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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0회 - 마구간으로 달아나 필마를 만나고 도관을 찾아가 이인異人을 만나다



p.326

“여시아문 일시불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구 이시 세존 식시 착의지발 입사위대성걸식 어기성중 차제걸이...”

“수보리 여여소설 여래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여...”


일시불재사위국 → 일시 불 재사위국 (一時 佛 在舍衛國)

입사위대성걸식 → 입 사위대성 걸식 (入 舍衛大城 乞食)

선호념제보살 선부촉제보살 → 선호념 제보살 선부촉 제보살 (善護念 諸菩薩 善付囑 諸菩薩)


   진왕 이세민의 명으로 축귀(逐鬼)를 위해 승려들이 암송하는 것은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Vajracchedikā Prajñāpāramitā Sūtra)』으로 우리에게는 『금강경』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은 산스크리트어 바즈라체디카(Vajracchedikā)를 뜻으로 풀어 해석한 것으로 ‘바즈라(Vajra)와 같이 강한 힘으로 절단하는 것’ 이라는 뜻이고, ‘반야바라밀’은 산스크리트어 프라즈냐파라미타(Prajñāpāramitā)를 음역한 것으로 ‘깨달음으로 이끄는 지혜’를 가리킨다. 즉, ‘금강반야바라밀경’은 ‘마음속의 분별, 집착, 번뇌 등을 부숴버려 깨달음으로 이끄는 강력한 지혜의 경’라는 뜻이다. 축귀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이다.

   『금강경』은 약 6천 단어 정도의 길이로 대체로 짧은 편이며, 석가모니와 수보리존자의 문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원전』에 언급된 것은 「법회인유분(法會因由分)」과 「선현기청분(善現起請分)」 부분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會因由分 第一

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 千二百五十人俱 爾時 世尊 食時 着衣持鉢 入 舍衛大城 乞食 於其城中 次第乞已 還至本處 飯食訖 收衣鉢 洗足已 敷座而坐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에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 급고독원에 계시어 아울러 대비구중 천이백오십 인과 같이 하시더니, 이때에 세존님께서 공양 드실 때에 가시를 수하시고 발우를 가지시고 사위대성에 들어가시어, 그 성중에서 차례로 걸식을 마치시고 본처로 돌아오시고는, 공양을 마치시고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 씻기를 마치시고 자리를 펴시고 앉으시었다.


善現起請分 第二

時 長老須菩提 在 大衆中 卽從座起 偏袒右肩 右膝着地 合掌恭敬 而白佛言 希有世尊 如來 善護念 諸菩薩 善付囑 諸菩薩 世尊 善男子 善女人 發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云何住 云何降伏其心 佛言 善哉善哉 須菩提 如汝所說 如來 善護念 諸菩薩 善付囑 諸菩薩 汝今諦請 當爲汝說 善男子 善女人 發 阿耨多羅三藐三菩提心 應如是住 如是降伏其心 唯然 世尊 願樂欲聞

그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 속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에 옷을 걷어 올리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꿇고 합장하여 공경을 표시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위대한 일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보살들을 잘 호념(護念)하시고 모든 보살들에게 불법을 잘 부촉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어진 남자(善男子)와 어진 여인(善女人)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향한 마음을 일으킨 이는 어떻게 행동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도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것처럼 여래는 모든 보살들을 잘 호염하고 부촉한다.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말하노니 잘 들으라. 어진 남자와 여인으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를 향해 마음을 일으킨 사람은 마땅히 이렇게 행동하며 이렇게 그 마음을 실천해야 한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즐거이 듣고자 원합니다.”


   쓸데없이 더 부연하자면,「선현기청분」에 나오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는 말은 『금강경』 전체에 걸쳐 자주 등장하는 단어인데, 이는 산스크리트어 ‘아누타라사먁삼보디(anuttara-samyak-sambodhi)’를 음차한 것으로 ‘위없이 올바른 깨달음으로 향하는 마음’을 뜻한다. 석가모니는 『금강경』에서, ‘이러한 마음을 내기 위해서는 겉모습이나 현상 및 관념의 덧없음을 알아 이들에 현혹되지 않은 채로 올바르게 관찰해서 깨달음을 향하는 순수한 마음을 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p.332

“이시 무진의보살 즉종좌기 편단우견 합장향불 이작시...”


p.334

“즉시 관기음성 개득해탈 약유지시관세음보살명자 설입대화 화불능소 유시...”


   현장이 암송하는 것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 Saddharma Puṇḍarīka Sūtra)』 (제7권)의 제25품(品)인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이다. 『요원전』 6회에서 처음 등장했던 현장이 처음으로 외웠던 불경도 바로 이 「관세음보살보문품」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때는 억울하게 죽은 원혼들의 해탈을 위해 독경했다면, 지금은 지용부인과 홍해아를 피할 수 있도록 자신의 안위를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외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 「관세음보살보문품」으로 현장은 손오공을 만났고, 손오공은 자신을 괴롭히던 망령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요원전』에서 인용한 「관세음보살보문품」의 원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爾時 無盡意菩薩 卽從座起 偏袒右肩 合掌向佛 而作是言 世尊 觀世音菩薩 以何因緣 名觀世音

그 때 무진의보살(無盡意菩薩)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어깨를 벗어 드러내고 부처님을 향하여 합장하고 여쭈시되 “세존이시여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무슨 인연으로 관세음이라고 합니까?”


佛告 無盡意菩薩 善男子 若有無量百千萬億衆生 受諸苦惱 聞是觀世音菩薩 一心稱名 觀世音菩薩 卽時 觀其音聲 皆得解脫 若有持是觀世音菩薩名者 設入大火 火不能燒 由是菩薩 威神力故 若爲大水所漂 稱其名號 卽得淺處

부처님께서 무진의보살에게 말씀하시되, “선남자야, 만일 한량없는 백천만억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당할 적에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듣고 한마음으로 그 이름을 부르면 관세음보살이 그 음성을 관하고 곧 해탈하게 하느니라. 만일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지니는 이는 혹 큰 불속에 들어가더라도 불이 그를 태우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보살의 그 위신력 때문이며, 만약 큰물에 떠내려가더라도 그 이름을 부르면 곧 얕은 곳에 이르게 되고 (...)”



p.337

“그러고 보니 여기랑 대불당 사이였지? 위지 장군께서 귀신을 놓치신 데가...”


