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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WIN PEAKS>
               (시즌  1)    
               에피소드  Pilot (1)
               타이틀  Pilot / Northwest Passage
               각본  Mark Frost & David Lynch
               감독  David Lynch 
               방영일  1990년 4월 8일
  

 

 

1. 시작 - 여신의 침 한 방울

   영화감독 데이빗 린치(David Lynch)는 엄청난 제작비가 소요된 SF 대작 <듄(Dune)>이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망하는 바람에 그의 영화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이했으나, 그만의 독특한 '비전'과 '감수성'이 들어간 <블루 벨벳(Blue Velvet)>의 성공으로 '화려하게' 재기할 수 있었다. 그로인해 그는 워너 브라더스로부터 흥미로운 프로젝트를 제안 받았는데, 그것은 바로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에 관한 베스트 셀러 소설 <여신(Goddess)>을 영화로 찍는 것이었다. 미모의 금발여자, 미스터리한 죽음, 그리고 그녀를 둘러싼 남자들의 이야기라는 설정은 데이빗에게 '흥미를 유발'시켰기에 그는 이 제안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대중적인 이야기를 뽑아 내는데 한계가 있음을 알기에, 같이 이야기를 만들 작가를 원했고, 데이빗의 에이전트인 토니 크랜츠(Tony Krantz)는 그런 그에게 마크 프로스트(Mark Frost)를 소개해 줬다. 만나보니 둘은 의외로 죽이 잘 맞았고, 그들은 마릴린 먼로에 대한 시나리오를 완성했다.

 

마크 프로스트. 1953년 미국 태생. 소설가, 시나리오 작가, 제작자, 감독 등 다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데이빗 린치와 만나게 된 계기는, 그가 당시 인기를 끈 TV 드라마 <힐 스트리트 블루스(Hill Street Blues)> 다섯 번째 시즌의 각본을 썼으며, 그 중 한 에피소드를 '감독'하기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비록 여러 사정으로 <여신> 프로젝트는 무산됐지만, 시나리오 작업으로 인해 데이빗과 마크는 친한 친구사이가 되었다. 이후 데이빗은 <듄>과 <블루 벨벳>을 제작한 디노 드 로렌티스와 영화를 찍기로 하고, 마크와 다시 작업을 했다. 시나리오 제목은 <침 한 방울(One Saliva Bubble)>이었고, 장르는 (놀랍게도) 코미디였다. 스티브 마틴(!)이 주연으로 확정된 이 영화는 안타깝게도 무산되고 말았고, 데이빗과 마크가 같이 작업한 두 편의 시나리오는 폐기처분 되었다.  

 

       

 

   두 편의 영화가 엎어지고 실의에 빠져있는 데이빗에게, 토니 크랜츠는 TV 드라마를 권유했다. 토니는 데이빗이 <블루 벨벳>을 만들 때부터 TV 작업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지만, 데이빗 자신은 별로 흥미를 느끼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데이빗의 마음을 돌리게 한 토니의 말은 이렇다. "자네는 TV를 해야 해. <블루 벨벳>에서 보여줬던 것 같은 미국에 대한 자네의 비전을, 미국에서의 진짜 삶에 관한 연속극을 만들어 봐."

   그럴듯한 기분좋은 칭찬에 낚긴 데이빗은 <블루 벨벳>에서와 같이 '작은 시골 마을'에 대한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지금까지 (엎어진) 시나리오를 작업한 마크 프로스트와 같이 이 아이디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마크는 데이빗의 아이디어에 "찰스 디킨슨 소설처럼 끝나지 않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나오는 드라마"를 첨가하기 원했고, 데이빗은 앞서 그들이 작업했던, '곤경에 빠진 금발 여자 이야기''유머'를 한데 뒤섞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렇게해서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살인 사건에 관한 이야기가 만들어졌고, 제목은 극 중 마을의 이름이기도 한 <노쓰웨스트 패시지(Northwest Passage)>로 정했다.   

 

  

 

   그들이 먼저 한 일은 마을의 지도를 그리는 일이었다. 드라마에는 (디킨슨 소설처럼) 굉장히 많은 인물들이 나올 예정이었던지라, 지리학적인 정보가 필요했던 것도 있지만,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어디엔가 존재하는 것 같은, 어떤 하나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필요한 작업이었다.     

 

 

   그런데 촬영 중, 가상의 공간이라 생각했던 '노쓰웨스트 패시지'란 마을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그들은 마을의 이름을 다시 정해야 했다. 왜냐하면, 데이빗에게 있어서 영화란, 그 자체로 독립적으로 '만들어진', 가공의 세계여야 하는데, 실제 지명을 사용하게 된다면, 드라마를 보게 될 시청자들이 드라마 속의 세계가 실재한다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개명을 위해 그들이 그린 지도를 살펴보던 중, 마을로 들어오는 길 초입에 두 개의 산이 나란히 있다는 것을 발견했고, 그들은 이 마을 이름을 트윈 픽스(Twin Peaks)라 결정했다. 그렇게해서, 우리가 알고있는 바로 그 <트윈 픽스>가 시작됐다.  

 

인구 51,201명이 사는 전원마을 트윈 픽스. 원래 초고에는 5,121명이 사는 작은 씨족사회 같은 마을로 설정했으나, ABC방송국의 요구로 인구가 10배 늘어난, 제법 규모가 큰(?) 마을이 되었다.  

 

 

2. 제작 

   데이빗 린치가 TV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소문은 TV, 영화계 모두를 놀라게 했다. 소수의 독특한 사람들만이 열광할 수 있는 저 특이한 감수성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한 TV에 접목할 수 있을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자체적으로 드라마를 제작할지라도, 공중파에서 방송되기는 힘들 것이라 생각했다.  

