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우리의 밥상을 지배하는가
브루스터 닌 지음, 안진환 옮김 / 시대의창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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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조작(GM) 농작물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음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지만, 정작 GM콩을 옹호하는 대표적인 인물이 브라질의 유명한 '좌파 지도자' 룰라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될까? 브라질은 세계적인 대두 생산국이고, GM콩과 일반콩 모두 대량재배하고 있다. 그래서 브라질의 룰라대통령은 국제무대에서 선진국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자국내 농가들 때문에 GM 문제에서는 함구하거나, 어정쩡한 입장을 취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글로벌화'된 세계농업의 한 단면이다.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추억은 방울방울'에는, 여주인공 타이코가 소학교 5학년 시절 우유를 먹기 싫어하는 친구 대신 급식우유를 마셔주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 어린시절을 돌이켜봐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장면이다. 거의 강제적으로 실시됐던 우유급식, 그리고 아주 어린시절의 '혼분식 장려' 구호들 같은 것들. 이것은 '글로벌화'된 세계농업의 역사적 단면. 2차대전 뒤 미국이 일본과 한국 등에 원조식량으로 밀가루를 퍼부으면서 '미국식 입맛'이 함께 이식됐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내가 먹는 쌀을 생산하는 우리나라 시골의 농부아저씨나 내 밥을 만들어주는 엄마가 아닌 '누군가가' 우리 밥상을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누가, 어떻게, 얼마나, 나의 밥상을 바꾸는데 관여를 했는지는 쉽게 눈에 보이지 않는다.

캐나다의 '농업분석가'라는 브루스터 닌은 수년간 발로 뛰어 모은 정보들을 총동원해 저 질문에 대한 일단의 대답을 찾는다. 이 책은 미국의 초대형 농산물 유통업체(실제 사업분야는 굉장히 다양하지만) 카길을 파헤친다. 카길의 사업분야, 사업방식을 집요하게 추적한 저자의 노력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을 수 없다.

'책' 자체만 놓고 봤을 때에는 많은 것이 아쉽다. 저자는 카길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소개해놨지만 사실 재미는 별로 없다. 가장 큰 단점은, 카길이라는 '보이지 않는 거인'(Invisible Giant는 책의 원제목이기도 하다)에게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이런 거인을 쫓는 작업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가 오히려 불분명하게 느껴진다는 점. 다시 말하면 무엇을 비판하고자 하는 것인지 불명확하다는 얘기다. 이는 책이 카길을 추적하는데에 전념할 뿐 글로벌 농업분업체계에서 양산되는 '피해자'들을 안 다루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책을 꼼꼼히 읽어봐도, 카길은 분명 '아주 나쁜 회사'는 아니다. 대체 글로벌화 시대에 '가장 나쁜 기업'과 '덜 나쁜 기업'을 나누는 기준이 뭐가 있겠는가. 대략적으로 봐도 카길은 월가의 기업들과 달리 '실물경제'에 관여하고 있는 기업이고, 자본의 지역 재투자라든가 환경정책 면에서도 다른 초국적기업들에 비해 특별히 나쁜 점수를 줄 이유는 없다. 책은 카길의 사업확장 역사를 소개하는데 대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회사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기업홍보차원의 '기업사'를 읽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분명한 것은 카길이라는 회사가, 그 엄청난 규모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그늘에 가리워진' 존재였다는 점이다. 내가 처음 카길이라는 이름을 들었던 것은 92년 우루과이라운드 반대 시위가 한창일 때였다. 인공위성까지 소유하고 전세계 농산물을 주무른다는 거대한 회사, '칼로즈'로 대표되던 '미국쌀의 압력' 뒤에 이 회사가 있다는 얘기였다. 그리고 다시 카길이라는 이름을 듣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몬샌토와 합작해 생명과학회사를 만들었다는 뉴스를 통해 카길은 다시 내 눈에 들어왔다.

