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회 CinDi영화제 프로그램 및 상영작 (8.17~23)
<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8월 3주

0. 그러니까 이건 작년에 썼던 "제 4회 신디 영화제 ~"의 연장선상 혹은 속편격 되겠다. 

 

1. 작년에는 정말 "멋모르고" 참석해 "정신없이" 영화들을 즐겼었다면, 올해는 작년과는 달리, 좀 더 자유롭게 - 멀찍하니 떨어져서 영화제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작년과 똑같은 장소에서 행해지는 영화제이지만, 이번 영화제는 어떤 "센세이션"이나 "스캔들"이 없는 관계로, 조금 그 열기가 식은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신디의 이번 모토는 "필름과 디지털의 공존(맞나?)"인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에는 "필름" 영화들도 다수 상영한다."디지털"이라는 단어에는 "새로움"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만, 이번 5번째 신디는 그 "새로움"을 잠시 접어두고, "공존"을 모색한다. 이 행보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는 좀 더 두고봐야 할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퇴보/정체"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밀려들기도 한다. 아마도 이것은 이번에 초대된 100편의 영화들이 답해줄 것이다. 

  

2. 알란 자마니 에스마티 감독의 <오리온(The Orion)>은 이란 영화다. 지금까지 내가 봐온 이란 영화는,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자파 파니히 감독의 "동화" 같은, 당대의 현실을 교묘히 피해간 영화들이었다. 그나마 이란의 사회를 직접적으로 표현한 것은 마르얀 사트라피의 『페르세폴리스』정도였을까? 현실에선 손목을 자르고 코를 베어가는 끔찍한 모습이 벌어지지만, 영화에선 짝궁의 공책을 돌려주려는 웃음이 베어나는 아름다운 모습만을 보아온 내게 <오리온>은 묵직한 충격을 전해주었다. 

영화는 여주인공 엘함을 중심으로 진행한다. 처음에 영화는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는다. 엘함은 무슨 수술 때문에 안절부절못하고, 그녀의 애인인 아미르는 "불법" 수술 준비에 분주하다. 하지만, 이웃의 신고로 이들은 체포된다. 

우리의 기준으로는 엘함이 행하려는 수술은 정말 "어이가 없는" 수술이다. 하지만 이 "어이없음"이 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항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제는 이 모든 것들이 "여성들"에게만 피해가 돌아간다는 것이다. 이 사건은 "엘함"과 "아미르" 쌍방간의 합의에 비롯된 일이지만, 그 피해는 고스란히 엘함에게 돌아간다. 아미르는 모든 책임에서 벗어나지만, 그 책임은 엘함의 아버지에게 고스란히 전달된다. 그래서 영화의 마지막 황무지에서의 무시무시한 소동극은 안타깝기 보다는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아미르와 친구들이 "불법 수술" 때문에 구치소에 머물러 있을 때, 한 친구가 이런 말을 한다. "밖을 보기 위해 창문을 만들었는데 왜 그 위에 커튼을 다는 것일까?"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종교가 만들어졌을 것인데, 지금의 이란은 종교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 그로 인해 생기는 이 웃지못할 끔찍한 아이러니들. 이들은 쳐다보지도 못할 창문은 왜 만든 것이었을까? 

8월 21일 14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3. 쉬통 감독의 <풍비박산>은 -감독 본인의 표현에 따르면- <초여름>, <점술가>에 이은 "유민 3부작"으로 그는 연속적으로 중국의 최하층민-농민들의 삶을 그리고 있다.  <풍비박산>의 원제는 탕 씨 노인(老唐頭)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풍비박산"이라는 제목이 훨씬 더 마음에 든다. 그 이유는 탕노인을 중심으로 한 가족들이 모조리 "풍비박산"나는 과정을 찬찬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그냥 그들의 삶을 보여준다. 그들의 삶이 정치적/윤리적으로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어찌됐든 삶을 견뎌내야 한다. 그 안에서 아버지와 자식간에 서로 원수지간이 되어 의절을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그들의 삶의 방법일 뿐, 그것을 윤리적으로 재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영화 중간에 돼지를 도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장면은 굉장히 사실적으로(잔인하게) 찍혔는데, 이상한 것은 이 장면이 굳이 영화의 내러티브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감독은 왜 이 장면을 넣었을까? 어쩌면 우리가 극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은 깔끔하게 도축된 고기를 정육점에서 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영화를 찍는 감독들은, 그 깔끔한 고기를 만들기 위해 돼지를 죽이고 털을 밀고 부위별로 분류하는 고통 아닌 고통을 겪는다. 쉬통 감독은 자신의 다큐멘터리 작업이, 그만큼 고통스러움을 직접적으로 알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것이 사실이라면, 편안한 객석에 앉아 그들의 고통을 음미하는 우리들의 행위는 이 얼마나 끔찍한 것인가! 

8월 22일 13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4. 오영두 감독의 <에일리언 비키니>에 대해 할 말은 많지않다. 아니, 솔직히 많긴 한데 하지 않으련다. 악평은 누구나 쉽게 쓸 수 있지만, 그만큼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내가 지지하지 않는다/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모두에게 그 영화가 엉망일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한 마디 한다면, 이 영화는 "임성한 작가가 <지구를 지켜라>를 썼다면 나올법한" 이야기 구조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진짜 임성한 작가가 썼다면, 훨씬 재미있고 찰지게 썼을 것이다. 지나친 임성한식 정보 나열은 가뜩이나 짧은 영화를 진저리나게 질리게 만든다. 온갖 금기는 다 튀어나오지만, 그저 나열에 그치고 만다. 만약 이 영화가 "무의미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찍은 영화라면, 영화는 100% 그 임무를 완수했다. 하지만, "무의미의 의미"가 "무의미"인 것을 굳이 75분의 시간을 버려가면서 깨달을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저 무의미한 것일 뿐인 것을. 

8월 22일 17시에 한 번 더 상영한다. 