 

평일 혹은 주말 저녁, 힘든 일과를 마치고 TV를 켰을 때 위와같은 캐릭터나 비정상적인 상황이 흘러나오면 누구라도 채널을 돌려버릴 것이다. 위로부터, <이레이저 헤드(Eraser Head)>, <엘리펀트 맨(The Elephant Man)>, <블루 벨벳>.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1988년, 작가 파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그래서 모든 드라마와 영화의 제작이 멈춰 있을 때, ABC 방송국에서 데이빗과 마크의 <트윈 픽스> 파일럿 프로그램을 제작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데이빗 자신조차 "도대체 어떻게 ABC가 <트윈 픽스> 파일럿을 제작하기로 결정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파일럿이 제작된다 하더라도, 그것이 시리즈를 제작한다는 의미는 아니었기에, 그들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파일럿 제작에 몰두했다. 1988년에서 1989년을 거치는 겨울, 180만 달러의 적은 예산으로 스노퀄미(Snoqualmie)에서 <트윈 픽스>는 첫 촬영을 시작했다. 

 

 

3. 캐스트 

   데이빗과 마크는 이 드라마가 기존의 TV에서 볼 수 있는 드라마가 아닌, '영화'로 보이길 원했다. TV 드라마에 이런 '기품'을 싣기 위해서, 남편을 감옥에 보내고 더블 알 카페(RR Cafe)를 홀로 운영하는 노마 재닝스 역에 페기 립튼(Peggy Lipton)을, 제재소를 운영하는 캐서린 마르텔 역에 파이퍼 로리(Piper Laurie)를, 정신과 의사 자코비 역에 러스 탬블린(Russ Tamblyn)을, 지역 유지이자, '유령숲'을 개발하려는 벤자민 혼 역에 리차드 베이머(Richard Beymer)를 캐스팅했다. 이들은 1950년대에서 60년대를 풍미했던 '스타'였기 때문에 (비록 드라마를 제작할 그 당시엔 전성기가 지나갔지만) 중장년층의 관심을 끌 수 있었고, 그들의 화려한 경력과 연륜은 드라마에 무게를 줄 수 있었다.   

 

위로부터 페기 립튼, 파이퍼 로리, 러스 탬블린, 리차드 베이머. 리차드 베이머는 데이빗 린치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West Side Story)>를 보고 난 후, 특히 좋아한 배우 중 한 명이었는데, 워낙 인기 스타라 감히 캐스팅 제안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리차드는 캐스팅 디렉터인 조해나 레이(Johanna Ray)와 친분이 있었는데, 데이빗 린치가 TV 드라마를 제작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자청해서 역을 맡았다. 리차드 베이머는 러스 탬블린과 함께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함께 공연했었다. 파이퍼 로리는 다른 역으로 유명해졌지만, 우리에겐 '십자가처럼 死하신 캐리의 어머니'로 잘 알려졌다. 페기 립튼은 <The Mod Squad>라는 작품을 한 번 찾아보시길. 젊은 시절의 미쉘 파이퍼가 떠오를 정도로 아찔한 미모를 지녔다. 

 

   그리고 다른 한 축은 데이빗 린치와 친분이 있는 배우들로 캐스팅됐다. 캐서린의 남편인 피트 마르텔 역에 잭 낸스(Jack Nance), 외지 사람인 FBI 수사관 역에 카일 맥라클란(Kyle MacLachlan), 로라 팔머의 어머니 사라 팔머 역에 그레이스 자브리스키(Grace Zabriskie), 주유소를 운영하는 빅 에드 헐리 역에 에버렛 맥길(Everett McGill), 통나무를 들고다니며 알듯 말듯한 예언을 하는 통나무 여인 역에는 캐서린 콜슨(Catherine E. Coulson) 그리고 불의의 사고로 남편을 잃고 제재소를 소유한 미망인 지오바나 패커드 역에는 그당시 한창 데이빗과 사귀고 있던 이사벨라 로셀리니(Isabella Rossellini)가 캐스팅 되었다. 그런데 이사벨라 로셀리니가 촬영 직전에 빠지고, 그 자리를 조안 첸(Joan Chen)이 맡게 됐다. 그래서 이탈리아 출신의 미망인은 홍콩 출신으로 바뀌고, 이름 또한 조쉬 패커드로 바뀌었다.  

 

위로부터 잭 낸스, 카일 맥라클란, 그레이스 자브리스키, 에버렛 맥길, 캐서린 콜슨, 조안 첸. 데이빗 린치는 마음 맞은 배우와 지속적으로 일을 하는 경향이 있는데(물론 역할이 있을 때다. 그는 예술과 친분을 잘 구분하기로 유명하다), 그 중 그가 가장 좋아했고, 고마워한 배우는 잭 낸스였다. 데이빗이 그의 장편 데뷔작 <이레이저 헤드>를 찍을 때, 돈이 없어서 제작을 3년간 중단했을 때에도 잭 낸스는 끝까지 기다렸고 데이빗은 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이후 잭은 <듄>, <블루 벨벳>, <광란의 사랑(Wild at Heart)>, <로스트 하이웨이(Lost Highway)>에 이르기까지, 작은 역이지만 꾸준하게 데이빗의 영화에 출연했었다. <스트레이트 스토리(Straight Story)>에 주인공 앨빈 스트레이트의 친구 중 한 명으로 캐스팅 됐으나, 촬영이 시작되기 전에 사망, 결국 유작은 <로스트 하이웨이>가 됐다.

 

   나머지 배우들은 오디션을 통해서 충당할 수 있었다. 이 중 가장 드라마틱한 오디션의 주인공은 로라 파머를 맡은 쉐릴 리(Sheryl Lee)였다. 워낙 예산이 부족했던터라, 데이빗은 촬영을 하고 있는 시애틀에서 즉석으로 오디션을 감행했다. "시체 역 구함. 단순히 시체 역할임" 애초에 데이빗과 마크가 구상한 로라 파머는, 트윈 픽스란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을 연결하는 고리, 기능적인 역할이었다. 파일럿에 시체로 한 번 보여지고, 그 이후의 드라마에서는 전혀 나올 필요없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연기 오디션을 치루지 않고, 사진으로만 선발했다. 그리고 그 오디션에서 쉐릴 리라는 배우 지망생이 뽑혔다. 

