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기인 > 물질화: 파리 1848~1870 -1

David Harvey, Paris, Capital of Modernity(2003), 3~7

3. Prologue

4. The Organization of Space Relations

5. Money, Credit, and Finance

6. Rent and the Propertied Interest

7. The State

3. Prologue

1부가 전체 책의 서론격이라면, 이제 2부(Materializations: Paris 1848-1870)는 본격적으로 오스망화(근대화)되었던 시기의 파리를 다루고 있다. 1부가 Representations: Paris 1830-1848이라면 이제는 Materializations 된다는 것. 옮긴이(김병화)는 이를 각각 ‘묘사’와 ‘물질화’로 옮기고 있지만, Representation은 ‘상상’혹은 ‘재현’으로 옮기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싶다. 결국 representation-> materialization 으로 이행한다는 것을 살리려면 상상-> 물질화(실현)의 과정인 셈.

1848-1870은 루이 나폴레옹 3세가 공화국 대통령(1850~52), 황제(1852~71)로 재위했던 시기이며 오스망이 1853-1870년까지 파리의 도시계획을 책임지고 실행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1부에서 살펴본 1830-1848시기는 1830혁명으로 시작되어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기까지의 시기로 이 때 또한 기존의 사회-경제적 불만들이 누적되어 혁명이 일어난 것으로 이 시기에 혁명으로 해결되지 못했던 많은 문제들이 이제 나폴레옹 3세 정권에게 이행되게 된 것이다. 1)

도시를 옥죄고 있는 또 다른 족쇄는 실질적으로는 18세기적 구조 그대로인 제조업, 금융, 상업, 행정, 노동관계들을 지배하는 사회 관행과 사회 하부구조였으며, 이런 활동들을 제약하고 있는 여전히 주로 중세적인 물리적인 하부구조(medieval frame of physical infrastructure: 결국 이 물리적인 infrastructure에 대한 관심이 하비 책을 특징짓는 요소일 것이다. 이 infrastructure을 ‘하부구조’로 번역하는 것도 조금은 미스다. 하부구조라는 용어는 당연히 맑스적 의미에서 읽히게 될 수밖에 없다. 인프라 구조나 사회간접자본(?) 등으로 번역해야 옳지 않았나 싶다. 그것이 더 하비적 맥락에 맞을뿐더러 쓸데없는 오해를 줄일 수 있다.) 역시 족쇄로 작용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7월 왕정 기간 동안 도시의 쇄신에 대한 이야기가 무성하게 나왔고 이따금씩 실제로 시도되기도 했지만 파리는 짓눌려 있는 상태였다. (143)

이러한 infrastructure는 ‘새로운 산업도시에서도 나타나는 점점 더 복잡해지고 효율적으로 되어가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의 조직과 양립할 수 없었다’

자본 축적이 요구하는 새롭고 엄격한 수준을 충족시킬 만큼 효율적으로 파리가 움직이지 못한 정도에 비례하여 1847년에서 1848년 사이의 위기 동안 느껴진 고통은 배가되고 연장되었으며, 회복을 꾀하려해도 온갖 장애물이 널려 있었고, 정계와 문화계가 하는 일이라고는 의심과 혼란과 공포감을 만들어내는 것뿐이어서 문제가 더욱 복잡해졌다. (145)

결국 자본의 근대적 운동 방식(이윤 추구)에 방해되는 도시 구조는 당대의 상황을 읽고 이에 기민하고 정열적으로 대응한 오스망에 의해 변혁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제2제정의 18년간을 하비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그 기간은 지독하게 진지한 국가사회주의 형태, 즉 경찰 권력과 인민주의 기반을 가진 권위주의 국가의 실험이었다. 그런 실험이 대부분 그렇듯이 그것도 전쟁과 불화로 인해 몰락했지만 그 기간은 강력한 노동 규율의 부과와 자본 순환의 기존 규제에서의 해방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정확하게 어떤 새로운 사회적 실천, 어떤 제도적 틀과 구조, 혹은 사회적 투자가 제대로 작동할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그때 제2제정은 자본주의, 즉 그 안에서 다양한 경제적 정치적 이익들이 의식적으로 이런저런 장점이나 해결책을 추구해보지만 자기들의 행동이 의도하지 않았던 결과에 얽매이는 일이 너무 잦은, 까탈스러우면서도 급속히 성장하는 자본주의에 적응하려고 분투하는 단계에 있었다.

황제와 자문관들이 파리를-그 삶과 문화와 경제를-그것을 까마득한 과거에 너무 답답하게 붙들어 매고 있는 규제들로부터 해방시킬 방법을 찾아나선 것은 그러한 맥락에서였다.(147~148)

그리고 이는 다음과 같이 본질적인 문제들을 발생시키고, 이 문제들에 대한 대응을 모색하게 했다. 이것이야 말로, 자발적 ‘근대화’의 고민과 면모들이며, 식민지 조선이 ‘주체적’으로 궁구하지 못했던, 맞닥뜨리지 못했던 문제들이다.

목적과 수단의 문제가 있었고, 개인의 이익과 자본 순환과 관련된 국가의 적절한 역할이 무엇인가, 노동시장과 산업 상업 활동이나 주거와 사회복지의 제공에 국가가 어느 정도로 개입할 것인가 하는 것도 문제였다. 무엇보다 아직도 강력한 상류 부르주아들의 완강한 저항과 부딪히지 않으면서, 또 겉보기에는 안정되게 뿌리박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언제나 한계상황으로 내몰릴 위협 아래 놓여 있는 중간 계급의 불안정성을 더 크게 만들지 않으면서, 노동자들을 노골적인 봉기로 내몰지 않고 파리 경제를 다시 확고하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정치적인 문제가 있었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황제가 처음에는 그처럼 방자하게 대하고 멸시하는 듯이 의표를 찔렀던 계급세력에게 궁극적으로는 포로가 된 사람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148)

결국 일반화를 최종 목적으로 하는 역사학자답게, 하비는 오스망과 황제 또한 ‘계급세력의 포로’, 즉 역사의 주체로서의 ‘계급’과 역사의 동력으로서의 ‘계급’을 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오스망의 파리는 1870년에 끝난 것이 아니라 그 뒤 30년이 지난 뒤에도 그가 규정한 노선에 따라 개발되었음으로 ‘오스망화=파리의 근대화’라는 명제는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하비의 저술이 문학도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아무래도 경제적 심급과 ‘역사-지리적’변모가 의식과 문화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중요시한다는 것이며, 실제로 이에 대한 연구를 실행한다는데 있을 것이다.

제국 치하의 18년은 오스망의 작업이 도시의 물리적 바탕을 절개하고 개조하는 과정에서 파리인들의 의식 속 깊이 각인되었다. (149)

하비가 2부에서 서술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시기 파리의 ‘역사-지리학적 변화’이며 이는 ‘도시 경제, 정치, 사회, 문화의 내적인 작동과 관계들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설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하비는 각기 주제들은 모두 다른 주제들이 없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전제 하에, 이 상호관계를 보여주려 한다. 특히 이 글이 구체적으로 다룰 5~7장인 ‘금융 자본, 부동산 이권, 국가’는

사회적 생산물이 이권과 임대료와 세금으로 분배된다고 하는 이론의 일부로서 함께 연결된다. 분배에 대한 고려가 생산보다 우선시되는 점이 좀 이상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마르크스가 언급했듯이,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는 데 극히 중요한 “원초적 생산-결정 분배”라는 것이 있다.(번역이 약간 이상한데 “an initial production-determining distribution"으로 ”생산을 원초적으로 결정짓는 분배”정도로 이해된다.) 이 경우에는 대체로 새로운 공간관계(내면적, 외면적 모두)는 국가와 금융자본과 토지 이권의 연정聯政에서 창출되었으며, 그들 각각은 도시 변형의 과정에서 시행되어야 하는 과제를 위해 고통스러운 상호적응 과정을 거쳐야 했다는 사실에 따라 위치가 설정된다. 물론 국가는 단순한 분배 도구 이상의 존재이며(비록 세금이 없으면 별 도리가 없지만), 국가 활동의 다른 측면들, 적법성과 권위도 여기서뿐 아니라 뒤의 적절한 지점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154)

4. The Organization of Space Relations

*생시몽주의: 19세기초 프랑스의 철학자 앙리 드 생 시몽은 빈민의 처지를 염두에 둔 '새로운 그리스도교'를 역설했다. 생 시몽파는 화합의 정신이야말로 사회발전의 기초이며, 여기에 종교가 주된 역할을 한다면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개인주의와 적대감정을 점차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들은 자본이 유산계급의 사욕에서 벗어나 사회의 의지대로 처분되기 위해서는 상속권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시몽파는 이러한 조처가 빈민들에 대한 착취를 효과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empas 백과사전)

철도의 확충과 도로망의 신설 등의 공간관계 변화에 따라 자본의 순환 시간이 짧아지고, 생산과 분배, 두 분야 모두에서 대기업 경영의 가능성이 열렸다. 오스망은 도시 구역 내에서 상품과 인간의 유통 능력을 개선시켰다. 이러한 오스망의 개혁은 능동적이라기보다는 자본의 ‘요구’에 따르는 수동적인 개혁이었다.

오스망은 토지와 부동산 시장의 운영과 산업의 입지와 노동과정과 시장과 분배시스템과 인구 분산과 가정 형성 등의 온갖 변동 양상을 주도했다기보다는 그에 적응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므로 파리의 내부 공간의 개조는 이미 가동되고 있던 과정에 대한 반응이라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바로 그 과정-산업과 상업 발전, 주거에 대한 투자와 주거 공간의 분리 등-이 뭉쳐지고 그들 자신의 궤적을 따라 활동할 수 있게 해주며 도시 진화의 새로운 역사지리학을 규정해주는 공간적 틀이 되기도 했다. (.....) 제국이 살아남으려면 자본과 노동력의 과잉은 기필코 흡수되어야 했다. 파리의 내부 공간을 그처럼 변형시킨 공공사업을 통해 그러한 과잉을 흡수하다보면 건조 환경의 특별한 공간 배치의 건설을 통해 자본이 자유롭게 순환하게 된다. 봉건적 족쇄에서 풀려난 자본은 파리의 내부 공간을 그 자신의 고유한 원칙에 따라 개조했다. 오스망은 파리를 서구 문명까지는 아닐지라도 프랑스에 걸맞은 근대적 수도로 만들고 싶어 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자본의 순환이 진정한 제국주의적 권력이 되어버린 도시를 만드는 것을 도왔을 뿐이다.(167-168)

오스망은 도시공간을 하나의 전체로서 파악하고 다루었으며, 그 안에서 도시의 상이한 구역과 상이한 기능들은 상관관계를 맺고 활동하는 전체를 형성하였다. 이는 자본이 도시를 그렇게 파악한 것과 관계 깊을 것이다.

공간관계의 재형성과 그로 인해 발생한 공간적 규모의 변형은 도시화 과정에서 수동적 계기가 아니라 능동적 계기로 작용했다. 교통과 운송을 통한 공간의 실제 조직은 모든 역사적 지리적 분석이 반드시 파악해야 하는 1차적인 물질적 사실이다. 파리 안팎에서 이루어진 제2제정의 공간관계의 혁명은 연원이야 그 이전 단계에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1852년 이후에 이루어진 변화의 속도, 공간적 규모, 지리적 확장은 그 이전의 전반적 수준과 차원이 다르다. (172)

5. Money, Credit, and Finance

1851년의 당면 과제는 자본과 노동력의 과잉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 정부는 생시몽주의 노선을 채택하고, 직접적인 정부 개입과 신용 창조와 금유에 관한 구조 재정을 혼합함으로써 과잉 자본과 과잉 노동을 경제 부흥을 위한 기반인 새로운 물리적 infrastructure로 전환하려고 했다. (175)

그리고 이를 보조할 수 있었던 것 페레르 형제들이 ‘소액 저축을 동원하여 장기적 프로젝트를 감당하도록 신용기관들을 치밀한 위계적 형태로 조직하여 저축을 민간 차원으로 확산하는 길’이었던 것이다. 금융-정부의 연합. 저축 즉 투자 붐의 근대적 시작.

계획의 실행을 위하 투기적 자본을 끌어 모으지 않는다면 근대성이 있을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 열쇠는 소규모 실개천 같은 자본을 한데 모아 필요한 규모의 기획에 착수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흐름으로 만드는 방법을 찾는 데 있다. 페레르 형제가 하려고 했고, 금융 분야에서 제도적 변화를 통해 달성하려 했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182)

실제로, 금융이 조금이라도 재편되지 않았다면 애당초 그처럼 빠른 속도로 변형이 진행될 수 없었다. 단지 도시가 돈을 빌려야 했다는 것(뒤에서 다룰 주제)뿐 아니라 오스망의 기획 자체가 그가 열어젖힐 공간을 개발하고 건설하고 소유하고 관리할 재정적 힘을 가진 회사의 존재에 기대었던 것이다. (178)

정부가 세금만으로, 공무원만으로는 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었다. 자본은 정부와 동시에 소시민들의 저축-투자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저축-투자를 하지 않으면 뒤떨어진다는 -손해를 본다는- 생각. 남들이 진보할 때 내가 서 있다면 나는 뒤떨어지는 것.