  

4-1. 한마디 더 보탠다면, 원래 일정은 어제 한 편 더 볼 예정이었으나, <에일리언 비키니>를 보고 그냥 집에 와버렸다. 

 

4-2. 한마디 더 보탠다면, 원래 어제 바로 정리할 글이었으나, 이 영화의 충격으로 폭음하고 오늘 아침에야 멍한 정신으로 끼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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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4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 감독의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 6부작을 한꺼번에 봤다. 2부작씩 묶어서 총 3회에 걸쳐 상영했고, 1, 2부 206분, 3, 4부 177분, 5, 6부 189분, 총 9시간 32분의 말 그대로 대작이었다. 아침 10시 30분에 상영을 시작해 밤 9시 50분에 끝났으니, 14일 하루를 온전히 이 영화에 쏟은 셈이다.  

내가 이 영화에 끌린 이유는 단 하나, 긴 상영시간 때문이었다. TV 드라마가 아직 제대로 태동하지 못했던 시기의 "연속극으로서의 영화"를 기대했기 때문이랄까? (그러고 보면 나란 “인간”은 참 단순하다.) 물론 긴 상영시간의 영화는 다수 존재하지만, "거대 자본이 들어간 상업 영화"의 틀 안에서, 에피소드별로 끊는 게 아니라 하나의 호흡으로 길게 꾸려가는 경우는 <반지의 제왕> 3부작을 제외하고는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영화는 지난 "3K 기획전(지금 하는 것은 앙코르다!)"에서 본 <사무라이 반란>이 처음이었다. 액션 활극의 쾌감을 버리고, 봉건 시대의 억압에 맞서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몇 몇 군상들의 처절한 드라마는, 솔직히 지루한 면도 없지 않았으나, 그 울림만큼은 정말 굉장했었다. 시대의 아이러니를 명확하게 파악하고, 그 안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준 감독이, "인간의 조건"이라는 주제 - 이 영화는 고미카와 준페이(五味川純平)의 동명 소설이 원작이다 - 로 어떤 이야기를 할 것인지에 대한 설렘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영화의 내용은, 기나긴 이야기를 단 몇 줄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주인공인 가지(나카다이 타츠야)를 중심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2부) 1943년, 남만주. 식민지를 착취해 부를 이룬 대기업에서 종사하고 있는 가지는 징집을 피하기 위해 부인인 미치코와 함께 광산에 가 군대에 납품할 광물들을 생산하는 일을 맡는다. "인간애"로 똘똘 뭉친 가지는 그곳에서 일본인에게 당하는 중국 노동자들의 생활개선과 동시에 포로로 잡혀온 중국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생활을 찾아주기 위해 노력하지만 일본군과 광산의 다른 간부들과의 갈등으로 이어지고 결국 일본군에 눈 밖에 나 징집을 당한다. (3, 4부) 이등병이 된 가지는 매번 군대의 부조리한 상황에 반항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인간적인 면을 가지고 있는 선임 신조에게 끌린다. 신조의 탈영을 돕다 부상을 당한 가지는 의무대에 입원을 하게 되고 그곳에서 자신과 같은 뜻을 가진 단게 일병을 만나 마음의 위안을 가진다. 퇴원 후, 능력 있는 신지는 상병으로 진급되고 신병들을 훈련하는 직책을 맡는다. 옛 친구인 신임 소대장 가케야마의 도움을 통해 신병들을 자신의 방법대로 인간적인 방법을 통하여 훈련시키게 되지만 이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선임들에게 매번 당하고 지내지만, 가지는 포기하지 않는다. 전쟁이 시작되자 일본군은 대패를 하게 되고 가지는 목숨을 건지기 위해 아군을 죽인다. 그는 살인의 괴로움에 몸부림친다. (5, 6부) 전쟁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가지는 한 무리의 병사들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선다. 집으로 향하는 도중 난민들 무리를 만나며 그들까지 자신의 무리에 받아들여 목적지까지 향한다. 그들은 여행 중 여기저기에 있는 중국군과 소련군들의 공격을 받지만, 가지는 자신을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랑스러운 부인 미치코를 생각하며 힘든 걸음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결국 가지의 무리는 소련군에 잡혀 포로가 된다. 한 때 일본군이었지만 소련 포로수용소 안에서 포로관리인이 된 옛 동료의 억압을 참지 못해 가지는 그를 살해하고 소련 포로수용소를 탈출하여 자신의 고향으로 향한다.  

가지는 이상주의자다. 이 "이상주의(理想主義)"라는 말은 영화 내내 상대에 따라서 "공산주의(共産主義)" 혹은 "사회주의(社會主義)"로 불리기도 한다. 생산량을 극대화하기위해 착취를 일삼는 것이 목표인 식민주의 시대에, 가지는 피지배민들이 인간답게 근무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려고 애쓴다.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도구로 보는 일본인 감독관들에게, 가지의 행동은 자신들의 발목을 잡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처음부터 가지가 “휴머니스트”인 것은 아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 역시 생산량을 극대화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는 세상을 바꾸려하기 보다는, 주어진 세상 속에서 가장 좋은 결과를 도출하려할 뿐이다. 잘못된 세계 안에서 바로 살아가기 위한 몸부림. 하지만, 가지의 행위는 그런 모순율조차 이루지 못한다. 애초에 전제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다 문득 모골이 송연해졌던 순간이 있다. 가지의 “휴머니스트”적인 행동들은 종종 답답함을 불러일으킨다. “저렇게 힘들게 살아서 뭐하나. 그냥 적당히 녹아들지.” 식민지를 경험했던 나라의 국민이 비인간적인 식민정책을 옹호하다니. 인간은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일까? 그 현실이 이렇게도 끔찍할지라도.  

