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마르코 폴로 지음, 김호동 옮김 / 사계절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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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플란의 책이 연말 거의 다 읽고 몇장 안 남은 상태였는데, 그래도 한 해의 첫 시작을 카플란 책으로 하기엔 좀 그렇다 해서 굳이 남겨두고 이 책을 읽었다. 작년부터 읽어야지 했다가 이제야 손에 넣고 책장을 넘겼는데 의외로(아니 어쩌면 예상대로)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다.

서문에서 역주를 단 김호동 서울대 교수가 이 책의 ‘원본’을 충실히 설명해놓았고 각주도 열심히 달아 읽는 데에 많이 도움이 됐다. 베네치아를 영어식으로 베니스라 한 것은 역자가 영어판본을 번역한 탓인 것 같고, 각주에 계속 km가 아닌 마일 단위가 나오는 것도 그 탓인 듯. 이런 책을 애써 펴낸(더불어 이븐 할둔의 ‘역사서설’까지 옮겨냈던) 김호동 교수에겐 박수를 쳐드리고 싶은데, 각주에서 마일 단위 나오는 것과 한자 한글발음 병기 안 한 것 때문에 읽으면서 아주 조금 불편했다.


원제목은 ‘Divisament dou Monde’ (세계의 서술) 이라 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방견문록’이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이 된 것이 지금도 우리에겐 그렇게 인식돼 있다고 한다. 책의 내용을 보면 ‘동방견문록’ 해도 영 틀린 것은 아니지만 원제대로 좀 바로잡을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예 번역자가 ‘세계의 서술’로 못박아버렸다면 조금은 바로잡기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역자가 지적한대로, 첫째 유럽인의 눈으로 본 유럽 이외의 모든 세계(유럽인들이 신대륙에 가기 이전)를 담겠다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고, 둘째로 ‘동방’이라 하면 중국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책은 멀리 아프리카 일부지역과 러시아, 북극 가까운 곳까지 포괄하고 있다는 점이다.

널리 알려진 대로 이 책은 폴로가 감옥에서 구술(口述)했다고 하는데 책의 세세한 부분까지 따지면 진위논쟁이 있는 것들이나 불명확한 부분이 한둘이 아니니 전공자가 아닌 나로서는 그냥 그런가보다 할 따름이다. 구술한 것 치고는 너무 상세하다는 점도 폴로의 정체(?)를 의심하는 학자들 사이에선 하나의 논거가 되었다고 하는데, 어쨌건 이 책의 재미는 바로 그 디테일함에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전체가 다 디테일이다 - 대단한 통찰력을 담은 서술이라기보다는, 건조하게 세부사항들을 아주 꼼꼼히 다룬 책이라는 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그 중엔 저자가 직접 다녀본 곳에 대한 설명도 있고, 전해들은 것들도 있다. 오늘날의 투르크와 이란, 중앙아시아, 중국 북부와 서남부, 동남부, 인도양 섬들과 인도를 거쳐 소말리아의 모가디슈와 오늘날 탄자니아의 잔지바르(예전엔 ‘인도 영향권’이었고 지금도 그러한) 같은 아프리카 동쪽 해안지대까지, 여러 지방과 도시의 독특한 풍물을 담고 있다.

그런데 수십년에 걸쳐 이 넓은 곳을 다니면서, 언급하는 지역에 대해 짤막짤막하게나마 위치와 거리, 인구, 경제력, 생계 수단(직업), 천연자원과 동식물, 정치구조 같은 것을 빼곡하게 실었다. 구술 형식 탓인지 중세 유럽풍인지는 몰라도 폴로라는 이의 말을 받아적는자가 듣는 이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돼 있는데, 그렇게 ‘이야기’로 치기엔 너무 방대하고 너무 건조하다. 여행담이라기보다는 지리서나 박물지에 가깝다. 팩트들을 기록해 남기겠다는 의무감과 사명감을 갖고 정리를 해놓은 듯한 분위기마저 풍긴다.


책의 재미는 바로 그런 것들이다. 여러 지역에 대한 폴로의 ‘느낌과 생각’ 같은 것을 찾으려 했는데, 기독교도로서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이슬람(사라센인들)에 대한 비하와 경멸의 표현 같은 구태의연한 것들 말고는, 사적인 감상이 너무 적다. 그 대신 당대의 이방인들 눈에 신기하게 비쳤을 생생한 풍물들이 나와 있어 그걸 보는 재미가 컸다.