돈, 재정, 투기는 파리의 부르주아들에게 너무나 큰 강박관념이 되었으므로(“사업이란 다른 사람의 돈이다”라고 아들 알렉상드르 뒤마가 농담했다) 증권거래소는 지주들의 재산을 수없이 집어삼킨 무모한 투기와 타락의 중심이 되었다.(181) (ps. 채만식, 󰡔탁류󰡕에서 미두)

이러한 신용 시스템의 재편은 파리의 산업과 상업, 노동 과정과 소비 양식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어쨌든 모든 사람이 신용 거래에 의존했으니까. 유일한 질문은 누가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조건으로 빌려주느냐 하는 점이었다. 계절 실업으로 인해 시달리는 노동자들은 거기에 생계를 의존했다. 소규모 장인과 점포주는 계절에 따라 달라지는 주문을 처리하려면 신용 거래를 해야 했다. 이 같은 연쇄는 끝없이 이어진다. 채무상태는 모든 계급과 모든 활동 영역이 당하는 만성적인 문제였다. (183)

신용 시스템은 자본의 연합을 통해 합리화되고 확장되고 민주화되었지만 대개 무절제한 투기와 중앙집중화되고 위계적으로 조직된 시스템 속으로 모든 저축을 흡수해들이는 대가를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시스템 속에서 바닥에 있는 사람들은 화폐권력을 조금이라도 지닌 사람들의 제멋대로이고 변덕스러운 일시적 기분에 더욱 피해를 입기 쉬운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공간관계에서 혁명이 일어나려면 신용 시스템에서 혁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파리 내에서 그 과정은 금융자본과 토지자신의 훨씬 더 긴밀한 통합에 의존하여 진행되었다. (184)

6. Rent and the Propertied Interest

임대료와 부동산 이권이 점차 자본주의적 방식으로 작동하기 시작하여 파리의 공간들이 분절되어 각기 용도에 맞는(높은 임대료를 부과할 수 있는 순으로) 구역들로 나뉘기 시작했다. 이제 파리의 부동산은 재정적 자산으로, 투자의 대상으로 인식-변모 되었다.

파리의 부동산은 점점 더 순수한 재정적 자산으로, 자본의 일반적인 유통과정에 통합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를 전적으로 지배하는 의제자본 형태로 평가되었다.(185)

중하류층가 소부르주아들은 부동산 소유권에서 계속 배제되었고, 그들의 자리는 지주와 대상인들로 이루어지는 상류층 부르주아가 차지했다. 그러한 변화는 수공업과 소생산자와 점포주가 대상인과 금융에 종속되는, 상업, 금융, 제조업 구조의 중대한 변화와 일치한다. 모든 사회 집단들이 점점 더 투기를 위해 부동산 매매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했다는 증거도 있다.

소유권은 분산되기 시작하여 계속 그러한 상태가 유지되었다. 도마르의 집계에 따르면 1846년에 평균적 소유자는 부동산 두 건만을 관리했고, 이들 가운데 개별적으로 대규모의 부동산도 일부 있을 수 있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다. (188)

파리의 부동산은 주식 시장의 전형적 특징인 불안정성으로부터 보호되는, 안정적이고 수익이 높은 투자처였다. (193)

이러한 인식변모의 와중에는 오스망이 파리라는 도시를 전체로 보고 이를 구역별로 운용하려는 그의 인식과 정책이 있다.

파리를 변형시키려면 자본을 동원해야 하는데, 그것은 매매뿐 아니라 전통적인 부동산 소유자들의 사생활 우선주의와는 상극이며, 집단적 원칙에 따르는 도시공간의 장기적 경영과 철거와 재편에도 투자할 자본이었다. (194)

오스망이든, 상류 부르주아든, 일반적 소시민이든 부동산에 대한 투자는 ‘자본의 순환이라는 기반’에 한데 묶여 있었다.

토지와 건물 자산의 임대료와 가격은 갈수록 현저하게 자본주의적 논리에 기대는 용도에 맞춰 토지를 할당하는 작용을 한다(201)

새로 도로시스템은 공간관계를 체계화하여 토지가격과 용도가 보다 체계적으로 조직된 시스템으로 넘겨주었다.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하는 용도는 점차 밀려났고, 감당할 수 있는 용도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202)

좀더 순수한 자본주의적 노선에 따르는 토지와 부동산 시장이 새로운 신용 시스템의 성장에 고무되어 재편성된 현상(좌안에서처럼 전통주의자의 저항 중심도 물론 있지만)은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즉 파리 내부 공간의 재편성이 공간을 장악하려는 여러 다른 사용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가격 경쟁에 점점 더 예속되어버리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 파리의 재건설을 통해 노동과 자본의 잉여를 흡수하는 일은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명백하게 병적이라고 여겼던 온갖 부정적인 결과들-퇴거당하거나 격리되는 일이 늘어나고, 일하러 더 먼 길을 가야 하며, 치솟는 집세와 인구과밀의 환경-을 가져왔다. (205)

이에 대해 이를 오스망-국가의 힘에 의한 일방적 결과인지는 다음 장에서 살펴볼 것이다.

(물론 ‘자본’의 운동과정에 따른 결과라고 제출될 것이다.)

7. The State

하비는 당시 프랑스 제국을 ‘국가 기관들이 근대의 요구와 자본주의의 모순점과 보다 밀접하게 조화하는 데 기여한, 프랑스 정부와 정치에서 중요한 변천 단계’로 보고 ‘이 정치적 변천 과정이 파리에서 어떻게 일어났으며, 그 도시의 역사적 지형에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오스망과 그의 파리는 자본의 ‘과잉 축적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적자재정을 통해 자체 재정을 충당하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했던 한 국가 기구가 결국은 이권을 장악하는 화폐 자본의 순환에 내포된 아슬아슬한 모순의 제물이 되고 만다’. 그 ‘정치 시스템이 이 분야에서 성장하는 자본주의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결국 과잉축적을 해결하는 대외적 방법이 제국주의와 식민지 건설이라면, 내부적으로는 적자재정을 통한 건설경기 활성화일 것이다. 그리고 이 둘 모두가 원활하게 작동할 때, 제국주의시기 근대화는 가능할 것이다. 이는 안으로는 노동자들의 계급적 착취로 인한 자본의 증가와 밖으로는 식민지의 착취로 벌어지는 데, 둘 다 피지배계급의 저항에 맞닥뜨리게 된다. 식민지는 ‘준인간’이었기 때문에 무자비하게 죽이면 됬지만, 어느정도 ‘민주주의’의 역사가 있는 프랑스-파리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은 탄압하는 주체인 병사들 또한 설득되기 힘든 문제여서 결국 파리 꼬뮌으로 나아가고 만다.

이 시기 오스망의 강압적인 감시와 통제, 일방적 선전과 축제와 빵은 노동자들의 불만을 억누르거나 달래지 못했다. (전두환 정권 시절의 무자비한 노동운동 탄압과 함께 3S정책의 투박함을 떠올리게 한다.)

오스망과 자본의 연합으로 실행된 ‘사회적 재생산 공간의 형성’을 통해 소득계층에 따라 ‘주거가 점점 더 격리되는 현상은 위험하고 범죄적인 계급이 가하는, 실제이건 상상에 의한 것이건 위험으로부터 부르주아를 보호할 뿐 아니라 점점 더 도시를 상이한 사회계급들의 재생산을 위해 상대적으로 안전한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결국 오스망과 제국은 실각하고 만다. 파리 꼬뮌의 탄생이 그것이고, 이는 계급적 혁명을 의미한다.

도시 내에서 안정적인 계급 연대를 유지하기가 특히 어렵게 된 더 깊은 불만의 원천이 있었다. 변형 자체로 인해 “오래된 파리”가 사라지는 데 대한 광범위한 향수와 회환(귀족이나 노동자나 모두에게서)이 생겨났고, 이는 가이야르가 대단하게 평가하는 공동체의 상실감을 널리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 낡은 방식과 구조가 뒤집어진 것이다. (.....) 오스망은 파리를 통상적인 의미의 공동체로 보고자 하는 입장에 확고부동하게 반대하고 그것을 “유목민적”인 이익과 개인들이 왕래하여 일체의 고정적이거나 영속적인 의미의 공동체 형성이 애당초 배제되는 방식으로 움직이는 자본주의적 도시로 다루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파리를 국가가, 국가를 위해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었으며, 이 목적을 위해 그는 선출된 관리보다 임명된 지사의 손에 모든 행정 권력을 쥐어주는 1855년의 정부조직법안을 발의하고 옹호했다. 파리 공동체를 이행기에 있는 것으로 본 점에서는 오스망이 옳았을지도 모르지만, 수도에서 대중 주권을 부정한 것은 수많은 노동자와 부르주아를 코뮌 지지로 끌어들인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다. 이 관점에서 볼 때, 오스망이 영구적인 계급 연대를 유지하는 데 실패한 것은 그가 한 일보다는 그 일을 한 방식과 더 많은 관련이 있다. 또 그렇다면 권위주의적인 그의 행정 스타일은 애당초 쿠데타를 발생시킨 상황과 완전히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가 자유주의 제국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오래 살아남을 수 없었다는 주장은 타당하다. (223-224)

결국 자본의 작동방식과 역사발전 과정에 부합하지 못했던 이전 프랑스가 쿠데타를 통해서 무너지고 다시 집권하게 된 나폴레옹 3세와 오스망이 근대적 기획에 따라 정부주도의 적자재정 경제정책을 폈지만 이 또한 내부적 한계로 무너지게 되었다. 여기서 더 살펴보아야 할 것은 당연히 오스망 직전과 직후의 프랑스 상황일 것이다.

1) 나폴레옹 3세가 집권하기까지의 시기에 대한 연구는 하비가 추천하는 마르크스 <1848년에서 1850년까지의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참조 할 것. 전자는 󰡔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 선집 2󰡕, 박종철출판사, 1992, 1~114면. 후자는 277~393면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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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퍼온글] 맑스 읽기Ⅲ : 맑스의 작품들

맑스 읽기 Ⅲ : 맑스의 작품들


 

  칼 맑스(Karl Marx)는 1818년에 독일 남부 트리어에서 태어나 1883년 영국 런던에서 죽었다. 그와 평생의 동무 엥겔스는 책을 쓰고 급진적인 신문과 잡지를 만들었으며 쉴 새 없이 기고했다. 맑스의 주장들은 그가 살아 있을 때 출판된 것이든 노트로 남아 있다가 훗날 세상에 공개된 것이든 20세기 사상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맑스·엥겔스 저작들의 출판 상황


  20세기에 흔히 MEW로 지칭되는 『맑스·엥겔스 저작집』(Marx/Engels. Werke)이 출판됐는데 총 39책 41권과 2권의 보충판으로 구성됐다. 이 저작집에는 1835년부터 1895년 사이에 작성된 맑스와 엥겔스의 책, 글, 노트와 편지들이 실려 있다. 또한 MEGA로 불리는 『맑스·엥겔스 전집』(Marx/Engels. Gesamtausgabe)의 출간이 진행 중인데 편집위는 그 완간 시기를 대략 2030년으로 잡고 있다. 전체가 몇 백 권이 될 지 확실치 않으며 재정상의 문제로 발간이 지속될 것인지도 의문이다. MEW를 전집, MAGA를 총집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편 한국에서는 수많은 출판사에서 맑스와 엥겔스의 책들을 번역하여 펴냈다. 어떤 저작이 어느 출판사에서 나왔는지를 정리하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체계가 없고 중복되고 난잡한 실정이다. MEW 가운데 『자본』이 이론과실천에서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이 백의에서 나왔고 박종철출판사에서 6권의 『맑스·엥겔스 저작선집』을 냈다. MEW나 MAGA의 한국어판 번역이 기획, 실행되지 않는 한 번역의 일관성도 주요 저작의 빠짐없는 출간도 희망하기 어렵다. <공산당 선언> 등의 인기 있는 상품만 계속 나오고 『독일 이데올로기』 같은 훌륭한 작품의 완역본은 출간 된 적이 없다.


  맑스의 주요 작품들


  1835년 17세의 맑스는 <직업 선택을 앞둔 한 젊은이의 성찰>이란 글에서 “우리는 자신이 신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고 믿는 지위를 마음먹은 대로 차지 할 수 없다. 우리가 미처 그것을 알아차리기도 전에 사회적 관계가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그는 법률가가 되기 위해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고 나중에 철학 교수가 되고자 했으나 결국 급진적인 저널리스트로 일하게 됐다. 곳곳에서 추방당했고 망명 생활을 했으며 그런 가운데 국제적인 공산주의 운동가, 이론가, 지도자가 되었다.


  맑스의 대표작은 ‘정치경제학 비판’ 『자본』이고 가장 널리 읽힌 글은 <공산주의 선언>이다. 이 글에서는 맑스의 글, 노트, 책 가운데 17개의 주요 작품들을 선정하여 집필 시기 순으로 소개하고 그 내용 일부를 음미할 것이다. 각 인용 문장은 참고한 책의 번역문을 그대로 가져왔다. 몇 개의 이름과 지명 등은 통일시켰다. 그 인용문들이 맑스 저작을 즐겨 읽어온 사람들에겐 익숙한 문구들이겠지만, 낯선 사람들에게 맑스의 작품은 이러이러한 게 있고 각 작품에서 이런 말들을 했다고 안내하는 게 이 글의 목적이다.


