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김용운]故 송인득 아나운서가 후배에게 남긴 것
2007년 05월 23일 오후 14:28
김용운기자 woon@joynews24.com

23일 새벽 MBC 송인득 아나운서가 향년 49세로 갑작스럽게 별세했다. 사인은 간경화에 따른 위정맥류 파열이었다.

1981년 MBC에 입사한 송인득 아나운서는 특히 스포츠 중계로 일가를 이룬 아나운서로 유명하다.

시청자들은 송인득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통해 메이저리거 박찬호의 투구에 환호했고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우리 선수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월드컵의 아쉬움과 영광의 순간을 송인득 아나운서와 함께 했다.

송 아나운서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네티즌들은 안타까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송 아나운서의 부고 기사마다 수백 수천개 댓글이 달리며 고인을 추모했다.

그만큼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다는 증거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다른 길로 외도 없이 20여 년 간 아나운서 외길을 걸어온 고인의 삶이 특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최근 각 방송국에서는 아나운서를 연예프로그램에 전진 배치해 아나운서의 연예인화를 종용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시청자들의 인기를 얻은 아나운서 몇 몇은 거액의 전속금을 받고 방송국을 떠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아나운서가 연예인이냐고 비난하는 시청자들도 늘었고 그들의 변신을 이해해야 한다는 시청자들도 늘었다.

결국 아나운서 스스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모색하기 위해 세미나를 여는 상황까지 왔다. 송 아나운서가 별세하기 하루 전인 22일 오후 아나운서연합회는 '아나운서, 그는 누구인가'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세미나에서 '아나운서 프리랜서 경향과 대안모색'이란 주제로 발제를 맡은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김현주 교수는 "최근 몇 몇 아나운서가 재벌가와 결혼한다거나 고액의 계약금을 받고 연예기획사로 자리를 옮기는 현상을 보고 아나운서에 대한 시청자들의 시선이 선망에서 질시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KBS의 강성곤 아나운서는 "아나운서는 언론인이다"며 "후배들 가운데 이런 모습과 배치되는 경우가 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의 전규찬 교수는 "아나운서는 아나운서이면서 동시에 연예인이자 스타이면서 교수이기도 한 분열적 다중인격체"라며 "현실적으로 변화된 아나운서들의 활동형태를 그대로 인정한 상태에서 논의를 출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렇듯 송인득 아나운서의 부고와 아나운서 정체성 모색 세미나를 겪으며 '아나운서는 누구인가'는 질문이 기자의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현 상황에서 아나운서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단언할 수 없다. 세미나에 참석한 한 교수의 말처럼 모든 것이 해체되는 21세기 신자유주의 시대에 아나운서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직종이 정체성에 대한 혼란을 느끼고 있는 현실인 까닭이다.

23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송인득 아나운서는 요즘 말하는 '스타아나운서'는 아니었다. 그는 20여 년간 묵묵히 스포츠 현장에서 아나운서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자신의 책임을 다했을 뿐이다. 스포츠 중계라는 자신의 전문영역을 개척하며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결국 송인득 아나운서는 국내 처음으로 스포츠 전문아나운서라는 명함을 가지게 됐다. 시청자를 염두에 두고 아나운서 한 길을 걸어온 덕분이다.

송 아나운서는 생전 MBC 아나운서 커뮤니티 언사운사의 인터뷰를 통해 "처음에 스포츠 중계에 매진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프로그램의 얼굴이 되고 주목을 받는 것과 스포츠 캐스터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고 밝혔다. 송 아나운서 역시 입사 초기 인기를 얻고, 돋보이고 싶은 신입 아나운서 중 하나였지만 이내 자신의 길을 정하고 그 길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한 것이다.

시청자들은 이런 송인득 아나운서를 잊지 않고 있었다. 방송이 아무리 달라져도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하게 한 길을 걸어온 ‘스타가 아닌’ 아나운서를 시청자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변화된 방송환경에서 아나운서들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의심하고 새롭게 정의내릴 필요가 있다. 그러나 아나운서들이 먼저 고민해야 할 부분은 '시청자를 향해 스스로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성찰 아닐까?

삼가 송 아나운서의 명복을 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연두부 2007-05-23 2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야구 캐스터 중에 가장 좋아하는 분이었는데...너무 마음이 아프다...스포츠 중계란 것이 2-3시간씩 하는 생방송이기 때문에 간혹 말실수도 나올 수 있는데 송 아나운서는 그런 실수가 거의 없었고, 냉정함과 감성을 적절히 배치해서 참 맛깔나게 방송을 했었다고 생각한다...50살도 안된 나이에 가시다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홍수맘 2007-05-24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너무 놀라고 마음이 아팠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천재소녀'의 시는 수업 시간에 쓰여졌다
[인터뷰] '그날'의 정민경씨 "난 시를 좋아하는 평범한 여고생"
홍성식 기자
▲ '그날'을 쓴 경기여고 정민경씨.
ⓒ 광주일보 안현주 제공

백준(song2100)
어린아이의 글을 읽고 눈물이 나네. 젊은 시절 5·18에 가슴 아려하며 눈물콧물 흘리던 시대정신을 이십여 년이나 잊고 살아왔는데. 어린 녀석이 삭아있던 내 양심의 찌꺼기를 들춰내며 눈물을 밀어내네. 눈물이 나네.
천지창조(earthnsky)
바로 눈 앞에서 펼쳐지는 듯 그 때 원한이 살아 꿈틀대어 나에게 점점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오월 광주는 우리 역사 속에 길이 살아 남을 생명수입니다.
- <오마이뉴스> 독자의견 중에서.

