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 블루베리 나이츠
왕가위 감독, 노라 존스 (Norah Jones) 외 출연 / KD미디어(케이디미디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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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My Blueberry Nights)』는 왕가위 감독이 처음으로 미국에서 영어로 찍은 영화다. 그는 홍콩을 벗어난 다른 나라에서 영화를 찍은 적이 있어도, 배우는 항상 중국어를 사용하는 배우를 기용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노라 존스, 주드 로, 나탈리 포트만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서양 배우들을 기용했다. 중국인들이 미국에서 찍는 영화가 아닌, 그곳 미국에 사는 사람들로 찍는 왕가위의 영화라니. 설정만으로도 기대감이 넘치는 영화였다. 그러나 영화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오간다.  

   영화의 내용은, 이번에도 역시, '사랑'영화다. 하지만 전작인 『화양연화』와 『2046』에서 이미 '어른'의 사랑을 보여준 왕가위는 이번엔 실연의 치유 과정을 보여준다. 영화의 주인공 엘리자베스(노라 존스)는 남자 친구에게 차인 후, 미국 전역을 돌아다닌다.(영화에 나오는 곳은 멤피스와 라스베가스지만, 아마도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의 사랑을 보면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해나간다. 그리고 종종 그녀가 실연당했을 때 그녀를 위로해준 카페 주인 제레미(주드 로)에게 일방적인 편지 연락을 한다. 

   먼저 절반의 실패. 전작 『2046』에서 왕가위는 한국, 중국, 일본의 다국적 배우들과 작업을 했다.(아쉽게도 심혜진은 촬영은 했지만, 편집돼서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은 굉장히 흥미롭고 좋았다. 하지만, 헐리우드 배우들의 출연은 왕가위 영화의 그 정서를 휘발시켰다. 그들의 모습은 아름답고 매혹적이지만, 어딘지 모를 위화감이 느껴진다. 왕가위 특유의 스타일이 살아 있을 뿐, 그 특유의 '통절한' 정서는 사라졌다. 그래서 이 영화는 마치 외국의 한 감독이 왕가위 스타일을 모방해 영화를 찍은 것 같은 가짜 냄새가 난다. 진짜 왕가위가 찍었는데도. 『무간도』라는 귤이 헐리우드에 와서 『디파티드』라는 탱자가 됐듯이,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도 다른 문화권으로 건너가면 전혀 다른 것이 되어버리는 것이 아닐런지. 그리고 그 문화적인 너비는 이쪽의 문화에서 저쪽의 문화로 각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각색하거나 윤색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것.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결국 우리는 우리 이외의 사람들을 평생 이해 못하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마치 『화양연화』의 <Yumeji's theme>과 『마이 블루베리 나이츠』의 <Yumeji's theme>의 차이처럼.

   절반의 성공은 왕가위의 시선이 조금 더 넓어졌다는 것이다. 『타락천사』에서 잠깐 나온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화양연화』를 관통하는 '어른들'의 관계가 이곳 미국에서도 그려진다. 그런 빗나가고 엇갈리는 관계를 통해서, (스스로 기억에서) 사라져가는 것과 물건을 통해서 끝까지 간직하려는 필사적인 마음이 이번 영화에 나타나 있다. 중경삼림의 비누와 수건같은 마음을 가진 소품들이 이번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대신한다. 연인들이 버리고 간 열쇠와 남편이 남기고 간 계산하지 않은 영수증, 도박으로 딴 재규어, 그리고 팔리지 않아 쓰레기통으로 들어갈 운명의 블루베리 파이까지. 사소한 물건들이 각자의 마음속에 큰 의미로 남게 된다. 물론 이런 깨달음은 모두 실연 후에 오는 것이다. 누군가를 잃어버리고 그 누군가가 의미 있는 존재로 남게 되지만, 결국 그 존재는 없고, 대체물로 그 존재를 대신하는 아픔이 이 영화에 베어있다. 

