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antastic Mr. Fox』 내가 나이가 든 것인가...

      

   『Fantastic Mr. Fox』 책을 읽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책이 언제 영화가 되었나요? 게다가 웨스 앤더슨 감독에 조지 클루니, 메릴 스트립, 빌 머레이(@.@)라니!!  

   도대체 어떤 영화가 나왔을지 궁금합니다. 예고편을 보니 책보다는 덜 위악적인 것 같아 다행이고, 또 『찰리와 초콜렛 공장』이후로 그럴싸한 Roald Dahl원작의 영화가 나올 것 같아 기대됩니다.  

   크리스마스 개봉 예정이고, 지금 시사회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으니, 관심 있는 알라디너분들께서는 아래 있는 홈페이지로 가서 지원하세요. ^.^  

 

홈페이지 가기 

 

* 덧붙임 

1. 이 예고편을 보니까 엉뚱하게도 무적핑크님의 「실질적이고 객관적인 동화」중, [여우와 포도]편이 생각나는군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제 오후, 업무에 관련한 자료 검색을 하던 중,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했다.  

 

‘8등신에 슬픈 눈매’ 가야 소녀 복원
(기사 읽기 클릭) 

권력자 무덤에 순장된 10대 여성
고대한국인 대상 첫 과학적 성과 

 


   이달 초, 유골이 출토되었다는 소식에는 그런가보다 싶었는데, 막상 복원된 모습을 보고나니, 1500여년 전 그 시대를 살았을 소녀의 모습에 왠지 모를 뭉클함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모습에서 『현의 노래』에 나온 순장된 왕의 시녀 아라가 떠올랐다.  

   내게 있어 순장은 '지배자가 죽을 때 아랫사람들을 같이 묻는다'는 개념화된 지식으로만 여겨졌었다. 하지만, 『현의 노래』를 읽고 나서 그 개념화된 순장이 실체가 되어 다가왔다. 김훈이 묘사한 순장을 조금만 들여다 보자. 

   
 

   왕의 관이 석실로 내려올 때, 문무의 두 순장 중신들은 흰 수염을 가지런히 하고 눈을 감았다. 군사들이 석실의 돌뚜껑을 덮을 때 쇠나팔이 길게 울렸다. 순장자들의 구덩이마다 배치된 군사들이 일제히 돌뚜껑을 들어올려 구덩이를 덮었다. 구덩이를 덮을 때, 울음소리나 비명소리가 한 줄기도 새어나오지 않으면, 백성들은 그 적막을 죽은 왕의 덕으로 칭송했다. 간혹 구덩이 뚜껑을 덮을 때 흑, 흑 젊은 여자들의 웃음인지 비명인지가 새어나오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람들은 그 불경하고 요망한 일을 입에 담지 않았다. 또 돌뚜껑이 덮이는 순간, 뚜껑을 밀치고 구덩이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자들도 더러는 있었다. 군사들이 달려들어 몽둥이로 사지를 부러뜨려 구덩이 안으로 밀어넣었는데, 그 일도 사람들은 애써 기억하지 않았다. 때로는 장례 전날 밤, 소복을 입은 채 달아난 처녀들도 있었다. 군사들이 갈대숲과 바위 틈을 뒤져 처녀들을 붙잡아 여러 토막으로 베었다. 군사들은 처녀의 몸 토막을 우물에 던지고 흙으로 메웠다. 처녀의 부모들이 쇠터의 노비로 끌려갔고 살던 집은 헐렸다. 처녀들의 도망은 없었던 일로 바뀌었는데, 세월이 지나도 사람들은 그 참담한 일을 일절 입에 담지 않았다. 

(별 中)

 
   

   순장에 선택되는 것은, 그시대에선 자연사나 다름 없었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운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블합리하지만, 따를 수 밖에 없는 그 시대의 질서였다. 그러나 아라는 달랐다. 그녀는 그 운명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받아들여야 할 어쩔 수 없는 죽음과 하나의 생명체로서 삶을 이어가고 싶은 본능 사이에서 그녀는 질서를 받아들이는 대신 삶을 선택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그녀가 우륵과 니문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녀도 결국엔 그 질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왕의 충성스런 신하들 덕분에 아라는 결국 순장되고 만다.

