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를 쉽게 교체할 수 있기 위해 통조림처럼 평평하게 만든 머리, 번개를 끌어들이기 위해 목에 박아 넣은 큰 못, 위압감과 순수함이 동시에 드러나는 복잡 미묘한 표정. 우리가 생각하는 괴물 ‘프랑켄슈타인’에 대한 이미지는 이 영화에서 시작됐고 완성되었다. 이후에 제작되는 모든 프랑켄슈타인 관련 영화들은 이 영화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의 이름이 아니라 괴물을 창조한 과학자의 이름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를 잘못 알고 있다. 아마도 그런 오해를 증폭시킨 것은 바로 영화 포스터 때문이 아니었을까? ‘프랑켄슈타인’이라는 타이틀 밑에 그려진 괴물의 이미지는 ‘괴물=프랑켄슈타인’이라는 공식을 무의식적으로 인식하게 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이후에 나오는 속편들의 제목 또한 그런 오해를 만들기에 충분했다. (<프랑켄슈타인의 신부, 아들, 집, 기타 등등.>) 그만큼 이 영화에 등장한 괴물의 이미지는 강력했다. 이 모든 것은 이 영화를 연출한 제임스 웨일(James Whale)의 비전과 잭 피어스(Jack Pierce)의 분장, 괴물을 연기한 보리스 칼로프(Boris Karloff)의 뛰어난 능력 때문이었다.

   페기 웨블링(Peggy Webling)의 희곡을 각색한 영화는 메리 셸리의 원작과는 꽤 많은 차이가 있다. 원작에서 주인공인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친구인 앙리 클레르발이 영화에서는 헨리 프랑켄슈타인(Henry Frankenstein), 빅터 모리츠(Victor Moritz)로 서로 뒤섞여 있다. (조금 더 들어가자면, 영화에서 프랑켄슈타인의 정확한 이름은 ‘하인리히 헨리 프랑켄슈타인, Heinrich “Henry” Frankenstein’이다. 이 중 ‘하인리히’는 원작에서 프랑켄슈타인이 생명의 신비에 빠져들도록 한 16세기 독일의 마술사이자 오컬트 작가이자 신학자이자 점성가이자 연금술사인 ‘하인리히 코르넬리우스 아그리파 폰 네테쉼, Heinrich Cornelius Agrippa von Nettesheim’에서 따온 것이다.) 게다가 빅터 모리츠는 절친인 헨리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애인 엘리자베스 라벤차 사이에서 갈등을 겪는다. 원작에서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던 프랑켄슈타인의 창조 행위는 영화의 1/3을 할애하면서 감독의 역량을 맘껏 쏟아 붓는다.

   영화는 권선징악의 해피엔딩으로 끝이 나지만, 찜찜한 구석을 지울 수는 없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악이라기보다는 백치에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가 살인을 저지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떤 의도가 있었다기보다는 그가 (방금) 배운 논리에 따른 행동이었다. 공동체에 속하고 싶지만 남들과 같지 않아 공동체에서 배척당하는 괴물. 후에 팀 버튼(Tim Burton)이 창조해낸 수많은 사랑스런 괴물들의 모체가 바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다.

   2014년 1월 21일 블루레이로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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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 설 다우리(J. Searle Dawley) 감독의 1910년 작 <프랑켄슈타인>은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각색한 최초의 영화이다. 무성영화에 10분 남짓한 상영시간으로 원작의 내용은 대폭 수정되었는데(그 때문인지 영화 처음에 “셸리 여사의 소설을 자유롭게 각색”했다고 명시했다), 원작에서 차용한 부분 중 절반 이상이 프랑켄슈타인이 괴물을 창조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총 9개의 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신을 설명하는 자막은 다음과 같다.

 

#1 프랑켄슈타인이 대학으로 떠난다.

#2 2년 후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의 신비를 알아냈다.

#3 실험 직전.

#4 완전한 인간 대신에, 프랑켄슈타인의 마음 속 악마가 괴물을 만든다.