바우닥(바그다드)과 바소라(바스라), 이스파안(이스파한), 타우리스(타브리즈), 야스드(야즈드)와 케르만, 소금산과 발크(발흐), 사마르칸(사마르칸드), 탕구트, 카라코롬, 그리고 모게다쇼(모가디슈)와 찬기바르(잔지바르)까지. 너무나 너무나 가보고 싶은 곳들이어서, 그런 지명들을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서남아시아인들이 말하던 루크(로크) 새 이야기가 여기 나온 것도 반가웠다(이 새에 대해서라면 난 정말 관심이 많은데). 일본 지브리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귀를 기울이면’에 나오는 ‘라피스 라즐리’라는 돌이 이란 북부 바닥샨에서 나는 청금석이란 사실은 처음 알았다.



“조르지아(그루지야)인들과의 경계에 있는 한 샘에서는 100척의 배에 한꺼번에 실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기름이 뿜어져나오지만 식용으로는 좋지 않다. 그러나 불이 잘 붙고, 가려움병이나 옴이 붙은 낙타에게 발라주면 좋다. 사람들은 아주 멀리서부터 이 기름을 구하기 위해 오고, 근처에 있는 모든 지방들에서도 이것 말고는 결코 다른 기름을 태우지 않는다.” (104쪽)


“카타이 지방 전역에 걸친 산지의 광맥에서 캐낸 검은 돌의 일종이 장작처럼 탄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 돌은 나무보다도 더 잘 탄다. 더구나 여러분에게 말하건대 저녁에 불을 잘 붙여놓으면 이 불은 밤새도록 계속되고 더러는 아침까지 가기도 한다. 장작과 같은 나무도 충분히 있지만, 카타이 전역에서는 이 돌들이 태워지고 있다. 이 돌들은 엄청나게 많은 양이 존재한다. 그들이 이 돌을 때는 이유는 비용이 적게 들고 나무를 많이 절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284쪽)


중앙아시아의 석유와 중국의 석탄 이야기. 그 시절부터 그랬었구나 생각해보니 이것도 재미있다. 악어를 보고 ‘입이 엄청나게 큰 무섭고 커다란 뱀’이라 한 것이나 호랑이를 ‘얼룩무늬가 있는 커다란 사자’라고 한 것 등등 웃음 짓게 하는 구절들이 많았다. 암살단(아싸신)을 얘기하는 ‘산상의 노인’ 편은 여러 책에서 접했었지만 여기서 보니 또 재미있다. 용연향 정향 침향 사향 등등 여러 향료에 대해서는 좀더 자료를 찾아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하나 더 기억에 남는, 인도네시아 ‘소자바’(수마트라섬) 페를렉 왕국 이야기.


“그들은 여러 가지를 숭배하는데, 아침에 일어나 처음 눈에 띄는 것을 숭배한다.”


마음에 든다! 이런 마음가짐으로 살아야겠다. 아침에 일어나 처음 눈에 띄는 것을 숭배한다! 나는 내 가족을 숭배하고 새벽공기를 숭배하고 지하철5호선을 숭배하고 이 도시와 나의 삶을 숭배하리라! 이것은 새해 첫 책으로 선택해준 데에 감사하며 폴로가 나에게 주는 한해의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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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부시대가 오는가
로버트 카플란 지음, 장병걸 옮김 / 들녘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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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저널리스트 로버트 카플란이 1994년 아틀란틱 먼슬리에 같은 제목의 글을 썼다가 센세이셔널한 반응을 얻었는데, 뒤에 썼던 다른 컬럼들까지 모아서 2000년에 이 책으로 묶어 냈다.
냉전 끝났다고 세상의 낙관론자들이 좋아라 날뛰지만 앞으로 다가올 것은 승리의 영광이 아니라 세계의 곳곳에서 독버섯처럼 퍼져나가고 있는 무정부주의적인 분쟁과 폭력이다, 하는 것이 책의 요지다.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 동유럽 곳곳에서 민족, 종교의 외피를 쓴 테러범들과 분리주의자들이 일전을 준비하고 있는데 대책 없이 좋다고 떠들지 마라. 책 제목이기도 한 ‘다가오는 무정부주의’는 이 책의 맨 첫 장에 나와 있다. 두 번째 장에선 무식하고 가난한 민중들에게 형식적인 민주주의(투표)만 가져다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설파하고, 세 번째 장에서는 대량학살을 이성으로 막아낼 수 있다는 낙관론자들의 주장이 얼마나 철없는 짓인지를 비판한다.