   
 

   아라는 상여의 왼쪽에서 올라왔다. 붉은 비단천을 휘감은 몸뚱이가 삼줄로 묶여 있었고, 긴 머리카락이 어깨 아래로 늘어졌다. 눈을 가렸고, 입에 재갈이 물려 있었다. 

   상여는 더욱 다가왔다. 아라의 머리카락에서 햇빛이 부서지면서 흘러내렸다. 

   지관이 요령을 흔들며 상여 앞으로 나아가 두 번 절했다. 태자의 구덩이 남쪽으로, 아라의 구덩이는 얕고 좁았다. 그 옆에 두 쪽짜리 돌뚜껑이 놓여 있었다. 지관이 아라의 구덩이 속에 토기 세 개를 넣고, 먼 가야산 쪽을 향햐 두 번 절했다. 내위군 한 명이 달려들어 아라를 밀쳤다. 아라는 구덩이 안으로 쓰러졌다. 지관이 밥 한 그릇을 구덩이 속으로 던졌다. 군사들이 돌뚜껑을 밀어서 덮었다. 지관이 우륵 앞으로 다가왔다.  

(월광 中) 

 
   

   그녀의 죽음은 어떻게 찾아왔을까. 구덩이 안에서 돌뚜껑이 덮어지는 광경은 어떤 것일까. 그리고 주위에 있던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이 사라진 후 그 적막함은 어떤 느낌일까. 원하지 않는 죽음을 인위적으로 시나브로 맞이해야 하는 그 절망감은 어떤 느낌일까. 이 어쩔 수 없는 불합리함에 분노하지 못하고 체념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아라의 죽음은 이렇게 경험하지 못하고, 해결할 수 없는 질문만을 내게 남겨주었다. 

   그런 그녀가 현대 과학의 힘으로 그 때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섰다. 그녀의 모습은 다부져 보이지만, 눈빛은 왠지 슬퍼보인다. 1500여년 전의 아라는 지금의 우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려 지금 다시 나타났을까. 그 이야기는 나중에 듣더라도, 지금은 그 당시 어쩔 수 없는 죽음 앞에 체념하고 공포에 떨었을 수많은 가야의 아라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다. 더이상 무서워 말라고. 외로워 말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때론 그런 책들이 있다. 읽기는 읽었는데 도대체 무엇을 읽었는지 잡히지 않는 책들. 

가슴에 무언가 벅차오르는 듯한 그런 '느낌'이 있는 책들. 

한번에 먹어버리기 보다 생각날 때마다 꺼내어 야금야금 베어먹는 그런 책들. 

느낀 감정을 개념화된 언어로 재구성하기 불가능한 책들. 아니, 그런 의미가 무의미한 책들.

요근래 석달간 짬짬히 읽은 김훈의 책들이 그러했다. 

그냥 홀로 이 감정, 이 느낌 간직하리라.


댓글(0) 먼댓글(2)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 『개』냉엄하고 엄정한 시선을 잠시 거둔, 미문의 소설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1-27 17:51 
       김훈의 문장은 냉엄하고 엄정하다. 1인칭 시점의 글이건, 3인칭 시점의 글이건 간에, 그는 냉엄하고 엄정한 관찰자의 시점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기본 조건이야말로 그가 기자시절부터 단련해 온,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일 것이다.     그런 그도 피곤했던 것일까? 늘 세상과의 거리를 두고 있던 그의 시선이 『개』에서는 더할나위 없이 아름답고 아련하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아마도 그가 인간이 아닌
  2. 발로 꾹꾹 밟어 쓴 풍경과 상처 그리고 아름다움
    from 이번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2009-11-30 09:40 
       전작 『자전거 여행』이 한강 하류, 조강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는 것을 멈추었다면, 이번 『자전거 여행 2』에서는 바로 그 조강에서 페달을 밝기 시작한다.      김훈의 기행문은 여타의 기행문과 다르다. 일반적인 기행문들이 그 지역의 정보와 풍경에 대해서 설명한다면, 김훈은 그가 바라본 풍경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말한다. 그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고 말한다. 하지만 그가 말
 
