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도시들
-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 

쿠빌라이 칸이 묻는다. 나의 제국은 실재하는가?

조금 어울리지 않지만, 나는 문득 어린 시절 TV에서 종종 보았던 도날드 덕 만화가 떠올렸다. 금고에 가득 쌓인 금화 속을 헤엄치는 도날드 덕의 모습은 쿠빌라이 칸의 고뇌와 정반대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도날드 덕의 소유는 즉물적이다. 그의 소유는 숫자나 상징이 아닌 금고 속의 금화들로 실체화되어 있고, 도날드 덕은 그 속을 헤엄치며 금화 하나하나를 (문자 그대로) 느낀다. 반면, 쿠빌라이 칸은 광대한 제국을 소유하고 있지만, 정작 칸 자신은 그 제국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다. 자신이 보는 것은 오직 자신이 살고 있는 제국의 수도와 방문해 본 몇몇 도시들일 뿐, 제국은 지도상의 표식과 한번도 가 본 적도 없는 도시들에서 보내오는 조공들로만 확인될 뿐이다. 그렇다면 칸은 자신의 제국이 실재한다는 것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인식에 대한 철학적 질문은 언제나 우리를 당혹케 하지만, 그 중 가장 고약한 것은 인식에 대한 질문은 곧 인식하는 자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존재는 오롯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과의 관계를 통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제국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은, 칸이 스스로가 칸임을 확신할 수 없음을 뜻한다. 칸의 고민도 여기에 맞닿아 있었을 것이다. 하여, 칸이 마르코 폴로에게 그대가 여행한 도시의 모습을 이야기해 달라고 했을 때, 칸이 듣고 싶었던 것은 애초에 아름답거나 신기한 도시의 풍광이 아니었으리라. 칸의 사유는 이미 소유의 굴레를 넘어 자아와 인생, 그리고 세계를 넘나들며 존재의 의미를 탐색하고 있지 않았을까.

이에 화답하여 마르코 폴로가 들려주는 도시 이야기도, 따라서 제국의 도시에 대한 기행문이 아니다. 이야기 속의 도시들은 과연 실제 제국의 도시들이기는 할까? 모른다. 그러나, 이 도시들은 우리에게 낯설면서도 친숙하다. 우리는 이 도시들에 가 본 적도, 심지어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동시에 마르코 폴로가, 아니 마르코 폴로의 입을 빌린 작가가 들려주는 도시들의 이야기는 내가 살고 있는 바로 이 도시의 이야기라고 해도 틀릴 것이 없어 보인다. 모든 도시란 결국 인간의 거주지이며, 인간이란 존재의 근본적 문제들에 대한 응답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다. 책 속의 도시들이 기억, 욕망, 기호, 교환, 하늘, 죽음 등의 키워드들로 묶여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조금 과장을 섞자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처럼 이 짤막짤막한 하나하나의 도시 이야기들은 우리 인생의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날 것 그대로의 현실에서는 은폐되고 모호해져 잘 보이지 않는 삶의 면면들은,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찬 이 세계에서는 보다 날카롭게, 그러나 훨씬 풍부하게 드러난다. 그러니, 어찌 이 아름다운 언어와 심오한 상징들로 가득한 이 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편 한편의 이야기들은 짧지만, 그 여운은 마치 향기처럼 오래도록 남는다.

네루다가 우편배달부 마리오에게 가르쳤듯, 시는 메타포이다. 이 책 [보이지 않는 도시들]도 한 편의 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간에 대한 오해
- 스티븐 제이 굴드 지음, 김동광 옮김 / 사회평론 / ★★★★★ 

