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한 사이트 회원정보 정리를 하다가 예전에 쓴 글 목록을 발견했다. 6년 전에 쓴 글들. 많지는 않았지만, 참 싸가지 없게도 썼었다. 대화를 하기 보다는 논쟁을, 의견을 경청하기 보다는 날선 각을 세운 글들. 도대체 왜 그런 태도를 지녔던 것일까. 

   내가 보낸 20대는 그런 것이었을까. 차분하게 기다리기 보다는, 조급함을 견디지 못해 먼저 달려드는, 치기어림. 

   싹 지워버릴까 생각했지만, 그냥 놔두기로 했다. 지워버린다고 해서 그 시절이 지워지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흔적이 모여 지금 나를 조금씩 만들어가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더 큰 이유. 언젠가, 10년 정도 지나서, 지금 쓴 이 글을 보고 지워버릴까 싶어서.

   결국 세월이 흐르는 것은, 치기어린 시절을 반성해가는 무력함을 확인하는 것일 뿐인가. 지금껏 보내온 시간들의 총합인 과거는 무효가 되고, 지금 살고있는 현재와 가늠할 수 없는 미래만이 내게 의미있는 시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 계속 살아간다는 것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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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9 14:0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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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0 09: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충치?" 

     "네, 충치."  

 

   오랜만에 만나서 한다는 말이 고작 충치야? 속으론 맘이 상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아니, 그려려고 노력했다. 그는 원래 이렇게 엉뚱한 면이 있었으니까. 여전하네. 16년 전에 너를 처음 봤을 때도 이렇게 엉뚱했었지. 8년 전, 겨우 수소문해서 너를 다시 만났을 때도, 2년 전, 네가 결혼하기 전에 겨우 다시 만났을 때도 넌 항상, 우리가 원하는 주제에서 벗어난 말로 대화를 시작했었지. 그래. 여전히 엉뚱해. 

 

     "의사 선생이 뭐라고 길게 얘기했었는데... 치아엔 음식물이 씹히는 교접면과 음식물이 끼는 인접면이 있는데, 제 경우엔 인접면이 다 썩었대요. 이전 치과에서 떼운 게 엉망이어서 충치가 떼운 치아 속으로 파고 들었다나? 그래서 다 들어내고 치료한 후, 새로 씌워야 한대요."  

 

   술술술 재미없는 말도 네 입에서 나오니 감미로운 노래처럼 들리는구나. 예뻐. 아, 지금 당장 너를 끌어안고 잘 수 있다면! 아니 하다못해 저 입술에 입이라도 맞출 수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내 이를 다 뽑아서 네 치아를 대신해 줄 수 있을텐데! 그럼 우린 항상 같이 있고, 네 혀는 항상 날 쓰다듬을 수 있겠지!

 

     "돈 많이 들겠네." 

     "돈이야 많이 들죠. 억울한 면도 있는데, 차라리 잘 된 일이라 생각해요." 

     "뭐가 잘 된 일인데?" 

     "지금이라도 다시 제자리로 돌릴 수 있다는 것이요. 물론 처음같은 치아는 불가능하죠. 이미 썩을만큼 썩었으니까. 전에 엉망으로 봉합한 치아들은 지금 당장은 괜찮아보일지 몰라도 시간이 지나면, 썩어버릴 테니까요. 초기는 아니지만, 지금에서라도 발견한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고통과,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아직은, 고칠 수 있다는 희망이 있으니까. 지금 우리 관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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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주가는 카페에 독서취향 테스트란 게 있어서 냉큼 해봤다. 열대우림 독서취향이라... 얼추 맞는 것 같기도 하고... 기형도의 시를 알아봐서 선택한 게 영향이 컸는지... 여튼 재미있다.  

   김영하 작가 좋아하는데.. 걸렸다. 히힛.