유미자님 생각
훌륭한 작품이네요. 5·18 묘역의 수많은 이름 모를 님들의 '넋'을 다시 한번 위로해 드리고 싶네요.
아라봐님 생각
지금도 겁은 없어지지 않고, 때때로 삶 속에서 비겁한 나를 본다. 이제부터 자전거를 제대로 보기 어렵겠다.
scorpion rock님 생각
소름이 쫙 돋아오르는 이 느낌! 대체 얼마만에 제대로 된 감동을 주는 시를 만난 건지!
- <미디어다음> 독자의견 중에서.


5·18민중항쟁 기념 제3회 서울 청소년백일장 대상 수상작인 경기여고 3학년 정민경씨의 시 '그날'을 읽은 후 네티즌들이 보인 반응이다.

관련
기사
5월 광주, 열여덟 소녀 천재시인을 낳다

심사위원들로부터 "1980년 5월 광주 그날의 현장을 몸 떨리게 재현했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 '그날'.

열여덟이라는 나이를 무색케 하는 빼어난 시적 형상화와 역사인식 수준이 기자 역시 놀라웠다.

그 놀라움은 시를 쓴 학생에 대한 호기심으로 발전했고, 그 호기심은 결국 정민경씨와의 인터뷰로 이어졌다.빼어난 시적 재능을 지닌 범상치 않은 소녀와의 만남에 기대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지난 13일 오후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5·18민중항쟁서울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난 정민경씨는 '시 읽고, 시 쓰는 것을 좋아하는'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이었다. 그 평범함 속에서 어떻게 그토록 비범한 시가 나온 것인지 궁금했다.

아래는 그 의문을 풀기 위해 정민경씨와 나눈 일문일답이다.

▲ 지난해 5월 18일 광주광역시 살레시오고등학교 학생들이, 자신들의 선배이자 5·18 당시 시민군 대변인 역할을 했던 윤상원 열사를 참배했다. 이들 학생들은 매년 윤 열사에게 종이학 1천마리를 접어 선물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강성관
- 시에 대해 관심을 가진 건 언제부터인가?
"유치원 때부터 동시 읽는 걸 좋아했다. 책을 읽고 그 느낌을 글로 남기는 것도 좋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땐 독후감을 써서 당선돼 상품권 20만원 어치를 받기도 했다. 엄마가 좋아하더라(웃음)."

- 특별히 영향받은 작가나 좋아하는 시인이 있는지.
"이상 시인의 시는 매력적이다. 이어령 선생의 책도 많이 읽었다. 하지만, 책 읽는 것 이상으로 음악도 좋아한다. 피아노와 첼로·기타 연주하는 걸 즐긴다."

- '5월 광주'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다. 시적 형상화가 힘들지 않았나?
"일단 쓰기 시작하면 상상을 많이 한다. 그 상상으로 시의 뼈대에 살점을 붙인다. '그날'의 경우 첫 구절은 친척 어른이 들려준 이야기를 그대로 옮겼다."

- '그날'에서 보여지는 질박한 호남 사투리 구사에 놀라는 독자들이 많은데.
"1989년에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서울로 이사온 6살 때까지 광주에서 살았다. 유치원 시절까지를 광주에서 보낸 것이다. 게다가 나주에 할머니가 살고 계신다. 그 분의 말투를 어릴 때부터 들어온 때문이 아닌가싶다."

"내 꿈? 소외받는 사람들 위해 무료 법률상담소 여는 것"

- 쓴 시를 보면 '5월 광주'와 '통일' 등에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영향을 끼친 사람이 있는가?
"평소 대학에서 단과대 학생회장을 맡고 있는 오빠와 이야기를 많이 한다. 중학교 3학년 때부턴 한국 현대소설을 열심히 읽었다. 박노자의 책도 좋아하고…. <한겨레신문>도 매일 보긴 한다. 그런 것들이 종합돼 관심사가 그런 쪽으로 간 것 같다."

- '5월 광주' 때문에 고통받는 친척이 있는지. 또, 시인이나 소설가 친척이 있나?
"없다. 그림을 그리는 분은 있는데, 문학을 하는 친척은 안 계신다."

- 앞으론 뭘 하고 싶은가? 시인이 될 생각인지.
"현재로선 시는 취미에 가깝다. 법학이나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싶다. 내 꿈은 소외 받는 사람들을 위해 무료법률상담소를 여는 거다."

- 적지 않은 네티즌이 "대단한 시적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부끄럽다. 난 그저 시 읽고, 시 쓰는 걸 좋아하는 평범한 여고생에 불과하다."

- '그날'을 쓰기까지의 과정을 요약해준다면.
"담임선생님이 ' 5·18 관련 백일장이 있다' 걸 조례 때 알려줬다. 참여하기로 마음먹고 수업 시간에 살짝살짝 몰래 썼다(웃음). 완성까지 40~50분쯤 걸린 것 같다."

- 광주 5·18묘역에는 가봤는지.
"아직 못 가봤다. 대학생이 되면 가보려고 한다. 기회가 된다면 항쟁의 피해자들을 만나 교과서에 나오지 않는 역사적 진실을 들어보고 싶다."

- 시 쓰는 것 외에는 어떤 걸 좋아하나?
"록음악을 자주 듣는다. '자우림'의 김윤아가 좋다. 그의 앨범 모두를 가지고 있다. 악기 연주하는 것도 재밌다."

- 어려운 질문일 수 있다. 시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마음으로 느낀 것을 마음으로 전달하는 게 아닐까."