위지 → 울지



p.346

현장과 황포의 만남


   현장이 낙태관에서 만난 사내는 황포(黃袍)다. 황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다음 장에서 하는 것으로 한다. 짧게 소개하자면, 홍해아와 마찬가지로 손오공과 현장에게 있어서 아주 지긋지긋한 인연을 이어나가는 인물이다.

   이 장면에서 눈에 띄는 것은 황포가 현장에게 다가올 때 황포의 몸에 찍히는 창호지 도장이다. 오세영 작가도 단편 「투계(鬪鷄)」에서 이런 창호지 도장을 그린 바 있었는데, 모로호시 선생이 표현한 것이 위협과 공포의 감정을 느끼게 한다면, 오세영 작가의 것은 아련함과 따뜻함을 느끼게 한다. 두 거장의 같은 묘사는 한 번 찬찬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첨언하자면, 모로호시 선생이 그린 빛과 그림자의 경계에서 스멀스멀 다가와 현장을 위협하는 장면은 가히 동양의 표현주의, 오리엔탈 느와르라 불러도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p.356

“어디, 황파파蝗婆婆에게 부탁해볼까...”


   황파파는 바람의 신으로 『서유기』45회와 98회에 걸쳐 두 번 등장한다. 황파파는 항상 손이랑(巽二郞)과 함께 다니는데, 황파파가 바람주머니를 풀어 바람을 쏟아내는 역할을 맡고 있고, 손이랑은 바람주머니를 뒤에서 잡아 원하는 방향으로 돌리는, 풍향을 전담하기 때문이다. 『서유기』에서는 비중이 미미한 역이었지만 모로호시 선생은 『요원전』에서 황파파와 손이랑, 이 둘을 「반사령의 장」, 「관음원의 장」, 「황풍대왕의 장」, 세 장에 걸쳐 등장하게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이들이 등장할 때 풀어내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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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회 - 태종은 여흥삼아 필마弼馬의 관직을 내리고 심원은 고통 속에서 제천의 이름을 부르짖다


p.289

“전하, 아니 폐하, 이제 앞으로 즉위식을 거행할 일만 남았군요.”

“하핫, 아직 폐하는 이르니라.”


   중국 송나라의 고승(高丞)이 편찬한 『사물기원(事物紀原)』에 따르면 천자에게는 폐하(陛下), 임금에게는 전하(殿下), 장군에게는 휘하(麾下), 높은 벼슬아치에게는 각하(閣下)라는 존칭을 쓴다고 했다. 천자가 집무하는 용상으로 오르는 돌계단을 ‘폐(陛)’라 하는데 그 돌계단 아래인 뜻인 폐하는 천자, 곧 황제에게만 쓰는 존칭이다. 이는 존대하는 사람이 거처하는 건물이나 발아래에서 우러러본다는 뜻에서 존칭이 된 것이라 한다. 그보다 한 등 낮은 호칭이 전하인데 진한(秦漢)이래 왕비, 세자 그리고 제왕들의 존칭이다. 『요원전』에서 아직 왕인 이세민은 ‘폐하’라는 말을 사양하지만, 이후로 그의 신하들은 계속 이세민을 ‘폐하’라 부르고 이세민 또한 더 이상 거부하지 않는다. 형과 아우를 죽이면서까지 원했던 자리였는데 더 이상 거부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p. 294

“관직은... 그래... 필마온弼馬溫이라 함은 어떨까. 재미있잖나.”


   필마온에 대한 설명은 p.293~p.294에 걸쳐서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만, 조금 더 부연하자면 다음과 같다. “중국 민담에 원숭이가 말의 역병을 물리친다 하여 ‘피마온(避馬瘟)’이란 용어가 있는데, 여기서 벼슬 이름으로 사용한 것은 ‘필(弼)’과 ‘피(避)’, ‘온(溫)’과 ‘온(瘟)’이 모두 중국어의 같은 발음 ‘비bi’와 ‘웬wen’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꾸어 쓴 것이다.” (임홍빈 역 『서유기』제1권 제4회 주2에서 인용)

   『요원전』에서 손오공은 무지기(無支祁)로부터 ‘제천대성(齊天大聖)’의 칭호를 물려받은 후에 당태종으로부터 ‘필마온’이란 직함을 받는 것으로 나오지만, 『서유기』에서는 그 반대다. 손오공이 자신의 신통력으로 용궁과 유명계에서 분탕질을 치자, 옥황상제(玉皇上帝)는 더 이상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손오공을 하늘로 불러들여 천마(天馬)를 돌보는 필마온(弼馬溫)이라는 벼슬을 준다. 후에 필마온이라는 품계가 하찮은 것을 알자 성을 내고 근무지를 무단이탈, 다시 화과산으로 돌아온다. 그 때 마침 찾아온 독각귀왕(獨角鬼王)이 “대왕처럼 놀라운 신통력을 지닌 분을 한낱 비천한 말먹이꾼에 임명하다니, ‘제천대성’이 되신다 한들 어떤 작자가 안 된다고 막겠습니까?”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스스로 ‘제천대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훗날 태백금성(太白金星)의 중재로 옥황상제에게 ‘제천대성’이라는 벼슬을 정식으로 받지만, 그것은 손오공을 천궁에 잡아두기 위해 만든, 허울뿐인 유관무록(有官無祿)의 벼슬일 뿐이었다.

   『요원전』과 『서유기』의 공통점이라면, 이 ‘필마온’이라는 직책은 손오공을 조롱하는 표현으로 쓰인다는 것이다.



p.297

“원망은 마십시오, 숙부님. 저도 여유가 없는 데다 또 놈들에게 미주알고주알 털어 놓으시면 곤란하니...”


p.317

“어마마마! 어째서 이런 놈과...! 어마마마께는 이 나타가 있지 않사옵니까!”


   홍해아는 자신의 아버지(나 다름없는) 두건덕(竇建德)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이세민을 죽이려고 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아버지의 복수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 자신의 작은 아버지(叔父)를 죽이고 나타의 아버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능욕한다. 게다가 지용부인은 홍해아에게 스스로를 ‘엄마’라 부르게 한다.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가 쏟아져 내린다.



p.303

“그 청원서라면 내 반려했을 것이야! 서쪽 옥문관玉門關 너머로는 일절 통행이 금지되어 있음을 모르느냐!”


p.311

“으음... 어차피 당도 아직 건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라 안의 질서가 완전히 바로 서지 않았네. 하주夏州에서는 양사도梁師都가 아직도 반기를 들고 있고...”