#5 프랑켄슈타인은 그가 만든 무시무시한 피조물의 광경에 끔찍한 충격을 받는다.

#6 귀향.

#7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피조물이 나타나고 처음으로 그 자신을 본 괴물은 창조주의 애인을 질투한다.

#8 결혼식 밤, 프랑켄슈타인의 착한 심성이 발휘되기 시작한다.

#9 사악한 마음의 피조물은 사랑에 압도당하여 사라진다.

 

   이 중 프랑켄슈타인의 창조 과정이 흥미로운데, 과학적인 방법이 아니라 (마치 마녀처럼) 마법으로 ‘괴물’을 창조해낸다는 점이다. 이것은 프랑켄슈타인이 창조가 과학이 아닌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사악한 의도’로 ‘생명’을 창조해낸다는 것은 악한 행위를 설명하는 영화적 표현이기도 하다.

   워낙 짧은 시간에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탓에 프랑켄슈타인과 괴물과의 갈등이 단순해진 점은 있지만, 재치 있는 반전으로 영화를 마무리한 점, 그리고 ‘처음으로’ 프랑켄슈타인이 만든 ‘피조물’의 모습을 스크린에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언급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2014년 3월 13일 유튜브에서 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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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60
메리 셸리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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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리 셸리(Mary Shelley)의 『프랑켄슈타인(Frankenstein, or The Modern Prometheus)』은 『성경』과도 같은 책이다. 매우 많은 사람들이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았지만, 아주 많은 사람들이 대충 그 내용을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약 200여 년에 걸친 세월동안 『프랑켄슈타인』은 연극, 영화, TV 등 대중문화 전반에 걸쳐 너무나 많은 변주를 해왔기 때문이다. (일설에 따르면, 1831년 『프랑켄슈타인』의 2판이 출간될 당시 런던에서 다섯 편의 프랑켄슈타인 관련 연극이 상영되고 있었다고 한다.)

   『프랑켄슈타인』이 이렇게 끊임없이 매체를 바꿔가며 각색되는 이유는 시체를 살려낸다는 괴담에 있지 않을까. 음침한 실험실, 공동묘지에서 매일 재료를 취합하는 광기어린 과학자, 그리고 자신의 창조물에 의해 비극에 빠져드는 창조주. 하지만 이런 공포와 드라마틱한 비극은 이후의 각색물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전되어온 것이다.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에는 우리가 원하는 이야기에 대한 묘사는 최소화되어있다. 작가는 창조의 신비, 경외 혹은 공포에 관심이 있기 보다는 그 이후의 문제, 창조자의 역할에 관심이 있다. 당신이 하나의 생명을 창조했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디까지 책임을 져야 할 것인가?

   『프랑켄슈타인』은 창조주의 영역에 들어선 인간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신은 완전무결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하다. 신은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인간은 숨을 수 없다. 프랑켄슈타인은 신의 흉내를 낼 수 있었지만, 신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 흉내에 대한 대가는 가혹했다.

   계몽주의가 만연했던 18세기, 그리고 '천재'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회고로 진행되는 소설인지라 고루하고 만연한 문체로 진행되어 좀 지루한 감이 있지만, 감내하고 읽을 가치는 충분히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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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이 천축으로 간 이유는 『십칠지론』의 원본을 보고 싶어서이다. 『요원전』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불교계는 지론종과 섭론종으로 나뉘었는데, 그 이유는 제8아리야식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이었다. 왜 하나의 경전에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종파까지 갈리게 되었을까? 그것을 이야기하려면 중국의 종교사를 살펴봐야 한다. 여기서는 중국의 고대종교가 어떻게 유교와 도교로 나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 후에 외래종교로서 불교가 어떻게 중국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려 한다. 한마디로 재미없는 글이다. 하지만, 현장이 천축행을 결정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자그마한 정보는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고대 종교

