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겨레 문화센터에서 황성근 선생님의 '자유기고가 과정' 수업을 듣고 있다. 저널리스트식 글쓰기, 간단히 말해 '기사' 쓰는 법을 배우는 수업이다. 물론, 글이라는 게 누군가에게 사사받는다 해서 필력이 갑자기 늘어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이 강의를 비싼 돈 내면서 듣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내 문체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픈 마음 때문이다. 그동안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다시 읽어봤다. 글의 내용도 재미없지만, 그 글을 구성하는 문장도 이런저런 수식어로 늘어붙고 둘러싸여 원뜻을 알아차리기 힘들다. 내가 쓴 글에서 수식어를 지워봤다. 주어와 동사만 남은, 문장이라고 차마 말하기 쑥스러운 것들. 초라하고 볼품없었다. 아마도 그게 나 자신일 것이다. 각 글에서 눈에 띄기 위해 화려한 미사여구로 치장했던 앙상한 문장은, 그나마 이 세상에서 뒤쳐져 보이지 않기 위해, 무시 당하지 않기 위해 여러 허장성세로 치장한 나 자신이다. 수식어구가 빠진 문장에는 글쓴이의 감상이 배제된다. 반면 그 자리는 읽는 이의 몫으로 남겨진다. '글은 쓰는 사람을 나타낸다'는 말이 맞다면, 그래서 주어와 동사, 이 문장의 기본요소로만 글을 쓸 수 있다면, 적어도 이 세상에 나 자신을 나타내는데, 표현하는데 조금 더 당당할 수 있지 않을까.


   둘째는, 내가 쓰고 싶은 글이 '기사'라는 글의 형식에 가장 가깝기 때문이다. 전에도 언급했던 '농촌에서의 삶'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선, 다양한 취재와 수많은 인터뷰가 필요하다. 그러한 자료 수집을 통해 가공시킬 글의 형태는, 글쓴이의 어설픈 감상이 들어가기 보다는 읽는 이가 판단할 수 있는 '기사'라는 장르가 가장 이상적일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이론 강의는 어제부로 끝났고, 앞으로는 수강생들이 기사를 작성해서 제출하고 품평을 할 예정이다. 기사는 단신기사, 생활기사, 가이드기사, 인터뷰기사, 탐방기사, 총 다섯 편을 작성하는데, 욕심부리지 않고 선생님이 가이드하는 대로 따라가보려 한다. 장황하고 지리한 내 문체를 버려야 한다는 점이, 아마도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글을 쓰는 것과 같이 어설프고 이상해보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어설프고 이상해보이는 왼손 글쓰기도 익숙해지면 고유의 스타일을 가진다. 이제 오른손의 익숙함을 잠시 접어두고, 새로움을 맞이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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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는 자기 노래 제목대로 인생을 산다는데, 꼭 노래가 아니더라도, 정말 제목대로 인생은 살아가나 보다. 내가 카테고리명을 '난중일기'로 지은 것은 앞으로 안정적인 직업을 갖지 않아 펼쳐질 전쟁같은 삶을 살아갈 내 일상을 조금씩 기록하자는 취지에서, 아주 겉멋든 거창함으로 포장한 것이었는데, 요즘 내 삶이 진짜 전쟁터 한복판에 있는 것 같다. 단, 삶의 치열함이 아니라, 일상의 사건에서 비롯된다는 게 다르지만.


   병원에 갔다온 이후로 아내는 아침 저녁으로 집 근처의 산부인과에 가서 주사를 맞았다. 나 역시 의무감 혹은 당연함으로 같이 따라다녔는데, 아침 10시, 저녁 6시, 단 두 번 따라가는데도 체력이 방전이 되어버렸다. 일어나서 식사 준비하고 밥먹고, 병원 갔다 돌아오면 11시, 조금 있다 점심 차리고 먹고, 5시 30분쯤에 병원가고 다시 돌아오면 7시. 저녁 차리고 먹고 그러면 어느새 하루가 후딱 가버린 일상의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하루가 실종되는 느낌. "왜 사나?"하는 삶의 존재 가치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까지 떠오르는 나날들의 연속이었다.


   그 기간동안 아내는 아침에 두 대의 주사를 맞았는데, 근육주사로 폴리몬을 배주사로 유트로핀을 맞았다. 유트로핀은 성장호르몬제로 성장기의 어린 아이들도 맞는 주사라는데, 아마도 난포를 키우는 데 필요한 성분이 들었나보다. 그리고 저녁에는 IVFM이란 근육주사를 맞았다. 잘 모르겠지만, 곧 추출할 건강한 난자를 만드는데 필요한 주사였겠지.


