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들은 다 일가친척이다 - 함민복 에세이
함민복 지음 / 현대문학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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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가수 김세환씨가 가수 조용필씨의 노래 '들꽃'을 자신만의 통키타 반주로 리메이크해서 부르는 것을 우연히 TV에서 보고 느낌이 좋아서 결국 음반까지 산 적이 있다.

그 후에 노래 좀 한다는 선배와 그 얘기를 하는 중에 선배가 했던 얘기가 기억에 남는다.

"노래를 잘 부른다는 것이 쉬운 게 아니지만 김세환처럼 조용필의 노래를 힘 빼고 자신만의 느낌으로 잘 부를 수 있다는 것도 정말 어려운 거야......그건 네가 불러보면 알겠지만...."


힘 빼고 노래 부르기.......

함민복의 글을 읽고 난 후에 드는 느낌이었다.

자못 치열한 삶도, 비장한 죽음도 그의 글을 통해 구경하는 세상사는 핏대를 세워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둑길 같은 곳에서 조용히 읊조리는 흥얼거림 같이 다가온다.

그런데도 나는 책을 읽으며 순간순간 울컥했고.......또 간간히 책을 덮었다.
또 어느 행간에서는 피식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힘 빼고 부르는 노래라고 해 놓고 웬 울컥 이냐고 自問할 수도 있겠지만 조그만 일상에서 커다란 담론을, 거대한 역사에서 조그만 삶의 편린들을 끄집어내는 그의 노래는 아름답고 또 집요한 구석마저도 있었다. 
 

그의 글에 나오는 어머니, 동네형님, 친구, 마당의 개와 고욤나무, 또 산과 강과 나무가 우리 곁엔들 왜 없겠는가?

그와 같은 글쓰기 능력이야 나와 같은 범부의 입장에서는 논할 것이 되지 못하지만 같은 사람과 사물을 보면서도 그와 같은 생각의 따라잡기를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지난해 촛불집회에서 그가 경찰의 폭력진압으로 크게 다쳤다는 기사를 보고 너무 놀랐었는데 책에는 후유증이 심한 것으로 나와 있다.
함민복과 같은 시인을 마구잡이 방패로 내려찍은 정권의 야만성에 다시 한번 고개를 떨군다. 
 

이제 그는 동네형님을 따라 숭어 잡이를 갈 수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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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야구가 생겨날 때 부터 이 팀의 팬이었습니다. 

최근 몇년간 참 지지리도 성적이 좋지 못해서 짜증 엄청 났었는데......  

올해 정규리그도 2게임 밖에 남지 않은 오늘 우연히 팀 홈페이지에 들어갔다가 아래 글을 봤습니다.

http://www.lgtwins.com/community/yard/yardView.jsp?seq=368316&gseq=-355421&sseq=0&no=2&noticeYN=N&yyear=2009
 

한달여 동안 편지를 썼네요........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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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일 씨, 나는 그가 더 슬펐다

이지상/ 인권연대 운영위원

아버지 영정 앞서 울지 못한 홍일 씨

고문의 상처는 시대의 아픔과 겹쳤다
 


 그 사람이 궁금했습니다. 하얀 국화 꽃송이에 묻혀 옅은 웃음 짓고 있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영정 앞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두리번거리기만 한 사내. 손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국화꽃 한 송이를 고인의 제단에 힘겹게 올리며 누군가가 밀어주는 휠체어에 앉아 허공만 바라보던 그 사내. 전 국회의원 김홍일이었습니다.
 

 검은 치마저고리에 흰 리본을 머리에 꽂고도 차마 남편을 보낼 수 없어 고개 들지 못하는 어머니의 슬픈 어깨를 쓸어주지 못하고, 망연자실해 하는 가족들의 가슴을 안아주지도 못한 채 비둘기 속살 같이 흰 머리카락의 무게조차 버거운 듯 겨우 고개만 들고 있던 그는 고 김대중 대통령의 장남이었습니다.
 

