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연휴로 며칠 떠나 있다가 다시 돌아오니 뭔가 한바탕 또 소란이 일었던 것 같네요. 어제 밤에는 알라딘 서재 메인이 들어가지지 않아서 제가 즐찾한 분들이 올려주시는 글들로 대충 분위기만 짐작했었는데, 오늘 폐허처럼 남겨진 글 부스러기들을 찾아 읽으니 착찹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결국은 그냥 평범한 사용자들끼리의 감정 다툼으로 치닫고 마는군요.
안그래도, 며칠전 바람구두님의 편지글을 읽다가 내내 마음에 걸려하던 부분을 쿡 찔러주시게 있어 또 한 번 글을 쓸 생각이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글을 처음 올리던 순간부터 저 자신에게 계속 반복해서 물으면서 확인해왔던 부분입니다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는 앙금으로 남아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불매운동을 진행(?)하셨던 분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기도 합니다.
저는 저 자신이 객관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고, 양심적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극히 그 반대라고도 할 수 있겠죠. 자기 합리화에 능숙하고, 소비 자본주의의 단맛에 길들여져 있으며, 적당히 먹고 살만한 맘 편한 화이트 칼라 노동자의 한 명일 뿐입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는 약자들의 고통에 깊이 공감을 못합니다. 스스로 사회의 밑바닥이 아닌 것을 감사하며(누구한테?) 살기도 하지요. 그래서 글을 쓸 때마다 매번, 내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고 너무 쉽게 말을 내뱉는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듭니다. 제가 이해하는 고통은 체감된 경험이 아닌 그저 상상의 산물일 뿐이니까요.
보통은 그래서 입다물고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면서 사는 편인데, 어쩌다보니 이렇게 논쟁의 한복판에 들어와 버렸습니다. 덕분에 많은 분들과 이야기도 나누고 많은 것을 배우기도 했습니다만, 한편으로는 대놓고 말은 안해도 한구석에서 들리는 비웃음과 이죽거림 때문에 가슴이 답답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래서 곰곰히 생각해 봤습니다. 내가 왜 그런 비웃음에 아파할까. 왜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지 못할까. 그건 결국, 그 비웃음들이 제 스스로가 가진 앞서의 죄의식들을 건드리고 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딱지 붙이기 식으로 말하자면, 쁘띠 부르주아 근성이라고 할까요. 저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저의 계급성입니다.
제 삶에 큰 굴곡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그 계급성은 아마도 남은 제 인생을 계속 규정지으리라 생각합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버리기가 힘들어 진다고, 저는 제가 지금 와서 제 삶의 방향을 바꾸리라고는 생각하지도 않구요. 그리고 그러는 동안 마찬가지의 등 따시고 배부르니 편한 소리 한다는 죄의식은 계속 저를 따라다니겠죠. 그러면 어쩔까요. 계속 침묵해야 할까요? 아니면 약자의 목소리에는 속죄하는 심정으로 무조건 고개를 끄덕이면서 살아야 할까요? 아뇨, 그렇게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에 앞서 저는 독립된 자아이고 제 스스로의 가치와 판단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스스로의 모순을 인정하면서도 부끄러움과 함께 더 큰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저는 자기 합리화의 달인이니, 스스로를 합리화 할 수 있을 정도의 기준을 세워야만 했습니다. 좀 더 거창하게 말하자면 그게 독립된 자아로서의 제 의식의 생존방법이었습니다.
아마도, 선/악의 이분법이 최초로 깨어진 것은 부모님의 잘잘못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 겁니다. 제 행동의 잘잘못을 가리는 판관이었던 부모님이 당신들 역시 마찬가지의 잘못들을 저지른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 가치판단의 잣대로서의 권위는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반항도 해 보고, 겉으로 반항하지 않더라고 내게 하는 말들을 맘 속으로는 무시하기도 했지요. 그리고 당신들도 그저 평범한 생활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조금 더 나이가 들어서였습니다. 불의에 저항하기보다는 피하거나 외면하고, 눈앞의 작은 편의를 위해 마찬가지의 작은 잘못들은 모른 척 눈감고 지나가는 제 자신의 모습에서 부모님의 모습을 발견했기 때문이지요. 마음 속 균열을 안고 사는 요령을 터득한 겁니다.
