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름 - 포켓북 한국소설 베스트
구효서 지음 / 일송포켓북 / 2005년 8월
평점 :
품절


낯설다  [형용사]
1. 서로 알지 못하여 어색하고 서먹서먹하다.
2. 사물이 눈에 익지 아니하다.

(출처: 표준 국어 대사전)

   구효서의 소설 『낯선 여름』을 이야기 하기 위해서 굳이 국어사전을 펼칠 필요는 없다. '낯설다'의 의미는 우리 모두 알만큼 '낯선' 단어는 아니니까. 하지만 책을 읽다보면, 왜 작가는 제목에 '낯선'이란 단어를 선택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작가 구효서에게 '낯설다'는 어떤 의미였을까? 

   소설의 인물은 효섭, 보경, 민재, 동우다. 효섭과 민재는 그저 아는 사이일 뿐이고, 민재와 동우는 부부사이다. 이야기는 효섭의 회상과 보경의 편지가 교차되면서 진행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보경의 시점으로 진행되면, 효섭이 보경을 때론 회상하고 때론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진행하는 식이다. 

   소설은 다분히 통속적이다. 보경은 이상적인 가정에서 살고 있는 여자다. 그녀에게는 일요일 아침에 스파게티를 준비해주는 남편이 있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다. 모든 것이 자신에게 맞추어져 있는 삶, 그래서 그녀의 가정은 더할나위 없이 완벽하다. 그러나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그 완벽함 앞에서 그녀는 그녀자신도 모를 이유없는 눈물을 흘리고 우연히, 효섭을 만난다. 그녀가 갑자기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 앉았을 때, 우연히 운좋게 그녀를 도와준 사람이 효섭이었고, 후에 그녀가 집에서 또다시 다리가 풀렸을때 그녀는 남편 대신에 효섭을 생각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남편은 항상 고마운 존재였지만, 효섭은 그녀가 필요로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런 그녀를 '나쁜년'이라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완벽한 일상속에서 갑자기 찾아오는 균열, 그 균열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울림은 불가항력이다. 이것은 남편이나 자식이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닌, 본인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일이다. 보경도 그런 삶의 매너리즘에 빠진 것 뿐이다. 그저 그녀의 그 작은 틈새에 효섭이 들어가 있었을 뿐. 

   효섭은 사랑다운 사랑을 제대로 해보지 못한 사내다. 그는 몇 몇 여자들과 사귀었으나 그녀들과 헤어진 후에도 그게 사랑이었는지 의심스러워 한다. 그녀가 진정 사랑에 빠진 여자는 결혼 첫날, 황망스럽게도 갑자기 죽었다. 그것도 자다가. 죽음같은 잠에 빠진 후 아침에 일어났을 때 사랑하는 여인이 죽어있다면, 그 충격은 얼마나 클까? 상상하기조차 싫은 일이다. 그 일을 겪은 후 그는 우연히 보경을 만난다. 

   매 해, 때마다 찾아오는 그 해 여름은 그들에게 이상했다. 친숙한 여름이 아닌, '낯선' 여름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생각하지 않던 효섭에게도, 완벽한 일상에서 살아가던 보경에게도. 그저 갑자기 찾아온 일상의 균열 속에서 그들은 낯설게 만나고 낯선 관계를 가졌다. 세상이 '불륜'이라 부르는 그들의 관계는 결코 친숙해 질 수 없는 '낯선' 관계다. 그 모든 게 이 여름에 시작됐다.  

   『낯선 여름』은 분명 유치하고 통속적이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뭐 안그런가? 대단한 것 하나 없는 유치하고 통속적인 인생이다. 효섭과 보경은 그들의 유치하고 통속적인 일상에서 그들만의 '새로운' 추억을 만들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박수쳐줄 일이지만, 그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 효섭 주위에 맴돌고 있는 민재와 보경의 남편인 동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랑은 윤리로 재단할 수 있을까? 개인과 개인이 걸쳐 있는 사랑에 교집합과 여집합이 존재할 수 있을까? 이 통속소설은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세상 엘리트들의 표본추출 같은 동우(부정적인 의미가 아닌 긍정적인 의미로서다. 그는 정말 이상적인 남편이자 아버지다)는 소설의 마지막, 효섭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인다. 삶 전체를 이성과 배려로 재단한 그도 사랑 앞에선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랑은 이성이나 배려같은 것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기도 하고. 아내의 행복을 진심으로 바라던 그가, 그녀의 행복이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때의 그 충격은 얼마나 컸을까. 사랑은 당사자들을 기쁘게도 하지만,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도 한다. 우리는 그 상처를 '배신감'이라고 한다. 

   어쩌면 이 모든 게 '결혼'이라는 제도 때문에 생긴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결속해주는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묶여있으면, 다른 사람을 더 이상 다른 사람을 사랑해서는 안된다. 사랑이 제도가 되면서 윤리가 되었다. 우리에겐 간통죄라는 법적 구속력까지 있다. 아니, 어쩌면 제도때문이 아니라 사랑을 소유하고 싶은 인간의 욕심때문이 아닐런지. 

   너무 쓸데없는 생각까지 해버렸다. 『낯선 여름』은 이들의 여름뿐 아니라, 내 감정, 생각도 낯설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가 선택한, '낯설다'는 단어는 이런 모든 감정을 설명하기에 조금 부족한 것 같다. 여러 단어를 생각해 봤지만, 우리말에 맞는 단어는 아직까지 찾지 못했다. 딱 맞는 단어는 아니지만, 내 느낌과 어느 정도 맞는 단어를 영어에서 찾을 수 있었는데, 그 단어는 'eerie'다. 

eerie [iri]
strange, mysterious and frightening

[출처: Oxford Advanced Learner's Dictionary] 

 

* 덧붙임 

   구효서 작가의 『낯선 여름』을 읽게 된 계기는 홍상수 감독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때문입니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은 『낯선 여름』을 원작으로 한 작품입니다. 홍상수 감독은 항상 자신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드는데 데뷔작만큼은 예외였습니다. 그래서 궁금한 마음에 원작을 읽었습니다. 