성폭력에 관련한 토론을 보다보면, 가해 남성들이 성욕을 억제 못하는 까닭을 진화론적 방식으로 설명하려는 주장을 종종 접하게 된다. 과거, 인류가 아직 생존을 위해 투쟁하던 당시, 종족 번식을 유도하기 위해 남성의 유전자는 성욕을 강화하는 식으로 진화했고, 여성은 남성에게 자신과 아이의 생활을 책임지도록 하기 위해 방어적으로 한 남자에게 집착하는 식으로 진화했다는 식의 설명이 그것이다. 물론 이러한 설명들은 '그럴듯하게' 들릴 수는 있어도 증명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며, 또한 생물학자들의 간단한 반론(예컨데, 여전히 대부분의 동물들은 생존을 위해 투쟁하고 있지만, 강간은 인간에게만 나타난다는 사실)에도 그 설득력을 잃는다. 하지만 여전히 이 어설픈 진화론은 남성의 성욕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이들의 단골 소재로 차용되고 있다.

여기서 질문 하나. 왜 하필이면 '진화론'일까. 이런 류의 주장에서 '과학'이 동원되기 시작한 것은 사실 인류 역사에서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다. 과학 이전의 인기 레퍼토리는 '신의 섭리'였다. 진화론이든 신의 섭리든, 공통점은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합리화하기 위해 외부의 권위에 의존한다는 점이다. 이성의 시대에 '과학'만큼 확실한 권위가 또 있을까. 허나 이들이 호명하는 '과학'은 엄밀한 의미의 과학이 아니다. '신의 섭리'가 입증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듯, 이들 '과학' 역시 입증할 수 없고 단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야기일 뿐이다.

예를 들어, 손을 따서 체기를 내리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이 실용적인 지식은 그 자체로 요긴하지만, 이것이 나쁜 피가 질병의 근원이라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앞서의 체한 사례 덕에 이러한 주장은 그럴 듯하게 들릴 수 있지만, 과학은 유추가 아닌 엄밀한 인과관계의 증명 속에서만 성립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를 뽑는 치료 방법은 한 시대를 풍미했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이비 과학/의학의 희생양이 되었다. 이처럼 "옳은 것처럼 '생각되지만' 입증할 수 없는 주장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p. 269)"

인종차별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의 시도들이 반복되었다. 애초에 신이 인간을 불평등하게 창조하였다는 주장이 한 시대를 풍미했다면, 과학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인종차별을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들이 속속 나타난다. 골상학이나 두개계측학과 같은 초기적 시도들부터 시작해 IQ 테스트와 같은 좀 더 고상한 이론들에 이르기까지, 인종주의는 지속적으로 과학의 이름을 호명해 왔다. 이들이 사용한 과학적 방법의 핵심은 인간의 측정(Measure)과 그 자료의 분석(Analysis)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굴드는 이 책 [The Mismeasure of Man] 을 통해 이들 이론들이 측정과 분석 모두에서 어떤 오류를 저질렀는지를 밝혀낸다.

우선 골상학과 두개계측학은 잘못된 측정(Mismeasure)의 대표적인 사례이다. 두뇌용적을 측정한다던가 아니면 신체의 여러 치수들을 측정하여 이를 근거로 인종간의 우열을 논하는 이들 이론들은, 사람들에게 숫자가 가지는 권위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그러나 눈을 어지럽히는 숫자들에 현혹되지 않는다면, 자료들 사이의 비교를 통해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예를 들어, 실험도구의 변화로 동일한 대상의 측정치가 달라지는 것은, 오차가 큰 실험도구를 썼을 때 실험자가 선입견에 따라 실험을 진행했다는 점을 보여준다. 때로는 원하는 결과와 일치하지 않는 자료를 의도적으로 결과 산출 과정에서 제외하기도 하고, 터무니없이 적은 표본에서 산출한 평균을 해당 인종 전체의 평균값으로 제시하는 등, 이들 측정된 자료의 신뢰수준은 '과학'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이다.