4장은 냉전 이후에 CIA같은 정보기구를 더 강화해야 하는 이유, 6장은 박애주의자들이 박애만 주장하다 결국 실패하게 된다는 걸 다룬다. 5장, 7장, 8장은 각각 기번 ‘로마제국의 흥망’과 헨리 키신저의 젊은 시절 논문, 조지프 콘라드의 ‘노스트로모’ 소설에 대한 서평이다. 마지막 결론 격인 9장은 평화라는 개념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 평화주의자들에게 따지며 환상을 깨라고 충고하는 것으로 끝난다. 재미는 있지만 어쩐지 올해 첫 책으로 하기 싫어서 1년 내내 강독한답시고 읽다가 석장 남겨놓고 또 미뤄뒀다. 결국 동방견문록을 다 읽고 나서 마지막 남은 여섯 페이지를 넘겼다.

실은 토머스 프리드먼의 ‘세계는 평평하다’를 동시에 읽고 있었다. 몇해전 카플란의 ‘타타르로 가는 길’을 읽고 나서도 프리드먼과 카플란을 비교하는 독후감을 썼었는데, 공교롭게도 또 비교를 피하기 힘들게 됐다.


국제정치 어쩌구 하면 현실주의/이상주의 이런 구분을 접하지 않을 도리가 없는데, 카플란은 현실주의 중에서도 수퍼울트라 현실주의다. 문체는 시니컬, 시선은 차갑고, 묘사는 처참하고, 진단은 냉혹하고, 처방은 극단적이라 할 정도로 ‘현실주의적’이다. 평화를 사랑한다고 목소리 높여 외치는 이들이여, 평화를 사랑하는 것으로 평화를 가져올 순 없다, 저 아프리카의 못나터지고 무능하고 잔혹한 작자들을 보아라, 저 동유럽의 걸레 같은 도시들을 보아라, 이슬람의 형편없는 테러리스트들을 보아라! 미국의 힘으로, 강대국들의 힘으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 가난한 제3세계 민중들에겐 차라리 나을 것이다 - 표현은 좀 다르지만, 이렇게 표현해도 카플란이 별로 반박은 안 할게다.

프리드먼은 기본적으로 낙관주의자, 이상주의자다. 9·11 테러 뒤 맛이 확 가버리긴 했지만 그의 시선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옳고 그르고를 떠나 그의 시선은 따뜻하다. 너무나 미국적인 희망의 메시지가 둥둥 떠다니다 못해 세상을 평평히 누른다고까지 하니 압박스러울 지경이다.

프리드먼은 카플란보다 유명하다. 돈도 더 많이 벌 것이다. 사람들은 낙관적인 이야기를 좋아한다? 어쩜 그런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대중적인 인지도 혹은 저술가로서의 인기 면에서 보자면 프리드먼은 저널리즘의 스타이고, 카플란은 황야의 선지자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카플란의 말마따나 미국에서 이상주의자들이 외교를 맡았던 적은 없었다! 민주당 정권 때 국무장관을 한 매들린 올브라이트가 헨리 키신저보다 순진했을는지는 몰라도, 이상주의는 아니었다. 학자들과 (뉴욕타임스 같은) 언론은 이상주의를 떠들어대지만 미 백악관과 국무부는 언제나 현실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정치와 외교는 현실이니까. 카플란과 정반대편에 서있는 촘스키 같은 사람들도 맞다고 할 것 같다.


프리드먼은 오만하고, 카플란은 잔인하다. 이 두 사람을 굳이 이야기하는 것은 잘나가는 저널리스트들로서 미국의 두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들의 시각이 세상을 보는 두 가지 방법을 대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세상은 평화롭다-위험하다’ ‘세상은 평화로워야 한다-평화는 주의주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협상과 대화가 중요하다-협상과 대화는 비효율적일 때가 많다’ ‘글로벌화는 번영을 갖다준다-그 번영을 깨려는 자들이 더 많아진다’ ‘미국식 가치는 선하다-그거 싫어하는 자들도 많다’ ‘착한 사람이 승리한다-착한 것은 승리와 관계 없다’ 등등.