   고대 중국의 사람들은 황하(黃河)유역의 평원에서 농경과 목축을 주로 했었다. 괭이를 이용한 개간지의 사용이 쟁기를 사용함에 따라 영구 경작지를 조성하였고, 이로 인해 토지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런 토지를 바탕으로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단위인 영지(領地)가 이루어졌다. 토지를 단위로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계층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과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국에서 세속조직과 종교조직의 모든 기본요소는 모두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처럼 영지였다. 세속사회는 가족집단과 영지의 소유라는 두 기반 위에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조상숭배와 토지신(土地神) 숭배를 토대로 삼았다. 이 두 숭배는 사회의 두 가지 근본사태를 종교적으로 전환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상과 토지에 대한 숭배는 모든 계층에 다 있었다. 귀족들은 신들에게 인간의 위계와 같은 신의 위계를 형성시키고, 그 위계에 맞는 숭배를 했다. 그것은 토지신의 숭배가 통치권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토지는, 국가의 수호신이며 국가권력을 나타냈다. 죽음에 대해서도 토지신의 위력은 대단했다.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히기 때문에 땅의 지배자가 죽은 사람의 지배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은 그리 명확하진 않았지만, 분류한다면, 토지신이 다스리는 황천(黃泉), 상제(上帝)가 다스리는 천상(天上), 그리고 조상의 영혼이 머무르는 종묘(宗廟)가 있었다.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라는 명확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개념대신 인간세계의 위계와 같은 위계가 사후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천상에 올라가는 이는 보다 지배적인 위치의 소수(周나라 文王의 예)이고, 대부분은 황천으로 간다고 믿고 있었다(기원전 8세기 齊나라 제후 鄭伯의 예). 고대인들은 인간이라는 것은 혼(魂)과 백(魄), 그리고 형신(形身)이 합쳐져 있다고 생각했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형신과 혼백의 분리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간다. 백은 묘에 위치할 수 있었지만, 하늘로 올라간 혼은 흩어지거나 떠돌아다니게 된다. 그래서 혼이 머무를 장소인 묘를 만들고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죽었다는 것만으로는 조상이 되거나 제사를 받을 권리가 없었다. 제사를 받기 위해서는 장례식이 거행되어야 한다. 장례는 귀족이 주도한 문화이다. 귀족들에게 있어서 토지신과 조상의 문제는 지배권과 영토, 그리고 종묘와 사직으로 대표되는 지역과 혈족을 통한 정치적 신성(神性)이었다.

   반면에 농민은 문화적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례라는 절차를 제대로 했을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죽고 나서 신성이 될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농민의 제의(祭儀)는 농사와 관련되어있다. 생산력에 기반을 둔 종교와 밀접해 있는 것이다. 이 당시의 사회적 특징은 토지의 생산력(불을 붙이는 종교적 의식)과 가문의 생산력(야합이라는 제의적 절차)이 결부되어 토지신에 대한 축제를 벌였다. 축제의 주체는 생산자인 농민이었다. 귀족들의 제의가 토지신과 조상신에게 지내는 정치적 신성을 나타내는 제의였다면, 평민층(농민)의 제의는 농업 생산력에 기반을 둔 생산신성을 나타내는 제의였다. 평민층의 제의는 귀족들의 제의에 독자적으로 접근되기보다는 정치적 룰에 예속되었으나, 조상에 대한 제의에서 정치적 신성과 생산적 신성, 이 둘이 서로 결합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달마다 그 계절의 수확물을 조상에게 바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상신에게는 각기 제삿날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모든 계급이 함께 드리는 농업의 숭배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가문이나 영지와 같은 집단을 위해서 그 집단의 우두머리가 제물과 기도를 올리는 공식적인 의식으로 이루어졌다. 집단 구성원들(귀족과 농민)은 제물을 공유하는 친교에 의해 제사에 직접 참여한다고 느꼈다.