아전인수격인 자료 해석은 더 가관이다. 대표적인 두개계측학자인 폴 브로카는 자신이 속한 인종(프랑스인)의 두뇌 용적이 독일인들보다 작은 사실을 변호하기 위해, 뇌의 크기가 신장 및 나이에 따라 변화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러나, 브로카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미이라에서 측정한 작은 두뇌 용적을 열등함의 증거라고 주장할 때는, 그들의 작은 신장이나 사망 나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이들 이론들의 가장 큰 난점은 인과관계의 증명 없이 자의적으로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예컨데 자신들이 가진 샘플에서 전두엽의 크기가 백인종 > 황인종 > 흑인종의 순서로 나타났을 때 이들은 가차없이 이것이 백인종의 우수성을 증명한다고 선언했는데, 후에 새로운 샘플에서 이 관계를 뒤집는 수치가 나타나면 이들은 전두엽 크기를 포기하고 다른 기준을 찾아나섰다. 이는 이들 이론들이 그저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수치를 찾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못했음을 잘 보여준다.

한편, 신체적 측정을 통해 인종간의 우열을 가리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지는 동안, 다른 한쪽에서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마음의 능력, 즉 지능을 측정하고자 하는 노력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른바 IQ 테스트의 탄생이다. 애시당초 IQ 테스트는 인간의 지능을 '서열화' 하고자 창안된 테스트는 아니었다. 오히려 IQ 테스트의 창안자 비네는 이 테스트가 학습능력이 극히 떨어지는 아이들을 일찍이 찾아내어 적절한 교육을 통해 개선하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결코 사람들을 서열화하여 낙오자들을 배제하고자하는 목적이 아니었음을 강조하였다. 허나 창안자의 이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된다.

비네의 이론은 터먼과 브리검 등에 의해 미국에 소개되면서 표준화된 문항들을 통해 지능을 측정하는 현대식 IQ 테스트의 형태를 갖춘다. 그러나 굴드가 밝혀내듯 이들이 실행한 IQ 테스트는 매우 조잡하고 사실상 엉터리로 진행된 실험이었는데, 문제는 이 테스트의 결과를 인종주의자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1920년대 미국은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IQ 테스트를 수행한 결과 낮은 수치가 나왔음을 근거로(수십일간 배를 타고 미국에 갓 도착한 비영어권 이주민들을 대상으로 IQ 테스트를 수행할 때 어떤 결과가 나오겠는가) 이주민들이 미국 전체의 평균 지능을 떨어뜨리고 있다며 이민자의 수를 제한하는 이민제한법을 제정하였다. 덕택에 가난과 전쟁으로부터 도망친 수많은 유럽 이민자들이 다시 그들의 고향으로 쫓겨나 비참한 삶을 살거나 죽음을 맞아야 했음은 물론이다. 또한 정신박약인들이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는 "단종법"이 제정되어 수십만의 정신박약인들이 강제로 불임수술을 받기도 하였다. 잘못된 믿음이 가져온 또 다른 비극의 역사가 IQ 테스트로 인해 초래된 것이다.  

파괴에 이르는 길은 종종 간접적이지만, 사상은 총이나 폭탄과 마찬가지로 확실한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이다. (p. 382)

'지능'을 기준으로 인간 본연의 권리를 말살한 것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과연 이 '지능'이라는 것이 실체가 있냐는 점이다. 터먼과 브리검, 그리고 후에 일반지능 g를 창안한 스피어맨과 버트 등 IQ 테스트 옹호론자들의 공통점은 지능이 고정불변하며, 하나의 수치로 환원될 수 있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이들을 통칭하여 '생물학적(유전적) 결정론자'라고 부를 수 있는데, 굴드는 이들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의 주장을 하나하나 논파해 나가면서 '지능'이 결코 실제로 존재하는 물리적 특징이 아님을 밝혀낸다. 이른바 '물화(物化)'의 오류이다. 또한 이들 이론들이 생물학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을 구분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도 갖지 못한채 성급하게 생물학적 결정론으로 비약하고 있음도 굴드가 비판하는 주요한 오류이다.