   시간과 거리로 환산된 실연의 아픔을 치유한 엘리자베스가 제레미와 '달콤한' 키스를 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제레미가 간직했던 수많은 연인들의 '열쇠'는 모두 각자의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 그 열쇠는 각자의 사연을 가진, 각자의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였다. 이제 그는 엘리자베스의 열쇠만을 간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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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지 2009-12-03 0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경삼림도 좋은데, 개인적으론 화양연화를 가장 재미있게 본 거 같습니다.

Tomek 2009-12-04 09:38   좋아요 0 | URL
저는 『춘광사설』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습니다. 군대 있을 때 처음으로 외박나와서 꾸리꾸리한 여관방에서 혼자 봤었습니다. 영화 마지막에 장국영이 '통곡'하는 모습에서 펑펑 울었던 기억이 있네요.

『중경삼림』은 고등학교 때 봤을 땐 굉장히 흥겨운 영화라 생각했었는데, 몇 년 전에 다시 봤을 땐 상당히 '메마른'영화여서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

『화양연화』와 『2046』은 결혼하고 나서 다시 보니 처음 봤을 때 보다 그 의미가 다르게 느껴졌습니다.
 

 

[본의 아니게 불쾌한 기분이 들 수 있는 이미지가 있으니 주의 바랍니다.] 

  

 

   며칠 전에 '세계 최장신 213cm 여성 모델' 기사가 화제가 되었다. 그냥 보기에, 누군가 포토샵으로 장난을 한 것처럼 보였는데, 관련 동영상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니 사실이었다. 실재가 가짜처럼 보이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그녀의 이름은 아마존 이브(Amazon Eve)고, 국적은 미국, 키는 213cm라 한다. 처음엔 그녀의 유난히 큰 키때문에 시선이 끌렸지만, 보면 볼수록 독특한 그녀의 표정에 자꾸 눈길이 갔다.    

 

   

 

   실재같지 않은 훤칠한 키, 그리고 분명 웃고 있는 모습이지만 무언가를 참고 있는 듯이 아랫입술을 살짝 물고 있는 모습과 치켜뜬 것 같은 강렬한 눈빛이 강한 기시감(旣視感)을 불러 일으켰다. 맞다. 난 그녀를 언젠가 본 것 같았다. 그녀는 내게서 후치를 기억하게 했다.  

 

  

이토 준지의 그녀, 후치


   2m가 넘는 훤칠한 키에 한 번 보면 기억에 각인을 시켜놓을듯한 강렬한 인상을 지닌 후치는 공포만화로 명성을 쌓은(현재 진행형 동사임) 이토 준지의 단편 만화에서 나온 캐릭터다. 그녀는『소이치의 저주의 일기』중「소문」에서 데뷔했다. 소이치가 단순히 반 친구를 놀리기 위해 연못에 무시무시한 여자가 있다는 소문을 냈는데 실제로 나타나는 역이다.  

   그리고 같은 책「패션모델」에서 그녀의 이미지를 고정시킨 강렬한 역을 맡는다. 키 큰 모델이 아마추어인들이 찍는 영화에 배우로 발탁되어 촬영을 위해 산에 갔는데 그녀가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을 잡아 먹는다(!)는 내용이다. 시공사 구판에서는 『소이치의 저주의 일기』에 두 편이 다 들어있지만, 새로 나온 <이토 준지 공포 박물관>시리즈에는 5권 『뒷골목』과 6권 『소이치의 저주 일기』에 두 에피소드가 나뉘어져 있다. 이전 구판이 후치의 이야기를 소이치 이야기 결말부에 대한 덧붙임 식으로 다루었다면, 이번 신판에서는 그녀를 당당한 개별적 캐릭터로 다룬 셈이다.   

 

    

 

   이토 준지의 후치 사랑은 워낙에 각별해서 후에 그녀를 한 번 더 출연시킨다. 『어둠의 목소리』 「도깨비집」에서 그녀의 예상치 못한 등장에 경탄과 경악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신 어둠의 목소리:궤담』 「소이치 전선(前線)」에서의 등장 이후로 (아마도 아쉽지만) 그녀의 모습은 더이상 보기 힘들 것 같다.  