   물론 정치적 신성과 생산적 신성의 제의가 고대 종교의 틀을 잡은 것은 확실하나,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한 공적인 종교였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를 갈망했고, 그래서 샤먼의 전통에서 나온 신과 인간의 특별한 매개자인 무인, 즉 무당을 찾아갔다. 무는 개인적인 신앙을 위한 사적인 영역이었다. 국가에서도 이들을 관료화 시켰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위치였다. 이들의 자기 부정적 행위는 국가에서도 상당히 불안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고대 종교의 모습을 간단히 정리한다면, 농민층의 생산적 신성, 귀족층의 정치적 신성, 그리고 개인의 영역인 무의 초월적 신성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초월적 신성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이었지, 공적인 위치에는 오르질 못했다.

   이런 것이 종교라는 큰 테두리에서 볼 때 중국 고대 종교였다. 그것은 제사를 집행하는 제후(귀족), 제후를 따라서 제사에 참여하는 신하(농민) 등 각 개인이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자신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에만 따르는 특정한 사회집단의 종교생활이 표현된 것이었다.

 


 


고대 종교가 유교(儒敎)와 도교(道敎)로 갈라지게 된 까닭

   고대 농민의 제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효과가 있었던, 인과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반대로 토지신이나 조상에게 관련된 귀족의 종교는 인격신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바라는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신의 인격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러 문명이 발달하고 지적으로 진보하면서 후자의 관념이 점차 확실한 지반을 얻게 된다. 사람들은 신들의 가호를 얻기 위해서 제사를 지냈다. 풍성하고 정결한 제물은 영토와 주민을 위해 신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모든 계급이 함께 드리는 농업의 숭배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가문이나 영지와 같은 집단을 위해서 그 집단의 우두머리가 제물과 기도를 올리는 공식적인 의식으로 이루어졌다. 집단 구성원들(귀족과 농민)은 제물을 공유하는 친교에 의해 제사에 직접 참여한다고 느꼈다. 이처럼 봉건사회의 조직을 신의 측면에서 재현한 종교는 국가종교였다. 제후국은 정치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단위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후국들의 붕괴는 고대 종교에 치명타를 가했다. 고대 종교는 국가종교이기에, 국가의 붕괴는 종교의 붕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500여개의 제후국이 10여개의 대제후국으로 통합되자, 수백여 곳에서 거행되던 제사가 중심지 십여 곳에서만 거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은 제사에 직접 참여 할 수 없었다. 제후국이 통합되기 전에는 제후국의 영토가 매우 좁았기 때문에, 농민들이 제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런 참여 때문에 농민들에게 고대 종교가 살아 있고 친숙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대제후국은 너무 넓어서 영토내의 많은 농민들은 제사에 직접 참여 할 수 없었다. 종교는 본래 제사 지내는 제후와 제사에 참여하는 농민의 결속에 좌우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농민의 참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제사는 종교가 될 수 없었다. 제사는 지배권의 상징을 확인하는 의례적 행사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고대 종교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주체세력인 기록자[史]계층이 출현한다. 바로 이 계층에서 철학적 운동이 일어났고 종교사상이 발전했다. 그들은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일을 맡아서 그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이 통치이론을 만들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통치문제와 분리되지 않았던 종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사가 점차 천박하고 무례하게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신의 인격성이 강조됨에 따라 신의 호의를 제물과 상업적으로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제사에서 제물을 완벽하게 바치기보다는 제사를 집행하는 사람들과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도덕을 갖추기를 바랐다. 이렇게 해서 신은 제사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비인격적인 존재로 변하게 되었다. 고대 종교에서 이러한 분화는 이 시기 중국 종교의 제의의 일반적인 경향에 상응하는 두 흐름을 만들어낸다. 하나는 합리주의적인 태도와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적인 태도이다. 전자는 종교에서 비합리적인 내용을 없애는 한편, 외형적인 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종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합리주의자들의 시도였다. 후자는 공식 제사와 집단 제의에 결여된 것들을 보완하려는 개인적인 종교에 대한 추구였다.

