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송어낚시
- 리차드 브라우티건 지음, 김성곤 옮김 / 비채 / ★★★★

진짜 드문 경우인데, 이 책은 두 번 읽었다. 책을 덮어도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종잡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친절한(?) 해설을 읽으니 더 헷갈린다. "강렬한 반체제 정신, 기계주의와 물질주의 비판, 목가적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허무감"이라니, 진짜? 내가 읽은 책은 모호한데, 해설이 너무 강렬하다. 내가 잘못 읽은걸까 싶다가도 석연치 않은 의구심이 든다. 분명 세상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책이 있고, 그럴 때 해설을 보면 숨겨진 맥락을 찾아가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 책은 뭔가 해설이 해설이라기보다 "이 책은 이런 의미야"라고 정의해 버리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읽었다.

다시 읽어도 여전히 모호한 것은 마찬가지다. 다만, 이 모호함에 숨겨진 어떤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모호함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게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든다. 책에 달린 해설도 하나의 가능한 해석이다. 하지만, 그건 책이 쓰여진 시대의 시대정신과 어긋난다. 60년대 히피들의 삶을 반자본주의 전선의 투쟁으로 해석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오류다. 히피 문화는 그들의 삶의 방식 그 자체로서의 목적이었지, 다른 어떤 목적을 위한 수단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 책도 마찬가지 아닐까.

때문에, 책이 쓰여진 시대(1960년대)를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겠다. 말랑말랑하게 바뀐 한글어판의 표지는 어차피 책의 내용과는 전혀 다르니까 제쳐두고, 원래 책의 표지인 아래 사진을 보자.(책 중간중간 저자는 이 사진을 참조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중요한 사진임)

 


아무래도 이 사진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건 뒤편의 벤자민 프랭크린 동상이 상징하는게 어쩌고 저쩌고가 아니라 저자 브라우티건(과 그 옆의 여자)의 모습이다. 한 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이 사람들을 오늘의 기준으로 재단하자면, 한마디로 "괴짜"들이다. 하지만 몇 명이 저러고 다니면 괴짜 취급을 받고 말겠지만, 많은 사람이 저렇게 하고 다니고 있었다면 그건 문화가 된다.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건 바로 저 문화, 정확히 말하자면 반문화(counter culture)의 정신이다.

반문화의 시발점은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대전은 인류에게 커다란 재앙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다른 문화가 뒤섞이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특히 미국의 물질적인 산업문명 속에서 성장한 미국의 젊은이들은 전쟁 도중에 마주친 구세계(유럽과 아프리카)의 문화에서 크게 정신적인 고양을 받는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미국으로 돌아온 이들은 국비 지원으로(참전의 대가였다) 대학에 대거 진학했고, 이들이 새로운 지식인 계층으로 떠오르면서 대학가를 중심으로 정신적인 가치를 추구하는 히피 문화가 형성되게 된다.

이와 함께, 다른 한쪽에서는 흑인들의 민권운동이 그 세력을 키워가며 미국 사회를 흔들고 있었다. 이 역시 전쟁의 영향이 컸는데, 지금껏 2급 시민 취급을 감내해왔던 흑인들이 자신들도 전쟁에서 똑같이 피를 흘렸음을 강조하며 정당한 권리를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이 시기를 다룬 <포레스트 검프>와 같은 영화를 보면 반전운동 진영에 군복을 입은 흑인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군복은 이들에게 동등한 시민권의 상징 같은게 아니었을까 싶다.) 히피 문화는 민권운동의 든든한 동반자였다. 기존 질서가 강요하는 권위와 억압을 무너뜨리고, 개인의 진정한 자유를 추구한다는 대의를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비록 흑인들은 실재하는 제도와 싸워야 했기 때문에 보다 정치적이고 물리적인 싸움을 벌일 수밖에 없었고, (대부분 백인이었던)히피들은 고정관념이나 관습을 무시하고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다분히 개인적이고 부담 없는(?) 싸움을 벌였다는 차이가 있었지만.