   소설은 영화와 흡사한 게 거의 없습니다. 등장인물의 이름 정도? 그리고 아주 희미한 설정들 뿐. 나중에 기회가 되면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낯선 여름』을 같이 언급해 보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지음, 박찬기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것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체면과 제도는 인간을 다른 동물들과 구별되게 하는 고유한 '발명품'이다. 자칫 본능으로만 흘러갈 수 있는 인간이 자제력을 발휘해 불필요한 싸움을 줄일 수 있는 것은 인간 이성의 힘 또한 크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와 체면 때문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단순하다. '젊은' 베르테르는 롯테에게 운명적으로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롯테에겐 알베르트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테르는 롯테에게 사랑을 갈구하지만, 그녀는 거절한다. 베르테르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살한다. 

   롯테에 대한 자신의 감정을 주체못하는 베르테르의 모습엔 솔직함이 드러나 있다. 일반 보통사람들이라면, 그런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살아가던가, 아니면 몰래 불륜을 저지르던가 할 테지만, 베르테르는 당당하게 자신의 사랑을 밝혔다. 인간 사회를 구성하기 위한 제도와 체면을 베르테르는 부정하고 속에 감춰진 감정을 드러냈다. 

   어떻게 보면 철딱서니 없는 젊음의 혈기일 수 있으나, 그가 롯테에게 향한 감정은 진실된 감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식적으로 숨기보다는, 남몰래 만나 은밀하게 드러내기 보다는, 직설적으로 드러냈다. 체면을 위선으로 전락시키기 보다는 그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히 반응했다. 

   인간이 인간답다는 명제는 어떻게 해야 성립되는 것일까? 감정을 이성으로 통제하는 것이 인간다움까, 아니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인간다움일까? 감정을 앞세운 베르테르는 결국 죽는다. 그는 죽을 수 밖에 없다. 베르테르와 롯테 그리고 알베르트를 둘러싸고 있는 질서를 파괴시키기엔 베르테르는 너무 무력하다. 베르테르는 알베르트에게 빌린 총으로 머리를 쏴 자살한다. 마치 롯테때문이 아니라 알베르트 때문이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그는 바로 죽지 못하고 긴 시간동안 고통스럽게 죽어간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지만, 그 생생한 생명력이 넘치는 분위기와 문장들은 시간을 견디어내 아직까지 읽히고 있다. 내가 지금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감정. 그 감정의 발산은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난 얼마나 그 감정을 감추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떤 방문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어떤 방문>은 세 명의 감독이 참여한 옴니버스 영화다. 하지만 얼마 전에 개봉한 <오감도>같은 영화를 떠올리는 것은 곤란하다. 이 영화는 상업영화로 기획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루하거나 어렵지는 않다. 영화는 찡하다가 웃기고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이것은 이 영화에 참여한 홍상수, 가와세 나오미, 라브 디아즈의 역량때문이다. 

   <어떤 방문>은 전주국제영화제의 한 섹션인 [디지털 삼인삼색]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다. [디지털 삼인삼색 프로젝트]는 세 명의 감독을 선정한 후, '선정한 세 명의 감독에게 전주국제영화제 프리미어 상영을 전제로 5천만원의 제작비를 지원하고, 디지털 카메라와 디지털 편집 장비를 이용하여 각각 30분 분량의 디지털 영화를 제작하'는 프로그램이다. 작품의 주제나 내용엔 일체 간섭을 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번에 참여한 세 감독의 작품을 보고, 세편의 영화에서 '누군가가 어딘가를 방문'하는 공통점이 있어 제목을 이렇게 선정했다고 한다. 잘 지은 제목이다. 세 영화 모두 '누군가의 방문'으로 인해서 사건이 벌어지니까. 

   <어떤 방문>은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 영화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이 연출한 <코마 Koma>, 두 번째 영화는 홍상수 감독의 <첩첩산중>, 세 번째는 라브 디아즈 감독의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이다. 개인적으로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각각의 영화는 각각의 존재감을 지니고 있다. 아마도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것 같은데 나에겐 다행히 다 마음에 든 경우라서 행복했다.   

 

 

<Koma> 감독 - 가와세 나오미 

   <코마>의 내용은 간단하다. 시간대별로 간단히 정리하자면, 먼 옛날 '코마'라는 조용한 마을에 한 남자가 방문한다. 그는 우연히 한 아이의 목숨을 구하고 아이의 아버지는 감사의 뜻으로 족자를 선물한다. 시간은 흘러 현재가 되고, 그의 손자인 강준일은 족자를 돌려주기 위해 코마를 방문한다. 그는 한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간단하고 담백한 내용인데 그 속엔 숨은 알레고리가 마구 엉켜있다. 

   영화 제목 <코마>는 의학용어인 coma가 아니라 Koma라는 지명이다. 이곳 사이타마현의 코마사토(高麗鄕)는 옛날 고구려의 유민이 일본에 건너와 흩어져 살다가 모여서 만든 마을이다. 이곳엔 고구려의 흔적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일본속의 한국. 주인공인 강준일은 한국사람인지 재일교포인지 분간이 안간다. 일본말이 능통한 것으로 보아 재일교포 3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코마사토 주변을 감싸고 있는 작은 산은 미와산이다. 미와산에는 슬픈 전설이 있다. 밤에만 찾아오는 신랑의 정체가 궁금해 신랑의 옷에 실꿴 바늘을 꽂고 다음날 아침 그 실을 따라 갔더니 큰 나무 밑둥에 바늘이 꽂혀 있고 신랑은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는 이야기. 이 전설을 바탕으로 한 일본의 전통 가무극 노(能)와 춘향가의 [사랑가]. 일본과 한국의 관계가 이런 수많은 알레고리로 걸쳐져 있다. 

   하지만 가와세 나오미는 이런 딱딱한 주제를 생각하게 하기 보다는 자연과 음악으로 '느끼게' 해준다. 숲, 나무, 빛나는 햇살. 자연과 동화되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꼭꼭 숨겨 놓은 알레고리를 생각하기 보다는 '느끼게' 하는 것은 가와세 나오미의 뛰어난 역량인 것 같다. 

