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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마법사 1
나루시마 유리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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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남과 다른 것이 그리도 큰 십자가인가 과연? 어차피 인간은 아주 조금의 차이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요상한 메타볼리즘을 지닌 존재들이 아니던가. 이 몸뚱아리들은 말이다. 결국 아주 조금 다른 존재들이 함께 득실득실 모여 살아내는 세상아닌가 말이다. 때론 같아지라는 집단의 압력에 굴복하고 때론 반항하면서 말이다. 근데...많이 차이나게 다르다고?

집단에 속하는 인간들은 말이다. 너무도 쉽사리 자신들이 의당 짊어져야할 자아라는 짐을 집단에 넘겨버린다...그리고는 책임 지려하지 않는다. 왜 나만 갖고 그래? 하며 모든 인간의 우매함을 인간 집단의 일반적인 특질로 환원시키려고 한다. -- 사특한 것들.쯧쯧. 태어날때부터 그 지극한 차이때문에 어거지로 자아라는 무거운 짐을 질 수 밖에 없었다고? 난 축복이라고 봐...그런식으로든 그짐을 질수 있다면.

이노무 집단 주의적인 한국땅과 일본땅에서는 차이를 지향하는 인간들이 좀 더 많이 늘어나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서도, 아무리 기를 써고 그게 단순히 발가벗고 아버지의 멜론모를 쓰고 거울을 바라보는 정도의 반항기로 끝나고 마는 사비나식의 치기어린 반항이라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中) 그래봤자 부질없다는 생각도 들거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맘에 들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의사 소통을 꾀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대하고....등등등.

나기는 자신의 동류가 하나도 없으니 차라리 차이를 자각케하는 타자들이 없어서인지 몰라도 외려 자신의 존재를 자연스레 잘 받아들이던데 말야. 역시...이 인간이 지닌 상대성은 운명의 굴레인가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를 지향해야하는. 오,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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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1 - 현경 순례기 1
정현경 지음 / 열림원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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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한국 교회의 지극히 가부장적인 행태가 싫다. 난 한국 교회의 유교적 잔재가 싫다. 난 한국 교회가 사회적 배출구가 차단된 여자들이 모여 대리로 사회적 성취감을 찾고자 격전의 장으로 변질 된 것이 싫다. 실제 자매 수가 훨씬 더 압도적인 한국 교회에서 남자 장로 들이 허세 부리고 앉아았는 동안 여자 집사님들 예배도 참석 못하고 쭈그리고 앉아 밥하는 꼴 보기도 싫다.

'순종'이라는 미명 하에 내가 가진 천의 얼굴 중에 단 한가지 얼굴만 보이도록하는 그 답답함이 싫다. 왜 모두 나긋나긋 웃으며 찬송과 율동을 잘하는 지극히 여성적인 특질 들에만 믿음 좋은 여자라는 딱지를 붙인단 말인가. 마리아 만이 내 얼굴은 아니란 말이다. 차라리 이교도들이 보았던 그 얼굴, 관세음 보살, 인도의 칼리 또한 아테네 또한 다 내 얼굴들이다.

난 하나님이 인간처럼 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차피 인간은 신이 인간의 언어로 말씀해주기 전엔 결코 신을 이해할 수도 없다. 하나님이 남성의 몸으로 성육신 하신 건 단지 시대적인 편의였다고 생각할 뿐이다. 난 예수 그리스도의 지극히 여성적인 특질들 때문에 외려 그를 사랑한다. 그가 분노하고, 울 줄 아는 인간의 몸을 입었었고, 그 몸을 찢음으로써 인간을 구원했기에 그를 사랑한다.

신앙의 궁극적인 경지가 정적인 해탈이라고? 난 어차피 보이는 것, 만질 수 있는 것에 갇혀진 인간일 뿐이다. 난 고매한(? - 훗.....) 정신을 통해서만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 아니다. 난 내가 가진 모든 것, 내 몸, 내 언어, 내 죄,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춤을 추며 신의 얼굴을 만진다.

춤이 내가 되고 내가 춤이 되는 순간, 난 베일이 벗겨져 모든 것을 분명히 보듯이 신의 얼굴을 보게 될 것이고, 내 얼굴의 눈물을 닦아주는 내 하나님 어머니를 보리라, 믿는다.

난 정현경이 추는 춤을 좋아한다. 유혹의 원죄를 걺어지고 유혹한 불결하고 피흘리고 새끼를 낳는 고통으로 찢어지는 여자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중의 살, 뼈중의 뼈...로 창조 받은 여자 속의 신의 이미지를 사랑한다.

남자는 여자를 만들기 위한 질료에 지나지 않았다고 아담과 하와를 해석하는 발칙한 해석이 좋다. 육체를 긍정하지 않고, 자신의 죄를 긍정하지 않는 자가 어찌 구원에 이를 수 있으랴. 그네들은 모른다. 여자들이 자신들의 몸을 '긍정'한다고 할 때, 담긴 그 의미를. 욕망이 죄라면, 한번이라도 욕망의 주체가 되어봐야 할것 아닌가...나 그때 머리 풀고 고개를 땅에 박고 난 하나님 어머니 앞에 차마 고개들 자격도 없는 여인이라 고백하리라.

