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회 - 손대성은 풍도酆都를 벗어나고 원수성은 팔괘八卦를 풀이하다


   풍도란 풍도옥(酆都獄)이라고도 하는데, 『요원전』에서 나타태자가 있는 곳이 삼라전, 곧 지옥이니, 풍도란 지옥을 가리키는 말이다.

   예부터 중국에는 사방과 중앙에 귀를 지배하는 귀제(鬼帝)가 있었다고 한다. 이 중 북방의 귀제가 있는 곳이 나풍산(羅酆山)이라는 산인데, 이 산은 북방 귀제의 수도여서 산 이름에 ‘도(都)’라는 자를 붙여 풍도라고도 불렸다. 이 산 위에는 지옥에 해당하는 6개의 천궁(天宮)이 있어, 귀는 귀제의 재판에 의해 죄의 경중에 따라 보내질 천궁이 결정되며 그곳에서 죄를 갚게 된다. 도교에서는 이 귀제를 풍도북음대제(酆都北陰大帝)라고 불러, 귀가 가는 명계를 지배하는 신으로 여겼다. (시노다 고이치『중국환상세계(幻想世界のちゅうにんだち)』에서 인용)

   팔괘란 중국 삼황(三皇) 중 하나인 복희씨(伏羲氏)가 만들었다는 여덟 가지 괘로, 주역(周易)에서 세상의 모든 현상(現狀)을 음양(陰陽)을 겹치어 여덟 가지의 상으로 나타낸 것을 말한다.



p.140

“과인이 어마마마께 들은 진실... 지금 지상에는 두 명의 태자가 있지만, 결국 두 태자를 죽이고 황제도 죽여... 이 제삼태자, 나타가 황제가 될 거라 이 말이다! 과인은 비록 지금은 이곳 삼라전의 왕이지만 결국에는 지상의 황제가 되고... 언젠가는 천상의 옥제마저 될 삼계의 태자란 말이니라!”


   나타태자와 탁탑 이천왕의 이야기는 『서유기』와 『봉신연의』 두 군데에 나오는데, 큰 줄기는 같지만, 디테일이 조금씩 다르다. 여기서는 『서유기』의 판본을 따르는 것으로 한다. 탁탑 이천왕은 아들을 셋 두었는데, 첫째가 금타(金吒), 둘째가 목타(木吒), 그리고 셋째가 나타이다. 이중 목타는 남해의 관음보살에게 귀의, 혜안 행자(惠岸行者)로 불리고 있다.

   여기서 나타가 이야기하는 “지금 지상에는 두 명의 태자가 있지만”이라는 말이 조금 이상한데, 왜냐하면 당고조 이연의 아들은 이건성, 이세민, 이원길 이렇게 세 명이기 때문이다. 조금 짓궂은 상상을 해보자면, 당고조 이연의 후궁인 지용부인은 이연의 아들인 이원길과 동침했기에, 이원길을 남편의 아들이 아닌 자신의 샛서방 정도로 격상(?)됐기에 나타에게 증오하는 아버지들 중 한 명이기에 저 카운트에서 제외되어, 세 명의 태자가 아닌 ‘두 명의 태자’라고 지칭한 게 아닐까 감히 상상해본다. 실제 역사에 기록된 사실 또한, 이세민이 현무문의 쿠데타를 일으킬 때 올렸던 상소 내용을 보면, 이건성과 이원길이 지용부인과 음탕한 관계를 맺었다는 것이었다.

   나타가 자신을 ‘제삼태자’라고 부르는 이유는 삼형제 중 셋째라서가 아니라, 황제와 두 명의 태자를 대신함과 동시에 이곳 저승과 인간세상, 그리고 천상의 삼계를 통치할 태자 이고픈 마음에 그렇게 자칭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본다.



p.141

“그리 놔둘 성 싶으냐! 이 참요검斬妖劍을 받아라!”


   나타태자에게는 여섯 가지 병기가 있는데, 그 이름은 다음과 같다.


卻是砍妖劍、斬妖刀、縛妖索、降魔杵、繡球、火輪兒。

요괴의 목을 치는 감요검(砍妖劍)와 참요도(斬妖刀), 요괴 마귀를 결박하는 박요삭(縛妖索), 절굿공이처럼 생긴 항요저(降魔杵), 둥근 공처럼 생긴 수구(繡球), 그리고 불길이 활활 솟구치는 수레바퀴 화륜아(火輪兒)가 그것들이다.


   『서유기』에서 참요검과 참요도가 번갈아가면서 쓰이기 때문에 같은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p.145

“타결鼉潔! 마앙摩昻! 죽여라! 언감생심 이 나타삼태자哪吒三太子의 자리를 노리던 놈이다!”


   나타태자가 부르는 타결과 마앙은 보다시피 악어인데, 손오공은 ‘용’이라며 놀란다. 이것은 손오공이 악어를 보지 못해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 알 수 있으나 실은 모로호시 선생이 교묘하게(혹은 절묘하게) 인용한 부분이다.