 

 

<첩첩산중> 감독 - 홍상수 

   이번 영화 관람에 가장 큰 기여를 한 작품이다. 솔직히 다른 두 편이야 어찌되든 이 영화만 건지면 된다고 생각했었는데, 운좋게도 다른 두 편까지 건진 셈이었다. 홍상수는 지금까지 항상 장편만을 찍어왔다. 때문에 그의 영화가 단편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을 견딜 수 있을까하는 궁금증이 있었는데, 그는 단편이든 장편이든 그만의 영화를 만든다. 

   영화는 미숙(정유미)이 친구 진영(김진경)을 만나러 전주에 내려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전주엔 대학 은사이자 옛 애인인 상옥(문성근)이 있다. 그런데 미숙이 자신의 친구 진영이 상옥과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자 옛 애인인 명우(이선균)를 부른다. 

   <첩첩산중>이라기 보다는 점입가경이 더 어울릴 정도로 이야기는 '그렇게 안되었으면'하는 방식으로 흐른다. 그 와중에 펼쳐지는 인간의 치사한 위선과 유치함이 쉴새없이 까발려진다. 영화 보는 내내 하도 웃어서 정신이 없을 지경이었다. 

   홍상수는 예쁜 화면을 만들기보다는 근사한 사건을 만든다. 그의 영화에서 기억나는 '화면'은 없으나 기억나는 인물이나 사건이 많은 까닭은 그가 인간에 관심이 많아서 일것이다. 

   영화의 처음은 아파트 건물로 시작하고 끝은 모텔 건물로 끝난다. 제목인 산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산'의 이미지란, 도시의 아파트나 모텔같은 높은 직사각형 건물들인 것일까 생각해본다. 

 

 

<나비들에겐 기억이 없다> 감독 - 라브 디아즈 

   라브 디아즈 감독은 필리핀 출신이다.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필리핀 영화를 본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필리핀은 우리에게 그저 값싼 동남아 여행지 정도로만 인식될 뿐이다. 한국에 수많은 필리핀 노동자들이 살아가지만, 우리에겐 그들이 보이지 않는다. 필리핀이 에스파냐, 미국, 일본에 점령됐었다는 역사를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필리핀의 공영어는 타갈로그어와 영어이고 영화에서도 이 두 언어가 함께 쓰인다. 

   영화의 내용은 금광회사가 철수하자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페르딩, 산토스, 윌리가, 어렸을 때 캐나다로 이민을 간 마사가 돌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영화는 필리핀의 어두운 현실을 반영하듯 흑백으로 촬영됐고, 무기력한 심정을 보여주듯 고정된 카메라로 길게 진행된다. 게다가 화면비율은 (이전의 두 영화들과 달리) 폐쇄공포증이 느껴지는 1.33:1이다. 화면이 움직이지 않아 상당히 지루할 수 있지만, 주변의 불안요소들로 영화적 긴장감을 유지한다. 

   그렇다고 영화적인 장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죄를 짓기 전에 미리 성당에서 속죄하는 모습이나, 거사에 돌입할 때 축제의 가면을 쓰고 숲을 지나는 모습. 그리고 갑자기 나비가 떼로 날아오르는 모습은 이 지독한 현실같은 영화에 어떤 마법같은 순간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어렸을 때의) 친구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죄의식 때문인지, 아니면 범죄의 막연한 공포때문인지 모를 '통곡'을 본다. 

   언뜻보면 지루한 흑백 다큐멘터리로 느껴질 수 있지만, 이 영화는 현재 필리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돈 앞에 굴복할 수 밖에 없고 그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그들의 현실을 차분히 보여준다. 이런 영화는 쉽게 찾아오는 영화가 아니다. 반드시 놓치지 말고 봐야할 영화다. 

 

 

   지난 15일 오후 3시에 홍대 상상마당에서 <어떤 방문>을 관람했다. 추운날 일요일 오후인데도 불구하고 좌석은 다행이 매진됐다. 그러나 들리는 말에 따르면, 지금까지 약 1,000명이 안 되는 관객이 이 영화를 관람했다고 한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구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는 많이 있다. 하지만 '나의 내일'을 걱정하는 영화는 흔치 않다. 이 영화의 우연한 방문을 통해서, 가능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내일에 대한 고민을, 해결까지는 아니더라도, 생각해보고 위로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면 좋겠다. 

 

 

*덧붙임   

   <첩첩산중>에서 이선균 씨가 연기한 명우는 소설가입니다. 미숙(정유미)에 따르면 명우는 어떤 소설로 상을 타고 유명해졌다고 합니다. 그런 명우가 영화 내내 들고 있는 책은 김연수 작가의 <밤은 노래한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명우는 (아마도) 김연수 작가를 모델로 한 것 같습니다. 

   김연수 작가는 홍상수 감독의 <잘 알지도 못하면서>에서 평단과 박스오피스를 석권한 유명 감독으로 나옵니다.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공연희(엄지원)에 따르면 그는 공연희를 강간한 '강간범'입니다. 그리고 <첩첩산중>에서 상옥(문성근)에 의하면, 명우는 그저 자신만을 따라하는 버릇없는 '개자식'입니다. 

   정리하자면, 홍상수 감독은 두 편의 영화에서 김연수 작가를 '강간범'이자 '개자식'으로 만든 셈인데, 그 의도가 심히 궁금합니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작가 김훈, 독자와의 만남] 잘 다녀왔습니다.

 [작가 김훈, 독자와의 만남 ]

 

<일시> 2009년 11월 13일 금요일 19시 40분
<장소> 누리꿈 스퀘어 18층 오마이뉴스 대회의실

   지난 금요일 [작가 김훈, 독자와의 만남]에 다녀왔습니다. 이런 자리는 처음이어서 어떤 느낌일까 생각했었는데, 기대보다 재미있고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원래는 저 개인의 추억으로 혼자 간직하려고 했으나, 약 8:1의 경쟁률(?)을 뚫고 참석한 자리라,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신 알라디너분들께 보고 형식으로라도 올려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았습니다.  