열심히 읽고, 깊이 생각하고, 많이 써보는 것... 감동 주는 시 만드는 힘

인터뷰를 통해 의문은 풀렸다. 정민경씨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3가지 조건, 즉 '열심히 읽고, 깊이 생각하고, 많이 써본다'는 불변의 대원칙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생 오빠와의 토론과 부지런한 독서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정리하려는 노력까지.

'천재 소녀시인'을 만난다는 기대는 '비범함은 평범하고도 성실한 노력 속에서 태어난다'는 보편적 진리를 깨닫는 것으로 끝이 났다.

그러나, 실망스럽지 않다. 정민경씨가 그랬듯 다른 중고생들도 열심히 읽고, 깊이 생각하고, 많이 써본다면 누구나 사람들을 감동시킬 빼어난 시를 써낼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래, '통일'을 노래한 정민경씨의 또 다른 시 '니얄 봄'을 올린다. '그날'을 통해 선물 받은 눈물과 가슴 찡함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앞날이 더 기대되는 한 소녀시인의 시 2편이 '감동하는 가슴'을 잃어버리고 살았던 우리의 감수성을 깨운다. 한없이 부드럽지만, 그 안에 역사가 남긴 상처와 교훈을 담고있는 5월 바람 같다.

▲ 2005년 8월. 남북이산가족 화상상봉이 이뤄지고 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니얄 봄

큰마니 죽지마오.
니얄 봄 곱게 화장해
내 저 리북 보내줄테니
죽지마오.

내 저 가시난 쇠붙이 위 새에게 물어보았소.
-너는 어드메서 왔네.
-내레 큰마니 아들 뒷뜰에서 왔시오.
-울 큰마니 아들 잘 살고 있드나.
-그렇디요. 니얄 봄 큰마니 뵈러 온다 했수다.

내 저 약수 같은 강물에게 물어보았소.
-너는 어드메서 왔네.
-내레 큰마니 딸 앞뜰에서 왔시오.
-울 큰마니 딸 잘 살고 있드나.
-그렇디요. 니얄 봄 큰마니 뵈러 온다 했수다.

큰마니 죽지마오.
니얄 봄 곱게 화장해
내 저 리북 보내 줄테니
죽지마오.

2007-05-14 19:03
2007 OhmyNews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재벌 때려잡는 게 우리시대 진보?"
'장하준 다시 보기' 논쟁 재점화... 장하준-김창근의 지상 논쟁
    김연기(yeonki75) 기자   
▲ 장 교수는 <한겨레21> 5월 7일자에 기고한 '재벌 때려잡으면 서민에게 이득이 되는가'란 제목의 글을 통해 최근 이 잡지를 통해 불거진 '장하준 다시보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장하준 교수(캠브리지대 경제학부)는 과연 노동자와 농민, 중소업체, 자영업자, 일반 서민 등 '약한 계급'의 이익을 옹호하지 않고 진보의 가장 큰 걸림돌인 재벌들과 타협을 했는가?

이 같은 질문에 "그렇다"고 단언한 김창근 경상대 교수(사회과학연구원)에 대해 장하준 교수가 직접 반박하고 나섰다. 이를 계기로 이른바 '장하준 다시보기' 논쟁이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다.

장 교수는 <한겨레21> 5월 7일자에 기고한 '재벌 때려잡으면 서민에게 이득이 되는가'란 제목의 글에서 최근 이 잡지를 통해 불거진 '장하준 다시보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장하준은 신자유주의 공격하면서 재벌 옹호?

장하준 교수는 누구?

86년 서울대 경제학과를 나왔다. 당시 대학 동기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갈때, 그는 영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가 둥지를 튼 곳은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이곳에서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난 90년 10월 만27 세의 나이로 한국인 최초의 케임브리지대 교수가 됐다.

80년대 후반 미국식 개발경제학에서 벗어나 영국에서 공부한 것도 남달랐지만, 그는 영국에서도 주류경제학이 아닌 ‘제도경제학’이라는 독특한 분야를 전공했다.

지난 2002년 영국과 미국 등 선진국들의 강력한 보호무역 정책을 꼬집으면서, 그들의 위선적인 세계화를 고발한 '사다리 걷어차기(Kicking away the ladder)' 를 출간했다. 이어 2003년엔 신고전파 경제학에 대안을 제시한 경제학자에게 주어지는 '뮈르달상'을 한국인 처음으로 받았다.

이후 장 교수는 '개혁의 덫', '쾌도난마 한국경제' 등의 책을 출간했으며, 최근에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질적 문제제기인 '국가의 역할'을 펴내기도 했다. / 김종철 기자
장 교수의 입장을 살펴보려면 먼저 김창근 교수가 지난 4월 12일자 <한겨레21>에 기고한 글을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김 교수가 보기에 장 교수는 "과거의 제도에만 매달리며 진보성을 상실"한 경제학자다.

그는 "장하준 교수는 한국에서 신자유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한적인 무역, 산업정책 또는 민주적인 발전국가를 제안한다"며 "그 목적은 노동자와 농민, 중소업체, 자영업자, 일반 서민 등을 희생시키더라도 재벌들을 초일류 초국적 기업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 장하준 교수를 신자유주의를 공격하면서도 재벌을 옹호하는, 이를테면 '좌도 우도 아닌' 경제학자로 평가한 것이다. 사실 장 교수가 속한 제도주의 정치경제학은 통상 우파로 분류되는 신고전파와 태생부터 다르며, 그렇다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마르크스 경제학과도 궤를 달리한다.

국내 주류 경제학을 신고전파가 장악했다면 진보 경제학은 과거 운동권 계보를 잇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세력이 강하다. 자연스럽게 장 교수의 이론은 좌우 모두에 도전적일 수밖에 없으며 반대로 이 둘로부터 협공을 받기도 한다. 김 교수의 비판은 다분히 좌파 진영에 서서 몰아붙인 공격이라 할 수 있겠다.