가지의 행위는 인간적이지만, 수용소에 갇혀있는 중국인 포로들은 가지를 믿지 않는다. 한 개인의 “믿음”이 전체 일본인의 “불신”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와 전기가 흐르는 수용소 안에 갇혀 지내면서 하루 종일 일을 하고 저녁에 위안부 여성들에게 짐승처럼 배설을 하며 서서히 동물처럼 길들여지는 이런 생활 속에서 믿음이 생길리는 만무하다. 자유를 갈구하는 피지배민들, 자유를 억압하는 지배자들 사이에서 “인간적인 삶”을 강조하는 가지의 행동은 그 둘 어느 하나도 만족시킬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가지는 인간 자체보다는 인간의 행동을 규정짓는 “시스템”에 집중하게 된다. 하지만 그의 탐색은 중단되고, 그는 징집되어 군대에 간다.  

군대라는 시스템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군대-라기 보다는 내무 생활-의 부조리는 결국 가지의 “휴머니즘”자체를 포기하게 만드는 순간을 보여준다. 개인의 잘못이나 실수가 전체의 책임으로 떠넘겨지는 이 무시무시한 연대의식. 그리고 선임과 후임 사이의 끔찍한 상명하복과 그에 따른 구타. 이들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군대”자체가 없어져야 하고,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지 개인이 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가지는 보통의 인간이라면 포기하고 말았을, 초인적인 의지와 집념으로 조금씩 군대를 바꾸어 나가지만, 그 또한 전쟁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다.  

전쟁은 가지에게 남아있던 조금의 “휴머니즘”조차도 앗아가 버리는 무시무시한 괴물이다. 그는 살기 위해 적을 죽이고, 심지어 전우를 죽인다. 하지만, 가지는 이런 끔찍한 상황 속에서 적응해나간다. 전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살인은 피할 수 없다. 전쟁이란 (내가) 죽거나 (상대를) 죽여야 하기 때문이다. 전쟁은 인간이 만들어낸 그 모든 것 중, 인간성을 말살하는 가장 끔찍한 “시스템”이다. 전쟁 안에서 “인간”에 대한 물음은 무의미하다.  

하지만, 시스템이 인간을 규정하지만 결국 그 시스템 또한 인간이 만든 것임을 가지는 포로수용소에서 깨닫는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동료를 억압하는, 옛 동료였던 포로 관리인을 살인한다. 그의 휴머니즘은 먼 길을 경유해 전혀 다른 지점에 도착했다. 결국 시스템을 만드는 것도,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도 모두 “인간”이다. 그리고 그런 인간을 규정짓는 조건은 “이기심”과 “이타심”이다. “이타심”을 “휴머니즘” 또는 “사랑”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이런 것들이 있어야 “믿음”이 생겨나는 것이고, 그것을 바탕으로 “인간다운 삶”을 꾸려나갈 수 있을 테니까. 가지가 자신의 휴머니즘을 버리고 “의도적인” 살인을 행한 것은, 그 포로 관리인에게선 “이기심”은 있어도 “이타심”은 발견할 수 없어서가 아니었을까? 그 살인으로, 가지 역시 부처나 예수가 아닌, 불완전한 “인간”임을 증명한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들어낸 불완전한 시스템 안에서, 모두가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선 “상대방을 이해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하지만, 인간은 얼마나 이기적인가! 그 이기심이 결국 “휴머니즘”의 포기를 부른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는 2.35:1 시네마스코프 비율에 흑백이다. 언어는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가 상황과 배우에 맞게 적절하게 나와 현실성을 배가시켜준다. 단 하나 아쉬웠던 점은, 음악의 사용이다. 당시의 대작 할리우드 영화들처럼, 감성에 치우친 "좀 뻔한" 음악들의 사용은 이 영화의 유일한 "옥에 티"랄까. 하지만, “인간”과 “시스템”에 대한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으로도 <인간의 조건>은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체험”이었다. 10여 시간의 상영 시간은 몸이 피로했을망정,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이런 위대한 작가를 이제야 만나게 된 것을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것을 위안으로 삼아야 할지 복잡한 심정이다. 영화는 길긴 했지만, 한 휴머니스트가 “인간”과 “시스템”으로 어떻게 부서지는지를 “체험”하기 위해선 이 정도의 시간은 필요했다고 본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 나아가려고 했던 가지의 모습이 환영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그는 무엇으로 불리길 원했을까? 이상주의자, 휴머니스트, 빨갱이, 사회주의자... 그 어떤 단어로도 그를 규정지을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런 단어들 조차 인간들이 "분류"를 위해 편의적으로 만들어낸 허상에 불과하니까. 만약, 인간이 만들어낸 단어 중 하나로 그를 규정해야 한다면, "인간" 이외의 단어를 찾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PS:

피디엔터테인먼트에서 출시한, 그리고 지금 알라딘에서도 팔고 있는 <인간의 조건>DVD는, 정말 뻔뻔하게도 크라이테리언의 DVD를 그대로 복사한 제품이다. 제작한지 50년이 지나 판권이 풀린 영화이지만, 이 DVD는 누군가가 힘들게 작업한 것을 그대로 훔쳐온 것이다. 책으로 따지자면, 김화영 교수가 번역한 알베르 카뮈의 작품들을 그대로 복사해 다른 출판사에서 출판한 경우와 같다. 최소한의 상도의를 지키지 않은 이런 행위는 명백한 범죄행위다. 절대 동조하시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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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11-08-17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대작을 보셨군요.대단합니다.소설의 마지막은 가지가 죽는데 영화는 다르군요.소설로 인상깊게 읽었습니다.저희 아버지 세대들이 많이 읽고 감동했다고 하죠.이젠 서점에서도 잘 안 팔린다는데...
저도 시간 내서 감상하고 싶군요.

Tomek 2011-08-17 18:18   좋아요 0 | URL
아, 영화에서도 가지는 죽습니다. 나름 스포일러라 피해보려고 두리뭉실하게 쓴 게 의미가 모호해진 것 같네요. 눈 덮인 길에서 쓰러지는데, 발은 계속 나아가려고 꿈틀꿈틀 거리는 장면이 잊혀지질 않습니다.
영화를 보니까 소설도 관심이 생기는데, 소설은 절판이라 이젠 구할수도 없네요. 영화가 소설을 뛰어넘을 수는 없지만, 몇 몇 장면에서는 영화가 소설을 뛰어넘는다고 하니 한 번 확인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D

노이에자이트 2011-08-18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러면 소설과 마지막 장면이 동일합니다.소설에선 죽은 가지 위로 눈이 계속 쌓이는 장면을 아주 간결하게 묘사합니다.그러면서 끝...