1. 맑스의 박사학위논문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

『Über die Differenz der demokritischen und epikureischen Naturphilosophie』(1841)

: 1841년 맑스는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철학논문을 제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그 동안 서양철학사에서 철저히 이단시 되고 온갖 비난을 받아오던 에피쿠로스를 새롭게 조명한다. ‘원자와 천체’를 아우르며 원자에 대한 세부적 차이가 천체라는 세계관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을 논증하는데 그의 이러한 통찰은 훗날 ‘상품과 자본주의’를 다루는 『자본』의 분석방법에서도 재현된다.


  …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학 사이의 하나의 본질적인 차이, 가장 미세한 곳까지 관통하는 그 차이가 증명될 수 있다면 그것은 매우 값진 일이 될 것이다. 작은 것 안에서 증명될 수 있는 것은 더 큰 차원의 관계들이 포착되는 곳에서는 더욱 쉽게 보여질 수 있지만, 반대로 아주 일반적인 고찰로부터 [시작할 때는] 그 결과를 개개의 것들에서 확증할 수 있을지 불투명한 것이다.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나 공허한 가정들이 아니라, 우리가 혼동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2. ‘헤겔 법철학’ 비판

<헤겔 법철학의 비판을 위하여. 서설>

(1843)

: 이 글에서 맑스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역사적 의미와 혁명적 역할을 처음으로 논한다. 독일의 상황을 독일 특유의 사변적 화법으로 비판한 셈이다. 맑스는 청년헤겔학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상가였다.


  종교적 비참은 현실적 비참의 표현이자 현실적 비참에 대한 항의이다. 종교는 곤궁한 피조물의 한숨이며, 무정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 없는 상태의 정신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철학이 프롤레타리아트 속에서 그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듯이, 프롤레타리아트는 철학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무기를 발견한다.

  모든 내적 조건들이 충족된다면, 독일 부활의 날은 갈리아의 수탉의 울음 소리에 의해 고지될 것이다.


* 이 글의 비판 대상인 헤겔은 1820년에 출간한 『법철학』의 <서문> 마지막 부분에서 “철학이 회색에 회색을 칠한다면, 생의 한 형태는 노후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회색에 회색으로써는 생이 갱신될 수 없고, 다만 인식될 뿐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어둑어둑한 황혼에야 비로소 날개를 편다”라고 했다. 맑스가 이 <서설> 마지막 문장에서 ‘프랑스의 프롤레타리아트’를 ‘갈리아의 수탉’으로 비유한 것은 ‘미네르바의 올빼미’에 대응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더군다나 올빼미의 ‘황혼’과 달리 수탉은 ‘새벽’에 운다.


3. <1844년의 경제학 철학 초고(수고)>/<파리 수고>

<Ökonomisch―philosophische Manuskripte aus dem Jahre 1844>

: 1932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이 노트들은 파리에서 작성되었다고 해서 ‘파리 수고’라고도 불린다. 이 노트에서 맑스는 처음으로 정치경제학 범주들을 연구하며 ‘소외된 노동’이라는 주제를 논했다. 맑스의 머리와 손을 통해 ‘고전 경제학’과 ‘헤겔 철학’이 동시에 비판된다. 이때의 문제의식들은 평생에 걸쳐 다듬어진다. 


  국민경제학은 노동자와 생산 사이의 직접적 관계를 고찰하지 않음으로써 노동의 본질 내부의 소외를 은폐한다.

  화폐는 만물의 현실적 정신이다. … 화폐는 눈에 보이는 신이며, 모든 인간적 자연적 속성의 그 반대의 것으로의 전환이요, 사물의 보편적 혼동과 전도이다. … 화폐는 인류의 외화된 능력이다.


4. 『신성 가족』/『신성 가족, 혹은 비판적 비판에 대한 비판. 브루노 바우어와 그 일파에 반대하여』

『Die heilige Familie』(1845)

: 엥겔스와의 최초의 공동 저작인데 당시 더 유명했던 엥겔스의 이름이 앞에 나온다. 엘리트들이 아니라 민중이 역사의 창조자라는 것을 주장했고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를 표명했다.


  국민 경제학의 모든 설명 전개는 사적 소유를 전제로 삼고 있다.

  이념은 결코 낡은 세계 상태를 넘어설 수 없으며, 항상 단지 그 낡은 세계 상태의 이념들을 넘어설 수 있을 뿐이다. 이념들은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실현할 수 없다. 이념의 실현을 위해서는 실천적인 힘을 모으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5.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들>

(1845)

: 맑스가 기록한 11개의 테제들로 엥겔스가 발견해 1888년에 처음으로 공개됐다. 엥겔스는 “새로운 세계관의 천재적인 맹아를 간직하고 있는 최초의 기록”이라고 평했다.


  6) 포이어바흐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용해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ensemble이다.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6. 『독일 이데올로기』/『독일 이데올로기. 포이어바흐, 브루노 바우어, 슈티르너로 대표되는 최근의 독일 철학과 그 다양한 예언자들의 독일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

『Die deutsche Ideoloie』(1846)

: 1932년에야 세상에 알려진 이 걸작은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견해로 유명하고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 대한 언급도 보인다. 이때 이데올로기의 뜻은 허위의식이다. 독일에서 헛소리하는 이들에 대해 비판한다는 뜻이다.


  아무도 하나의 배타적인 활동의 영역을 갖지 않으며 모든 사람이 그가 원하는 분야에서 자신을 도야할 수 있는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사회가 전반적 생산을 규제하게 되고, 바로 이를 통하여, 내가 하고 싶은 그대로 오늘은 이 일 내일은 저 일을 하는 것, 아침에는 사냥하고 오후에는 낚시하고 저녁에는 소를 치며 저녁 식사 후에는 비판하면서도 사냥꾼으로도 어부로도 목동으로도 비판가로도 되지 않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공산주의란 조성되어야할 하나의 상태, 현실이 이에 의거하여 배열되는 하나의 이상이 아니다. 우리는 현재의 상태를 지양해 나가는 현실적 운동을 공산주의라고 부른다. 이 운동의 조건들은 현재 존재하고 있는 전제로부터 생겨난다. 


7. 『철학의 빈곤』/『철학의 빈곤. 프루동 씨의 「빈곤의 철학」에 대한 응답』

『Das Elend der Philosophie』(1847)

: 프랑스의 소시민적 사회주의자 Proudhon이 1846년에 출판한 『빈곤의 철학』을 공격하기 위해 작성했다. 맑스는 이 책의 내용으로 독일노동자협회에서 강연했다.


  영국인이 인간들을 모자들로 바꾸어 놓는다면, 독일인은 그 모자들을 이념들로 바꾸어 놓는다. 그 영국인은 부유한 은행가이자 탁월한 경제학자인 리카도이며, 그 독일인은 베를린 대학의 단순한 철학 교수인 헤겔이다.

 

8. <공산주의당 선언>/<공산당 선언/공산주의 선언>

(1848)

: 공산주의자 동맹의 강령으로 작성한 선언문으로 당시에는 작성자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 마지막에 쓰인 구호는 이후 맑스와 엥겔스가 주도하는 모든 국제 노동자 운동에서 변함없는 슬로건으로 사용된다.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다. / 현대의 국가 권력은 부르주아 계급 전체의 공동 업무를 관장하는 위원회일 뿐이다. / 부르주아의 결혼이 사실상 아내 공유제이다. /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 / 한 시대의 지배적 이념은 항상 지배 계급의 이념이었을 뿐이다. / 계급과 계급 대립이 있었던 낡은 부르주아 사회의 자리에 각자의 자유로운 발전이 모두의 자유로운 발전의 조건이 되는 연합체가 들어선다. / 만국의 프롤레타리아트여, 단결하라!


9. <임금노동과 자본>

(1849 → 1891년 엥겔스가 수정)

: 1947년 브뤼셀에서 강연 했던 내용을 기초로 작성한 것이다. 엥겔스가 훗날 맑스의 연구성과를 반영해 일부 표현을 수정했다. 가령 ‘노동’을 ‘노동력’으로 고쳤다.


  흑인은 흑인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 그는 비로소 노예가 된다. 면방적기는 면방적을 하는 기계이다. 일정한 관계들 속에서만 그것은 자본이 된다.

  자본 또한 하나의 사회적 생산 관계이다. 그것은 부르주아적 생산 관계, 즉 부르주아 사회의 생산 관계이다.


10. <1848년부터 1850년까지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

(1850)

: 파리에서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 입헌군주제 대신 공화정이 선포됐다. 맑스는 <신라인신문 정치경제 평론>에 이 혁명의 의미와 사태의 진전에 대해 연재했다. 원래 1849년까지만 다루었는데 1850년 ‘보통선거권 폐지’ 후에 비판한 글까지 하나로 묶었다. 국가, 혁명,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대한 견해를 밝혔고 화려한 문필력과 박학다식함으로 반동들을 규탄했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패배는 비로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자신의 처지를 아주 조금 개선하는 것조차 부르주아 공화국 내부에서는 하나의 공상이며, 이 공상은 자신을 실현하려 하자마자 범죄가 되고 만다는 진리를 깨우쳐 주었다.

  착취자는 동일하다 : 자본. 개별 자본가들은 저당권과 고리 대금업을 통해 개별 농민들을 착취하고, 자본가 계급은 국가 조세를 통해 농민 계급을 착취한다.

  혁명은 역사의 기관차이다.

  헌법은 포위한 자들을 보호할 뿐 포위된 자들을 보호하지 않는 요새이다!


11. <루이 보나빠르뜨의 브뤼메르 18일>

(1852)

: 대통령이던 루이 보나빠르뜨가 1851년 12월에 쿠데타를 일으켰다. 맑스는 즉시 분석에 들어갔다. 동시대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해 맑스는 프랑스에서의 ‘계급 투쟁’이 그런 정세와 상황을 발생시킨다는 관점으로 서술한다.


  로마의 프롤레타리아트는 사회의 비용으로 살아갔던 반면, 현대 사회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비용으로 살아간다.(1869년 제2판 서문)

  인간은 자기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자기 마음대로, 즉 자신이 선택한 상황하에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주어진, 물려받은 상황하에서 만든다.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은 마치 꿈속의 악마처럼, 살아 있는 세대들의 머리를 짓누른다.


12.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Grundrisse de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1857~8)

: 맑스는 이 수고에 제목을 붙이지 않았다. ‘정치경제학 비판’이라고 메모했는데 그 시절에 쓰던 모든 글은 다 그 주제로 분류된다.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노아의 방주 이전에 적어도 개요나마 명확히 하기 위해서 나의 경제학 연구를 요약하는 데 밤새 작업하고 있네”라고 했다. 여기에서 이 노트의 전체 제목을 따왔다. 이 노트들이 최초로 출간된 것은 1939년이었다. 이 작품에서 맑스는 처음으로 ‘잉여 가치’, ‘잉여 노동’, ‘불변/가변 자본’ 등의 범주를 사용했다.


  인간의 해부는 원숭이의 해부를 위한 열쇠를 쥐고 있다. 이에 반해 하급 동물류에서 보이는 보다 고차원적인 것들에 대한 암시는 고차원적인 것 자체가 이미 알려져 있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 경제는 고대 경제 등에 대한 열쇠를 제공해 준다.(서설)

  자본은 필연적으로 자본가이다. 그리고 자본은 필요하지만 자본가는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몇몇 사회주의자들의 견해는 전적으로 오류이다.

  프루동은 가치 법칙에 따라 가치가 노동과 교환되는 것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점, 즉 이자를 지양하기 위해서는 자본 자체를, 교환 가치에 기초한 생산 양식을, 그러므로 임노동도 지양해야 한다는 점을 이해하지 못한다.


13.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Zur Kritik der Politischen Ökonomie』(1859)

: ‘요강’을 작성하고 『자본』을 출판하기 전에 맑스는 이 글을 통해 정치경제학 비판의 주제들과 자신의 연구 경로 등을 밝힌다. <서문>에서 ‘상부구조와 토대’라는 비유를 사용하며 유물론적 역사 파악의 핵심을 간결하고 힘차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 책에서 처음으로 화폐 학설을 포함해 가치 이론을 체계적으로 서술한다.


  생산 관계들의 총체가 사회의 경제적 구조, 즉 그 위에 법률적 및 정치적 상부 구조가 서며 일정한 사회적 의식 형태들이 그에 조응하는 그러한 실재적 토대를 이룬다. 물질적 생활의 생산 방식이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생활 과정 일반을 조건 짓는다. 인간들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그들의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규정한다.


14. 『임금, 가격, 이윤』

『Wages, Price and Profit』(1865 → 1898)

: 1865년에 맑스가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 영어로 강연할 때의 원고다. 1898년에 그의 막내딸 엘레노어가 서문을 달아 출판했다. 이 짧은 원고에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정치경제학의 비판을 위하여』,  2년 후에 출판될 『자본』의 연구성과와 결론들이 모두 압축되어 있으며 이해하기 쉽다.