김창근 교수는 또 장 교수의 '국가 역할론'에 대해서도 "제도에만 초점을 맞추고 계급 문제를 등한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며 비판했다. 장 교수는 그의 저서 <국가 역할론>을 통해 "신자유주의는 이론적으로 틀렸으며 그 대안은 국가의 역할을 신중하게 복원하는 것이다"는 주장을 폈다.

하지만 김 교수는 "우리나라의 경제발전은 국가정책을 잘 써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냉전구조에서 차관을 많이 받고 수출시장 접근도 손쉽게 하는 가운데 노동자를 '초과착취' 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며 "그러나 장 교수의 발전국가론은 (이 같은 조건을 무시한 채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있어서) 국가와 재벌의 역할만을 강조했다"고 지적했다.

재벌 때려잡는 게 우리시대 진보?

이 같은 김 교수의 비판에 대해 장 교수는 "필자(장하준)의 주장이 계급론적 관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와 마찬가지라고 하는 김 교수의 주장에는 수긍할 수 없다"며 이를 조목조목 반박했다.

그는 우선 "김 교수가 장하준의 '계급타협에 기초한 민주적 발전-복지국가' 모델을 비판하면서 제시하는 '진보적' 대안이 과연 무엇이며, 그것이 과연 김 교수가 위하는 노동자와 농민, 중소업체, 자영업자, 일반 서민에 도움이 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인가"라고 되물었다. 즉 현실적 대안에 대한 고민이 없는 비판에 대해서는 수긍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한 셈이다.

장 교수는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김 교수가 '우리 편'(노동자, 농민, 중소업체, 자영업자, 일반 서민)으로 규정한 집단들 사이에는 이해의 충돌이 없는가"라고 되레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는 우선 "중소기업들이 대기업보다 더 가혹하게 착취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렇다면 노동자와 중소기업이 한 편이 될 수 있는가"라고 김 교수에게 물었다.

또 "조세저항과 탈루가 높기로 유명한 우리나라 자영업자의 이해와 세금을 가지고 복지국가를 만들면 이익을 보는 노동자, 농민, 서민의 이해는 어떻게 일치시킬 수 있는가"라고 반문했다. 마지막으로 "농민보다 다른 '우리 편'의 수가 훨씬 많은데, 그렇다면 농민을 희생하더라도 한미FTA를 하는 것이 '진보'인가"라고 역설했다.

즉 재벌을 때려잡는 것 말고는 김 교수가 규정하는 '우리 편' 사이의 공통 이해란 찾아보기 힘들다는 게 '김 교수의 장하준 다시보기'에 대한 장 교수의 입장인 셈이다. 장 교수는 더 나아가 "재벌타도가 우리 편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 할지라도 과연 재벌을 때려잡는 것이 '우리 편'의 이익이고 '진보'인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재벌 응징은 여우 잡으려고 호랑이 들이는 격

▲ 장하준 캠브리지대학 교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러면서 그는 김 교수가 미처 꺼내들지 못한 '대안'에 대해서도 동시에 고민을 했다. 그는 "우리의 주어진 현실 속에서 노동자, 농민 등 사회적으로 약자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가장 유리한 것은, 재벌들을 외국 금융자본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을 대가로 그들에게 복지국가와 적극적인 정부규제를 받아들이게 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장 교수는 이어서 "재벌을 부정하면 우리에게 남는 대안은 국제금융자본이 들어와 단기 이윤을 위해 경제를 굴리는 것이다"며 "이미 외환위기 이후 지난 10여 년간 우리가 목격한대로 이 체제는 저투자, 저성장, 저고용, 그리고 고용불안을 불러 온다"고 지적했다. 즉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재벌을 응징하는 것은 여우 잡으려고 호랑이 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장 교수는 "재벌들은 그나마 이씨 가족, 정씨 가족이라는 구체적인 실체가 있고, 과거에 국민들에게 진 빚, 잘 알려진 나쁜 행실의 기록 등 약점이 많아 싸우기가 상대적으로 쉽다"며 "그러나 재벌총수 가문들을 쫓아내고 국제금융자본이 우리 경제를 장악하게 되면, 우리는 뉴욕과 런던에 앉아 있는 누구인지도 모르는 펀드매니저들과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의 역할과 관련해서도 김 교수의 비판이 여전히 '대안'의 문제에 소홀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박정희가 밉고, 현정부 관료들이 문제가 많다고 국가의 역할을 원론적으로 부정해 버려서는 안 된다"며 "김 교수가 바라는 대로 '진보적'이고 '자본 편향적'이 아닌 국가 개입의 모델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고 꼬집었다.

그러면서 장 교수는 "(김 교수가 바라는 것이) 이미 그 실패가 낱낱이 드러난 과거 사회주의 계획경제인가, 아니면 마르크스가 가끔 이야기하던, 국가가 소멸한 목가적인 공산주의 사회인가"라며 "둘 다 아니라면, 결국 개입주의적 국가 역할의 재정립이 '진보적' 의제의 일부가 될 수 없다는 김 교수의 주장은 본의 아니게 자유방임주의를 지원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글을 맺었다.

도저히 양립 불가능할 것처럼 보이지만 좌파와 우파로부터 각각 '재벌 옹호자', '신자유주의 파괴자'라는 비난을 동시에 뒤집어 쓰고 있는 장하준 교수. 그러나 이 같은 '모순'은 장 교수의 경제철학을 좌우의 이념적 스펙트럼으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넌센스'라는 점을 되레 상기시켜 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논쟁을 지켜본 'sparkscieng'이란 아이디의 한 누리꾼의 지적은 곱씹어볼만하다.