가끔 새책방에도 10여년 전에 나온 <인간의 조건>이 다른 제목으로 나와있으니 한번 찾아보십시오.

카스피 2011-08-18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조건이라 저도 헌책방에서 이 책을 봤던 기억이 나네요.

노이에자이트 2011-08-18 22:50   좋아요 0 | URL
앙드레 말로의 인간의 조건은 서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죠.그러고 보니 이 소설도 중국이 배경입니다.
 

8월 5일과 6일, 이틀에 걸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세 편의 영화를 봤다. 세 편 모두 블루레이로 상영했고, 지금 구입할 수 있는 영화들이다. 그 중 두 편은 상영 당시에 극장에서 보고, 그 감동을 잊지 못해 DVD를 구입해서 반복 감상한 영화들이다. 이미 본 영화를, 그것도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다시 꺼내 볼 수 있는 영화를, 굳이 발품을 팔아가며 다시 스크린에서 본 이유는, 내가 혹시 이 영화들에게 속은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마음이 의심하기 시작하면 사랑은 떠나간다. 에로스가 프쉬케에게 했던 말이다. 떠나간 사랑을 다시 찾기 위해서 프쉬케는 고난을 감수했다. 나 역시 프쉬케의 절박한 심정으로 이 영화들을 다시 마주보았다. 그 절박한 영화들은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of the Spotless Mind)>과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Memories of Matsuko, 嫌われ松子の一生)>이다.  

 

미셸 공드리(Michel Gondry) 감독의 <이터널 선샤인>은 처음 봤을 때, 느낌이 제대로 오지 않은 영화였었다. 그렇게 어렵지 않은 이야기를 영화는 비비 꼬아 정신을 못 차리게 하더니, 주인공 조엘(집 캐리)의 “두뇌 탐사”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을 보고, 각본을 쓴 찰리 카우프만(Charlie Kaufman)도 이제 매너리즘에 빠지는구나 하는 탄식을 하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이 영화를 보고 났을 때,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쨍”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마치 영화의 제목처럼, 티끌하나 없는, 청명한 마음에 비친 영원한 햇빛처럼.  

하지만, DVD로 다시 봤을 때, 불행히도, 전반부의 혼란함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영화의 마지막, 그 쨍한 느낌은 많이 희석되어 있었다. 어쩌면, 내가 그때 느꼈던 감정들은 미셸 공드리의 현란한 연출과 벡의 환상적인 주제가 때문일 거라는 단정을 서둘러 지으며, 이 영화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렸다.  

8월 5일, 6년 만에 스크린에서 다시 마주한 이 영화는, 날 진심으로 펑펑 울리게 했다. 이 영화에 대한 내 태도가 변한 이유는 아마도 사랑을 "경험"해서가 아닐까. 그냥 머릿속에서만 맴도는 사랑에 대한 막연한 감정, 그리고 사랑이라 믿었던 감정들이 사랑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고, 헤어짐, 만남, 결혼을 경험하고, 불타올랐던 뜨거웠던 감정과, 점점 식어가는, 그리고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경험을 해가는,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한 사람에 대한 기억을 지워버린다고 해서 그 사람과 함께 했던 "몸의 반응"마저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사랑이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니까. 제 아무리 지루하고 끔찍한 시간을 보내더라도, 결국 모든 감각이 사랑을 기억할 것이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의 경우처럼, 기억을 지워버려도 서로에게 끌려 다시 시작하는, 그래서 또 다시 그 지독한 열병을 앓고, 또 서로의 기억을 지워버린다 할지라도, 그렇게 다시 사랑은 시작될 것이다. 그게 사랑 아닐까?  

 

     

반면, 6일에 본 나카시마 데츠야(中島哲也) 감독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은, 영화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하게 했다. 제목은 신파로 보이고, 포스터는 코미디처럼 보이는 이 종잡을 수 없는 영화를 아무런 사전정보 없이 봤을 때의 충격은 정말로 "강렬"했다. 쉴 새 없이 들이붓는 강렬한 음악, 화려하다 못해 과장된 색감, 끝없이 흘러나오는 내레이션, 급작스런 화면 전개로 정말 울면서 웃게 만드는(!) 이 기막힌 영화의 출현은 정말로 굉장했었다. 그런데 DVD로 다시 봤을 때는, 그 굉장했던 느낌들이 조금 사라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스크린에서 다시 확인했을 때, DVD에서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던 "굉장했던" 그 느낌들마저 모두 휘발되어 버린 것을 느꼈다. 내가 굉장했다고 느꼈었던,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영화적 장치-스타일들은, 이미 영화에 익숙해진 내게 더 이상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못했고, 오히려 내러티브를 방해하는 과잉의 요소로까지 느껴지게 되었다. 감독 특유의 과잉이 사라지고 나니까, 남는 것은 정말이지 "지독한 신파 멜로 여인 잔혹극"이었다. 그저 사랑을 원했던 마츠코(나카타니 미키)를 온갖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착취하는 이야기를 난 "쿨"하다며 봤던 것이다.   

 

    

그 뒤에 상영한 <고백(告白)> 또한 마찬가지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과잉의 스타일을 쏟아내며 끔찍한 이야기를 한다. 딸을 잃은 여교사 유코(마츠 다카코)가 종업식에서, 자신의 딸을 죽인 범인이 이 반 안에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철저하게" 복수를 하는 이야기를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시청각적으로 관객들을 붙잡고 이야기에 몰입하게 한다.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나, <고백> 모두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을 수 있는 내용들이다. 아마도 다른 감독들이 이 영화를 찍었더라면, <마츠코>는 <영자의 전성시대> 같이 한 여자의 일생을 그 사회의 알레고리로 담은 영화가 나왔을 것이고 <고백> 역시 청소년 보호법이나 이지메 같은 거대 담론들을 다룰 수 있는 영화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이 이야기들을 철저하게 개인의 이야기로만 다루었다. 일례로 <고백>에서는 끔찍하게 이지메를 당하는 학생이 나온다. 그리고 자신의 학생 중 한 명이 살인자에게 끔찍하게 살해당하지만, 담임인 유코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그녀는 오로지 자신이 짜놓은 이 끔찍한 지옥에 범인들이 걸려들기만을 바란다.  