책은 그늘에 가려져 있던 카길이라는 회사가 대체 어떤 회사인지, 얼마나 거대한 회사인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브라질이 어떻게 GM콩의 세계적인 생산국이 됐는지, 세계 곳곳에서 '농업의 글로벌화'라는 이름으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한 단편적인 스케치들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이 책을 통해 얻은 수확 중의 하나다. 다만 이런 '농업 자이언트'의 존재가 곡물 한 알에 땀방울을 쏟는 세계 곳곳의 농민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저자는 카길을 '자이언트'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괴물에 맞서야만 하는 농민들의, 그리고 어차피 밥상위에 놓인 무언가를 먹고 살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희망은 어디에? 아쉽게도 저자는 이에 대한 생각은 말미에 아주 간단히만 언급한다. 반다나 시바가 주창한 '사티아그라하(씨앗)' 운동과 같은 '풀뿌리 운동'만이 자이언트들의 밥상 지배에 맞서는 대안이 된다는 것이다. 카길과 같은 회사의 실체를 알려주는 작업은 의미가 있지만, 읽는 이에게 그만큼 고민거리를 많이 던져준다.

고민해도 좋으니, 다음엔 누군가가 몬샌토에 대해 이렇게(이보다는 좀 재미있게) 파헤친 책을 써줬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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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냐 2004-12-24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지 취재가 안되서 그렇지, 맘 먹으면 직접 해볼만 하지 않나? 몬샌토 말야...^^

딸기 2004-12-24 0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지'가 어디인지를 모른다는 점부터 문제 아닐까?

몬샌토를 '현지취재'한 기사를 본 적이 있기는 있어. 딱 한번.

몬샌토의 '농장'을 취재한 기사였는데-- 카길보다 아마 더 취재하기 어려울걸. ^^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수은 옮김 / 문학동네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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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올로 코엘료의 소설 중에 가장 먼저 읽은 것은 '연금술사'였다. 어떻게 그 책을 고르게 되었을까? 당시 나는 코엘료라는 작가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었고, 듣고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알라딘을 돌아다니다가 정말로 우연히 책의 표지를 보게 됐다. '연금술사', 매혹적인 제목, 예쁜 표지, 라틴스러운 이름. 그런 것들에 이끌려 충동적으로 책을 샀고, 그다지 두껍지 않은 저 소설을 아주 오랜시간에 걸쳐 읽어내려갔다.
'아주 오랜시간'이 되어버린 것은 내 게으름탓도 있지만, 저 책을 읽기시작한 뒤 잠깐의 여행을 다녀와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는 여행지에서 미처 읽지 못한 결말 부분을 이리저리 예상해보고, 저 책이 '지금 내게' 무슨 메시지를 던져주는 것인지 골똘히 생각해봤다. 생각의 내용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그저 잡념에 불과한 것이지만, 한 소설이 내게 부과해버린 '생각의 과정' 혹은 '생각의 필요성'은 생생히 기억에 남아있다.

다소 신비주의적이고 몽환적이기까지 한 '연금술사'라는 책의 마력에 끌려 코엘료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봐야겠거니, 하고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7일째...'라는 시리즈들을 모두 읽기까지는, '연금술사'로부터 다시 2년이 걸렸다. 그 사이 코엘료 소설을 읽는 친구들이 많이 생겼고, 드문드문 친구들의 입을 통해 '독후감'을 들을 수 있었다. '연금술사'가 내게 보여줬던 매혹적인 세계와는 달리, 코엘료 소설들에 대한 평가는 사실 그리 후한 것만은 아니었다.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라는 기나긴 제목의 이 소설은 '사랑과 은혜'라는 기독교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여러 종류의 사랑을 이야기한다. 신에 대한 사랑, 만인을 향한 박애주의적 사랑, 연인을 향한 사랑과 소유욕, 더 큰 사랑을 위한 '도구'로서의 사랑, 사랑이 야기하는 불안감들. 이런 사랑들을 다루는 방법은 -전형적인 '코엘료식 신비주의'라 할까. 
그런데 소설이라기보다는 잠언류에 가깝다 할 소설들, 신과 선악과 사랑의 이야기들이 읽는 이에게 마력을 발휘하는 일이 늘 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 심오하고 아름다운 이야기일수록, 마력을 발휘하는 기회는 적다. 독자의 상태와 책의 메시지가 용케도 맞아떨어졌을 때, 그러니까 '기적을 원하는 이에게 기적이 나타난다'고 해야 할까. '연금술사'는 기적을 원했던 내게 마력을 보여줬던 소설이었고, 이 '피에트라...'는 일상의 자질구레한 일들에 매달려있을 뿐인 내게는 너무나 종교적이다못해 뜬구름잡는듯한 얘기였다.