   당 건국 초기에는 나라의 기틀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가 백성들의 이동을 아예 차단했다. 국경을 통과할 때 필요한 통행증 ‘과소(過所)’의 발급을 금지한 것은 물론이고 국경커녕 옆의 지역조차 이동을 금지했다. 그런 상황에서 627년에 천축행을 결심한 국경 근처까지 갈 수 있었던 것은 이상기후로 인해 식량난이 생겨 수도에 밀집한 인구를 흩어지도록 자유 통행을 허가하는 칙명이 내려졌기 때문이었다.

   이 이상기후로 인한 식량난은 『요원전』에서 또한 기막히게 다룬다.



p. 310

“지난번에는 웬 요물 원숭이가 나오는가 싶더니 이번에는 귀신이 떠돈다니...”

“세상에 그런 일이...”

“순시 중이던 군사나 환관 중에서도 본 자들이 있다지. 월화문에서 액정궁쪽으로 유유히 활보하는 걸 봤다던가...”


p.313

“이세민! 이세민- 제위를 내놓아라-”


   『삼교수신대전(三敎搜神大全)』에 “전설에 따르면 당태종이 병이 났을 때, 침문 밖에서 귀신이 이름을 부르고 침문 밖에서 벽과 기와를 던지며 희롱했다(按傳,唐太宗不豫。寢門外拋磚弄瓦、鬼魅呼號)”는 기록이 있다. 『요원전』에서는 이 짧은 기록을 바탕으로 『서유기』의 나타태자와 당태종의 저승구경 에피소드를 한데 묶어버렸다. 이쯤 되면 모로호시 선생이 허구와 역사를 엮어나가는 모습은 절묘함을 넘어서 신묘함에 가깝다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삼교수신대전』을 조금 더 인용하자면, “겁이 난 태종은 진숙보(秦叔寶)와 호경덕(胡敬德) 두 장수를 불러 자신이 자고 있는 방문을 지키게 했는데 그렇게 했더니 별일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두 장군이 후에 세가(世家)의 문신(門神)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요원전』에서 다루고 있다.



p.311

“법현 법사께서도 열여섯이 넘어서야 천축으로 구법求法의 길을 떠나셨다지 않나. 너무 조급히 굴지 말게...”


   열여섯 → 예순


   법현(法顯)은 동진(東晋) 시대의 승려로, 당시 중국에 불전이 완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한탄해 399년 60여 세 노령의 몸으로 인도로 떠난 승려이다. 412년에 귀국했으며 『마하승지율(摩訶僧祗律)』, 『대반니항경(大般泥恒經)』 등 6부 63권에 이르는 계율을 한역한 후, 형주 신사(辛寺)에서 사망했다. 우리에게는 『불국기(佛國記:高僧法顯傳)』로 알려져 있다.



p.313

“위지 장군, 나왔나이다! 오늘 밤은 남쪽 담장입니다!”


   위지 → 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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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이 천축으로 간 이유는 『십칠지론』의 원본을 보고 싶어서이다. 『요원전』에서도 언급했듯이, 당시 불교계는 지론종과 섭론종으로 나뉘었는데, 그 이유는 제8아리야식에 대한 해석 차이 때문이었다. 왜 하나의 경전에서 다른 해석을 내리고, 종파까지 갈리게 되었을까? 그것을 이야기하려면 중국의 종교사를 살펴봐야 한다. 여기서는 중국의 고대종교가 어떻게 유교와 도교로 나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 후에 외래종교로서 불교가 어떻게 중국에 정착하게 되었는지를 알아보려 한다. 한마디로 재미없는 글이다. 하지만, 현장이 천축행을 결정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에 대한 자그마한 정보는 얻을 수 있으리라 본다.



◆고대 종교

   고대 중국의 사람들은 황하(黃河)유역의 평원에서 농경과 목축을 주로 했었다. 괭이를 이용한 개간지의 사용이 쟁기를 사용함에 따라 영구 경작지를 조성하였고, 이로 인해 토지를 점유하게 되었다. 이런 토지를 바탕으로 정치적이면서 동시에 종교적 단위인 영지(領地)가 이루어졌다. 토지를 단위로 정치적 권력과 종교적 권위가 탄생되었던 것이다. 당시의 계층은 토지를 소유한 귀족과 그 토지를 경작하는 농민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중국에서 세속조직과 종교조직의 모든 기본요소는 모두 그리스의 도시국가에서처럼 영지였다. 세속사회는 가족집단과 영지의 소유라는 두 기반 위에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종교도 조상숭배와 토지신(土地神) 숭배를 토대로 삼았다. 이 두 숭배는 사회의 두 가지 근본사태를 종교적으로 전환시킨 것에 지나지 않았다.

   조상과 토지에 대한 숭배는 모든 계층에 다 있었다. 귀족들은 신들에게 인간의 위계와 같은 신의 위계를 형성시키고, 그 위계에 맞는 숭배를 했다. 그것은 토지신의 숭배가 통치권을 상징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토지는, 국가의 수호신이며 국가권력을 나타냈다. 죽음에 대해서도 토지신의 위력은 대단했다. 사람이 죽으면 땅에 묻히기 때문에 땅의 지배자가 죽은 사람의 지배자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념은 그리 명확하진 않았지만, 분류한다면, 토지신이 다스리는 황천(黃泉), 상제(上帝)가 다스리는 천상(天上), 그리고 조상의 영혼이 머무르는 종묘(宗廟)가 있었다. ‘인간이 죽으면 어떻게 된다’라는 명확한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천국과 지옥의 개념대신 인간세계의 위계와 같은 위계가 사후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천상에 올라가는 이는 보다 지배적인 위치의 소수(周나라 文王의 예)이고, 대부분은 황천으로 간다고 믿고 있었다(기원전 8세기 齊나라 제후 鄭伯의 예). 고대인들은 인간이라는 것은 혼(魂)과 백(魄), 그리고 형신(形身)이 합쳐져 있다고 생각했었다. 인간이 죽는다는 것은 형신과 혼백의 분리다.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백은 땅으로 내려간다. 백은 묘에 위치할 수 있었지만, 하늘로 올라간 혼은 흩어지거나 떠돌아다니게 된다. 그래서 혼이 머무를 장소인 묘를 만들고 제사를 지낸다. 그러나 죽었다는 것만으로는 조상이 되거나 제사를 받을 권리가 없었다. 제사를 받기 위해서는 장례식이 거행되어야 한다. 장례는 귀족이 주도한 문화이다. 귀족들에게 있어서 토지신과 조상의 문제는 지배권과 영토, 그리고 종묘와 사직으로 대표되는 지역과 혈족을 통한 정치적 신성(神性)이었다.