영화는 과도한 스타일로 보는 것 자체가 피곤할 지경이다. 특히 <고백>의 스타일은 지나칠 정도로 과잉이라고 생각되는데, 사람을 죽이는 장면조차 "감각적으로" 찍는 장면에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게 만들 지경이었다. 마치 그는 단 한 장면이라도 관객들의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영화를 붙들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도대체 나카시마 데츠야 감독은 왜 이런 식으로 영화를 찍는 것일까?  

어쩌면, 그는 이 시대의 관객들을 더 이상 믿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0세기까지는, 적어도 영화는 최고의 오락거리였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서, 영화는 수많은 오락거리 중 하나에 불과해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한탄해봤자, 대중의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다. 소위 "작가주의 영화"들은 재미없는 영화, 지루한 영화, 철저하게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는 일방통행의 영화로 구분되어지기 시작했고, 고립되어 갔다. 대중 영화는 자신만의 비전은 고사하고, 대중의 입맛에 맞추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만의 이야기를 하려는 감독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할까?  

그의 과잉의 스타일은 이런 까다로운 관객들을 끌어들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하다. 하지만, 과연 이런 과잉이 그런 지독한 이야기들에 어울리는 것일까? 어떤 카타르시스도 없고, 그저 끔찍한 지옥도를 보여주는 이 잔인한 감독에게 신은 너무 많은 재능을 준 게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의 영화는 정말로 굉장하다. 하지만, 그게 올바른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프쉬케는 결국 모든 고난을 극복하고 에로스와 결혼을 한다. 둘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 볼룹투스라 지었다. 사랑(에로스)이 마음(프쉬케)안에 깃드니 쾌락(볼룹투스)이 생긴다. 영화에 대한 내 사랑은 "절박한" 쾌락이었나?  

그게 아니면, 혼돈을 불안해하며 무언가로 규정 짓고 싶어하는 하나마나 한 행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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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드디어 그렇게도 보고 싶어했던 인도영화 <로봇(எந்திரன்)>을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봤다. 인도 영화는, 거의 처음인 내게, 작년에 만들어져 엄청난 화제를 뿌린 이 최신 대중 영화를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말 궁금했었다.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로봇>은 스즈키 세이준(鈴木清順), 미이케 다카시(三池崇史), 남기남, 심형래 감독 등의 작품들을 "애교" 수준으로 여기게 할 정도로 인간의 상상력(혹은 통속성)을 정말 끝까지 밀어 붙인 영화다. 그리고 나(를 비롯한 <로봇>을 보러 온 그 수많은 관객들 모두) 역시 이 말도 안 되는 영화를 진심으로 즐겼다.  

<로봇>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천재 과학자 바시 박사(라즈니칸뜨)는 자신의 모습을 본딴 안드로이드 치티(라즈니칸뜨의 1인 2X수백역!)를 발명한다. 치티는 인간의 능력 이상의 실력을 발휘하지만 거짓말을 못하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군대 납품을 위해) 바시 박사는 치티에게 인간의 감정을 시물레이션 할 수 있는 능력을 (하늘의 도움을 받아) 개발하게 되고, 마침내 치티는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된다(그리고 필요에 따라 거짓말을 할 수도 있게 됐다). 그러나 치티가 바시 박사의 애인인 사나(아이쉬와라야 라이)를 사랑하게 되면서, 그리고 바시 박사의 스승인 보라 박사(다니 덴종파)의 시기와 음모로, 치티는 파멸을 불러일으키는 병기가 된다.  

무척 짧게 요약했지만, 전체적인 이야기는 너무나 익숙하다. 『프랑켄슈타인』 이야기를 기본으로 삼고 , <터미네이터 2>, <블레이드 러너>, <공각기동대>, <아이 로봇> 같은 심오한 기계-자아 성찰 이야기가 양념으로 뿌려졌다. 영화의 주제 또한 이 영화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즉, 뻔한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데 <로봇>은 이 뻔한 이야기를 조금 다르게 한다. 그것은 종교적인 관점이다.  

영화의 시작은 개발 중인 치티의 모습과 인도 영화답게 "노래"로 시작한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노래는 로봇을 "하늘에서 내려온 새로운 인류(혹은 신)"로 찬양하고 있다. 사나와의 에피소드에서, 치티가 모든 철붙이를 끌어모으고 그것들을 재분류하자 종교 의식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그를 신으로 여기고 의식을 행한다. 그리고 화재 현장에서 치티는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는 구원의 신이자, 동시에 (의도적이진 않았지만) 사람의 목숨을 거두는 파멸의 신이기도 하다. 치티에게 인간의 감정을 "학습"시키기 위해 바시 박사가 도서관에서 꺼낸 책 중 한 권은 『리그 베다』다. 그리고 치티는 (섹스 없이) 여자를 임신 시킬 수도 있고, 영원히 살 수 있다. 그는 새로운 인류라기 보다는 신에 가깝다. 이런 치티가 신으로 여기는 존재는 자신을 창조한 바시 박사다. 안드로이드 개발 세미나에서 "신은 존재하나?"라는 한 사람의 질문을 받자, 치티는 "신이란 무엇인가?"라고 되묻는다. 질문자가 "신은 모든 것을 창조하는 존재"라고 대답하자, 치티는 "나를 창조한 것은 바시 박사다. 그렇다면 내게는 그가 신이다"라고 대답한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바시는 치티를 제거하려고 하고, 치티는 바시 박사를 죽이려 한다. 이 두 신의 전쟁은 마치 『바가바드 기타』의 내용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문화권의 차이로 같은 이야기가 전혀 다르게 느껴지게 된다.  