   결국 이런 강력한 두 흐름이 먼저 집단적인 종교 형태를 선호하는 유교(儒敎)를, 그 다음으로 개인적인 형태를 선호하는 도교(道敎)를 만들었고 도교를 넘어 후대에 불교(佛敎)가 중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종교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유교는 정치적 신성 속에서 집단적인 종교 형태를 지닌 합리성에서 발전 된 것이고, 도교는 초월적 신성 속에서 개인적인 종교 형태를 지닌 신비주의적인 관점에서 발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교와 도교는 생산적 신성과 정치적 신성, 그리고 초월적 신성 이들 세 가지가 각기 따로 발전하고 반성한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을 하고 반성을 해서 나타난 결과물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도교만이 샤먼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지만, 유교 또한 샤먼의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죽음에 관련된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는 ①선조와의 관계(과거) ②부모와의 관계(현재) ③자손, 일족과의 관계(미래)를 나타낸다. 유교는 이 관계를 흩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통합시킨다. 곧 ①조상의 제사, ②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 ③자손을 낳는 일, 이들 세 가지 행위를 포함하여 ‘효’로 삼았던 것이다. 효를 행함으로써 자손을 낳고 조상을 재생시키며 자신도 또한 언제인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자손과 일족에 의해 이 세상에 재생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생명론이 유교에서의 효의 본질이다. 유교는 이 위에다 가족윤리(가족이론)를 만들었고 또 그 위에다 정치윤리(정치이론)를 만들었던 것이다. 후세에 12세기의 신유교가 되면 그 위에다 다시 우주론과 형이상학까지 만들게 된다.

   이처럼 고대 종교의 양산은 생산적 신성, 정치적 신성, 초월적 신성, 이들 세 가지가 각기 따로 반성하고 발전해서 양산된 것이 아니라, 이들 세 가지의 날줄과 씨줄의 촘촘한 의미망에 의해서 양산된 것이다.

 


 


◆불교(佛敎)

   이렇게 명확하게 갈린 양대 종교 사이에서 외래 종교인 불교는 ‘새로운 형태의 구원’을 제시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불교가 서서히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도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은 이후이다.

   불교 경전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은 번역된 경전을 한자로 기록한 기록자들이었는데, 이들은 거의 도교도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불교 경전은 각각의 팀으로 번역 작업이 행해졌다. 각 팀의 구성원은 외국인 승려, 기록자(들), 통역관으로 이루어졌다. 작업은 외국인 승려가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그럭저럭 설명하면,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기록자들이 구어로 설명된 것을 한자로 초안을 잡는다. 외국인 승려가 중국어에 능숙하지 않을 때는 통역관이 개입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번역물을 검토할 때에는 외국인 승려가 배제되기 일쑤였고, 번역물은 기록자(들)의 용어와 사상, 해석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전문 용어들은 도교에서 빚진 것이 많게 되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 달리 한자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표현하기에 상당히 까다로운 표의문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처가 보리(菩提)를 얻었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득도(得道)’했다고 한다. ‘도를 얻는다’는 표현은 명백히 도교의 것이다. 이 전통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원본의 내용보다는 그것을 해석한 차이의 입장이 갈려 종파가 나눠지기도 했다. 현장이 인도로 간 이유는 바로 이 갈라진 해석들을 하나로 바로 잡고 싶은 욕망(혹은 소명) 때문이었다.

   게다가 언뜻 보기에 불교는 도교와 이름만 다를 뿐, 거의 같은 종교로 보이기까지 했다. 도교가 신선이 되어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이라면, 불교는 부처가 되어 열반에 드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도교에 비해 간단하며 저렴하기까지 했다.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곡물법, 양생법 등 실생활에서 지켜야할 규율이 많고, 단약 제조 등 돈이 많이 들지만, 불교에서는 (도교에 비해) 간단한 명상과 수행이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를 겪으면서 불교는 도교와 유교에 버금가는 강력한 종교가 됐다. 그 이유는 끔찍한 시대상황 때문이었다. 이연이 당(唐)을 세우기까지 약 400여 년에 걸쳐 전쟁과 착취가 빈번하게 지속됐다. 백성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지배계층조차 나라의 흥망에 따라 하루아침에 귀족에서 노예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삶은 고통이었고 생명은 허망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고쳐볼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절망. 그 속에서 사람들은 이 끝없는 절망의 윤회를 끊고 피안(彼岸)으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불교는 지배 세력들의 눈에 들어 수당(隋唐)시대를 거치며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종교는 정치와 윤리에 봉사해야 한다’는 유가사상이 스며들어 기존의 정치체계를 유지하고 옹호하는 ‘도구’가 된다. 이것은 불교만의 일이 아니다. 중국에서 종교는 정치에 예속되어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儒), 불(佛), 도(道)라는 세 가지 사상이 서로 공격하고 논박하는 단계를 거쳐 점차적으로 서로 공존하고 협조하는 길로 접어들게 됐고, 나머지는 역사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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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 현무문에서 태자가 변을 당하고 양의전에서 위징이 요괴를 쏘다

