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 포터와 불의 잔 1 (무선) 해리 포터 시리즈
조앤 K. 롤링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수첩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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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에 빗대어 이야기를 하자면, <드래곤볼>이 생각난다. 토리야마 아키라는 <닥터 슬럼프>와 <드래곤볼>로 유명한데, 나는 닥터 슬램프를 무지무지 좋아했었다. 상상 속에서 가능한 모든 익살을 그림으로 풀어놓는 재주가 놀라운 작가다.

초창기의 드래곤볼에는 토리야마의 재능이 그대로 드러나있다. 아주 재미있고, 웃기고, 명랑하다. 그런데 어찌된 게 뒤로 갈수록 재미가 없어지고, 그림도 제 색깔을 잃어버린다. 이유는 단순하다. 인기를 끌다보니 출판사에서 작가에서 '질질 끌 것'을 요구했고, 결국 드래곤볼은 생명력 없이 연장방영되는 희한한 전투극이 되어버렸다. 요약하자면, '더 강한 적'의 함정에 빠진 셈이다.

주인공 손오공은 적과 싸워서 이긴다. 주인공이니까 이겨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야기가 끝나면 안 되니까, 더 강한 적이 나타난다. 놀랍게도 전투력이 향상된 오공은 적과 싸워 또 이긴다. 그 다음엔 더 강한 적이 나타난다. 이렇게 강하고, 더 강하고, 또 더 강한 적이 나타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반복되는 것이다.

기우일지 모르지만, <불의 잔>을 보면서 드래곤볼이 떠올랐다. 솔직히 난 기다리고 기다리던 <불의 잔>이 조금 실망스러웠다. 어둠의 지배자 볼드모트는 드디어 육신을 얻어 부활했다. 사실 볼드모트의 부활은 1권에서 이미 나왔던 내용이다. 단지 이번에는 '뼈와 살'이 볼드모트에 더해졌을 뿐이다.

작가가 '드디어 부활했다'고 아무리 주장한들, 난 이미 첫 권에서부터 볼드모트의 부활을 봤기 때문에 그다지 극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드디어 부활했다'기보다는 '육신을 얻어 더 막강해졌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나이를 한 살 더 먹은, 이제는 여학생들에게도 관심을 쏟게된 사춘기의 해리 역시 더 강해졌다. 그리고 해리는 볼드모트와 싸운다. 물론 현상적으로는 이긴다. 그러나 작가는 여운을 남긴다. 해리는 싸움에서는 일단 이겼지만-살아서 돌아왔으니까- 볼드모트를 없애지는 못했다. 왜? 5권, 6권, 그리고 7권까지 볼드모트가 나와야 하니까.

더 강한 적, 더 강해지는 주인공의 반복되는 싸움. 물론 조앤 롤링의 작가적 능력에는 높이 쳐줄 부분이 많다. 영상문법에 충실함으로써 영상세대의 어린이들을 페이퍼북으로 끌어들이는 능력도 놀랍고, 과거의 전통들을 아주 맛있게 버무리는 능력도 놀랍고, 이전의 마법동화들에 비해 탁월한 시나리오로 어른 독자들까지 책을 손에 쥐게 만드는 능력도 놀랍다.

그런데 시리즈의 중반부에 해당되는 네번째권을 읽으면서, 어쩐지 씁쓸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꿈이나 희망 같은 것, 동화가 어린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인 그런 것이 빠져있는 것 같아서다. 물론 재미는 있다. 갈수록 기름기가 끼어가는, 스필버그의 영화를 닮아가는 것 같아서 찝찝하긴 하지만. 문제는 그 재미조차 전편이랑 비등비등하다는 것. 내 기대가 너무 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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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니문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마야 막스 그림,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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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정말 바나나에게는 안녕을 고하고 싶다.

바나나에 대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 '가볍다'는 생각과 달리, 나에게 바나나의 작품들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상처와 치유라는 주제는 사실 가볍기보다는 오히려 무겁고 진지한 주제들이고, 그걸 다루는 방식도 가볍지많은 않게 보였다.

물론 바나나의 작품들은 역사적, 사회적 '맥락'들을 모두 끊고 난 뒤에나 가능할 것 같은 극히 개인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기는 하다.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측면도 있고.