스피어맨이 발견한 일반지능 g 는 IQ 테스트에서 수행된 다양한 테스트들을 관통하여 강한 상관관계를 나타내는 어떤 수치를 지칭한다. 스피어맨은 요인분석 기법의 복잡한 계산을 통해 이 g 값을 산출한 후, 이것이 사람의 여러 정신적 능력들을 지배하는 '일반지능'을 실제로 측정한 값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굴드는 요인분석의 결과값은 분석에 도움이 되는 편의적 수치지, 결코 어떤 실체가 아님을 지적한다. 마치 우리가 '속도'라고 부르는 것이 우리 생활에서 편의적으로 사용되는 수치일 뿐 어떤 실체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상대성 이론의 세계에서 사물의 속도는 간단히 사라져버린다. 일반지능도 마찬가지다. 요인축을 회전하면 일반지능은 사라지고 다른 형태의 해석이 나오게 된다. 이렇게 실체가 없는 값에 '지능'이라는 이름을 부여하여 실제 존재하는 무엇을 측정한 것처럼 착각한 것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IQ 인 셈이다. 따라서 지능이 생물학적으로 고정적이라는 주장은 그 근거를 잃게 된다.

그러나 IQ의 옹호자들은 IQ 테스트의 결과를 끊임없이 확대 해석했다. 상류층 아이들의 IQ 테스트 결과가 높게 나온다는 사실에서 그들은 지능이 유전이라는 결론을 도출해낸다.(부모의 IQ는 재 보지도 않고!!) 좋은 환경은 아이들 부모가 지능이 높다는 증거이며, 그렇기 때문에 높은 지능을 유전받은 아이도 지능이 높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거꾸로, 좋은 환경이 아이들의 지적 능력을 높였다는 가설은 이들의 머리에 아예 떠오르지도 않았다. 이는 생물학적 결정론자들이 실험의 결과 생물학적 결정론을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먼저 생물학적 결정론의 입장에 서서 실험결과를 해석했다는 점을 잘 보여준다.

아닌게 아니라, 골상학이건 두개계측학이건 IQ 테스트건, 굴드가 밝혀내는 이들 이론들의 일관된 오류는 냉정한 관찰자의 눈조차 흐리게하는 선입견에 의한 왜곡이다. 원하는 결론을 위해 자료 자체까지 조작하는 조악한 시도들은 사이비 과학으로 분류할 수 있다 하더라도, 날카로운 관찰력과 엄밀한 과학적 과정을 강조한 연구자조차 결정적인 순간에는 아무런 의심 없이 인종주의적 결론으로 비약해 버리는 과정을 보고 있자면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한 회의마저 들 지경이다. 한마디로, 이 모든 사례들은 어떻게 '의도'가 '원하는 결론'을 향해 진실을 왜곡하는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블랙홀의 존재가 빛의 진로마저 바꾸어 놓는 것처럼, 인종주의라는 사회적 통념의 힘은 이처럼 가장 객관적이어야 할, 그리고 객관적이라고 믿어지는 과학적 탐구마저 왜곡시켰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아무리 전문지식으로 무장했더라도 결국 과학자들도 이 사회의 평범한 한 명의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곱씹어야 할지 모르겠다. 다시 말해, 이들 이론들에서 나타나는 오류들은 사회적 통념과 선입견의 강한 요구가 과학자라는 사회 구성원을 통해 이론화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들 이론들이 발표 당시 상당한 대중적 반향을 일으켰음은 역시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물론 이러한 이론들이 각광을 받은 것이 그 과학적 엄밀성과 획기적인 결과물 때문이 아니었다. 거꾸로 이들 이론들은 대중들이 이미 공유하고 있었던 선입견들을 확인해주는 일견 '과학적인' 근거를 제공함으로써, '인종주의'라는 비난과 마음 한구석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길을 제시했을 뿐이다. 자신이 속한 인종이 다른 인종을 지배하는건 그저 인간이 '원래' 만들어진대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예들을 밟고 올라서서도 당당하게 "나는 관대하다"고 외칠 수 있는 것이다. 조금만 들여다보면 쉽게 드러날 오류들이 묻혔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대중들은 자신들이 기대했던 결론을 얻은 이상, 그 과정을 짚어보는 것을 무의미하게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대중용 출판물에서 쉽게 보 수 있는 버트의 주장이나 자료에 분명한 잘못이나 의심스러운 주장이 포함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지능에 대한 그의 주장을 믿었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이것은 객관성이라는 가면을 쓴 공유된 도그마에 대해 무언가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닐까? (p. 446)