프리드먼은 독자들 혹하게 글을 쓰긴 하는데 통찰력이 없다. 뉴욕타임스 국제문제 전문기자라는 문패 값이 더 높다고 본다. 혹평을 하자면 그 정도 배우고 그 정도 돌아다니면서도 그렇게 통찰력 없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다. 머리가 나쁘다고 할밖엔. 카피를 만드는 것도 영 그저 그런데 억지로 밀어붙이는 느낌이다. 렉서스와 올리브나무, 경도와 태도, 월드 이즈 플랫(The World Is Flat) 이라니.


카플란은 잔인한데 그가 묘사하는 것은 ‘현실’이다. 조지 W 부시가 이 자의 책을 보고 전쟁구상을 했다는 믿거나 말거나 소문이 있지만, 부시 류의 기독교 근본주의와 카플란이 주창하는 ‘강자(强者)의 현실주의’는 맥락이 좀 다르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행여라도 이상주의-현실주의라는 기준으로 사람을 가를 때 내가 후자의 편에 들어갈 것이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사필귀정, 권선징악, 세상은 착한이들의 것이며 인간에겐 이성과 양심을 기대할 수 있다,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은 도와야 하고 법과 정의가 승리할 것이다. 나는 계몽주의 이상주의 이런 것 굳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이성의 힘과 역사의 진보를 믿는다! 그런데 갈수록 현실주의 쪽에 귀가 솔깃해지려는 나를 발견하니 당혹스럽다. 카플란이 말하는 것은 ‘진리’는 아닐지언정 적어도 ‘현실’ 혹은 ‘현실의 한 단면’이니 말이다.

일례로, 아프리카를 볼 때 가장 난감한 것이 개발독재 문제다. 개발독재는 필요한가? 쉽게 말하기 힘든 것들, 더군다나 박정희의 그림자가 여전히 드리워져 있는 한국사회에서 태어나 자란 내가 뭐라 단언하기 힘든 유령 같은 문제들과 부딪칠 때마다 혼란스럽다. 자유, 평화, 민주주의, 인권, 평등, 정의, 테러, 분배, 유엔, 국제기구, 효율성, 자선과 구호.


“세계무역 확대, 인간의 창의성 같은 것들이 세계가 지금 처한 문제들을 해결해주리라고 믿는 기술낙관론자들이 한 무더기 있지만 그따위 것들은 문제가 다 터지고 나서야 뒤늦게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카플란은 프리드먼 같은 한 무더기 낙관주의자들을 싸잡아 평가절하한다. 방금 전 시오노 나나미가 “일본이 60년간 전쟁을 겪지 않아 죽음에 무감각해지다보니 잔혹한 범죄가 많아진다”고 했단다. 이 기사를 보고서 황당해 했는데, 카플란은 조금 다른 맥락에서 ‘60년간의 평화’가 백악관에 철부지들만 들끓게 할 것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평화의 시대에 태어나 자란 스페셜리스트들의 위기관리 능력을 의심하고 있는 것. 이 부분이 들어가 있는 마지막 챕터의 제목은 ‘평화의 위험성’이다. 카플란이 내던지는 말들엔 동의하고 싶지 않은데, 또 100% 틀렸다 할 수 없는 것이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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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1-08 1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딸기 2007-01-08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아니고 영어로 된 건데... 저보다 영어가 출중하시니, 괜찮으시겠지요 ^^
 
아얏! 등에 뭐가 붙었지?
레그힐드 스캐멜 지음, 차은숙 옮김 / 홍진P&M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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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이야기, 특히 유아용 그림책에 나오는 동물들 사정 같은 것, 통 감정이입이 안 되는데 이 책의 주인공 고슴도치 사정은 아주 생생하다. 자꾸자꾸 과일들이 와서 등에 꽂혀버리면 어떡해, 겨울잠 자러 들어가야하는데...



고등학교 교실 창문은 이렇게 생긴 손잡이가 달려서, 그걸 살짝 들어올리고 앞으로 밀어젖혀 여는 그런 창문이었다. 요즘도 그런 창문 있는지 모르겠다. 언젠가 저 손잡이 구멍에다가 아무 생각없이 엄지손가락을 넣었는데 빠지지 않아서 고생했다. 하필이면 종례하러 담임 선생님 오고계신다고 하고, 손가락은 안 빠져나오고... 손가락 관절 빠질 것 같은 고통 속에 힘으로;; 간신히 잡아 뺐던 생각이 난다. 고슴도치는 그때의 나보단 그래도 사정이 낫다. 염소 친구가 등에 박힌 것 다 먹어주어 '윈-윈' 했으니깐. 재미난 그림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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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앗 나라의 루시 - 물구나무 그림책 048 파랑새 그림책 48
소피 드 레슬러 지음, 김효림 옮김 / 주니어파랑새(파랑새어린이)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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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 좋고 그림도 좋은데... 이상하게 흡인력이 없는 그림책.