직장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 균열은 좀 더 커졌고, 마찬가지로 요령도 늘어 가더군요. 누가 봐도 부당한 갑의 요구를 씩 웃으며 받아들이는 법도 배웠고, 막말하는 상사한테 요령껏 대처하는 법도 배웠습니다. 왜 그걸 참고 사냐고 물으실지 모르겠습니다. 부당한 일을 당했으면 맞서 싸워야지 왜 침묵하냐고 다그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틀린 말은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편하게 살고 싶었다고 밖에 할 말이 없네요. 제 밥벌이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 다른 곳에 간다고 해도 피할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며, 무엇보다도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일로 양심의 가책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그런 대접을 받을지라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그런 대접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물리적 폭력이나 성추행 등 제 스스로 정한 기준 이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맞서 싸운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자기합리화라면 자기합리화 입니다만, 투사로 살아가기로 마음 먹지 않은 이상, 제가 자아의 분열을 겪지 않으면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비단 제 주변의 일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의 줄타기가 이루어 집니다. 욕하기는 쉽습니다. 분노하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행동으로 이어지기 위해서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조건들이 붙기 마련입니다. 이게 그 정도로도 중요한 일인지, 그리고 그 정도로 큰 피해를 가한 일인지, 행동의 수위는 적절한지, 내 참여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저는 제가 소심하긴 해도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상황이 된다면 제 작은 참여를 보태는 일을 귀찮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마다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런 저조차도 실제 참여에 이르기까지는 수많은 판단의 과정들을 거칩니다. 이것이 옳다 라는 선언만으로는 메꿔지지 않은 그 간극이 바로 윤리적 “판단”과 정치적 “행위” 사이의 간극입니다. 부모님이 길에서 무단횡단했다고 가출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이제 불매운동으로 돌아옵시다. 제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속을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 자신과 제 주변 사람들, 그리고 문학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수준의 행동의 기준들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이해해보면, 불매운동을 관망해왔던 알라디너들이 요구하는 것은 간단합니다. 알라딘의 행위가 직접 행동을 촉발할만큼 중대한 잘못임을 증명해 달라는 것입니다. 알라딘이 선량한 기업이라서도 아니고, 김종호님의 처지가 대수롭지 않아서도 아닙니다. 아마도 정보의 부족에서 오는 오판도 있습니다. 저 자신만해도 알라딘의 비정규직 사용에 대해 순진하게 생각해 왔으니까요. 그래서 토론이 필요했고, 정보의 교류가 필요했습니다. 어떤 분은 당장 해고당한 사람이 있는데 엉뚱한 논쟁으로 헛다리를 짚고 있다고도 말합니다. 미안한 말입니다만, 저는 헛다리를 짚고 있는건 그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문제제기를 넘어 불매 “운동”이라는 대중 운동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거쳐야만 하는 불가피하게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의 상황입니다. 김종호님의 해고가 안타깝긴 하지만 정황상 알라딘이 의도적으로 벌인 일은 아닌 이상 직접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다는 판단입니다. (최소한 다른 사례들이라도 제시하면서 상습범이라는 증거라도 찾았으면 또 모를까요) 김종호님의 문제제기와 알라딘의 지속적인 회피로 알라딘이 비정규직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불법행위들은 어느 정도 확증으로 바뀌고 있지만, 그것도 조사장님의 도급 중단 선언으로 딱히 계속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렵습니다. 비정규직 자체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미 여러 글에 썼으니 더 언급할 것도 없겠죠. 현실적으로 더 이상 동의를 이끌어낼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된겁니다. 적당한 선에서 마무리를 져야 할 타이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황을 인정하기보단 짜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알라딘 마을이 원래 그렇지 라는 묘한 냉소부터 시작해 알라딘 밖에서 답을 찾겠다는 선언도 나왔습니다. 토론을 하기보단 “부당한”이라는 단어에 폰트를 키우고 굵은 글씨로 치장하기만 합니다. 정치적 행위를 놓고 곧바로 그 사람의 윤리적 판단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런 모습들, 많이 봐 왔습니다. 대중의 정치적 참여를 이끌어낼 결절점들을 만들어내기보단, 눈 앞의 투쟁을 위해 대중들을 끌어들이려다 지쳐 대중을 비난하면서 진보적 가치들에 대한 피로감만 높이는 모습들 말입니다. 좋게 말하면 혈기고, 까놓고 말하자면 그저 조급증입니다. 긴 안목으로 변화의 토대를 만들기보단 눈 앞의 투쟁의 성과를 위해 안달할 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비정규직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든 것, 그리고 알라딘의 관행적 불법행위들이 도급 중단과 함께 일소될 가능성(아직 구체적인 조처들을 모르기 때문에 해결됐다고는 말 못하겠군요)을 만든 것으로도 불매 운동이 소기의 성과를 이루어냈다고 생각합니다. 김종호님만 생각하자면 애초에 고용 기간을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책임을 물어 알라딘 쪽의 사과와 1~2개월 재취업 기간에 대한 보상 정도의 요구였으면 어땠을까도 싶습니다만, 그랬더라면 알라딘의 불법행위들이 알려지지 않았을 테니.. 참 뭐라 말하기 힘들군요. 어쨌든, 이제 알라딘 내에서의 불매운동은 현실적으로 힘을 잃은 것 같습니다. 더 높은 수준의 요구에 대해서는 알라딘 밖에서 움직이시는 분들께 맡겨야겠죠.
저는 일단 알라딘의 도급 중단 조치의 구체적인 내용이 알려질 때까지 불매는 지속합니다. 처음부터 그랬듯, 다른 분들에게 동참을 요구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최소한 불매에 동참했던만큼, 어떤 식으로든 (자족적일지라도) 마무리는 짓고 끝내겠다는 개인적인 고집입니다. 조사장님도 조치에 대한 약속을 했으니, 그 결과에 대해서 공지를 할 정도의 성의는 보여주시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