   로라 파머의 시체가 발견되는 씬을 찍는 날. 추운 겨울에 강가에서 옷을 홀딱 벗고 비닐에 꽁꽁 묶여 시체 역을 하고 있는 쉐릴에게 카메라가 다가갔고, 그 장면을 모니터하고 있던 데이빗이 갑자기 중얼거렸다. "맙소사, 시체가 연기를 하고 있잖아?" 데이빗은 현장에서 갓 발견된 그녀의 모습과 시체실에 누워있는 그녀의 모습을 찍으면서, 단순한 시체가 아닌, 어떤 풍부한 감정이 흘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로라의 방에서 발견되는 비디오 테이프의 내용을 촬영하면서, 이 배우가 연기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하고, 어떤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때는 단편적인 아이디어일 뿐이었다. <트윈 픽스>의 시리즈화가 결정되자, 데이빗은 로라의 사촌 매기 퍼거슨이란 캐릭터를 만들고 그녀에게 이 역을 맡겼다.  

 

로라 파머의 시체는 30부작이나 되는 긴 드라마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 맨 아래, 학교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이자 드라마가 끝날 때마다 비치는 로라 파머의 '교내 미인대회(Homecoming Queen)' 수상 사진은 실제로 쉐릴 리의 오디션 프로필 사진이었다. 

 

 

4. 로라 파머

   데이빗은 그저 단순히 기능적인 역할에 머무를 로라 파머에 대한 캐릭터를 확실히 구축하기 위해 작곡가 안젤로 바달라멘티(Angelo Badalamenti)를 찾아갔다. 안젤로는 이전까지 '그저 그런' 헐리우드 영화 음악을 만들던 작곡가였으나, <블루 벨벳>에서 데이빗과 처음 작업을 한 이후, 그의 재능이 한창 피어나고 있던 때였다.  

   그와 데이빗이 작업하는 방식은 상당히 특이한데, 피아노 옆에 나란히 앉아, 데이빗이 영화나 캐릭터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안젤로가 그 말을 듣고 피아노로 연주하는 형식이다. 데이빗이 원하는 음악이 나오지 않으면(데이빗의 표현에 따르면 안젤로가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데이빗은 "그게 아냐, 안젤로"라며 다시 말을 하고, 데이빗이 원하는 느낌의 곡이 나올 때 까지 계속 연주한다. 

   그날도 역시, 데이빗은 안젤로 옆에 앉아 이야기를 했다. "어두운 밤, 깊은 숲속이야. 잣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고 있어. 달도 뜨지 않고, 동물 소리가 들려. 새소리... 올빼미 소리 같기도 해. 나무 뒤에 한 소녀가 보여. 로라 파머야. 그녀는 공포에 떨고 있고, 슬퍼보여. 무언가 말할 수 없는 슬픔이. 카메라가 다가가고 있어. 점점 그녀 앞으로. 웃는 듯 우는 듯 알 수 없는 표정이야. 그리고 그녀는 사라지기 시작해. 어둠 속으로. 이제 다시 어둠이야." 이 말을 듣고 안젤로는 로라 파머의 테마곡을 만들었다. 이 곡을 들은 데이빗은 이렇게 말했다. "훌륭해! 정말 훌륭해! 단 한 소절도 고치지 말아. 자네 음악으로 난 <트윈 픽스>를 봤으니까." 

 

<Twin Peaks: Definitive Gold Box Edition>에 수록된 다큐멘터리 『WHERE WE'RE FROM』을 보면, 음악을 작곡한 안젤로 바달라멘티와 극 중 가수로도 출연한 줄리 크루즈(Julee Cruise)의 인터뷰도 실려 있다. 이 작품에서, 안젤로와 데이빗이 실제로 어떻게 작품을 하는지 '시연'하는 장면이 있는데, 정말 소름이 돋을 정도로 '감동적'이다. 데이빗은 실제로 안젤로와 작업하는 것을 즐겼으나, 둘이 사는 곳이 너무 떨어져있어서 매일 작업하지 못하는 것을 매우 애석하게 여겼다. 다큐멘터리에서 안젤로가 밝힌 이야기 중에 폴 매카트니가 <트윈 픽스> 때문에 여왕 생일날 굴욕을 당한 일화도 있으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CJ 관계자 여러분!, 자막 좀 입혀서 제발 좀 '정발'해 주세요! 

 

 

5. 이야기 

   2월 24일 아침, 워싱턴 주(州)의 작은 마을 트윈픽스. 제재소를 운영하는 피트 마르텔은 여느때와 같이 낚시를 하러 나서는 길에, 강둑에 비닐에 꽁꽁 묶인 한 여자의 시체를 발견한다. 그의 신고로 보안관 해리 트루먼과 보안관보 앤디, 윌 헤이워드 의사가 현장에 가고, 확인 결과 살해된 여자가 로라 파머인 것을 알게 된다. 로라의 죽음은 그녀의 가족, 친구들, 마을 주민들에게 알려지고 마을은 슬픔에 잠긴다. 그리고, 로라가 죽은 날, 같은 학교에 다니는 동급생 로네 풀라스키 또한 실종된 사실을 알게 된다.     

   한편, 주 경계의 기찻길에서 로네 풀라스키가 반사 상태로 발견되고, 지역 경찰의 요청으로 FBI 수사관 데일 쿠퍼가 수사에 착수한다. 그는 로네와 로라가 서로 연관되어있을 것이라 확신한 후, 로라의 손톱 밑에서 작게 잘리워진 'R'이라는 글자를 발견한다. 그는 이번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이 1년 전, 워싱턴 남서부 지역에서 벌어진 테레사 뱅크스의 살인사건과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동일범의 소행이라 확신한다. 그는 살인자가 이 마을에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는동안, 반항기 많은 오드리 혼(Sherilyn Fenn)은 유령숲을 개발하려는 아버지 벤자민 혼의 계약을 엉망으로 만들어버리고, 트루먼 보안관은 로라의 남자친구 바비 브릭스를 체포하는데, 그는 유부녀 셜리와 불륜 관계이다. 바비는 무혐의로 풀려난다.