   이번 만남은 강연과 질의 응답 그리고 사인회로 진행됐습니다. 오마이뉴스에서도 생방송으로 인터넷 중계를 했고, 이미 기사도 올라왔습니다. (바로가기 클릭) 그 기사로 후기를 대채할 생각이었으나, 무언가 미흡한 마음이 들어 그때 강연과 질의 응답을 재구성하기로 했습니다.  

문학동네에서 제공한 <공무도하> 연필과 오마이뉴스에서 제공한 소책자 메모장 

 

 

어쩌다보니 이런 사진밖에 없네요... 죄송합니다. ㅜㅜ

 

   아래의 글은 제가 메모한 것을 바탕으로 김훈 선생님이 강연에서 하신 말을 Tomek이라는 여과기를 거쳐 쓴 것입니다. 최대한 정확하게 쓰려 했으나 제 생각이 중간 중간 개입된 부분도 있습니다. 그 점 감안하시고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강연> 수능날 아침, 고사장 풍경을 바라보며 

   저는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지만 말을 해야 한다고 해서 겨우 준비해 왔는데... 저는 소설이나 문학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저는 늘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 제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저는 세상 잡사(雜事)를 아주 싫어하지만, 세상 잡사를 끝없이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저는 항상 이런 모순된 욕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건 아마도 여러분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수능 당일 새벽 5시에 일어나 5시부터 오전 8시 30분까지 수능 고사장 풍경을 관찰했습니다. 저는 이자리에서 지금의 교육제도를 비판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는 제가 보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물론 이런 주제가 이 자리에서 말할 게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12일 새벽 5시에서 6시 사이에 경기도 교육청에서 시험지 수송이 이루어졌습니다. 시험지가 담긴 상자 하나에 무장경찰이 두 명씩 들러붙어 각 고사장으로 시험지를 수송했습니다. 

   6시 30분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그 때 응원부대가 속속 고사장 주변으로 집합했습니다. 응원부대는 고1, 2로 이루어졌고 그들의 표정은 발랄하고 이뻤습니다. 그들은 "수능 대박 / 재수 없다"라는 피켓을 준비하고 응원했습니다. 그들은 고3들의 얼굴을 부비고 안으며 응원하고 들고온 린나이 곤로로 따듯한 커피를 끓여서 먹였습니다. 

   7시 30분이 되자 수험생들이 입실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응원은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입실을 한 여학생들은 화장을 하기 시작했고, 남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를 태우기 시작했습니다. 화장은 여자의 지옥과 같은 '업'입니다. 절대 벗어날 수 없습니다. 저는 40년간 피우던 담배를 얼마전에 끊었는데, 이들 남학생들은 제가 40년간 피웠던 담배를 시작하는 셈입니다. 수능은 여학생들과 남학생들 모두 인생의 시작으로서 업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학부모들이 수험생들을 데려다주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 한 아버지가 자신의 딸을 수험장에 데려다 주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을 내리고 직장으로 출근했습니다. 딸은 교문 밖으로 나가는 아버지가 탄 승용차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아마도 딸의 아버지 역시 백밀러로 수 많은 인파들속에 묻혀가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차가 교통체증과 신호에 막혔습니다. 안타까운 부성을 어쩔 수 없었는지 아버지는 차창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어 딸의 모습을 바라봤습니다. 그 시간 2차선에 있었던 아버지들은 차 창문을 열고 계속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1차선은 퀵서비스 오토바이들이 점거하고 있었습니다. 도로가 막힐 때마다 항상 1차선에 있는 것은 퀵서비스 차량입니다. 이들은 거리의 야생동물입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곡예와 같은 운전을 합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이들은 이 도시의 역동적인 생존의 투사들입니다. 

   어머니들은 수능 기도를 올리고 있었습니다. 모두들 중년, 초로의 어머니들입니다. 어머니들의 애끓는 모정은 다 큰 성인인 아들이 군대를 갈 때도 병영 앞에 따라 갈 정도입니다. 수능 시험이 아니라 대학원 시험을 볼 때도 어머니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습니다. 한편에선 동네 목사님이 오셔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인도해 줄터이니, 성령에 기대어 다들 잘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이 애끓는 모정과 성령의 힘이 발휘된다 하더라도, 인간이 만들어 낸, 이 수능이라는 제도 앞에선 모두 무력화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수능을 잘 본다 하더라도, 수능은 결국 밑에서부터 쳐 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능이라는 등급을 만들어 놓고, 대학을 서열화 시킨 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우리는 제도화 시켜놓고, 그 모순된 제도속에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을 밀어 넣는 것입니다. 

  거리에는 경찰, 퀵서비스, 해병대 전우회, 헌병까지 나와 시험에 늦은 수험생들을 고사장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국가는 모든 학생들이 균등하게 시험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 공평한 기회를 우리는 공정거래라고 합니다. 공평한 기회 안에서 강자와 약자가 거래를 하면 약육강식의 결과가 됩니다. 사회의 배려로 균등하게 시험을 볼 수 있는 공평한 기회 안에서 경쟁을 해서 운명에 맞는 서열화를 지닙니다. 불합리한 것은 알지만, 대안이 없습니다. 

   집에 와서 뉴스를 보니 약 10,000명 이상의 학생들이 시험을 포기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그 시간에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아마도 이들은 스스로의 고민을 짊어지고 방황을 시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일만명의 학생들을 궁금해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만명의 학생은 수능이라는 제도 안에서 잘라서 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입니다.  

   1교시가 끝나자 각 입시 학원에서 정답을 제공했습니다. 저는 이 신속함이 야만적인 신속함이라 느꼈습니다. 정작 정답이 필요할 학생들은 시험장에 갇혀서 시험을 보고 있을 것인데, 이런 신속함이 누굴 위한 것인지 의문이 들었습니다. 

   수능평가의 문제를 보니, 수능은 개념을 평가하는 시험입니다. 사물은 개념의 형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물은 그 자체로 운동의 모습으로만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학생들에게 사물을 개념화 시켜서 가르치고 그것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수능은 평준화 제도라는 틀 안에서 평가합니다.  