<미국의 송어낚시>는 바로 이 시대, 그 중에서도 히피 문화의 산물이었다. 모든 곳에서 기성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자유를 갈구하던 그 시대에, 문학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미에의 집착, 틀에 박힌 서사 형식, 기승전결이 분명한 이야기 구조 등은 무너뜨려야 할 또 하나의 권위였을 것이다. <미국의 송어낚시>는 바로 그 교본이라고 할 수 있다. 모호하지만 읽는 사람이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는 객체들("미국의 송어낚시"는 책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가진다)과 뒤죽박죽의 서사구조들은 기존 문학의 관점에서보면 말도 안되는 글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 책은 당시의 젊은이들에게 강하게 어필했다. 매력적인 냉소와 버무려진 이 새로운 스타일은 요즘 말로 치자면 "cool~" 하다고 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 책에 달린 역자서문과 각주, 해설을 읽지 말라고 권하고 싶다. 역자가 책을 해석하는 방식은 책의 시대적 맥락을 무시하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그것도 전통적인 문학의 독법으로 의미를 부여한다. 중간중간 모르는 이름이나 지명이 나오면 차라리 인터넷을 찾아보는게 좋다. 각주로 달린 역자의 친절한(?) 설명은 오히려 독자의 자유로운 독해를 가로막는다. 게다가, "사라진 꿈과 희망을 찾기 위해 떠나는 송어낚시 여행"과 같이 말랑말랑한 문구와 표지그림은 거의 "낚시질"에 가깝다. 여기에 속아 책을 산 독자들이 얼마나 많을까. 송어 하천을 피트 단위로 잘라서 쌓아놓고 파는 책 속의 "클리브랜드 폐선장" 에피소드가 나에게 연상시킨건 바로 출판사의 이 기만적인 마케팅이었다.

"이 포스트모던한 소설책 한 권을 사시면 강렬한 반체제 정신, 기계주의와 물질주의 비판, 목가적 꿈을 잃어버린 현대인의 허무감을 맛보실 수 있습니다"

얼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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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1-02-08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중간에 읽다가 말았어요. 그 모호함을 즐기려고 노력했지만, 도저히 안 되더라구요.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혹은 제가 좀 더 쿨해진다면 의미 따위 상관없이 다시 읽어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렇지만 '정액으로 만든 담요'(맞나?) 이 부분은 참 멋졌어요.

turnleft 2011-02-09 03:36   좋아요 0 | URL
뭐 모든 책을 꼭 다 읽을 필요는 없잖아요? 세상에 좋은 책이 얼마나 많은데 굳이 한 권을 잡고 낑낑댈 필요는 없죠.

근데, '정액으로 만든 담요' 같은게 있었나요?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온천 장면 말하는건가?

다락방 2011-02-09 08:38   좋아요 0 | URL
정액으로 만든 담요 같은 부분이 나오나요? 정말? 근데 왜 제가 기억못하죠? ㅎㅎ

Arch 2011-02-09 10:25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온천! 역시 두번쯤 읽어야 기억을 하지, 이건 인용의 다락방도 기억 못한거잖아요. 물론 제가 정확하게 기억한 것 같진 않지만

turnleft 2011-02-09 11:00   좋아요 0 | URL
흐흐, 역시 온천 장면이었군요.

근데, "인용의 다락방" 멋지다. 나도 저런 별명 하나 지어줘요~

Arch 2011-02-11 16:37   좋아요 0 | URL
음... 알겠어요!

다락방 2011-02-08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모호한게 나 뿐만은 아니었군요!
저는 이상하게 뭐랄까, 어려운 용어가 나오는것도 아닌것 같은데 확 이해는 안되고, 그런데 읽다보니 좋기는 하고, 그런데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고 그랬거든요. ㅎㅎ
다들 그런거구나. 으흐흐흐

turnleft 2011-02-09 03:37   좋아요 0 | URL
사실, 뭔지 모르겠는데 좋다..가 당시 책의 인기를 설명해주는 가장 적절한 표현 같은데요 ㅎㅎ

무해한모리군 2011-02-08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도 아치님과 같아요.. 중간쯤 읽다 말았는데 두번!!! 읽으시다니..

