 마음속에 나타나는 그런 환상들을 피하지 않고 용기 있게 그 속으로 빠져들어갔다. 그는 횔덜린이나 니체처럼 정신적 붕괴에 이를 뻔한 위험한 상태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위험한 환상 속에서도 그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는 말한다: “. . . 그 폭우에 부서졌다. 니체와 횔데를린과 그밖의 많은 것이 부서졌다. 그러나 내 속에는 마력 같은 것이 있어 처음부터 나를 지탱해 주고 있어서 내가 환상에서 겪은 것의 의미를 찾아야만 했다.”(202) 이것은 그 자신이 무의식에 완전히 휩쓸리지 않으려는 방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환자를 이해하기 위한 거인적인 노력, “환자를 위해서 감행하는 것”(203)이었다. 이것이 그를 그 위험에서 버티게 해 주었다.

이러한 노력의 과정이 7장 <무의식과의 대면>에 실려 있다. 그의 무의식과의 대면은 1913년부터 1919년까지 6년 간에 걸친 고독하고 위험하고 처절한 과정이었다. 누구도 그를 이해하지 못했고 누구도 그에게 동조하지 않았으나, 그는 결국 위험한 문을 열었고, “철학적 연금술과 그노시스 파의 사상에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에 이르기까지 — 대부분 인기 없는, 애매모호한, 그리고 위험한 — 세계의 다른 극을 향한 하나의 탐험여행”(215)을 했다.

이때부터 나의 인생은 보편성에 속하게 되었다. 나에게 중요했고 내가 찾던 인식들은 당시의 학문에서는 아직 만날 수 없었다. 나는 원초적 체험을 몸소 겪어야 했고 게다가 내가 체험한 것을 현실의 토대 위에 확립해야 했다. 그렇게 안 했더라면 그 체험은 생명력이 없는 주관적 전제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영혼에 봉사하는 것을 나의 역할로 삼았다. 나는 그것을 사랑했고 또한 미워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커다란 보배였다. 내가 그 영혼의 말을 적은 것은 나의 존재를 비교적 전체성으로서 살고 견디어내는 유일한 가능성이었다.(218)

그는 이 기간에 이후에 펼쳐낼 사상의 거의 대부분의 핵심을 건져올렸다. 그러므로, 그는 경험주의자이고, 그의 저작들은 한 영적인 인간이 누멘의 체험을 한 이후 그 체험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끈기 있게 탐구한 기록이기도 하다.

내가 나의 내적인 像을 추적하던 그 몇 해는 나의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 그 속에서 온갖 본질적인 것이 결정되었다. 모든 것이 그때 시작되었다. 뒤의 세부적인 것은 다만 보충하거나 보다 더 분명히 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후기의 작업은 모두 그 당시 무의식에서 터져나와 나를 휩쓸었던 자료들을 보다 더 철저하게 다듬는 데 있었다. 그것을 일생을 두고 하여야 할 작업의 原物質prima materia이었다.(228)


이처럼 누멘을 체험하고 또 탐구했던 그가 동양사상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불교, 요가, 도가, 주역, 중국연금술, 선불교 등 그의 관심사는 폭넓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서양인임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서양의 고중세 신화의 이미지들을 빌어 무의식의 내용을 읽어내고자 했다. 그래서 동양인인 우리는 그의 꿈과 환상과 이미지들에 대하여 이질적인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특히 무의식의 어두운 면에 대한 진지한 탐구는 과연 이런 것이 있겠나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이러한 의문은 동양인인 우리가 선불교나 도가의 가르침을 통하여 언제나 자연과 더불어 상상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리라. 우리는 자연의 사물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반면, 혹 서양인은 신화의 이미지들과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는 않을까? 아무튼 이런 낯선 요소에도 불구하고 융은 ‘아는 자’였고, 그래서 평생 외로웠다. 그러면서도 그는 오직 내부적으로만 침잠하거나 외적으로 팽창하는 대신 그 앎을 세상의 언어로 내놓기 위해 평생을 겸허하게 고투한 학자였다.

어릴 때 나는 외로웠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왜냐하면 내가 알고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어야 하는데도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하나도 모르고, 전혀 알고자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고독이란 그의 주변에 사람들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기보다 남에게 자기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전달할 수 없거나, 자기는 어떤 생각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간주될 때 생기는 것이다. 나의 고독은 나의 어린 시절의 꿈과 더불어 시작되었고 내가 무의식과 작업을 할 시기에 최고에 달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알면 그는 외로워진다.(401)

융의 자전적 저술을 읽으면서 나는 니체와 횔덜린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서양에서는 누멘을 체험했던 자가 정신적 붕괴로 이어지고 말았던가? 아니, 서양인들 대부분은 그들이 누멘을 체험했다는 사실조차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그저 그들이 ‘미쳤다’는 데에만 동의하는 듯하다. 참 무서운 일이다. 동양에서는 니체나 횔덜린의 예를 찾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정도의 누멘의 체험은 동양의 전통종교에서 충분히 흡수하고도 남을 수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니체와 횔덜린의 사례는 신학적 종교가 되어버린 기독교 때문은 아닐까? 신학적 종교가 거의 모든 정신세계를 장악한 시대에 누멘을 체험한 자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움을 넘어 절망과 파멸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또한, 그런 이들을 지도할 만한 자가 없다는 사실은 그들이 누멘의 부정적 영향 아래 고스란히 노출될 수밖에 없음을 뜻한다. 누멘은 누멘을 경험한 자를 높히면서 동시에 낮추기 때문이다. 그것은 절대긍정 아니면 절대부정을 향한다. 그러고 보니, 니체는 “높힘과 낮춤”(Erhöhung und Erniedrigung)이라는 용어를 자주 썼다. 아, 니체여, . . .

그런 면에서 극도의 고독과 커다란 위험을 견뎌낸 융은 독보적인 인물이다. 나는 틈틈이 그의 저술을 읽을 필요를 느낀다.

때때로 나는 마치 내가 자연의 풍경과 사물 속으로 퍼져들어가 모든 나무 속에 살며, 출렁이는 파도 속에, 구름 속에, 오고가는 동물들 속에, 그리고 그밖의 모든 사물 속에 살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다.(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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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퍼온글] 위기의 탐구자, 가라타니
탐구 1
가라타니 고진 지음, 송태욱 옮김 / 새물결 / 1998년 12월
평점 :
품절


  1.

  본서의 주제를 한 마디로 말한다면 그것은 「독아론」과 「타자」라는 두 개의 문제로 귀착된다. 이것들은 물론 철학의 영역에서는 데카르트 이후 지치지 않고 반복되어온 진부한 화제에 속한다. 그러나 가라타니의 전략목표는 이것들의 논의에 새로운 논점을 첨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독아론」과 「타자」를 둘러싼 기존의 문제 틀 자체를 근본적으로 「전도」하는 것에 두어져 있다. 이 「전도」작업은 독아론의 극복을 내세우면서도 독아론을 재생산해 온 것에 지나지 않는 지금까지의 철학(가라타니는 그것을 「변증법」이라 부른다)의 전면적인 부정으로 직결되고 있다. 가라타니가 비트겐쉬타인과 만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이다.