'피에트라...'가 사랑의 문제를 다룬다면, '그리고 7일째...' 시리즈의 또다른 작품인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정신병원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배경으로 '죽음'의 압박감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그린 소설이다. '피에트라...'에 비하면 플롯이 있고 재미도 더 있다. '악마와 미스프랭'은 선악의 문제를 다루지만 줄거리가 재미있는 듯하면서도 결말이 뻔한 것이어서 좀 김이 빠졌다.
파울로 코엘료가 훌륭한 이야기꾼인 것은 틀림없다. 저렇게 원초적이고 심오한 주제들을 잠언동화식으로 꾸며내면서도 책장이 술술 넘어가게 만드는 것을 보면. 적어도 세 권의 소설을 읽으면서 이 작가의 능력에 대해 실망을 하지는 않았다. 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 반감을 느끼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지만 역시나 책에는, 읽는 사람에 따라 '읽을 때'가 따로 있는 것 같다. 코엘료의 소설은, 이제 이것으로--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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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INY 2004-12-20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독자의 상태와 책의 메시지가 용케도 맞아떨어졌을 때, 그러니까 '기적을 원하는 이에게 기적이 나타난다'고 해야 할까. -> 저도 공감합니다.

딸기 2004-12-20 1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리니님, 반갑습니다. 확실히 책이란, '언제 읽었느냐'에 따라서 감동이 많이 달라지는 것 같아요.

로즈마리 2004-12-20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에는 때가 있다는 게 맞는 것 같습니다. 때로 어떤 책들은 인연이 되면 만날 수 있겠지 싶은 때가 있더라구요. ^^

딸기 2004-12-20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가 하면, 영 인연이 없는 책도 있는것 같아요.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2
올더스 헉슬리 지음, 이덕형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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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올더스 헉슬리는, '멋진 신세계'라는 멋진 반어법으로 디스토피아적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해낸 이 사람은, 사실은 누구보다도 유토피아에 대해 많이 상상해본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건 그냥 나의 상상이다. 어쩌면 올더스라는 사람은, 사랑이라는 이름의 소유욕과 폭력적 배타적인 가족제도에 상처를 많이 받았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 자신 유달리 독점욕이 강한 사람이었고, 그의 연인 혹은 아내는 끊임없이 그에게서 '해방'되는 것을 마음속으로 꿈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올더스는 자기 내부의 욕망에 스스로 질식해 죽을 것 같았고, '짐승같은 본능'이 판치는 세상을 벗어나고 싶어했는지도 모른다. 그를 옥죄어왔던 현실은 그것 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극심한 불평등과 계급화, 계급간의 격렬한 투쟁, 행복을 모르는 사람들, 끊임없이 '위로 올라가려' 하면서 싸우는 사람들, 그 속에서 올더스는 지옥을 보았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는, 자신과 인류의 목을 죄어오는 것 같았던 현실 대신 유토피아를 꿈꾸게 되었는지 모르지. 갈등이 없는 사회,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는 사회, 모두가 행복을 만끽하는 사회, 생로병사의 악순환을 극복한 사회, 노쇠 혹은 죽음에 대한 공포 따위는 없는 사회.