 

   왜 아마존 이브를 보고 후치를 기억해냈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녀는 적어도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는 건강한 모델일 것이다.  

 

   


 

*덧붙임 

   1. 이토 준지는 개별적 캐릭터로서 후치를 굉장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후치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그의 인터뷰를 조금 옮겨놓겠습니다. 전문은 더링님의 블로그에 가셔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이와: 이야기의 소재들을 생활을 찾는다고 하는데, 당신은 생활 속에 보이지 않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 것 같다. 흥미로운 소재를 생각한 후에 무서운 이야기로 만드는 게 아닌가? 「패션모델」역시 그렇게 만들어졌나? 

이토: 잡지를 읽는데 어떤 모델이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는데, 그녀의 표정은 매우 섬뜩했다. 패션모델치곤 독특해 보였다. 그래서 그걸 과장시키고 식인이라는 설정을 추가했다. 그랬더니 무서운 이야기가 되었다. 

이토준지 다빈치 매거진(1998)인터뷰
인터뷰: 이와네 아키코
번역자: 더링

 
   

 

   2. 후치의 입을 보니 또 한사람이 생각나는군요. 7080세대라면 다들 기억 하실 듯 합니다. ^.^



에이미, 지못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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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gettable. 2009-12-03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무섭군요 ㅠ_ㅠ

블루베리나이츠 리뷰를 보고 상큼했던 분위기를 떠올리며 스크롤을 내리는데 이토준지의 만화가..^^;; 중학생때였나, 이 만화책을 보면서 두근두근하며 최대한 손이 그림에 닿지 않도록; 책 모서리를 잡고 책장을 넘기던 기억이 나네요 ㅎㅎ 역시나 이렇게 이미지를 따로봐도 무섭군요 ㅠㅠ

Tomek 2009-12-04 09:37   좋아요 0 | URL
본의 아니게 무섭게 해드려서 죄송합니다. ^.^;

저도 처음엔 이토상의 만화를 보고 무서워했었는데, 계속 읽다보니 그 상상력의 힘에 압도되더군요. 특히 「기나긴 꿈」이나 「길 없는 거리」같은 작품들에서 소재주의를 넘어서 인간의식의 본질적인 부분까지 건드리는 것을 보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2000년대 이후의 작품은 소재주의에 머무는 듯한 경향을 보여주지만, 그래도 다른 작가들이 범접할 수 없는 그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죠. ^.^
 
리뷰의 허망함
자전거 여행 2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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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작 『자전거 여행』이 한강 하류, 조강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을 멈추었다면, 이번 『자전거 여행 2』에서는 바로 그 조강에서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김훈의 기행문은 여타의 기행문과 다르다. 일반적인 기행문들이 그 지역의 정보와 풍경에 대해서 설명한다면, 김훈은 그가 바라본 풍경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것은 그가 본 것 그 너머의 것들이다. 그렇기때문에 굳이 그의 글을 분류해야 한다면, 기행'산문'집이 될 것이다.

   광릉의 숲에서 그는 숲과 나무를 통해 생명체로서의 '완성체'를 바라본다. 노동으로 음식을 섭취해 삶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비루한 인간은, 물과 햇빛만으로 스스로의 동력을 만들어내는 나무에 무한히 감동한다. 그가 바라는, 가장 최소한의 외부 요인으로 연명하는 생명체의 가장 이상적인 형태이다. 

   역사속에 박제된 남한산성에서 살기 위해 감수해야하는 삶의 치욕을 바라본다. 양수리 두물머리에서 다산 정약용의 치욕과, 그 치욕을 감내하는 삶을 바라본다. 살기위해 감내해야 하는 그 치욕의 크기가 얼마한지는 알 수 없으나, 김훈은 그들의 '그 어쩔 수 없는' 선택을 긍정한다.

   선재도 갯벌에서 어민들이 꼬막을 캐가는 것을 보고 선사시대부터 지속되어온 원시적인 삶의 역동성을 바라본다. 꼬막 캐기의 일관성은 선사시대와 현재를 이어주는 고결한 노동이다. 그는 이런 노동을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시간을 이렇게 과거와 현재로 잇대어주기도 한다.  