사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결론'이 어떻게 진실을 왜곡할 수 있는지 너무나도 소상히 보아오지 않았던가. 한국 사회를 휩쓸었던 소위 '황우석 신드롬'에서 대중들이 원했던 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세계 최초'라는 허위 의식과 '국익'이라는 이름의 얄팍한 주판 굴림이 그들을 지배했을 뿐이다. 때문에 거짓 가면이 거의 벗겨진 순간에조차 사람들은 현실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노력들을 외부 세력의 불순한 음해 정도로 치부했던 것이다. 그리고, 맹목적 믿음이 강했던만큼, 진실이 밝혀졌을 때 우리 사회는 더 큰 정신적 폐허를 견뎌야만 했다. 이 역시 공유된 도그마에 대해 무언가 교훈을 주는 것이 아닐까?

또 하나 질문이 남는다. 우리는 과연 인간이 원래 평등하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생각하는걸까, 아니면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만약, 정말로 만약, 사람들 사이에 유전적 차이로 우열이 존재하는 것이 증명된다면 그 순간 우리는 평등이라는 가치를 집어던져야 하는 것일까. 내 대답은 아니다 이다. 생물계가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른다고 해서 인간 사회도 적자생존의 법칙을 따를 까닭은 없다. 만약 약자를 보호하고 다 같이 공존을 도모하는 것이 어리석은 짓이라면, 과연 우리는 무엇을 '문명'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결정은 우리 손에 달려 있다. 과학은 결코 우리 삶의, 우리 사회의 판관이 될 수 없다. 과학에서 답을 찾으려 했던 것은 질문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질문은 '인간은 평등한가'라는 사실관계의 질문이 아니라, '인간은 평등해야 하는가'라는, 우리가 추구할 가치를 묻는 질문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 과학은 우리에게 지식을 줄 수는 있지만 답을 줄 수는 없다. 과학이 인간을 측정할 때, 그것을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우리가 다양성에 대해 배우는 것은 단지 받아들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해하기 위함이다. (p. 616)" 는 굴드의 조언을 다시 한 번 마음 속에 새기는 것이다.


ps. 원서와 비교하지 않아서 전체적인 번역의 정확성은 알 수 없지만, 책 표지의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잘못된 척도에 대한 비판" 이라는 문구는 어처구니가 없다. 과연 역자가 책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고 번역한게 맞을까? 출판사 쪽의 실수이길 빌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열린 사회와 그 적들
- 김소진 지음 / 문학동네 / ★★★★

아무런 힌트도 없이 나타나는 갑작스런 시점 이동은 김소진의 글에 나타나는 공통된 특징 중 하나다. 보통은 과거와 현재, 생각과 현실 사이를 오갈 때면 단락을 나눈다던가 하는 형식상의 변화가 독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할 여유를 주기 마련인데, 김소진의 단편들에서는 이러한 배려(?)라고는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다. 덕분에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실어 잠시 나른하게 읽다가도 갑작스래 정신을 곧추세워 다시 읽어내려가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곤 하는 것이다. 작가가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러한 형식상의 특징도 일상의 나른함 속에서 그의 소설이 주는 정신적 각성 효과와 같은 맥락으로 느껴졌다.