 


 


p.220

“현무문에서 양의전으로 향하려면 이 길목을 지날 거야. 저쪽 숲에 매복하자.”

 

 


p.258

“저쪽이다! 월화문月華門쪽으로 달아났다!”


 


 


圖 7 8 世紀前半的長安宮城、皇城에서 발췌

 

 


   위의 대화로 미루어볼 때, 『요원전』에서 ‘현무문의 쿠데타’는 현무문, 양의전, 월화문을 아우르는 지역인 산지원(山地院)과 남해지(南海地) 사이에서 벌어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쪽인 산수지각(山水地閣)근처에서 벌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자치통감』권191에서, “이건성과 이원길이 임호전(臨湖殿)에 도착하여 변고가 있음을 깨닫고 즉시 말을 돌려서 동쪽으로 가서 궁부(宮府)로 돌아갔다”고 했다. 즉, 이건성의 거처인 동궁(東宮)으로 가는 길에 변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역사서마다 그 기록이 다르기 때문에(달리 말하면, 황제가 되기 위해 형제들을 죽인 일을 그리 세세히 기록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에)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p.221

“아바마마께서는 세민이 놈에게 너무 무르십니다. 역시 우리 둘이서...”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꾸나.”

 

 


   『요원전』에서 이원길은 틈만 나면 이세민을 죽이자고 이건성을 부추기지만 이건성은 반대한다. 이는 실제 역사에도 기록된 부분이다.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부분을 옮겨 적는다.


애초에 제왕(齊王) 이원길이 태자 이건성에게 권고하여 진왕(秦王) 이세민을 제거하라고 하며 말하였다.

“마땅히 형님을 위하여 손수 칼을 쓰겠습니다.”

이세민이 황상을 좇아서 이원길의 집에 갔는데, 이원길이 호군 우문보(宇文寶)를 침실 안에 숨겨두고 이세민을 찌르게 하려고 하였는데, 이건성은 성격이 자못 인자하고 후덕하여 갑자기 이를 중지시켰다.

 

 


   두 형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세민의 정통성을 확보시키기 위해서는 두 형제의 단점을 부각시켜야 하는데, 이건성의 경우에는 종종 장점을 기술한 부분이 보인다. 어찌보면 이건성은 ‘인자하고 후덕한’ 그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p.224

“사공 배적裴寂, 좌복사 소우蕭瑀...”

 

 


좌복사 → 좌복야

 


 

   『요원전』에서는 당고조 이연이 양의전에 있는 것으로 설정했지만, 역사에는 해지(海地, 어느 해지인지는 정확히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위 범선에서 배적, 소우, 진숙(陳叔)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연은 이세민의 상소를 공적인 일로 처리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형제들간의 해묵은 감정을 해소시키려는 자리로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부자지간, 형제지간의 정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이세민이 영악(혹은 냉철)한 것이다.

   소우는 이세민이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였다는 말을 당고조 이연이 들었을 때 즉각 이세민의 편을 든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것으로는 626년 4월, 태사령 부혁(傅弈)이 불교를 없애자고 탄원했을 때 소우가 불교를 옹호하며 서로 토론했으나 처절하게 발린 것이 있다. 이 때 대다수의 사찰과 도관이 철폐됐으나, 현무문의 정변 이후 다시 환원됐다.