  …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이나, 물이 극히 연소되기 쉬운 두 가지의 가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역설이다. 우리를 현혹시키기 쉬운 사물의 외양만을 포착하는 일상적인 경험으로 판단할 경우, 과학적 진리는 언제나 역설이다.

  “공정한 노동에 공정한 임금을!”이라는 보수적 표어 대신에 그들(노동자들)은 “임금제도 철폐!”라는 혁명적 구호를 자신들의 기치에 써넣어야 한다.


15. 『자본』/『자본. 정치경제학 비판』

『Das Kapital』/『Das Kapital. Kritik der politischen Oekonomie』(1867)

: 맑스는 20여 년 동안 ‘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해 1,500여권의 책과 자료를 읽었고 노트로 옮겼으며 그 가운데 800여 권을 이 저작에 인용, 언급했다. 맑스는 『자본』을 가리켜 “부르주아지(지주를 포함하여)의 머리로 날아갈 가장 효과적인 미사일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고전 정치경제학을 지적으로 파괴하는 프로젝트’였는데 맑스는 이 책이 “예술적 총체를 이루고 있다”고 자부했다. 맑스는 1권만 출판했고 2권(1885년), 3권(1894년)은 엥겔스가 출판했다.


  현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발견하는 것이 이 책의 최종 목적이다.

  자본가는 오직 인격화된 자본에 지나지 않는다. … 자본은 죽은 노동인데, 이 죽은 노동은 흡혈귀처럼 오직 살아 있는 노동을 흡수함으로써만 활기를 띠며, 그리고 그것을 많이 흡수하면 할수록 점점 더 활기를 띠는 것이다.

  동등한 권리와 권리가 서로 맞서 있을 때는 힘이 문제를 해결한다. 그리하여 자본주의적 생산의 역사에서 노동일의 표준화는 노동일의 한계를 둘러싼 투쟁, 다시 말하면 총자본[즉 자본가계급]과 총노동[즉 노동자계급] 사이의 투쟁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노동자는 여기에서는 노동시간의 인격화에 불과하다.

 

16. <프랑스에서의 내전>/<프랑스 내전.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담화문>

(1871)

: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요청에 따라 맑스가 작성한 글로서 협회 회원들에게 보내는 담화문(격문) 형태로 발표되었다. 처음에 영어로 작성됐고 1871년 5월 30일 만장일치로 채택되어 13일 출간됐다. 


  꼬뮌에게 내려진 해석의 다양함과 꼬뮌에 표현된 이해관계의 다양함은 이전의 모든 정부 형태가 분명하게 억압적이었음에 반해 꼬뮌은 철저하게 확장적인(expansive) 정치 형태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꼬뮌의 진정한 비밀은 이것이었다. 꼬뮌은 본질적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부였으며, 전유 계급에 대한 생산 계급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완성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17. <독일 노동자 정당 강령에 대한 평주>/<고타 강령 비판>

(1875 → 1891년 발표)

: 1875년 5월 독일의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당과 전독일 노동자 협회가 고타에서 통합 당대회를 가졌다. 그때 준비된 강령의 퇴보에 대해 맑스가 매우 격렬하게 비판한 글이다. 맑스는 주요 지도부에게 회람 후 돌려달라고 했다. 1891년 <신시대>를 통해 출판됐는데 엥겔스가 당시는 필요했지만 훗날에는 불필요한 표현들을 생략했다.


  권리는 사회의 경제적 형태와 이 형태가 제약하는 문화 발전보다 결코 더 높은 수준일 수 없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 부르주아적 권리의 편협한 한계가 완전히 극복되고, 사회는 자신의 깃발에 다음과 같이 쓸 수 있게 된다 :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속류 사회주의는 부르주아 경제학자를 본받아 (그리고 이를 다시 본받아 일부 민주주의자들은) 분배를 생산 방식과는 독립된 것으로 간주하고 또 그렇게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사회주의는 주로 분배를 중심 문제로 하고 있다는 듯이 서술하고 있다.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전환의 시기가 놓여 있다. 또한 이 시기에 상응하는 정치적 이행기가 있으니, 이때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이외에 다른 것일 수가 없다.


  ‘맑스 읽기’를 마치며 : 비판과 실천


  지금까지 세 개의 글을 통해 ‘맑스 읽기’에 대해 논했다. 첫 글 <그들은 왜 맑스를 읽어왔나>에서 오늘날 맑스를 읽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20세기에 그들- 맑스주의자, 맑스의 후예 혹은 문예비평가 -이 맑스로부터 어떤 영감과 영향을 받았는지 살펴보았다. 두 번째 글 <맑스로 가는 길>에서는 맑스(주의)를 탐구하는 세 가지 길을 논했다. 철학사를 통해 내려오거나, 동시대의 유행 사상을 살피거나, 전기와 작품을 통해 이해하기 등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연재에서 맑스의 주요 작품 17개를 선별하여 간단히 설명하고 맑스가 썼던 글에서 인용하여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았다.


  맑스학Marxology을 수행하는 맑스 전문가, 맑스주의 문헌학자가 아니라면 그의 전 저작을 집필 순서대로 통독할 필요는 없다. 사회주의 운동가들의 경우 맑스뿐만 아니라 엥겔스, 레닌 등 고전적 맑스주의자들의 저작들을 두루 찾아 읽긴 하지만 맑스의 박사학위논문이나 『정치경제학 비판 요강』 등을 읽는 경우는 드물다. 그것들이 현실 운동에 직접적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한편 경제학, 정치, 사회학 등의 분야의 맑스주의 학자들도 맑스의 전 저작을 고루 섭렵하진 않는다. 학자의 양심이나 성실의 문제라기보다는 오늘날 전 세계의 학문적 풍토가 그러하기 때문일 것이다.

  학적인 탐구나 전문가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게 아니라 교양 차원에서 맑스와 친해지고자 한다면 이 연재에서 추천했던 전기들과 함께 <공산주의 선언>,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임금, 가격, 이윤> 정도 읽으면 될 것이다.


  결론이 나진 않은 주제


  ‘정치경제학 비판’과 관련한 책과 노트들은 분량이 방대해서 쉽게 권하기 어렵다. 또한 이름 높은 당대 최고라는 맑스주의 전문가들 수천 명이 달려들어 지난 세기를 다 소진하며 논쟁했지만 정리가 되지 않았다. 결론이 나지 않는 쉽게 결론 낼 수 없는 주제라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전문가들도 포기하거나 더 연구해야겠다며 물러서는 난제들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좌절할 필요는 없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람들은 종종 ‘쉬운, 얇은, 일목요연한, 단순명료한’ 입문서/해설서를 찾곤 한다. 분량이 많든 적든 내용이 현학적이든 세속적이든 저자가 그 주제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자기 이해를 거쳐 결론을 내지 못한 상황에서 세상에 내보내는 그런 결과물들은 혼란을 가중시킬 뿐이다. 스피노자로부터 맑스가 가져왔던 것처럼 ‘무지가 증명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동서고금의 고전들을 통해 지혜를 익힌, 철학과 역사를 통해 이치를 깨달은, 문학예술을 통해 글을 볼 줄 아는, 비록 자본주의 안에 살고 있지만 대안의 공동체를 희망하는 사람들이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런 삶의 자세와 여정 속에서 만난 맑스라면 그의 대표작 『자본』에 그 모든 인류의 지혜가 ‘노아의 방주’처럼 집결되고 농축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예술적 총체’는 맑스와 그 가족들이 부르주아적 출세와 풍요 그리고 건강을 포기한 채 만들어낸 피눈물의 결실이기도 하다.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


  맑스는 대학을 떠나면서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이데올로기나 공허한 가정들이 아니라, 우리가 혼동 없이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와 엥겔스는 평생 경제학자들과 사상가들,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이데올로기를 조롱하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단 한번도 자신들에 대해서 노동자계급의 ‘이데올로그’라고 표현한 적 없고 자신들의 사상이 위대한 ‘공산주의(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정초한 것이라고 회고한 적도 없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는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라는 표현과 뜻이 맑스의 적대자들과 계승자들 모두가 이해하는 공용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식의 발상과 어의語義변화와 전도顚倒는 20세기의 서글픈 현상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미 죽은 맑스,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즉 이데올로그로 세계 곳곳에서 경외의 대상으로 되었다. 공동묘지에 묻힌 맑스, 바다에 뿌려진 엥겔스의 죽음과 대조적으로 사람들은 우상숭배를 일삼으며 그들의 동상을 세웠다가 무너뜨렸다.

  그들이 그렇게도 증오했던 물신숭배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의 폐해들을 돌아보라. 이데올로기를 지양하는 게 아니라 또 다른 허위의식들의 바벨탑을 건설했던 게 아니겠는가. 맑스를 읽었을 사람들이 왜 그렇게 했는지 의문이지만, 그 역시 지배 계급의 사상이 그 사회의 지배적 사상으로 군림하고 억압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맑스를 읽는 까닭은 당대의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와 그것에 아첨하는 이데올로그들의 감언이설에 현혹된 채 길을 잃지 말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맑스의 비판(Kritik)과 실천(Praxis)만큼 감동적이고 유익한 나침반이 또 어디 있겠는가.


오창엽 : 69년생. 청년진보당, 사회당에서 활동했고 진보매체 기자로 일했다. lastmarx@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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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고대문화(komun.net) 9, 10, 12월호 학술연재의 마지막 글로 최종 작성일은 2006년 11월 24일이다.

맑스 읽기Ⅰ : 그들은 왜 맑스를 읽어왔나

☞ 맑스 읽기Ⅱ : 맑스로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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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드무비 > 우리들의 한글나라 - 2007 동아일보 단편소설

2007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
' 우리들의 한글나라’
[동아일보   2007-01-01 03:00:00] 
[동아일보]

유아용 한글 카드다. 콘크리트 칸막이 기둥마다 붙어 있는 네모난 카드는 막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에게 필요한 물품이다. 엽서 크기만 한 카드 왼쪽에는 굵은 명조체로 ‘가’가 써 있고, 그 옆에는 가위가 그려져 있다. 글자의 첫머리에 해당하는 단어와 연상되는 그림이 짝지어 있는, 유아용 한글 학습 카드가 분명하다. 싱글과 커플만 사는 원룸에 아이가 있을 리 없고 아이가 있다 해도 어둑한 주차장에서 놀게 할 부모는 없다. 까막눈의 노인이 살 만큼 관리비며 주위 상가의 물가도 호락호락하지 않다. 투명테이프로 반듯하게 붙여놓은 걸로 보아 누군가 한글 공부를 하나보다. 어둑한 주차장에서 한글을 공부하는 사람은 누굴까? 글자만 보면 솔깃해지는 내게 한글 카드는 묘한 호기심을 일으킨다. ‘가’를 지나고 ‘나’ ‘다’를 지나 ‘라’ ‘마’ 앞에서 후진을 하여 자동차를 주차시킨다. 차 문을 열려고 하는 사이 ‘가’ 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일정한 간격과 박자, 웅얼거리는 음성,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내밀어 바라본다. 어렴풋한 형체가 색으로 먼저 눈에 띈다. 푸른색 상의와 갈색 하의, 청소원 복장의 여자다. 나는 고개를 뒤로 빼고 운전석에 등을 밀착시킨다. 여자와 나의 거리에는 자동차 일곱 대를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여자는 기둥에 붙여놓은 한글 카드를 느릿느릿 떼어내며 카드에 적혀 있는 글자를 소리 내어 읽는다. 여자의 한국어는 어설프다. 하지만 여자의 억양에는 최선을 다하려는 의지가 들어 있다. 살짝 등을 떼고 여자를 염탐한다. 여자는 큰 소리로 글자를 반복하여 말한 후 카드를 툭 떼어내 한 손에 모아 쥐고 한 번 더 말한다. 여자는 여러 번 크게 소리 내어 ‘마’ 카드에 써 있는 ‘마술’을 읽는다. 마수, 머슬, 마슬을 발음하다 가까스로 ‘마술’이라 말하고는 ‘바람’으로, ‘사과’로, ‘아가’로 이동한다. 여자가 카드를 다 떼어낸 뒤 콘크리트 기둥 뒤로 사라진다. 웅얼거리는 소리도 멀어진다. 운전석에 얼굴을 파묻는다. 얕은 한숨이 새나온다.

“아, 마샤? 그 여자 이름이야. 나이는 한 스물 넷? 미니슈퍼 아줌마한테 들었어. 꽤 친절하고 유능하대. 남의 나라에 와 있어서 그렇지, 자기네 나라에선 선생님이었다나 봐. 왜 그런 경우 많잖아. 우리나라 사람들이 깔보고 함부로 해도 자기네 나라에선 한 자리 했던 치들이 돈 벌러 오는 거잖아. 그런데 넌 주차장에서 그걸 다 지켜본 거야?”