   우리나라 교육은 평준화 교육임에도 부모는 내 자식이 평준화 된 것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부모는 자식이 그 이상이 되기를 바랍니다. 평준화 제도 안에서 평준 이상을 원하는 부모의 욕망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평준화의 이상은 우리가 쉽게 단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모순을 우리는 제도로 만들고 아이들을 수용합니다. 그리고 그 제도에 맞지 않는 아이들은 쉽게 내칩니다. 

   불합리하지만 대안이 없습니다. 저는 단지 수능을 보지 않은 일만명의 학생들이 개념화된 지식에서 벗어나길 바랍니다. 그들에게서 희망을 기대합니다.  

 

 

유일하게 제 뒷모습이 담긴 사진이라서 올렸습니다. ^.^ (출처: 오마이뉴스)  

 

<질의 응답> 

[질문 1] 본인의 문체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제게 있어서 문체는 고통스런 글쓰기의 조건입니다. 문체가 확보되지 않으면 한 줄도 쓸 수 없습니다.책을 낼 때도 원고를 쓰고 출판사에 넘겨야 하는데, 이 원고가 제 맘에 들지 않습니다. 이건 아니라는 것을 알겠는데, 제가 가지고 있어봤자 다른 대안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닌 걸 알면서도 넘길 수 밖에 없습니다. 저는 이런 모순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허영심이 있다면 주어와 동사만을 사용해서 글을 쓰고 싶습니다. 말의 뼈대만을 사용해서 소설을 쓰고 싶습니다. 판소리로 비유하자면 서편제가 아닌, 동편제같은 기교를 배재한 문장을 쓰고 싶습니다. 일종의 허영심이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제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고요. 원고가 진행되어야 돈을 벌 수 있을텐데, 말의 뼈대만을 가지고 글을 쓰면, 평소에 10장 쓰는 것을 1장밖에 못쓰는 것인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해보고 싶습니다. 

 

[질문 2-1] 소설 『개』는 어떻게 쓰셨습니까? 

   『개』 주인공 '보리'라는 개는 제가 기르던 개의 이름이었습니다. 진도개였는데 너무 사나워서 도저히 키울 수가 없어 농장에 취직시켜줬습니다. 지금은 농장에서 잘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저한텐 상당히 좋은 개였으나 제 식구들에겐 힘든 개였습니다. 저한텐 그렇게 충성을 바치고 어리광도 부리는데, 이 개는 여자, 특히 제 딸을 무시했습니다. 딸이 집에 들어오건 말건 누워있는 상태에서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보다못한 딸이 몽둥이로 개를 때리는데도 이놈은 그냥 맞고 있습니다. 아마도 '때릴테면 때려봐라' 뭐 그런 심보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개에 대한 관심이 생겨 도감을 찾아보니, 개의 시각과 청각, 후각이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다면, 개가 느끼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것 이상의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삶의 뛰어난 원형질을 지닌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그 삶의 뛰어난 원형질을 지닌 개가 되어 이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삶을 삶 자체로 느끼지 못합니다. 글자, 매체,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 사이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우리의 삶을 차단합니다. 우리가 우리 몸으로 직접 개입하고 느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개는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개를 통해 우리에게 부당하게 개입하는 것에서 벗어나 세상을 직접 느끼는 것을 집필 의도로 삼았었는데, 그게 잘 표현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질문 2-2] 작가 김훈에게 있어서 글쓰기란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저에게 글쓰기란 밥벌이, 노동, 생존입니다. 저에게 글쓰기란 경건하고 심오한 노동입니다. 이것이 보장되어질 때 비로서 글쓰기란 저 자신을 표현해 주는 수단이라 생각합니다. 이 순서가 저에겐 중요합니다.  

   저는 세속의 질서를 지니고 삽니다. 현세적 가치를 존중합니다. 저는 현세적 가치를 경멸하는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질문 2-3] KBS 정연주 사장과 YTN 기자들의 해임 무효 승소에 대한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저는 법원의 판단에 따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저는 세속적인 질서를 존중합니다. 법관은 개인의 신념이나 정의감, 여론으로 판단하지 않습니다. 법과 헌법에 따라 판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결과가 여론과 정 반대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판결을 따르는 것이 시민의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3-1] 선생님은 시민은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시민의 불복종은 권리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특별한 계기일 때 권리라 생각합니다. 

 

[질문 3-2] 그렇다면 그 특별한 계기는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시민 불복종이 권리가 된 그 특별한 때를 듣고 싶습니다. 

   (질문하신) 선생님은 그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자 모르겠다고 대답)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 때가 어떤 때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질문 4] 소설 『공무도하』를 보면 작가 스스로 많은 조사와 취재를 했다는 것이 느껴집니다. 이런 조사와 취재를 글로 만드는 과정이 궁금합니다. 

   『공무도하』에서는 연민과 서정을 의식적으로 제거했습니다. 무정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냉엄하게 관찰하는 문체를 고집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엔 세상에 대한 연민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 이유는 연민을 감춰서 더 많은 연민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나쁜놈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글로 표현할 때, '나쁜놈'이라는 세글자를 쓰면 안됩니다. 직접적인 글 대신에 이 사람이 나쁜놈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증명해야 합니다. 

   취재나 소재는 극히 일부가 소설이 됩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머지는 대부분 버리게 됩니다. 저는 자연의 풍광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강을 보면, 하류의 조강은 늙은 강입니다. 힘겹게 겨우 겨우 흘러갑니다. 그렇게 바다로 흘러갑니다. 반면에 북한강 상류는 힘이 넘칩니다. 젊은 강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자연을 느끼는 것을 자연을 취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연을 취재하다보니 인간을 취재할 때도, 인간을 하나의 풍광으로 관찰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이것은 나쁜 습관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질문 5] 선생님이 쓰신 『자전거 여행』에서는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이 느껴지고 소설 『남한산성』에서는 애끓는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선생님은 애국자이십니까? 