치티가 인간의 모습(불완전한 모습)을 보일 때는 인간의 감정을 갖게 된 후, 정확히 표현하자면,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된 후다. 치티의 사랑은 욕망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결국 그는 파멸의 신이 되고 만다. 불편한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여자(사나)" 때문에 벌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바시 박사의 애인인) 사나는 이 영화에서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내는 캐릭터인데, 그녀가 무슨 행동을 하기만 하면, "남성"들은 모두 폭력적이 된다. 영화 중 가장 섬뜩했던 장면. 바시 박사가 치티 때문에 계속 고민을 하자, 사나가 "계속 이렇게 굴면 제일 먼저 지나가는 남자와 사귈 것"이라 얘기를 한다. 바로 그 때, 순박하게 생긴 한 지저분한 남자(감독인 S. 샹카르!)가 지나가자 사나는 그에게 다가가 하루 동안 남자 친구가 되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그 사내는 진심으로 기뻐하고 사나를 대접하지만, 수준이 맞지 않아, 그녀는 이 재미없는 놀이를 중단하고 바시에게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자, 그 순진했던 사내가 갑자기 폭력적으로 변하고 심지어는 칼(이라기 보다는 낫!)까지 빼든다. 순박한 사람이 단숨에 난봉꾼이자 폭력배로 될 수 있는 것은 여자 때문이니, 특히 여자는 행실을 똑바로 하라는 것 같은, 불편한 메시지가 느껴지는 것은 나만 그런 것일까? 이것은 감독 특유의 여성관인지, 아니면 인도 문화의 무의식적인 단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둘 다 맞는 것 같은 느낌도 든다. 왜냐하면 인도 영화에서의 검열은 키스신을 비롯, 여성(혹은 남성)의 나체(심지어 가슴조차도)는 철저히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뭐 이런 저런 심각한 이야기를 했지만, 영화는 전혀 심각하지 않다. <로봇>은 영화라기 보다는 왠지 "축제"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 이유는 끊임없이 계속되는 뮤지컬 장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로봇>의 뮤지컬은 다른 영화들의 뮤지컬과는 조금 다른데, 일반 뮤지컬 영화의 음악이 내러티브를 드러낸다면, <로봇>의 뮤지컬은 하나의 챕터가 정리될 때 마다 나온다. 즉 어떤 이야기가 시작되고, 그 이야기가 마무리되면, 다른 이야기로 넘어가기 전에 "브릿지 형식"으로 뮤지컬이 등장하는 것이다. 다른 인도영화도 이런지는 잘 모르겠으나, 이 뮤지컬 장면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중시하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좀 뜬금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장면 자체만으로 굉장한 엔터테인먼트를 보여준다. 특히나 노래 가사들이 거의 쓰러지게 만드는데,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인가 / 아이작 뉴턴의 작품인가" 뭐 이런 기상천외한 라임은 귀여운 수준이고 "당신은 식인종 / 나를 잡아 먹어요 / 뼈까지 씹어 먹어요" 이런 가사를 들으면, 점점 정신이 풀리기 시작하기 마련이다.  

특수 효과를 뺄 수 없는데, 아쉽게도 인도 자체의 기술은 아니고, 할리우드의 스탠 윈스턴 스튜디오가 참여했다고 한다. 다시 한 번 느끼는 것이지만, 영화에서 특수효과의 주체가 누구인지 보다는, 그 특수효과를 포장하는 그 상상력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후반부 로봇들이 벌이는 클라이맥스는 정말 입이 딱 벌어질만 하며, 그 놀라운 상상력에 경탄을 넘어서 경배를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나는 살아 생전에 모기와 로봇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이 영화를 생각하다 보니,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영화가 한 편 있었던 것 같다. 춤과 노래, 그리고 말도 안 돼는 상상력으로 버무려진, (네이버 영화 사상) 가장 끔찍한 평점의 영화. 바로 이재용 감독의 <다세포 소녀>다.   

<다세포 소녀>는 개봉한지 5년이 지난, 그래서 B급 달궁의 무시무시한 원작의 흥취가 조금은 옅어진, 지금 보더라도 너무나 덜컥 거리는 장면이 많다. 말도 안 돼는 개그 작렬에, 엉뚱하게 수습되고 봉합되는 장면들, 그리고 중심 없는 내러티브와 장르의 쉴 새 없는 전환, 간간히 등장하는 뮤지컬 넘버까지, 이 영화는 당장 타밀어나 벵갈어로 더빙해서 인도에 개봉하면, 아마도 인도 영화라고 생각할 정도로 인도 영화의 그 정신 없는 전개와 너무나 쏙 빼 닮았다. 어쩌면 이재용 감독은 자신이 그동안 침잠했던 "개인과의 관계에만 집착하는, 서로간에 상처만 입히는" 지긋지긋한 연애(담)에서 벗어나, 그 모든 것을 감쌀 수 있고 모두들 즐길 수 있는 "축제" 같은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영국 워킹 타이틀에서 제안한 <오만과 편견>을 거부하고, 자신의 커리어에 불명예가 될 수도 있는(아, 실제로 그리 됐지만...) <다세포 소녀>를 택했던 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었을까?   실제로 <다세포 소녀> 이후 이재용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유사) 다큐멘터리들로 채워져 있다. 그는 다시는 가공된 연애담의 세계로 들어갈 마음이 없는 것일까?