 파킨슨씨병을 앓고 있다고 했습니다. 90년대부터 서서히 진행되던 병이 그가 의원직을 잃고, 언론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난 2006년 즈음에는 급속히 진행 되어 그를 휠체어에 주저앉힌 것입니다. 언론은 그가 민주화 운동의 과정에서 두 번의 옥고를 치루고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는 것과 그 때문에 몹쓸 병을 얻었다는 사실을 보도했습니다.
 



지난 23일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마당에서 열린 고 김대중 대통령 영결식 장면.
사진출처 - 시민사회신문
 

 그의 어머니 이희호 여사도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때 고문의 와중에도 혐의를 허위로 자백하지 않기 위해 홍일 씨가 자살기도까지 했었다고 자서전에서 증언하기도 했습니다. 단군 이래 가장 위대한 지도자 중 한사람을 잃은 슬픔도 컸지만 자신의 생명을 던져 지키고자 했던 아버지의 죽음에도 통곡으로 답하지 못하는 백치가 된 아들의 눈빛은 국장(國葬)기간 내내 더 큰 슬픔으로 기억에 남습니다. 그의 몸짓 하나하나가 야만의 시대, 고문의 잔혹사를 증명하는 표식이 되어 이 쓸쓸한 역사를 향해 거칠게 항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마취 없는 외과 수술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학살로 들어선 전두환 신군부 세력이 김대중을 비롯한 민주인사 20여명을 북한의 사주를 받아 광주민주화 운동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입니다. 자신이 저지른 학살의 책임을 민주인사에게 돌리고 그 중 김대중을 수괴로 낙인찍어 결국 대법원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됩니다.
 

 그 사건에 관련된 이들은 예외 없이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거꾸로 매달려 물 몇 양동이를 마시는 건 기본이고, 갖가지 고문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수사관을 엄마라 부르기도 했으며 고문 수사관이 지치거나 진술서를 쓸 때를 제외하고는 조사기간 내내 심한 매질을 당했습니다.
 

 그 즈음 광주시민 학살을 규탄하는 유인물을 돌리다 붙잡힌 시인 황지우는 자신이 당한 고문을 ‘마취 없는 외과수술’이라고 했습니다. “거꾸로 매달린 내 몸에서는 나도 모르게 어찌할 수 없는 짐승소리가 났다. 죽을 수 있는 희망조차 없던 그곳에서 고문의 효과는 견딜 수 없는 자기 혐오감이었다. 나는 그 혐오감을 기본 정서로 80년대를 살았다. 죽을 수도 살수도 없었던 시절에 나는 견딜 수 없어서 시를 썼다.”(나의작품 나의 얘기-흉측한 삶, 80년대 고문체험 중)
 

 그의 고백에서 묻어나는 절절한 아픔을 짐작할 길은 없지만, 나는 2006년 남영동 평화 인권센터 준비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번 들어가면 모두가 간첩이 되어서야 나올 수 있었던 남영동 대공 분실의 구조를 보고 놀랐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건축은 빛과 벽돌로 짓는 시”라고 읊었던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 김수근에 의해서 지어진 이 건물은 거짓을 진실로 자백받기 위한 오직 고문의 용도로만 만들어 졌습니다.
 

 50센티미터가 족히 넘는 두께의 대문을 넘으면 피의자들이 출입했던 건물 뒤편의 조그만 문이 나옵니다. 두 눈을 가린 피의자들이 문을 들어서는 순간 ‘철컹’ 대는 철문이 닫히고, 나선형 계단을 따라 수십 바퀴쯤 돌아 5층 조사실에 도착할 때는 모든 피의자가 방향감각을 상실한 채 곧이어 닥칠 끔찍한 상상을 하며 공포에 떨어야 했습니다. 거기서 민주당 고문 김근태는 수사관의 발밑을 기며 살려달라고 애원했고, 박종철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습니다.
 

 그렇게 수많은 반국가 단체의 조직사건이 만들어 졌고, 납북어부와 조국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재일교포 학생들도 간첩이 되었습니다.
 