   『서유기』43회를 보면, 삼장법사가 흑수하(黑水河)를 건너다 요괴에게 사로잡히고 마는데, 그 요괴가 바로 서해 용왕 오순(敖順)의 조카 타결이다. “불초 생질(甥姪) 타결(鼉潔)은 돈수백배하옵고, 둘째 외숙 되시는 오씨(敖氏) 어른 좌하에 여쭙나이다.(愚甥鼉潔,頓首百拜,啟上二舅爺敖老大人臺下)” 이 사실을 알게 된 손오공은 오순을 찾아가 시비를 따지고, 오순은 태자를 불러 타결을 잡고 삼장법사를 구출하게 하는데, 그 태자가 바로 마앙이다. “오순은 즉시 태자 마앙(摩昻)을 불러들여 분부를 내렸다. 「어서 속히 건장한 하어(鰕漁) 장병 오백 명을 뽑아 거느리고 출동해서 타룡이란 놈을 잡아다가 죄를 묻도록 해라.」(敖順即喚太子摩昂:「快點五百蝦魚壯兵,將小鼉捉來問罪。」)”

   그리고 손오공과 타결, 마앙이 물속에서 엉키는 이 장면으로, 손오공이 빠진 물속은 흑수하로 볼 수도 있겠다. 『서유기』에서 흑수하에 대한 묘사는 다음과 같다.


層層濃浪,疊疊渾波,層層濃浪翻烏潦,疊疊渾波捲黑油。近觀不照人身影,遠望難尋樹木形。滾滾一地墨,滔滔千里灰。水沫浮來如積炭,浪花飄起似翻煤。牛羊不飲,鴉鵲難飛。牛羊不飲嫌深黑,鴉鵲難飛怕渺瀰。只是岸上蘆蘋知節令,灘頭花草鬥青奇。湖泊江河天下有,溪源澤洞世間多。人生皆有相逢處,誰見西方黑水河?

   층층이 짙은 물결, 첩첩이 흐린 파도.

   층층이 짙은 물결은 시커먼 빗물을 뒤엎어놓은 듯하고, 첩첩이 흐린 파도는 검정 기름을 휘말아놓은 듯하다.

   가까이 보아도 사람의 그림자 비치지 않고, 멀리 떨어져 바라보아도 나무숲의 형체를 찾아보기 어렵다.

   대지는 온통 세차게 굽이쳐 흐르는 먹물로 뒤덮여, 천리 너비에 도도히 흘러 잿빛투성이로 만들었다.

   수면에 떠오른 물거품이 숯더미처럼 쌓이고, 흩날려 오른 물보라가 석탄 더미를 뒤엎어놓은 듯하다.

   소나 양도 마시지 않고, 까치 떼도 날기 어렵다.

   소나 양은 너무 깊고 검어서 마시기를 꺼리고, 갈가마귀 까치 떼는 너르디너른 강물 폭이 두려워 날지 못한다.

   강기슭 둔덕 위에 갈대와 네가래 수초만이 무성하게 푸르러 제철을 알리고, 여울목에 들꽃 나무숲만이 푸르름과 기이한 자태를 뽐낸다.

   호수와 늪, 장강 대하는 하늘 아래 어디에나 있으며, 골짜기 시내와 샘의 원천과 연못, 동굴은 인간 세상에 많고도 많다.

   사람이 한세상 태어나 어디인들 서로 만날 곳이 없으랴만, 서방 세계 흑수하(黑水河)를 어느 누가 보았으랴!



p.149

“영안거永安渠에 떠다니던 걸 이 사람이 건져왔다네.”



圖 6 8 世紀前半的長安宮城、皇城、外郭城 에서 발췌


   손오공이 지용부인에 이끌려 들어간 곳은 액정궁의 지하이고, 삼라전에 흐르는 지하수로가 영안거에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이다. 영안거는 장안 도성을 남북으로 관통하고, 특히 황성과 궁성 옆을 흘러 저 멀리 금원(禁苑)까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육건장(六健將) 일행이 궁성을 침입하는 루트로 활용되었다.



p.152

“‘한 손님이 두 주인에게 신세지지 않는다’라는 말도 있건만, 기왕이면 좀 확실히 봐 줄 일이지 그게 뭐요?”


   『서유기』3회에서도 이 말이 사용되었는데, 손오공이 동해 용왕 오광(敖廣)에게 다짜고짜 찾아가 금고봉을 (거의)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갑옷투구를 내놓으라고 (거의) 협박하는 장면에서 쓰였다. 이 때 손오공이 한 말은 다음과 같다.


一客不煩二主。若沒有,我也定不出此門。

   속담에도 ‘손님이 한 주인집을 찾으면 다른 주인을 찾지 않는다’하지 않았소이까? 만약 없다고 뻗대신다면 나도 이 댁 문턱을 나서지 않을 테니까 알아서 하십쇼.


走三家不如坐一家。千萬告求一件。

   속담에 ‘세 집을 돌아다니기보다 차라리 한 집에 눌러앉아 버티는 것이 낫다’했소. 나는 여기서 꼭 한 벌 얻어가야 되겠는걸!


俗語謂『賒三不敵見二』,只望你隨高就低的送一副便了。

   속담에 ‘외상 돈 석 냥보다 맞돈 두 냥이 더 낫다’고 했으니, 적당히 알아서 한 벌 내어주시는 게 좋을 거외다.



p.154

“현장법사, 자네는 섭대승론攝大乘論을 완전히 통달했네. 이미 이 노인네를 넘어섰구먼.”