다섯살 아이가 보기엔 좀 어렵다. 세밀화와 스케치의 중간 정도? 어린 소녀 루시가 조그맣게 되어 집 주변을 여행하며 온갖 풀씨들, 꽃씨들을 구경하는 내용. 씨앗들 생김새를 보니 난 거의 모르겠고, 민들레 단풍나무 정도 구별이 간다. 어릴 적 우리 집 마당에 단풍나무가 있었다. 바람개비처럼 독특하게 생긴 단풍나무 씨를 아주 신기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 후에도 간혹 친구들에게 "혹시 단풍나무 씨앗 알아? 바람개비처럼 생긴 것 말야" 하면서 묻곤 했었다.

'씨앗나라의 루시'를 읽으면 우리집 대문 옆에 있던 단풍나무를 떠올렸다. 그 집은 진작에 허물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내 '유년 시절의 기억'일 뿐, 지금은 사실 그집의 마당이 얼마나 넓었던지 마당엔 뭐가 있었던지 하는 내 기억조차도 의심스러운 처지가 됐다. 그래도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마당있는 집에서 자라 좋았다는 것. 마당에 있던 라일락과 목련은 집을 허물고 새로 지은 뒤에도 여전히 내 친구였다. 라일락 이파리를 깨물면 몹시 쓴 맛이 났었다.

내 아이는 마당 있는 집에서 자라보지 못했고, 어느 집 마당에서 놀아본 기억도 없다. 아이가 두돌이 되기 전에 대전 근처에 있는 어느 전원주택에 데려간 적 있지만 아이가 기억하지 못하니. 씨앗나라 루시를 보는 딸의 반응은 무덤덤했다. 솔직히 말하면 '무반응'이었다. 루시는 씨앗 타고 바람 따라 날아다니는데, 책 내용이 아주 섬세하지도 않고 좀 어중간하다. 나는 정답게 보았는데 딸아이가 이 책 좋아하게 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 드넓은 마당과 집 뒤켠 개울가 여행이라니, 내 딸에게 이건 정말 '딴 세상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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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 2006-12-28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 그런 책들이 있어요. 참 좋은 책인데 선뜻 손이 안가는 책들^^
 
창백한 말 - 애거서 크리스티 재단 공식 완역본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19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영희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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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이라고 해서 처음엔 무슨소리인가 했다.

 

"And when He had opened the 'FOURTH SEAL,' I heard the voice of the 'Fourth Beast' say, Come. And I looked, and behold a PALE HORSE: and his name that sat on him was DEATH, and HELL (Hades) followed with him. And power was given unto them over the fourth part of the earth, to kill with SWORD, and with HUNGER, and with DEATH, and with the BEASTS OF THE EARTH."

 

네 번째 봉인, 창백한 말을 타고 찾아오는 ‘죽음’. 아니나 다를까... 이건 또 윌리엄 블레이크다. 나는 벡신스키, 블레이크, 오키프, 보슈, 이런 식의 우울음침엽기적인 그림들하고는 정말이지 코드가 맞지 않는데 어째 ‘창백한 말’ 듣는 순간부터 블레이크스럽다 싶었던 것을 보면, 언젠가 아마도 이 그림을 본 적이 있었던 듯.


애거서 크리스티의 ‘창백한 말’은 블레이크의 ‘창백한 말을 탄 죽음’과는 좀 색채가 다르긴 하다. 적어도 크리스티의 소설인 이상, 바이블이나 몽상이 아닌 논리적인 결론이 나올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랄까. 소설은 꽤 재미있었다.
어두침침한 영국, 안개 사이에서 벌어지는 살인사건. 주술의 메시지들과 결합된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 의문이 계속 커졌다가 한번에 풀려버리는데 나는 이번에도 범인을 잡지 못했다;; 탐정 노릇은 죽어도 못 하겠지만, 덕택에 크리스티의 추리소설들을 줄줄이 재미나게 읽었으니 추리 재능 없는 것이 별로 아쉽지는 않다. 결론 부분이 다른 작품들보다 몇% 정도 더 허망했다는 것이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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