   저는 이념화된 애국심은 없습니다. 『남한산성』에서 애국자는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절망적인 고립된 성 안에서 있는 그들의 선택을 전 긍정합니다. 개인의 목숨을 강요하는 애국심에 대해선 긍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이유도 가능합니다.  

   『남한산성』에서 남한산성 안에 있던 백성들은 자급자족이 가능한 삶을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조선 임금 때문에 살 수 없습니다. 임금이 그 성으로 피난을 오지 않았으면 이들은 계속 자급자족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이들은 성 안에 들어온 임금을 향해 엄청나게 욕을하고 저항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사기록에는 이것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역사는 이런 것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느 정도 상상력으로 복원했습니다. 이들에게 이념화된 애국심은 필요 없습니다. 그저 이들이 일상생활을 하는 것으로 이들의 애국심을 표현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질문 6-1] 선생님은 예전에 시에 대한 글을 많이 쓰셨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정작 시를 쓰지는 않으십니다. 선생님에게 시는 어떤 영향을 주었고, 어떤 의미인지, 어떤 애착을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시를 못씁니다. 시를 보면 질투가 나고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쓸 수 있는지 경탄합니다. 

   김소월의 「산유화」를 보면 산, 꽃, 새 주어가 3개입니다. 그리고 피네, 우네, 지네, 사네 동사는 4개입니다. 고작 이것을 가지고 자연에 동화되지 못하는 인간의 소외를 그렸습니다. 정말 무섭습니다. 게다가 주격조사 '이'. '산에는 꽃 피네 / 꽃이 피네' 주격조사 '이' 대신 '은'을 집어 넣으면 이것은 망한 글이 됩니다. 이것은 생각으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김소월은 이것을 육감적으로 표현했습니다. 타고난 재능입니다. 저는 그렇기 때문에 시인의 재주는 사회의 공적 자산으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 6-2] 선생님께서 편애하시는 것, 예를 들면 힘들거나 기분 나쁜 일이 있을 때 이것만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저는 가끔 집 근처에 있는 학교에 갑니다. 가서 울타리 사이로 무리진 여학생들을 바라봅니다. 그러면 그 중 한명이 저를 발견하고 까르르 웃습니다. 그러면 같이 있던 학생들이 다같이 따라 웃습니다. 그 웃음의 전파속도는 실로 엄청납니다. 그리고 그 웃는 모습은 마치 꽃이 피는 것 같습니다. 저는 거기서 인간의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그 아름다움을 느끼기 위해서 학교에 자주 가는데, 수위 아저씨에게 의심을 받곤 합니다. 다 늙은 아저씨가 학교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여학생들을 쳐다보니까. 요새 하수상한 일들도 많이 생기고. 

   재미없죠? 이상하고. (웃음)

 

[질문 7] 선생님의 <수능 고사장 풍경>에 대한 강연 잘 들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우리 교육제도에 대안이 없을까요? 선생님의 생각을 듣고 싶습니다. 

   제 생각은 있지만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 할 만한 게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물어봅니다. 4대강사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세종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FTA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전 정말 모릅니다.  

   신문 사설을 보면, 이렇게 저렇게 쭉 말을 하면서 항상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국민이 판단할 일이다.' 국민이 판단한다는 말은 마치 민주주의의 절차를 대변하는 말 같으나 실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공허한 말이고 하나마나한 말입니다. 국민이 판단할 거라면, 대체 국회는 왜 있고 사법부는 왜 있으며 대통령은 왜 있는 것입니까?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린다면, 요즘 대학은 인문주의의 쇠퇴로 위기에 달했다고 합니다. 대학이 취업준비에 열을 올린다고 하고 개탄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게 옳다고 봅니다. 앞서 말했듯이 전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인간의 위엄과 존엄은 자기 밥벌이가 가능해야 그것들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스스로의 밥벌이를 할 수 있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임금 격차나 다른 것들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교육은 임금 격차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 집근처에서 일 하는 젊은 목수들에게서 희망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일을 합니다. 스스로의 자부심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많아져야 합니다. 젊은이들도 정서적인 관점이 아닌 과학적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질문 8] 『공무도하』의 원작 「공무도하가」는 끔찍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소설에는 그런 사랑 이야기가 없습니다. 선생님이 「공무도하가」에서 받은 인상과 왜 제목을 차용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공무도하가」를 고등학교 때 처음 접했습니다. 그걸 읽었을 때 무서움을 느꼈습니다. 백수광부가 물에 빠져 죽고 부인도 죽는데 부인의 죽음은 석연치 않습니다. 백수광부를 구하려다 죽었는지 아니면 백수광부가 죽은 것을 알고 투신 자살하려 했는지. 그 둘은 서로 다르잖아요? 이 이야기를 해주자 여옥이 부른 노래가 「공무도하가」죠. 물 너머의 세계로 간 사람들, 그리고 남아 있는 사람들. 그런 것들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국어선생님은 무조건 개념화된 지식만 가르쳤었죠. 외우지 못하면 맞고. 

   소설에 사랑 이야기가 없다고 하셨는데, 직접 나오지는 않고 바탕에 깔려있습니다. '사랑'은 처자식을 만들고 인간을 속박시킵니다. 저는 그런 인륜의 관계를 벗어나려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과 좌절을 이 소설에서 그렸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랑이 새로운 관계로 이루어 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계속 생각할 것입니다. 사랑이란... 끈적한 것일까요? 

 

[질문 9] 저는 딸과 아들, 두 번의 수능을 겪은 엄마입니다. 이 해결할 수 없는 모순된 제도 안에서 수 많은 갈등을 하며 아이들을 제도 안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수 많은 학부모들의 이 더러운 비열함을 희망으로 전환시킬 문학작품을 다음에는 써 주셨으면 합니다. 

   수능 고사장에서 돌아와 제가 찾은 책은 마크 트웨인의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었습니다. 허클베리는 미시시피의 건강한 반항아이자 문제아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우리 문학에는 이런 아이들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작가들의 직무 유기가 아닐런지. 