“하지만 법상法常스님... 빈도의 의문은 아직도 풀리지 않습니다. 빈도는 이제껏 엄법사嚴法師, 도악법사道岳法師를 비롯하며 많은 대사님들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 어느 분의 풀이라 해도 음으로 양으로 어딘가 모르게 합치가 안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현장의 학문 여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현장은 13세에 낙양[東都]에서 경 법사(景法師)에게 『열반경(涅槃經)』을, 엄 법사(嚴法師)에게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웠다. 후에 면촉(綿蜀)에서 석도기(釋道基)와 보섬(寶暹) 법사에게 『섭론(攝論)』과 『비담(毘曇)』을, 도진(道震) 법사에게 『가연(迦延)』을 사사받았으며, 상주(相州)에서는 혜휴(慧休) 법사에게 의심나는 것을 질문했고, 조주(趙州)에서는 도심(道深) 법사에게 『성실론(成實論)』을 배웠다. 그리고 장안에 들어가서는 대각사(大覺寺)에 머물면서 도악(道岳) 법사에게서 『구사론(俱舍論)』을 배웠고 법상(法常)과 승변(僧辯)에게서 『섭대승론(攝大乘論)』을 배웠다. 지금 『요원전』에서 현장과 대화하고 있는 스님이 바로 이 법상 스님이다.

   법상 스님은 남양(南陽) 백수(白水) 사람으로 속성은 장(張)씨로, 정관(貞觀) 연간(627-649)에 역장(譯場)의 역경(譯經)에 참여했다. 현장이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공부하고 습득하는 모습을 보고 찬탄하며, “자네는 석문(釋門)의 천리마(千里馬)라 할 수 있으니, 다시 지혜의 해를 밝게 하는 일은 마땅히 그대에게 달려있을 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가 이미 늙어서 그날을 아마도 보지 못할 것이 두렵구나.(汝可謂釋門千里之駒,再明慧日當在爾躬,恨吾輩老朽恐不見也。)”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당시 중국과 해외에 명성이 널리 퍼져있었던 법상 스님에게 20대 중반의 젊은 승려가 이런 찬사를 받은 것을 보면, 현장이 얼마나 특출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당시 현장의 지식이 어느 정도였냐면, “배우는 것은 모두 단번에 그 뜻을 깨달아 경전의 조목조목을 마음에 새겨두니 비록 나이 많은 노승들이라 해도 그를 따를 수가 없었고, 학문이 깊고 원대하여 은미하게 숨은 뜻까지도 밝혀내므로 대중들이 따를 수가 없었다. 때로는 홀로 깊고 오묘한 뜻을 깨닫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皆一遍而盡其旨,經目而記於心,雖宿學耆年不能出也。至於鉤深致遠,開微發伏,眾所不至,獨悟於幽奧者,固非一義焉。)”



p.155

“빈도는... 이 이상 섭론攝論을 연구해 본들 계속 제자리만 빙빙 돌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빈도는... 빈도는 천축에 있다는 『십칠지론十七地論』의 원본을 보고 싶나이다...”


   바로 이것이 현장이 17년간 그 지난하고 위대한 구법여행을 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이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法師既遍謁眾師,備飡其說,詳考其理,各擅宗塗,驗之聖典,亦隱顯有異,莫知適從,乃誓遊西方以問所惑,并取《十七地論》以釋眾疑,即今之《瑜伽師地論》也。

   법사는 두루 다니면서 여러 스승을 뵙고 그 말씀을 자세히 경청하고서는 그 이치를 자세히 고찰해보았다. 그런데 그들은 제각기 종지(宗旨)를 멋대로 해석하고 있어서, 성전(聖典)에 징험해 봐도 또한 숨은 뜻과 나타난 뜻에 다른 곳이 있어서 어느 것을 따라야 할 지 알 수가 없었다. 이에 법사는 서방(西方)으로 가서 의혹되는 것을 풀고, 아울러 『십칠지론(十七地論)』을 가지고 와서 모든 의심을 풀기로 맹세하였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이다.


   『유가사지론』이란, 미륵(彌勒)의 미륵보살이 무착(無着)을 위해 중천축(中天竺)의 아유사(阿踰闍) 대강당에서 4개월에 걸쳐 매일 밤 강설한 것으로 후에 현장(玄奘)이 번역한 것으로, 유가행자(瑜伽行者)의 경(境)‧행(行)‧과(果) 및 아뢰야식설, 삼성설(三性說), 삼무성설(三無性說), 유식설 등을 자세히 논하는 불전이다. 『아비달마대비바사론(阿毘達磨大毘婆師論)』이 소승 불교의 사상을 대표하고, 『대지도론(大智度論)』이 대승 불교가 발흥하던 시 대의 사상을 대표함에 대해서, 대승 불교가 완성되고 있던 시대의 사상을 대표하는 것으로서 유식 학파의 중도설과 연기론 및 3승교(乘敎)의 근거가 되는 불전이다. (더 자세한 것은 23회 p.89 주석 참조)



p.158

“그 지용부인이라는 여자는 정식으로 치면 윤덕비尹德妃라고 본래 양제의 후궁이었던 것을 호색한 이연이 눈독 들여 냉큼 자기 후궁으로 삼았다더군. 때문에 본래 황제의 비는 삼부인三夫人까지로 정해져 있던 규범마저 고쳐 사부인으로 만들었다는 말마저 있을 정도라지.”