지긋지긋한 인간사의 올가미를 벗어나기 위해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에 몰두했던 올더스는, 스스로 머리 속에 '창조'해낸 유토피아마저 인간성이 말살된 세상임을 어느 순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을지도 모른다. '소설'이라는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는 유토피아를 창조하려 했는데, 유토피아의 미래는 이미 그의 희망사항을 넘어서버렸다. 어느 순간 그가 발견한 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라, 그가 떠나고 싶어했던 현실과 똑같이 숨막힐듯한 디스토피아였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어느 쪽에도 발붙이지 못한 정신적 '야만인'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자살뿐이다.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에 대해 소개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워낙 유명한 책이어서, 읽어보지 않은 사람도 이 책이 '무엇에 관한' 소설인지 정도는 알고 있을 테니까. 소설 그 자체로도 이 책은 훌륭하다. 재미있고, 짜임새 있다. 쓰여진 시기를 감안할 때 여러 가지 탁견을 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유전공학적 디스토피아에 대한 소설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이 책에서 그것 이상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내게는 특별한 소득이었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소설에 묘사된 '포드 기원 600몇년'의 세상에 대한 묘사가 '모성(母性)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었다. 헉슬리는 소설의 상당 부분을 '사랑에 대한 감정'을 설명하는데에 할애하고 있다. 어찌 보면 '유전공학적 디스토피아'는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도구 정도로 보인다 싶을 정도로, 헉슬리는 사랑이라는 문제에 집착한다. 인간이 그것을 정의하는 방식, 받아들이는 방식, 그리고 거부하는 방식.

'모성 신화가 사라진 사회'를 디스토피아의 1조로 삼은 것은, 막 꿈틀거리고 있던 페미니즘에 대한 헉슬리 나름의 반발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미래소설이라고는 하지만 이 책은 분명 '헉슬리의 시대'를 담고 있다.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묘사되는 지역은 지금까지도 현실로 존재하는 '인디언 보호구역'을 그대로 닮았고, 식민지적 인종관계를 계급관계로 치환시킨 것 또한 그렇다. 남녀차별적 역할구분이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도 헉슬리 시대의 유산일지 모르겠다.

특기할 만한 것은 '멋진 신세계'에 대비되는 '구세계', 즉 '야만인들의 세계'를 보는 헉슬리의 시각이었다. 유토피아를 가장한 포디즘 세계에 대한 헉슬리적인 경멸감 못잖게, '야만인'들을 보는 눈에도 증오가 묻어난다. 물론 여기서의 '야만인'들은 서구 제국주의자들이 주창했던 인종적 '야만인' 개념과는 다른 것이고, 아마도 헉슬리를 둘러싸고 있던 현실 모두를 지칭하는 것일 터이다. 그가 묘사한 이 '야만인'들의 세계는 소유욕과 폭력으로 점철된 사회다. 적어도 헉슬리는 과학기술의 우위에 대한 반발로 '고상한 야만인'을 동경하는 짓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멋진 신세계'에 들어온 야만인 '존'의 운명은 그래서 비극으로 귀결된다. 야만인 보호구역으로 돌아가는 것도, 신세계에 적응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은, 그리고 스스로 허용하지 않은 야만인 존에게 결론은 자살뿐이었다. 작품해설에서 재미난 얘기를 읽었다. 헉슬리는 이 책을 쓰고 10여년이 지난 뒤에, "지금 다시 쓴다면 존이 다른 곳에 '제 3의 세계'를 만드는 것으로 결론을 냈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책은 물론 '멋진 신세계'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다. 하지만 어떨까? 내 경우는 어떤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을까? 나는 과연 저 멋진 신세계를 거부하려 하고 있는가? 책을 읽으면서 끊임없이 머리 속을 잠식했던 것은 이런 의문이었다. 반(反)이상향에 대한 공포 섞인 상상이 과학기술 시대를 만나 '기계인간' 따위의 모티브를 발견하고, 더욱이 전체주의와의 결합이라는 계기를 통해 '장르'로서의 매력을 확실하게 갖추게 된 것은 인류 역사에서 극히 최근의 일이다. 하지만 인간들은, 유토피아에 대한 상상 못잖게 오래전부터 디스토피아를 상상해왔는지도 모른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디스토피아 소설류의 첫 번째 작품은 '메트로폴리스'였다. 영화 '메트로폴리스'를 만든 프리츠 랑 감독의 부인이기도 한 Thea von Harbor의 이 소설은 내게 어찌나 끔찍한 기억을 남겼는지! 국민학교 5학년 때였으니, 그런 류의 책을 읽기엔 아무래도 너무 어렸다. 뒤에 중학교에 들어가 영어를 배울 때 metropolis 란 단어를 보고 우울해졌을 정도였으니. 조지 오웰의 '1984년'은 그저 무서웠다, 이런 느낌으로만 남아 있다. 메트로폴리스가 '계급'이라는 낯선 문제를 어린 나에게 던져줬다면, 1984년은 '독재' 혹은 '전체주의'라는 것에 대한 공포를 심어줬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어떤가. 나는 어릴적부터 내 나름대로 '유토피아'를꿈꿔왔다(어린아이들 모두가 그런 상상을 해보았겠지만). 나만의 유토피아는, 공상과학만화에서 보는 것처럼 '알약 하나만 먹으면 며칠씩 굶어도 되는' 그런 곳이었다. 먹고 자는 것이라면 물론 나도 좋아하지만-- 먹고 자는 따위의 '동물적인' 일에 시간을 보내기엔 어린 시절의 내게는 재미있는 일들이 너무 많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나는 어릴 적부터 '동물적 본능을 벗어난' 사회를 맘속으로 꿈꿔왔었다.