   반면에 농민은 문화적 주체가 아니었기 때문에, 장례라는 절차를 제대로 했을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죽고 나서 신성이 될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농민의 제의(祭儀)는 농사와 관련되어있다. 생산력에 기반을 둔 종교와 밀접해 있는 것이다. 이 당시의 사회적 특징은 토지의 생산력(불을 붙이는 종교적 의식)과 가문의 생산력(야합이라는 제의적 절차)이 결부되어 토지신에 대한 축제를 벌였다. 축제의 주체는 생산자인 농민이었다. 귀족들의 제의가 토지신과 조상신에게 지내는 정치적 신성을 나타내는 제의였다면, 평민층(농민)의 제의는 농업 생산력에 기반을 둔 생산신성을 나타내는 제의였다. 평민층의 제의는 귀족들의 제의에 독자적으로 접근되기보다는 정치적 룰에 예속되었으나, 조상에 대한 제의에서 정치적 신성과 생산적 신성, 이 둘이 서로 결합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것은 한 편으로는 달마다 그 계절의 수확물을 조상에게 바쳤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조상신에게는 각기 제삿날이 있었다는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모든 계급이 함께 드리는 농업의 숭배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가문이나 영지와 같은 집단을 위해서 그 집단의 우두머리가 제물과 기도를 올리는 공식적인 의식으로 이루어졌다. 집단 구성원들(귀족과 농민)은 제물을 공유하는 친교에 의해 제사에 직접 참여한다고 느꼈다.

   물론 정치적 신성과 생산적 신성의 제의가 고대 종교의 틀을 잡은 것은 확실하나, 이것은 앞에서도 말했듯 개인적인 감정을 배제한 공적인 종교였다. 사람들은 개인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를 갈망했고, 그래서 샤먼의 전통에서 나온 신과 인간의 특별한 매개자인 무인, 즉 무당을 찾아갔다. 무는 개인적인 신앙을 위한 사적인 영역이었다. 국가에서도 이들을 관료화 시켰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위치였다. 이들의 자기 부정적 행위는 국가에서도 상당히 불안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고대 종교의 모습을 간단히 정리한다면, 농민층의 생산적 신성, 귀족층의 정치적 신성, 그리고 개인의 영역인 무의 초월적 신성이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초월적 신성은 어디까지나 사적인 영역이었지, 공적인 위치에는 오르질 못했다.

   이런 것이 종교라는 큰 테두리에서 볼 때 중국 고대 종교였다. 그것은 제사를 집행하는 제후(귀족), 제후를 따라서 제사에 참여하는 신하(농민) 등 각 개인이 개인적인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고, 자신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역할에만 따르는 특정한 사회집단의 종교생활이 표현된 것이었다.

 


 


고대 종교가 유교(儒敎)와 도교(道敎)로 갈라지게 된 까닭

   고대 농민의 제의는 그 자체만으로도 효과가 있었던, 인과성에 기반하고 있었다. 반대로 토지신이나 조상에게 관련된 귀족의 종교는 인격신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바라는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신의 인격성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 이르러 문명이 발달하고 지적으로 진보하면서 후자의 관념이 점차 확실한 지반을 얻게 된다. 사람들은 신들의 가호를 얻기 위해서 제사를 지냈다. 풍성하고 정결한 제물은 영토와 주민을 위해 신에게 바치는 것이었다. 모든 계급이 함께 드리는 농업의 숭배와 조상에 대한 제사는 가문이나 영지와 같은 집단을 위해서 그 집단의 우두머리가 제물과 기도를 올리는 공식적인 의식으로 이루어졌다. 집단 구성원들(귀족과 농민)은 제물을 공유하는 친교에 의해 제사에 직접 참여한다고 느꼈다. 이처럼 봉건사회의 조직을 신의 측면에서 재현한 종교는 국가종교였다. 제후국은 정치적이면서도 종교적인 단위였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제후국들의 붕괴는 고대 종교에 치명타를 가했다. 고대 종교는 국가종교이기에, 국가의 붕괴는 종교의 붕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500여개의 제후국이 10여개의 대제후국으로 통합되자, 수백여 곳에서 거행되던 제사가 중심지 십여 곳에서만 거행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농민들은 제사에 직접 참여 할 수 없었다. 제후국이 통합되기 전에는 제후국의 영토가 매우 좁았기 때문에, 농민들이 제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이런 참여 때문에 농민들에게 고대 종교가 살아 있고 친숙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새로운 대제후국은 너무 넓어서 영토내의 많은 농민들은 제사에 직접 참여 할 수 없었다. 종교는 본래 제사 지내는 제후와 제사에 참여하는 농민의 결속에 좌우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농민의 참여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제사는 종교가 될 수 없었다. 제사는 지배권의 상징을 확인하는 의례적 행사로 변모하였다.

   이러한 고대 종교의 위기 속에서 새로운 시대의 주체세력인 기록자[史]계층이 출현한다. 바로 이 계층에서 철학적 운동이 일어났고 종교사상이 발전했다. 그들은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일을 맡아서 그들 중 가장 훌륭한 사람이 통치이론을 만들게 되었고, 그런 과정에서 통치문제와 분리되지 않았던 종교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제사가 점차 천박하고 무례하게 되어간다고 생각했다. 신의 인격성이 강조됨에 따라 신의 호의를 제물과 상업적으로 교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제사에서 제물을 완벽하게 바치기보다는 제사를 집행하는 사람들과 제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도덕을 갖추기를 바랐다. 이렇게 해서 신은 제사에 의해서만 움직일 수 있는 비인격적인 존재로 변하게 되었다. 고대 종교에서 이러한 분화는 이 시기 중국 종교의 제의의 일반적인 경향에 상응하는 두 흐름을 만들어낸다. 하나는 합리주의적인 태도와 다른 하나는 신비주의적인 태도이다. 전자는 종교에서 비합리적인 내용을 없애는 한편, 외형적인 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종교를 과학적으로 설명하려는 합리주의자들의 시도였다. 후자는 공식 제사와 집단 제의에 결여된 것들을 보완하려는 개인적인 종교에 대한 추구였다.