  우리는 통상 나와 타자와의 사이에 「언어게임」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이전부터 피아(彼我)의 사이에 공통의 규칙(코드)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가라타니에 의하면 이러한 사고야말로 「독아론」의 전형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독아론이란 「나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법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발견되는 타자는 「다른 하나의 자기의식」에 불과하고, 여기서 행해지는 언어게임은 외관은 어떻든 간에 단지 「자기대화(모노로그)」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서는 타자의 「타자성」이 처음부터 누락된 것이다. 현상학을 비롯한 「내성(內省)」을 특권적 방법으로 하는 철학은 「나」로부터 「우리」로의 통로를 확보하려는 것에 불과하며, 결국 진정한 「타자」를 발견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2.

  자기대화의 폐쇄된 영역을 타파하기 위해 가라타니가 요구하는 것은 「말하다 - 듣다」 입장에서 「가르치다 - 배우다」 입장으로의 근본적인 시좌의 전환이다. 소쉬르의 언어학에서 오스틴의 행위론에 이르기까지 「말하다 - 듣다」관계를 기초에 두고, 그것들을 교환 가능한 역할로 간주하는 입장은 결국 「모노로그」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 소쉬르의 「랑그」, 오스틴의 「관습」 등은 공통의 코드를 새롭게 설정하는 것에 의해 역으로 「타자」의 존재를 은폐하는 개념장치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하여 비트겐쉬타인의 독창성은 규칙을 공유하지 않는 외국인이나 어린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다」라는 관점에서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고찰하는 것에 있다. 가르치는 입장에 설 때 우리는 동일한 「의미」나 「규칙」을 아프리오리하게 전제할 수 없다. 오히려 의미이해의 주도권은 항상 「배우는」측의 자의에 맡겨져 있다. 「의미하는 것」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갖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여기서는 「사적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때문에 언어게임은 「어둠 속의 도약」(크립키)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는 「공통의 규칙」이 되는 것은 후지혜(後知惠)로서 날조된 사후적인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


  확실히 이러한 가라타니의 비트겐쉬타인 해석은 크립키의 규칙수순(規則隨順)을 둘러싼 고찰에 많은 것을 신세지고 있다. 그러나 크립키가 사적 규칙에 관련된 패러독스를 「공동체의 선행성」에 호소하여 해소하려고 할 때, 가라타니는 크립키로부터 결별한다. 비트겐쉬타인의 사적 언어비판을 사회적 제도나 공동주관성의 우위성을 시사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오늘날에는 일종의 「공인된 학설」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러나 가라타니에 의하면 그것은 공통의 의미나 규칙을 「기계장치의 신」으로 무대에 등장시키는 것에 불과하며 결국 데카르트의 「신」의 대체물에 지나지 않는다. 어찌되었든 간에 그것은 문제의 회피가 아니면 순환논법의 아포리아를 면할 수 없는 것이다.


 3.

  「말하다 - 듣다」라는 관계가 결국은 자기대화(독아론)로 귀착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하여, 「가르치다 - 배우다」라는 관계는 그 속에 가교설정이 불가능한 심연을 안고 있는 것에 의해 역으로 진정한 「타자」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타자란 공동체의 내부가 아닌, 외부에 속하는 자인 것이다. 이것을 가라타니는 "대화란 언어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자와의 사이에만 있다. 그리고 타자란 자신과 언어게임을 공유하지 않는 자가 아니지 않으면 안 된다"하고 간결하게 요약한다. 물론 이것은 역설 등이 아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근원적인 「비대칭성」은 타자를 타자답게 하는 성흔(聖痕, stigmata)인 것이다. 이러한 「타자」를 가라타니는 키에르케고르의 「예수」개념 속에서 발견한다. 즉, 「절대타자(=신)」도 아닌, 「상대타자(=사람)」도 아닌 「神人」이라는 양의성을 지닌 예수야말로 우리들의 언어게임을 「異化」하는 힘을 갖는 본래의 의미에서의 타자인 것이다.


  가라타니가 비트겐쉬타인과 키에르케고르에서 발견한 것은 이른바 「이인(異人)으로서의 타자」이다. 그것은 공동체의 외부로부터 부지불식간에 도래하고 공동체의 동일성(identity)을 위기에 처하게 하는 폭력적 존재에 다름 아니다. 그것을 「예수」라 불러도, 혹은 「바로바로이」라 불러도 같은 것이다. 플라톤 이후의 철학은 「대화」라는 미명 하에 이 「바로바로이」의 존재를 고의로 은폐하고 배제하는 것에 의해 점차 공동체 내부에 모노로그의 질서를 보지해 왔다. 가라타니가 이의를 제기한 것은 이러한 「모노로그의 질서」 혹은 「독아론적 이성」의 수호신으로서 자신을 바쳐 온 기존의 철학에 대한 것이다.


  「나」와 「공동체」는 대립개념이 아닌 보완개념에 불과하다. 공동체 내부에 안주하는 한, 「내」가 「우리」로 확장된다 해도 그것은 독아론의 꿈을 꾸는 것임은 변하지 않는다. 독아론의 일장춘몽은 타자와의 조우에 의해서만 깨어질 수 있다. 언어에 그 진면목을 묻는 것은 바로 이 장면에서이다. 즉, 「대화」란 공동체와 공동체의 「사이」에서 생기하는 스릴 있는 사건에 다름 아니다. 적어도 가라타니는 비트겐쉬타인의 「언어게임」과 맑스의 「등가교환」 속에서 그러한 「대화」의 있어야 할 모델을 발견한 것이다.

* 蛇足 : 내가 가라타니의 저서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이 탐구 1, 2이다. 아마 가라타니의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문예평론가에서 비평가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한 부분에서 쓴 글일 것이다. 가라타니 스스로도 자신이 태도의 변경이 이루어졌음을 고백하고 있는데, 나는 거기에서 미답의 영역으로 처음 들어가려는 고독한 가라타니의 그림자를 볼 수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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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퍼온글] 피터 싱어 교수 인터뷰

 

피터 싱어 교수 인터뷰(2001년 5월)


   윤리는 인간을 다른 동물과 구분 짓는 중요한 잣대이다. 그러나 최근 주로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간의 삶을 둘러싼 조건이 급격히 변화하면서 무엇이 윤리적으로 옳은지에 대한 판단이 흔들리고 있다. 인류의 새로운 윤리적 기준을 세우려고 하는 미국 프린스턴대 피터 싱어 교수를 침례신학대 배국원 교수가 만나 그가 주장하는 '실천윤리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편집자)


―당신은 실천윤리학이라는 분야를 새롭게 정립한 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윤리는 당연히 실천을 전제로 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실천윤리학이라는 말의 의미가 모호해집니다. 실천윤리학이란 과연 무엇이며 왜 필요합니까?


"실천윤리학(practical ethics)은 전통윤리학의 한계로 인해 요청됩니다. 현대 사회는 급격하게 변하고 있고 낙태·안락사·환경오염·독점자본 등 문제들이 새롭게 등장해서 윤리적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윤리학은 이런 문제들에 적절하게 대응할 능력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은 윤리학자들이 구체적인 윤리적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윤리 그 자체의 의미를 질문하는 방법론적 탐구에 더욱 치중하여 왔기 때문입니다. 실천윤리학은 이름 그대로 현대인의 윤리적 실천을 목표로 하는 학문으로서 이론적 탐구에 그치는 윤리가 아니라 실행 가능한 구체적 윤리를 제시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특징은 다양성과 상대성이라고 말합니다. 상대주의가 지나쳐 허무주의까지 거론되는 우리 시대에 어떻게 윤리가 가능합니까?