좀더 자라난 뒤, 그리고 어른이 된 지금 유토피아의 목록은 좀더 복잡해졌다. 굳이 말하자면 헉슬리가 묘사한 '멋진 신세계'에 좀더 가까워졌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소유하고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억압하는 것은 이제 그만했으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부작용이 없다면 환각제의 힘을 빌어서 행복을 얻은들 어떠하리... 유전공학 등 과학기술과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폭력도 무시무시하지만 사랑 혹은 가족의 이름을 걸친 일상의 폭력도 그 못잖게 무시무시하다. 그리하여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진 나만의 유토피아를 꿈꾼다. 하지만 내 머릿속 시뮬레이션은 언제나 단순한 희망사항의 나열에 그칠 뿐, 그 이상의 진전을 보지 못한다. 헉슬리가 소설에 표현하지 못한 '제3의 세계'는 어떤 곳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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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붕잡억 - 문화대혁명에 대한 한 지식인의 회고
계선림 지음, 이정선,김승룡 옮김 / 미다스북스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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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좋은 책'에도 여러 종류가 있는 것 같다. 다 읽고난 뒤 "아, 재밌었다!" 하면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장을 덮을 수 있는 책이 있는가 하면, 책장을 덮은 뒤에도 생각할거리가 뒤통수에 달라붙은듯 마음이 묵지근해지는 그런 책도 있다.
이 책은 분명히 후자 쪽이다. 책을 집어들었던 초반에는 '지지부진한 노인네 잔소리같으니'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고, '요점만 간단히' 하지 않고서 질질 끄는 것이 맘에 안들기도 했다. 뒷부분으로 갈수록 그 '노인네 잔소리'가 마음에 걸려서 읽는 속도는 오히려 느려졌다. 다 읽은 뒤에는 뒤통수에 달라붙은 '생각거리'의 무게가 제법 무거워서 주체를 못하게 됐다.

