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 지음, 김선형 옮김 / 살림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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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살부터 늪지에서 홀로 자란 여자 카야의 이야기이다. 소설의 세팅은 아름답다. 자연 속에 홀로 사는 야성의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주제 하나로 반 이상 먹고 들어간달까.

그러나, 자연 =여성이라는 등식을 전제로 깔고 있어 불편하다. 자연은 아름답다. 자연이 아름다운 건 인간의 투사일 뿐이다. 원시의 미몽에서 벗어나 문명을 건설하고 자연을 정복한 인간들은, 자연 속에 생존을 두고 공포에 발발 떨던 과거를 편리하게도 잊고 그 무시무시했던 자연을 아름다운 것으로 환원시켜버렸다. (영어로 '환원시키다'가 reduce인거 정말 마음에 든다. ) 자연 속의 여자가 아름다운 것도 사실 환상일 뿐일지도 모른다.

남자는 두 가지 힘으로 여자의 세계에 침탈해 온다. 하나는 글자를 가르치는 이성의 힘, 또 하나는 온전히 마초스러운 남자의 힘.

재미있긴 하다. 이성 = 남자라는 등식이 통용되는 문화 내에서 여자가 이성의 질서에 편입되는 과정이 어떤 건지, 공부하는 여자의 딜레마가 무엇인지, 여자의 이성이 유독 돋보이는 건, '와, 여자인데 똑똑해'이건 '혼자 자연 속에서 독학했는데 똑똑해'이건, 이런 새삼스러운 반응들만큼,얄궂지 않나.

글을 가르치는 남자에게 종속되듯 느끼는 의존인지 사랑인지 한 관계가 축을 이룬다면, 공작새같이 수컷의 매력을 잔뜩 내뿜으며 실질적으로 (육체적으로) 여자를 침탈하는 관계가 또 다른 축을 이룬다. 후자의 남자는 사회와 문화가 가르치고 허용하는 관계 외엔 모른다 - 쓰레기라 불리는 늪지에 사는 가난한 백인과 계급의 차이를 좁힐 생각도 의지도 없고, 여자가 같은 인간이고 고유한 매력을 지녔는지에도 관심이 없다. 그냥 예쁘면 된다. 그리고 언제나 새로운 여자가 최고의 여자이므로, 문명 밖 여자의 아름다움은 ('헌'여자가 아닌) '새' 여자의 아름다움이니까 쫓는다.

카야는 독서의 힘으로 이성을 갈아, 늪지에서 자신을 들어올린다. 남들이 '마시 걸,' 쓰레기같은 늪지 소녀라 붙인 낙안에서 자신을 들어올린다. 남자건 여자건 공히 있는 이성의 힘으로 자신을 들어올리고, 남자건 여자건 공히 있는 욕망의 힘으로 자기 세계를 위협하는 남자에 맞선다. 끝에 반전이 있다.

성장 서사로 시작해, 로맨스 서사를 타다, 법정 심리 서사로 마무리되는 그런 느낌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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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 - 심리학, 어른의 안부를 묻다
김혜남.박종석 지음 / 포르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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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는 '가벼운' 심리 서적이나 자기 계발서를 거의 읽지 않는다. 이 책의 제목도 페북에서 투표할 때 사실 반대했었다. 이 책의 제목,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를 읽으면 드는 생각은 두 가지이다. 첫째, 겉껍질만 어른이고 속은 애라는 걸 이제 인정해?평균 수명이 길어지며 서른이 넘고 마흔이 넘어도 도통 어른이 아닌 사람이 부지기수인 걸 이제사 인정하나? 두 번째, 괜찮다는 건 남이 괜찮다는 말을 백 번 해줘서 괜찮은 게 아니고, 남이 쓴 괜찮다를 백 번을 읽어 괜찮은 게 절대 아닌데, 뭘 자꾸 괜찮다는 제목의 책을 만들지...뭐 이런 반발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제목에 사람들이 가장 많이 반응한다니, 그냥 그렇다고 치자. 중요한 건 내용이니까.

처음에 우울증 얘기나 나올 땐, 책을 읽지 말까 싶었다. 하아....또 우울증 얘기가 싶었다. 우울증 이야기라면 우울증 상담 내용을 환자 입장에서 책으로 쓴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부터 시작해 창궐하지 않는가 싶어서. 하지만 뒤로 갈수록 이 책의 내용은 묵직해지고 깊어졌다. 역시 전문가들의 지식 + 경험이 우러나오며 포스가 느껴진다.

읽은 내용 중 니 책이 의미심장한 통찰을 보여준 부분을 옮기자면 아래와 같다.

- 감정은 분출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감정을 마구 쏟아내며 그게 해소한다고 많이들 착각하는데, 감정의 기본 속성은 '소통'이므로 표현되어야 하지, 쏟아내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쏟아내면 외려 그 감정이 강화/ 악화된다.