그렇지만 상처와 치유라는 문제를 사뿐사뿐(적절한 표현을 도저히 찾지 못해서 이렇게 안 어울리는 부사를...) 다루는 게 마음에 들었고, 또 바나나의 소설을 읽다 보면 따스한 기분이 많이 들어서 좋아했었다.

그런데 <허니문>에 와서는, 너무너무 '지겨워졌다'. 담담하면서도 따뜻한 것, 말하자면 그게 내 취향인데, 그리고 환타지를 조금 섞은듯한 비현실적인 분위기도 나름대로 별미라고 생각했는데, 이 작품은 한마디로 '영 아니다'. 담담한 것이 지나쳤는지 재미가 없고, 현실도피가 너무 심해서 따뜻한 느낌도 안 들고, 그저 세상 사람 누구나 갖고 있는 작은 어두움이나 우울함 따위를 극대화, 극단화시킨 것 같아서 염증이 났다.

작가는 이 책에서 주인공 남녀와 올리브라는 개와의 우정을 계속 얘기하는데, 대체 그 개가 무슨 역할을 하는 건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다. 인간에 대한 애정, 살아야 한다는 의지, 희망을 일깨워주는 개? 아무런 모티브도, 설명도 없이 쉼표만 많이 집어넣는 것은 신경숙이 쓰던 방식 아닌가.

바나나가 나태해진 건지, 독자인 내가 혼자 지겨워진 건지. 혹은 바나나가 늙어버린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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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수리의 눈 힘찬문고 20
론 버니 지음, 지혜연 옮김, 심우진 그림 / 우리교육 / 200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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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동화를 보는 건 처음이다. 호주라는 나라, 어릴 적에는 백호주의라는 이상한 사상을 가진 나라 또는 캥거루나 코알라같은 동물들이 사는 낯선 나라 정도로만 알았었다. 물론 지금도 내게 호주는 낯선 나라다.

호주에 대한 이미지가 바뀐 계기를 굳이 찾으라면 한 장의 그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백인 정복자들이 원주민을 사냥하는 그림을 책에서 본 일이 있다. 말을 탄 백인들이 총과 창을 들고, 도망치는 원주민들을 사냥하는 그림. <독수리의 눈>은, 내가 그림에서 보았던 바로 그 장면을 글로 써놓은 동화다.

동화라고는 하지만, 말 그대로의 페어리 테일은 절대 아니다. 사촌지간인 소년과 소녀는, 가족들이 백인들에게 몰살당한 뒤 다른 부족에게 의탁을 하지만 역시나 도망쳐야 하는 신세. 나는 소년과 소녀가 '어디론가' 도망을 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적어도 '동화'이니까, 분명 어디론가 도망을 쳐서 오래오래는 아닐지언정 행복하게 살 수 있어야 한다고.

그것도 아니라면, 그저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착한 백인'과의 화해 따위를 설파할 것으로 믿었다. 물론 그랬다면 나는 아마 작가를 욕했을 것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어설픈 화해 따위를 주장하지 말라고.

그런데 이 책에서, 소년과 소녀는 끝까지 안식처를 찾지 못한다. 그냥, 계속 도망칠 뿐이다. 가뭄 속에 굶어죽을뻔한 위기를 넘기면서, 백인들을 피해 달아나는 것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 책은, 동화라는 외피를 쓰고서 원주민들의 '역사'를 얘기하려 한다. 그 역사의 내용은 너무나 단순하다. 백인들은 원주민을 짐승처럼 '사냥'했고, 원주민들은 희생됐다. 백인들이 원주민의 문화를 몰살하기 위해 아이들을 부모에게서 떼어내와 따로 격리시켰다든가 하는 따위의 '고도의 식민전략'은 훗날의 일일 뿐이다.

환경운동가들이 종종 인용하는 '시애틀 추장의 연설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이 땅도 이 하늘도 우리가 숨쉬는 공기도 모두 있는 그대로의 것들이지 나의 땅이 아닌데 그것을 어떻게 팔고 사고 할 수가 있느냐고. 물론 인디언들의 외침은 백인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연설문은 자연과 하나되는 마음을 가진 선량한 인간의 목소리였고, 너무나 감동적이었고, 아름다웠다.

나는 결말이 궁금하다. 시애틀 추장은 그 연설 뒤에 어떻게 됐을까. 인디언 '보호구역'에 격리되어 비참한 말년을 보냈을까, 아니면 '서부개척'에 나선 '카우보이'의 총탄에 숨졌을까.