샤워를 끝내고 나온 정연이는 조금 전 주차장에서의 일을 듣자마자 여자를 알은척 한다. 뉴스에서 고용주에게 억울하게 임금 체불을 당하고 핍박받는 이주노동자들을 보면 안됐다는 생각은 했지만 막상 가까운 곳에 있는 그 여자를 봤을 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외려 나는 여자가 불편하다. 까만 피부에 덩그마니 쌍꺼풀 진 큰 눈은 경계심으로 가득했을 뿐만 아니라 눈을 맞추지 못하고 시선을 피할 때면 의뭉스러워 보였다. 마샤라는 이름과 어울리지 않는 외모였다. 이름 따위 아무려면 어떤가. 주차장에서 홀로 한글 공부를 하는 걸 보면 의지의 한국인 못지않은 것 같다.

언젠가 광화문에서 까만 피부의 남자가 나를 쫓아온 적이 있다. 버스에서 내리려는 찰나였다. 남자는 함께 서 있던 사람들에게 서툰 한국어로 “여기가 광화문 맞습니까?” 하고 물었다. 남자와 가까이 서 있던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우산을 폈다. 가을비였다.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남자는 빗물에 아랑곳 하지 않았다. 내게 간절히 어떤 말을 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나는 우산을 남자 쪽으로 기울였다. 남자가 내 우산 속으로 성큼 들어왔다. 남자는 고맙다는 말 대신 대뜸 시간이 있느냐 물었다.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빗물에 젖은 남자의 까만 피부에선 꿉꿉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시간이 없다고 말하자 남자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는 마음대로 하라는 투로 남자를 빤히 쳐다보고는 거래처 사무실로 향했다. 두어 시간 쯤 지났을까. 일을 보고 나오는데 불쑥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비가 멈춰 있어 남자는 말끔한 차림새였다. 정확히 두 시간 삼십분이 지나 있었다. 나는 앞장서서 남자와 근처 카페에 들어갔다. 자세히 보니 까만 피부도 매력적으로 보였다. 더듬더듬 한국말로 내 이름을 묻고 직업을 물었다. 나는 고분하게 말해주었다. 남자는 커피를 벌컥 마신 후 내게 영어를 잘 하느냐고 물었다. 간단한 회화 말고는 영어를 못 한다고 했다. 남자는 자신이 한글을 공부하기 위해 각종 한국 방송과 책들을 섭렵했다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나는 빙긋 웃었다. 남자가 갑자기 테이블을 탁 내리쳤다. 왜 영어 공부를 하지 않느냐고 말했다. 당황스러웠다. 한 개 국어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며 남자는 애정 어린 충고를 했다. 한국에 와서 라면으로 때우며 살았던 나날을 회상하던 남자는 눈물을 글썽였다. 나는 머뭇거리다 사무실 호출이 와서 일어나야겠다고 말했다. 갑자기 남자는 일어서려던 나를 제지하며 대뜸 자신이 나의 영어 선생님이 되어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프리토킹, 완벽한 원어민 발음, 전화로 영어 통화 수시 가능이 적혀 있었다. 두 시간 동안 고객을 기다린 남자는 덧붙여 이렇게 말했다. “싸게, 싸게 해드려요!”

나는 선풍기 앞으로 가 앉아 땀을 식힌다. 주차장에서 송 선배가 거절한 내 폰트에 대해 절망하고 있었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다. 정연이의 컴퓨터를 올려다본다. 정연이는 머리의 물기를 떨어내며 다가와 웹 폰트 작업 중인 컴퓨터를 천천히 꺼버린다.

“전기세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미안.”

전기세 때문이 아니라 내가 모방할까 두려워서라는 걸 나는 안다. 말을 삼키듯 선풍기 풍향을 한 단계 높인다. 미니홈피에서 정연이가 단독 개발한 한글은 잘 팔린다. 벌써 두 번째 한글 폰트를 개발 중이다. 내 폰트는 언제쯤 네티즌들에게 공급될까. 아니, 내 폰트는 언제쯤 한반도를 강타하는 폰트가 될까. 정연이가 슬그머니 다가와 선풍기 풍향을 낮춘다. 매몰차게 모니터를 꺼버린 행동을 정당화시키려는 정연이의 지루한 자기변호다.

“마샤가 재활용 창고 운영하는 거 알아? 누구한테 무엇이 필요한 지 알아뒀다가 가져다준대. 덕분에 오피스텔 사장이 구의원 나올 때 도움도 되고 해서 계속 놔둔다나봐. 그래서 매트리스 하나 부탁했어. 번갈아 가며 침대에서 자는 거 좀 불편하지 않니? 미니슈퍼 아줌마한테 슬쩍 운을 떼어 놨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선풍기를 정연이에게 내어주고 땀에 전 티셔츠를 벗는다. 장미꽃 피는 계절인데 날씨는 초여름이다. 앙가슴 사이로 땀이 또르르 흘러내린다. 화장대에서 머리 끈을 집어 긴 머리를 틀어 올려 묶는다. 정연이는 부러 고개를 돌리고 머리의 물기를 떠는 데 집중한다. 내가 옷을 입을 때까지 정연이는 그러고 있을게 분명하다. 2년째 같이 살면서 정연이는 자신의 속살을, 속마음을 쉽게 내비치지 않는다. 우리 우정은 미니슈퍼 아줌마와의 친분보다 못하다. 제 것을 드러내면 내가 움켜쥐기라도 할까봐 정연이는 조심, 또 조심한다. 내가 벌거벗고 돌아다니기라도 하면 정연이는 그 자리에서 머리를 말리다 박제가 될지도 모른다. 동거인을 박제로 만들 수는 없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는다.

“매트리스가 필요해? 여긴 너무 좁아.”

정연이는 내가 옷을 입었다는 걸 알고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얘기한다. 정연이가 폰트 개발에 성공하는 이유는 사방에 눈을 심어두기 때문일지 모른다. 정연이는 안 보는 듯 하면서 다 보고 있다. 그게 정연이의 필살기일까.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저 테이블을 현관 쪽으로 옮기면 돼. 테이블에 잡동사니뿐이잖아.”

정연이는 머리를 뒤로 넘기면서 남은 물기를 떨어낸다.

“그거 얼마나 한다고. 필요하면 우리 생활비에서 하나 사지 그래?”

청바지를 벗어 침대에 던질 뻔 한 팔을 재빨리 거둬내고 바닥에 던져놓는다. 정연이와 내가 함께 산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물과 기름이 합쳐지기도 하느냐고 물었다. 정연이와 나는 함께 출발한 신입사원이었다. 전문대학을 졸업하고 디자인 학원을 수료한데다 집 떠나 살고 있는 동향인이라는 것까지, 닮은 데가 많아 쉽게 친해졌다. 신입사원 시절 윗사람의 횡포를 묵묵히 받아내며 서로를 위로하다 보니 함께 살자는 말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튀어나왔다. 물과 기름이 교묘하게 일치하는 정점, 생활비를 절약하자는 모토가 우릴 한 곳에 몰아넣었다. 동료로서 뿐만 아니라 동거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 살면 문제될 것 없다고 생각했다.

“여기 살던 사람들이 내놓는 거면 웬만큼 쓸 만 할 거야. 좀 기다려보자고. 이사 가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조만간 매트리스 하나 나올 거야.”

호기로운 정연이의 말 꼬리를 덮치듯 현관 벨이 울린다. 인터폰에 얼굴 하나가 떠오른다. 한글 공부를 하던 여자, 마샤다. 마샤의 동공은 사물을 움켜쥐고 있는 듯 팽팽하다. 앙 다문 두터운 입술, 자두알처럼 동그란 얼굴형과 옴폭 파인 턱, 질끈 묶어 올린 머리 아래로 야생초처럼 듬성듬성 흘러내린 잔머리. 마샤는 두 눈을 껌벅거리며 응답을 기다린다. 정연이가 일어나 인터폰 수화기를 든다.

“무슨 일이세요?”

“매트리스, 왔어요.”

“네? 아, 매트리스? 고마워요. 금방 갈게요.”

정연이는 마샤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수화기를 내려놓는다. 팽팽했던 마샤의 풍선이 푹 꺼져버린 느낌이다.

“거봐. 내가 뭐랬니? 금세 하나 생겼잖아.”

정연이는 싱긋 웃어 보이며 컴퓨터 앞에 풀썩 앉는다. 다리를 꼬고 턱을 받친 채로 모니터를 켠다.

“참, 송 선배 만났지? 뭐래? 니 폰트 사겠대?”

정연이는 생각보다 인내심이 많다. 내가 원룸에 들어서던 순간 궁금했을 텐데 지금까지 참은 걸 보면 정연이의 인내심은 칭찬할 만하다. 나는 냉장고에서 주스를 꺼내 천천히 뚜껑을 연다. 건조대에 있는 컵을 바라보다가 주스 병째 벌컥 마셔버린다. 내 등에 생채기를 낼 것처럼 정연이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동거인으로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정연이는 지금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쯤은 금세 대답하지 않는 내 침묵으로 미뤄 알고 있다. 때로는, 최소한의 예의를 잊어버릴 때도 있다.

“잘 안 됐구나? 나도 처음엔 그랬어. 송 선배가 오죽 까다로워야 말이지. 그래도 송 선배가 틀린 말 하는 사람은 아니더라고.”

정연이의 폰트 ‘천사체’는 미니홈피에서 베스트 상품이다. 개인 블로그나 홈페이지가 활성화되면서 자신의 글에 어울리는 향기처럼 독특한 글씨를 선택하는 사용자가 늘어났다. 몇 년 전 함께 일하던 송 선배가 한글폰트디자인 사무실을 차리면서 좋은 폰트를 사들이고 있었다. 정연이는 회사에서 팀장 역할도 똑 부러지게 해내면서 개인적으로는 송 선배에게 자신의 폰트를 팔고 있다. 먼 훗날 제 이름을 내 건 회사를 차리기 위해 정연이는 여러모로 준비를 하는 중이다.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나를 수석 디자이너로 써먹겠다고 하지만 며칠 전 K기업 로고디자인 프로젝트팀에서 정연이는 내 이름을 빼버렸다.

“조금만 더 고쳤으면 좋겠대.”

마지못해, 자기 위안처럼 정연이에게 말한다.

“어떻게?”

호기심 많은 정연이, 쓸데없는 관심은 싫은 나. 침대에 걸터앉아 내 포트폴리오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정연이는 내 시선을 쫓아 집요하게 묻는다.

“내가 도와줄 수도 있잖아.”

“괜찮아. 내일부터 생각할래.”

“넌 그게 문제야.”

“뭐가?”

“금방 좌절하는 거. 쉽게 좌절하고 쉽게 절망하는 거 말이야. 그리고, 폰트를 무조건 팔겠다고 생각하면 안 돼. 거기엔 디자이너의 혼과 집념을 쏟아야 돼. 무조건 팔려고 하면 그게 상품이지, 예술작품이니? 그래, 상품인데 예술작품 다운 면모를 갖춰야 팔린다 이 얘기야. 내가 회의 시간마다 누누이 강조하잖아. 디자인이 경쟁력이고, 디자이너가 상품이다. 언더스탠?”

정연이는 입 꼬리를 올리며 회전의자를 돌려 앉는다. 회사에서 내 직속상관인 팀장 정연이는 이젠 집에서도 팀장 행세를 하려든다. 팀장과 동거인의 위치를 망각해버리는 정연이를 인간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 걸 구분할 줄 알면 사람이 아니지. 정연이는 팔을 뻗어 물 한 모금을 마시고 가지런하게 제자리에 올려놓는다. 책상 밑에 놓아둔 가방에서 안경집을 꺼내 안경을 꺼내 쓴다. 사감선생 같다고 놀려도 정연이는 뿔테 안경을 바꾸지 않는다. 자신의 모습이 더 위악적으로 보이길 바란다. 그것이 자신의 경쟁력이고 상품이라는 듯이. 팀장 정연이는 오늘 바닥에 요를 깔고 자야 한다. 그래서 밤새도록 스탠드를 켜놓고 작업을 할 작정인 것 같다. 번갈아가며 싱글 침대에서 자는 방법은 나쁘지 않다. 하지만 정연이는 자신이 바닥에서 자야 하는 날에는 밤새 불빛을 어른거리게 하여 내 잠을 망친다.

얼핏 잠이 들었을까. 뜨거운 샤워가 온몸을 녹지근하게 만들었다. 현관벨 소리에 눈을 뜬다. 정연이가 뿔테 안경을 위로 치켜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정연이는 팔짱을 끼고 선 채로 모니터 속의 얼굴을 바라본다. 마샤다. 다시 현관 벨이 울린다. 모니터 속의 마샤는 주위를 둘러보며 원룸의 동정을 살피듯 현관 문 쪽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정연이가 낚아채듯 인터폰 수화기를 든다.

“무슨 일이죠?”

정연이는 한참 골몰하고 있던 중이었나 보다. 날 선 목소리가 날아가는 새 깃털이라도 잘라버릴 것만 같다. 모니터 속의 얼굴은 아랑곳하지 않고 수줍은 웃음을 짓는다. 머리를 긁적인다. 어색한 상황일 때 머리를 긁적이는 버릇은 온 지구인의 공통점인가.

“매트리스요. 안 가지세요?”

한 겹 철문 밖이라 마샤의 음성이 생생하게 들린다. 정연이가 한숨을 내쉬며 인터폰이 붙어 있는 벽에 등을 기댄다.

“알았어요. 나중에 갈 테니까 보관 잘 해놓으세요.”