<로봇>은 또 내게 다른 것을 생각할 기회를 줬다. 올 6월, 동생 결혼식에 참석하러 인도 첸나이에 가게 됐는데, 그곳 지방의 언어가 타밀어이고, <로봇>이 첸나이에서 주 로케이션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드디어 어쩌면, <로봇>을 볼/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그래서 염치불구하고 결혼식의 바쁜 일정 속에 (감히) 매제에게 <로봇> DVD를 구할 수 없겠냐는 부탁을 했다. 그러자 매제는 "왜 그런 영화를 보려고 하는가? (인도 영화 중 특히) 그 영화는 쓰레기"라며, 나중에 자신이 더 좋은 영화를 선물하겠다며 나를 말렸다 (그렇게해서 받은 선물이 "사티야지트 레이 컬렉션"이다).  

그 나라의 대중 영화와 세계에서 인정을 받는 그 나라 감독의 영화의 갭은 굉장한 차이가 있다. 사티야지트 레이 감독의 작품과 <로봇>의 느낌은 정말로 천지차이다. 사티야지트 레이 감독의 작품은 인도 영화인 동시에 인도 영화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그 영화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 든다. 같은 예로, 한국의 대중 영화와 임권택, 이창동, 홍상수, 김기덕의 작품들 역시 그 자체로 "따로" 존재하는 느낌이 든다. 솔직히 나도, 매제한테 한국 영화를 권했을 때 (<헬로우 고스트>가 아니라)  <시>를 권했다. 그가 본 한국 영화 중 괜찮은 영화를 언급할 때 <쉬리>를 이야기하면, 반가움 보다는 이유 모를 탄식이 든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문화적인 자존심 혹은 스노브인지도 모르겠다. 대중 영화가 (여러 면에서, 꼭 수준이 아니라) 한심한 경우가 많지만, 그 자체가 지금 우리 시대의 모습(혹은 욕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난 (대중) 영화에 대한 태도를 <로봇>이라는 인도 (대중) 영화를 통해, 저 멀리 돌아서 찾은 것이다. 그 어떤 영화도 편견을 갖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 이 대답이 <로봇>이 내게 전한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이 영화를 만나지 않고 지금에서야 만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때 이 영화를  DVD로 샀으면, 영어 자막의 어설픈 이해와 이 영화의 축제 같은 느낌을 결코 얻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역시 영화는 큰 화면에 다같이 모여서 즐겨야 한다. 그리고 <로봇>은 그 목적에 너무나도 잘 맞는 궁극의 엔터테인먼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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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8일과 9일 이틀에 걸쳐 세 편의 영화(또는 한 편의 필름과 두 편의 블루레이)를 봤다. 어떤 영화는 정말 놀라운 경험을, 어떤 영화는 딱 기대한 만큼의 감흥을 가져다 주었다. 물론 그것은 영화 자체의 힘도 있지만, 아마도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내 태도도 어느 정도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 세 편의 영화 모두 한국영상자료원(KOFA)에서 보았는데, 그 중 한 편은 (아직) 필름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있고, 다른 두 편은 이달에 블루레이로 출시될 예정이다.  

 

7월 8일 19시에 본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 감독의 <사무라이 반란(上意討ち 拝領妻始末)>은 내가 기대했던 영화가 전혀 아니었다. 내가 이 영화를 택한 이유는, 미후네 도시로와 나카다이 다쓰야가 <요짐보>와 <스바키 산주로> 이후로 다시 만나 진검승부를 펼친다는 것과, 정말 "죽여주는" 제목 때문이었다(사무라이만으로도 헐떡거리게 하는데, 게다가 반란이라니!). 딱 이 두가지 설정만으로도 엄청난 사무라이-액션 활극이 머릿속에서 만들어지지 않나? 그런데 그 결과물은 의외였다.  

영화는, 물론 액션 장면이 나오긴 하지만, 운동-이미지에 집중하지 않고 봉건 시대의 부조리함을 다루고 있다. 에도 시대. 영주의 첩인 이치는 아들을 낳은 후 성에서 쫓겨나 사사하라 가문의 큰아들과 강제로 결혼하게 된다. 세월이 흘러 이치의 아들이 영주의 후계자가 되자 성에서는 생모인 이치를 다시 데려가려 하고, 사사하라 이사부로는 영주의 불합리한 처사에 분노해 아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다.  

영화는 일본영화답게 시종일관 조용하게 진행한다. 그러나 그 조용함 속에서 계속 부조리한 명령이 내려온다. 사무라이의 미덕, 가문의 미덕, 체면의 미덕, 거기에 생존의 욕망!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은 더운물에 개구리를 삶아 죽이는 것처럼, 아주 조금씩, 천천히 이 부조리함을 잔인하게 드러낸다. 이 논쟁에 서 있는 가련한 인물인 이치는 매번 잔인한 질문 앞에 내던져지고, 결국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된다. 영화의 거의 모든 인물들은 이 부조리함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 이유는, 자기 일이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에도 시대의 이 부조리한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들은 인간이 아니라, 그저 (<매트릭스>의 프로그램들처럼) 시스템의 일부이다. 이 부당함에 대항하는 것은 이치(츠가사 요코)와 그녀의 시아버지인 이사부로(미후네 도시로), 남편인 요고로(가토 고)다. 이들은 부조리한 시스템 속에서 분노를 느낀다. 시스템은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하지만, 인간은 시스템이 아니다. 부당함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이 마땅히 인간의 행동이다. 이들은 시스템에 저항함으로서, 봉건제를 유지하기 위한 수많은 미덕들이 실은 허상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것은 인간이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결국 <사무라이 반란>은 패배에 관한 이야기이다. 개인이 시스템을 거역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의 패배는 <매트릭스>의 한 프로그램처럼 제 할일만을 하고 있는 한 인간을 흔들어 놓았다. 부당함에 분노하고 저항하는 것! 그게 인간이다.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은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잊어버린 이 낡은 명제를 2011년에 다시 꺼내 놓았다. 이 영화를 볼 것인지 그냥 지나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또 다시 마지막으로 <매트릭스>를 언급하자면, 빨간약을 고를 것인지 파란약을 고를 것인지 선택하는 것과 같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건 당신 몫이다.  