   결국 이런 강력한 두 흐름이 먼저 집단적인 종교 형태를 선호하는 유교(儒敎)를, 그 다음으로 개인적인 형태를 선호하는 도교(道敎)를 만들었고 도교를 넘어 후대에 불교(佛敎)가 중국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종교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유교는 정치적 신성 속에서 집단적인 종교 형태를 지닌 합리성에서 발전 된 것이고, 도교는 초월적 신성 속에서 개인적인 종교 형태를 지닌 신비주의적인 관점에서 발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교와 도교는 생산적 신성과 정치적 신성, 그리고 초월적 신성 이들 세 가지가 각기 따로 발전하고 반성한 것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며 발전을 하고 반성을 해서 나타난 결과물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도교만이 샤먼의 전통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하지만, 유교 또한 샤먼의 영향을 받았다. 그것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죽음에 관련된 조상에게 지내는 제사는 ①선조와의 관계(과거) ②부모와의 관계(현재) ③자손, 일족과의 관계(미래)를 나타낸다. 유교는 이 관계를 흩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로 통합시킨다. 곧 ①조상의 제사, ②부모에 대한 존경과 사랑, ③자손을 낳는 일, 이들 세 가지 행위를 포함하여 ‘효’로 삼았던 것이다. 효를 행함으로써 자손을 낳고 조상을 재생시키며 자신도 또한 언제인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만 자손과 일족에 의해 이 세상에 재생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생명론이 유교에서의 효의 본질이다. 유교는 이 위에다 가족윤리(가족이론)를 만들었고 또 그 위에다 정치윤리(정치이론)를 만들었던 것이다. 후세에 12세기의 신유교가 되면 그 위에다 다시 우주론과 형이상학까지 만들게 된다.

   이처럼 고대 종교의 양산은 생산적 신성, 정치적 신성, 초월적 신성, 이들 세 가지가 각기 따로 반성하고 발전해서 양산된 것이 아니라, 이들 세 가지의 날줄과 씨줄의 촘촘한 의미망에 의해서 양산된 것이다.

 


 


◆불교(佛敎)

   이렇게 명확하게 갈린 양대 종교 사이에서 외래 종교인 불교는 ‘새로운 형태의 구원’을 제시했지만, 그 효과는 미미했다. 불교가 서서히 그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한 것은 도교와 유교의 영향을 받은 이후이다.

   불교 경전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이들은 번역된 경전을 한자로 기록한 기록자들이었는데, 이들은 거의 도교도들이었다. 일반적으로 불교 경전은 각각의 팀으로 번역 작업이 행해졌다. 각 팀의 구성원은 외국인 승려, 기록자(들), 통역관으로 이루어졌다. 작업은 외국인 승려가 불교 경전을 중국어로 그럭저럭 설명하면, 한 명 혹은 여러 명의 기록자들이 구어로 설명된 것을 한자로 초안을 잡는다. 외국인 승려가 중국어에 능숙하지 않을 때는 통역관이 개입했다. 이렇게 복잡한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번역물을 검토할 때에는 외국인 승려가 배제되기 일쑤였고, 번역물은 기록자(들)의 용어와 사상, 해석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의 전문 용어들은 도교에서 빚진 것이 많게 되었다. 인도의 산스크리트어와 달리 한자는 형이상학적인 내용을 표현하기에 상당히 까다로운 표의문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처가 보리(菩提)를 얻었다’는 것을 불교에서는 ‘득도(得道)’했다고 한다. ‘도를 얻는다’는 표현은 명백히 도교의 것이다. 이 전통은 이후로도 계속 이어져 원본의 내용보다는 그것을 해석한 차이의 입장이 갈려 종파가 나눠지기도 했다. 현장이 인도로 간 이유는 바로 이 갈라진 해석들을 하나로 바로 잡고 싶은 욕망(혹은 소명) 때문이었다.

   게다가 언뜻 보기에 불교는 도교와 이름만 다를 뿐, 거의 같은 종교로 보이기까지 했다. 도교가 신선이 되어 불사의 존재가 되는 것이라면, 불교는 부처가 되어 열반에 드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는 도교에 비해 간단하며 저렴하기까지 했다.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곡물법, 양생법 등 실생활에서 지켜야할 규율이 많고, 단약 제조 등 돈이 많이 들지만, 불교에서는 (도교에 비해) 간단한 명상과 수행이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시대를 겪으면서 불교는 도교와 유교에 버금가는 강력한 종교가 됐다. 그 이유는 끔찍한 시대상황 때문이었다. 이연이 당(唐)을 세우기까지 약 400여 년에 걸쳐 전쟁과 착취가 빈번하게 지속됐다. 백성들은 말 할 것도 없고, 지배계층조차 나라의 흥망에 따라 하루아침에 귀족에서 노예로 전락하기 일쑤였다. 삶은 고통이었고 생명은 허망한 것이었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알고는 있지만, 어떻게 고쳐볼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는 절망. 그 속에서 사람들은 이 끝없는 절망의 윤회를 끊고 피안(彼岸)으로 가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후

   불교는 지배 세력들의 눈에 들어 수당(隋唐)시대를 거치며 국가의 관리를 받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종교는 정치와 윤리에 봉사해야 한다’는 유가사상이 스며들어 기존의 정치체계를 유지하고 옹호하는 ‘도구’가 된다. 이것은 불교만의 일이 아니다. 중국에서 종교는 정치에 예속되어 복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儒), 불(佛), 도(道)라는 세 가지 사상이 서로 공격하고 논박하는 단계를 거쳐 점차적으로 서로 공존하고 협조하는 길로 접어들게 됐고, 나머지는 역사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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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8회 - 현무문에서 태자가 변을 당하고 양의전에서 위징이 요괴를 쏘다

 


 


p.220

“현무문에서 양의전으로 향하려면 이 길목을 지날 거야. 저쪽 숲에 매복하자.”

 

 


p.258

“저쪽이다! 월화문月華門쪽으로 달아났다!”