독수리의 눈을 가진 소년은 어떻게 됐을까. 넓디넓은 호주라는 땅에서 백인들을 피해 맨발로 도망치던 소년은, 어딘가 숨어살 구석을 찾았을까, 아니면 결국에는 백인들의 사냥감이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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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환 2004-12-31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마..늙을 때까지 이곳저곳으로 달아다니다가 세상을 떠났겠죠.
 
지하철
아사다 지로 지음 / 태동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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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철. 가장 서민적인 교통수단이 역사를 넘나드는 마법의 통로로 탈바꿈한다. 그러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이 여행에는 어떠한 낭만이나 환타지도 없다. 한 남자가 아버지의 궤적을 거꾸로 밟아가며 보고싶지 않았던 아버지의 인생을 보게 되는, 가슴 답답하고 두려운 여행이다.

고누마 신지는 어릴적부터 대재벌인 아버지의 횡포와 독선에 짓눌려오다가 가출을 한다. 아들이 아버지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반항은 집을 버리는 것이었고, 또 아버지가 줄 수 있는 막대한 재력과 특권을 거부하는 것이었다. 신지는 아버지에게 구박만 받았던 어머니와 함께 조그만 집에 살면서 지하철 구내상가에 사무실을 둔 속옷회사의 보잘것없는 샐러리맨으로 살아나간다.

행복한 사람은 없다. 마음 좋은 속옷회사의 사장은 더이상 '발전'이라고는 꿈도 꾸지 못하는 소시민에 불과하고, 신지와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디자이너 미치코는 좁은 물에서 실력발휘조차 못하고 사는 떠돌이 고아같은 여자다. 신지의 어머니는 죽은 맏아들에 대한 기억에 머물고 있고, 동생 게이조는 아버지곁에 남아 대기업을 이끌고 있으면서도 소심증과 나약함을 어쩌지 못하는 불안정한 재벌2세가 되어 있다.

동창회. 졸업 이후에 사회적 지위와 명예, 돈을 얼마만큼 갖고 있는지를 과시하기 위한 '명함돌리기' 행사장. 신지는 동창회장에서 비참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 뒤 술에 취해 지하철을 탄다. 이 때부터 신지의 여행이 시작된다. 태평양전쟁 직후 미군점령기의 암시장,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만주, 전쟁 직전 비참한 공황기의 풍경.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지하철 여행에서 만난 '아무르'라는 다부진 청년이 자신의 아버지임을 깨닫는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짧은 여행을 통해 신지는 독선과 고집과 폭력으로 똘똘뭉친 아버지라는 인물을 이해하게 된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험한 세상을 헤쳐온 인물'이었다. 그리고 '가족의 모순'은 신지가 태어나기도 한참 전인 전쟁 때부터 이미 씨앗을 품고 있었다.

가족. 피로 연결된 이 조직은 제도로부터 충실한 지원을 받고 있으면서도 사실은 얼마나 허약한지. 철옹성처럼 든든한 가족이 과연 세상에 존재하기나 할까. 모든 가족은 균열의 틈새를 갖고 있다. 신지 가족의 균열은 어릴 적 형의 자살로 일찌감치 터져나온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미치코, 갑작스레 신지의 여행에 동행하게 된 불륜의 여인이 신지의 배다른 여동생일 줄이야. 시간을 되돌이켜 미치코는 자신의 출생을 막고 사라져버리지만 가족의 균열을 그렇게 되돌릴 수는 없었다.

아사다 지로는 <철도원>과 <프리즌호텔> <천국까지 100마일>에서처럼 이 책에서도 가족의 문제에 깊이 파고든다. 영원히 끊을 수 없는 사슬인 듯 보이면서도 실상은 곳곳이 갈라지고 터져나간 허약한 성(城). 사회적 요인과 개인적 요인들이 얼키고 설켜 이 성에 균열을 가져오고, 그것은 또 종종 개인의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곤 한다.

작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에 대한 애정을 놓치지 않는다.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거니와 균열의 틈새에서도 실낱같이 이어지는 사람에 대한 애정, 한사람 한사람이 간직한 '역사'에 대한 애정. 허울 뿐인 가족이 아닌 진정한 인간애의 복원, 작가가 꿈꾸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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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즌 호텔 - 겨울 이야기
아사다 지로 지음 / 우리문학사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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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사람 사이의 '유대관계'란 대체 어떤건지 새삼 궁금해집니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 중에 그렇게 인간을 통째로 내어던진 그런 관계가 있었나 의문이 드네요.