 그대는 아직도 잠자는 돌
 


 살인적 고문이 민주화 인사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전두환 신군부는 자신들의 집권에 반대하는 조그만 틈새조차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치는” 애국자만이 살 수 있었던 그 시대에는 신문 연재소설의 삐딱한 한구절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만나게 되는 얼굴, 정부의 고위관리가 이상스레 촌스런 모자를 쓰고 탄광촌 같은 델 찾아가서 그 지방의 아낙네들과 악수하는 경우, 그 관리는 돌아가는 차 속에서면 다 잊을 게 뻔한데도 자기네들의 이런저런 사정을 보고 들어 주는 게 황공스럽기만 해서…. 세상에 남자 놈 치고 시원치 않은 게 몇 종류가 있지. 그 첫째가 제 복 좋아하는 자 들이라니까. 그런 자들 중에는 군대 갔다 온 얘기 빼놓으면 할 얘기가 없는 자들이 또 있게 마련이지.”
 

 작가 한수산은 1년 동안 아무 일 없이 중앙일보에 연재 해왔던 소설 <욕망의 거리>에 삽입된 단 두 구절 때문에 1981년 5월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끌려가 책 한권으로는 다 쓰지 못할 고문을 당했습니다.
 

 조선시대 사극에서나 나올법한 장단지 사이에 각목을 끼우고 주리를 트는 고문, 얼굴에 수건을 뒤집어 씌우고 고춧가루 물을 퍼붓는 고문, 열 손가락에 전선을 묶어놓고 스위치를 올리는 전기고문까지. 이미 널리 알려진 한수산 필화 사건의 개요입니다.
 

 산문시에 가깝게 유려하고 서정적인 문체로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작가는 이 사건을 계기로 절필을 선언했고, 그를 고문했던 노태우(당시 보안사령관)가 대통령이 된 1988년 고국을 등지게 됩니다.
 

 이 사건에 함께 연루되었던 7명중에는 고독한 술꾼, 서정을 사랑한 시인 박정만이 있습니다. 소설가 김성동의 표현대로 그는 기갈지옥에서나 온 것처럼 액체로 된 것이라면 하다못해 농약까지도 마시고 싶어 했던 술꾼 이었습니다.
 

 ‘이마를 짚어다오,/산허리에 걸린 꽃같은 무지개의/술에 젖으며/잠자는 돌처럼 나도 눕고 싶구나.
 

 -중략-
 

 말이 죽고 한 침묵이 살아/그것이 더 큰 침묵이 되더라도/이제 내 눈을 감겨다오./이 세상 마지막 산, 마지막 선 모양으로.(잠자는 돌, 박정만 시)
 

 술을 사랑했던 만큼 인간의 묻어둔 감성을 사랑했던 한국 서정시의 별은 한수산과 함께 끌려갔던 3박 4일이 지난 후, 모든 것이 불타버린 숲에 남은 흐느적거리는 연기처럼 자신을 버렸습니다. 직장을 잡지도 못했고, 가정을 원만히 꾸리지도 못했습니다. 그가 혹독한 고초를 겪은 이유를 그 자신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말이 죽고 침묵만 살아 더 큰 침묵이 되었던 살기어린 시절의 저녁이면 그는 어김없이 술에 취했고, 술에 취하면 누구든 붙잡고 물었습니다. “내가 왜 그 고통을 당해야 했는지를 제발 알려 달라”고.
 

 한수산과 같은 대학을 나왔고, 책 출판 관계로 몇 번 만났던 이유로 보안사에 끌려간 한국의 마지막 서정시인 박정만은 고문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88올림픽 폐막식이 열리던 10월 2일 오후 봉천동 그의 집 화장실에서 고작 마흔 셋의 나이에 ‘잠자는 돌’이 되었습니다. 그의 임종을 지킨 것은 그가 죽기 전 시마(詩魔)에 들어 초인적인 힘으로 옮겨 적은 300여 편의 시 뭉치뿐이었습니다. 그는 생전에 자신은 민주화 운동가도, 아무것도 아닌 사람임을 강조했었다고 합니다. 야만의 시대에는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야만성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독백으로 읽힙니다.
 