 

지구 생명의 원천인 태양의 영향력이 가장 두드러진 곳. 어마어마한 태양 에너지로 인해 엄청난 양의 강수량과 엄청난 생산력의 동식물군이 번성한다. 열대우림이 차지하는 면적은 전체 지구 표면의 3%에 불과하지만, 이곳엔 전지구 생물의 15%가 살고 있다. 이곳에 사는 생물 수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아 아직도 인간에 발견되지 않은 동식물들을 헤아릴 수 없다.  

극단적으로 다양하고 비옥한. 열대우림의 자연적 특성은 당신의 책 취향을 대변하기에 가장 적당합니다.  

밀림 같은 포용력:
마치 열대우림과도 같은 극도로 다양하고도 조밀한 책 소비 행태를 보임. 그 어떤 극단적인 내용이라도, 그 어떤 괴상하고 수상한 내용이라도 이 취향에선 대체로 기꺼이 소비되는 편. 가장 다양한 종류의 책을 가장 적극적으로 소비하는 '지적인 대식가' 계층.  

태양 같은 직관력:
중요한 사실은 돼지처럼 무작정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수준 높은, 가치있는 책을 정확히 판단한다는 점. 이런 심미적 분별력은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으로 보임.  

원시적인 진실성:
당신의 취향은 뭔가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내용과 표현을 선호함. 비록 조잡하고 미숙하더라도, 책이라면 무릇 솔직하게 자신감있게 꾸밈없이 쓰여져야 함.
당신의 취향은 전체 출판 시장의 약 5% 정도에 불과하지만, 소비 규모는 15% 이상일 정도로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유명 소설 작가의 상당수가 이 취향에 속합니다. 당신의 취향 중에도 작가 기질이 다분한 사람이 많을 듯. 

다음은 당신의 독서 취향을 자극할만한 거침없는 작가들입니다.  

아멜리 노통브, 김영하, 커트 보네거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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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에 일찍 일어나 조조영화를 보고 들어와 침대에 뒹굴거리며 달디단 독서를 하고 있는 중에 벨이 울렸다. 찾아올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 순간 조금 긴장하면서 현관문으로 서서히 다가가는 와중에 다시 울리는 벨 대신에 다급히 불려지는 내 이름. 문을 열어보니 택배사 사장님이 서 계셨다. 알라딘에서 금요일에 발송했다는 신간 평가단 도서를 들고서.  

 

"어... 오늘도 일하세요? 오늘 일요일인데..." 

"월요일에 눈내리고 일이 계속 밀려있어서요. 구정까진 계속 일요일까지 일해야 할 것 같아요."  

 

   책을 받고, 오배송한 도서를 반품처리하고, 인사를 하고 문을 닫았다. 천재지변과 쇼핑몰에 밀려드는 주문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이니 나완 상관 없는 일이야, 라고 생각하면 간단할 문제라고 머리는 스스로 위안하고 있지만, 내 맘은 편치 않았다. 개인 사업자란 이유만으로 일요일에 일하는 것을 당연히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니까.  

   이 문제는 내 짧은 가방끈과 미지근한 심장으로는 결론을 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들 사장님들께 따듯한 환대와 고마움을 전하는 문자 한 통뿐. 그리고 배달 늦어진다고 괜히 툴툴거리지 않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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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1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3-02 0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출발 라운지에서 이별하는 아름다운 연인들의 모습과 콩코드 룸에서 엿본 신흥 자산가들과 그곳을 청소하는 필리핀 청소부 사이의 묘한 이질감, 우리가 비행기에서 맛보는 인공과 자연이 뒤섞인 기내식을 만드는 공장, 항공사 사무실에 있는 공항을 떠난 비행기들의 행적을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지도, 문제가 생긴 비행기들이 수줍게 방문하는 격납고 등 그는 우리가 볼 수 없었던 공항의 다양하고 매력적인 면면들을 그 특유의 놀라운 위트와 통찰력을 섞어 보여준다. 이를 통해서 공항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했던 것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이야기한다. 