 

 

다음날, 7월 9일 13시 30분에 본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 대해 할 말은 그리 많지 않다. 이미 블로그에도 이 영화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기도 하고(http://blog.aladin.co.kr/tomek/3553158), 또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이 그 때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 번 더 반복한다면, 영화의 이야기나 캐릭터 보다는, 영화 표피 그 자체에 파고드는 김지운 감독의 특성상, 이 영화는 아마도 그의 최고작으로 남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무언가를 다루려고 하지만, 그 무언가 대신 스타일에 집중하게 되어, 영화를 보고 나면 공허하다는 느낌이 들기 마련인데, <달콤한 인생>은 바로 그 공허함을 다루기 때문에, 그의 주제의식과 스타일이 일치하는 흔치 않은 경우다.  

이 영화가 개봉한 게 2005년 4월 즈음으로 기억하는데, 그 때부터 지금까지 (정말 다양한 매체로, 그리고 본의 아니게) 한 10번은 넘게 본 것 같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영화를 보다 별 헛생각까지 들게 되었는데, 어쩌면 <달콤한 인생>은 게이 커뮤니티 안에서 이성에게 성욕을 느낀 한 게이의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에서 제대로 된 여자 캐릭터는 희수(신민아) 혼자만, 그것도 잠깐, 나올 뿐이고, 선우(이병헌)가 그녀에게 반응하고, 기억하는 모습도 순 페티쉬적인 모습(머리카락을 귀로 넘기는 모습/하얀 목덜미)이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발단이 된 선우와 강사장(김영철)과의 대립도 (둘 사이의 관계를 방해하는) 여자 때문에 생긴 질투 때문이 아닌가! ... 더 이상 영화가 산으로 가기 전에 다음 단락으로 빨리 넘어가야 겠다.   

 

같은날 16시에 본 (또,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는 인터내셔널 버전이었다. 한국 개봉판과 달리, 인터내셔널 버전은 심의에서 문제가 됐던 '조금 잔인한' 장면들이 추가가 된 반면, 기존에 있던 두 씬이 삭제가 되었다. 하나는 장경철(최민식)과 태주의 애인(김인서)이 기이한 팬션에서 벌이는 "개 같은 정사"씬이고, 다른 하나는 오과장(천호진)의 딸이 밤중에 공부한다고 나가는 씬이다. 이 두 씬은, 내가 영화를 보면서 불필요(혹은 불쾌)하다고 느꼈던 장면들이었는데, 이유는 이렇다. 전자는 오로지 장경철을 위한 장면이었다. 그는 성욕을 해결하기 위해 여고생을 강간하려고 했고, 여간호사를 강간하려고 했다. 하지만, 거의 성공할려는 차에 수현(이병헌)이 방해(?)를 하는 통에 그의 욕구는 배설되지 못하고 멈춰 있는 상태다. 김지운 감독은 그의 영화에서 아무리 용서할 수 없는 캐릭터라도, 한 번쯤은 그 캐릭터를 동정하게 만드는 장면을 넣는데, 삭제된 정사씬은 그런 의도도 어느 정도 있었으리라 본다. 하지만, 관객이 장경철을 응원(?)하는 장면은 앞에도 이미 있었다. 택시 강도들과의 대결과 무례하게 반말을 내뱉는 한의사와의 맞대응은 아마도 이 영화에서 장경철의 유일한 순기능(?)이 아니었을까? 장경철을 심정적으로 동조하게 만드는 이런 일련의 장면들이 아마도 이 영화를 모호하게 받아들이는데 일조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 장면의 삭제는 "악에 대한 동정"이라는 모호함을 덜어준다.  

그에 반해 후자는 아마도 김지운 감독이 이 영화에서 야심을 품었을만한 장면이었을 것이다. 오과장의 딸이 무방비 상태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장면은, 지금은 아니더라도 그 언젠가, 그 누구라도 이 끔직한 범죄의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장경철이라는 개별적 악과, 그 악에 대응하다 결국 괴물이 되어 버린 수현의 이야기가 "세상의 악"을 다루는 거대담론이 되는 순간이다. 거대담론을 다루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러니까 영화가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영화는 지루해지고 유치해지기 시작한다.   

이 두 장면이 없어지자, 영화는 장경철과 수현의 이야기에 더 집중됐고, 현실의 이야기라기 보다는 보다 장르적으로 읽혔다. 영화의 마지막, 수현의 울음/절규도 더 절절하게 다가왔고. 내가 이 영화에 그렇게 불쾌했던 까닭은, 현실을 다루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장르물도 아닌 영화의 이상한 스탠스 때문이 아니었을까.  

영화가 끝나고 김지운 감독과의 대화 시간이 주어졌다. 겉보기에는 자만심 가득하고 허세 작렬하는 이미지였던데 반해, 그 속은 오히려 너무나도 사려깊고 친절한 사람이었던 모습에 깜짝 놀랐다. 좋게 말하면 사변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이야기에 중심이 없다는 것? 어쩌면 그는 자신의 모습조차도 영화를 닮았나!  

 

그렇게 새로움과 익숙함 사이에서, 그렇게 또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그게 내가 시간을 쏟아가며 영화를 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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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트 2011-07-19 0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한동안 뜸하신 것 같더니 다시 서재 활동 하시는군요. 저는 거의 안하고 있습니다^^, 김지운의 <악마를 보았다>는 생각보다는 좋더군요. 왜 그런지에 대해선 나중에 정리해 봐야 겠습니다. 한가지 여쭤볼게요. 최근 시드니 루멧 감독에 대한 관심이 (뒤늦게) 생겼는데요, 그의 옛날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요?

Tomek 2011-07-19 09:1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간 많은 일들이 있어서 한동안 서재를 잠시 접고 있었거든요. 그냥 조용히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끼적이고 있습니다. <악마를 보았다>보면서 남재홍님 소설 많이 생각 났어요. 지존파 이야기와 관련이 있어서 그랬나? 정리글 기대하겠습니다. :D
시드리 루멧 작품은 DVD아니면, KOFA나 시네마데크 프로그램을 기다릴 수 밖에 없는 것 같아요. 별로 도움이 못 돼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