"윤리의 전통적 기초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판단에는 동의합니다. 종교적 권위 혹은 계몽주의의 이성적 권위에 의거한 도덕률은 현대인들에게 더 이상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현대인에게 도덕(morality)은 무의미할지라도 윤리(ethics)는 필요합니다. 인간은 반드시 행동을 위한 결단을 내려야 하고 이는 윤리적 선택과 기준을 요구합니다. 윤리적 선택이 가져올 결과를 기준으로 삼자는 나의 결과주의(consequentialism)는 물론 공리주의로부터 영향 받은 것입니다."


―결과주의를 잘 보여주는 예가 동물 살상에 대한 당신의 반대라고 보여집니다. 사람이 육식을 하는 것이 왜 비윤리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쓴 '동물해방'의 중요한 논지는 인격체인 동물에 대해 인간이 지극히 비인격적인 살상행위를 자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로지 더 많고 더 좋은 고기를 얻기 위하여 온갖 비윤리적인 방법으로 사육하고 살육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 가축을 기르기 위해 산림을 목장으로 개조하면서 환경을 훼손하게 되고, 또 목장의 가축들은 전 세계 메탄가스의 20%를 배출하여 더욱 환경을 오염시키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동물과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당신은 동물도 인간과 같은 '인격체(person)'라고 강조합니다. 전통적으로 사람이라고 해석되어 왔던 이 단어(person)를 어떻게 새롭게 정의할 수 있습니까?


"사물들은 세 가지 범주로 구분될 수 있습니다. 무감각한 것, 감각은 있으나 자의식을 갖지 못한 것, 감각과 자의식을 가진 것, 세 종류입니다. 이 중에서 마지막 범주에 해당하는 생명체는 모두 인격체(person)라고 나는 정의합니다. 나는 비록 동물학자는 아닙니다만 물고기 등은 두 번째 유형에, 다른 많은 동물들은 세 번째 유형에 속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모든 인격체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고려해야 할 윤리적 의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20 세기에 들어와서 남성우월주의와 인종차별주의는 종식을 고했습니다.  이제 남은 과제는 인간우월주의입니다."


―방금 말씀하신 인격체의 정의는 획기적입니다. 그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똑같은 정의를 적용해서 당신이 낙태를 찬성하고 불구로 태어난 유아의 살해를 지지한다는 사실입니다. 획기적인 정의가 오히려 엽기적으로 적용되고 있지 않은가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뱃속의 태아는 감각을 느끼지만 자의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두 번째 유형에 해당하는 비인격체입니다. 뇌가 없게 태어난 무뇌아 등 특정한 불구아들도 역시 정당한 의미의 인격체가 아닙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이 오해하듯 내가 무조건적인 낙태와 불구아 살해를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런 가능성을 위한 윤리적 근거가 있다고 말할 뿐입니다."


―서두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실천윤리학은 우리 시대를 위한 윤리적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요청됩니다. 그러나 지금 세계에는 복제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논란이 가열되고 있는데 정작 실천윤리학자들은 아직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테크놀로지가 너무 빠르게 발달하여 대응하기 숨이 가쁠 지경입니다. 원칙론적 의미에서 인간 복제는 윤리적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3대 독자로 태어난 자식이 죽을 수밖에 없는 경우 등 여러 가지 정황에서 복제 결정은 정당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우려하는 것은 복제의 테크놀로지가 일부 특권 부유층에 의해 왜곡되거나 남용될 가능성입니다. 우생학적 방법으로 신귀족주의적 사회계층이 형성되는 등의 부적절한 결과에 대한 대비가 필요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현재 실천윤리학이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다국적 기업의 횡포 등 기업 윤리를 바로잡는 일도 심각합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역시 올바른 환경 윤리의 정립입니다. 지금 지구는 날이 갈수록 오염되어 가고 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의 생존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인간만을 위한 윤리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위한 공생의 윤리가 절실히 요청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자 나라가 가난한 나라에 대한 경제적 특권을 포기하고 나아가 인간이 다른 종에 대한 지배적 특권을 포기할 때 참다운 공생의 윤리가 수립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배국원·침례신학대교수

chosun.com 2001.05.08


■싱어 누구인가


실천윤리학의 새 지평 개척


   실천윤리학의 세계적인 거장인 피터 싱어(Peter Singer)는 현대 사회의 복잡한 윤리적 문제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분명한 입장 표명으로 유명하다.

   1946년 호주의 유태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난 싱어는 멜버른 대학을 거쳐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7년부터 호주 모나쉬 대학에서 가르치다가 1999년 미국 프린스턴 대학의 생명윤리 교수로 자리를 옮겨 활동하고 있다. 현재까지 모두 27권의 저서를 집필 또는 편집한 싱어는 '실천윤리학'이라는 분야를 새롭게 정립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활발한 기고와 강연 활동을 통해서 윤리적 견해를 거침없이 피력해 온 싱어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철학자들 가운데 일반인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사람 가운데 하나이다. 싱어가 29세 되던 1975년에 출판했던 '동물해방'은 40만권이 넘게 팔렸으며 9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동물 살해을 반대하는 철학적 논증과 더불어 채식주의자를 위한 요리법까지 소개하고 있는 이 책을 통해 딱딱한 철학 서적에 식상해 있던 독자들은 삶에 있어서 철학의 위치를 다시 생각해보는 계기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싱어의 명성만큼이나 그에 대한 비판도 세계적이다. 철학자들은 그가 너무 피상적이라고 비판하고 일부 청중들은 낙태와 안락사를 지지하는 싱어를 인종 청소를 주장했던 히틀러에 빗대어 야유한다. 프린스턴 대학으로 옮길 때 또 한 차례 반대 여론에 직면했던 싱어는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현재 가장 주목받는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편집 by Han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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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반조 > 천 육백 년 편견의 역사를 뒤집다
이것이 영지주의다 - 기독교가 숨긴 얼굴, 영지주의의 세계와 역사
스티븐 횔러 지음, 이재길 옮김 / 샨티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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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들은 사탄의 통로다. … 그대들은 사탄이 감히 공격하지 못한 남자를 꾀었던 여자다. … 그대들 각자가 이브라는 사실은 아는가? 그대들의 성性 위에 내린 하느님의 선고는 지금도 유효하다. 필연적으로 죄 또한 유효하다.

