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의 어느 거리를 무작정 거닐다, 길 가의 작은 공원에 문득 발걸음이 멈췄다. 작은 산책로를 따라 벤치가 놓여 있던, 큰 포플러 나무가 우산처럼 하늘을 뒤덮은 도심의 그저 평범한 공원. 하지만 공원의 한가운데를 자리잡고 있는 동상은 여느 공원들이 기념하던 그것과는 달랐다. 갓 피어난 봄꽃 아래서 묵상 중인지 잠깐 선잠에 든지 모를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는, 바로 영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마하트마 간디의 동상이었다.
우리야 간디를 비폭력주의의 성인으로 기억하지만(물론 이것도 상당 부분 신화이긴 하지만), 제국의 입장에서는 그는 제국에 맞선 식민지의 독립운동을 이끄는 지도자, 즉 적이었다. 그런 간디의 동상을 수도 한가운데 세워 그를 기린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에 대한 존경심만으로 가능한 일은 아닐게다. 그보다 먼저, 인도를 점령하여 수탈했던 제국의 역사에 대한 반성과 그로 인해 고통받았을 인도인들에 대한 사죄가 앞서야 하지 않았을까. 물론 인도인들이 영국인들의 사죄가 충분하다고 느끼는지 여부는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이 동상은 최소한, 영국인들은 스스로의 과거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했다는 증거로 읽힌다.(물론 영국인들에게 면죄부를 주자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내가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늘도 전해오는 티벳의 소식은 우울하기만 하다. 새로운 제국을 꿈꾸는 중국은 총칼로 티벳 민중의 입을 막는 야만을 반복하고 있지만, 국제사회의 반응은 미적지근할 뿐이다. 옳고 그름보다는 당장의 실리를 쫓는 것이 국제 정치의 생리라는 말은 아무런 위안도 되지 않는다. 권력에 취한 제국에게 스스로 성찰하기를 요구하는 것 또한 공허한 이상주의에 불과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지식인들에게, 최소한의 양식 있는 사람들에게, 오늘 중국이 자행하는 만행이 훗날 중국 스스로에게 어떤 죄과를 치를게할지 생각해보기를 요구할 수는 있을것이다. 저 간디의 동상처럼, 베이징에 티벳 민중을 위한 기념비가 세워지기까지, 중국과 티벳이 공존하기 위해서 중국 사회가 겪어야 할 혹독한 자기 반성의 비용을 가늠해보기를 말이다. 그럴 양심조차 남아 있지 않다면, 중국의 미래는 없다.
중국의 지성이여, 바로 지금, 평화를 꿈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