"장하준은 신자유주의의 '위선'을 공격했지만, 자유무역의 확대라는 '흐름'을 부정하거나 맞서 싸운 것은 아니다. 여러 나라의 경제발전과정을 들여다 본 그의 학문적 업적으로부터 우리가 '응용'할 것은 얼마나 영악하게 우리의 잇속을 차릴 것이냐 하는 것이지, 거룩한 민중 자본주의를 구현하는 것도, 국가 개입을 강화하여 준계획경제로 가는 것도, 보호무역주의로 회귀하여 고립되는 것도 아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연두부 2007-05-08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손이 가리키는 달을 봤으면...손가락만 보지 말고

마법천자문 2007-05-08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하준 교수 주장에 틀린 곳 하나 없는데, 한국 강단좌파 찌질이들은 언제까지 마르크스 시체나 뜯어먹고 살려는지 정말 한심하네요. ㅉㅉㅉ
 

돌풍의 '닥터 K', 최창호
[야구의 추억, 마흔 다섯 번째] 돌핀스 '삼총사 전설'의 가운데 자리
김은식 기자
▲ 최창호의 투구
ⓒ 현대 유니콘스 홈페이지
야구를 보다보면, 가끔 그런 선수가 있다. 선동열처럼 엄청난 업적을 이룬 것도, 임수혁처럼 끔찍한 비운을 겪은 것도 아니며, 김홍집이나 박충식이 그랬듯 잊을 수 없는 극적인 순간을 만들어낸 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볼 때마다 삶의 어색한 구석에서 만난 미안한 친구처럼 애틋한 선수. 내게는 최창호가 그렇다.

야구명문 경북고를 졸업했지만 대학 진학은 가정형편이 허락하지 않았고, 역대 최고의 야수들인 유중일과 강기웅을 잡느라 이정훈을 버릴 만큼 자원이 넘쳤던 연고지 프로팀 라이온즈에는 바늘만 한 틈도 없었다. 몇몇 실업팀 입단을 타진해보았지만 여의치 않았던 최창호가 야구를 계속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최약체팀 청보 핀토스의 연습생으로 들어가는 것뿐이었다.

대구를 떠나, 인천이라는 멀고도 막막한 땅으로 기약 없는 연습생의 길을 떠나는 아들을 온 가족이 따라나섰고, 아버지는 숫제 인천 도원야구장 앞에 구멍가게를 열었다. 그리고 가게 옥상에서 벌을 기르고 꿀을 모아 왜소한 아들의 몸을 돌보았다.

입단 2년차인 87년에 정식 선수지명을 받고 야구장에 설 수 있었지만, 그로부터 2년 동안 1군 무대에서 그가 거둔 성적은 23.1이닝동안 두 번의 패전. 그리고 8점에 육박했던 평균자책점 뿐이었다. 그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던 팀의, 다시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연습생 출신 2군 선수일 뿐이었다.

174cm의 작은 키에 눈초리도 밑으로 쳐져있는 순한 얼굴. 도무지 상대를 압도할 힘이나 카리스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순박한 시골 소년에게 특별한 날이 올 거라고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88년, 최창호는 운명의 세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 하나는 박정현이었다. 유신고를 갓 졸업한 그는 최창호와는 반대로 키가 190cm이 넘는 거한이었지만, 바람 불면 날아갈 듯 부실한 몸과 체력 때문에 어울리지 않는 잠수함 스타일로 공을 던지고 있었다. 나란히 서면 머리 하나 차이가 났던 두 소년은 돌핀스 2군 경기에서 하루 걸러 하루씩 선발을 주고받았고, 쉬는 날에도 죽이 맞아 같이 돌아다니는 기괴한 단짝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에 그들은 또 한 명, 정명원을 만나 삼총사를 이루게 된다. 군산상고와 원광대를 다니면서 쓸 만한 타자로 알려졌던 정명원은 대학 졸업이 가까워서야 투수로 전향을 했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과 영 다른 내성적인 성격에 낯선 팀과 보직의 막막함은 자연스레 숙소 한구석에 박혀서 야구에만 미쳐있던 최창호, 박정현과 이어지게 했다.

88년, 운명의 세 사람을 만나다

▲ 500경기 출장 기념(2002년 5월 10일)
ⓒ LG 트윈스 홈페이지
겉모습은 영 한목에 꿰어지지 않는 구색이었지만, 모두 뭔가 이루어내고 말겠다는 의지로만 가득 찬 빈손들이었고, 또 야구 외에는 별 관심사가 없는 순둥이들이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가을 부임하자마자 돌풍의 설계를 시작한 김성근 감독의 눈에 곧 그 셋이 들었고, 그들은 역사를 만들기 시작했다.

선수들 스스로 경비를 모아 쌀이며 고추장을 챙겨 떠나 하루 열 시간 이상의 산악행군에서 흘린 땀을 계곡 얼음물 속에 들어가 식혔던 오대산 극기훈련을 시작으로, 고정시켜놓은 포수 미트를 겨냥해 하루 500개 이상의 공을 던지는 지옥훈련이 이어졌다. 그 속에서, 언젠가는 정상에 서겠다던 막연한 포부가 거친 호흡 속에서 현실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작은 체격을 만회하느라 키워온 최창호의 단단한 상체근육에 바짝 "실전용" 기운이 들어가자 직구는 시속 150km 언저리를 넘나들었고 커브의 낙차는 예리하게 날이 섰다.