 그의 통곡하는 모습을…
 

 인권연대 운영위원회가 끝나고 뒷풀이를 하는 지난해 가을 밤 늦은 시간, 함께 있던 오창익 사무국장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가을 저녁에 취해 거나하게 술을 마신 그의 지인이 경찰과 시비가 붙어 공무집행 방해혐의로 경찰서에 끌려갔다는 것입니다. 부랴부랴 경찰서에 찾아간 그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하게 됩니다. 자신을 끌고 온 경찰에게 항의 했다는 이유로 그의 지인은 손목에 수갑이 채워진 채 말 한마디 못하고 있었다는 겁니다. 아무리 사소한 이유라도 경찰의 권위에 도전 하는 시민은 용서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입니다.
 

 그 사실 하나 만으로도 MB시대 인권의 시계가 얼마나 거꾸로 돌아갔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30년 전 군사정권이 했던 일중 ‘고문 빼고는 이 정부가 다 하는 것 같다’는 한 인권변호사의 넋두리는 이제는 고문도 할 것 같다는 우려가 되고, 곧 현실이 될지도 모릅니다.
 

 생전에 고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을 괴롭혔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노할 사람들이 너무 많아 자신이 더 괴로울 거라고도 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그에게 사형선고를 내렸던 전두환 씨는 전직들이 가장 편했을 때가 국민의 정부 시절이었다는 덕담(?)도 했습니다.
 

 전두환 씨가 서거하신 아버지의 영전에 꽃을 바쳤을 때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던 김홍일 전  의원의 심정은 어땠을까를 생각합니다. “죽음의 고통은 주되 죽음이라는 영원한 휴식은 주지 않았던(황지우 윗글)” 고문자의 환영을 그의 시선은 쫓아가지도 못하고, 사지는 굳을 대로 굳어 고문자의 멱살잡이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는데도 과연 김홍일은 전두환을 용서할 수 있을까.
 

 국장 기간 내내 비친 그의 모습에서 원귀처럼 되살아나는 고문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부모 잃은 슬픔을, 꺼이꺼이 우는 그의 목소리라도 들었으면, 부리부리 했던 큰 눈으로 쏟아내는 눈물이라도 보았으면 마음이 이리 착잡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김홍일 전 의원, 그가 울부짖으며 통곡하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다시 일어나 고문으로 얼룩진 이 잔혹한 역사 위에 회한의 곡소리 한번 크게 우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화해와 용서, 사회통합의 메시지를 강조한 고문자들의 레토릭은 해원(解怨)의 통곡이 끝난 뒤에 논해도 좋을 듯 합니다.

 이지상 위원은 현재 가수겸 작곡가로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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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칭) 성·인종 차별 대책위원회 기 자 회 견


○ 일 시 : 2009년 7월 27일 오후 6시 30분

○ 장 소 :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종로구 숭인동)


○ 순 서

1. 기자회견 취지 소개와 참석자/단체 소개 (사회: 이대훈/아레나)

2. 한국 사회의 성·인종 차별

(1) 당사자 발언 1 (보노짓 후세인 / 성공회대 연구원)

(2) 당사자 발언 2

(3) 이주민에 대한 인종주의적 차별 (마붑알엄 / 이주노동자영화제 집행위원장)

(4) 가부장적 성차별과 인종주의 (정혜실 / 다문화가족협회 공동대표)

(5) 난민단체 (토나 이욤비 / 콩고 난민)

(6) 성공회대학교 입장 (성공회대학교 정해구 교수/교학처장)

3. 기자회견문 발표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 참가단체 및 개인 (가나다순) (* 개인 참가자는 계속 확인중입니다)

강서양천이주여성의집,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국제민주연대, 다문화가족협회, 마하이주민지원단체협의회, 민주주의연구소, 보노짓 후세인(성공회대 연구원), 부산여성회,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 성공회대학교, 수원여성의전화, 아레나(아시아대안교류회), 아시아의 친구들, 언니네트워크,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이주노동자노동조합, 이주노동자의 방송(MWTV), 인천여성의전화, 조희연 (성공회대 통합대학원장), 조효제(성공회대학 사회학), KASAMMA KO(필리핀이주공동체), The HanFil Association(한-필 결혼이주자협회), 토나 이욤비(콩고, 난민),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대구이주여성인권센터, 부산이주여성인권센터, 전남이주여성인권센터, 전북이주여성인권센터, 충북이주여성인권센터)