나쁜 의미로 하는 말은 아닌데, 김소진의 글을 읽노라면 세대차이 같은게 느껴진다. 그가 77년생인 내게는 익숙치 않은 우리 고유어와 사투리를 능란하게 구사하는 탓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가 그리는 삶의 모습이 낯선 까닭이다. 예컨데 90년대 후반부터 많이 읽히는 하루키나 폴 오스터의 소설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곤궁함은 (젊은)주인공에게 닥치는 일시적 시련/고난의 성격을 지니는 반면, 김소진의 주인공들에게 가난은 어려서부터 뼈 속 깊이 스며든 삶의 본질과도 같은 것이다. 이런 가난은 우리 부모 세대에서는 흔한 경험이었지만, 확실히 우리 세대에게는 낯선 경험일 뿐더러 우리 세대를 타깃으로 하는 작가들도 좀체 그리지 않는 삶의 모습이다. 다시 말해, 지금도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하지만 대부분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삶의 모습들이다.

김소진이 지적하는 바, "열린 사회"의 이데올로기 역시 그 이데올로기의 관심사가 아닌 이들을 타자화 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닫힌 사회"이다. 생각해보면, 서울역이나 종묘공원에서 집회가 열릴 때 그 주변에는 노숙자들이나 나이 지긋하신 어르신들이 모여 있기 마련이었는데, 정작 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싸늘했던 것 같다. 노동자/농민/빈민/장애인들이 더 좋은 세상을 만들자고 외칠 때 이들은 그 구호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다른건 몰라도, 자신들도 그 좋은 세상에 한자리 낄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느꼈을리는 없는 것 같다. 모두로부터 타자화된 삶. 그것이 김소진이 신문사를 그만두면서까지 소설로 담아내고 싶었던 이야기일지 모른다.

단편집 한 권 읽고 하기엔 좀 건방진 이야기지만, 확실히 김소진이라는 작가는 '아직' 미완의 그릇이라는 생각이 든다. 임존성이라던가 어릴적 담력 과시를 위해 철탑에 오른 이야기 등은 오롯이 그 자체로 의미부여가 되고 어느 단편에서는 중심 소재가 되는 내용인데, 몇몇 단편에서 별 비중 없이 소품처럼 재차 사용되다보니 오히려 소재의 가치가 닳아 없어지는 느낌이다. 소품으로 쓰일 소재를 좀 더 풍부히하고, 힘없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냥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심리를 좀 더 면밀히 파고 들어갔더라면 하는 바램이 남는다. 이런 바램을 들어줄 수 없는, 35세의 나이로 요절한 작가의 생이 더더욱 안타까울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흡혈귀의 비상
-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은주 옮김 / 현대문학 / ★★★★★

오랜만에 읽는 미셸 투르니에.

미셸 투르니에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흡혈귀의 비상"이라는 제목을 보며 신화를 변주하는 또 다른 소설을 기대하며 그답다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제목이 "미셸 투르니에 독서노트"라는 부제와 함께 묶이면 일단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다. 흡혈귀라니. 호러 소설이라도 읽은걸까.

... 한 권의 책을 출판할 때 그는 익명의 남녀의 무리 속으로 종이로 만들어진 새떼를, 피에 굶주려 야윈 흡혈조들을 풀어놓는 것이다. 그 새들은 닥치는 대로 독자를 찾아 흩어진다. 한 권의 책이 독자를 덮치면, 그것은 곧 독자의 체온과 꿈들로 부푼다. 그것은 활짝 피어나고, 무르익어, 마침내 자기 자신이 된다. 그것은 작가의 의도들과 독자의 환상들이 구별할 수 없게 뒤섞여 있는 - 어린아이의 얼굴에 아빠의 모습과 엄마의 모습이 섞여 있듯이 - 풍부한 상상의 세계이다.

저자 서문에 담긴 이 흡혈귀의 비유는 (비록 피를 빨리는 입장이긴 하지만) 독자의 지위를 수동적인 소비자에서 생산자로 격상시켜 책읽기를 즐기는 독자에게 제법 으쓱하는 기분이 들게 만들어준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이내 이 기분은 위화감으로 바뀌기 마련인데, 미셸 투르니에가 몸소 보여주는 독서는 지친 하루를 마감하는 잠자리 독서 같은 나같은 소시민적 독서와는 차원이 다르다는걸 깨닫기 때문이다. 텍스트를 넘나들고 각 작가의 생애와 유럽의 역사를 아우르는 '읽기'라니!