   쿠퍼의 수사로 희생자 로라 파머의 이중생활이 밝혀진다. 그녀는 품행이 방정한 아름다운 소녀로 알려졌으나, 한편으로는 마약중독과 원조교제에 탐닉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진다. 수사가 진행될수록 용의자들은 알리바이가 입증되고, 사건은 미궁에 빠지게 된다.  

   로라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같이 있었던 사람이 로라와 몰래 사귀고 있는 제임스 헐리라는 것이 밝혀지고, 제임스는 로라의 가장 친한 친구인 다나 헤이워드에게 자신의 결백을 이야기하는 중, 그들이 서로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경찰은 제임스를 연행하고, 다나 때문에 싸움을 벌인 바비와 그의 친구 마이크 또한 연행된다. 제임스와 다나는 연행되기 전, 중요한 증거품으로 보일 수 있는 목걸이를 땅에 묻는다. 드라마는 로라의 어머니인 사라 파머가 무언가에 깜짝 놀라고 그와 동시에 어둠속에서 누군가가 제임스와 다나가 숨긴 목걸이를 꺼내가는 장면으로 끝난다. 

 

 

 

6. 즉흥성(1) - 밥(BOB) 

   데이빗은 잘 짜여진 시나리오로 통제된 영화를 찍는다기 보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의외성에 더 집착하는 편이다. 일례로, 데일이 로라 파머의 시체를 검시하는 장면은 NG컷이다. 형광등이 껌뻑거리는 것과, 엑스트라가 대사를 잘못 들어 버벅대는 장면을, 데이빗은 다시 찍지 않고, 그대로 파일럿에 삽입했다. 그는 그런 작은 실수가 오히려 현실에서 발생하는 '리얼리티'를 나타낸다고 믿었다.

 

   어느날, 로라의 침실 장면을 찍고 있던 중, 데이빗의 귀에 이런 말이 들렸다. "프랭크, 그렇게 옮기면, 나중에 갇혀서 나오지 못해요." 데이빗이 돌아보니, 의상 담당이자 소품 담당인 프랭크 실바(Frank Silva)가 옷장을 옮기던 중 잘못해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데이빗이 프랭크에게 다가가 말했다. "프랭크, 당신 연기할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그러면 이렇게 있어봐요." 데이빗은 프랭크가 침대 윗쪽에 쭈구려 앉아있는 모습을 찍었다. 물론 이 장면이 어디에 어떻게 쓰일줄은 본인도 모르고 있었다. 

 

침대에서 카메라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프랭크. 이 장면은 어떤 의도도 담겨 있지 않기에, 순수한 공포를 불러 일으킨다. 

 

   이 즉흥성이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파일럿의 결말부. 로라의 엄마인 사라 파머가 소파에 누워 있다가 갑자기 무언가에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비명을 자르는 장면을 촬영하는 날이었다. 배우의 집중적인 연기가 필요한 장면이라, 세트 안에는 긴장감이 돌았고, 스태프들이 다 모여있는 가운데 촬영을 시작했다. 그레이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비명을 지르고 카메라가 옆으로 팬하면서 촬영은 끝났고, 데이빗은 그레이스의 연기에 깊은 만족감을 나타냈다. 그런데 촬영을 하던 숀이 말했다. "NG에요. 누군가 거울에 비쳤어요." 그말을 들은 데이빗이 확인해보니, 거울엔 프랭크가 비쳤다. "BINGO!" 데이빗은 그 장면을 그대로 파일럿에 삽입했고, 그는 로라를 살해한, 살인마 밥(Killer BOB)이란 존재를 생각해냈다.   

 

   로라의 살인범에 실체를 입히는 대신, 악마와 같은 영혼으로 표현하고, 그 반대편에 그 '악령'의 존재를 알려주는 다른 영혼을 설정하면 어떨까? 그렇게해서 생겨난 게 밥(BOB) 과 마이크(MIKE)다.  

 

 

7. 즉흥성(2) - 빨간방

   <트윈 픽스>의 스크립트를 쓰면서 데이빗과 마크가 처음에 기인한 아이디어는 간단했다.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사랑하는 금발의 여자아이가 무참히 살해당했다. 그런데 알고보니 그녀는 정숙과 순결과는 거리가 먼, 마약과 섹스에 탐닉한 음탕한 소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은 지역사회의 "거물이자 중요한" 인물과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가볍게' 설정했었다. 마릴린 몬로의 미스터리한 죽음과 겹쳐지고, <블루 벨벳>처럼 현실 세계에 기반을 둔 작품이었다. 데이빗과 마크가 한창 파일럿을 촬영하고 있을 때, ABC 관계자로부터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따뜻하게 동봉된 편지 안에는 이런 글이 써 있었다. "이 파일럿이 시리즈가 제작되지 않더라도, 유럽에 '독립된 TV용 영화'로 팔 수 있게 결말부를 찍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때부터 데이빗과 마크는 또 다른 고민에 밤잠을 설쳤다. 클리프행어(떡밥결말)로 가득찬 열린 결말을 닫힌 결말로 끝을 맺으라니. 편집실에서 (줄곧 데이빗의 영화 편집을 맡았던) 듀웨인 던햄(Duwayne Dunham)과 필름을 이리 저리 재단해도 답이 안나온 데이빗은 편집실 밖에 주차된, 봄 햇살에 따뜻하게 덥혀진 자동차에 기대어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그 때, 기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빨간방, 마이클 J 앤더슨 그리고 거꾸로 말하기(speaking backwards)"  

 

   원래 데이빗은 <이레이저 헤드> 이후로 <로니 로켓(Ronnie Rocket)>이란 영화를 기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우연찮게 <엘리펀트 맨>을 제안받고, <로니 로켓>을 잠시 보류했다. <블루 벨벳>을 끝내고, <여신>과 <침 한 방울> 기획이 다 무산됐을 때, 데이빗은 한 단편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의 주인공이 마이클 J 앤더슨 이었다. 그를 보자마자, 그는 그동안 묵혀뒀던 <로니 로켓>을 찍기로 하고, 그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으나, 아쉽게도 그 기획은 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데이빗은 언젠가 다음 영화에서 같이 작업하자는 (기약없는) 약속을 하고, 그를 잠시 잊고 있었는데, 차에 기대고 있는 순간, 갑자기 그가 떠오른 것이었다. "<이레이저 헤드>처럼 이 세상이 아닌 것 같은 공간, 그 안에 알 수 없는 난쟁이, 그리고 로라 파머의 영혼을 데일 쿠퍼와 만나게 하면 되지 않을까."  