   이 땅의 모든 예술 작품들이 이런 모순된 제도 앞에서 우리 아이들의 고통을 말하고 절규해야 하는데, 도대체 왜 없을까요. 

 

[질문 10-1] 『공무도하』에서 노목희가 새벽에 냉장고에서 낫또를 꺼내 끓이는 장면을 보고 놀랐습니다. 낫또는 우리에게 친숙한 식품이 아닌데 왜 낫또였습니까? 

   왜 청국장이 아니라 낫또냐고 물으신 건가요? 청국장이면 분위기가 깨지죠. 한 밤에 끓이기도 번거롭고 냄새도 나고. 청국장의 이미지는 같이 오래 산 중년 부부에게 어울립니다. 노목희가 청국장을 끓이면 분위기가 망합니다. 그래서 낫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질문 10-2] 『공무도하』에서 개인적으로 '뻥'터졌던 부분이 고압 산소통과 화장실에 빠져 죽은 사건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실은 그 부분은 넣을지 뺄지 상당히 고민을 했던 부분입니다. 삶을 조롱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어서였는데, 그 또한 삶의 우연이라 생각하고 삽입했습니다. 그리고 그 일들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제가 창작해서 쓴 것이 아닙니다. 

 

[질문 11] 선생님의 오늘 강연은 예전에 기자 시절에 쓰신 「대학 졸업식 풍경」에서 느낀 감정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지금의 작가 김훈은 그 때 기자 김훈에서 얼마나 벗어났는지 궁금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관찰자의 시선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저는 사심을 배제하고 목격한 것만을 적습니다. 

   대학 졸업식은 난민 캠프입니다. 졸업식이 시작되면 온갖 잡상인들이 몰려들어 음식을 팝니다. 대학 총장은 졸업 축사를 비어있는 팻말 앞에서 합니다. 그 안에 있어야 할 학생들은 사진을 찍고 핫도그를 입에 물고 돌아다닙니다. 졸업식장에서 대학생들은 discipline이 안된 사람들입니다. 저는 그런 훈련이 안 된 사람을 날라리라 부릅니다. 대학 졸업식은 형식이 무너진 교양이 없는 풍경입니다. 

   삶의 형식에 있어서 형식은 중요하지 않고 내용이 중요하다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형식이 무너지면 그 내용도 무너집니다. 형식은 내용을 견디고 버텨내는 그릇입니다. 형식적인 면에서, 형식을 존중한다는 점에서 전 보수주의자 입니다. 

 

[질문 12] 선생님은 글을 쓰실 때 끝을 낼때가 언제쯤인지 아시는지 궁금합니다. 

   소설이 끝날 때쯤 되면 기진맥진합니다. 그래서 빨리 해결하려 합니다. 제가 소설을 쓰다가 '아, 이제 연필을 던져도 되겠구나.'하는 부분은 그저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저는 소설을 쓸 때 여자가 등장하는 부분은 굉장히 힘들게 씁니다. 그래서 『공무도하』에서도 노목희를 빨리 보내려고 했고. (웃음) 특히 『칼의 노래』쓸 때, 여진이라는 여자가 초반에 나오는데, 이 여자가 살아 있으면 소설을 진행하기 힘들 것 같아 가능한 빨리 없앴습니다. (웃음) 

 

    

<사인회>  

   생각 같아선 가지고 있는 소설을 다 가지고 가서 사인을 받고 싶었으나, 많은 분들이 오실 것 같고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빗살무늬토기의 추억』과 『강산무진』 두 권만 가져왔습니다. 알라딘과 문학동네에서 주최하는 행사이니 문학동네에서 출판한 책만 챙겨온 셈이지요. 기회가 되면 다른 책에도 사인을 받고 싶습니다. 

  

 

그날 강연과 질의 응답을 적은 메모지 

 

<나는 왜 김훈에 열광하는가?> 

   이날 독자와의 만남에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 김훈은 -굳이 가르자면- 보수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현실을 긍정하지만, 또한 현실에 복종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한 번도 대통령 선거에서 1번을 투표한 전례가 없는 저와는 이념적으로는 맞지 않는 성향입니다. 그런데 그런 나는 왜 이런 김훈에게 열광하는가? 

   작가 김훈은 자신이 완벽하다고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이 그런 권력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자신이 모순된 존재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약점을 알고, 세상을 파악하고 그 현실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지금껏 어떤 위대한 이상에 짓눌려 살아왔습니다. 돈벌이를 경시하고 저 너머에 있는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 제 삶의 이유였습니다. 하지만 삶은 그리 녹록치 않았고 신념과 이상은 항상 돈 앞에서 멈칫거렸습니다. 그러나 김훈은 세속적인 것을 존중합니다. 끼니를 때우는 것에 대한 숭고함, 돈벌이를 통한 인간의 존엄성과 위엄을 그는 글로, 소설로 표현했습니다. 소외당한 것 같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삶 속에서 하찮게 느껴지는 돈벌이를 그는 긍정했습니다. 이땅의 위로받지 못하는 가장들은 김훈에게 위로를 받고 삶의 숭고함을 찬양 받습니다. 

   내가 살고 있는 삶의 존재 이유를 김훈에게서 받습니다. 그것도 우리와 같이 불완전하고 모순으로 가득 찬 위대한 김훈에게. 그렇기 때문에 저는 그에게 열광합니다. 그의 다음 소설을 기대합니다. 

   소중한 기회를 준 알라딘과 문학동네, 오마이뉴스 그리고 김훈 선생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댓글(4) 먼댓글(2)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1. 『개』냉엄하고 엄정한 시선을 잠시 거둔, 미문의 소설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1-28 08:08 
       김훈의 문장은 냉엄하고 엄정하다. 1인칭 시점의 글이건, 3인칭 시점의 글이건 간에, 그는 냉엄하고 엄정한 관찰자의 시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기본 조건이야말로 그가 기자시절부터 단련해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 것이다.     그런 그도 피곤했던 것일까? 늘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있던 그의 시선이 『개』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고 아련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인간이 아닌
  2. <공무도하> '시간 너머'의 세계로 건너가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1-28 08:44 
       처음 <공무도하>를 읽었을 때의 느낌은 그의 처녀작인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의 대구 소설이 아닌가 싶었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은 바람이 불어오는 것으로 시작하고 <공무도하>에서는 장마전선이 형성되는 것으로 시작한다. 바람과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은 물의 이미지는 우리가 그 존재는 알고 있으나 잡을 수 없는 아득한 것이다. 마치 우륵의 음률이나 타이웨이 교수의 저작처럼.
 