“어흠~ 당 황제에게는 이 왼쪽에 보이는 것처럼 황후 아래로 백이십 명 이상의 여인들이 있었다고 합디다.”


   윤덕비가 원래 양제의 후궁이었다는 사실은 기록된 바 없다. 하지만, 삼부인이 사부인으로 늘어난 것은 당고조 이연 때가 맞다. 이런 역사의 빈틈을 자신만의 상상력으로 결부시키는 모로호시 선생은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당대 후궁의 칭호와 위계는 다음과 같다.


▪황후(皇后)

▪4부인(四夫人) -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 - 정1품

▪9빈(九殯) -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 - 정2품

▪27세부(二十七世婦) - 첩여(婕妤) 9명, 미인(美人) 9명, 재인(才人) 9명 - 정5품

▪81어처(八十一御妻) - 보림(寶林) 27명, 어녀(御女) 27명, 수녀(綏女) 27명 - 정8품



p.161

“전하, 그 일로 진왕이 폐하께 상소를 올린 모양이옵니다. 대명천지에 이런 변괴가 일어나는 까닭은 궐내에서 도의를 저버린 해괴망측한 행위가 벌어지기 때문이라며...”

“그것은 과인을 두고 하는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이정을 비롯한 진왕파들이 태자 전하와 제왕 전하께서 후궁 장이호張姨好, 윤덕비 등과 밀통한다며 중상모략을 일삼고 있나이다.”


   이 대화는 『요원전』 24회 p.85에서 이세민이 이정에게 은밀히 지시한 내용을 밝힌 것이다. 다시 한 번 반복한다면, 『구당서(舊唐書)』「은태자전(隱太子傳)」에, “건성과 원길은 또 밖으로 소인과 결탁하고, 안으로는 폐행(嬖幸, 황제의 총애를 받는 사람)과 관계하여, 고조가 사랑하는 장첩여(張婕妤)와 윤덕비(尹德妃)는 모두 이들과 음란했다.” 는 기록과, 『자치통감』권190에 “이건성과 이원길은 뜻을 굽혀서 여러 비빈들을 섬기고 아첨하고 뇌물을 보내지 않는 곳이 없게 하여 황상에게 좋게 보이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은 장첩여와 윤덕비에게 증(蒸, 이건성과 이원길이 아버지 이연의 처첩과 사통私通하는 관계를 가졌다는 말)하였다고 말하였지만 궁중 깊숙한 곳의 비밀을 밝힐 수는 없었다.”고 기록으로 보아, 이세민이 이런 내용의 상소를 실제로 올린 것은 역사에 기록된 것과 같다.

   하지만, 이는 이세민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일 공산이 크다고 여겨지는데, 왜냐하면, 이세민이 이 내용으로 당고조에게 상소를 올려 이건성과 이원길을 입궐시켜,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진순신 선생은 「은태자전」의 기록을 언급하면서, “건성과 원길의 이름을 나란히 적었는데, 음란한 상대가 어느 쪽인지 매우 모호하다”고 밝혀, 이 내용이 누군가의 조작임을 이야기하고 있다.



p.162

“오공, 소찬풍小鑽風녀석 못봤나?”


   소찬풍이란 『요원전』 23회부터 등장해 음으로 양으로 오공을 도와주는 원숭이다. 이 소찬풍이라는 이름 또한 『서유기』에서 발견할 수 있는데, 74회에서 팔백 리 사타령(八百里獅駝嶺)이란 산을 지나던 중 만나는 요괴들의 수하가 바로 소찬풍이다. 손오공은 이들 요괴들에 대한 정보를 캐내려고 소찬풍에게 접근하지만, 소찬풍이 워낙에 눈썰미가 좋고 의심도 많아 쉽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만큼 똑똑한 캐릭터인데, 『요원전』에서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속담을 직접 증명하는, 칠칠치 못한 원숭이로 나온다.

   소찬풍이란 이름이 지금 나오는 것으로 보아, 모로호시 선생은 아마도 「현무문의 장」을 그릴 당시, 53회에서 62회까지 이르는 「황풍대왕의 장」을 구상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황풍대왕의 자식과 수졸들의 이름이 모두 풍(風)자 돌림인데, 굳이 중요한 소찬풍을 이 장에서 소모시킬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p.168

“금원禁苑 서쪽 변두리에 조태천照胎泉이라는 우물이 있는데 말이야, 그 인근 여자들은 회임 기가 들면 거기로 가 물에다 자기 그림자를 비춰본다지... 회임한 여자가 비추면 그림자가 둘로 보이기에 조태천이라 부른다나... 그 우물이 출입구일세.”


   『서유기』53회에서 삼장법사와 저팔계가 강을 건너다 강물을 잘못 마셔 잉태를 하는데, 그곳에 사는 노파가 그 사정에 대해 설명을 하는 말에 조태천에 대한 설명이 있다. 『요원전』에서 해놓은 설명과 거의 흡사하다.


我這裡乃是西梁女國。我們這一國盡是女人,更無男子,故此見了你們歡喜。你師父吃的那水不好了。那條河喚做子母河。我那國王城外,還有一座迎陽館驛,驛門外有一個照胎泉。我這裡人,但得年登二十歲以上,方敢去吃那河裡水。吃水之後,便覺腹痛有胎。至三日之後,到那迎陽館照胎水邊照去。若照得有了雙影,便就降生孩兒。你師吃了子母河水,以此成了胎氣,也不日要生孩子,熱湯怎麼治得?