“아, 안돼요. 그냥 두면, 나 없으면, 누가, 가져버려요. 지금, 가져야 돼요.”

마샤의 어설픈 한국어가 툭, 툭 분주하게 튀어나온다. 가위를, 마술을, 사과를 발음하던 음색과는 딴 판이다.

“그럼 그렇게 해요. 하나 사면 되니까 그대로 두세요.”

정연이는 인터폰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는다. 모니터 속의 마샤가 바닥으로 툭 떨어지듯 사라진다.

“뭘 그렇게까지 화를 내?”

“안 잤어? 지금 막 중요한 타이밍이었단 말이야. 그깟 매트리스 사면 되지 뭘 그래.”

내가 이불을 조심스레 거둬내고 일어나는 사이 정연이는 오만 상을 찡그리며 책상 앞에 앉는다. 다시 잠들기 어려울 것 같다. 침대 옆에 있는 가방을 끌어당긴다. 담배를 꺼낸다. 창가로 다가가 문을 연다. 찬 바람이 훅 얼굴을 덮친다. 담배에 불을 붙인다.

“윤서영. 나 작업하는 거 안 보이니?”

“어, 미안.”

나는 담배를 창밖으로 내던진다.

“야! 불나면 어쩌려고 그래? 담뱃불 끄고 버린 거야?”

“아, 아니….”

“얼른 나가봐. 얼른!”

정연이가 큰일이나 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바지와 카디건을 집어준다. 뭔가 내키지 않지만 방화범이 돼버리는 극단적인 상상에 떠밀려 옷을 걸치고 신발을 꿰어 신고 나온다. 엘리베이터가 맨 꼭대기 층에 있어 할 수 없이 계단으로 뛰어 내려간다. 5층에서 1층까지 단숨에 뛰어내려와 담배를 던진 화단으로 향한다. 가느다란 흰 연기를 뿜고 있는 담배를 찾아 발로 비벼 끈다. 위를 올려다본다. 정연이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담배를 들어 보인다. 정연이가 말없이 고개를 뒤로 빼고 창문을 닫는다.

발로 비벼 끈 불이 내 가슴으로 옮겨온 것처럼 식은땀이 난다. 허기가 진다. 뭔가 먹고 싶다. 그러고 보니 저녁도 걸렀다. 카디건 주머니를 뒤진다. 만 원 짜리 한 장이 잡힌다. 어쩐지 당한 느낌이다. 이 카디건은 장 볼 때 입는 ‘마트 전용 카디건’ 이다. 여분의 돈을 넣어둔 것도 정연이의 아이디어였다. 담배를 꺼낸 건 자발적이었지만 당황스러운 깜짝 각본은 떨떠름하다.

테이크아웃 식품을 들고 가는 손들, 아무 곳에도 시선을 주지 않는 마네킹들이 사는 오피스텔 근처, 샐러드 바로 들어간다. 샐러드 바에는 서너 명의 여자아이들이 생과일주스를 홀짝이며 자기들만의 이야기에 빠져 있다. 뉴에이지 피아노 연주곡 속으로 여자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캐스터네츠처럼 부딪쳤다 흩어진다. 단골이라고 결코 알은척을 하지 않는 샐러드 바 주인이 목례를 하고 진열대를 응시하며 조용히 주문을 기다린다. 늦은 저녁이라 메뉴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먼저 토마토 주스를 주문한다. 주인은 발 빠르게 밀폐용기에서 토마토를 꺼내 믹서에 넣고 작동 버튼을 누른다. 믹서 소음이 샐러드 바를 휘젓는다. 주인이 토마토 주스를 내 쪽으로 건네고 진열대 앞으로 와 선다. 아스파라거스와 데친 새우, 양상추를 가리키자 주인은 집게로 적당량을 집는다. 계산을 하고 나서 샐러드 접시와 토마토 주스를 들고 빈 테이블에 앉는다. 열 평 남짓한 샐러드 바, 조금만 집중하면 옆 테이블의 사소한 정보쯤은 얼마든지 들을 수 있다. 여자아이들은 진로 문제와 남자친구 이야기를 테이블 위로 뚝뚝 떨어뜨린다. 흘린 이야기들을 다시 또 주워 담느라 여자아이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다. 양상추에 새우를 포개 파인애플 소스에 찍어 한 입에 넣는다. 새콤한 소스가 혀에 착착 감겨든다.

샐러드 접시를 거의 다 비웠을 때쯤 샐러드 바 문이 열리는 동시에 후끈한 바람이 먼저 들어온다. 푸른색 상의에 갈색 바지를 입은, 마샤다. 그녀의 옷은 색상뿐만 아니라 신분에 대한 상징이기도 해서 얼굴색과는 상관없이 고단해 보인다. 마샤가 신호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자아이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여자아이들은 마샤와 닿지 않고 좁은 테이블 사이를 빠져나간다. 마샤가 내 옆을 지난다. 샐러드 바 주인이 유난한 목소리로 여자아이들을 배웅한다. 뒤돌아 마샤를 본다. 마샤는 샐러드 바 앞에서 메뉴를 고르고 있다. 주인은 냉담한 표정으로 마샤를 훑는다.

“이거, 이거, 주세요. 칼로리 없어요?”

마샤가 손가락으로 메뉴를 고른다. 주인은 싸늘한 시선으로 답하며 천천히 접시와 집기를 집어 든다. 외려 마샤는 주인의 표정에도 담담하다. 그런 일쯤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여유가 느껴진다.

“우리 샐러드바 메뉴에는 명찰마다 칼로리가 적혀 있습니다.”

주인은 태평양 한가운데에서 낚시라도 하는 듯 마지못해 메뉴들을 집어 접시에 올려놓는다.

“아, 맞다, 여기, 써 있어요. 고마워요.”

“양상추와 새우 드릴까요? 더 필요한 거 없으세요?”

“없습니다.”

마샤는 반듯하게 선 채로 또박또박 말한다.

나는 샐러드 접시를 들고 카운터로 가 반납한다. 주인은 와중에도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깍듯하게 내게 인사한다. 주인이 마샤가 고른 샐러드를 저울에 올려놓고 눈금을 가늠한다.

“삼천 팔백 원입니다.”

주인은 마샤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한다. 내가 앉아있던 테이블에 빈 주스 잔이 눈에 띈다. 주스 잔을 들고 다시 카운터로 간다. 마샤가 주머니를 뒤적인다. 천 원짜리 석 장을 꺼내 보인다.

“팔백 원, 없어요, 빼주세요.”

마샤는 얼버무리며 말한다. 주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친다.

“미안합니다. 빼주세요.”

마샤가 다소곳하게 한 번 더 말한다. 주인은 신경질적으로 집게를 집는다. 나는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지폐를 만지작거린다. 주인의 행동을 참을 수가 없다. 대놓고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지켜볼 만한 구경거리는 아니다. 주인이 마샤가 고른 샐러드 접시에서 새우 조금, 양상추 조금을 덜어내려 할 때, 나는 주인에게 손을 들고 말한다.

“여기, 천 원 있어요. 거스름돈은 됐어요.”

천 원짜리 한 장을 들어 보인 후 카운터 위에 올려놓고 그대로 뒤돌아 나온다. 오월의 밤에 여름의 전조가 풍긴다. 카디건을 벗어 허리에 두르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다. 아그작, 이 밤을 깨물어 삼키기라도 할 것처럼 심호흡을 한다.

담배 냄새가 자욱한 피시방에는 축 늘어진 채로 손가락만 움직이는 군상들이 모여 있다. 늘 그랬던 것처럼 포털 사이트에서 내가 처음으로 커버 디자인한 책 ‘비즈니스 브리지’를 검색한다. 경영학과 수업 듣는데 비즈니스 브리지 요약 좀 해주세요, 비즈니스 브리지 읽고 리포트 써야 하는데 도와주세요…. 책 내용과 관련된 질문 맨 밑에 그해의 베스트 북커버 디자인으로 뽑혔다는 기사가 짤막하게 실려 있다.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전이라 시상식 사진이라든지 내 신상명세서 등의 정보는 없다. 이 책은 나 혼자 디자인했다. 저자의 얼굴 윤곽과 부리부리한 눈이 돋보이도록 세피아의 농담을 조절해 모노톤 기법으로 그렸다. 활자는 세로로 배치했다. 고딕체와 명조체를 결합하여 특이한 폰트를 그려낸 것도 비즈니스 브리지만의 특징이다. 기존의 폰트가 아니어서 따로 조판과 필름 작업을 거쳐 찍어야 했다. 인쇄공들에게 간식을 사다 나르며 비위를 맞췄고 밤샘 작업을 거듭했다. 구매욕을 북돋우며 지적인 이미지를 갖췄다는 평을 받아 경영학 서적 커버 디자인의 전형이 될 정도였다. 비즈니스 브리지는 한동안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다 스테디셀러가 되었다. 스테디셀러 같은 삶, 내가 추구하는 삶의 형태였는지도 모른다. 꾸준히 사랑받는 한 권의 책처럼, 적정한 온도를 유지하는 안온함.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정상 체온을 유지하는 일이었다. 환절기에는 감기에 걸렸고 불규칙한 계절의 본성을 버거워했다. 오랜만에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잘 지낸다는 안부가 새삼 귀하게 다가왔다.

나는 그 한 번의 성공을 기억한다. 독특한 폰트라며 한글 서체로 개발하라는 의뢰를 받았을 때 나는 실패를 생각하지 못했다. 국제표준 폰트인 유니 폰트에서 모든 경우의 수를 동원하여 사용빈도가 높은 한글 2350자의 웹 폰트를 만든다. 홀로 작업해야 글꼴의 분위기와 개성이 고르게 나타난다. 근육통과 관절염은 액세서리처럼 따라붙는다. 외로움과 인내의 싸움이다. 송 선배는 보기 좋게 늘 나를 넘어뜨렸다. 그건 겨우 단 한 번의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며 꿈을 깨라고 했다. 명품 넥타이를 바투 조이며 송 선배는 내 폰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서영 씨 폰트는 너무 안이해. 폰트야말로 디자이너의 감각적인 마인드를 표현하는 거라고. 자음은 명조의 느낌이 많이 나고 특히 ‘ㅡ’ ‘ㅜ’ 는 가로획이 너무 짧아. 모음을 힘겹게 떠받치고 있는 느낌이 나. 다른 자음들과 어울려 있을 때 균형미도 떨어지고. 확 튀어버리니까 다른 글씨체와 섞여 있는 것 같아서 독창성이 없어. 다시 한 번 해봐. 영혼을 넣어보라고, 영혼을.”

송 선배는 매번 똑같은 소리만 반복한다. 그걸 누가 모르나. 영혼을 넣고 디자이너의 마인드를 살린 감각적인 폰트를, 세상에 단 하나뿐인 폰트를 만들고 싶다. 균형미를 갖추되 개성을 담고 있으며 독창적인 이 세상 단 하나의 폰트를, 내가 만들고 싶다. 내 영혼은 어디에서 헤매고 있는 걸까. 헤매고 있을 만한 영혼이 내게 있었던가. 아. 이 지독한 패배 의식. 그래도 만약 영혼이 있다면 부디 내 손으로 스며들기를. 스며든 후엔 결코 사라지지 말기를.

피시방에서 나와 한달음에 원룸에 도착한다. 현관 벨을 누른다. 기척이 없다. 열쇠를 갖고 나오지 않아 난감하다. 정연이는 벌써 잠이 든 걸까. 현관 문 틈으로 원룸의 동정을 살핀다. 딸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인터폰 스피커로 정연이의 음성이 흘러나온다.

“어디 갔다 와?”

“… 피시방.”

“나간 김에 매트리스 좀 갖고 와. 오늘부터 매트리스에서 자도록 하자. 내가 치워놓을 테니까 얼른 다녀와. 응? 부탁한다, 친구야.”

정연이는 일 년에 한두 번쯤 내게 친구라고 부른다. 자기 생일과 내게 간절히 도움을 요청할 때. 올해는 그 소리를 다 들었으니 내년을 기약해야 한다. 오피스텔 후문을 통과해 재활용 창고로 향한다.

재활용 창고에 드리워진 비닐 발로 불빛이 새나온다. 고요하고 스산하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말한다.

“저기, 계세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불빛 옆에 웅크리고 있던 그림자가 커진다. 비닐 발을 들추고 마샤가 나온다.

“무얼 찾으세요?”

“저기, 매트리스 가지러 왔어요.”

“503호? 잠깐만요. 아, 샐러드바!”

뒤돌아서던 마샤가 나를 알아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거스름돈, 여기, 있어요.”

마샤가 주머니에서 동전 두 개를 꺼내 내게 내민다. 나는 겸연쩍어 손을 내저으며 괜찮다고 말한다.

“감사합니다.”

마샤는 깍듯하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고는 동전을 주머니 속에 넣는다. 엉거주춤 선 채로 나도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두 사람이 맞절이라도 하는 품새다. 고개를 들자 어색한 웃음이 동시에 새나온다.