상식이 있는 이들이라면 위의 인용문이 얼마나 편견에 가득 차 있고 얼마나 폭력적인가를 간파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믿기 어렵겠지만, 초기기독교의 교부였던 테르툴리아누스가 여성들에게 쓴 편지 내용이다. 과연 이런 혐오스러운 글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혹시 성서 문자주의와 교조주의 때문은 아닐까? 그는 “불합리하므로 나는 믿는다”(credo quia absurdum)는 유명한 문구로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물론 그가 이 문구를 직접 쓰지는 않았지만 그의 신학적 태도는 이 문구로 요약될 수 있다. 신의 아들인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은 그것이 불합리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믿음”(credo, credible)은 위험하다. 이런 믿음은 성서의 모든 사건을 역사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한다. 그 믿음에 의하여 창세기 내용도, 예수의 동정녀 탄생과 부활도 역사적 사실이 된다. (그것이 신화가 아니라고 믿는 이들만큼 성서의 풍요로움을 제거하는 이들도 드물리라!) 여기에서 성서 문자주의가 탄생하고 교조주의가 태동한다. 이러한 공격적 사상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는 테르툴리아누스는 영지주의를 혐오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영지주의자들은 자신의 영적 경험을 신화를 빌어서 이야기하기를 좋아했으므로 성서 문자주의나 교조주의와는 정반대였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영지주의의 문헌은 대부분 실전되었고, 단편적으로만 테르툴리아누스와 같은 성향의 교부들의 기록에 의해서만 후대에 전달되었다. 그래서 서구 정신사에서 영지주의는 항상 비난받아 마땅한 이단이었고, 육체와 물질세계를 혐오하는 이들이었고, 황당한 신화를 신봉하는 이들이었다.

1945 년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은 이러한 천 육백 년간의 왜곡과 편견의 역사를 뒤집는 사건이었다. 그 문헌들은 역사속에서 주류기독교에 의해 거의 완전히 폐기되었던 영지주의의 문헌들이었기 때문이다. 이 문서의 발견은 1945년에 이루어졌으나 문서의 확보전과 학자들 특유의 공명심이 결합되면서 수십 년이 지난 뒤에 비로소 일반에게 공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사정은 1970년에 발견되었으나 작년 봄에 처음 공개되면서 세계적인 이슈가 되었던 <유다복음>의 사례에서 잘 엿볼 수 있다.) 그리하여 1980년대에 대중이 접할 수 있는 소개서들이 출판되기 시작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지난해 비로소 영지주의 관련서적들이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스티븐 횔러의 «이것이 영지주의다»(샨티, 2006)는 바로 이러한 유구한 역사적 흐름의 소산으로서, 탁월한 영지주의 입문서라고 할 만하다.

 

“영지靈知”는 희랍어 “그노시스γνωσις”의 번역어인데, 이는 대부분의 번역어처럼 일본인들의 결과물일 것이다. 전통적으로 “영지”는 선불교에서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 “알음알이[知解]”나 “분별”과 대비되는 공적한 상태의 앎, 깨달음을 말한다. 이 용어는 우리나라의 태고선사나 나옹선사의 어록에서도 나타난다. 결국 영지주의의 “γνωσις”는 동양의 선불교와 맥락이 닿는다고 판단하고 “영지”라고 번역한 셈인데, 이는 매우 탁월한 판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를테면 영지주의는 서양의 선불교라고 할 만하다. 실제로 저자는 “위대한 영지주의자 붓다”(43)라는 표현도 쓴다. 그렇다면, 과연 영지주의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저자는 영지주의의 문헌들 중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도마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인용하고 있다: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게 될 때 너희는 알려지고 ‘너희가 살아계신 아버지의 자녀’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너희 자신을 알지 못하면 너희는 빈곤케 되고 너희 자신이 곧 빈곤이 될 것이다.”(말씀3)

“태초를 알고 있어서 종말에 관해 묻느냐? 태초가 있는 곳에 종말도 있다. 태초에 서 있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는 끝도 알게 될 것이며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말씀18)

“만일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낳으면 너희가 낳은 것이 너희를 구원할 것이요, 너희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낳지 못하면 너희가 낳지 못한 것이 너희를 죽일 것이다.”(말씀70)

“나는 그 모든 것들 위의 빛이요, 나는 만물이니, 만물이 나에게서 나와서 나에게 이르렀다. 저 나무를 쪼개보아라. 나는 저기에 있다. 저 돌을 들어보아라. 거기서 나를 볼 것이다.” (말씀77)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저희가 당신을 믿을 수 있도록 당신이 누구신지 말씀해 주십시오.”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는 하늘과 땅의 징표는 이해하면서 너희 앞에 있는 자는 알지 못하니, 너희는 이 순간을 이해하는 법을 모르는구나.”(말씀91)

불교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알고 있는 이들은 위의 구절들이 너무 친근해서 혹시 불교의 가르침이 아닐까 의구심을 가질 만하다. “살아계신 아버지”, “구원” 등의 낱말이 생소하기는 하지만, 모든 위대한 가르침은 그 가르침이 전파되는 지역의 문화와 언어를 토대로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생소할 것도 없다. 이처럼 불교와 영지주의 간에 근본적인 친화성이 느껴지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영지주의와 인도종교의 교류관계를 파헤치려고도 한다. 그러나 굳이 그럴 필요는 없겠다. 인간의 위대한 점은 서로 간의 교류가 없더라도 충분히 위대한 영역을 공유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저자의 말을 빌어서 말하자면, “인간의 영혼이라는 바다에 퍼지는 통찰은, 연못에 던져진 돌멩이가 만들어내는, 점점 커져가는 동심원과 같다. 우리가 더 이상 지각할 수 없을지라도 그것은 영원히 바깥으로 확대되어 간다. 영지주의자들의 지혜는 이런 동심원과 같아서”(6) 다른 동심원, 가령 불교의 가르침과 언젠가는 만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최근 수십 년 사이, 더 정확히 말하면 19세기 후반 이후, 독단은 덜한 반면 영감은 훨씬 풍부한 가르침과 수행법을 찾아 동양의 종교로 발길을 돌리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찾는 대안이 아주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영지주의라 불린다는 것을 전혀 짐작도 못한 것 같다. 그뿐 아니라 실재와 영혼, 그리고 깨달음의 필요성 등에 대한 통찰에 있어서 영지주의와 동양 종교가 얼마나 유사한지도 깨닫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20)

동양과 서양을 하나로 묶는 가장 중요한 공통의 분모는 분명 그노시스의 경험이다.(21)

영지주의가 과연 이런 것이었던가? 나 역시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편견에 가득 찬 초기기독교 교부들의 비난을 통해서만 영지주의를 접했었다. 물론 그들의 비난이 부당할 것이라는 예상은 했다. 이제 우리는 나그함마디 문서의 발견과 함께 역사상 가장 쉽고 풍요롭게 영지주의의 문헌을 접할 수 있는 시대를 맞이했지만, 아직 영지주의에 대한 이해는 초기기독교의 편견에 물들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기독교가 로마제국에서 313년에 공인된 이후 지하에서 벗어나 권력을 등에 업기 시작하면서 소위 ‘이단’이 탄생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지하의 기독교 시절에는 영지주의도 기독교였다. 이단이 애초부터 이단이었던 것이 아니라, 주류기독교(로마카톨릭)가 권력화되면서 주류기독교가 아닌 종파들이 이단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2세기의 탁월한 영지주의자였던 발렌티누스가 약간의 표차로 로마 주교직에서 탈락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역사속의 로마제국은 313년에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중에는 국교로 삼았다. 그 이후부터 주류기독교가 이단들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살육이 동반된 이 전쟁은 중세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스티븐 횔러는 이 역사를 추적하면서, 기독교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살아났던 영지주의자들의 고귀한 삶을 소개하고 있다. 특히 카타르 파에 대한 박해는 기독교인들에게 더없이 곤혹스러운 역사이기도 하다.