 
 

   오늘 집에 고사가 있다고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와서 고사 떡 좀 가져가라는 말씀이셨는데, 그 속에는 '떡 가져가는 김에 얼굴 좀 보자'는 성화가 숨어 있었다. 3하긴 30여년간 줄곧 같이 살다가 결혼이라는 핑계로 분가를 하게 되서 같이 지내지 않으니 그 빈자리가 얼마나 클까 짐작은 해보지만 절실하게 와닿지는 않는다. 그건 아마도 내가 자식이 없어서겠지. 그리고 자식을 낳으면 어머니보다 더 큰 그리움에 전전긍긍하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그 미래는 아직 내게 다가오지 않아 잘 모르겠다. 

   내가 사는 곳은 서울 마포고 집은 서울 정릉이다. 집에 갈 때는 항상 110번 버스를 타고 집에 갔었는데, 오늘은 왠지 지하철을 타고 싶었다. 아내가 지하철을 싫어해 항상 버스를 탔지만 오늘은 혼자 가는 것이기도 하고, 또 버스에선 책을 읽기 힘들지만 움직임이 적은 지하철에서는 책을 읽을 수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는지 모른다. 

   아침 8시 10분 광흥창 역에서 봉화산행 지하철을 탔다. 보문역에서 내려 1014번 버스를 타고 가면 가장 최단 거리의 요금이 나온다는 것을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했다. 평소 토요일 아침보다 차량에 사람이 많았다. 21일, 셋째주 토요일. 격주 근무를 하는 회사나 학교가 쉬는 날이 아닌것을 알기에 다른 놀토보다 사람들이 많을 것이라는 것은 예상했었지만, 이정도로 많을줄은 몰랐다. 그냥 평소보다 많았겠거니 하고 사람들 틈에 비집어 섰다. 

   4호선 환승이 되는 삼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내리고, 자리가 났다. 자리에 앉고 책을 읽는데,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이 밀려들기 시작했다. 내리는 사람은 없고 타는 사람만 늘어갔다. 지하철 차장이 평소에는 안하던 방송을 하기 시작했다.  

   "약수역 앞, 뒤쪽으로 많은 수험생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앞, 뒤 차량에 굉장히 많은 승객들이 승차할 것으로 예상되오니, 차량 앞, 뒤에 계신 승객분들 중, 바쁘지 않으신 분들은 차량 중간으로 이동하셔서 쾌적한 환경에서 목적지까지 이동하시기 바랍니다." 

   객차에 있던 승객들이 웅성거리더니 누군가가 이야기 한다.  

"오늘 고대 논술고사 있잖아."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하필 오늘, 그것도 이 시간대에, 고대를 경유하는 6호선을, 그것도 두 번째 객차를 택하다니... 다른 사람들과 달리 앉아 있었지만, 아침 출근시간 신도림역 수원행 열차를 경험해본 나로선 전신이 저릿저릿하고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오늘같이 긴장이 풀어진 상태에서 이런 상황은 감당이 되지 않는데... 오늘은 어떤 지옥을 맛 볼 것인가... 

   열차가 약수역에 도착했다. 찢어진 샌드백에서 모래가 쏟아지듯 사람들이 들어왔다. 대부분 앳된 학생들과 어머니들이었다. 열차는 금방 차고 들어오지 못한 학생들은 다른 객차에 타려고 달리기 시작했다. 빨리 움직이라는 공익요원의 호루라기 소리, 그만 문을 닫겠다는 차장의 단호한 협박, 반대편 플랫폼에서 열차가 들어온다는 경고음, 그리고 그만좀 집어 넣으라는 객차 속 (열차를) 탄 자들의 절규가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정말로 장관이었다. 