   우리네가 사는 이곳은 바로 서량여국(西梁女國)이랍니다. 이 나라에는 모두 여자들뿐이고 남정네라곤 하나도 없지요. 그래서 여러분을 보자 반색했던 거라오. 당신네 사부님이 그 강물을 떠마신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었어요. 그 강은 자모하(子母河)라고 부른답니다. 우리 국왕님이 사시는 성문 밖에는 영양관(迎陽館)이란 역사(驛舍)가 있고, 그 아문 밖에 조태천(照胎泉)이란 샘이 하나 있소이다. 우리 고장 사람들은 나이 스무 살을 넘기면 비로소 자모하 강변에 나가서 물을 마시는데, 그 강물을 마신 다음에는 이내 복통을 일으켜 잉태한 것을 알게 되지요, 사흘이 지난 뒤에 영양관으로 나아가 조태천 샘물에 몸을 비쳐보는 관례가 있어서, 만약 수면에 비친 그림자가 한 쌍으로 보이면 곧 어린 아기를 낳게 된답니다. 당신네 사부님도 자모하의 강물을 마셨다니, 그 때문에 복통을 일으키셨다면 아마도 태기가 있으신 모양이고, 이제 며칠 안 있어 어린아이를 낳게 되실 겁니다. 형편이 이렇게 되셨는데, 더운물 한 두 모금 마신다고 산고(産苦)가 멎겠습니까?


   『서유기』에서 자모하가 아이를 잉태하게 한다면, 그 반대편에 태기를 풀게 하는 낙태천(落胎泉)이 있는데, 그 낙태천을 차지하고 독점하는자가 바로 우마왕의 아우이자 홍해아의 삼촌인 여의진선이 차지하고 있다. 『요원전』에서 여의진선이 하는 일이 아이를 떼게 하는 환단을 만들거나 불법 중절 수술을 하는 것을 보면 얼추 비슷한 캐릭터로 볼 수 있다.



p.170

“바보 같은 소리 마라. 법도가 있는데 어찌 대궐 안에서 그리 움직일 수 있겠느냐. 게다가 세민이한테는 이정李靖이나 위지경덕尉遲敬德 같은 자들도 붙어 있을 것인데.”


위지경덕尉遲敬德 → 울지경덕尉遲敬德


   지금까지 ‘울’지경덕이냐 ‘위’지경덕이냐, 많은 말이 있었는데, 간단하게 정리한다면 ‘울’이 맞다. ‘尉’자는 성으로 쓸 때 ‘울(於勿切, 音鬱)’로 읽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에 ‘울지’성에 대해 찾아보면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p.170

“그보다 원길아, 지용부인과의 관계는 사실이냐? 세민이의 중상모략으로 그저 흘려듣기에는 석연치가...”

“형님이야 말로...!”


   이세민이 올린 상소를 모로호시 선생은 전적으로 믿지 않는 대신 절반 정도는 ‘그럴 수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여지를 남겼는데, 그 여지가 바로 이원길이다. 『자치통감』권 187에 기록된 이원길의 성품을 조금 옮겨본다.


   이원길(李元吉)은 성격이 교만하고 사치하여, (...) 멋대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풀어놓아 백성들의 물건을 빼앗게 하고 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활을 쏘아 그들이 화살을 피하는 것을 보았다. 밤에는 부(府)의 문을 열어놓아 다른 방에서 간음(姦淫)하는 것을 드러냈다. (...) 이원길은 어리고 약하며 지금 해야 할 일을 익히지 못하였으니, (...) 진양에는 강한 군사가 수만이고 식량도 10년은 지탱할 곳이고 왕을 일으킨 터전인데 하루아침에 이를 버렸다.


   당태종의 정통성을 위해 어느 정도는 폄하되었을 게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원길은 정말 문제가 있어 보인다.(그에 반해 태자 이건성은 어느 정도 복권이 되었다.) 이런 사료를 토대로 모로호시 선생은 야사와 역사를 적절하게 섞어 절묘하게 풀어놓은 셈이다.



p.174

“지당하신 말씀이옵니다. 전하라면 이 나라 사직을 훌륭히 떠받치실 수 있을 터인데 말이지요. 무엇보다 전하의 함자에서 「원元」자와 「길吉」자를 하나로 합치면 「당唐」이 되지 않사옵니까.”

“과연, 확실히 그러하구나! 그렇다면 나는 태어날 때부터 천자가 될 운명을 타고 났음이 아닌가! 동궁을 치는 것쯤은 세민이 놈만 제거하고 나면 손바닥 뒤집듯 쉬운 일이지.”


   이원길의 수하가 이렇게 흰소리를 하는 것도, 그리고 이원길이 이런 흰소리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유는 바로 수나라 말기에 유행한 ‘도참서(圖讖書)’ 때문이다. 『자치통감』권 183에 기록된 도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근래(수양제 대업 12년, 616년) 사람들 사이에 불리는 노래로 ‘도리장(桃李章)’이 있는데, ‘도리자(桃李子)여, 황후가 양주(揚州)를 두르고 화원 안에서 굽혀 구르네. 여러 말을 하지 말아요, 누가 허락하였는지.’라고 하였소. 도리자란 도망한[桃] 사람 이씨(李氏)의 아들을 말하며, 황(皇)과 후(后)는 모두 주군이고, ‘화원 안에서 굽혀 구른다’는 것은 천자가 양주(揚州)에 있고 돌아올 날이 없어서 장차 도랑에 구르게 된다는 것을 말하며, ‘여러 말을 말아요, 누가 허락하였는지’란 비밀이란 말이오.