 

«이것이 영지주의다»는, 천 육백 년 동안 묻혀 있다가 불과 반세기 전에 세상에 드러난 나그함마디 문서를 토대로 영지주의의 역사와 기본 가르침을 소개하는 책이다. 저자 자신이 영지주의의 사제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이 책은 단순한 소개서 수준을 뛰어넘는 훌륭한 통찰들로 가득하다. 나의 경우에는 이 책을 읽고 그동안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이 다소 풀렸다. 가령, 여성적 지혜를 상징하는 “소피아”에서 성모 마리아의 원형을 보았고, 입교의식 및 성례전에서 카톨릭 성례전의 근원을 보았다. 데미우르고스에 관한 서술도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칼 구스타프 융의 심리학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특히 “그노시스(영지)”를 경험한 자는 필연적으로 그 경험을 신화적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으며, 그 경험이 없는 자는 그 신화적 표현들조차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도 재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지”를 경험한 자, 아는 자는 소수이고, 그 경험에 관해 듣기만 하는 자들은 다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지주의는 필연적으로 엘리트주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어쩌면 이것이 영지주의가 탄압을 받았던 정치적 이유였을 지도 모른다. 실제로 영지주의는 언제나 엘리트주의라는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런 이상한 부류의 비난은 인류 역사에서 근절되지 않을 것이다.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을 빌자면, “세상에는 오직 두 종류의 사람, 곧 아는 자와 알지 못하는 자가 있을 뿐”(41)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유일한 아쉬움은, 영지주의의 구체적인 수행법이 소개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아마도 나그함마디 문헌 중에 수행법에 관한 책이 없었나보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소개됨으로써 비로소 영지주의가 제대로 소개되기 시작한 셈이지만, 영지주의의 소개가 더 이상 지속되리라는 보장을 못하겠다. 영지주의는 기독교의 역사에서 철저히 배격되었던 이단인데다가 그 수행법이나 성례전을 담당하는 종교세력이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내에서 영지주의를 연구할 만한 인력은 어느 종교, 어느 대학에서도 배출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워할 것은 없겠다. 어쩌면 이것이 “그노시스(영지)”의 고귀함에 어울리는 방식의 삶일 지도 모르므로.

그노시스의 깊이를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 자신의 그노시스를 드러낸다면 치명적인 과오가 될 것이다. 역사를 통해 수많은 영지주의자들이 가슴 아픈 운명을 맞이한 것은 알지 못하는 자가 아는 자에게 터뜨린 눈먼 분노 때문이었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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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balmas > 마르크스주의 이후 정치의 모험-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 [세계의 문학] 여름호에 실릴 글을 한 편 올립니다. 논문은 아니고,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좀더 정확히

말하면 알튀세르나 푸코, 들뢰즈 또는 하버마스 이후 세대의 철학자들 중에서 국내에 그다지 많이 소개되지

않은 철학자들을 개략적으로 소개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시간이 더 있고 지면의 여유가 좀더 있었다면 한 2-3명의 정치철학자들을 더 보태고 싶은데, 그렇지 못해서

이탈리아와 독일, 프랑스의 철학자 3명을 소개하는 것으로 그쳤습니다.

이 글은 아직 교정을 마친 글이 아니기 때문에, 인용은 불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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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 이후 정치의 모험 - 현대 유럽의 정치철학


 



  20세기 유럽 정치철학의 흐름이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주의 역사였다면, 21세기 벽두의 유럽 정치철학은 역사적인 종언을 고한 마르크스주의 이후에 어떻게 지배에 맞서 저항할 것인가, 어떻게 사회의 변혁을 사고할 것인가라는 화두에 대한 상이한 응답의 시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현대 유럽정치철학은 근본적으로 포스트마르크스주의로 특징지을 수 있는데, 이는 달리 말하면 우리가 살펴볼 3명의 정치철학자들 중 누구도 더 이상 잉여가치의 착취 메커니즘을 정치적 지배의 핵심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또한 누구도 노동자 계급이라는 정치적 주체에 근거를 둔 정치적 변혁과 대안 사회의 구성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는 점을 의미한다. 

 

  그 대신 이들은 모두, 근대 정치 문명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공백으로 남겨두었던 문제들이나 마르크스주의 자신을 포함한 근대 정치 문명 전체에 함축된 모순들을 해명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그것은 파시즘과 홀로코스트는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근대 정치 구조의 본질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결과라는 고발로 제시되거나(조르지오 아감벤), 정치란 평등의 원리에 대한 옹호라는 급진적인 선언으로 표현되기도 하며(자크 랑시에르), 또는 모든 정치 투쟁, 모든 권리에 대한 옹호 투쟁은 인정을 둘러싼 갈등과 다르지 않다는 규범적인 원리의 정초 시도로 나타나기도 한다(악셀 호네트).  

 

  따라서 이들의 이론적 작업은, 마르크스주의 이후에도 여전히 비판적 사회이론이 가능한지, 또 지배자들의 질서에 맞서고 그것을 변혁할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 여부를 평가해보기 위한 좋은 시금석을 제공해준다. 현실의 가장 민감한 지점, 가장 깊고 예민한 상처를 진단하고 그 뿌리를 드러내는 것, 바로 그것이야말로 정치철학이 단지 철학의 한 하위분과에 그치지 않고, 철학과 현실의 마주침, 철학과 현실의 상호침투가 발생하는 자리로서 기능할 수 있는 바탕이라면, 이들의 작업은 오늘날 정치철학이라는 이름에 값하는 매우 드문 성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조르지오 아감벤과 호모 사케르의 묵시록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1941~)은 국내에도 잘 알려진 움베르토 에코나 안토니오 네그리와 더불어 이탈리아가 배출한 현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정치철학자로서 아감벤의 명성은 무엇보다도 󰡔호모 사케르Homo Sacer󰡕(1995)의 놀라운 성공에 힘입고 있다. 이 책에서 그는 서양 형이상학의 역사에 관한 하이데거의 관점과 발터 벤야민의 종말론적인 폭력의 비판을 밑바탕에 두고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한나 아렌트가 제시한 인권 개념에 대한 비판, 푸코의 생명권력론, 칼 슈미트의 주권 개념 등을 비판적으로 전유하여 정치 공동체의 구조와 정치적 주체의 본성에 대한 매우 독창적인 주장을 제시하고 있으며, 이는 서양 근대정치철학의 규범적 기초 전체를 뒤흔드는 결과를 낳았다.

 

  󰡔호모 사케르󰡕의 핵심 테제는 아감벤 자신이 요약하고 있듯이,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1) 원초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배제ban(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이 구분되지 않는 지대로서의 예외상태state of Exception)다.

2) 주권의 근본 활동은, 원초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zoē와 bios의 접합의 임계(臨界)로서 벌거벗은 생명bare life의 생산에 있다.

3) 서구의 근본적인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은 도시가 아니라 강제수용소에 있다.