나는 마샤를 따라 재활용 창고 안으로 들어간다. 스탠드, 테이블, 전기밥통까지 재활용 창고는 잡동사니 천국이다. 벽에는 마른 꽃다발까지 걸려 있어 이국의 카페 같기도 하다. 백열전등 아래 자그마한 탁자 위에 노트와 연필, 한글카드가 널려있다. 주차장에서 보았던 그 한글카드다. 마샤는 창고 구석에 쌓아놓은 폐휴지 더미들을 한 덩어리씩 옮겨놓는다. 마샤의 키만큼 폐휴지들이 쌓인다. 그 뒤에 매트리스가 벽에 기대어 서 있는 게 보인다.

“이렇게 안 하면, 누가, 가져요.”

마샤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마샤가 매트리스를 조심스럽게 움직인다. 나는 마샤를 도와 매트리스 한 귀퉁이를 나눠 잡고 발을 맞춰 옮긴다. 한쪽에 세워놓은 매트리스에 마샤가 마른걸레질을 한다. 나는 뒤돌아서다 쌓아놓은 폐휴지 더미들에 걸려 넘어진다. 동시에 폐휴지 더미들도 쓰러진다. 막아보려 했지만 이미 폐휴지 종이들은 직소퍼즐 조각처럼 흩어져버린 후다. 마샤는 개의치 않고 매트리스를 정리한 후에 폐휴지 더미들을 정리한다.

“미안해요.”

마샤는 너그러운 미소로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폐휴지 더미를 모은다.

“같이해요.”

나는 마샤처럼 쭈그리고 앉아 흩어진 폐휴지들을 모은다. 폐휴지들은 연극 포스터, 의류 대 방출 바겐세일, 신장개업 북경반점 등 크기가 다른 광고지 일색이다. 무조건 눈에 띄도록 디자인은 무시하고 커다란 글씨로 써 있어 공해처럼 여겼었다. 누군가가 정성스레 모아놓고 있었다는 느낌 때문일까. 구겨지거나 발밑에 깔려 누추하게 삶을 마감해버리는 폐휴지들과 달리 서로의 등을 껴안고 있었을 폐휴지들은 마니아의 소장품처럼 귀중해 보인다.

“이걸 모은 거예요?”

“…네.”

“특별한 이유라도 있나요?”

“한글, 공부해요. 재밌어요.”

“한국에 온 지는 얼마나 됐어요?”

“2년, 됐어요.”

마샤가 검지와 중지를 세우고 말한다. 승리를 기원하는 표시 같아 괜스레 웃음이 난다.

“이사 가고, 오면 재활용 많이 버려요. 좋은 거 없어져요. 금방 없어요. 아까 909호, 이사 갔어요. 안 쓴대요, 버렸어요.”

“고마워요. 덕분에 잘 쓸게요. … 꽤 늦었는데, 집에 안 가요?”

“여기, 지하에, 내 방, 있어요. 잠깐, 방 구할 때까지만, 살아요.”

마샤는 얼추 폐휴지 더미들을 정리하여 네 개의 덩어리로 분류한다. 덩어리들을 들고 한쪽으로 갖다 놓는다. 바닥에 초등학생 노트와 철제 필통이 눈에 띈다. 노트 겉장에는 마샤의 이름이 비뚜름히 써 있다. 마샤가 다가와 머리를 긁적인다. 어색하고 쑥스러울 때 머리를 긁적이는 버릇은 마샤의 성격인 듯하다. 나는 마샤의 손에 노트를 건네준다.

“아, 미안해요. 글자만 보면 습관적으로 쳐다보게 돼요.”

마샤가 두 손으로 노트를 들고 내게 내민다.

“한글, 가르쳐주세요. 배우고, 싶어요.”

뜻밖의 부탁이라 나는 조금 당황스럽다. 지하주차장에서 마샤는 홀로 한글을 깨쳤다. 한글 카드를 보고 배울 정도라면 내가 가르쳐 줄 단계는 지난 게 아닐까. 어설프지만 제 의견을 말하는 것만 봐도 마샤의 한국어 능력은 상당하다.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게 끝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더 배우겠다고 결심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왜, 한국어를 배우려고 해요?”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듯 마샤는 입술을 오므리고 지그시 웃는다. 한국에 돈 벌러 왔으니 한국어를 배워야 하는 건 당연한 일인데 왜 배우느냐는 내 질문은 어리석었을지도 모른다. 마샤의 한글 노트를 펼쳐 유심히 살펴본다. 모음과 자음이 가지런하지 않고 제각각 놓여있는 글씨부터 모음 자음을 바짝 붙여 쓴 글씨까지, 삐침이 있는 명조도 둔탁한 고딕도 아닌 마샤만의 글씨다. 길쭉한 자음과 작은 알갱이처럼 붙어있는 모음은 그 하나만으로도 독특한 분위기가 난다. 한글로 메워진 노트를 멀리 놓고 보니 한 폭의 그림 같다. 머릿속으로 마샤의 글씨를 그린다. 각 진 모음의 글꼴에 명조의 삐침을 넣어 자음을 만든 내 폰트의 이름은 ‘서영체’다. 오랫동안 군림해온 두 개의 폰트를 합친 이유는 익숙한 친근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명조의 삐침을 여리게 하고 고딕의 딱딱함을 부드럽게 공 굴려도 여전히 두 개의 서체는 너무나 달라 조합될 수 없었다. 조금 모양을 바꾸는 것만으로는, 오랜 세월의 무게를 바꿀 수 없었던 것이다!

“내 이름을 그려주세요, 써주세요. 예쁜 글씨, 쓰고 싶어요. 한글, 이뻐요. 그림, 같아요. 한국말 잘하면 다른 사람, 될 것 같아요. 나는 내 나라 사랑하지만 한국도, 사랑해요.”

마샤가 노트를 내민다. 노트를 받으며 마샤의 푸른 상의를 들여다본다. 늦은 밤까지 제복을 입고 있는 마샤. 물음표를 남발하는 것 같지만 궁금증을 참을 수 없다.

“제복 입고 있으면, 제복이 유니폼이에요, 알죠? 제복 입고 있으면 답답하지 않아요?”

“편해요. 이거 입어야 사람들, 내가, 누군지 알아요. 괜찮아요. 난 좋아요. 지금은 오피스텔 청소하지만, 난 달라질 거예요. 다른 사람, 될 거에요.”

“왜, 이름이 마샤예요? 좀 특이해서요. 마샤의 나라에서 보통 쓰는 이름이 아니잖아요?”

“우리 아버지, 선생님이에요, 러시아, 이야기 좋아해요, 많이 읽었어요, 마샤는, 모스크바에 가면, 다를 거라고 믿는, 여자 이름이에요, 아버지 나한테, 그랬어요. 나처럼, 살지 마, 안 돼, 더, 좋은 세상, 가, 그랬어요.”

마샤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다. 더 좋은 세상에 와 있을지도 모를 마샤는 울면 더 약해진다는 금기사항이라도 새긴 것처럼 금세 눈물을 닦고 방긋 웃는다. 노트를 빤히 보며 자신의 이름이 쓰이기를 기다린다. 나는 푸른색 상의에 흘림체로 수놓은 마샤의 이름을 노트에 쓴다. 아니, 마샤의 말대로 마샤의 이름을 그린다. 쓰는 게 아니라 그린다, 이다. 마샤의 미음(ㅁ)은 아득한 평원에 자신의 자리를 만드는 울타리 같다. 시옷(ㅅ)은 한자의 ‘사람 인’ 자 같기도 하고 자음의 ‘ㅑ’ 와 만나 보드라운 느낌도 든다. 마샤는 내게서 노트를 받아 주의 깊게 본 후 내 글씨와 비슷하게 자신의 이름을 그린다.

마샤가 한글을 쓴다. 마샤의 글씨는 명조체도, 고딕체도 아닌 이 세상, 단 하나의 글씨처럼 보인다. 연필을 쥔 손에 바짝 힘이 들어가 있고 마샤는 자신의 이름에 들어 있는 모음과 자음을 천천히 써내려간다. 마샤의 미음(ㅁ)은 어디에나 내걸어도 좋을 창이다. 시옷(ㅅ)은 평원을 향해 뛰어가는 사람의 걸음 같고 자음의 ‘ㅑ’와 만나 씩씩한 느낌이 난다. 아. 탄성이 절로 나온다. 처음 한글을 배웠던 시절, 나는 다섯 살이었다. 또래아이들보다 일찍 한글을 떼었고 내가 쓴 글씨는 모든 아이들이 흉내내고 싶어 할 만큼 예뻤다. 새로운 글씨체들을 마구 만들어냈다. 아이들은 내 글씨를 모방했다. 그러나 간혹은 아이들의 외면을 받은 글씨들이 있었다. 나는 아이들의 찬사를 받지 못한 글씨를 원망하며 망설임 없이 휴지통에 버렸다.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누군가 그랬다. 즐기는 사람을 당할 수 없다고. 그러므로 나는 이길 수 없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마샤에게 주문한다.

“잘했어요. 다시 써 봐요.”

마샤는 연필을 다시 모아 쥔다. 엄지와 검지에 힘을 주고 중지로 연필을 받친다. 두 글자를 쓰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마샤의 눈빛은 진지하고 섬세하다. 마샤에게 한글은 더 좋은 세상의 창이 되고 있는 걸까.

제 이름을 써놓고 마샤는 무릎걸음으로 폐휴지 더미로 다가간다. 종이 한 장을 꺼내와 내 앞에 내민다.

“여기, 이 글씨처럼 써주세요.”

마샤가 내민 두툼한 아트지는 어떤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다. 독특한 서체로 디자인한 숫자가 한눈에 들어온다. 나는 그것이 마감일이 멀지 않은 폰트디자인 공모 포스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글씨, 너무 예뻐요, 그림, 같아요. 똑같이 안 돼요, 될 것 같아요. 아, 될 거예요.”

콘테스트 제호를 아라베스크 문양과 결합시키고 보라색으로 농담을 조절한 ‘폰트디자인콘테스트’는 글자 하나하나 독립돼 있고 어울려 있는 것도 어색하지 않다. 다른 글자들과의 어울림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나는 머리에 둔기를 맞은 것처럼 새로운 창을 발견한 느낌이다. 언젠가 내 글씨와 똑같이 쓸 거라는 확신에 찬 마샤의 말이 주문처럼 들린다. 마샤가 정성들여 글씨를 쓴다. 한글을 그림이라 생각한 마샤, 울타리를 치지 않고 창을 만든 마샤의 눈썰미는 아름답다. <끝>

이은조

"세상을 보는 맑은 창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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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 > 오백이건 오십이건, 다산은 다산 아닌가?

 

 

 

 

 

얼마 전에 창비 겨울호를 뒤적뒤적 하다가 박석무의 <풀어 쓰는 다산 이야기>(문학수첩)이란 책에 대해 도종환이 쓴 "서평"에서 문득 다음과 같은 대목을 발견했다.

  • 다산은 5백 권이 넘는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남겼으나, 모두 한문으로 기록된 책이라서 일반 독자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314쪽)

그런데 나는 여기 나온 "5백 권"이라는 표현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문득 의문이 생겼다. 나로선 다산이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의 저술이 "5백 권"에 달한다는 구체적인 숫자는 미처 들은 바가 없었(거나, 혹은 들었더라도 까먹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야 한문학이나 역사학, 혹은 서지학을 전공하는 사람은 아니고, 사실 한문 해독에 있어서도 까막눈이나 다름없으니 감히(!) 다산학 분야의 전문가가 쓴 책에 나왔음직한 내용(하긴 그러니까 서평자도 권수를 구체적으로 인용한 게 아니었겠는가)을 반박한다거나 하는 것은 그야말로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격"에 불과할 것이다. 다만 나는 예전부터 우리나라나 중국 등의 한문 자료에 대한 서지를 간혹 접할 때마다 종종 혼동을 느꼈던 대목, 즉 "권(券)"과 "책(冊)"의 구분에 있어 뭔가 좀 더 엄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느꼈을 뿐이다. 쉽게 말해 다산의 "500권"은 분명히 "500권"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이 생각하는 권수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단행본 한 권, 두 권의 "권"은 다산의 저서 500"권"의 그 "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권"은 한문 자료에 있어 "책"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우리 귀에 익숙한 고전들로 바꿔 말해보자면 <삼국사기>는 모두 50권(9책)이며, <삼국사기>는 5권(2책), <고려사>는 139권 101책, <성호사설>은 30권 30책, <신증동국여지승람>은 55권 25책, <증보문헌비고>는 250권 50책이다. 여기서 "권"은 volume, 즉 지금과 같이 "넘기는 책"이 아닌 "두루마리 책"이 대세였던 과거에 사용하던 구분으로, 지금 기준으로 보자면 어디까지나 책의 내용이나 분량에 따른 구분단위일 뿐이다. 반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한 권 한 권은 "책"이라는 단위로 계산했다. 따라서 우리가 교과서에서나 제목을 달달 외웠을 뿐, 실제로 볼 일이 거의 없는 이런 책들의 경우, 무지막지해 보이는 "권"과 "책"의 수에 비해 정작 요즘 책의 형태로 번역 출간된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 가령 50권이나 되는 <삼국사기>는 기껏해야 단행본 한두 권 분량이고, 5권짜리 <삼국유사>는 짤 없이 달랑 한 권, 139권짜리 <고려사>는 원문 없이 북역 리프린트 본으로 총 열한 권, <성호사설>은 재편집본 <성호사설유선> 10권 10책짜리를 토대로 한 국역본이 총 열두 권, 55권짜리인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원문 축쇄 영인 부분 포함 일곱 권, 250권짜리인 <증보문헌비고>는 원문 축쇄 영인 및 색인 3권을 포함해서 모두 마흔 권으로 국역되었다.