 


 


圖 7 8 世紀前半的長安宮城、皇城에서 발췌

 

 


   위의 대화로 미루어볼 때, 『요원전』에서 ‘현무문의 쿠데타’는 현무문, 양의전, 월화문을 아우르는 지역인 산지원(山地院)과 남해지(南海地) 사이에서 벌어진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는 동쪽인 산수지각(山水地閣)근처에서 벌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한다.『자치통감』권191에서, “이건성과 이원길이 임호전(臨湖殿)에 도착하여 변고가 있음을 깨닫고 즉시 말을 돌려서 동쪽으로 가서 궁부(宮府)로 돌아갔다”고 했다. 즉, 이건성의 거처인 동궁(東宮)으로 가는 길에 변을 당한 것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역사서마다 그 기록이 다르기 때문에(달리 말하면, 황제가 되기 위해 형제들을 죽인 일을 그리 세세히 기록할 필요는 없을 것이기에) 엄격하게 적용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p.221

“아바마마께서는 세민이 놈에게 너무 무르십니다. 역시 우리 둘이서...”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하자꾸나.”

 

 


   『요원전』에서 이원길은 틈만 나면 이세민을 죽이자고 이건성을 부추기지만 이건성은 반대한다. 이는 실제 역사에도 기록된 부분이다.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부분을 옮겨 적는다.


애초에 제왕(齊王) 이원길이 태자 이건성에게 권고하여 진왕(秦王) 이세민을 제거하라고 하며 말하였다.

“마땅히 형님을 위하여 손수 칼을 쓰겠습니다.”

이세민이 황상을 좇아서 이원길의 집에 갔는데, 이원길이 호군 우문보(宇文寶)를 침실 안에 숨겨두고 이세민을 찌르게 하려고 하였는데, 이건성은 성격이 자못 인자하고 후덕하여 갑자기 이를 중지시켰다.

 

 


   두 형제를 죽이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이세민의 정통성을 확보시키기 위해서는 두 형제의 단점을 부각시켜야 하는데, 이건성의 경우에는 종종 장점을 기술한 부분이 보인다. 어찌보면 이건성은 ‘인자하고 후덕한’ 그의 성격으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했을지도 모르겠다.



p.224

“사공 배적裴寂, 좌복사 소우蕭瑀...”

 

 


좌복사 → 좌복야

 


 

   『요원전』에서는 당고조 이연이 양의전에 있는 것으로 설정했지만, 역사에는 해지(海地, 어느 해지인지는 정확히 기록이 되어 있지 않다) 위 범선에서 배적, 소우, 진숙(陳叔)과 자리를 함께 하고 있었다고 한다. 즉, 이연은 이세민의 상소를 공적인 일로 처리하려고 했던 게 아니라, 형제들간의 해묵은 감정을 해소시키려는 자리로 마련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부자지간, 형제지간의 정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한 이세민이 영악(혹은 냉철)한 것이다.

   소우는 이세민이 이건성과 이원길을 죽였다는 말을 당고조 이연이 들었을 때 즉각 이세민의 편을 든 것으로 유명하다. 다른 것으로는 626년 4월, 태사령 부혁(傅弈)이 불교를 없애자고 탄원했을 때 소우가 불교를 옹호하며 서로 토론했으나 처절하게 발린 것이 있다. 이 때 대다수의 사찰과 도관이 철폐됐으나, 현무문의 정변 이후 다시 환원됐다.


 

 


 

p.231~232

이세민이 쏜 화살에 쓰러지는 이건성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현무문의 정변’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건성과 이원길이 임호전(臨湖殿)에 도착하여 변고가 있음을 깨닫고 즉시 말을 돌려서 동쪽으로 가서 궁부(宮府)로 돌아갔다. 이세민이 좇으면서 그들을 부르니 이원길이 활을 당겨서 이세민을 쏘려는데 두 세 번이나 활이 당겨지지 않았으며, 이세민은 이건성을 쏘아서 그를 죽였다.

 


 

   『요원전』에서는 이건성이 부상만 당하고 다른 인물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역사에는 이세민이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p.241~242

울지경덕에게 목이 잘리는 이원길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현무문의 정변’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울지경덕이 7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계속하여 도착하니 좌우에서 이원길을 쏘아서 말에서 떨어뜨렸다. 이세민의 말이 놀라서 숲속으로 달아나다가 말을 타고 있던 이세민이 나뭇가지에 걸리니, 떨어져서 일어날 수가 없었다. 이원길이 갑자기 도착하여 활을 빼앗고 그를 누르는데 울지경덕이 말을 달려오면서 그를 질책하였다. 이원길이 걸어서 무덕전으로 가려고하니 울지경덕이 쫓아가서 쏘아서 그를 죽였다.

 


 

   울지경덕이 이원길을 질책한 것과 이원길이 걸어서 무덕전으로 가려고 한다는 사실이 언뜻 연결이 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울지경덕이 이원길을 죽인 것이다. 『자치통감』권 188에 기록된 것을 보면, 이원길과 울지경덕이 서로간에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일화가 나온다. 이 대결에서 이원길은 울지경덕에게 완패해 여러 사람들 앞에서 큰 망신을 당한다.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은 말을 타고 삭(矟)을 잘 다룬다고 자부하였는데, 울지경덕이 능력 있다는 소식을 듣고 각기 칼날을 떼어내고 승부를 비교하자고 청하였다. 울지경덕이 말하였다.

“저 울지경덕은 삼가 이것을 떼어 버리겠지만 왕께서는 떼어버리지 마십시오.”

이미 그렇게 하고 이원길이 그를 찔렀지만 끝내 적중시킬 수가 없었다.

진왕 이세민이 울지경덕에게 물었다.

“삭을 빼앗는 것과 삭을 피하는 것 가운데 어느 것이 어렵소?”

울지경덕이 말하였다.

“삭을 빼앗는 것이 어렵습니다.”

마침내 울지경덕에게 이원길의 삭을 빼앗도록 명령하였다. 이원길이 삭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뛰어나가니 속으로는 그를 찌르려고 하였는데, 울지경덕이 잠깐 사이에 그의 삭을 세 번이나 빼앗으니, 이원길은 비록 얼굴을 대하고는 탁월함을 탄복하였지만 속으로는 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다.

 


 

   이세민은 이미 자존심을 크게 상처 입은 이원길을 두 번 능욕하는 처사를 저질렀다. 평소에 이원길이 잘난 척하는 게 꼴사나워 그런 명령을 내렸는지, 아니면 이참에 기를 꺾어 고분고분하게 만들려는 처사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이원길에게는 울지경덕과 이세민 둘 다 죽이고 싶은 마음이 어쩌면 이때부터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이원길은, 이건성이 울지경덕을 자신의 도당으로 포섭하려 했으나 이를 거절하자 당고조에게 참소하여 울지경덕을 죽이려 했었다. 울지경덕은 이세민의 강력한 요청으로 죽음을 면했다.