 

<이레이저 헤드> 헨리의 낙원이자 지옥인 규정할 수 없는 라디에이터 속 공간. <트윈 픽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위는 커튼으로 둘러 싸여있고, 바닥은 격자무늬 패턴으로 되어 있다. 

 

 

8. 즉흥성(3) - 마이크(MIKE) 

   데이빗은 로라를 죽인 범인을 '악령'으로 설정했으니, 이 사실을 알려주는 '선한 영혼'의 존재 또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데일 쿠퍼가 좀 독특한 캐릭터라 하더라도 그가 한순간에 악령의 존재를 알아차린다는 것은 지금까지 진행한 90분 분량의 드라마를 산으로 가게하는 무리수이기 때문이었다. 새로운 인물을 찾던 중 데이빗은 드라마에 필요한 짧은 시(혹은 노래 가사)를 한 편 썼는데, 그때 병원 장면에서 한 번 등장한 알 스트로블(Al Strobel)이 그 시를 낭독했다. "지나버린 미래의 어둠을 통해 / 마법사는 알기를 원한다. / 두 세상 사이 바깥에 노래 하나 / 불이여, 나와 함께 걷자. (Through the darkness of future past / The magician longs to see. / One chants out between two worlds / Fire, walk with me.)" 어두운 병원 복도에서 음산하게 내뱉는 목소리에 데이빗은, "맙소사, 이사람 정말 끝내주는구만!"라고 생각했고, 그를 밥의 대척점에 서 있는 마이크(MIKE)로 캐스팅했다.  

 

원래 알이 맡은 '외팔이 마이크' 역할은 파일럿에서 단 '한 장면'에 스쳐 지나가는 카메오로, TV 드라마 <도망자(The Fugitive)>에 대한 오마주였다. 데이빗은 이 장면을 유머로 삽입했으나, 그의 아이디어로 마이크 역할은 시리즈가 진행될수록 중요해졌다. 극 중 마이크의 이름은 필립 마이클 제라드(Phillip Michael Gerard)인데, <도망자>의 필립 제라드 경감에서 따온 이름이다.  

 

 

9. 또다른 결말 

   기존의 파일럿은 로라의 어머니인 사라 파머가 '무언가'에 놀라 비명을 지르는 것으로 끝났지만, <또다른 결말>부는 그녀가 로라의 방에서 밥을 본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 <또다른 결말>은 <트윈 픽스> 시리즈를 지배하는 대표적인 정서로 자리잡으며, 첫 번째 시즌, 두 번째 에피소드(Zen, or the Skill to Catch a Killer)에 재편집 되었다. 

 

   리랜드 파머는 앤디와 '밤을 보낼 준비'를 하고 있는 루시에게 전화를 해서 아내가 살인자를 봤다고 연락을 한다. 루시의 연락을 받은 보안관 해리는 보안관보 호크와 함께 사라의 집에 가 범인의 몽타주를 그린다.  

 

   그레이트 노던 호텔에서 늦게 잠이 든 데일은 기이한 전화를 받는다. 전화속 목소리는 자신이 로라를 죽인 범인을 알고 있으니, 지금 당장 병원으로 오라고 한다.  

 

   자신을 마이크라고 소개한 사내는, 로라 파머는 밥이 죽였고, 밥과 자신은 인간의 몸을 선택해서 기생할 수 있는(마치 편의점에 들르는 것처럼) 영혼들이라 이야기한다. 그들은 서로 악행을 벌이고 다녔으나, 마이크가 신(God)을 본 이후로, 그를 지배하고 있던 문신이 새겨진 팔을 잘라내 버렸다. 그는 밥의 살인 행각을 멈추기 위해 이곳에 왔으며, 지금 병원 지하실 밑에 밥이 있다고 얘기한다. 

 

   병원 지하실 밑에 밥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Robert고, 최초의 희생자 테레사(Teresa) 뱅크스의 손톱 밑에 T를, 로라(lauRa) 파머의 손톱 밑에 R를 넣은 것은, 자신의 이름을 알리려고 한 것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은 또 살인을 할 것이라 '예고' 한다.  

 

   그때 지하실에 몰래 따라들어온 마이크가 밥을 쏴버리고 밥은 쓰러진다. 그리고 총을 쏜 마이크 역시 (약기운이 빠져) 쓰러지고, 밥이 만든 제단에 데일이 (난데없이) 소원을 빌자 시간은 갑자기 25년이 흘러 버린다.  

 

   늙어버린 데일은 빨간 커튼으로 둘러싸인 이상한 공간에서 마이크로 추정되는 난쟁이(Little Mike / The Man from Another Place)와 로라 파머의 영혼을 만난다. 이곳에서 타자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왜곡되게 들리며, 오로지 자신의 목소리만 제대로 들린다. 난쟁이는 옆에있는 여자는 로라 파머가 아니라 자신의 사촌이라고 소개하지만, 그녀는 로라 파머다. 난쟁이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춤을 추고, 로라는 데일에게 다가가 키스를 하고, 무언가를 귓속말로 속삭인다. 그리고 영화는 끝난다. 