   경기만 등대와 고속도로에 막힌 차들로 장관을 이루는 미등의 물결을 바라보며 시간속에서 지속되는 빛의 신호와 이끌어줌의 고마움을 느낀다. 이렇듯 김훈이 자전거를 타고 바라보는 풍경은, 지금 살아가는 현재의 풍경을 통해서 그 풍경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의 첫 산문집『풍경과 상처』에서 그는 자신의 내면에 있는 '상처'를 통해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 후 10년, 그는 자신 내면의 상처의 범주에서 벗어난, 우리 '인간 내면'의 상처를 통해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이후에 그는 3인칭의 문장을 쓸 수 있었을까? 

   김훈의 소설, 특히 『칼의 노래』, 『현의 노래』, 『남한산성』과 같은 '역사 소설'만 읽은 독자들에게 이 책은 상당히 어렵게 다가갈 책이다. 하나의 풍경을 바라보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아니 그 풍경의 본질과 원형으로 다가가려는 그 치열한 사유의 과정이 읽는 이의 진을 빼기 때문이다. 위의 역사소설에서도 물론 치열한 사유의 과정이 있으나, 그나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라는 서사가 읽는 이의 나침반 구실을 해주지만, 생경한 풍경과 생경한 김훈의 사유 속에서 처음 길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그 길을 찾게 된다면, 김훈의 이 책은 더할나위 없는 축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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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공무도하』장철수의 모습에서 다산의 치욕을 보다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2-04 09:18 
       요즘들어 김훈의 책을 '과하다'싶을 정도로 많이 읽었다. [작가와의 만남]에 다녀오면 좀 그 양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어찌된 게 더 늘어났다. 10대 초반에는 이문열(이게 다 『삼국지』 때문이다), 중반에는 이현세, 10대에서 20대를 관통하는 조정래. 20대 초중반의 하루끼. 20대 말의 이토 준지와 고우영 그리고 30대에 만난 박민규, 성석제. 그 외에는 이렇게 전작을 파고든 작가는 없는 것
 
 
 

   시사IN이 걸그룹에 대한 기사를 썼다.(2009 대한민국 평정한 걸그룹) 집에 TV가 없는 나로선 당췌 누가 누군지 모르는 이야기었는데, '김작가'가 음악적인 면에서 접근한 기사(음악성까지 갖춘 걸그룹)를 읽고 갑자기 궁금해졌다. 아마도 스쳐지나가면서 들어본 익숙한 음악이겠지만, 그래도 왠지 아직까지는 익숙하지 않다. 이번 기회에 한번 도전해봐야 할 듯.

   예전에 디시 인사이드에서 '악플에 근거해서' 만든 걸그룹 관계도가 기억나 들쳐봤지만, 난 봐도 당췌 모르겠다...(클릭하면 커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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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아라 - 1집 Absolute First Album [재발매]
티아라(T-ara) 노래 / Kakao Entertainment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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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시대 노래 / SM 엔터테인먼트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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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운 아이드 걸스 3집 - Sound G [2CD]
브라운 아이드 걸스 (Brown Eyed Girls) 노래 / 스톤뮤직엔터테인먼트(Stone Music Ent.)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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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NE1 노래 / YG 엔터테인먼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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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훈, 독자와의 만남] 잘 다녀왔습니다.
리뷰의 허망함
- 내 가난한 발바닥의 기록
김훈 지음 / 푸른숲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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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훈의 문장은 냉엄하고 엄정하다. 1인칭 시점의 글이건, 3인칭 시점의 글이건 간에, 그는 냉엄하고 엄정한 관찰자의 시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기본 조건이야말로 그가 기자시절부터 단련해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 것이다. 