우붕잡억. 문혁때 지식인을 잡아가두고 이른바 '노동개조'를 시켰던 헛간(외양간)을 우붕이라 부른다고 한다. 우붕에 갇혔던 저자가 우붕시절의 기억들을 끄집어내 낱낱이 드러내보이는 것이 이 책, '우붕잡억'이다. 책에는 '문화대혁명에 대한 한 지식인의 회고'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문화대혁명, 그리고 '지식인'. 책의 화두는 이 두 가지다. 둘 중 어느 하나도 가벼운 것이 아닐진대, 아흔을 넘긴 '노지식인'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정제되고 또 정제되어, 천근의 무게를 가진다. 독일에서 인도학을 공부하고 베이징대에서 동양학부 교수로 평생을 보낸 저자 계선림은 중국에선 꽤 유명한 '지식인'인 모양이다. 자꾸만 '지식인'이라는 말에 작은따옴표를 치게 되는데, 책의 3분의2 정도는 문혁 당시의 '인간 학대'를 서술하고 있지만 뒷부분 3분의1은 '지식인론'에 촛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문혁 당시 '사냥감'이 됐던 사람들에게 가해진 폭력의 잔혹함만을 보자면, '사람아 아 사람아' 같은 소설을 읽는 편이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이책 '우붕잡억'은 제목에서 보이듯이 문학적이라기보다는 시시콜콜한 우붕의 기억을 나열하는데 그치고 있고, 또 거의 모든 단락이 반어법으로 구성돼 있어서 보다가 질리기 십상이다.
저자의 진면목, 그러니까 '노인네 잔소리'가 가슴을 치며 머리속에 들어오는 것은 뒷부분에 가서다. 저자는 '중국의 지식인'을 강조하고 있긴 하지만,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지식인의 존재 의미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체 지식인이란 무엇이고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저자는 '체면'과 '기개'같은 개념을 들어 중국 지식인의 역사적 기능을 소개한다. 노학자 스스로는 '정치적 감각이 없고 아둔했다'고 하면서도 지식인과 정치/사회를 분리시키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지식인의 존재의미 중에 '저항'이라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중국에서 베이징대 부총장과 이러저러한 학술단체의 우두머리를 맡았다고 하는데, 저자의 글은 다분히 고전적이다. 문장도 고전적이고, 생각도 고전적이다. 일종의 '선비정신'이 책 전반을 관통한다. 격랑의 세월 속에서도 아흔이 넘도록 그런 정신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의 글이기에 책이 더욱 귀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가벼운 글들이 난무하는 시대에 이런 이의 글이 묶여져나온다는 것만 해도 반가운 일이다

문혁에 대한 회고도 회고이지만, 뒷부분에 실린 저자의 '지식인론'은 학문을 업으로 삼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꼭 읽어볼법한 글이고, 더불어 저자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띤 역자들의 '후기'도 읽어볼 만하다. 번역이건 편집이건 몹시 꼼꼼하게 성의를 기울인 티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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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고통 - 인간의 고통에 대한 사회학적, 의학적, 문화인류학적 접근
아서 클라인만 외 지음, 안종설 옮김 / 그린비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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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 이렇게 만들면 싫단 말이다...



책소개를 보고 흥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선뜻 구입했는데, 의미있고 재미있을 수 있는 주제를 이렇게 재미없게 만들다니. 이건 저자들 탓.
번역도 참으로 엉터리. 도대체 알아먹을 수가 없다.

'지지한다'-> 이 동사는 사람이 주어가 돼야 한다. 사물 혹은 주의주장에다가 이런 동사를 붙이면 열받지...

'전유한다'-> 대체 이런 어려운 말이 뭣땜에 그렇게 자주 나오는거지? 특히 사회과학이란 장르에서 이 말 참 많이 나오는데, 역시나 열받는다.

강제한다-> 강제로 ~하게 한다, 라면 몰라도, '강제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못봤다. 근데 번역책엔 이 말이 되게 많다. '무엇이 번역가들이 강제한다는 표현을 전유하게끔 강제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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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레혼 2004-11-30 0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신랄한 유머!

마음에 안 드는 책, 이렇게 리뷰 쓰면 되는 거군요! 한수 배워 갑니다.

딸기 2004-11-30 00: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헤헤 라일락와인님, 그렇게 말씀하시니 제가 너무 나쁜사람 같잖아요 ^^

숨은아이 2004-12-01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클클클...

비로그인 2004-12-06 0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단서 정도의 가치만 있는 것 같아요. 저는 관심주제상 그것으로도 충분했는데, 딸기님 서평 보니, 제가 미안할 지경이군요. 크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