선동열이 21승에 1.17의 평균자책점, 그리고 198개의 탈삼진으로 "트리플크라운"을 달성했던 89년, 박정현은 19승과 2.15의 평균자책점으로 두 부문 2위를 차지했고 최창호는 191개의 삼진, 2.22의 평균자책점으로 탈삼진 부문 2위와 평균자책점 부문 3위를 차지했다. 선발과 구원을 가리지 않고 등판했던 정명원도 2.45의 기록으로 평균자책점 4위에 오르며 11승과 6세이브를 곁들였다.

프로야구사상 한 팀이 배출한 가장 경악스러운 "신인투수 3총사"의 출현이었다. 물론 신인왕은 그 중에서도 두드러졌던 박정현에게 돌아갔고, 만년 꼴찌의 늪에서 허덕이던 돌핀스는 별다른 전력보강 없이도 그들 삼총사의 힘으로 일약 3위에 오를 수 있었다.

그 해 삼총사의 활약은 타선과 수비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한 채 이루어낸 것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가치 있었다. 특히 최창호는 89년부터 91년까지 해마다 평균 220이닝 가량을 던졌고, 2점대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면서 탈삼진 3위 이내를 지키는 빛나는 투구를 했지만 그가 거둔 승수는 간신히 10승, 9승, 그리고 15승이었다.

경악스러운 "신인투수 3총사"

박정현이 등판했을 때는 아쉬운 대로 두세 점을 뽑아주던 타선이 최창호의 차례에서는 무득점으로 침묵하기 일쑤였고, 더구나 수비조차도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90년에 그가 9승과 함께 기록한 9번의 패전 중에서 무려 7번이 1점차 패배였고, 그 해 그가 허용했던 86개의 점수 중에서 수비 실책 등으로 내준 비자책점이 무려 16점이나 될 정도였다.

그렇지만 최창호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타선이 받쳐주든 아니든, 수비들이 잡아주든 아니든, 심지어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그는 한결같은 표정으로 공을 뿌렸다. 그것은 그리 애타고 비장한 표정도 아니었고, 또 무덤덤한 돌부처의 얼굴도 아니었다. 그저 제 할 몫 다하면 되는 것이라고 자신에게 되뇌듯, 그저 힘 닿는 대로 뿌리고 이따금 모자를 벗어 땀 한 번 닦아내는, 어쩌면 고단한 벌판에서 누가 보든 말든 묵묵히 혼자만의 깜냥대로 쟁기를 다루는 어느 농부의 표정이 그렇지 않을까 싶기도 했다.

그런 표정으로 그는 왼 다리로부터 시작된 몸의 대각선을 축으로 웅크렸던 온몸을 빙글 돌리며, 마치 발석차(發石車)에서 돌을 날리듯 공을 쏘아 날렸다. 작은 체구에서 시속 140km대 후반의 강속구를 짜내기 위해 온 몸의 힘을 순간적으로 모으는, 최창호만의 투구동작이었다. 공터의 아이들은 하나 둘 그 동작을 흉내 내기 시작했고, 학교의 야구코치들은 어린 투수들에게 그 동작을 따라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느라 바빠졌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에 들어서며 그들 삼총사는 정명원, 박정현, 다시 최창호의 순서로 하나씩 무너져 내리고 만다. 그것은 단순히 많은 이닝동안 그들을 마운드로 내몰았던 코칭스태프의 탓만은 아니었다. 바로 타선도, 수비진도 의지할 수 없었던 그 시기에 온전히 한 몸으로만 경기를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감, 혹은 현실인식이 그들의 어깨를 긴장시켰고 확실한 삼진을 위해 매 타자에게 서너 개의 공을 더 던지게끔 했기 때문이다.

최창호는 박정현이나 정명원과 달리, 부상중에도 "화끈하게" 쉬지를 못했다. 때로는 부상도 "확실한" 것이 "애매한" 것보다 나은 경우가 있는 법이다. 91년에 생애 최다승인 15승을 올렸던 그는 그 해를 기점으로 조금씩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92년에도 부상 와중에 100이닝 가까이 던지며 3점대 평균자책점으로 선방했지만 3승에 머물렀고, 그 이듬해는 다시 162.1이닝동안 2.99의 평균자책점으로 호투하고도 7승에 만족해야 했다. 그리고 다시 94년에는 한층 살아난 타선의 덕으로 12승을 올렸지만 평균자책점은 4점대로 치솟고 있었다.

91년 기점으로 조금씩 내리막

▲ 아령을 든 최창호
ⓒ LG 트윈스 홈페이지
그 뒤로도 그는 크고 작은 부상을 안은 채로 묵묵히 공을 던졌고, 예전 같지는 않았지만 꾸준히 해마다 100이닝 이상을 던지면서 삼진을 잡고 승수를 올리는 그에게 특별히 신경을 써주는 이는 없었다. 그저 몇 경기 쉬면 상승세를 탔고, 조금 무리한다 싶으면 내려앉았다. 무심한 이들은, 그저 "원래 작은 선수들이 나이 먹으면 좀 일찍 내리막길을 타는 법"이라고 웅성거릴 뿐이었다.

98년. 프로야구에 뛰어든 지 3년째를 맞던 현대는 그 해 기필코 첫 우승을 이루고 말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다. 97년 겨울, 이미 해체지경에 몰리고 있던 쌍방울 레이더스에 9억을 주고 박경완을 데려온 현대는 98년 7월 31일, 또 한 번 회심의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레이더스에서 조규제를 데려와 불펜을 다지고, 트윈스에서 박종호를 데려와 "인간종합병원" 2루수 이명수의 뒤를 받치기 위한 것이었다.