어릴 적에 엄마는 동네 건달이랑 도망쳐버리고, 아빠는 공장일밖에 모릅니다. 아홉살때부터 40줄에 접어들기까지 못생긴 새엄마를 두들겨패는게 일인 남자가 있습니다.
이 남자는 소설가로 성공을 한 다음에 한 여자를 샀습니다. 기요코라는 그 여자는 머리가 모자라는 미인입니다. 기요코의 남편은 살인을 두 차례나 저지르고 감옥에 갔습니다. 언제 나올지, 아니면 아예 못 나올지 모릅니다.
소설가는 가난한(우리 식으로 말하면 생활보호대상자) 기요코에게 매달 돈을 주는 대신, 기요코에게 심부름을 시키고 비서로 부려먹고 생각 날 때마다 때리고 폭언으로 마음에 상처를 입히고 섹스파트너로 삼습니다.

여기까지는 그냥 비뚤어진 소설가의 악행 정도였는데, 그만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기요코에게는 병든 모친과 여섯살난 딸 미카가 있습니다. 소설가는 피 한방울 안 섞인 미카에게서 어린 시절의 자신을 발견합니다. 그럴 때마다 미카를 쥐어박고 구박합니다. 사실은 미카랑 기요코가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면서도요.

'가을 이야기'에서, 소설가는 미카에게 자신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좋다고 허락합니다. 제가 궁금한 건, 인간관계 중에서 가장 끈끈한 관계로 여겨지는 가족이란 것이 어떻게 형성되는가 하는 겁니다. 소설가와 어린 미카, 눈물이 날 정도로 감동을 받았습니다. 눈에 띄게 감동적으로 쓰여진 것 같지도 않은데, 작가가 사람의 마음을 야쿠자들이 쓰는 사시미칼 같은 걸로 콕콕 건드립니다.
겨울이야기에서 감옥호텔을 다시 찾은 소설가, 바보 미녀 기요코를 너무 사랑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알 수 없어서 불쌍한 미녀를 눈속에 파묻어 죽이려고 했다가 결국 다시 파냈습니다. 눈덮인 설원에서 소설가는 기요코를 끌어안고 엉엉 울면서 청혼을 했습니다.

제가 읽은 몇 안되는 일본 소설을 볼 때, 작가들이 참 글을 잘 쓴다는 생각이 듭니다. 무라카미 류도 그랬고, 하루키, 바나나 모두 참 잘 씁니다.
아사다 지로 역시 글을 잘 씁니다. 내용은 잠시 접어두고, 글 솜씨만 놓고 보자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퍼즐맞추기를 좋아하는 제 취향에는 딱입니다. 앞에 나왔던 노래가사, 편지의 한 구절, 말 한마디, 등장인물의 생김새를 묘사한 표현 등등이 뒤에 가서 착착 맞아떨어지는 걸 보면 꼭 추리소설을 읽는 기분입니다. 그리고 스토리가 단단합니다. 딴 건 다 치우고 줄거리만 쭉 늘어놔봤을 때 얘기가 되는 소설과, 줄거리만 써놓고 보면 굉장히 유치한 '불륜소설'은 읽을때의 재미가 확연히 다르죠.

무라카미 류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른바 80년대 세대라는 젊은 작가들이 이렇게 일본 것을 베껴왔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것이 일본소설을 읽은 저의 첫번째 느낌이었습니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장르가 다양하다는 겁니다. 소재나 상상력 면에서 말이죠.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대표적인 국내 작가들은 문장이나 단어 하나하나를 열심히 다듬는데 비해서 상상력은 절대빈곤 상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바나나도 그렇고 하루키도 그렇고 아사다 지로도 그렇고, 독특하다는 느낌을 참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일본 소설들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규칙성은, 소재나 표현이 구체적이라는 겁니다. 저는 '의식의 흐름'류(관념적이고 표현도 정교하지 못하면서 작가 자신의 개인적인 고백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소설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인지, 아주 구체적인 표현이 들어간 일본 소설들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 역시 일본문화를 근거없이 추종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 들긴 하지만요.

요즘 계속 감옥호텔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곳을 떠나기가 싫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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