   그런 그도 피곤했던 것일까? 늘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있던 그의 시선이 『개』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고 아련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인간이 아닌 개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중략) ...개에 대한 관심이 생겨 도감을 찾아보니, 개의 시각과 청각, 후각이 인간보다 월등히 뛰어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뛰어난 감각을 지니고 있다면, 개가 느끼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것 이상의 것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삶의 뛰어난 원형질을 지닌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내가 그 삶의 뛰어난 원형질을 지닌 개가 되어 이 세상을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집필을 시작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삶을 삶 자체로 느끼지 못합니다. 글자, 매체,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 사이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우리의 삶을 차단합니다. 우리가 우리 몸으로 직접 개입하고 느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개는 직접 몸으로 부딪히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개를 통해 우리에게 부당하게 개입하는 것에서 벗어나 세상을 직접 느끼는 것을 집필 의도로 삼았었는데, 그게 잘 표현됐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작가 김훈, 독자와의 대화 中)

 
   

   그의 말대로 우리는 삶을 삶 자체로 느끼지 못한다. 인간은 하루 하루 살면서 겪는 현상이나 느낌을 개념화된 언어로 정리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안하다고 느끼거나 (혹은) 뒤쳐진다고 느낀다. 이것은 실체가 없는 불안함이고, 대상이 없는 뒤쳐짐이다. 늘 이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해야 안심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개는 그렇지 않다. 개에게는 언어가 없다. 개는 온 몸으로, 모든 감각으로 세상을 익힌다. 개 발바닥에 있는 굳은살의 정도가 개가 느끼고, 경험한 세상을 나타낸다.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칼의 노래』, 『현의 노래』를 통해 인간 삶에 대해, 역사에 대해, 민족과 국가에 대해, 예술에 대해 고민한 김훈은 더 큰 인간 삶의 원형질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바로 그 '개'를 주인공으로, 그 '개'가 바라본 세상을 '개'의 시선으로 글을 썼다. 그가 '개'가 된 덕분에, 그는 인간으로서 지닌 냉엄하고 엄정한 시선 대신 감각만으로 느끼는 따스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봤다. 덕분에 소설은 다른 소설들과 달리 아름다운 문장으로 넘쳐난다. 

   소설은 4부로 나뉘어 있다. 1부에서는 '보리'와 그의 형제들, 어미 개에 대한 이야기와, 그들을 키우는 할아버지, 할머니, 댐 때문에 곧 수몰될 그들의 고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2부에서는 새로 이사간 어촌 마을의 일상, 3부에서는 '보리' 주인과의 끈끈한 정과 다른 개들과의 만남, 4부에서는 '소멸'에 대해 이야기한다.

   개는 인간 삶에 개입하지 않는다(혹은 할 수 없다). 개는 인간과는 다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삶을 경험한다. 개의 삶은 인간의 윤리나 지식으로 재단될 수 없다. 개는 체념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간다. 김훈은 어쩌면 개의 삶에서 인간 삶의 최정점을 보았는지 모른다. 인간을 속박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간 삶을 삶 그대로 느끼는 긍정적인 삶. 

   어쩌면 김훈은 다시는 이런 류의 소설을 쓰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개』이후, 그는 『강산무진』, 『남한산성』,『공무도하』의 무력감과 허무함에 진득히 빠진 '어찌할 수 없는' 인간 세계로 돌아왔다. 아마도 이 소설은 그의 독자와 작가 스스로에게 준 작은 '위로'일런지도...

 

   쓰지 않고 혼자만 간직하려 했으나, 소설의 잔향이 계속 남아 있어 다른 책을 읽기 힘들다. 간직한 느낌을 끄집어내어 '보리'에게 작별을 고한다.  

   인간의 마을마다 서럽고 용맹한 개들이 살아남아서 짖고 또 짖으리. 개들아 죽지 마라. 

  

 

*덧붙임 

   이 책을 읽고 나서 갑자기 홍상수 감독의 『해변의 여인』이 떠올랐습니다. 영화속에서도 '보리'와 같은 진돗개가 나오지요. 허문영 영화평론가가 『해변의 여인』을 평할 때, 이 개에 대해 언급을 했었습니다. 같이 읽어볼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조금 옮겨 봅니다. 전문을 읽으실 분들은 아래 제목을 클릭하시기 바랍니다.   