 

  이 세 가지 테제는 이 책 1, 2, 3부의 내용을 집약적으로 보여준다. 우선 “벌거벗은 생명”이란 벤야민이 「폭력의 비판을 위하여」에서 사용한 “blosses Leben”이라는 개념에서 빌려온 것인데, 아감벤은 이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및 정치학의 논의와 직접 결부시켜 서양 정치철학을 관통하는 근본 개념으로 제시하고 있다. 아감벤이 주목하는 것은 한편으로 “비오스bios”와 “조에zoē” 사이의 아리스토텔레스식 구분법인데, 전자는 인간에 고유한 생명/삶을 가리키고, 후자는 인간, 동물, 신에게 고유한 자연적 생명/삶을 가리킨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러한 구분은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은 오직 인간에게만 존재하며, 따라서 비오스에 놓여 있다는 고대 희랍인들의 사고를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자로서의 존재자on hē on”를 형이상학의 대상으로 설정함으로써 제1 철학으로의 길을 열어 놓았는데, 여기서 “존재자로서의 존재자”는 바로 “순수 존재”, 곧 “온 하플로스on haplōs”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 존재자들에 공통적인 삶/생명zoē을 추출해내려는 노력과 “순수 존재”를 분리하려는 노력, 곧 정치학과 형이상학 사이에는 체계적 연관성이 존재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아감벤은 벌거벗은 생명의 최초의 법적 유래를, 고대 로마법에 나오는 “homo sacer”라는 표현에서 찾는다. 호모 사케르는 “희생물로 삼을 수는 없지만, 그를 죽인다고 해서 살인죄가 되는 것이 아닌” 사람을 말한다. 희생물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은 “sacer”가 종교적 의미에서 “성스러운”을 가리키지 않음을 의미하고(신의 법에서 배제), 그를 죽이는 게 살인죄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호모 사케르가 “정상적인 인간”의 범주에서 제외되어 있으며(인간의 법에서 제외), 그의 삶은 “비오스”가 아니라 “조에”에 해당한다는 것을 뜻한다.

 

  아감벤이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근대에 들어서 비로소 이 “조에”, 호모 사케르가 법적ㆍ정치적으로 보편적인 의미를 획득하게 되었으며,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의 핵심 목표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보여주기 위해 아감벤은 푸코의 생명 권력의 문제설정과 아렌트의 전체주의 비판을 결합하여 󰡔인권선언󰡕(1789)을 새롭게 해석한다.

 

  그에 따르면 󰡔인권선언󰡕이 제 1조에서 “인간은 나면서부터 자유로우며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천명할 때의 “인간”은 인간주의적인 전통이 해석해온 것처럼 천부인권의 담지자가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을 가리킨다. 곧 󰡔인권선언󰡕은 아무런 특질도 지니지 않는 추상적 존재로서의 인간, 벌거벗은 생명체가 정치의 대상이 되었음을 공표한 선언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시민들이 누리는 이러저러한 정치적 권리들은 우선 그들 각자가 인간=벌거벗은 생명체로서 주권자의 통치의 대상으로 포섭된 이후에 얻게 되는 특질들의 표현에 불과하다. 푸코가 말하듯 생명권력이 근대성의 문턱을 이룬다면, 그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다.

 

  아감벤은 아렌트가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수행한 “민족국가의 위기와 인권”의 관계에 대한 분석을 여기에 결부시킨다. 아렌트는 1차 대전 이후에 특히 유럽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국가의 영역 바깥으로 밀려나게 된 상황에 주목하면서, 이러한 민족국가의 위기는 동시에 인권 개념의 한계를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이처럼 국가의 바깥으로 밀려남으로써 이 사람들은 아무런 권리도 누리지 못하고 시시각각 생존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었는데, 이는 인간주의적 전통에서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인권 개념은 특정한 정치공동체에 선행하는 천부적인 권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는 점을 극명하게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간”, “벌거벗은 생명”으로서 인간은 주권적 권력에 포섭됨으로써만 비로소 인간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아감벤에게 󰡔인권선언󰡕은 근대 정치철학의 규범주의적 해석과는 정반대로 주권자의 생명권력에 대한 근본적인 예속의 선언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아감벤은 나치즘이 근대 유럽의 역사, 더 나아가 서양 역사 전체의 흐름과 전혀 무관한 돌연변이적 현상이 아니라, 그 본질적인 잠재력의 표출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주권 개념에 대한 분석과 곧바로 연결되는데, 그는 주권 개념에 대한 해석에서 슈미트의 테제, 곧 “주권자는 법질서 바깥에 서 있지만, 그럼에도 이 질서에 속해 있는데, 왜냐하면 헌정이 전면적으로 중단되어야 하는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라는 테제를 준거로 삼고 있다. 그가 이처럼 슈미트의 테제에 주목하는 것은 이 테제가 나치 독일이 수행한 생명정치의 핵심을 매우 정확히 드러내준다고 보기 때문이다.

 

  아감벤은 우선 나치 강제수용소의 법적 지위의 특이성에 주목하는데, 강제수용소는 나치 시대에 처음 설치된 게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사실은 그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단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에는 강제수용소의 설치 및 운용에 관한 사항, 또는 좀더 일반적으로는 주권자가 국민들의 기본권을 잠정 중단시키고 “예외상태Ausnahmezustand”를 선언할 수 있는 권한에 관한 사항이 헌법에 명시되어 있었던 데 비해, 나치 수용소의 경우는 헌법에 아무런 규정이 없는 가운데 강제수용소를 설치, 운용했다는 점에 차이가 있다.

 

  아감벤에 따르면 이는 법적인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새로운 점이다. 우선 첫째, 이처럼 명시적인 규정 없이 기본권을 정지시키고 예외상태에 돌입함으로써,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하게 된다. 바이마르 헌법이 규정하는 예외상태는 정확히 헌법이라는 정상적인 법적 규범에 따라 자신의 효력을 얻게 되는 반면, 나치 법에서는 법적 규범에 대한 준거가 없이 예외상태가 성립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에 따라 예외상태는 실질적으로 법질서 자체가 되는데, 이 예외상태는 바로 주권자(총통)의 결정에 따라 직접 성립하기 때문에, 이제는 단지 정상과 예외의 구분이 소멸할 뿐만 아니라 법과 사실 사이의 구분도 소멸하게 된다. 하지만 아감벤이 보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나치의 특이성, “예외성”은 사실은 전혀 예외가 아니라 서양 형이상학과 정치학의 성립 이래 존재해온 잠재적 경향의 발현이라는 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는 “조에”와 “하플로스” 사이의 내적 연관성과 고대 로마법에서 homo sacer라는 존재에 주목하고 있는데, 나치가 정상화된 예외상태 속에서 설립한 강제수용소는 이를 가장 온전한 형태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곧 주권자(총통)의 권력은 기본권-인권의 “금지”와 이질적인 존재들의 “추방”의 권력이며, 이를 통해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일체의 정치적 지위와 권리를 박탈당하고 한낱 몸뚱아리로 환원되어, 그를 살해한다고 해서 살인죄가 성립하지 않는 “호모 사케르”가 되는 셈이다.