   이것은 이현영(李玄英)이 이밀에게 한 것인데, 이 말을 들은 이밀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즉, 수나라가 멸하고, 이씨가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으로 자신이 왕이 될 거라 생각했었던 것 같다. 이런 확인되지 않은 도참서로, 수많은 효웅들이 일어서는 명분이 됐으며, 그 효웅들이란 이런 하찮은 이원길 같은 무리들이 대다수였다는 사실을 은근히 알려주는, 흥미로운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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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은 2014-03-07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양제良梯
 


   지난 금요일(12월 6일)에 충청남도 서천에 다녀왔다. 12월 6일에서 7일까지 서천군귀농인협의회에서 주관하는 16차 귀농투어에 참가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2개월간 정읍에서 8주간 깊이 있는 귀농교육을 받기는 했지만, 귀농귀촌에 대해서는 가능한 여러 지역을 답사해보고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 더 앞섰던지라, 망설임 없이 참가 신청서를 내고 서천으로 갔다.


   용산을 출발한 무궁화호 열차는 천안을 분기점으로 경부선과 장항선으로 갈라졌다. 열차는 장항선의 끝자락에 걸쳐있는 서천으로 향했다. 충청남도 서천은 충청남도 최남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서쪽으로는 서해바다를 끼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보령, 동쪽으로는 부여와 인접해 있으며 남쪽으로는 금강을 기준으로 전라북도 군산과 익산을 마주하고 있다. 인구는 2012년 기준으로 6만 명이 채 안 되며, 행정구역은 2개의 읍과 11개의 면으로 나뉘어 있다. 전체 면적 중 41%가 농경지인데, 그 중 70%가 벼농사를 행하고 있다. 바다가 인접해 있어, 신선한 해산물과 갓 수확한 농산물이 한 데 모이는 재래시장이 있다. 이것이 서천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관련 사항들이다.



   1박 2일의 시간 동안 서천에 있으면서, 많은 것들을 보고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그 중 가장 컸던 것은 귀농과 귀촌에 대한 개념이 분리된 것이다. 간단히 말해, 귀농이란 농촌으로 와서 농사를 짓는 직업을 가지는 것을 말하고, 귀촌이란, 농촌에서 살지만 직업은 꼭 농사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귀농귀촌의 전제조건은 농촌에서 거주하는 것이지만, 선택하는 직업에 따라 귀농과 귀촌으로 갈라지는 것이다.


   귀농을 선택할 것인가, 귀촌을 선택할 것인가는 단순한 말장난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선택이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귀농은 사업을 하는 것이고, 귀촌은 은퇴 후의 노후를 보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귀농이 처절하고 다급하고 불안하고 절박한 느낌이라면, 귀촌은 여유롭고 행복하고 편안한 느낌이 든다. 물론 더 깊게 들어가면 이 분류는 달라지겠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이렇게 보인다.


   은퇴 후 퇴직 연금과 국민 연금을 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라면 귀촌을 택하면 되겠지만, 농촌 생활을 꿈꾸는 대다수의 (젊은) 사람들은 농촌에서도 돈을 벌어야 한다. 귀농을 하건 귀촌을 하건 결국에는 돈을 벌어야 한다는 현실에 놓이게 된다. 농사로 돈을 벌겠다면 공격적인 귀농이 맞을 것이고, 그에 맞게 지원하는 지역으로 옮기면 될 것이다. 농사를 짓지 않고 다른 일로 농촌 생활을 영위하려면 안정적인 귀촌 또한 맞을 것이다. 농촌에서의 삶은 생활 방식을 송두리째 바꾸는 것이기도 하지만, 귀농을 선택할지, 귀촌을 선택할지에 따라 또 다른 삶이 갈라지는 것이다. 열차는 서울에서 출발하지만, 목적지가 어디냐에 따라 경부선, 호남선, 장항선 등으로 갈라지는 것처럼.



   그래서 궁금해졌다. 농촌으로 이주를 한다면, 농촌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면, 귀농이 적절할까, 귀촌이 적절할까. 농사로 밥을 벌어 먹고 사는 것이 우선인 것인가, 농촌에 성공적인 정착이 우선인 것인가. 둘 다 우선되어야 하지만, 그래도 우선시한다면 어느 것을 먼저 선택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들. 이 질문들을 해결하는 것이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리고 조만간 그 해답을 위해 움직일 것이고.


   쓰다보니 계획과 다짐만 남았다. 어찌됐든 시작은 했다는 사실에 위안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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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네 번째 시험관시술을 위해 강남 차병원에 다녀왔다. '강남 차병원 불임시술연구소'였던가... 근 1년 6개월이라는 기간에 걸쳐 역삼동에 위치한 병원에 다녔지만, 정확한 명칭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동안 달라진 것이라고는 9호선 공사로 인해 고갯길에 위치해있던 횡단보도가 제 자리로 환원된 것 정도? 그리고는 달라진 게 없다. 우리 부부는 아직 애가 없는, 뭐 그런 것.