   목요일(12월 12일)에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받고 의사 선생님을 만나 얘기를 들었다. 잘 컸으니까 이번 토요일(14일)에 추출을 하자고 했다. 처방전을 보니 주사가 달라졌다. 세트로타이드와 오비드렐. 세트로타이드는 조기배란억제제고 오비드렐은 난포터지는 주사란다. 세트로타이드는 13일 오전에 병원에 가서 맞고, 오비드렐은 시술 전 밤 10시에 꼭 시간 맞춰 맞아야 한다는 중요한 다짐을 받고 밤 10시에 맞았다. 지금까지 처방받은 약제품이 전부 LG생명과학에서 만든 제품이라는 사실을 아내가 넌지시 알려줬지만, 그냥 LG에서 나온 시약들이 아내에게 딱 맞는 제품이라 선생님께서 선택하신 것이라 생각했다. 난 '추적 60분'보다는 '육아일기'를 원하니까. 이날 서울에 엄청나게 눈이 내렸다. 큰맘먹고 택시를 탔는데, 30분 거리를 2시간이 넘도록 도로에 갇혀 있었다. 두눈 부릅 뜬채 하루를 빼았겼다.


   토요일에 시술을 했다. 오전 9시까지 수술실/시술실로 오라 했는데, 주말이라 도로에 차가 없어 30분 일찍 도착했다. 그래도 시술은 정시에 시작했다. 온갖 우울한 표정의, 시술실에 누워 추출을 하고 있을 누군가의 남편들과 대기실에 앉아 영혼 없이 TV를 봤다. 부인들의 이름과 남편들의 이름이 호명되고, 호명된 남편들은 번호표를 뽑고 정자 체취실로 들어갔다. 대기실 구조상 체취실에 들어갔다 나오는 이 남편들과 눈이 마주치게 되는데, 그때 그 마주침은 무언가 민망하고 안쓰러우면서 왠지모를 자괴감도 느끼게 된다. 이 대기실의 구조야말로 던적스럽다고 감히 말할 수 있지 않을까.


   9시에 들어간 아내는 12시가 되어도 나오지 않았다. 수술 현황을 알려주는 모니터에는 대기중, 수술중, 회복중을 알리는 아내들의 이름이 빼곡히 차있었는데, 멍했있던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내 이름밖에 있지 않았다. 무언가 불길한 기분이 느껴질 찰라, 간호사 선생님이 날 부르더니 "아내분 시술이 잘 끝났는데, 배가 아프시다고 해서 진통제 맞고 누워 계세요. 조금 기다리시면 나오실 거예요."라고 말을 했다. 물론 추가로 이런 말도 들었지만. "추가 수납이 있으신데 지금 하시겠어요, 아니면 다음에 오실 때 하시겠어요?"


   수술이란 게 여러 번 받는다고 숙련도나 경험치가 올라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매 수술은 매번 새로운 수술이고, 수술실에 들어갈 때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아내는 1시 즈음에 나왔다. 아무리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마지막으로 임했던 시술이지만, 이러다 진짜로 마지막이 되는 거 아닌가하는 경망스런 생각이 들 때 즈음이었다. 난포가 5개 추출됐다는 말을 듣고, 다음 화요일 8시 30분에 이식하겠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다.


   뼛속까지 시린 새벽바람을 뚫고 수술/시술실에 도착했고 아내는 들어갔다. 이식은 전신마취를 하지 않으니까 조금 편한 마음으로 기다릴 수 있었다. 신문을 읽고 있던 그 때, 나를 부르는 간호사 선생님의 목소리를 들었다. "네, 선생님. ... ○○씨요. 남편 분 앞에 계세요. 입원... 아니요. ... 수술... 네." 간호사 선생님이 전화를 끊고 내게 말했다. "담당 선생님께서 남편분게 말씀드릴 게 있다고...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짧은 순간이었는데, 정말 오만가지 망상들이 내 머릿속에서 지랄발광을 하고 있었다. 누군가 시술실에서 나오더니 나를 부르고 그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아, 이곳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곳인데... 망상의 지랄 지수가 최고조를 향했다. 마음을 가다듬고 들어가니 아내가 가운을 입고 앉아있었다.