turnleft 2011-02-09 03:37   좋아요 0 | URL
오기였습니다 -_-
 



시간과 공간의 문화사 : 1880 ~ 1918
- 스티븐 컨 지음, 박성관 옮김 / 휴머니스트 / ★★★★

테크놀로지의 발전은 항상 인류 역사의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 굳이 역사유물론까지 갈 필요도 없이, 초등학교에서 배우는 선사시대 역사 구분이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 였음을 떠올려보면 된다. 기술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기술 결정론으로 귀결되서는 안되겠지만, 기술은 생산의 양식을 바꿔놓고, 그러한 생산양식의 변화가 사회 구조의 변화를 이끌어냈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마찬가지의 시대 구분을 오늘날까지 확장시켜보자. 오늘날의 생산양식을 규정하는 가장 핵심적인 테크놀로지는 열기관과 전기/전자 기술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이니 휴대전화니 최근 급격한 기술 발전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것 같지만, 그것도 근본적으로 보면 전기/전자 기술이라는 패러다임의 한 가지일 뿐이다. 여전히 우리는 화석연료를 태우는 자동차와 비행기를 타고(열기관), 확장된 모르스 부호로 인터넷을 즐기고 있을 따름이다. 다시 말해, 진짜 기술혁명은 19세기 말에 일어났고, 우리는 아직 그 시대(뭐라고 불라야 할지 모르겠지만)의 연장선상에 살고 있다.

1880~1918년이라는 시기는 그래서 중요하다. 산업혁명의 결과 산업 자본주의가 정착하면서 사회 조직 전반이 자본주의적으로 재편되었고, 그에 따라 우리의 의식 세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들이 그 때의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때문에, 이 시기의 문화에는 이러한 변화의 충격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는데, 이 책이 문화사를 통해 읽어내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이 시대의 의식세계를 형성한 근본적인 충격 말이다.

게다가, 이 시기의 기술혁명은 과거와는 질적으로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과거의 기술이 1차적으로는 지배계급에 의해 향유되고, 그 후에야 차츰 사회 전반으로 퍼져나간 반면(예컨데, 철의 사용은 지배계급의 전쟁무기로 우선적으로 활용되고, 시간이 상당히 흐른 후에야 농사도구 등으로 확산되었다), 19세기 말에 촉발된 기술혁명은 다수 대중을 직접적으로 대상으로 한다는 점이 그것이다. 이른바 테크놀로지의 대중화, 민주화라고 할 수 있는데, 덕분에 기술혁명의 충격은 더욱 급속도로 사회 전체를 휩쓸었고 사람들의 의식 전반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기에 이른다.

제목이 말해주고 있듯이, 저자는 이 시기의 의식상의 변화를 시간감각과 공간감각의 변화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엮어낸다. 열기관으로 촉발된 이동 수단의 혁명적 발달은 세계를 하나의 공간으로 통합시켰고, 통신의 발달은 세계 여러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동시적 사건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편리함? 2시간 걸리던 대전까지 1시간에 갈 수 있게 된 것은 분명 편리함이다. 하지만 일주일 걸리던 거리가 반나절로 줄어든다면 그건 단순한 편리함을 넘어선다. 편지를 써서 보내고, 그 답장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사람에게 전화로 상대방과 동시에 대화할 수 있게 되는건 정말로, 편리함 이라는 말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충격적인 변화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세계"의 확장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세계"는 자기가 태어나서 자란 고장으로 한정되어 있었으며, 그의 의식세계 또한 이 경계를 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 전 지구가 마음만 먹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로 축소되고("80일간의 세계 일주"는 이 시대의 소설이다), 움직이지 않고도 전세계의 소식들을 거의 동시적으로 전해들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전에도 저 언덕 너머에 더 큰 세계가 펼쳐져 있다는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관념 속에서만 존재하던 세계가 내가 직접 가 볼 수 있고, 혹은 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다시 말해 통제가능한 "세계"가 된 것이다. 이제 서구문명은 바야흐로 전지구적 존재로 확장되기에 이른다.

그래서, 서구 문명은 미래에 대한 장미빛 전망에 도취되어 있었다. 새로운 기술은 세계를 서구 문명의 손바닥 안에 가져다 주었고, 그것은 새로운 번영과 평화(그들은 더 넓은 땅에서는 자기들이 적당히 서로 만족하며 살 줄 알았다)를 약속하는 듯했다. 물론 몇몇 날카로운 혜안을 지닌 이들(예컨데, 조셉 콘라드의 "암흑의 핵심" 같은 책에서 드러나듯)은 제국주의의 불길한 기운에 경고를 보내기도 했지만, 그런 우려조차도 이내 낙관론 속에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채 덮여버리고 만다. 공간의 확장으로 점령할 식민지들이 무한정(?) 늘어났기 때문에 유럽 열강들끼리 서로 싸울 필요도 없을 것이며, 설혹 오해로 인한 갈등이 생기더라도 발달된 통신기술을 사용하여 갈등을 재빨리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기술은 파국을 막기보다는 가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발달된 이동수단 덕에 열강들은 서로의 공격 능력에 대해 신경과민 상태에 빠져들어 재빠른 선제공격만이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기 시작했다. 동시 통신은 오히려 연락 과정에서의 시간지연이 해주었던 완충 역할을 제거함으로써 서로간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결국 사소한 실수나 뜻하지 않은 오해들마저 바로잡을 틈도 없이 사태의 흐름에 가속도를 더하기 시작하면서, 유럽은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며 전쟁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인간은 세계를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지만, 정작 그 세계를 감당하지 못하고 혼돈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암흑의 핵심"에서 카츠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기술의 발전에 힘입은 더 강력하고 파괴적인 무기들과, 더 나은 기술로 세계를 통제할 수 있다는 잘못된 믿음도 함께.