                                              - 알랭 드 보통 『공항에서 일주일을』 출판사 제공 책소개 중에서 - 

 

   '공항'이라는 공간은 확실히 특별한 곳이다. 공항은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다. 물론 역이나 터미널 또한 그렇지만, 공항의 이미지는 그곳들과는 전혀 다른 중량감이 있다. 비행기를 타고 떠난 다는 것은 내가 발딛고 살고 있는 이 땅을 떠난다는 것이고, 그것은 관계의 정리, 새로운 시작을 내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기차나 버스를 타고도 그런 것을 느낄 수 있겠지만, 3면이 바다이고 육로마저 막힌 대한민국에서는 육상수단으로 움직여봤자 거기서 거기일뿐이다) 

   그래서일까? 아직 사지도, 읽지도 않은 책을 보고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 것은. 알랭 드 보통의 새책을 보고서 바로 떠올린 것은 <마이 앤트 메리>의 「공항가는 길」이었다. '사쿠라 꽃 피면 여자 생각'나듯이 나 또한 '공항'하면 이노래 생각난다. '이것은 불가피하다.'  이 노래엔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고 있는 '공항'의 이미지 - 새벽, 불안, 설렘, 포기, 다른 길, 새로움, 뒷모습, 언젠가 등 - 가 다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없는 파란 새벽에
          차가운 바람 스치는 얼굴
          불안한 마음과 설레임 까지
          포기한 만큼 넌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또 다른 길을 가야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를
          새로운 하늘 아래 서있을 너 웃을 수 있도록

          어색한 미소 너의 뒷모습
          처음 사랑이던 너의 얼굴
          이젠 익숙한 공항으로 가는 길

          불안한 마음과 설레임 까지
          포기한 만큼 넌 더 이상 쓰러지지 않도록
          또 다른 길을 가야겠지만 슬퍼하지는 않기를
          새로운 하늘 아래 서있을 너 웃을 수 있도록

          언젠가 우리가 얘기하던 그때가 그때가 오면
          어릴 적 우리 얘기하며 둘이 또 다시 만나길

                                                                                      - 마이 앤트 메리 「공항가는 길」 -

 

   그 다음 생각난 것은 커티스 핸슨의 『러브 액츄얼리』다. 솔직히 이 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오프닝 만큼은 심금을 울리게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곳이 바로 공항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 거자필반(去者必返).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이 있으면 또 만남이 있다고 했다. 긴 헤어짐 후에 맞이하는, 가족, 연인들의 모습은 바라보기만해도 가슴이 뭉클하다. 그곳 공항의 입국장에는 영화 제목처럼 '사랑이 확실히' 우리 주위에 있다.  

 

   세상 돌아가는 꼴에 우울할 때마다, 전 히드로 공항의 입국장을 생각합니다. 우리는 증오와 탐욕의 세상을 살아간다고 대체로 확신하지만,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게는 온 세상에 사랑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종종 특별나게 고귀하다거나 기삿거리가 되지 않아서 그렇지, 사랑은 항상 이 세상에 존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 어머니와 딸, 부부, 남자친구들, 여자친구들, 옛 친구들. 911 테러 희생자들이 죽어가는 순간, 그들이 남긴 메시지는 모두 사랑의 메시지였습니다.
   사랑은 확실히 우리 주위에 있습니다.


   Whenever I get gloomy with the state of the worId, I think about the arrivals gate at Heathrow airport. General opinion's starting to make out that we live in a world of hatred and greed. But I don't see that. It seems to me that love is everywhere.
   Often it's not particularly dignified or newsworthy but it's always there. Fathers and sons, mothers and daughters, husbands and wives, boyfriends, girlfriends, old friends. When the planes hit the Twin Towers, as far as I know none of the phone calls from the people on board were messages of hate or revenge, they were all messages of love.
   If you look for it, I've got a sneaky feeIing you'll find that love actually is all around. 

                                                         - 『러브 액츄얼리』영국 수상(휴 그랜트)의 대사 중에서 - 

 

   내 삶에 있어서 앞으로 공항에 갈 일이 얼마나 있을까 생각해본다. 이젠 누군가를 떠나보내거나 맞이하기엔 힘들지 않을까? 떠나는 것보다 머물러 있는 것이 더 익숙해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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