   더이상 탈 데가 없는 것 같은데도 사람들은 열차에 끊임없이 들어왔다. 가장 절정은 고려대역을 네 정거장 앞둔 동묘역에서였다. 한데 무리진 여학생들이 도저히 못참았는지, "이제 그만좀 태워요."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그 소리는 세상사에 익숙한 어른들이 내지르는 '짜증'과는 달랐다.  

   어른들의 짜증이 익숙한 사회생활에서 겪는 어쩔 수 없는, 받아들여야 함을 알지만 최소한 항변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그렇게라도 해야 자신이 그래도 살아있음을 느끼는 그런 것이라면, 아이들의 항변은 짜증과 '어떤 설렘'이 그들의 목소리에 배어있는 것 같았다. 그 어떤 설렘이란, 어른들이 지니고 있지 못한 삶의 긍정, 역동성인것 같았다. 어쩌면 그들에게는 오늘 시험을 본다는 사실 자체가 신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면, 나도 그 때 시험이, 두려운 감정도 있었지만, 어떤 통과제의 같은, 어른이 된다는 설렘같은 것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 감정이 어떤 것이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익숙한 생활의 반복속에서 그런 설렘은 아득한 것이 되었다. 

   결국 보문역에서 내리지 못하고 이들과 함께 고려대역에서 내렸다. 엄청난 인파가 계단을 올라가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열과 줄을 맞춰 일사분란하게 올라가는 모습은 파도가 출렁이는 것처럼 보여졌다. 차마 저 인파에 끼지 못해 주저하고 있는 상황에서 다음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다. 꼬리에 꼬리를 문 인파속에 미아가 될까 두려워 마음을 다잡고 휩쓸려 들어갔다. 

   110번 버스를 타기 위해 4번출구로 나왔다. 안암오거리는 차와 사람으로 엉켜있었다. 길건너 고대 생활관 쪽으로 수많은 인파들이 줄을 지어 올라갔다. 1차선에 있던 차량에서 어머니와 수험생인 딸이 내려서 학교쪽으로 뛰어갔다. 오거리 가운데 있는 경찰은 확성기로 차량과 인파를 제어해보지만, 도로로서의 기능을 포기한 도로에서 꾸역꾸역 머리를 들이밀며 밀려드는 차량과 신호를 무시하며 차량속으로 길을 내는 인파속에서 속수무책이었다. 

   버스를 타고 길 반대편을 보았다. 가방을 맨 앳된 학생들이 뛰는 모습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8시 52분이었다. 9시까지 시험장에 들어가야 하니까, 움직이지도 못하는 차 안에서 내려 뛰기 시작한 것 같다. 그 뒤로 밍크코트를 입고 하이힐을 신은 중년의 어머니도 뛰는 모습이 보였다. 애끓는 모정은 추위와 하이힐 앞에서도 굴복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두 정거장을 지나가는데, 힘들게 힘들께 뛰다 서다를 반복하는 학생이 보였다. 시각은 8시 58분이었다. 저 학생이 2분안에 뛰어서 시험장에 도착할 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힘들 것이다. 하지만 저 학생이 시험을 보지 못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성인으로서 첫 시작을 시도해보지도 못한 무력감에서 맞이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집에 도착해서 고사떡을 맛봤다. 떡을 맛보며 이따 집에 갈 방법을 생각해봤다. 이런 글을 쓰고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을 보니 나도 어쩔 수 없는 어른인가 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 여전한 박민규의 유효한 선동

0.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영화화

 

   박민규 작가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영화화 된다고 한다. 감독은 수백편의 CF를 제작한 오민호 감독이고 영화 제작사 아이디어 팩토리에서 제작을 한다고 밝혔다. (기사보기 클릭)  

   좀 더 기사를 살펴보자면 이렇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는 여자의 이야기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겉모습으로 비교되고 경쟁하며, 늘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려야 하는 우리 사회의 여성 98%에게 바치는 위로로 다가갈 것이다. 영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시나리오 작업이 완료되는 대로 캐스팅 작업을 거쳐 2010년 상반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다. 