   "다섯 개가 다 수정이 됐대요. 처음이지. 이식을 하려고 하는데, 수정이 정말 잘 되어서 한 이틀 더 배양시키자고 하네요. 그게 임신 확률이 더 높대요. 근데, 그럴 경우, 만에 하나 다 죽을 수도 있다고 하네요. 그래서 지금 이식할 지, 이틀 더 배양시켜 그 때 이식할 지, 결정을 하라는데, 난 도저히 모르겠어서. 당신 생각은 어때요?"


   지금 이식이 문제냐. 저 대기실에서 지금 여기 수술실까지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를 걷는 동안 내 안에서는 처절한 아마겟돈을 벌였는데. 아무일 없으면 됐지. 아내와 약간의 대화를 하고, 이틀 후에 이식을 받는 것으로 했다. 기왕에 마지막이라 했으니 조금이라도 확률이 높은 쪽을 택했다. 모두 다 살아남지 못한다 하더라도, 어짜피 그럴 운명이었으면 이식했어도 임신이 안 될테니까.


   아내와 대화를 하면서 간호사 선생님의 저 말을 이야기해주니, 아내가 바로 복원을 해줬다. "네, 선생님. ... ○○씨요. 남편 분 앞에 계세요. 입원(은 안하셨어요.) 아니요. 수술(할지 미룰지요.) 네." 별 말 아니었는데. 얼마전에 다시 본 <올드보이>에서 박철웅(오달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간이 왜 두려움을 느끼는 줄 알아? 상상력 때문이래. 그러니까 너도 상상력을 없애봐. 졸라 용감해질거야."


   아무일 없어서 정말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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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2-19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이 있으시길... ^^

Tomek 2013-12-19 16:21   좋아요 0 | URL
pek0501님~ :)
오늘 잘 이식하고 왔습니다.
고맙습니다. *^^*
 

   오늘 네 번째 시험관시술을 위해 강남 차병원에 다녀왔다. '강남 차병원 불임시술연구소'였던가... 근 1년 6개월이라는 기간에 걸쳐 역삼동에 위치한 병원에 다녔지만, 정확한 명칭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동안 달라진 것이라고는 9호선 공사로 인해 고갯길에 위치해있던 횡단보도가 제 자리로 환원된 것 정도? 그리고는 달라진 게 없다. 우리 부부는 아직 애가 없는, 뭐 그런 것.


   처음 시술을 할 때는 직장에 다니느라 아내가 어떤 시술을 받는지 몰랐었다. 뭐 어쩌다 한 번 나와 포르노를 틀어주는 작고 어두컴컴한 방에 들어가 수정을 위한 정액을 빼는, 그 정도의 수고, 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첫 번째 시술에 실패하고, 두 번째 시술을 했던 올해 초에는 처음부터 함께 다녔다. 그리고 그때 처음 알았다. 시험관 시술이라는 게 정말 힘든 일이었다는 것을.


   우선 난포를 키우기 위해 배란 유도제를 맞았다. 하루에 두 번 -마치 당뇨병 환자처럼- 스스로 배주사를 직접 맞았다. 4일에 한 번씩 병원에 가서 초음파 검사를 받고 난포가 적절하게 커졌으면 난자를 빼내는 수술을 한다. 이 때 한 6개인가 나왔던 것 같다. 하나도 나오지 않는 경우도 있다. 그에 맞춰 남편인 나는 정자를 뽑았고, 그 뽑은 결과물들로 수정을 시켰다. 운이 좋으면 다 수정되는 것이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우리의 경우는 3개가 수정이 됐었다. 4일 후, 3개의 수정란을 자궁에 집어 넣었다. 아내 말로는 마치 실뱀이 기어들어오는 듯한 불유쾌한 경험이었다고 했었다. 수정이 다 되면 세쌍둥이인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나머지는 알려진 바와 같다. 피검사를 통해 임신 사실을 알게 되는데, 결과를 전해주는 간호사 선생의 목소리만으로도 임신 판정을 알 수 있다. 다행히 이 때는 하이톤의 밝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 이후 수정이 되기 위해 무려 6주간 매일 엉덩이 주사를 맞았는데, 나중에는 주사를 맞을 데가 없어서 굉장히 고생했었다. 그래도 병원에 가니 착상됐다고, 임신이라고 했었다. 이렇게도 애가 생기는구나. 가히 현대의학의 개가라 할 수 있구나. 진심으로 즐거워하고 좋아했었다. 그런데 10주차에 계류유산을 했다. 원인불명의 유산. 월급이 통장을 스치듯, 우리 아이도 그렇게 잠시 다녀갔다.


   7월 말에 3차 시술을 했다. 이번엔 그 결과를 아는데 짧았다. 이상하게도, 세 번째 시술 때는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래서 결과가 좋지 않게 나와도 크게 실망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는데, 마음은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거의 무너진 것처럼 살고 있었으니까.


