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구판절판


"어때, 뭐 재미있을 만한 거 없나?"
"없네."
교고쿠도는 간발의 차도 두지 않고 대답했다.
"그러니 이런 걸 읽고 있지. 하지만 말이지 ─── 재미있다, 재미없다는 자네의 척도에 따라서도 다르지만, 애초에 이 세상에 재미없는 책 같은 건 없어. 어떤 책이든 재미있는 법이지. 따라서 읽은 적이 없는 책은 대체로 재미있지만, 한 번 읽은 책은 그것보다 재미있어하는 데에 좀더 수고가 든다, 그저 그뿐일세. 그렇게 생각하면 자네에게 있어 재미있는 책은 여기에 쌓여 있는 정리 안 된 책뿐만 아니라, 그 쪽 책꽂이에 벌써 수 년 전부터 먼지를 뒤집어 쓰고 계속 꽂혀 있는 책도 해당될 걸세. 그걸 찾는 건 쉬운 일이니, 냉큼 골라서 사게나. 공부도 가끔은 해야 하지 않겠나?"-14p쪽

"원래 이 세상에는 있어야 할 것만 존재하고, 일어나야 할 일만 일어나는 거야. 우리들이 알고 있는 아주 작은 상식이니 경험이니 하는 것의 범주에서 우주의 모든 것을 이해했다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상식에 벗어난 일이나 경험한 적이 없는 사건을 만나면 모두 입을 모아 저것 참 이상하다는 둥, 그것 참 기이하다는 둥 하면서 법석을 떨게 되는 것이지. 자신들의 내력도 성립과정도 생각한 적 없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나?"-23p쪽

"마음과 뇌는 서로가 없으면 안 되는, 조직폭력배와 물장사 같은 거라네. 어느 한 쪽이 맛이 가 버리면 꽤 귀찮은 분쟁이 일어나지. 하지만 이건 각자가 만족하기만 하면 대개 수습이 돼. 뇌나 신경에는 물리적인 치료를 할 수 있고, 하지만 마음이 그런 기관들과 다르다는 증거로, 다른 기관들이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가도 분쟁이 수습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네. 그럴 때 종교가 유효하지. 종교란, 다시 말해서 뇌가 마음을 지배하기 위해 만들어낸 신역이라는 궤변이니까."-32-33p쪽

"그런데, 자네 증조부님은 잘 계시는가?"
하고 물었다. 나는 당혹스러웠다.
"갑자기 무슨 소린가? 그렇게 얘기를 얼버무리지 말게."
"누가 얘기를 얼버무렸다는 건가? 어때, 잘 지내시는가?"
나는 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증조부님은 뵌 적도 없어. 자네도 알지 않는가? 우리 할아버지도 내가 다섯 살 때 타계하셨네.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에 귀적에 오르셨는걸."
"그럼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자네는 모르겠군."
"존재하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실제로 그 증손자인 내가 존재하니까."
"뭐, 그건 좋아. 그럼 자네의 할아버지는 어때? 존재하는가?"
"지금 말했잖은가. 할아버지는 다섯 살 때 돌아가셨어. 이것은 내가 아무리 바보라도 기억이 있으니, 존재한 것이지."
"자네가 그 기억째로 태어났다면 어떻겠나? 쉽게 말해서 자네가 이 세상에 탄생한 것은 방금 전, 이 곳에 오기 직전이고, 자네는 그 때까지의 기억을 전부 다 가진 채 이 세상에 뚝 떨어진 것이라 해도, 지금의 자네로서는 구별할 수 없지 않은가? 내 말이 틀렸나?"-45p쪽

나는 갑자기 바다에 내던져진 갓난아기 같은 공포감을 느꼈다. 아니, 공포라기보다는 쓸쓸함이나 공허에 가깝다. 마치 진흙 배가 바다에 녹아 버린 것 같았다.
"그런 일 ─── 아니, 그런 바보 같은 일은 있을 수 없어. 나는 날세."
"어떻게 아나? 자네로서는 판단할 수 없을 텐데. 자네의 추억도, 자네의 현재도, 전부 방금 전에 자네의 뇌가 적당히 만들어낸 것인지도 모르지 않나? 마치 공연 첫날 개막 직전에 아무렇게나 갈겨쓴 극작가의 대본처럼 말일세. 언제 다 썼는지는 ─── 손님인 자네로서는 전혀 알아볼 수 없는 거지."-46p쪽

"가상현실과 현실의 구별은, 자기 자신은 절대로 할 수 없는 법이야. 세키구치 군. 아니, 자네가 세키구치 군이라는 보증조차 없는 걸세. 자네를 둘러싼 모든 세계가 유령처럼 가짜일 가능성은, 그렇지 않을 가능성과 똑같이 존재한다네."-46p쪽

"자네에게도 치료의 효과가 있군. 그 말 그대로일세. 말이라는 것이 바로 주술의 기본이야. 자네에게는 '세키구치 다츠미'라는 주가, 내게는 '교고쿠도'라는 주가 걸려 있는 거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용하고 있지만 말이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분명히 존재했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옛날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기록이지, 결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아는 게 아닐 걸세. 선에서 말하는 불립문자(불도의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는 것이지, 문자나 말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라는 거지. 이에야스의 존재는 사실이라도, 우리들에게 '이에야스'는 현실이 아닌거야. 하지만 우리들은 때로 이에야스를 알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네. 이것은 '이에야스'라는 말이 가져오는 정보를 담고 있는 기억의 창고와, 우리들의 실제 체험을 담고 있는 기억의 창고가 같은 창고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류일세. '말'에 의한 정보도 '체험'한 정보도 '기억'이 되면 결국 똑같아져 버리거든. 즉 우리들은 만난 적도 없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유령을 보게 될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61p쪽