   내가 이 영화를 반대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소설에 나오는 "그녀-못생긴 여자"를 어떻게 그릴 것인가? 이건 실패를 담보한 기획이다. 

 

1. 다빈치 코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니 책이나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건너 뛰시기 바랍니다)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로버트 랭던을 도와주는 소피 느뷔는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의 피를 이어받은 자손이다. 이 사실은 소설의 중후반에서 밝혀지지만, 읽는 데 감상에 무리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에 그녀의 모습을 대충 맞춰서 상상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소설의 상상력을 더욱 풍부하게 만드는 재료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설정이 영화로 옮겨가면 골치가 아파진다.  

 

  

산 아폴리나레 누오보 성당에 있는 예수의 모자이크 그리고 소피 느뷔로 분한 오드리 토투 

 

   소설에서 제시한 이미지는 우리의 머리속에서 재구성 된다. 각자 개인이 가지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와 각자가 생각하는 소피 느뷔의 이미지가 겹쳐 예수를 닮은 각자의 '소피 느뷔'가 탄생할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눈에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객관성을 담보한다. 아무리 오드리 토투가 예수를 닮았다고 우겨봤자, 모든 관객이 그 객관성을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의 캐릭터를 영상화하는 것은 각자의 주관성을 객관화 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위험성을 담보로 한다.  

 

2. 아름답다  

 

   조금 다른 경우지만, 이 영화는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를 형상화한 작품이다.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가 자신의 아름다움 때문에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보여준다. 김기덕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그간 김기덕 감독 영화에서 조연출을 맡은 전재홍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이 영화에서 치명적인 아름다을 간직한 여인은 배우 차수연이 맡았다.  

   차수연은 물론 아름답다. 그러나 이 영화의 설정은 '세상 모든 남자들이 그녀의 치명적인 아름다움에 홀리는' 여인을 그린 영화다. 아마 시나리오 상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설정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아름다움'의 주관성을 어떻게 객관화 시킬 것인가. 각자의 아름다움은 각자의 기준에 적용된다. 배우 차수연이 아름다운 것은 인정하지만, 모든 남자를 굴복시킬 그 절대적 아름다움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만큼 미적 주관성은 객관화 시키기 어려운 법이다. 

 

 

3. 박민규 작가의 다른 작품 영상화를 꿈꾸며

   박민규 작가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이렇게 밝혔다. "가장 아름다운 것과 가장 추한 것은 똑같이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한 번 쳐다보면 세상이 얼어붙은 듯이 숨이 턱 막히는 그런 '추함'을 어떻게 형상화 할것인가. 예쁜 여배우를 못생기게 분장을 시키든, 진짜로 못생긴 여배우를 캐스팅하든, 아마도 이 소설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를 수긍케하는 '그녀'를 탄생시킬지는 모르겠다. 혹여나 '못생긴 여자'가 아닌 '흉측한 여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못생긴 척 하는 예쁜 여자가 되는 것은 아닌가 벌써부터 걱정이다.   

 

박민규 작가의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각색한 <낙타씨의 행방불명>

 

   박민규 작가의 서사가 영상화에 잘 맞아떨어질까? 예전에 TV문학관에서 방영했었던 <카스테라>는 그저 그랬다. 오히려 예전에 드라마시티에서 방영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각색한 <낙타씨의 행방불명>이 훨씬 더 박민규 작가의 감수성을 담았다고 생각한다. 특히 무기력한 아버지 역할의 기주봉 씨의 연기는 단연 압권. 소설에서 묘사한 절망적인 멍한 눈빛의 모습을, 드라마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허탈한 모습으로 서 있는 모습과 비교해보면 활자가 영상화 되었을 때의 화학반응이 얼마나 짜릿한지를 느낄 수 있다. 

   이런 무리수를 둔 작품보다는 차라리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영화화 하는 게 어떨까? 최근 프로야구 인기도 절정인데. <슈퍼스타 감사용>개봉한지도 꽤 되었으니 괜찮을 것 같기도 한데.


댓글(1)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09현 2011-07-12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감독.. 저질러 놓고 뒷감당 못하는 작태는 여전하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