저자는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이 시기의 다양한 문화 영역들을 훝어, 거기에 반영된 사람들의 의식상의 변화를 읽어낸다. 하지만 문화는 학술 분야처럼 명시적으로 존재하는 공리들에 따라 전개되는 논리적인 영역이 아닌지라, 그 안에서 일관된 흐름을 잡아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다양한 문화 영역들이 서로간의 영향을 명시적으로 드러내 인정할리도 없기에, 그 안에서 공통점들을 읽어내는 작업은 상당한 정도의 유추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자칫 비약이 되기 쉬운 이 유추들이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건, 풍부한 사료들과 과감하면서도 오버하지 않는 저자의 균형감있는 논지 전개 덕택이다. 또한, 중요한 사회학적 문제를 다루면서도, 다양한 문화 영역들의 기념비적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는 점은 이 책의 더할 나위할 바 없는 장점이 된다. 근래 보기 드문 역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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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

- 나카지마 아츠시 지음 / 명진숙 옮김 / 이철수 그림 / 신영복 추천.감역 / 다섯수레 / ★★★★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타인을 상처입히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남에게 지기 싫어서 온갖 궤변을 끌어다 붙이고 인신공격을 일삼는 것은 그나마 나은 축에 속한다. 그보다 더 위험한건 정의 혹은 진리라는 이름 하에 남을 심판하려 드는 자들이다. 상대의 잘못이나 결점을 핑계삼아 그들을 몰아붙이고, 종국에는 굴복시켜 그 위에 올라서려는 사람들이 있다. 왜? 정의 구현을 위해서? 아니다. 그들은 정의의 가면을 쓰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낫다라는, 우월하다라는 알량한 자부심을 느끼려는 것 뿐이다. 노력하지 않고 손쉽게. 타인의 상처를 당신의 영광으로 삼아.

중요한건 "왜, 내 말이 틀렸어?" 이게 아니다. 당신의 말은 옳다. 내가 묻고 싶은건, 왜 "당신이" 그 정의의 칼을 휘두르고 있는가이다. 내게는 칼날 아래 무릎 꿇고 있는 그들 죄인보다, 당신의 눈에 번들거리는 자아도취의 기운이 더 위험스럽게 느껴진다. 하나 묻자. 세상이 이 모양인건 자기성찰의 부족해서인가, 아니면 단죄가 부족해서인가. 안다. 성찰이라는게 강요할 수는 없는 법, 부득불 차선책으로 법이 존재하고 법의 단죄가 존재한다. 하지만, 남에게 강요할 수 없다면, 왜 먼저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지 않을까? 넘쳐나는 블로그 글들 속에서 남의 허물이 아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블로그를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는건 하나의 사회적 병리증상으로 봐야하는게 아닐까?

어느날 호랑이로 변한 <산월기(山月記)>의 이징은 자신이 호랑이로 변한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나는 시(詩)로 명성을 얻으려 하면서도 스스로 스승을 찾아가려고도, 친구들과 어울려 절차탁마(切磋琢磨)에 힘쓰려고도 하지 않았다네. 그렇다고 속인들과 어울려 잘 지냈는가 하면 그렇지도 못했다네. (중략) 내가 구슬이 아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애써 노력해 닦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또 내가 구슬임을 어느 정도 믿었기 때문에 평범한 인간들과 어울리지도 못했던 것이라네.
         
이징은 자신의 이 겁많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주변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렇게 마음 속에 맹수를 키우던 그는 결국 겉모습이 속마음과 어울리도록 변한 것이다. 호랑이는 상처 입은 마음이 괴로워 울부짖지만, 아무도 그의 상처 입은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그저 두려움에 떨며 그를 멀리할 뿐이다.