   처음 시술을 할 때는 직장에 다니느라 아내가 어떤 시술을 받는지 몰랐었다. 뭐 어쩌다 한 번 나와 포르노를 틀어주는 작고 어두컴컴한 방에 들어가 수정을 위한 정액을 빼는, 그 정도의 수고,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첫 번째 시술에 실패하고, 두 번째 시술을 했던 올해 초에는 처음부터 함께 다녔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알았다. 시험관 시술이라는 게 정말 힘든 일이었다는 것을.


   우선 난포를 키우기 위해 배란 유도제를 맞았다. 하루에 두 번 -마치 당뇨병 환자처럼- 스스로 배주사를 직접 맞았다. 4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받고 난포가 적절하게 커졌으면 난자를 빼내는 수술을 한다. 이 때 한 6개인가 나왔던 것 같다.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에 맞춰 남편인 나는 정자를 뽑았고, 그 뽑은 결과물들로 수정을 시켰다. 운이 좋으면 다 수정되는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우리의 경우는 3개가 수정이 됐었다. 4일 후, 3개의 수정란을 자궁에 집어 넣었다. 아내 말로는 마치 실뱀이 기어들어오는 듯한 불유쾌한 경험이었다고 했었다. 수정이 다 되면 세쌍둥이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는 알려진 바와 같다. 피검사를 통해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데, 결과를 전해주는 간호사 선생의 목소리만으로도 임신 판정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이 때는 하이톤의 밝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 이후 수정이 되기 위해 무려 6주간 매일 엉덩이 주사를 맞았는데, 나중에는 주사를 맞을 데가 없어서 굉장히 고생했었다. 그래도 병원에 가니 착상됐다고, 임신이라고 했었다. 이렇게도 애가 생기는구나. 가히 현대의학의 개가라 할 수 있구나.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좋아했었다. 그런데 10주차에 계류유산을 했다. 원인불명의 유산. 월급이 통장을 스치듯, 우리 아이도 그렇게 잠시 다녀갔다.


   7월 말에 3차 시술을 했다. 이번엔 그 결과를 아는데 짧았다. 이상하게도, 세 번째 시술 때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와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마음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무너진 것처럼 살고 있었으니까.


   딱 세 번만 하자고 아내하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내가 깼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시술인데도, 굳이 한 번 더 하자고 했던 것은, 정부 지원이 세 번에서 네 번으로 바뀐 것도 있었지만(그래도 전체 진료비의 1/3수준이다...), 새로운 식구, 새끼 고양이 '양이'를 들인 것이 큰 이유가 됐다. 그 전까지의 아이가 추상적인 느낌이었다면, 양이를 통해, 이제 아이는 구체성을 띄게 되었다. 그래서 면목없이 아내에게 부탁을 했고, 아내는 고맙게도 이 힘든 일을 받아들였고.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내 욕심 혹은 내 욕망으로 누군가의 삶을 힘들게 할 줄은 정말로 몰랐었는데... 미안하고 고맙고. 술도 안마셨는데 그냥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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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주간 교육을 받았던 (구)산성초등학교에서.



  이번 주말이면, 이제 정읍에 내려가는 것도 (공식적으로는) 마지막이 된다. 8주간의 귀농귀촌교육이 끝나는 시기, 그리고 연말이 다가오는 시기가 겹쳐서인지, 종강파티에 관한 들뜬 글들이 카톡 채팅방과 카페 게시판을 달구고 있다. 수료식이 끝나면, 누군가는 교육에서 얻은 응원과 지식으로 계속 농사를 지을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의 부족함을 느껴 다른 교육을 알아볼 것이며, 다른 누군가는 녹록치 않은 농촌 생활을 깨닫고 귀농을 포기할 것이다. 어떤 선택을 하건 그 선택의 결정은 옳고 틀림에 기반을 둔 것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에 방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나는 어떤 선택을 할까? 아직 결정한 것은 없지만 기회가 된다면, 귀농포털을 만들어 귀농인들의 농산물 직거래 창구를 만들고 싶다. 농업인들과 소비자들을 직거래로 연결시키는 농촌 브로커(broker), 뭔가 접시 냄새가 나는 게 멋들어져 보인다. :)


   이 농촌 브로커라는 발상은 내가 한 게 아니다. 교육 중 들었던 '지리산닷컴'의 '마을이장'이 이미 벌이고 있는 일이다. 지리산닷컴은 매일(은 아니고 그 자신의 표현대로 '가끔 생각날 때마다') 주변의 농부들을 편지 형태로 소개하고 그들의 농산물 직거래를 ‘연결’해준다. 이렇게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주지만, 수수료는 받지 않는다. 그냥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 주는, 진정한 브로커이다.


   수수료가 없으면 어디서 수익을 내는지 궁금했는데, '지리산닷컴'이 수익을 내는 것은 펀드다. 일명 ‘맨땅에 펀드’라고 1,000개의 구좌를 개설, 펀드 투자금을 받아 농사를 짓고, 그 배당금을 농산물로 주는 형태이다. 올해에는 약 1억원을 굴려서 '남의 돈으로 잘 먹고 잘 놀았다'고 했지만, 말이 그렇지 쉽지 않은 일이다. 한 달에 100만원 정도 월급을 받으며 일한다는 생각으로 운영을 했는데 녹록지 않다고 했으니까. 쉽지 않은 일이고 안쓰러워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농촌을 생각하는 '태도(attitude)'에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그는 농촌을 수익 대상이 아닌, 같이 살아가는 공동체로 보는 것이다.