- 과거의 불행을 인정하기에 있어서 사람들이 저지르는 오류가 있다. 
과거의 불행을 인정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점인 것은 맞으나, 여기서 사람들은 과거의 불행에 대해 많이들 오해한다. 그 불행을 다시 불러내어 다시 괴로워지며 불행과 싸우는 것이 해결방법이 아니다. '그래, 난 과거에 그랬지' '그래, 난 과거에 어리석었지.' 이걸 담담하게 인정하고 그레서 힘든 시간을 보내고 난 이만큼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인정하는 게, 과거의 불행을 인정하는 방법이라고 저자들은 적고 있다.

- 거짓 자아? 
김혜남 선생님이 이 거짓 자아 부분, 부모가 사회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와서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이 뭔지 모르겠다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엄청난 통찰을 보여주신다. 그렇게 남에게 맞춰 만들어진 자아, 거짓 자아를 버리고 극복하고 싸워야 하는 게 아니라고. 본인이 원하지 않고 괴로워 했을지라도, 지금까지 살아온 삶은 모두 '내'가 살아온 삶이라고. 거짓 자아도 내 일부라는 것을 거리를 두고 본 후, 자아에 통합시키는 것이 해결책이지, 버리고 싸우고 새로운 자아를 찾는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내게 유미의했던 부분은, 몇 가지가 있다. 내가 어디까지 왔고, 어떤 부분을 이미 언어로 - 내가 깊이 들여다 보고 만들어낸 내 언어로 - 인지하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자기 자아의 중심추를 드리우는 지각까지 왔고, 감정을 더 풀어내는 자유를 찾을 필요가 있겠다는 인식까지 왔다. 결핍으로 글을 써서 호흡 가쁘고 에너지 넘치던 글쓰기를 지나, 이젠 무엇을 위해, 왜 써야 하지?를 다시 골라야 하는 단계이기도 하다. 그래서 문학으로 다시 돌아가 있기도 하다 - 은유의 글타래, 그 안온한 비유와 상징의 거울을 다시 들여다 보며 날 고르고 있다.

본문 중에 여성들의 화병에 대해 말하며 이를 '신체화 장애'라고 일컫으며 저자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체화 장애는 언어표현이 억압되어 있는 문화권에 많이 나타난다. 자신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감정을 억누르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마음의 이야기를 속 시원히 표현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구절에서 '언어 표현이 억압되어 있는 문화권"이라는 말은 한국 사회의 많은 이들에게 해당된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에 말이 끓어넘치는 이유 중 하나도 아마, 비로소 목소리를 찾은, 그러나 길잃은 목소리들이 많아서라는 생각도 든다.

<어른이 되면 괜찮을 줄 알았다>같은 책은, 이제서야 목소리를 내려는 많은 이들에게, 목소리를 내고 싶은데 길을 은 목소리들에게, '단어'를 들려준다. 자, 이게 당신을 표현하는 말이에요!'하고. 이름을 얻은 인식은 그제서야 자기 길을 찾는다. 당신 길의 등불이 된다. 당신 속에서 꿈틀거리나 그 단어를 찾지 못해 꺼집어 내지 못하고 혼란스러울 때에 그 감정, 그 인식을 불러줄 말, 그 이름을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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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책으로 -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을 읽는다는 것
매리언 울프 지음, 전병근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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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 <책읽는 뇌>를 읽고 읽는 것이 좋다. 책 내용은 만만치 않다. 전공분야가 리터러시이고, 리딩과 뇌에 대해 읽어서 알고 있는데도 그렇다. 번역은 책 읽는 뇌 쪽이 더 낫다 - 언어학 전공자 번역이 이해도가 높아 훨 나은듯. Biliterate brain을 양손잡이 뇌라 번역한 것도 마음에 안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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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 지성 세계를 향한 열망, 제어되지 않는 사랑의 감정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서정일 옮김 / 녹색광선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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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혼란>

혼란스러운 작품이기는 했다. 그런데,감정의 혼란이라는 제목이 맞는 걸까, 이성의 혼란이 더 맞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굉장히 19세기적인 감성이기는 했다. 특히, 이성과 감정의 이분법이 너무 예리하다는 점에서. 츠바이크는 오히려 그 이분법으로 인간이 얼마나 고통받아야 하는지, 이를 어떻게 잘 통합하는 것이 인간으로 잘 사는 것인지에 대해 말하고자 했다고 해석하고 싶다.

이 책의 초반에 갓 20세가 된 젊은이는 (불행히도) 지성과 정욕의 세계에 동시에 입문한다. 19세기 말 혹은 20세기 초 베를린이라는 도시를 꿈틀거리는 거대한 육체로 묘사한 장면이 압권인건 지성을 상징하는 대학도 바로 그 꿈틀거리는 도시 안에 있다는 점 - 인간과 똑같이.

잔인하다는 생각이 드는 건, 여자와 동침한 아들의 침대를 행여 손이라도 대면 더러워질까 장갑도 벗지않는 아버지를 묘사하는 부분이었다. 인간의 본성을 저렇게 압박하는 이분법의 칼날이 너무 예리하다는 생각에 섬뜩했고, 과연 이건 빅토리아 시대적인 인식과 감성이 맞거든.