 

홍상수식 구원의 기적 <해변의 여인> 
글 : 허문영 (영화평론가) | 2006.09.20   

   하얀 진돗개가 잘 차려입은 부부와 함께 봄의 해변을 거닐고 있다. 남자가 얼굴 나이에 비해 머리숱이 적고 둘 다 우울한 말투를 지녔으며 해변의 여행객들이 돌이를 예뻐하는 걸 귀찮아하는 기색이긴 하지만 부부는 기품이 있어 보인다. 해변에는 고즈넉한 평화가 깃들어 있고, 오후의 햇살은 화사하며, 개의 털은 햇살로 더욱 새하얗다. 그러나 개는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을 알지 못한다. 그의 이름은 ‘돌이’다.  

   돌이는 해변에서 한번 더 비슷한 모습으로 나타난 뒤, 부부에 의해 버려진다. 돌이를 내버려두고 기품있던 부부가 낡은 프라이드 승용차를 타고 떠나버리자, 버림받은 돌이는 프라이드 뒤를 있는 힘을 다해 아스팔트길을 따라 달려간다. 며칠 뒤, 돌이는 펜션 종업원이자 펜션 주인의 조카에 이끌려 다시 해변에 나타난다. “삼촌이 키우기로 했다”고 그는 말한다. 여행객이 “차라리 잘됐다”고 말한다.  

    홍상수의 일곱 번째 영화 <해변의 여인>은 개의 영화는 아니지만, 어쨌든 이 개가 중요한 영화다. 돌이는 자주 나오진 않지만 이 영화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역정을 겪는다. 인간들이 모텔과 횟집과 해변에서 짝짓기 수작을 벌이고 있는 동안, 그는 주인과 함께 우아하게 해변의 걷다가 다음날 주인에게 버려져 생사의 갈림길에 섰고 며칠 뒤 새로운 주인을 만나 다시 평화를 찾는다. 그 사이에 그의 이름은 ‘돌이’에서 ‘똘이’ 혹은 ‘똘’로 오인돼 불렸고, 그의 이름을 모르는 새 주인에게 ‘바다’로 명명된다.  

   돌이는 인간의 서사를 옹호하거나 보충하기 위해 혹은 비난하기 위해 이 자리에 와 있는 게 아니다. 그는 다만 자신의 시간을 살고 있다. 어떤 이름으로 불리든 누가 주인 행세를 하든 그는 살아간다. 우리는 그 개를 알지 못한다. 진돗개이긴 하지만(주인은 “진돗개라서 이발하지 않는다”고 이상하게 말한다), 그가 순종인지 잡종인지, 어떤 짝을 만나왔는지, 게다가 수컷인지 암컷인지도 알지 못한다(돌이는 대개 수컷의 이름이지만 바다는 대개 암컷의 이름이다). 또 그의 전 주인이 부유한지 가난한지 혹은 병들었는지 건강한지 알지 못하며, 주인 부부가 그를 왜 버렸는지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가 위험한 아스팔트길을 달리다가 어떻게 바다로 돌아왔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는 죽음 같은 시간을 거쳐 다시 바다로 와 있다. 개가 자신의 시간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그의 시간이 홍상수 영화에서 마련된다는 건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중략) 

   “바람은 딴 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김수영, <절망>) 온다. 그것이 기적이다. 그 기적은 누구도 모르게 돌이가 바다로 돌아왔을 때 이미 이루어졌고, 돌이는 이미 바다가 되어 자신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다. 홍상수 영화는 그렇게 넓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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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트 2009-11-27 16: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는 김훈 작가가 긴장감을 풀고 여유롭게 쓴 것 같다는 느낌이 잔뜩 묻어나지요. 홍상수 영화와 연결되는 부분이 재미있네요.

Tomek 2009-11-28 08:03   좋아요 0 | URL
저도 굉장히 편하게 읽었습니다. 다음엔 혹시 '새'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쓰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개'는 꽤 많이 나오는 편입니다. 『생활의 발견』,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해변의 여인』, 『밤과 낮』, 『첩첩산중』에서 다 의미있는 존재로 나오지요. 언제 기회가 되면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