 

 


 

p.231~232

이세민이 쏜 화살에 쓰러지는 이건성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현무문의 정변’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건성과 이원길이 임호전(臨湖殿)에 도착하여 변고가 있음을 깨닫고 즉시 말을 돌려서 동쪽으로 가서 궁부(宮府)로 돌아갔다. 이세민이 좇으면서 그들을 부르니 이원길이 활을 당겨서 이세민을 쏘려는데 두 세 번이나 활이 당겨지지 않았으며, 이세민은 이건성을 쏘아서 그를 죽였다.

 


 

   『요원전』에서는 이건성이 부상만 당하고 다른 인물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역사에는 이세민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p.241~242

울지경덕에게 목이 잘리는 이원길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현무문의 정변’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울지경덕이 7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계속하여 도착하니 좌우에서 이원길을 쏘아서 말에서 떨어뜨렸다. 이세민의 말이 놀라서 숲속으로 달아나다가 말을 타고 있던 이세민이 나뭇가지에 걸리니, 떨어져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원길이 갑자기 도착하여 활을 빼앗고 그를 누르는데 울지경덕이 말을 달려오면서 그를 질책하였다. 이원길이 걸어서 무덕전으로 가려고하니 울지경덕이 쫓아가서 쏘아서 그를 죽였다.

 


 

   울지경덕이 이원길을 질책한 것과 이원길이 걸어서 무덕전으로 가려고 한다는 사실이 언뜻 연결이 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울지경덕이 이원길을 죽인 것이다. 『자치통감』권 188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원길과 울지경덕이 서로간에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일화가 나온다. 이 대결에서 이원길은 울지경덕에게 완패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한다.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은 말을 타고 삭(矟)을 잘 다룬다고 자부하였는데, 울지경덕이 능력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칼날을 떼어내고 승부를 비교하자고 청하였다. 울지경덕이 말하였다.

“저 울지경덕은 삼가 이것을 떼어 버리겠지만 왕께서는 떼어버리지 마십시오.”

이미 그렇게 하고 이원길이 그를 찔렀지만 끝내 적중시킬 수가 없었다.

진왕 이세민이 울지경덕에게 물었다.

“삭을 빼앗는 것과 삭을 피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어렵소?”

울지경덕이 말하였다.

“삭을 빼앗는 것이 어렵습니다.”

마침내 울지경덕에게 이원길의 삭을 빼앗도록 명령하였다. 이원길이 삭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뛰어나가니 속으로는 그를 찌르려고 하였는데, 울지경덕이 잠깐 사이에 그의 삭을 세 번이나 빼앗으니, 이원길은 비록 얼굴을 대하고는 탁월함을 탄복하였지만 속으로는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이세민은 이미 자존심을 크게 상처 입은 이원길을 두 번 능욕하는 처사를 저질렀다. 평소에 이원길이 잘난 척하는 게 꼴사나워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아니면 이참에 기를 꺾어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는 처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원길에게는 울지경덕과 이세민 둘 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이때부터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이원길은, 이건성이 울지경덕을 자신의 도당으로 포섭하려 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당고조에게 참소하여 울지경덕을 죽이려 했었다. 울지경덕은 이세민의 강력한 요청으로 죽음을 면했다.

   울지경덕은 선양(善陽, 산시성 숴저우시) 출신으로 역주(易州)의 도적 우두머리 송금강(宋金剛)의 장수였으나, 이세민에게 패해 포로가 됐다. 이 때 울지경덕을 눈여겨본 이세민이 바로 울지경덕을 우일부통군(右一府統軍)으로 임명했다. 이세민의 측근들은 울지경덕이 배반할 것이라 하며 죽일 것을 요구했지만, 이세민은 신의로써 그를 믿었고, 울지경덕은 그 믿음에 화답하듯 왕세충군을 격파했다. 신의로 충만하고 무예가 출중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p.250

“잘했다, 위징!”