위의 예에서 쉽게 알 수 있듯이 한문본의 "권"이라는 것은 딱 정해진 분량이 아니다. 쉽게 말해 <삼국사기>나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시 "권수"에서는 별 차이가 없지만, 책수에서는 벌써 세 배 가까이 차이가 나고, 실제로 국역본의 분량으로 치면 세 배에서 최고 일곱 배는 너끈히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위에서 말한 "다산의 저서 500권"은 쉽게 말해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단행본 500권"으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오히려 지금의 단행본 분량으로 계산하자면 그보다 훨씬 분량이 줄어들면 줄어들었지, 결코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지금 내가 다산의 위대함이나, 다산의 가치를 무작정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500권이면 어떻고, 요즘 책으로 쳐서 50권밖에 안 된다면 또 어떤가? 500이건 50이건 간에 다산은 다산이다. 그렇지 않은가? 다만 혹시나 있을 선의의 "오해"를 피해 보자는 거다. 한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나 기자들(설마?)로선 "몇 권 몇 책"이라는 한문본의 권수 따지기에 익숙한지 몰라도, 그걸 읽거나 듣는 일반인들로서는 오히려 "단행본 500권"을 딱 떠올리게 될 수 있으니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다산의 업적을 단순히 숫자로만 표현한다는 것은 편리하기는 할 망정, 솔직히 좀 품위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굳이 이렇게까지 꼬치꼬치 따져가면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오늘 우연히 인터넷을 뒤적이다가 이번에 정민이 펴낸 <다산선생 지식경영법>(김영사)이라는 책에 관한 신문 서평에서 그놈의 "다산의 저서 500권"이라는 문구가 여전히 합창되고 있음을 보고 짜증이 팍 솟구쳤기 때문이다. 물론 그 책을 못 본 상태에서 함부로 말하기는 곤란하고, 또한 그런 기사를 쓴 기자들이 과연 보도자료에 나온 내용을 그대로 답습했는지, 아니면 이른바 다산의 "500권"이 요즘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500권"과는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쓴 것인지는 나도 모를 일이며, 혹은 그 기사를 본 일반 독자들이 각자 알아서 "그래, 하지만 그 500권과 이 500권은 좀 다르지" 하고 혼잣말을 하며 제대로 알아들을지도 모르는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솔직히 "다산"과 "지식경영법"이라는 약간은 생소한 조합이 그처럼 주목을 받게 된다는 것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어째서 그놈의 "500권"이 꼭 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다는 거다. 뭐 남이야 다산을 삶아먹든, 데쳐먹든, 튀겨먹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한편으로는 그놈의 "지식" 때문에 늘그막에 유배지를 전전하며 타향살이 온갖 설움을 받아야 했던 다산의 "경영법"이 뭐 얼마나 대단했으랴 하는 비뚤어진 심사가 없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이번에는 "과연 그 500이 정말 500인가?" 하는 궁금증이 생겨서 이것저것 관련 자료를 뒤적여 보았는데, 막상 지금 나와 있는 <여유당전서>의 권수는 500권이 아니라 154권인 거다. 다산연구소에서 인터넷에 올려놓은 <여유당전서> 영인본 해제(송재소 지음)에 따르면 그 전후 사정은 이렇다.

  • 필사본으로 전해 오는 다산 정약용의 저술이 처음으로 간행된 것은 1936년이었다. 이 해에 다산서거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하여 신조선사에서 다산의 저작을 154권 76책으로 재편집하고, 이를 활자본으로 출판한 것이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여유당전서>이다. 이후 1960년에 문헌편찬위원회에서 신조선사본을 4책으로 축쇄영인앴으며, 1969년에 경인문화사에서 6책으로 다시 축쇄영인한 바 있다. 1985년에는 여강출판사에서 신조선사본을 실물대의 크기로 영인하여 20책으로 간행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차이가 나는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올라와 있는 "다산의 저작"이라는 글에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http://www.edasan.org/menu2/main.php?mode=content3)

  • 다산의 저술은 1922년에 문집에 넣기 위해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자찬묘지명의 집중본을 기준으로 할 때, 육경사서의 연구서인 경학집 232권과 일표이서를 포함한 경세학서 138권에 시문집과 기타 저술을 포함한 문집 260권을 합하여 총 492권이다.

그런가 하면 을유문화사의 <한국학대백과사전>(1989 재판) 제2권의 "서지" 항에는 "정다산전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 원래 자찬묘지명 집중본의 목차에 없는 민보의 3권, 풍수집의 3권, 문헌비고간오 3권을 가하면 도합 508권의 대저서이나, 지금은 1936년 신조선사에서 정인보, 안재홍이 교열하고 <여유당전서>라 하여 활자본 전질 154권 67책으로 간행한 것이 전한다. 그런데 이 <여유당전서>는 그 편찬의 체재와 분권 등이 원고본과 같지 않고 삭제된 부분이 있어 원본 그대로 전해지지 않고... (이하 생략) (244쪽)

결국 다산의 저서가 "500권"이라고 계산한 것은 어디까지나 "자찬 묘지명", 즉 다산 스스로가 생전에 쓴 자기 비문에 나온 내용을 토대로 했다는 이야기인데, 그것도 492권이니 508권이니 해서 세는 사람에 따라 권수가 막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 그렇다면 혹시나 다산 스스로의 계산이 틀렸을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 그리고 이렇게 많은 "권수"를 자랑했던 다산의 저술도 나중에 교정 교열을 거쳐 활자화되면서부터는 <여유당전서> 154권 67책, 현재는 영인본 20권으로 대폭 줄어들었다고 하지만, 오늘날 이 영인본이 다산 연구의 기본자료로 각광받고 있는 것으로 보아, 특별히 판본의 충실성에 대한 시비는 없지 않나 싶다. 즉 어쩌면 지금 다산의 저술 권수에 대해 굳이 언급하려면, 차라리 현재 유통되는 <여유당전서>에 따라 154권이라고 하는 편이 보다 정확하지 않겠느냐는 거다. 물론 500권이 편집 과정에서 154권이 되었지만, 특별히 그 와중에 크게 누락된 것이 없어 보이니 500이나 154나 "질적"으로는 똑같을지 몰라도, 분명 "양적"으로는 다른 숫자이니 말이다.

아니, 나는 차라리 이제부터는 다산의 위대성, 혹은 탁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굳이 "500권"이니 "154권"이니 하는 "숫자 놀음"이 없어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다산이 위대하다면 그것은 그가 단순히 "방대한 저서"를 남겨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특출한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단지 책 권수로 따지자면 최남선이 <조선상식문답>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역사상 최대는 다산이 아니라 혜강 최한기라고 할 수 있다.

  • 그 최대한 것은 최한기(혜강)의 <명남루집> 1000권이니, 아마 이것이 진역 저술상에 있는 최고기록이요, 또 신구학을 강통한 그 내용도 퍽 재미있는 것이지마는, 다만 그 대부분이 미간으로 있고, 원본조차 사방에 산재하여 장차 어떻게 될 지 모르는 상태에 있음은 진실로 딱한 일입니다.

현재 전하지 않는 책이야 500권이건 1000권이건 무슨 소용이 있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혜강 최한기의 경우는 오늘날 가장 각광받는 고전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비록 <기측체의>나 <인정> 같은 책의 권수나 분량은 다산이나 다른 유명 사상가들에 비해 적지만, 그의 사고방식이나 사상체계 자체가 무척이나 독특하기 때문이다. 결국 최한기야말로 중요한 것은 "양"이 아니라 "질"임을 오히려 역설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인물은 아닐까? 물론 그의 1000권 저술이 모두 전해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마는, 원래 말이 많아지면 허언도 많아지는 법이니, 그의 저술 모두가 일정 수준 이상을 성취했으리라는 보장은 또 없는 것이다.

그럼 여기서 한 번, 어디까지나 "심심풀이"로 다산의 "500권" 저술이 요즘 기준으로 하면 대략 "단행본 몇 권"쯤 될런지 계산해 보자. 우선 위의 인용문 가운데 <여유당전서>본 154권 가운데 "시문집"에 해당하는 22권은 현재 민족문화추진회에서 <다산시문집>이란 이름으로 총10권(색인 1권 포함)으로 간행되어 있다. 그 책의 해제에서는 거기 번역된 분량이 <여유당전서>의 약 7분의 1에 해당한다고 했으니, 단순계산을 해 보면 <여유당전서> 전체의 국역본은 색인까지 제대로 갖추었다고 상정해도 요즘 단행본으로 70권 가량 될 것이다. 그리고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나온 492권을 기준으로 해 볼때, 우선 "일표이서"에 해당하는 <경세유표> 48권, <목민심서> 48권, <흠흠신서> 30권은 원문까지 모두 포함한 상태의 번역본이 현재 각각 3권, 6권, 3권으로 출간되어 있다. 결국 "한문본 126권"이 "국역본 12권"에 해당하는 셈이니, 여기서 대략 네 배 가량 되는 492권의 국역본은 약 50여 권에 달하지 않을까 싶다. 결국 요즘 신국판 단행본 기준으로 보아도 최소한 50-10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이며, 이는 솔직히 "만화가"나 "무협지" 혹은 "판타지" 작가들을 제외하면 웬만한 요즘 현대 저술가들조차도 따라잡기 힘든 분량이 아닐까 싶다. 물론 그 막대한 분량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바로 다산의 "개성"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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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기인 > 목숨을 걸지 않는 한 결단은 없다.
전태일 평전 - 개정판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2001년 9월
절판


목숨을 걸지 않는 한 결단은 없다.
한 인간이 아무리 고양된 감정으로, 아무리 절절한 언어로 투쟁을 결의한다 해도 그가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라고 말하지 아니하는 한 그것은 이미 완전한 결단이 아니다. 그것은 언젠가는 가혹한 현실의 벽, 생사의 벽에 부딪혀 힘없이 허물어지고야 말 헛맹세이다.
목숨을 걸지 않는 '투쟁'은 거짓이다. 그것은 소리치는 양심의 아픔을 일시적으로 달래는 자기 위안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삶의 문제는 결국 죽음의 문제이며, 죽음의 문제는 결국 삶의 문제이다. 비인간의 삶에 미련을 갖는 자는 결코 인간으로서 죽을 수 없고, 따라서 결코 인간으로서 살 수 없다. 전태일이 죽음을 각오한 투쟁을 결단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비인간의 삶에 대한 온갖 미련을 떨쳐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242쪽

그가 이 사회의 밑바닥에서 겪고 보아온 비인간의 삶은 너무나도 '지긋지긋하고 답답한' 것이었다. 그것을 철저하게 인식하였을 때 그는 그것을 철저하게 증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비인간적인 현실의 '덩어리에 뭉쳐지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외쳤다. 그는 "죽음 그 자체를 두려워하기 전에 (비인간의) 삶 그 자체에 환멸을 느낀다"고 고백하였다. 그리고는 아주 단순하게, 아주 분명하게 "나를 버리고, 날르 죽이고 가마"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는 그러기에 마침내 모든 것을 버릴 수가 있었다. 그가 끝내 버릴 수 없었던 것은, 끝내 버려서는 안된다고 확인하였던 것은 그의 마음의 고향, 저 인간시장의 현장에서 학대받고 수모당하고 짓밟혀 파괴되고 있는 인간성을 위한 투쟁의 길뿐이었다.
이제 마음의 준비는 끝났다.
오직 거짓이 없는 그 순간을 위하여 아무 두려움도 남지 않는 그 완전한 순간을 위하여, 그는 이제 돌아가야 한다. 여기서 전태일 사상은 완결되었다.
남은 것은 오직 행동뿐. 불꽃같은 행동뿐. 한 병약한 인간이 어떠한 굴종의 성채도 파괴해버리는 저 처절한 분노와 사랑의 불길을 여러분은 곧 보게 될 것이다.-242-243쪽

전태일 열사. 분신으로서, 자신의 생명을 태워버림으로서, 사회에 목소리를 내려 했던 그. 점차 큰 목소리로 울려퍼졌던.
그가 분신한 1970년, 그리고 1980년만의 문제일까. 노동운동이 집단 이기주의로 몰아지고, 현재 FTA 협상으로 전국적 시위가 일어나고 있는 지금.
한 노동자가 자신의 목숨과 발언권을 맞바꾸는 사태는 10년, 20년 전에 있었던 '과거 사건'이 아니다. 불과 얼마 전에도, 이들은 자신의 목숨을 발언권과 맞바꾸었지만, 큰 반향도 일으키지 못하고 묻혀지고 말았다.
자신의 생을 바쳐가면서까지, 말하고자 했던 그. 세상의 무심함을 깨뜨리고 돌격하고 싶어했던 그. 36년전 전태일 열사, 그리고 오늘날의 열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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