 

  더 나아가 강제수용소란 벌거벗은 생명이 정치의 대상으로 출현하는 장소들을 모두 포함하기 때문에, 이제 수용소는 나치의 유대인수용소나 소련의 정치범수용소 같은 것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훨씬 보편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개념이 된다. 예컨대 아감벤은 프랑스 공항에 설치되어 있는 난민 신청자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장소 역시 일종의 수용소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공식적인 법적 기관에 넘겨지기 전까지 이 사람들은 “예외상태” 속에서 어떤 법적 지위나 권리도 지니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벌거벗은 생명체”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얼마 전에 참사를 빚은 여수의 외국인보호소 역시 이런 의미에서 아감벤이 말하는 수용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감벤의 작업은 서양 근대 정치철학의 가장 기본적인 규범적 토대인 인권의 원리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자 서양 근대 문명의 가장 깊은 상처 중 하나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혁신적인 재해석이라는 점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하지만 아감벤의 정치철학은 그가 원용하는 철학자들에 대한 해석의 타당성 여부를 둘러싼 논란들은 제쳐둔다 하더라도, 정치적 행위를 위한 규범적 기초의 여지를 지나치게 축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다. 가령 그는 법과 폭력을 구분 불가능한 것으로 제시하고 있고, 나치즘 같은 전체주의와 현대의 서구 자유주의를 본질적으로 등가적인 것으로 간주하며, 나치의 강제수용소와 현대의 난민 보호소 등을 동일시하고 있는데, 그럴 경우 과연 어떠한 정치적 행동이 가능할까, 또 어떤 정치적 목표를 추구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악셀 호네트와 인정 투쟁


  아감벤이 근대성(또는 더 나아가 서양 역사 전체)의 부정적인 경험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면, 독일 비판이론의 제 3세대 대표자로 불리는 악셀 호네트Axel Honneth(1949~)의 “인정투쟁Kamp um Anerkennung” 이론은 반대로 근대성이 이룩한 핵심적인 성과, 곧 계몽주의 이래 서양 사회가 이룩한 합리적ㆍ도덕적 진보에 대한 긍정에 뿌리를 두고 있다.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하버마스가 제안한 이론적 전회, 다시 말해 주체 중심적인 철학에서 상호주관성 철학으로의 전회에서 출발한다. 곧 이들에게 주체는 타인들과의 관계 이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주체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형성되며, 주체가 지닌 언어적ㆍ실천적ㆍ반성적 자율성은 상호주관적 규준들을 내면화함으로써 형성된 산물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호네트는 하버마스의 상호주관성이 지나치게 보편적 화용론에만 의지하고 있으며, 다른 종류의 규범적 토대들을 간과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곧 주체들 사이의 상호주관적 관계는 언어적 소통을 통해서만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정서적 관계 및 구체적인 욕구들을 포함하는 주체들의 정체성의 실현 과정을 포함하고 있는데, 하버마스의 이론에는 이러한 차원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하버마스는 구체적인 사회적 투쟁들 속에 담겨 있는 규범적 쟁점들을 충분히 해명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하버마스 이론의 이러한 난점 내지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지난 1990년대 이래 호네트는 헤겔 철학에서 유래한 인정투쟁 이론을 발전시켜왔으며, 이는 그가 하버마스의 이론적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정치철학자로 부상하는 데 중요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호네트의 출발점은 개인이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하는 데서나 사회가 성립하는 데서 주체들 사이의 상호 인정 관계가 핵심적이라는 데 있다. 곧 한 개인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그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의 가치를 긍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러한 자기 긍정은 이 개인에 대한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형성되고 또 그것을 통해 지속적으로 유지ㆍ발전될 수 있다.

 

  이를 좀더 구체적으로 해명하기 위해 그는 인정의 세 가지 차원을 구별한다. 곧 한편으로는 엄마와 아이나 연인들 간의 사랑과 상호배려에서 표현되는 정서적 차원의 인정의 관계가 있고, 또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다른 성원들을 동등한 법적 주체로서 인정하고 배려하는 법적 인정의 관계가 존재하며, 분업적으로 조직된 사회 단체 내부에서 동료들에 의한 사회적 평판이라는 인정 관계가 존재한다. 이 세 가지 형태의 인정은 각각의 개인들이 하나의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정체성을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다. 그리고 각각의 주체들의 정체성 형성에는 역시 독립된 주체로서의 타인들의 인정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는 또한 상호주관적인 사회화의 조건으로서도 기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정관계의 정치적ㆍ사회적 함의는 어떤 것인가? 호네트가 주목하는 것은 인정의 반대, 곧 무시의 경험이다. 인정이 개인의 정체성 형성 및 사회적 유대관계의 형성에서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면, 역으로 개인이 타인들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그 개인의 정체성 및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따라서 타인으로부터 자신이 기대한 만큼 또는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개인은 그에 대해 저항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무시가 특수한 한 개인에 대해 우발적인 방식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집단에 대해 구조적이고 반복적으로 일어나게 되면, 이는 곧바로 사회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가령 식민지 주민들이 정복자들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나, 소수 인종, 소수 종족들이 한 사회의 지배 인종, 종족들에게 멸시받고 차별받는 것, 또는 우리나라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조선족이나 동남아시아 출신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차별 대우를 받고 무시당하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들이 이러한 멸시와 차별대우, 따돌림 등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할 때 인정투쟁은 정치적 투쟁으로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론은 피지배자들이 지배에 맞서 저항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이며, 왜 그것이 합당한 규범적 근거를 지니고 있는지 해명해줄 수 있으며, 역으로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인지 아닌지를 평가할 수 있는 척도도 제시해줄 수 있다. 각각의 사회 성원들이 억압 없이 자유롭게 자신의 정체성을 실현할 수 있는 사회는 건강하고 정의로운 사회인 반면,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억압하는 사회 또는 특정한 집단의 정체성을 기준으로 다른 집단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강제하는 사회는 병리적이고 부당한 사회로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가령 영미권에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나 낸시 프레이저Nancy Fraser 등이 발전시킨 “인정의 정치학”보다 좀더 규범적이고 도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그의 이론은 1980년대 다문화주의와 정체성의 정치의 맥락에 따라 전개된 인정의 정치학과 달리 적절한 인정을 받으려는 인간의 욕구는 인간의 정체성 형성에 본질적이며, 따라서 이는 초역사적ㆍ초문화적인 규범적 기초라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다.  

  

  호네트의 인정투쟁 이론은 하버마스의 화용론 중심의 상호주관성 모델을 인간학적으로 확장했을 뿐만 아니라, 무시당하고 억압받는 피지배자들의 부정적 경험을 자신의 비판이론의 원천으로 삼으면서 비판이론이 지닌 해방론적 함축을 잘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 하지만 이러한 해방론적 함의에도 불구하고 정작 호네트 자신은 인정투쟁 이론이 지닌 정치철학적 측면들을 발전시키지 않은 채, 인정투쟁 이론의 규범적인 측면을 좀더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호네트의 작업에서는 인정투쟁 이론이 사회구조 또는 사회제도들의 형성과 개조, 변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찾아보기가 어렵다. 따라서 인정투쟁 이론이 비판이론의 진정한 계승자가 되기 위해서는 정치적ㆍ사회적 차원에 대한 논의를 보완ㆍ확장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 호네트는, 스승인 하버마스와 마찬가지로 서양 근대 문명의 가장 어두운 측면, 곧 파시즘과 홀로코스트에 대한 적절한 이론적 해명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얼마간 맹목적이다. 한나 아렌트 이래 또는 비판이론의 대표자 중 한 사람인 아도르노 이래 현대 철학자들 중 상당수가 근대성에 내재한 도착성의 뿌리를 해명하는 것을 자신의 본질적인 과제로 삼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인정투쟁 이론이 정치철학으로서의 이론적 완결성을 갖기 위해서는 이 점은 반드시 보완되어야 할 것이다. 