○ 문 의

아레나(아시아대안교류회) 02-2610-4751

이대훈 dlee@pspd.org (영어, 한국어), 진홍잉 chy7211@gmail.com (영어, 중국어)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 02-3672-8988

허오영숙 wmigrant@naver.com


○ 첨 부 : (1) 기자회견문: 대책위 입장과 활동계획

(2) “인종주의-성차별 공격사건 사실관계” 개요  



(가칭) 성·인종 차별 대책위 기자회견문

- 입장과 활동계획 -







1. 한국 사회의 성·인종차별


동남아시아 및 아프리카 출신 이주자들에 대한 인종차별적 행동 및 공격이 한국에서 상당히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다수 이주자들은 취약한 한국 내 지위 때문에 이러한 인종차별의 문제를 일상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개인의 삶 속에서 작은 방식으로 저항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이주자들 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며 출신국의 경제적 상황, 출신국에 대한 한국 사회의 편견, 피부색, 한국 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직업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차별받는 이주자들의 수많은 이야기들은, 신분과 계급, 백인-서구 숭배 등 세계를 우열관계로 보는 다양한 차별의식이 인종주의와 결합될 때 얼마나 배타적이고 공격적으로 드러나는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종주의적 공격은 한국에 유학 온 학생이나 연구자에게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는데, 최근에 부천의 한 버스에서 한 한국인이 인도인 보노짓 후세인과 같이 동행한 한국인 여성에게 인종차별적이고 성차별적인 욕설을 퍼부었던 사례에서도 드러납니다. 더욱 큰 문제는 경찰서에서 역시 이들이 성차별적이고 인종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사실관계 진술자료 참조, 첨부).


이는 가장 반인권적이고 혐오스러운 차별이념의 하나인 인종주의가 한국 사회의 큰 문제로 자리 잡았고 그 피해의 정도와 심각성이 큰 반면, 이에 대한 각성이나 공론화, 경찰 등 인권관련 기관의 의식이나 대책이 매우 미흡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또 이 사건에서처럼 인종주의는 성차별, 가부장적 가치와 결합해 더욱 공격적으로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관심과 대책 역시 심각하게 부족합니다. 더구나 최근 인권기준과 인권보호제도가 크게 후퇴하고 있는 상황에서 인종주의와 성차별이 결합된 차별과 공격의 피해가 더욱 우려됩니다.


이러한 공격은 소위 ‘백인’으로 간주되는 사람들과 소위 ‘백인’과 함께 있는 한국인들에게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면에서, 그리고 소위 ‘노동자’로 간주되는 사람들에게 더 공격적으로 나타난다는 면에서, 외국인혐오를 넘어서서 한국 사회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는 다양한 차별이 인종주의와 적극적으로 결합하는 양상을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 사회 내에서 다양한 차원에서 이주자에 대한 인종 차별이 광범위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관한 문제가 제대로 가시화, 공론화되지 못한 것에 대해 한국 시민사회는 반성적 성찰을 하고 경종을 울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보노짓 후세인씨와 동행한 사람이 겪은 사건은 숨겨져 있는 커다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쉽게 도움이나 관심을 촉구하지조차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때문에 이주자 사회와 제한된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이러한 성·인종차별 사례와 상황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고 알릴 필요가 있으며, 아울러 조속히 피해자에 대한 지원과 정책적 대안을 포함하는 대책활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좀 뒤늦은 느낌이 있지만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인종차별의 문제가 시민사회 내에서 중요한 의제로 설정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특히 한국 사회의 특성상 긴밀한 관련을 갖고 있는 성차별과 인종차별을 동시에 제기하는 공동 대책과 실천이 필요합니다.