 
톨트 2009-11-1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강연회 였군요. 저는 추위와 감기 때문에 갈 생각은 엄두도 못내고... 여튼 저도 김훈 선생의 소설은 대부분 읽었습니다. 배울 게 많은 작가이지요.

Tomek 2009-11-16 12:22   좋아요 0 | URL
감기 걸리셨나봐요. 요즘 감기 독한데.. 빠른 쾌유 바랍니다.
이런 자리는 처음이었는데, 좋은 분위기 속에서 화기애애하게 진행됐습니다. 좀 더 시간이 길었으면 했는데.. 90분이 금방 지나가더군요. 다음에 또 다른 기회가 있으면 좋겠습니다. ^.^

2010-03-01 12: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2 09: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회사 업무 상 13일, SETEC에서 개최하는 <EBS 어린이 영어교육박람회>에 다녀왔다. 작년 12월에 KOEX에서 했던 박람회보다는 규모가 좀 작은 편이지만, 현 사교육 영어 '시장'의 흐름을 짚어볼 수 있는 기회였던 것 같다. 

   내가 하는 일이 어린이 영어와 관련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난 어린이 특히 유아에 대한 영어 교육에 대해서 꽤 비판적인 입장이다. 우리말도 제대로 모르는 아이들에게 다른 언어를 주입시키는 것은 -몇 몇 재능있는 아이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부모들의 욕심과 욕망이 투영한 결과라 생각한다. 하지만 내가 뭐라 할 수 없는 게, 난 그 대한민국의 일반적인 부모들의 욕망에 기대어 책과 상품을 개발하는 것으로 끼니를 때우기 때문이다. 삶의 모순. 내가 내 신념대로 살려면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하지만, 지금껏 쌓아온 경력을 버리기에는 이 사회가 어리숙하지 않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내 모순을 인정하고 살아가는 것인지. 대안 없는 모순을 끌어안으면서 나는 그렇게 하루 하루 끼니를 때우나 보다. 

   이번 <영어교육박람회>엔 총 41개 업체가 참가했다. 그 중 4개업체는 어린이 영어 교육과는 관련이 없는 업체였다(그 4개 업체는 쇼핑몰 회원유치, 보험 회원가입, 학원 인테리어, 아동학대 예방 캠패인 기관이다). 나머지 37개 업체 중 가장 많이 전시한 분야는 '어린이대상 영어 전문서적 및 교재'이다. 가장 볼 게 많았고 또 관심있는 분야였다. 

   아이들 손에 맞게 작은 판형으로 만들고 해당되는 주제에 맞는 내용으로 아기자기하게 책을 꾸몄다.   

   유아를 대상으로 하는 책은 책이라기 보단 장난감, 교구에 가깝다. 그만큼 '책'을 온몸으로 느껴서 책을 알게되고 결국엔 책을 친숙하게 대하는 것. 위의 책들은 책 위에 책 내용과 관련한 장난감이 같이 있는 게 신선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빠질 수 없는 팝업북의 향연. 평면성을 지닌 책에서 입체성을 지닌 그림이 튀어나오는 것은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의 주의도 끌기 마련이다. 책을 통한 신기함과 재미를 느낄 수 있으므로 아이들은 더 많이 책과 접하게 될 것이고 책에 있는 내용 또한 익히게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저런 책을 만들어내는 아이디어가 부족한 것과 제작비가 많이 든다는 것. 하지만 도전해 볼만한 영역이기도 하다.  

   달력처럼 양면을 사용할 수 있고 글의 내용에 맞게 시간을 독자 스스로 조작할 수 있는 책. 책이 꼭 양면을 사용헤 펼쳐서 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형식적인 면에서 새로운 책이 계속 나오는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존경스럽고, 이런 기획을 무시하지 않고 살린다는 것이 부럽다는 생각이 든다.  

   똑같은 위치에 똑같은 모양을 한 눈을 가지고 같은 주제로 얼마나 다양하게 변주를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훌륭한 예시다. 이런 책을 만드려면 얼마나 많은 아이디어 회의와 기획과 시행착오를 겪어야 할까? 그에 비해 난 너무 쉽게 책을 기획하고 만드는 게 아닐까하는 반성을 했다. 

   책이 꼭 사각형일 필요는 없다는 멋진 형식 변형의 한 예. 항상 깨어있으려고 노력하는 사람만이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 같다. 

   영어 사교육 시장의 측면에서 봤을 때 작년에 비해 달라진 점은 '화상교육'이 꽤나 많이 등장했다는 점이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 업체도 상당히 많이 참가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앞으로 학원의 역할은 관리자의 역할에 머물것 같다. 지금 영어 학원이 선생 중심(T-centre)에서 학생 중심(S-centre)의 수업으로 넘어갔듯이, 앞으로는 선생과 학생의 일대일 수업이 될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인터넷이고. 물론 현장 수업과 온라인 수업의 차이는 아직까지는 현장 수업의 효과가 높지만, 이 차이는 앞으로 점점 좁혀질 것이다. 박람회에 참가한 인터넷 기반 프랜차이즈 학원들은 그 차이를 학원수업으로 매우고 있다. 이것이 성공할지 아니면 그냥 해프닝으로 끝날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새로운 수익 모델을 제시했다는 점은 간과하기 어려울 것 같다. 

   영어 교육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이번 주말을 이용해 한 번 다녀오시는 것도 좋은 기회라 생각한다. 2009년 현재 영어 사교육 시장의 흐름을 느낄 수 있는 기회이니까 말이다. 

 

 

*덧붙임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많아서인지 정말 멋진 팝업북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습니다. 거의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더군요. 몇 장 올려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