자크 랑시에르와 평등의 원리로서 정치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철학계에서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ère(1940~)라는 이름은 오랫동안, 스승인 알튀세르에 대한 지적 반역을 감행한 인물로 기억되어 왔다. 1965년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들이 함께 저술한 저 유명한 󰡔“자본”을 읽자Lire le Capital󰡕에 공저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가, 1974년 󰡔알튀세르의 교훈La leçon d'Althusser󰡕이라는 자신의 첫 번째 저서에서 알튀세르의 엘리트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독립선언”을 했던 만큼 이러한 평판은 얼마간 불가피한 것이었다. 하지만 랑시에르는 1980년대부터 󰡔무지한 스승Le maître ignorant󰡕(1987), 󰡔불화La mésentente󰡕(1995) 같은 독창적인 저작들을 발표하면서 알튀세르의 그늘에서 벗어나 곧바로 현대 철학의 핵심 인물로 떠올랐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은 하나의 근본적인 통찰, 곧 정치는 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통찰에 대한 체계적인 탐구라고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랑시에르는 “정치la politique”와 “치안/통치la police”를 구별하면서 출발한다. 치안/통치는 한 사회를 위계적으로 조직하고 통치하는 구조 일체를 가리키며, 따라서 지배자와 피지배자, 지식인 내지 철학자와 대중 사이의 근원적인 불평등을 가정한다. 반면 정치는 모든 사람은 동등하며, 누구나 다 동등한 능력과 자질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 심지어 지적인 능력에서도 모든 사람은 동등하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는 근본적으로 민주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반대로 철학은 한 사회의 구조와 성립 근거를 밝히고 그것을 가장 합리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원리를 해명하는 것, “치안/통치”를 확립하는 것, 곧 위계와 지배를 정당화하는 것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랑시에르는 “정치철학”이란 용어모순이며,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정치와 “치안/통치”,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와 근원적인 불평등의 질서 중에서 우선하는 것은 바로 정치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불평등을 가정하는 “치안/통치”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지배자는 피지배자들에게 지배자로서 인정을 받아야 하는데, 이는 피지배자들이 지배자를 지배자로서 인정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지배자와 근원적으로 동등하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근원적인 불평등을 전제하고 있는 “치안/통치”의 질서는 근원적인 평등의 원리를 자신의 존립의 기초로 삼고 있는 셈이다.

 

  랑시에르는 이러한 역설적인 상황을 “잘못/왜곡tort”이라는 중의적인 개념으로 표현한다. 이것이 (도덕적으로) 잘못인 이유는 “치안/통치”의 질서는 지배-피지배 관계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만, 사실 “치안/통치”는 지배와 피지배의 구별이 근원적으로 근거가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평등의 원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는 또한 “왜곡”되고 “뒤틀린” 것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공동체의 성원들은 모두 동등함에도 불구하고, 또 그러한 동등성 때문에 비로소 “치안/통치”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치안/통치”의 질서는 사회 성원들에게 자원과 권한을 불균등하게 배분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치안/통치”의 질서에 대해 저항하는 것, 이를 전복시키거나 변혁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제 3의 용어, 곧 “정치적인 것le politique”이라는 용어의 의미를 이해해야 한다. 랑시에르는 정치와 “치안/통치”가 조우하는 장소, 곧 “치안/통치”의 잘못과 왜곡이 드러나는 장소를 “정치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것은 기존의 “치안/통치”의 질서에서 배제되어 있는, 이러한 질서 속에서 아무런 몫도 갖지 못한 자들이 자신의 몫을 주장하면서 저항할 때, 자신의 목소리를 드러내면서 “치안/통치”의 균형잡힌 질서를 뒤틀고 균열을 낼 때, 그것의 잘못을 보여줄 때 나타난다. 따라서 “정치적인 것”은 고정된 불변의 장소, 위치를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몫 없는 자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등장할 때마다, “치안/통치”의 도덕적 잘못을 드러내고 이로써 그 존재론적 질서의 왜곡을 보여줄 때마다 형성된다. 아니 그러한 보여줌의 사건 자체가 바로 정치적인 것의 자리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랑시에르에게는 “정치적 주체” 역시 어떤 객관적인 속성에 따라 (예컨대 노동자 계급인지 여부)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아테네의 자유 빈민들(“데모이demoï”)이 민주주의의 실시를 요구하면서 나섰을 때 그들이 곧 정치적 주체였으며, 또 1871년 파리에서 노동자들이 봉기했을 때, 1968년에 학생-노동자들이 “우리 모두는 독일의 유대인들이다”라고 외치며 거리에 나섰을 때, 그들 역시 정치적 주체들이었다. 그에게 정치적 주체란 어떤 존재론적 규정에 따라 정의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기존의 “치안-통치”의 질서에 따라 규정된 존재론적 정체성에서 벗어나 정치적 투쟁이 전개될 때 비로소 정치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랑시에르는 “주체화”를 “탈정체화”, “탈분류화”의 과정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볼 때 그가 현재의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비판적일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랑시에르는 의회주의적인 자유민주주의를 “탈민주주의post-démocratie”라고 부른다. 곧 “치안-통치”의 “잘못/왜곡”을 드러내줄 수 있는 여지가 대부분 사라지고 정치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집단들의 산술적 합의(“선거”)로 환원되는 곳, 전문가들과 정책입안자들이 통치하는 곳이 바로 현재의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그가 자유민주주의(또는 근대성) 일체를 부정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아감벤이나 알랭 바디우와 달리 랑시에르는 자유민주주의 제도가 지닌 긍정적인 함의들을 인정하는데, 이는 이 제도들이 바로 과거 정치적 주체들의 투쟁의 산물이며, 그러한 투쟁을 자기 내부에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제도들 덕분에 이전에 일어났던 정치적 투쟁의 사건, 민주주의의 사건은 언젠가 다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랑시에르에게 민주주의는 어떤 특정한 제도, 어떤 특정한 정치유형과 동일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모든 정치 제도 속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규범적 원리로 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랑시에르의 정치철학이 지닌 강점은 바로 이처럼 혁명적 전통의 유산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민주주의의 규범적 측면을 함께 유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반면에 정치를 사회적 질서와 대립시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정치에 관한 사고를 실재의 객관적 조건에 대한 사회과학적 탐구와 근본적으로 절연시키고 있는 것은 랑시에르의 철학이 지닌 중대한 문제점 중 하나다. 게다가 이는 민주주의적 제도들에 대한 긍정적 평가와도 얼마간 모순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평가는 제도들에 대한 객관적 규정의 가능성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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