 

    촬영을 끝마치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온 데이빗은 편집실에서 이 결말을 편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편집을 끝마친 후, ABC 방송 관계자들에게 기술 시사를 했는데, 그때 반응은 이랬다.  

 

"ABC에서 그러는데, 다들 이 영화를 싫어했다고 하더군요. 뭐 데이빗 린치의 작품을 시사한 후 늘상 듣는 반응과 크게 다르진 않았어요." - 편집/감독 듀웨인 던햄 

 

   하지만, 스태프들과 배우들로 이루어진 기술 시사에서, 그들의 반응은 뜨거웠고, 단순히 드라마가 아닌, 새로운 '영화'를 찍었다고 자평했다. 어쨌든 내부 시사를 마치고 ABC는 이 드라마를 폐기할지 방송할지 고민을 했다. 기이하지만 무언가 독특한 이 프로그램을 방송하기엔 너무나 큰 무리수이기에, 전국방송보다는 일단 한 지역에서 시험 방송하고 그 결과를 토대로 결정하기로 했다. 

 

 

10. Launching Season 1

   ABC는 이 파일럿을 필라델피아에서 처음 시험방송했었다. 반응은 열광적이지도 않았지만, 실망스럽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반응이었는데, 젊은 사람들일수록 이 드라마에 열광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심사숙고 끝에 ABC는 1990년 4월 8일 부활절(!) 일요일, 첫 방송을 하기로 결정하고, 편당 110만 달러의 예산으로 총 7편의 에피소드를 제작하기로 결정했다. <트윈 픽스>의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1. 기억할만한 지나침  

   셜리 존슨(Mädchen Amick)이 바비 브릭스(Dana Ashbrook)에게 "프랑스에선 지금 이런 시간을 해피 아워라고 해" 라고 말하는 것은 '쌩크 아 쎄트(Cinq a Sept)"를 의미한다. 쌩크 아 쎄트는 오후 5시부터 7시 사이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연인들이 일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서로를 즐길 수 있는 하루 중에서 가장 편안하고 분위기 있는 시간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특별한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특별한 두시간이자 불륜과 외도의 시간으로, 쉘리와 바비가 서로 불륜관계임을 간단하게 대사 한마디로 처리했다.   

   그리고 일이 끝나는 시간이 일정치 않다는점, '쌩크 아 쎄트'라는 외국어 대신 해피 아워란 자국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그녀가 학교를 다니지 않거나 공부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드라마에서 그녀는 학창시절, 빨간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던 리오 존슨(Eric Da Re)에 반해, 자퇴하고 결혼을 한 상황으로 나온다.  

 

   데일 쿠퍼는 또다른 실종자인 로네 풀라스키(Phoebe Augustine)가 반사상태로 발견되고 나서야 등장한다. 로네가 발견된 곳이 캐나다 국경을 가르는 다리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연방 경찰관 FBI가 개입한 것이다. 로네가 아니었으면, 이 사건은 지역 경찰이 수사를 했을 것이고, 아마도 드라마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데일의 등장 또한 독특한데, 그는 등장하자마자, 사건과 별 관계없는 시시콜콜한 일상을 한참 떠들어댄다. 보통 TV나 영화에서 사건이 발생하고 등장하는 경찰이 어떤 모습을 보였는지를 떠올린다면, 이 장면은 굉장히 어색하고 신선한 장면으로 보인다. 이 장면에서 시청자는, 데일은 다른 경찰들과는 달리, 매우 '독특한 정신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건 발생 후, '오늘도 야근이군'이란 말을 할 것 같은 표정으로 등장하시는 호반장님과 비교를 해보면 데일 쿠퍼의 캐릭터가 얼마나 독특한지 알 수 있다.   

 

   "다이앤, 알버트에게 이걸 조사하라고 해. 샘에겐 아무 말도 말고." 데일 쿠퍼가 말하는 샘은 로라 파머의 살인 사건 전, 테레사 뱅크스의 부검을 맡았던 법의학 전문가다. 최초 사건을 수사했던 샘을 빼고 다른 사람을 부르는 것으로 보아 전 사건을 영 미덥잖게 수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샘이 누구냐면 바로 이사람이다.  

 

왼쪽부터 샘 스탠리(Kiefer Sutherland), 고든 콜(David Lynch), 체스터 데스먼드(Chris Isaak). 이 때의 굴욕으로 샘은 FBI를 사직하고, 이름을 잭으로 바꾼 후 CTU로 이직했다는 슬픈 전설이... (ㅡ.ㅡ;;;) 샘은 이 드라마의 프롤로그이자 에필로그인 극장판 <트윈 픽스(Twin Peaks: Fire walk with me)>에서 등장한다. 그와 체스터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으로 미룬다.

 

   <트윈 픽스> 시리즈에서 계속 보여지는 장면이 두 개 있다. 하나는 숲이 바람에 흔들리는 장면이고, 다른 하나는 바람에 흔들리는 빨간 신호등이다. 이 두 장면은 볼 때마다 독특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데일이 트윈 픽스의 유지들에게 이번 살인 사건을 브리핑하면서 이렇게 끝맺는다.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밤에 일어났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로라가 죽기 전 마지막까지 같이 있었던 제임스 헐리(James Marshall)가 로라와 헤어진 장소가 바로, 그 신호등이 걸려있는 네거리였다. 한밤중에 바람에 흔들리는 빨간 신호등은 로라 파머의 죽음을 떠올리게 한다. 이후 드라마에서 로라 파머와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가 진행되더라도, 한밤중에 흔들리는 빨간 신호등이 나오기만 하면 알 수 없는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모두 이 두 장면으로 학습한 효과다.

 

   "바비가 사람을 죽였다고 로라가 말했어."  제임스가 자신의 결백을 이야기하기 위해 로라의 가장 친한 친구인 다나 헤이워드(Lara Flynn Boyle)에게 이야기하는 장면이다. 하지만, 이후 시리즈에서 바비가 살인을 했다는 이야기나 그에 관한 사건은 진행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극장판 <트윈픽스>에서 다루어진다.  