   울지경덕은 선양(善陽, 산시성 숴저우시) 출신으로 역주(易州)의 도적 우두머리 송금강(宋金剛)의 장수였으나, 이세민에게 패해 포로가 됐다. 이 때 울지경덕을 눈여겨본 이세민이 바로 울지경덕을 우일부통군(右一府統軍)으로 임명했다. 이세민의 측근들은 울지경덕이 배반할 것이라 하며 죽일 것을 요구했지만, 이세민은 신의로써 그를 믿었고, 울지경덕은 그 믿음에 화답하듯 왕세충군을 격파했다. 신의로 충만하고 무예가 출중한 보기 드문 인물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p.250

“잘했다, 위징!”

 


 

   『요원전』에서는 이건성이 위징에게 죽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이건성은 이세민이 쏜 화살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요원전』에서 위징의 모습은 기회에 따라 주인을 바꾸는 비열하고 저열한 모습으로 그려졌지만, 역사에서는 다르다. 『자치통감』권 191에 기록된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애초에 선마(洗馬) 위징(魏徵)은 항상 태자 이건성에게 일찍이 진왕(秦王)을 제거하라고 권고하였는데 이건성이 실패하고 나서 이세민이 위징을 불러서 말하였다.

“너는 어찌하여 우리 형제들을 이간질하였느냐?”

무리들은 이 때문에 위험스러워서 두려워하였지만 위징은 행동을 자연스럽게 하면서 대답하였다.

“먼저 돌아가신 태자가 일찍이 저 위징의 말을 쫓았더라면 반드시 오늘과 같은 화란은 없었을 것입니다.”

이세민은 평소에 그의 재주를 중하게 생각하였던 터라 얼굴을 고치고 그에게 예의를 차리고 끌어서 첨사주부로 삼았다.

 


 

   자신의 친형제는 물론이고, 친형제와 직접적으로 관련한 일가친척 500여 명을 학살한 이세민이 자신의 숨통을 조인 위징을 살린 것은 지금 봐도 미스터리하다. 『요원전』에서처럼 정말로 모종의 거래가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이세민의 냉혹하면서도 탁월한 정치 감각의 발현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위징은 이세민에게 있어서, 그리고 당(唐)에 있어서도 중요한 인물이었다.



p.268

“꼬마야, 내가 일찍이 도적 패거리에 투신했을 때도 딱 너 만한 나이였으나... 이 정도로 무모한 짓을 한 적은 없었다. 감히 궁성에 잠입할 줄이야...”

 


 

   이세적이 이야기하는 ‘도적 패거리’는 적양(翟讓)의 와강군(瓦崗軍)을 말한다. 와강군은 고기잡이 능수들이 주축이 된 농민군이다. 수 양제의 폭압으로 농민군의 봉기에 가담한 이세적이 지금은 그들을 ‘도적 패거리’라고 지칭하는 것을 보니 좀 씁쓸한 마음이 든다. 『자치통감』권 186에 기록된 서세적(이세적이 당고조 이연에게서 이 씨 성을 하사받기 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상당히 어린 나이에 농민군에 가담한 것을 알 수 있다.


이호(離狐, 산둥성 허쩌시) 사람 서세적(徐世勣)은 집은 위남(衛南, 허난성 안양시 화현)에 있었고 나이는 열일곱이었으며 용기와 지략이 있었는데 적양(翟讓)에게 유세하였다.

 

 


 


p.275

“전하, 신이...”

“오, 위징인가.”

 

 


   『서유기』10회에서 위징은 당태종의 신하이면서 동시에 옥황상제의 명을 받아 경하 용왕의 목을 베는 신묘한 인물로 묘사된다. 『요원전』에서 위징이 양의전 위에 올라간 ‘요물’을 죽이는 것은 『서유기』에 대한 해석으로 보인다.


 

 


 

p.282

“이 장안의 불교계를 보게. 섭론파 외에 북도파北道派, 남도파南道派... 종파마다 죄다 다른 소리를 하고 있어...”


   ‘미륵(彌勒, Maitreya, ?~?) → 무착(無着, Asaṅga, 300?~390?) → 세친(世親, Vasubandhu, 320?~400?)’의 기본 틀에서, 세친의 『십지경론(十地經論)』을 논서로 성립된 종파가 지론종이다. 이 지론종 성립 후 제8아리야식(第八阿梨耶識: ālaya vijñāna의 구역)에 대한 견해 차이로 상주남도파(相州南道派)와 상주북도파(相州北道派)로 분리되었는데, 약칭으로 남도파 · 북도파라 한다. 섭론종은 진제(眞諦, 499~569)가 번역한 무착의『섭대승론』을 논서로 성립된 종파이다.

   이렇게 종파가 나뉜 이유는 『요원전』24회와 25회에서도 다뤘듯이 ‘아뢰야식(阿賴耶識)에 대한 해석에 대한 차이 때문이었다. 바로 이게 현장이 천축으로 가게 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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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4-01-08 22: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Tomek님의 서유요원전 주해는 참 재미있고 대단하네요.언젠가 책으로 나올듯 싶군요
그나저나 늦었지만 Tomek님 새해 복많이 받으셔요^O^

Tomek 2014-01-09 10:14   좋아요 0 | URL
분에 넘치는 과분한 덕담, 정말 고맙습니다.
카스피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셔요. :)
 


제27회 - 육건장은 심야에 우물로 숨어들고 삼태자는 지저에서 검을 휘두르다


p.186

*『중국의 과학과 문명』(J.니덤)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sation in China)』은 영국의 생화학자이자 과학사가인 조지프 니덤(Noel Joseph Terence Montgomery Needham, 중국 이름은 李約瑟, 1900~1995)이 지은 중국과학사 연구서로 1955년 1권 『서론(Introductory Orientations)』이 발간된 이후 2008년까지 총 24권이 나온, 한마디로 엄청난 책이다. 니덤 생전까지는 총 16권이 출판됐으며, 니덤 사후에는 니덤연구소(Needham Research Institute, NRI)에서 니덤의 연구를 바탕으로 계속 집필을 하고 있다.