 


 

   『요원전』에서는 이건성이 위징에게 죽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건성은 이세민이 쏜 화살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원전』에서 위징의 모습은 기회에 따라 주인을 바꾸는 비열하고 저열한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역사에서는 다르다.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애초에 선마(洗馬) 위징(魏徵)은 항상 태자 이건성에게 일찍이 진왕(秦王)을 제거하라고 권고하였는데 이건성이 실패하고 나서 이세민이 위징을 불러서 말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들을 이간질하였느냐?”

무리들은 이 때문에 위험스러워서 두려워하였지만 위징은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면서 대답하였다.

“먼저 돌아가신 태자가 일찍이 저 위징의 말을 쫓았더라면 반드시 오늘과 같은 화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세민은 평소에 그의 재주를 중하게 생각하였던 터라 얼굴을 고치고 그에게 예의를 차리고 끌어서 첨사주부로 삼았다.

 


 

   자신의 친형제는 물론이고, 친형제와 직접적으로 관련한 일가친척 500여 명을 학살한 이세민이 자신의 숨통을 조인 위징을 살린 것은 지금 봐도 미스터리하다. 『요원전』에서처럼 정말로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세민의 냉혹하면서도 탁월한 정치 감각의 발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위징은 이세민에게 있어서, 그리고 당(唐)에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p.268

“꼬마야, 내가 일찍이 도적 패거리에 투신했을 때도 딱 너 만한 나이였으나... 이 정도로 무모한 짓을 한 적은 없었다. 감히 궁성에 잠입할 줄이야...”

 


 

   이세적이 이야기하는 ‘도적 패거리’는 적양(翟讓)의 와강군(瓦崗軍)을 말한다. 와강군은 고기잡이 능수들이 주축이 된 농민군이다. 수 양제의 폭압으로 농민군의 봉기에 가담한 이세적이 지금은 그들을 ‘도적 패거리’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니 좀 씁쓸한 마음이 든다. 『자치통감』권 186에 기록된 서세적(이세적이 당고조 이연에게서 이 씨 성을 하사받기 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상당히 어린 나이에 농민군에 가담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호(離狐, 산둥성 허쩌시) 사람 서세적(徐世勣)은 집은 위남(衛南, 허난성 안양시 화현)에 있었고 나이는 열일곱이었으며 용기와 지략이 있었는데 적양(翟讓)에게 유세하였다.

 

 


 


p.275

“전하, 신이...”

“오, 위징인가.”

 

 


   『서유기』10회에서 위징은 당태종의 신하이면서 동시에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경하 용왕의 목을 베는 신묘한 인물로 묘사된다. 『요원전』에서 위징이 양의전 위에 올라간 ‘요물’을 죽이는 것은 『서유기』에 대한 해석으로 보인다.


 

 


 

p.282

“이 장안의 불교계를 보게. 섭론파 외에 북도파北道派, 남도파南道派... 종파마다 죄다 다른 소리를 하고 있어...”


   ‘미륵(彌勒, Maitreya, ?~?) → 무착(無着, Asaṅga, 300?~390?) → 세친(世親, Vasubandhu, 320?~400?)’의 기본 틀에서, 세친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논서로 성립된 종파가 지론종이다. 이 지론종 성립 후 제8아리야식(第八阿梨耶識: ālaya vijñāna의 구역)에 대한 견해 차이로 상주남도파(相州南道派)와 상주북도파(相州北道派)로 분리되었는데, 약칭으로 남도파 · 북도파라 한다. 섭론종은 진제(眞諦, 499~569)가 번역한 무착의『섭대승론』을 논서로 성립된 종파이다.

   이렇게 종파가 나뉜 이유는 『요원전』24회와 25회에서도 다뤘듯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한 해석에 대한 차이 때문이었다. 바로 이게 현장이 천축으로 가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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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4-01-08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omek님의 서유요원전 주해는 참 재미있고 대단하네요.언젠가 책으로 나올듯 싶군요
그나저나 늦었지만 Tomek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O^

Tomek 2014-01-09 10:14   좋아요 0 | URL
분에 넘치는 과분한 덕담, 정말 고맙습니다.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