 

   "너 같은 딸이 있어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단다." 다나의 아버지 윌리엄 헤이워드(Warren Frost)가 하는 대사다. 자상한 아버지가 딸에게 할 수 있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대사지만, 자세히 보면, 그 말 다음에 윌의 얼굴이 잠시 굳어지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복선은 시즌 2의 후반부에서야 밝혀진다.

 

 

 

 

12. 덧붙임

a. 연재 시작일을 2월 24일로 할지 4월 10일로 할지 고민하다 오늘로 정했습니다. 2월 24일은 로라 파머의 기일입니다.

b. 대부분 사실에 기초하여 썼고, 개개의 세부사항은 사실에 부합하지만, 이야기의 흐름에 따라 사실의 전후부분이 바뀐 경우도 있습니다. (예를들면, ABC 관계자들이 '또다른 결말'을 찍어달라고 한 건, 촬영 중이 아닌, 계약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c. 컨텐츠 중 캡쳐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해당 저작권사에게 있습니다. 

d. Refenences 

- 『Lynch on Lynch, Revised Edition』크리스 로들리, Faber & Faber
- 『데이빗 린치의 빨간방』데이빗 린치,  곽한주 옮김, 그책
- 『SXE』스티븐 베일리 외, 안진환 옮김, 해바라기
- <Twin Peaks: Definite Gold Box Edition> Lynch/Frost Productions, CBS DVD, Paramount Home Entertainment
- <Twin Peaks: Fire walk with me> Lynch/Frost Productions, CIBY 2000, New Line Cinema
- <David Lynch The Lime Green Set> ABSURDA
- 위키피디아 http://en.wikipedia.org/
- IMDB http://www.imdb.com/
  

e. 다음 글은 3월 3일 오전 9시에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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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둠 속 깊숙이 뚫어보면서, 오랫동안 나는 거기 서 있었지. 이상히 여기며, 두려워하며, 
     의심하며, 전엔 감히 꿈꾸지 못한 이 세상 것이 아닌 것을 꿈꾸면서. 
     그러나 침묵은 깨어지지 않고, 정적은 아무런 계시도 보여주지 않고 
     거기 들리는 단 한마디는 속삭이는 음성, "레노어!" 
     나도 속삭였지, 메아리처럼 웅얼거리는 그 소리, "레노어!" 
     단지 이것뿐 그밖엔 아무것도 없었네. 

     (......)  

     "예언자여!" 나는 말했지. "마물이여! 새든 악마든 그러나 예언자여! 
     신의 뜻으로 보내졌든, 폭풍에 날려왔든 
     황량한, 마술에 걸린 이곳 황무지 
     공포의 신이 붙은 이 집에 두려움 없이 날아든 새여! 
     청하노니 내게 진심으로 말해 주오 
     있소이까? - 길르앗에도 슬픔을 고치는 향이 있는지? 제발 내게 말해 주오" 
     갈가마귀는 말했네. "이젠 끝이야"
 

 

          Deep into that darkness peering, long I stood there wondering, fearing,
          Doubting, dreaming dreams no mortal ever dared to dream before
          But the silence was unbroken, and the darkness gave no token,
          And the only word there spoken was the whispered word, `Lenore!'
          This I whispered, and an echo murmured back the word, `Lenore!'
          Merely this and nothing more. 

          (......) 

          `Prophet!' said I, `thing of evil! - prophet still, if bird or devil! -
          Whether tempter sent, or whether tempest tossed thee here ashore,
          Desolate yet all undaunted, on this desert land enchanted -
          On this home by horror haunted - tell me truly, I implore -
          Is there - is there balm in Gilead? - tell me - tell me, I implore!'
          Quoth the raven, `Nevermore.'
  

 

- 애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갈가마귀(The Raven)」 중에서 - 

 

   고등학교 때였을 것이다. 영어 교과서에 실린 포의 「갈가마귀」를 읽으면서(당연히 원문이 아니라, 고딩 수준에 맞게 쉽게 풀어 쓴 글이었다) 무서움보다는 왠지 모를 슬픔을 느꼈던 것은. 물론 포의 시 중, 읽는 이의 가슴을 마구 뜯어낸 시는 「애나벨 리(Annabel Lee)」였으나, 이 「갈가마귀」 역시 설명할 수 없는 애틋함, 슬픔이 묻어났었다. 포의 새로움을 알았다고나 할까. 이전까지 「검은 고양이」나 「어셔가의 몰락」등 괴담작가로만 기억했던 포의 새로움을 느끼게 한 작품이었다. 

   그 후 20년, 에서 몇 년 모자라는 올해 초, 난데없이 이 시가 '사무치게 읽고 싶어' 찾아 읽어보던 중, 갑자기 예전에 봤던 드라마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레노어처럼, 어둠속으로 사라져버린, 슬픈 소녀의 얼굴이.  

 

 

   내가 <트윈 픽스(Twin Peaks)>를 본 것은 아마도 「갈가마귀」를 학교에서 배웠을 때와 거의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여름방학을 이용해, 15편으로 출시된 비디오를 하루 한편씩 빌려봤었다. 파일럿이 빠진채 출시된 아쉬운 구성이었으나 그 당시엔 그런 게 뭔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저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에 답답한 가슴을 두드려가며, 로라 파머를 살해한 범인이 언제 잡히는지에만 신경을 쓰며 보았다. 