저마다의 가슴 속에 살고 있는 이 맹수를 떨쳐내지 않고는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만 입히고 상처를 입을 수밖에 없다. 당신이 휘두르는 정의의 칼날은 상대만 상처입히는게 아니다. 그런 자신 역시 그저 외로운 호랑이일 뿐인 것을. 굴 속에 웅크려 잠자는 신세이면서도 자신의 시집이 사람들에게 읽히는 꿈을 꾸는 호랑이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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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관함에 넣어둔지 오래 된 책들 중에서 내가 왜 이 책을 보관해 뒀는지 기억이 안 나는 책들이 있다. 이 책이 딱 그랬는데, 뭐 어디선가 좋은 소개글을 봤기 때문에 넣어뒀겠지 싶어 지난번 책 주문할 때 같이 주문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존재감이 적어서 다른 책들에 밀려 책장 구석에서 한동안 묻혀 있었다가 문득 지난 주말 나에게 간택된 이유는 단 하나, 두께가 얇다는 것. 한동안 꽤 묵직한 책을 붙잡고 씨름을 했더니 주말 동안 좀 가볍게 머리를 식히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표지를 장식하고 있던 이철수 화백의 담백한 그림도 이 선택에 한 몫 했다.

표지의 그림이 실은 고양이가 아니라 호랑이였다는 사실도 충격적이었지만(^^;), 그보다는 짧은 글에 담긴 결코 가볍지 않은 이야기가 나른하게 흐트러져 있던 내 마음을 화들짝 놀라게했다. 책머리의 신영복 선생님의 추천글부터 심상치가 않았는데, 다소 과잉해설의 혐의가 있어서 읽다 말고 본문으로 바로 뛰어넘긴 했어도 가볍게 읽어서는 안 될 책이라는 암시를 주는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어렵지 않은 글임에도 대화 하나하나 곱씹어야 할 정도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이야기들이 나를 맞이했다.

일본 작가의 글이지만, 이 책에 실린 4편의 이야기는 각기 중국 고전 혹은 역사 속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이야기의 얼개나 사건 자체는 이미 작가의 창작물이 아닌 바, 작가가 온전히 심혈을 기울이는건 캐릭터 자체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일이다. 우화의 교훈이나 장대한 서사에 매몰되었던 인물에 조명을 비추니, 드러나는건 인간의 연약하면서도 강인한 내면이다. 삶의 격랑 속에서 끊임없이 번뇌하고 반추하는 인간. 따라서 이들 각기 다른 중/단편에서 일관된 주제는 "인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직접 지은 제목은 아니지만, 책의 제목 <역사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은 역사라는 틀 안에서 화석화된 인물들을 되살려낸다는 뜻에서 이 4편의 이야기들을 잘 아우르는 제목이라 하겠다.

앞서 언급한 <산월기>의 이징과 <명인전>의 기창, <제자>의 자로, <이능>의 이능, 사마천 등의 인물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자기 성찰의 힘이다. 외부에서 원인을 찾기보다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행동의 원인을 찾고자 하면서, 이들 인물들은 삶의 위기를 한 단계 더 높은 자아(自我)로 나아가는 기회로 만든다. 그 인물들의 고뇌를 함께 느끼며 같이 고민하다보면 자연스럽게 나는 어떠한가라는 질문에 다다르게 된다. 나른한 주말,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이 인물들을 거울 삼아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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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ry Potter and the Deathly Hallows

- Joan K. Rowling 지음 / Scholastic / ★★★★★

여기까지 오는데 10년이 걸렸다. 책 나오기를 목놓아 기다리는 열혈 독자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꾸준히 새 책들 챙겨보며 해리와 그 친구들의 모험을 뒤쫓아 왔는데 그것도 이제 끝이라니 아쉽기는 하다. 스타워즈도 끝나고, 반지의 제왕도 끝나고, 매트리스도 끝나고, 이젠 해리포터마저 끝나버렸다. 한동안 시리즈물 기다리는게 유행처럼 연례 행사가 되곤 했는데, 이젠 딱히 뭘 기다릴만한게 안 보인다. 유행이 지났나.