2. (가칭) 성·인종차별 대책위원회의 결성과 활동



이러한 성차별적, 인종주의적 차별과 공격에 대응하기 위하여, 2009년 7월 27일 인권, 이주, 난민, 민주주의, 아시아연대와 관련하여 활동을 전개하는 시민·사회단체와 이번 사건 당사자가 소속된 성공회대학과 아레나(아시아대안교류회)는, 동의하는 단체와 개인들과 함께 성·인종차별에 대항하는 공동대책기구를 결성합니다.


(가칭) 성·인종차별 대책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활동목표를 세우고 뜻을 같이 하는 단체와 개인들을 계속 초청하여 함께함으로서 목표 맞는 다양한 활동을 시작하고자 합니다.


대책위의 활동 목표와 계획


1. 가시화되지 않은 인종차별 피해자의 목소리와 피해를 가시화하고, 연대와 지원을 제공하며, 인종차별에 관한 정보와 자료를 축적하고 공유한다.


2. 토론회, 직접행동, 언론기고, 기자회견 및 다양한 활동을 인종차별 문제를 대중화하는 캠페인을 전개한다.


3. 인종주의와 계급차별 그리고 가부장제가 서로 연결되어 작동하고 있음을 부각시킨다.


4. 성·인종차별 상황을 종합 정리하여 유엔인권이사회 정례보고서 등 한국 인권상황 보고서에 포함시킨다.


5. 외국인과 이주자를 고용·초청·상대하는 모든 기관에 성·인종차별에 대한 대책과 절차를 세우고, 이를 기관 내에 교육 등을 통해 공론화, 제도화할 것을 요구한다.


6. 시민·사회단체, 학교, 교육기관 등의 프로그램에 인종차별문제가 중요하게 포함되도록 공론화하고 협의한다.


7. 인종차별 문제를 다른 형태의 차별과 연결시켜 대응함으로써 향후 차별 방지와 관련된 법제정의 기초가 되도록 한다.


대책위원회는 또한 보노짓 후세인과 동행한 한국인에 대한 가해사건에 대해서는, 가해자의 사법처리와 경찰 행위의 적절성에 관한 국가인권위원회 조사를 동시에 요구할 것이며, 조사에 따라 성·인종차별 해당 경찰관 징계 조치와 관할 경찰 책임자의 사과를 요구할 것입니다. 또 다른 유사한 침해사실을 조사할 것이며, 이를 위하여 알려진 사건을 언론 기고와 여러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공론화할 것입니다.

 


2009년 7월 10일 인종주의-성차별 공격사건 사실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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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9-08-05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길지만 맨 마지막 부분 사실관계를 꼭 읽어봐 주셨으면 합니다.
 

그들이 처음 왔을때....

  

  Friedrich Gustav Emil Martin Niemöller

(1892.1.14– 1984.3 6) was a Protestant pastor and social activist.

 

 

Als die Nazis die Kommunist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Kommunist.

 나치가 공산당원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Sozialdemokraten einsperr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Sozialdemokrat.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뒀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Gewerkschafter holten,
habe ich nicht protestiert;
ich war ja kein Gewerkschafter.

 그들이 노동조합원에게 갔을 때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die Juden holten,
habe ich geschwiegen;
ich war ja kein Jude.

 그들이 유태인에게 갔을 때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으니까.


 

 

Als sie mich holten,
gab es keinen mehr, der protestierte.

 그들이 나에게 왔을 때
항의해 줄 누구도 더 이상 남지 않았다.

 

 

  

그들이 촛불 든 시민을 때리고 짓밟아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촛불집회에 가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용산 철거민들을 불태워 죽였을 때도

나는 아무렇지 않았다.

나는 철거민이 아니었으니까

 

 

그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한 전교조 선생님을 해직하고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을 정리해고 했을 때도

나는 항의하지 않았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고 해고당하지도 않았으니까.

 

 

그들이 시민들의 반대와 언론노조, 야당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언론악법을 국회에서 통과 시켰을 때도

나는 괜찮았다.

어차피 ‘개그콘서트’와 ‘1박2일’은 계속 볼 수 있을 거니까...

 

 

마침내 그들이 나와 내 가족을 잡아 갔을 때

어떤 언론사에서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나와 함께 항의해줄

그 어떤 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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