   6번 째 비디오에서야 겨우(그러나 경악할만한)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고 7번 째 비디오에서 범인이 잡히고 난 후, 난 미련없이 비디오 시청을 중단했었다. 더 이상 볼 필요가 없었다. 내겐 오로지 '로라 파머를 누가 죽였'는지에만 관심이 있었을 뿐이니까. 그리고 그녀를 잊었다. 당연한 일이다. 누가 TV 드라마 주인공을 기억하고 있을까? 엄청난 인기를 끌었던 <사랑이 뭐길래>에서 하희라 씨가 맡은 역할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대발이는 기억이 나는데... ㅡ.ㅡ;;;

 

   그러다 3년 전, 우연히 이 드라마를 다시 보게 되었다. 이유는 당시 본 <카니발(Carnivale)>에 출연한 마이클 J 앤더슨을 보고 불현듯 <트윈 픽스>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범인이 누구인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지만, 후반부는 보지 않았기 때문에 별 고민없이 선택할 수 있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내가 그당시 굉장히 많은 부분을 놓치고 오해했다는 것을 알았다. <트윈 픽스>는 미스터리 스릴러의 장르 외피를 뒤집어 쓰고 있지만, 실상은 그 마을에 사는 사람들 - 정확히 표현하자면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 중산층 계급) - 에 대한 추악함과 위선을 까발리는 이야기였다. 마을에서 사랑받았던 한 여자아이의 죽음으로, 겉으로는 평화로운 전원 마을 트윈 픽스가 외부인(FBI 수사관 데일 쿠퍼)의 개입으로 그들의 진짜 모습을 감추어왔던 치양막이 벗겨지는 자멸의 드라마였다.  

   그러면서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 모든 게 로라 파머의 죽음으로 인해 드러난 사실이라는 것을. 물론 '영매' 능력을 지닌 FBI 수사관 데일 쿠퍼의 적극적인 수사 덕분이었지만, 로라의 죽음이 아니었다면, 트윈 픽스에 사는 마을 사람들은 겉으로 보이는 평화에 만족하며 수많은 죄를 짓고 살아갔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포의 「갈가마귀」를 읽으면서 로라가 떠올랐던 것은. 달조차 떠오르지 않은 진한 어둠, 숲속에서 들리는 동물소리, 바람소리에 떨며 나무 뒤에 웅크리고 숨어있는 로라의 모습이 떠오른 것은. 드라마를 보면서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만 기억할 뿐, 단지 범인이 잡히기만 기대할 뿐, 그녀가 왜 그런 이중 생활을 했고, 살해당하기 전, 얼마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선 그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이제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한 여자아이의 죽음. 그 죽음을 둘러싼 마을 사람들의 추악함. 살인과 마약과 근친상간과 매음과 강간과 불륜과 파괴와 위선이, 잣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포근한 바람과 지랄맞게 좋은 커피와 죽여주게 맛있는 체리파이와 누구에게나 친절한 이웃들이 공존하는, 선과 악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함께 혼재되어 있는, 어디엔가 있을 것 같지만 실재하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현존하는 세상, 그리고 그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내가 지금 발을 붙이고 사는 지금 이 세상과 너무나 흡사하다고 느끼는 것은 내가 너무 과민한 것일까?  

   이것이 이 글을 쓰기로 결심한 가장 큰 이유다. 

 

   물론 다른 이유들도 있다. 올해가 <트윈 픽스>가 방영한지 꼭 20년이 되는 해라는 점 그리고 해외에 완전판 DVD가 발매됐으나 국내에는 <시즌 1>만 발매되고, 그나마도 절판했다는 점도 그렇다. 그리고 이 드라마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해서 '자료정리'의 목적도 지니고, 다른 누군가가 이 드라마에 대해 이야기를 하길 기다렸는데, 여지껏 아무도 없어서 '감히 내가' 쓰려고 한다. <트윈 픽스> 관련 (잡다한) 자료 모음이라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언제까지 쓸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능한 매 에피소드별로 이야기를 끌어낼 계획이다. 가능할지는 모르겠다. 할 수 있을 때까지 해볼 일이다. 이 모든 게 내겐 소중한 경험이 될테니까. 

 

 

 

* 덧붙임 

1. 컨텐츠 중 캡쳐 이미지에 대한 권리는 해당 저작권사에게 있습니다. 

2. 다음 글은 2월 24일 오전 9시에 올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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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츌리 2010-09-29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의미있는 작업을 하셨네요.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트윈픽스를 그저 재미로 넘겨보지 않고, 꼼꼼히 여러번 뜯어 본 사람으로서

참으로 반가운 포스팅이 아닐수 없습니다.

모든 포스팅을 다 읽고 다시 답글 하도록 하겠습니다.

Tomek 2010-10-03 08:24   좋아요 0 | URL
와라라라락!

고맙습니다. :D

파츌리 2010-09-29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cinephil 2013-03-19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좋은 포스팅이네요!! 저도 하나하나 찬찬히 읽어봐야겠어요!!
제가 정말 좋아하는 드라마거든요 ㅠ_ㅠ

Tomek 2013-03-20 11:57   좋아요 0 | URL
저도 오랜만에 다시 한 번 볼까 생각 중입니다. :)
고맙습니다.

chuteedo 2015-01-19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트윈 픽스 시즌3가 제작된다는 소식에 인터넷에서 이것저것 찾아보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유익한 글 감사합니다.

Tomek 2015-01-20 19:57   좋아요 0 | URL
저도 뉴 시즌 엄청 기대하고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321321 2015-04-06 2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트윈픽스 시즌3 제작에서 린치가 하차한다는 비통한 소식을 전해듣고
절망감에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찾아왔습니다.
좋은 이야기들 감사합니다...

Tomek 2015-04-08 11:31   좋아요 0 | URL
헉! 정말인가요?

...

만약 그렇다면, 내년에는 마크 프로스트의 <트윈 픽스>를 볼 수 있겠군요. 프로스트가 빠진 <트윈 픽스>가 어떠했는지는 이미 확인 했기에, 어떤 의미로는 흥미가 갑니다.

고맙습니다. :)

chuteedo 2015-05-17 21:38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데이빗 린치 복귀한다고 하네요~ㅜㅜ 트윈 픽스 배우들이 린치가 하차했을 때 ”Twin Peaks without David Lynch is like…??” 라는 제목의 동영상을 만들었는데 보니 뭉클하더군요. 유투브에 있어요.

Tomek 2015-05-26 21:40   좋아요 0 | URL
다행이네요. 그가 참여하는 트윈 픽스를 진심으로 기대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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