7권은 아마도 지금까지의 시리즈 중에서 가장 박진감 넘치는 책이 아닐까 싶다. 이전에는 호그와트에서의 학교 생활이라는 축이 이야기 흐름에 여유를 더한 반면, 마지막 권에서는 계속되는 추적과 탈출이 롤러코스터처럼 이어지며 시종 팽팽한 긴장감을 놓지 않는다. 덕분에 읽다 보면 조금 지치는 감이 없지는 않지만, 마지막 권이니 이 정도는 화끈하게 가 줘야 아쉬움이 없을 것 같기도 하다. 하긴 그동안 등장했던 수많은 인물들에게 나름의 완결성을 부여하려면 그에 걸맞는 많은 사건들이 필요하기도 하겠다. 약간 무리다 싶은 설정도 있지만, 뭐 크게 불평할 수준은 아닌 것 같다. 대체적으로 무난한 결말이라는 평에 나도 동의.

아는 분이 책을 읽고 있는 날 보더니 해리 포터 시리즈가 전세계적으로 기록적인 흥행을 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물었다. 불후의 명작 이라서.. 라는 생각은 전혀 안 들고, 솔직히 어떤 문학적 성취를 말할 소설은 아니라고 본다. 해리 포터 시리즈가 계속 흥행에 성공하긴 했지만, 사실 첫 권이 사람들에게 줬던 신선한 충격을 능가하는 무엇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작가는 꾸준히 그 수준을 유지하는데 성공했고, 그로 인해 한 번 마법의 세계에 발을 담근 사람들이 딱히 해리 포터 시리즈를 외면할 이유가 없이 지금까지 끌고 온게 아닐까 싶다. 상상의 세계를 다룬다는건 사람들에게 그만큼 상상할 여지를 남겨주기 때문에, 이 상상력을 중심으로 자기 증식하는 팬덤이 존재한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상상력. 사실 나는 이 이유 하나만으로도 해리 포터 시리즈의 강력한 지지자 중 하나를 자처한다. 책을 읽다 보면 작가가 사람들이 살아가다가 "아.. 이런게 있음 좋지 않을까"라고 상상하곤 하는 것들을 적절하게 마법의 세계에서 짚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에게건 어른에게건 상상력은 자신의 욕구를 발견해가는 과정이다. "그런게 어딨어", "그런건 불가능해"와 같은 반응은 일종의 자기 검열과 같이 작동해서 자신의 욕구를 스스로 은폐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상상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아이에게도 해리 포터와 같은 판타지 소설을 읽게 할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이다.

Seattle Times 에 실린 아래 만평이 해리 포터 시리즈를 끝내는 내 심정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것 같다. Goodbye Harry, Hermione, R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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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1-02-07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해리 포터의 가치에 대해 쓰신 '상상력...'으로 시작하는 저 부분 읽으면서 아, 그렇겠구나, 깨우치고 갑니다.

turnleft 2011-02-08 03:35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상상력이 풍부해서 그런게 아니라, 거꾸로 저런 식으로 스스로의 상상력을 억압해 온 타입인지라..;;
 

어둠의 속도
- 엘리자베스 문 지음, 정소연 옮김 / 북스피어 / ★★★★★ 

"자폐"라는 증상에 대한 내 최초의 경험은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레인맨] 에서였다. 이 영화에서 더스틴 호프만은 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애송이였던 톰 크루즈와 함께 출연해 연기력의 차이라는게 어떤건지 확실히 보여주었는데, 그 연기가 인상적이었던만큼 자폐증에 대한 나의 인식도 그 선에서 멈춰버리고 말았던 것 같다. 특정 분야에서 놀라운 집중력과 천재성을 보이는 정신지체인.. 이라는 이미지로 말이다. 이 이미지는 영화 [큐브]에서 다시 한 번 확인되었는데, 이게 자폐인에 대한 내 경험의 전부인 셈이다. 실제로 자폐인을 만난 적이 없으니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다는게 사실 정확한 표현이다.

때문에, 대부분 자폐인 루 애런데일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이 책을 읽으며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야 기존의 자폐인에 대한 기존 이미지와 일치할지언정, 루의 목소리로 서술되는 내면은 오히려 '정상'인들보다 더 많은, 더 깊은 고민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자폐인들의 내면은 저럴까? 모른다. 아직 아무도 자폐인의 머리 속에 들어가 본 적도 없고, 자폐인이 스스로의 의식세계를 서술한 적도 없기 때문이다.