롤란트의 멘토이자 영감의 원천이었던 영문학 교수를 포스트마던 시대에 그린다면, 반쪼가리 자작 정도로 묘사되겠지 싶지만, 이분법으로 자신의 지성과 자신의 정욕을 스스로 이분법의 칼로 매번 내리쳐야 하는 그 고통만 하겠나 싶기도 하다.

정욕이 죄인 시대에 동성애에 빠진 정욕은 정말로 감옥에 가야할 범죄이기도 했으니까. (오스카 와일드가 어떻게 비참하게 죽었는지 생각해보면 그 당시 정서도 이해가 가고, 젊고 예쁜 남자들이 계속 집에 드나들었다는 소문만 무성히 남은 롱펠로우도 이렇게 비참했겠구나 싶다.)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자신의 정욕을 나누어진 다른 세계 - 사창가와 하류 인생들이 헤매는 도시의 밑바닥을 기어가는 하이드처럼 때로 뗴어내어 배분하고 스스로를 증오해야 하는 삶이란 보기에 너무 아팠다. 선과 악에 대한 인간의 인식이 19세기말보다 더 진일보한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놀랍고도 슬픈 건 그 지점이다.
자기 분열의 균열, 그 영혼의 크레바스에서 터져나오는 위대한 조각들. 그 영문학 교수가 뿜어내는 열정들. 한 젊은이의 영혼을 완전히 사로잡을 만큼 대단한 열정과 영감이었다. 그런데, 그 열정과 그 영감은 바로 이원론의 칼로 스스로 그리고 사회가 베어 만든 균열에서 터져나온다고 하면 그런 역설의 미학은 또 없을테지만, 그게 또 진실이기도 하지.

롤란트는 지성은 교수에게, 감성과 정욕은 교수의 아내에게, 마찬가지로 이분해서 분배한다. 문학에서 경계까지 가는 인간은 기록자가 된다. 오래 살아남아 회고록을 쓰지. <어둠의 심장부>가 실체로 현현된 인간의 악에 스스로 먹혀 죽어가는 커츠를 보고 돌아온 말로우가 쓴 구술하는 회고담인 것처럼 말이지.

영문학 교수는 흔적도 없이 사그라졌지. 자기 분열의 고통, 그 불꽃이 위대한 입자로 반짝일 때 그걸 글로 옮길 힘이 없어서. 그런데, 그거 아나? 셰익스피어도 동성애자였다는 설이 있는 것? 무수한 그의 시에서 칭송한 Dark Lady가 남자 파트너라는 설이 있으니까. 예술가는 그런 것 같다. 사회와 자신이 분열하는 지점에서 터져나오는 화산들 같다. 문제는 그렇게 터뜨려 어떤 이들은 위대한 예술가로 남지만, 많은 이들은 반짝였다가 그렇게 이름도 없이 사그라진다는 거지. 세익스피어도 어쩌면 그 위대한 불꽃의 동력은 스스로를 찢어발기는 자기 분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 쏟아낼 수 있는 언어들이니까.

롤란트 같은 인간은 경계까지 가서 그걸 들여다 보고만 돌아오는 인간이다. 그래서 오래 살아 은퇴도 하고 기념문집도 받고 말이지. 그 교수의 삶은 겉보기엔 부도덕한 것 같지만, 자기 분열에 있어 그토록 충실했지. 사그라들지라도. 고통 한 알 한 알까지 진실했으니까. 롤란트는 어정쩡하게 맛만 보고 물러나 오래 산다 - 겉보기에는 선하게. 실제로는 비겁하게. ㅋㅋㅋ

츠바이크가 롤란트를 통해 미처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 그 지독한 지성과 정욕의 이분법, 그 칼날 아래 가장 뜨겁게 고통스러워하는 영혼과 만나 머리와 몸으로 나뉘어져 같이 한동안 고통스러워 했던 젊은이는...어떻게 그 이분법을 통합시켜 잘 늙어 회고담까지 쓰는지 말하지 않는다. 그 경험을 통해 지성도 인간, 정욕도 인간이라는 걸 껴안지 않으면, 잘 늙기 힘들었을텐데 말이지. 가끔 작가들이 나레이터로 택한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기만이라는 게 있는데, 롤란트의 경우, 기만인지, 기망인지...잘 모르겠다.

알겠는 건 한 가지이다. 지성과 정욕 혹은 이성과 감정이 통합되지 못해 빚어지는 극도의 혼란을, '감정'의 탓으로 돌려, 이 책의 이름이 '감정의 혼란'인 것, 그건 알겠다. 아니면, 츠바이크가 독자들에게 던지는 질문일까? 이건 과연 감정만의 혼란이겠냐고?

세계의 혼란을 참을 수 없이 자신의 이성의 결정으로 죽음을 택한 작가는 과연 무엇을 의도했을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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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찮은 여자들 - 세상의 룰을 깬 여성 29인의 인생수업
캐런 카보 지음, 박다솜 옮김 / 모멘토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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숀다 라임즈 외엔 모두 백인 여성들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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