대신 조규제의 대가로 현금 6억원에 얹혀 레이더스로 보내진 것은 "재기불능" 판정을 받은 박정현이었고, 박종호 대신 트윈스로 보내진 것은 "돌이킬 수 없는 하락세" 진단을 받은 최창호였다. 삼총사는 그렇게, 쓸쓸히 해체되고 말았다.

현대는 그 해, 선발투수로 부활해 1점대 평균자책점으로 14승을 올린 주장 정명원과 뒤 세대 에이스 정민태의 힘으로 첫 우승컵을 들어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얄궂게도 한국시리즈 6차전 혈투 끝에 유니콘스에 무릎을 꿇은 것은 트윈스였고, 유지현의 마지막 타구가 중견수 이숭용의 글러브에 빨려들면서 인천 하늘에 축포가 터지던 순간, 무겁게 가라앉은 트윈스 덕아웃에는 최창호가 앉아있었다.

그라운드에서는 정명원과 정민태와 김경기가, 다시 이숭용과 박재홍이 엉켜있었지만, 맞은 편 덕아웃 구석의 최창호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또 한 번, 우승반지의 꿈이 사라진 허탈감과 10년 넘게 기다려왔던 인천팀의 우승이 이루어지고 말았다는 흥분이 묘하게 가슴 속에 소용돌이쳤다.

상대팀 덕아웃에서 지켜본 인천팀의 첫 우승

"당황스러웠다. 나는 저 쪽 팀에 있어야 하는데, 왜 여기에 이렇게 앉아있게 된 걸까 싶었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들의 의지로 만들어진 상황이 너무나도 나를 화나게 하더라." (최창호, 06년 9월 20일자 <스포홀릭>과 한 인터뷰 중에서)

굳게 입을 다문 선수들이 각자 가방을 챙겨 떠나기 시작한 트윈스의 덕아웃에서 최창호는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낯익은 목소리가 장내 스피커를 통해 울려나왔다. 우승 소감 인터뷰에 응하는 유니콘스의 주장 정명원의 목소리였다. 흥분과 감격으로 정신이 반쯤 나간 목소리였다.

"아… 예… 감사드리고…"

말을 잇지 못하는 듯했다. 뭔가 애써 뜨거운 것을 씹어 삼키는 듯도 했다. 그리고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이어졌다.

"같이 고생했던 창호랑 정현이가 이 자리에 없는 게…, 가슴이 아픕니다."

선수로나 팀으로나, 다시 연고지로서나 사상 첫 우승을 맞이했던 바로 그 순간, 함께 그 자리에 어우러진 동료선수들 대신 이제는 다른 팀으로 떠나간 두 선수의 이름을 떠올린 주장 정명원. 그러나 그 경솔함을 나무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인천 팀의 어제와 오늘을 보아온 팬들은 그 순간 물기어린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고 있었다. 그 삼총사는 바로 돌핀스의 역사였으며, 90년대 인천 야구팀에 뿌려진 씨앗이자 거름이었다.

셋이 걸으면 190대의 장신 박정현과 정명원 사이에 머리 하나가 쑥 들어간 170대 단신 최창호의 자리가 두드러지곤 했다. 그리고 출발점에서는 신인왕 박정현의, 그리고 뒷날에는 구원왕 정명원의 빛나는 자리 사이에 그보다 빛은 덜했지만 소리 없이 한 시대를 지켜온 당찬 투수, 최창호의 자리가 있었다.

지도자 생활 후 사업가로 변신

▲ 최창호가 개발한 투수용 운동기구
ⓒ 초이볼
그 뒤로 다시 네 해, 연습생 시절부터 모두 17년 동안 이어간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고 잠시 모교에서 지도자생활을 했던 그가 지금은 사업가로 변신해있다는 소식이다. 그렇지만 "변신"한 그가 만들어낸 것이 기껏 투수들의 변화구 그립 연습용 운동기구라니, 또 묘하게 우습다. 아무래도 그가 조만간 다시 지도자로 "변신"해 그 운동기구를 들고 불펜으로 돌아오게 될 것 같아서다.

도원야구장 앞길에서라도 우연히 만난다면 무심코 "미안하다"는 말이 튀어나올 것 같은, 그래서 "누구신가" 하는 황당한 표정이 돌아오면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사인을 한 장 부탁하게 될 것 같은 내 마음의 에이스 최창호.

그래서 가끔 오랜만에 메이저리그로 복귀한 박찬호가 다시 된통 얻어맞다 내려갔다거나 하는 씁쓸한 소식 뒤 끝에 이유 없이 종종 떠오르는 그 이름.

뜬금없지만, 고백하건대 사실 나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팀 돌핀스의 유민 중 한 사람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연두부 2007-05-03 15: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야구가 시작된 82년 이후 대학1학년때까지 야구장은 텔레비젼으로밖에 보지 못했으면서도 참 징글징글하게 좋아했었다...왜 그렇게 야구를 좋아했는지 남들에게 설명하라면 딱히 못하지만 이런 기사를 만나면 어느정도는 설명이 된다..."야구는 인생이다...
 

어제 포털을 보다가 가슴이 억 했습니다. 올봄 몽골發 `최악의' 황사테러 덮친다 라는 기사가 톱에 있더군요.

기억하시는 분이 있지만 모르지만 저는 그 전날 사막에 내린 폭설, 황사를 삼키다 라는 기사를 썼기 때문입니다. 기사를 읽어봤습니다. 뭣 같더라구요. 이 기사는 황사에 대한 전반적인 접근이 아니라 일단 몽골의 상태가 안좋으니 최악의 상태라는 기삽니다.