   지리산닷컴은 구례를 중심으로 여러 농업인들을 직거래로 묶(을 수 있)었다. 지역을 중심으로하는 소모임이 이루어진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시스템이 전국적으로 다양하게 생긴다면 농촌은 훨씬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현재의 농촌 모습은 어떠한가. 생산자로서의 농민은 눈치만을 보며 산다. 돈을 빌릴 때에는 농협의 눈치를 봐야 하고, 정부의 지원금을 받을 때는 시군청의 눈치를 봐야 하며, 직거래로 물건을 팔 때는 소비자의 눈치를 봐야 한다. 이 풀 수 없는 구조적인 문제를 지리산닷컴은 해나가는 것처럼 보인다. 농사 짓는데 필요한 돈을 굽실거리면서 대출받은 게 아니라, 직접 당당하게 도시인들에게 받아왔으니까. 그 결과(수익)야 어떻든 간에 대단한 일이라 생각한다.


11월 초 밭에서 보았던 수박. 

여름에 수박은 인기 상품이지만, 제철을 벗어난 수박은 그저 구경거리밖에 되지 못했다.



   내가 꿈꾸는, 하고 싶은 일도 이와 비슷하다. 마음이 맞는 귀농인(혹은 농업인)들과 함께 지역내 소모임을 결성, 우리의 시시콜콜한 일상을 라이브 중계 하듯, 글로 써서 알리는 것이다. 물론 결국에 최종 목표는 생산한 농산물 또는 가공식품을 파는 것이지만, 단순히 농산물을 파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시골에서의 즐거운 생활’을 파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우리의 즐겁고 유쾌하고 행복한 일상이 결국엔 우리가 생산한 농산물에 대한 ‘이야기’와 ‘이미지’를 규정지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가 생산한 농산물을 판매하기 위해 소비자들에게 이유 없이 굽실거리는 것이 아닌, 생산자로서의 농민이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주체"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하며, 장기적으로는 직거래 농산물을 구매하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를 넘어서 농촌과 도시를 연결할 수 있는, 하나의 커다란 네트워크가 되기를 꿈꾼다.


   수익성을 기대할 수도 없고, 지나치게 뜬구름 잡는 이야기임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을 하고 싶은 것은, 교육 동안 '함께 일하는 즐거움'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생활할 수 있다면, 조금 부족하게 사는 것 정도는 감내할 수 있지 않을까.


   꿈이 없는 내가 다시 꿈을 꾸기 시작했다. 이 꿈이 그냥 일장춘몽으로 끝날지, 진짜 현실이 될지는 결국 내게 달린 일이다. 어떻게 되든 할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일이 지금 내 가슴을 뛰게 하고 있으니까.



11월 23일의 아침. 용이 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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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29 07: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11-29 10: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토요일에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이 나이에 아직도 결혼식이라니 조금은 쑥스러운 감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도 안 간 녀석들도 있으니, 40이 넘어서도 결혼식에 가서 사진을 찍을 일은 몇 번 더 남아 있을 것 같다. 결혼한 친구는, 나와는 초등학교 때 굉장히 친하게 지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왠지 모르게 연락이 멀어진 친구다. 내가 결혼할 때 청첩장도 보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와 축하를 해 준 것에 너무 마음이 쓰였었는데, 이렇게나마 축하를 해줄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고나 할까.


   10여 년 가까이 지내고 20여 년 멀리 지냈으니, 삶의 궤적도 멀어지고 친분을 가져온 친구들도 서로 달라졌다. 그래도 은둔형인 나보다는 쾌활하게 지내서인지, 초중등 동창들의 모습들을 많이 확인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옛 모습을 간직한 반가운 얼굴들.


   은 한 순간이고, 그 이후는 어떻게 이 자리를 벗어날까 하는 몸부림들의 연속이었다. 그냥 악수 하고 제 갈길가면 그만이지, 뭔 그리 핑계들이 많은지. 예전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었던 무례함들이 불쾌감으로 바뀌는 데는 한순간이었다.


   예전의 기억을 가지고 현재의 모습을 재단하려는 것은 커다란 오류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저지른다. 그게 편하니까. 그러한 오해를 이해라 생각하고, 사람들을 평가하고 끝. 자신의 상황에 비교해 손익분기점을 넘은 사람들만 새로 간직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예전에) 친구라고 불렀던 놈들이 이럴진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도 사람들은 겉모습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그저 지금의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혹은 손해가 되는지만 파악하려고 하는 마당에, 눈에 보이는 겉모습은 얼마나 중요한가. 


   축하의 자리에 않좋은 소리가 너무 많았다. 친구의 결혼은 진심으로 축하하지만, 그저 추억으로만 간직했으면 좋았을 많은 모습들을 이제는 지워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좀 착찹하다. 가끔씩 인간에게도 RESET 버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티븐 킹의 『셀』처럼, 아예 뇌를 포맷하는 한이 있더라도. 부팅이 되던 안되던, 포맷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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