저자 역시 책 말미의 인터뷰에서 루가 오늘날의 전형적인 자폐인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고 밝힌다. 이 책은 기본적으로 근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SF 소설이고, 책에 등장하는 자폐인들은 어린 시절 치료(아마도 현재의 기술로는 불가능한)를 통해 어느 정도 사회적 적응을 할 수 있게 된 사람들로 설정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 책에서 말하는 자폐인들은 허구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책에 대해 자폐인들을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묘사해 또 다른 편견을 조장한다는 비판이 있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이러한 비판에 당당할 수 있는 것은 그녀가 바로 자폐아동을 입양해 20년이 넘도록 키워온 부모의 입장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말처럼 "어떤 자폐아의 부모도 자폐증을 낭만적으로 말하거나, 자폐증이 아이와 아이가 살아가는 사회에 얹는 부담을 축소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녀는 자폐인을 괴물(당황하면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대고, 벽에 머리를 부딛혀 자해를 하는)처럼 묘사하는 기존의 시각을 바꾸고 싶어한다. 그녀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폐인도 하나의 완전한 인간이고,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욕망과 감정을 가진 존재라는 단순한 사실이다. 저자가 자폐인 아이를 키우면서 교감해 온 경험은 이를 증명한다. 그리고 이를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자폐인의 내면의 시각을 취함으로써 그들의 외견상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내적인 원리와 설명을 부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어둠의 속도]가 자폐 자체를 설명하기 위한 책은 아니다. 자폐인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는 것은 자폐인의 내면을 보여준다는 효과도 있지만, 동시에 자폐인의 눈으로 바라보는 대상, 즉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여기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일종의 소격효과, 낯설게보기 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가 흔히 '정상'이라고 분류하는 사람의 행동들이 과연 우리가 생각하는만큼 '정상'적인가를 되돌아보게 된다. 예컨데, 자신의 불행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려버리는 돈의 행동은 극도로 방어적이 되어 모든 것을 우선 자신이 무언가 잘못한게 아닐까 고민하는 자폐인들과 대비가 되는데, 과연 여기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정당한가를 되묻지 않을 수 없다.

정상과 비정상을 구분 짓는 담론의 권력은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이 소설 속에서도 뇌과학의 이름을 빌어 자폐인들을 끊임없이 "비정상"으로 규정하는 의사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담론에 기대어 자신들을 정상으로, 그리고 그들을 비정상으로 구분짓는다. 하지만 자폐는 루의 한 특징일 뿐이다. 담론에의 의존이 심한 사람일수록 루라는 존재의 풍부한 스펙트럼을 발견하지 못하고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볼 뿐이다. 우리가 이성이라고 부르는 것, 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에는 항상 마찬가지의 함정이 존재한다. 우리는 상대를 항상 우리가 아는 만큼만,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보고 싶은 만큼만 재단하여 보기 때문이다.

빛은 앎, 어둠은 무지(無知)라는 상징은 다소 구태의연하지만, 저자는 이 상징을 통해 우리의 무지함을 드러내고자 한다.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따지자면 어둠의 속도라는 것은 non-sense 이다. 어둠은 존재가 아니라 단지 빛의 부재요, 따라서 빛의 속도는 있을지언정 어둠, 존재하지 않는 것의 속도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빛이 비추지 않는 곳에 어둠은 이미 존재한다. 우리가 아는 것은 오직 빛이 비추어진 부분과 그 순간일 뿐, 우리는 언제나 무지라는 조건 속에서 앎을 찾아 나아가는 존재일 뿐이다. 어둠의 속도가 빛의 속도보다 빠르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길 때, 우리가 가진 빛에 자만하기보다 더 큰 어둠 앞에 겸손할 수 있지 않을까.

루가 성공 여부가 불확실한 자폐 치료를 받기로 결정한건 그 때문일거다. 그는 자폐인으로서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 그렇기에 그저 '정상'이 되고 싶은 갈망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치료가 성공해 더 이상 자폐인이 아닐 때, 그 때의 루는 더 이상 예전의 루가 아닐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치료를 택한다. 그는 우주로 나가고 싶었다. 더 많은 세계를 알고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다. 루는 항상 어둠이 더 빠르다는걸 알고 있었다. 자신이 현재의 자신에 만족하려 할 때, 어둠은 언제나 빛보다 더 빠른 속도로 나아갈 것이라는걸 알았던 것이다. 그를 이끈건 바로 어둠의 속도였다.

잊지 말자. 비록 내 눈은 빛만을 느낄지라도, 어둠은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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