   니덤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총 7부로 구성했는데, 1부 『서론(Introductory Orientations)』, 2부 『과학사상사(History of Scientific Thought)』, 3부 『수학, 하늘과 땅의 과학(Mathematics and the Sciences of the Heavens and Earth)』까지는 단권으로 출간됐지만, 그 이후 4부 『물리학과 물리기술(Physics and Physical Technology)』, 5부 『화학과 화학기술(Chemistry and Chemical Technology)』, 6부 『생물학과 생물학기술(Biology and Biological Technology)』, 7부 『사회적 배경(The Social Background)』은 각 파트별로 책이 나눠지기 시작했다. 2013년 12월 현재, 5부 Part 8 & 10, 6부 Part 4가 저술 중이며, 언제 완간이 될지는 알지 못한다.

   이 책이 워낙에 방대하고 깊은 내용을 다루는 것이라, 일반 독자들을 위한 축약본이 나왔는데, 한국에 소개된 니덤의 책들은 바로 이것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을유문화사와 까치글방에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이란 제목으로 출간되었으나 현재는 모두 절판됐으며, 지금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것은 조지프 니덤의 연구를 로버트 템플(Robert Temple)이 축약하고 도판을 넣은 『그림으로 보는 중국의 과학과 문명(The Genius of China: 3,000 Years of Science, Discovery and Invention)』이 유일하다.



   사족으로, 니덤연구소는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진흥사업단의 지원 하에 『한국의 과학과 문명』을 총 10권의 분량으로 낼 계획을 발표했는데(2013년 11월 7일), 이는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에서 출간한 비서구권 인문·과학 총서로는 두 번째라 한다.



p.197

“거령신! 거령신!”


   나타가 부르는 거령신(巨靈神)은 『서유기』에 등장하면서 동시에 중국의 창세 신화에도 모습을 보이는 신이다.

   『서유기』4회에서 거령신은 옥황상제가 하사한 필마온(弼馬溫)이라는 벼슬이 품계에도 없는 하찮은 것임을 알고 무단이탈한 죄를 묻고자 출동한 탁탑 이천왕과 나타삼태자의 선봉장으로 나온다. 『요원전』 p.201에 등장하는 거령신의 모습은 바로 『서유기』에 등장한 거령신의 모습을 그대로 차용했다.

   “이천왕은 양지바르고 평탄한 들판에 영채를 세우기가 무섭게 먼저 선봉장 거령신을 출동시켜 첫 싸움을 걸게 하였다. 출전 명령을 받은 거령신은 갑옷 투구를 단단히 고체 매고 선화부(宣花斧) 큰 도끼를 휘두르며 곧장 수렴동으로 쳐들어갔다.(選平陽處安了營寨,傳令教巨靈神挑戰。巨靈神得令,結束整齊,掄著宣花斧,到了水簾洞外。)”

   중국 신화에서도 거령신을 발견할 수 있다. 위앤커는 『노사(路史)』, 『문선(文選)』, 『수경주(水經注)』 등에서 거령신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는데, 그의 저서 『중국신화전설Ⅰ』 「개벽편(開闢篇)」에 실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에게 비교적 흥미를 느끼게 하는 것은 다른 책에 기록되어 있는 거령(巨靈)이라는 천신에 관한 신화이다. 그는 원기(元氣)와 함께 태어났고 재주가 뛰어나 <산천을 만들어내고 강물을 흐르게 하였다>고 하니, 조물주의 자격을 갖고 있었다 하겠다. 그는 분수(汾水)의 하류에서 태어났다고 하는데, 본래는 강물의 신으로 화산(華山)에서 자신의 능력을 한 번 과시하였었다. 즉, 황하를 가로막고 있는 화산을 <손을 흔들고 발로 밀어내어 두 조각을 내서> 황하가 곧바로 화산을 지나갈 수 있게 하였으니, 그 후로는 돌아서 흐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지금도 화산에는 거령이 산을 갈랐던 손과 발자국이 완연히 남아있다고 한다. 도가의 방사들은 아마도 이런 전설들에 의거해서 이 귀여운 강물의 신을 천지개벽의 조물주로 격상시켰을 것이다. 그리하여 본래의 소박한 신화는 이러한 조작과 수식을 거쳐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20세기 후반에 유년기를 겪었던 사람들이라면, ‘거령신’이라는 이름을 듣고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 등장한 거신병(巨神兵)이 아닐까.




p.205~206

거령신과 싸우는 손오공


   『요원전』에서 손오공은 거령신과의 싸움에서 도망치지만, 『서유기』에서는 그 반대다. “거령신은 도무지 원숭이 임금의 적수가 아니었다(巨靈神抵敵他不住).” 거령신과 손오공의 싸움 장면을 묘사한 부분은 다음과 같다.


棒名如意,斧號宣花。他兩個乍相逢,不知深淺,斧和棒,左右交加。一個暗藏神妙,一個大口稱誇。使動法,噴雲曖霧;展開手,播土揚沙。天將神通就有道,猴王變化實無涯。棒舉卻如龍戲水,斧來猶似鳳穿花。巨靈名望傳天下,原來本事不如他:大聖輕輕掄鐵棒,著頭一下滿身麻。

   철봉 이름은 여의금고봉이요 도끼는 선화부,

   둘이서 덥석 맞붙으니 강약을 알 도리가 없고,

   도끼와 철봉이 좌우로 얼기설기 마주칠 따름이다.

   한편은 신묘한 계략을 몰래 감추고,

   또 한편은 큰소리 뻥뻥 쳐서 상대방을 놀라게 만든다.

   이쪽저쪽 술법을 부려 구름을 토해내고 안개를 삼켜가며

   있는 솜씨 없는 솜씨 한껏 뽐낸다.

   허공에는 흙먼지 뽀얗게 일고, 모래 바람이 소용돌이치는데,

   하늘의 장수 신통력에는 도력(道力)이 깃들고,

   원숭이 임금의 술법은 변화무쌍하다.

   철봉을 치켜드니 흡사 용이 물장난하듯,

   도끼날이 찍어드니 마치 봉황이 꽃떨기를 꿰뚫는 듯 절묘하기 짝이 없다.

   거령신의 명망이 천하에 두루 떨친다지만, 근본 실력은 애당초 적수가 못 돼.

   제천대성이 철봉을 가볍게 돌리니, 첫 수부터 온 몸뚱이가 저려서 말을 듣지 않는다.


   그래도 p.208~210에 걸쳐 묘사한 괴물 원숭이 육이(六耳, 소찬풍)와 거령신과의 사투를 보면, 어느 정도 원작인 『서유기』와 맞게 이야기를 진행시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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