차라리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쓰기'에 가깝다. 유럽 근현대의 거장들과 그들의 작품을 소재로 삼아 미셸 투르니에 자신의 정신세계를 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흡혈귀는 책이 아니라 미셸 투르니에 자신이 되지 않을까. 거꾸로 그들 책에서 피를 빨아 자신의 세계를 살찌우고 있으니 말이다. 아닌게 아니라, 책을 읽고 나면 유럽 문학에 대해서보다 미셸 투르니에라는 작가에 대해 더 풍성하게 알게 되는 느낌이 든다. 예컨데 중간 중간 등장하는 대립항들은 "소크라테스와 헤르만 헤세의 점심"(진짜 이 번역제목 맘에 안 들지만)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내용들이 다시 서술되고 있으며, 레비 스트로스에 대한 회고에서는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의 기원을 짐작할 수 있게 되는 식이다.

우연한 일이겠지만, "독서 노트"에 해당하는 프랑스어는 "Note de Lecture"인데, 여기서 영어 "reading"에 해당하는 단어 "lecture"는 영어의 "lecture", 즉 "강의"라는 단어와 철자가 같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마치 미셸 투르니에에게서 유럽 문학사 강의를 듣는 듯한 느낌을 준다. 교재에 해당하는 각 원전들을 미리 읽는다면 더욱 풍성한 강의가 될 것이다. 물론 언제나처럼 불성실한 학생인 나는 교재도 읽어보지 않고 수업을 들어 많은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다는 점은 고백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새로운 인생
- 오르한 파묵 지음 / 민음사 / ★★★★★

인식론적 관점에서, 세계는 전적으로 주관적이다. 세계는 오직 주체가 인식하고 상호작용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존재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지중해를 세계로 이해했듯이, 중국인들이 자신들을 '中' 이라고 이해했듯이, 그리고 오늘날의 우리들이 "세계"를 지구로 한정시켜 이해하듯이. 이 집단적 의식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의 분화가 이루어진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 우리의 인생이 그처럼 끊임없는 지진과 화산활동으로 가득한건 이 저마다의 세계들이 서로 부딛히고 부서지기 때문이리라.

되돌아보면, 젊은 날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솟아났던 기억이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학교에 잡혀 있었고, 그저 약간의 일탈로 세상에 복수라도 한 양 의기양양했던 나의 세계는 얼마나 작았던가. 그 작은 세계의 의기양양했던 개구리 왕은 우물 밖 세상을 만나자 이내 넋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새로운 세계는 눈부셨다. 비록 새로운 세계에서 나는 작은 개구리에 불과했지만, 그 모든 불안과 모험을 감내할만큼 새로운 세계는 매혹적이었다. 게다가 내 옛 왕국은 이미 새로운 세계의 빛에 녹아내린지 오래. 나는 이 새로운 세계를 향해 모험을 떠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어느 날 한 권의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의 인생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여기, 또 하나의 세계가 방금 무너졌다. 책 한 권이 인생 전체를 흔들었음을 고백하는 이 강렬하고도 간결한 두 문장을 시작으로 소설 "새로운 인생"은 우리를 새로운 인생을 찾아 나서는 주인공의 여정 속으로 이끈다. 하지만 주인공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놓은 그 책이 무엇인지, 그리고 주인공이 찾고자 한 새로운 인생이 무엇인지는 끝내 나오지 않는다. 허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이 소설을 다른 성장소설들과 구분짓는 가장 큰 차이이다.

때로, 중요한건 답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일 때가 있다. 샤르트르가 "지식인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 그가 추구한 것은 지식인은 이러저러하다는 답이 아니라, 질문 그 자체였다. 답을 내놓는 순간, 그것은 관습이 되고 규범이 된다. 때문에, 질문하기를 멈추는 순간 진리는 화석이 되어 바스러진다. 진리는 끊임없이 부정되고 재규정되는 과정 속에서만 생명력을 얻는다. 인생 또한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 책에서 작가는 바로 삶이 이러저러하다는 규정 대신, 삶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모색 자체를 옹호하고 있다.