예수님은 2000년 동안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했다고? 예수꼐서 십자가에 달려 인간을 구원한다,는 표현에 쓰이는 히브리어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구속하는 시제라고 들었다.

그는 지금, 내 앞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항상. 난 차라리 그 나무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핥는 개가 될지언정, 그의 죽음을 관조하고, 멀찍이서 음미하는, '몸뚱아리'가 없는 철학 따윈 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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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사냥의 역사
오성근 지음 / 미크로 / 200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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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 사냥은 게르만 부족사회의 잔재를 중세 기독교 가부장제로 효과적으로 편입시킨 방법이었다.

부족 사회에서 약초와 민간 전승 요법으로 여성들의 출산, 임신, 기타 의학 지식을 가지고 지식의 힘을 휘두르던 여성들을 비롯 사회 성원 재생산을 할 능력이 없어진(결국 가부정제 내에서 여자의 효용 가치란 이게 가장 중요 하겠지만) 늙은 여자들, 그들의 사회적 지위에 위협이 되는 경제적 파워를 가진 여자들을 마녀 사냥이란 이름 아래 화형 시키고 여성들을 무지하게, 가난하게, 순종적으로 길들인 폭력의 역사이다.

현대에 들어서며 여성들의 몸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 고양이 그리도 중시되는 것은, 자신의 성,임신, 출산에 대한 지식을 남성들의 전유 지식으로 박탈당한 채 남성들의 진찰대, 수술대 위에 영원한 타자로 올라야 했던 굴욕의 역사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사후 피임약을 왜 그리도 그들이 반대 하냐구? 성적인 방종 때문에? 여자들이 임신과 출산에 대한, 성에 대한 기득권을 되찾는 것이 두려운 게지.

온 몸을 바늘로 찔러 피가 한 방울도 안나는 곳이 있으면 마녀, 돌을 묶어 강에 던져 떠오르면 마녀라 다시 끌어내 화형시켜 죽이고, 안떠올라 걍 익사하면 마녀는 아니지만 이미 아쉽게도 죽었고....이런식의 마녀 감별법은, 정말 참,으,로, 이성적이 더구만.

그네들의 역사를 누가 이성의 역사라 하는가 말이다. 누가 그네들이 여성들보다 이성적이라고 보편화 하도록 사회화 시켰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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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와 마녀와 옷장 나니아 나라 이야기 (네버랜드 클래식) 2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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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지금 30대 입니다. 초등 시절에 읽은 동화입니다.^^옷장안에 숨은 루시가 옷장을 통해 나니아로 가는 정면이 참 매혹적이죠.하얀 마녀의 통치 아래 겨울 만 계속되는 나니아에 사자 아슬란이 목숨을 희생해 나니아 사람들(?)을 구원하고첫 아담이 지은 죄를 속죄하죠.여기 사자 아슬란은 예수 그리스도의 알레고리 입니다.폰이라던가 반인반마 같은 이교적인 존재들이기독교적 상징과 잘 어우러진 매혹적인 동화입니다.

젤 먼제 이 동화가 나오고, 글고 루시의 삼촌 디고리가 어떻게 나니아의 창조의 순간에 개입하고 악을 나나아에 데려갔는지가 마법사의 저카에서 설명이 되죠.성바오로 출판사에서 젤 먼저 출판했었죠.찔끔찔끔 한권씩 시리즈를.대학교 때 미처 전권이 번역이 안된 뒷권들을원서로 찾아읽었습니다....^^개인적으로는 동녘호의 모험과 은으로 만든 의자를 좋아합니다.하지만 역시 압권은 사자와 마녀와 옷장이죠.^^서구 문학에 등장하는 온갖 상징들을쉽게 그리고 아주 오래 기옥할만큼 인상깊게 접할 수 있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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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뽀로 여인숙
하성란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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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동이라는 존재가 참 흥미있게 그려져 있다. 진명/ 선명 쌍동이는 차라리 진명 내의 남성성/ 여성성으로 읽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다. 분리를 거쳐 다시 통합에 이르는. 가지고 태어난 남성성(선명)을 일단 거부하는 발돋움이 자아 찾기의 시작이라면, 선택을 통해 자신속의 남성성을 받아들이는 결말이 결국 자아의 통합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사실 선명과 분리되고 나서(선명이 죽고 나서) 진명은 무엇을 찾겠다는 듯 달리기 시작하고 이성(김동휘)의 주목을 끌기 시작한다...그리고 정인,이라는 남자를 거쳐 고스케를 만나 안착하게 되지 않는가.

사실 한 사람이 지니고 태어난 sexuality라는 거, 남자든 여자든 반대 성의 기질은 어느정도 가지고 태어나게 되어있고, 사회화 되는 과정에서 한 쪽을 거부당하면서 사회화에 굴종하던가 치열하게 맞서 통합의 과정에 이르던가.... 둘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싶다.

고스케에 대해 별 설명이 없는 것도 결국 자기 속의 이미 익히 알고 있는 타자를 만났기 때문에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없는것이다.

삿뽀로가 메마른 강바닥이라고? 강바닥으로의 하강? 무의식으로의 하강을 통해 또 다른 나와 조우하는 initiation 소설이다. 삿뽀로 여인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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