에노키즈는 그제야 내 쪽을 보았다.
단정한 얼굴. 놀랄 만큼 커다란 눈. 다갈색을 띤 눈동자. 피부색깔도 동양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늘 만큼 하얗다. 햇빛이 비치면, 머리카락 색깔조차 밤색을 뛰어넘어 갈색으로 보인다.
색소가 옅은 사람이다.
아아, 서양 도자기인형을 닮았다, 하고 생각했다.-118-119p쪽

"어쨌든 자네의 이야기는, 사실 관꼐는 애매하고 시간 관계는 뒤죽박죽인 데다 시점까지 이리저리 바뀌어서, 젼혀 요령이 없지 않은가. 그걸 일일이 질문하다가는 시간이 걸릴 테니 일단 전부 듣고, 내 나름대로 정리하고 나서 말하려고 한 걸세. 딱히 자네 쪽을 보지 않았다고 해서 듣고 있지 않았던 것은 아니야. 귀는 닫을 수 없는 법이니, 그렇게 옆에서 주절주절 떠들어대면 듣기 싫어도 들린단 말일세."-120p쪽

"그렇다네. 꿈에는 물론 소리나 냄새나 맛도 있지만 대개는 시각이 중심인 것으로 생각되는데, 그것은 코나 귀나 피부는 자고 있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야. 귀는 닫을 수가 없으니 말일세."-170p쪽

"그래. 몇 번이나 말했듯이 기억에는 의식에 등장하지 않는 것도 많이 있어. 이보게, 세키구치 군, 자네는 자주 건망증을 일으키곤 하지 않는가. 뇌가 아무리 기억을 재구성해주어도, 어떤 착오가 일어나 어찌 해도 의식의 무대에 올라오지 않는 것일세.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은 대개 본인이 잃어버리는 셈이니, 뇌는 알고 있다는 뜻이 되지."-174p쪽

"알겠나, 새키구치? 주체와 객체는 완전히 분리할 수 없어─── 다시 말해 완전한 제삼자란 존재할 수 없는 걸세. 자네가 관여함으로써 사건도 변하게 되네. 그러니 자네는 이미 선의의 제삼자가 아니게 된 거야. 아니, 오히려 자네는 이제 당사자가 되었네. 탐정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사건도 있어. 탐정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란 말일세. 알겠나? 마른 과자는 뚜껑을 열었을 때 그 성질을 획득했을 가능성도 있단 말일세. 사건도 마찬가지야."
딸랑, 하고 또 풍경이 울린다.
남매는 말없이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179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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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에쿠니 가오리 지음, 김난주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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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실함, 이란 무츠키에게는 상당히 소중한 것인 모양이다. 성실하기 위해서라면 그는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친족 회의처럼 성가진 희생이라도 말이다. 덕분에 나는 무츠키의 몫까지 챙겨 점점 불성실해진다.-171p쪽

무츠키와 잘 수 없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태연하게 부드럽고 자상한 무츠키를 견딜 수 없다. 물을 안는 기분이란 섹스가 없는 허전함이 아니라, 그것을 서로에 대한 콤플렉스라 여기고 신경을 쓰는 답답함이다.-183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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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유 범우문고 2
법정스님 지음 / 범우사 / 2004년 5월
절판


아름다운 장미꽃에 하필이면 가시가 돋쳤을까 생각하면 속이 상한다. 하지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가시에서 저토록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났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감사하고 싶어진다. <너무 일찍 나왔군>-30p쪽

이해란 정말 가능한 걸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하노라고 입술에 침을 바른다. 그리고 그러한 순간에서 영원을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 이해가 진실한 것이라면 항상 불변해야 할 텐데 번번히 오해의 구렁으로 떨어진다.-31p쪽

나는 당신을 이해합니다 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언론의 자유에 속한다. 남이 나를, 또한 내가 남을 어떻게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이해하고 싶을 뿐이지. 그래서 우리는 모두가 타인이다.-31p쪽

'자기 나름의 이해' 란 곧 오해의 발판이다. 우리는 하나의 색맹에 불과한 존재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 색맹이 또 다른 색맹을 향해 이해해 주지 않는다고 안달이다.-32p쪽

오해란 이해 이전의 상태 아닌가. 문제는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느냐에 달린 것이다. 실상은 말 밖에 있는 것이고 진리는 누가 뭐라 하건 흔들리지 않는다. 오전한 이해는 그 어떤 관념에서가 아니라 지혜의 눈을 통해서만 가능할 것이다. 그 이전에는 모두가 오해일 뿐이다. <오해>-33p쪽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든 것은 무쇠로 된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 <설해목>-34p쪽

사형수에게는 일분 일초가 생명 그 자체로 실감된다고 한다. 그에게는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늘 오늘을 살고 있는 것이다. <종점에서 조명을>-40p쪽

용서란 타인에게 베푸는 자비심이라기보다, 흐트러지려는 나를 나 자신이 거두어들이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탁상시계 이야기>-47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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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2 조반니노 과레스끼 선집 2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이승수 옮김 / 서교출판사 / 2006년 5월
구판절판


시계를 멈추게 할 수는 있지만 시간을 멈추게 할 수는 없어.-43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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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귀고리 소녀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양선아 옮김 / 강 / 2003년 8월
구판절판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더 그림을 응시했다.

자세히 보면 볼수록 뭔가가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마치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거과 같았다.

똑바로 바라보고 있으면 좀처럼 찾을 수 없는 밤하늘의 별 말이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면 눈 끝으로 살짝 보았을 때 별은 더 밝게 다가온다.-54p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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