무슨 말이냐고? 어떤 단어의 의미가 명확하게 다가오지 않을 때는 그 반대말을 보면 된다. 새로운 인생을 찾아 헤메는 주인공과 자린, 마흐메트의 대척점에는 나린 박사가 서 있다. 그는 존중받을 만한 삶을 이루었고, 스스로 삶과 세계에 대한 어떤 깨달음에 도달했다고 믿는 인물이다.

"... 그 음악이 바로 우리가 세계라 부르는 것을 형성하고 있지. (중략) 주의 깊은 사람이라면 그것을 듣고 보고 이해할 수 있어."

물론 이 말은 나린 박사의 자아도취만은 아니다. 그는 실제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으며, 가족에게도 인자하고 자상한 아버지였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 자신이 깨달은 삶의 지혜를 그의 아들이 왜 거부하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준수한 외모에 좋은 머리를 가진데다가 풍족한 경제적 삶과 아버지(나린 박사)의 지혜까지 상속받을 수 있었던(나린 박사가 보기에는 모든 것이 완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던) 마흐메트가, 그 모든 것을 뿌리치고 새로운 인생을 찾겠다고 헤메이는 것은 나린 박사에게는 헛된 낭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나린 박사는 바로 모든 젊은이들의 아버지이다. 아버지들 역시 한 때 젊은이였고 새로운 인생에 목말라했었지만, 이제 그들은 그 젊은 날의 열병을 극복하고 나름의 해답을 찾았을 것이다. 어느새 아버지의 입에서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젊은 날의 아픔을, 그 젊은 날의 방황을 이겨낸 목소리에는 피로감과 함께 자부심이 묻어나온다. 이해한다.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 아픔과 혼돈을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은 당신들의 사랑을.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건 답이 아니라 과정이었음을. 모든게 완벽하고 모든게 갖추어진 미래가 혹 우리를 기다린다고 하더라도, 버스 창문 너머로 흐르던 그 불빛을, 잠든 자린의 어깨로 흘러내리던 그 머리칼을, 점멸하는 TV 불빛으로 어른거리던 고뇌의 그림자들을, 그 모든 것을 그저 헛된 지난날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사고처럼 불현듯 다가오는 인생의 순간들을 피하기 위해 그저 한 곳에 안전하게 정착해 있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새로운 인생의 빛을 보고 아무 것도 보지 못한 듯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을까.

모든 것은 마치 신기루와 같았다. 소설에서도, 새로운 인생의 빛을 강력하게 내비추던 그 책은 아버지의 친구가 몇 권의 책을 짜집기하듯 베낀 것이었고, "새로운 인생" 캬라멜의 천사는 그저 마를렌 디트리히의 어느 영화 제목에서 나온 단어였을 뿐이었다. 지난 날의 열정도, 그 뜨거웠던 사랑도, 운명같던 우연들도 뒤돌아보면 그렇게 그저 하나의 그림자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내 삶 그 자체였다. 그게 당신들의 삶 자체였다. 그 뜨거웠던 모색을 마감하고 결론에 안착하는 순간, 다시 말해 주인공이 아내와 아이가 기다리는 행복한 집으로 돌아가려는 순간, 버스는 멈췄다. 그렇게, 삶도 멈췄다.

되돌아보면, 젊은 날 하나의 세계가 무너지고 다른 세계가 솟아났던 기억이 있다. 지금의 나는 비록 그 세계를 떠났지만, 그 세계는 여전히 나의 한 부분이다. 사랑했던 이들이여, 그대들도 나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여전히, 또 다른 세계, 또 다른 사랑을 찾는 모험은 계속되어야 한다. 질문은 계속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계는 어디에 있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