   딱 세 번만 하자고 아내하고 약속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내가 깼다. 그렇게 육체적으로 힘들고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시술인데도, 굳이 한 번 더 하자고 했던 것은, 정부 지원이 세 번에서 네 번으로 바뀐 것도 있었지만(그래도 전체 진료비의 1/3수준이다...), 새로운 식구, 새끼 고양이 '양이'를 들인 것이 큰 이유가 됐다. 그 전까지의 아이가 추상적인 느낌이었다면, 양이를 통해, 이제 아이는 구체성을 띄게 되었다. 그래서 면목없이 아내에게 부탁을 했고, 아내는 고맙게도 이 힘든 일을 받아들였고.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 내 욕심 혹은 내 욕망으로 누군가의 삶을 힘들게 할 줄은 정말로 몰랐었는데... 미안하고 고맙고. 술도 안마셨는데 그냥 복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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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토요일에 친구의 결혼식에 다녀왔다. 이 나이에 아직도 결혼식이라니 조금은 쑥스러운 감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도 안 간 녀석들도 있으니, 40이 넘어서도 결혼식에 가서 사진을 찍을 일은 몇 번 더 남아 있을 것 같다. 결혼한 친구는, 나와는 초등학교 때 굉장히 친하게 지냈지만, 고등학교 졸업 후 왠지 모르게 연락이 멀어진 친구다. 내가 결혼할 때 청첩장도 보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알고 찾아와 축하를 해 준 것에 너무 마음이 쓰였었는데, 이렇게나마 축하를 해줄 기회를 주어서 고맙다고나 할까.


   10여 년 가까이 지내고 20여 년 멀리 지냈으니, 삶의 궤적도 멀어지고 친분을 가져온 친구들도 서로 달라졌다. 그래도 은둔형인 나보다는 쾌활하게 지내서인지, 초중등 동창들의 모습들을 많이 확인할 수 있었다. 세월이 흘렀어도 옛 모습을 간직한 반가운 얼굴들.


   은 한 순간이고, 그 이후는 어떻게 이 자리를 벗어날까 하는 몸부림들의 연속이었다. 그냥 악수 하고 제 갈길가면 그만이지, 뭔 그리 핑계들이 많은지. 예전에 친구라는 이름으로,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용인되었던 무례함들이 불쾌감으로 바뀌는 데는 한순간이었다.


   예전의 기억을 가지고 현재의 모습을 재단하려는 것은 커다란 오류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저지른다. 그게 편하니까. 그러한 오해를 이해라 생각하고, 사람들을 평가하고 끝. 자신의 상황에 비교해 손익분기점을 넘은 사람들만 새로 간직하고 나머지는 버린다. (예전에) 친구라고 불렀던 놈들이 이럴진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도 사람들은 겉모습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눈에 보이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은 관심도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그저 지금의 나에게 이익이 되는지 혹은 손해가 되는지만 파악하려고 하는 마당에, 눈에 보이는 겉모습은 얼마나 중요한가. 


   축하의 자리에 않좋은 소리가 너무 많았다. 친구의 결혼은 진심으로 축하하지만, 그저 추억으로만 간직했으면 좋았을 많은 모습들을 이제는 지워버려야 한다는 사실이 좀 착찹하다. 가끔씩 인간에게도 RESET 버튼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티븐 킹의 『셀』처럼, 아예 뇌를 포맷하는 한이 있더라도. 부팅이 되던 안되던, 포맷 하나는 확실하게 보장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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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 일로 병원을 갔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무심코 창문 밖을 보니, 신경의학, 척추치료, 재활의학 관련 병원들이 엄청 많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사람은 처한 상황에 따라 보이는 게 한정되어 있다고 하지만, 이런 병원들이 이렇게나 많았나 놀랍기도 하다. 포털 광고배너에도 심심찮게 나오는 걸 보면, 그 예전 안동찜닭처럼, 유행타는 대세가 아닐까. 그렇다면 나도 백만년만에 이 최첨단의 유행의 대열에 낀 셈인가?


간만에 헛소리는 유머지만, 너무 자주하면 병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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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녀 2013-08-02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지금은 좀 나았어?? 그나저나 나 비번잊어버려서 로긴도 못하고 핸펀없어서 재발급도 못받고...-_-

Tomek 2013-08-02 14:40   좋아요 0 | URL
다 나은 것 같다. 오래 앉아있지 못해 힘들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힘들지 않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