하지만 편집자는 이 기사의 행간을 전혀 읽지 못합니다. 이 기사는 몽골의 상황이 나쁘기도 하지만 몽골의 상황이 나쁘니 와서 다양한 작업을 해달라는 몽골 정부의 염원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배제한 체 일단 황사 자체를 최악으로 몰고가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포털들은 메인에 배치해 우리나라 황사가 무척 심할 것으로 인식하게 하더군요. 사실 개가 사람을 물면 뉴스가 안 되도, 사람이 개를 물면 뉴스가 되는 보도의 생리를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지난해 올 최악의 황사가 온다고 예측했을 때 무시했는지 몰라요.(후후)



사실 저는 지난 수년간 황사를 비교적 정확히 예측했습니다.

-중국 이상 기온 한국도 위협한다 2002-02-23

- 올 황사 횟수 줄고, 강... 2003-03-21

-불청객 '모래바람', 2년만에 돌... 2004-03-11

- 올 황사 크게 약화할 듯... 2005-02-17

-'황사' 3년 침묵 깨고 다시 분... 2006-03-14



사실 제가 황사에 관심을 가진 것은 제일 위의 기사를 쓴 후입니다. 그때 따뜻한 겨울(暖冬) 현상에 강수량 부족으로 난리였죠. 저도 기사의 말미에 황사가 심해질 거라는 기사를 썼습니다. 그때는 톈진에 살 땐데 어느 날 세상이 온통 노랗더군요. 결국 그해 수십차례 황사가 왔고 황사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후 중국 기상자료를 참고하고, 운이 돼서 세미나도 들으면서 황사 예측보도를 했습니다. 해년마다 현장을 방문하면서 지리에 대한 감각도 익혔습니다. 그리고 올해를 맞습니다.



사실 봄이 되기 전에 저는 이명처럼 황사에 대한 악몽을 꿉니다. 크게 주목받지 않는 기사지만 어떻든 올해는 틀리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으로 최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매년 현장을 방문해 상황을 체크하면서 기사를 씁니다.



사실 황사 예측은 신이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아무리 빨라야 3월은 되야 가능하고 이후에도 기상 변화에 따라 천양지차로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떻든 운이 좋아서 저는 지난 몇 년간 황사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위 기사가 말해주니 거짓말은 못할 겁니다. 그리고 제 지인들에게 보내는 메일에도 이런 부분을 잘 쓰는데, 지난해는 황사 관련주를 사라는 농담까지 했습니다. 이 때문에 농담처럼 황사전문가라는 말을 합니다.



올해도 그런 악몽이 시달릴 무렵, 황사가 심할 거라는 예측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가 앞에 쓴 기사(황사 예보, 빗나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서도 썼듯이 심할 거라는 기사만을 인용하는 자가당착적 시각의 문제입니다. 중국 보도의 전반은 반반 정도였거나 오히려 심하지 않을 거라는 예측인데, 우리 눈에는 심할 거라는 것입니다.



사실 황사에 대한 중국 기사를 읽을 때는 색안경을 끼고 봐야 합니다. 중국은 가능하면 심하지 않을 거라고 보도하는 습성이 있고, 거기에 책임자들은 아예 말조차 하지 않습니다. 그만큼 어렵기도 하지만 책임지지 않는 거죠. 역으로 몽골은 심하다고 말해 다른 나라의 지원을 받아서라도 녹화를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이번 기사는 기상에 대한 관측도 있지만 그런 이해적인 문제가 행간에 있습니다.



사실 올해 예측에는 남들이 심할 거라니 나는 반대로 이야기하고 싶다는 청개구리 심보가 있습니다. 그런데 마침 황사 발생의 중요한 전기인 대규모 강우가 있었고, 여전히 바람의 강도가 세지 않다는 것에 용기를 얻어서 앞번 기사를 썼습니다. 그런데 제 기사 전날 ‘시사매거진 2580’에서 심하다고 보도했고, 다음날 또 심하다는 기사가 나왔군요.



일단 제가 바보가 된 꼴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두고 봐야겠지요. 저는 여전히 자신합니다. 올해는 황사가 평년수준을 넘어갈 수 없습니다. 일단 어제 몽골발 기사는 일부를 일반화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황사 발생의 최대 지역이 네이멍구(내몽고)인데, 이 지역을 제외하고 몽골에서 온 황사가 한국을 장악할 거라는 예측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발생한 황사의 대부분이 네이멍구 발인데 올해는 왜 몽골에서 모든 게 날라올까요. 그리고 날라와도 20%도 안되는 힘이 전체를 최악으로 만들까요. 사실 몽골은 우리나라의 북서향에 있고, 거리도 멀어서 최악의 상황까지 만들기에는 힘이 없습니다. 분명히 그 지역 상황은 최악일 수 있지만 올해 이상하게도 바람의 강도가 약합니다. 기류도 부정확해서 이 지역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몽골이 우리나라 황사를 지배할 수 있을까요.



사실 제갈공명이 와서 동남풍을 열심히 불면 정말 그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올해간만에 긴장이 풀리면서 푸념을 해봤습니다. 사실 황사 예측 기사는 한번 제대로 틀렸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럼 다음해에는 이런 기사 쓰지 않을 겁니다. 반면에 올해도 황사가 심하지 않다면 내년에도 때가 되면 온갖 신경이 황사로 쏟아가겠지요. 때문에 정말 제갈량의 동남풍이 소중한 것은 저인지도 모릅니다.





적벽에 가서 기우제라도 지내고 와야 할 듯 합니다. 지난번 테마여행에 들린 적벽을 부적으로 붙여둡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연두부 2007-04-24 1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 초 오마이뉴스에서 본 기사인데 다들 "사상 최악의 황사가 온다"고 난리법석일때 올 황사가 그리 심하지 않을 것 같다는 기사 내용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