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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프리즘] 명승부 / 송호진
한겨레프리즘
 
 
한겨레 송호진 기자
 




 

» 송호진/스포츠부문 기자
 
열여덟에 때 집을 뛰쳐나왔다. 9남매 중 다섯째. 영세민 집안에 입 하나 더는 것도 효도라면 효도라고 여겼다. 양말공장에서 일하던 그는 권투체육관 문을 두드렸다. “세계챔피언이 돼 집도 일으키고, 우리 어머니 불편한 다리도 고쳐드리고 싶었거든요.” 그는 ‘두 평짜리 체육관 옥탑방이면 또 어떠랴!’ 스스로를 토닥였다. 한국챔피언이 됐을 때 그는 며칠 동안 벨트를 껴안고 잤다. “눈물은 왜 그렇게 나던지.” 아버지는 돈이 없어 펼침막도 걸지 못했다. 아들이 챔피언 됐다고 쓴 종이를 동네에 붙이는 게 가난한 아버지의 사랑표현이었다.

이제 그가 ‘도전자 정재광’으로 링에 섰다. 동양챔피언 벨트를 앞세워 챔피언 김지훈(20)이 등장했다. 저 벨트. 1년 전 정재광(30)의 것이었다. 그는 김지훈과의 방어전이 다섯차례나 연기되자 돌연 벨트를 내놓고 링을 떠났다. 빚이 불어났고, 더는 아내를 고생시킬 수 없었다.

그런 그가 다시 글러브를 꼈다. 그 놈의 꿈. 그 놈의 미련. 아들의 열성팬 아버지는 오지 못했다. 지난해 겨울 쓰러진 아버지는 끝내 눈을 뜨지 않았다. 아버지가 늘 응원하던 자리. 한 살 연상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체육관 건물 경리였다. 그는 아내 사무실 형광등을 갈아주던 날 쭈뼛쭈뼛 첫 데이트를 청한 쑥맥이었다. 아내 눈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박스(Box)! 심판이 소리치자 ‘땡’ 종이 울렸다. 챔피언 김지훈은 8케이오(KO), 11승을 거둔 독종이었다. 정재광도 맞으면서 들어가는 탱크였다. 7월 초 열린 동양챔피언 페더급 타이틀매치. 권투계는 모처럼 보는 최고 라이벌전이라며 흥분했다. 승자에게는 세계챔피언 도전의 길도 뚫린다. 모두 승리를 바라지만, 그럴 수 없는 서글픈 경기.

둘은 1라운드부터 피하지 않았다. 키(163㎝)가 작은 정재광의 왼쪽눈가가 2라운드에 찢어졌다. 3라운드엔 입술도 터졌다. “이쯤되면 재광이형이 쓰러져야 하는데 버티는 거예요.” “내가 이렇게 맞받아치면 지훈이가 움찔해야 하는데 그런게 전혀 ….”

심판은 6라운드 중반 ‘스톱’을 외쳤다. 정재광 눈가가 피로 뒤덮였다. 그는 “싸우겠다”고 했다. 그러곤 둘은 승부를 내겠다는 듯 퍽 퍽 굉음을 내며 부딪쳤다. 함성이 최고가 된 순간, 누군가 무릎을 바닥에 찍으며 무너졌다. 정재광이었다. 오른 주먹에 턱이 걸려들었다. 아마추어 경력을 포함해 50여차례 싸우는 동안 첫 다운. 1, 2 …. 심판이 보챘다. 그는 다리를 부르르 떨며 몸을 세우려 했다. “일어나고 싶었는데, 일어나려고 했는데.” 그는 체중 10㎏을 빼며 이날을 준비했다. “훈련하다 죽는 게 아닐까 생각도 했죠.” … 8, 9, 10. 모든 게 끝났다. 그는 부축을 받고서야 일어섰다. 아내는 울음을 삼키며 링쪽으로 다가갔다. 마지막이라던 도전. 그는 처참한 패자가 됐나?

챔피언이 뛰어왔다. “형, 수고하셨어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도 한걸음 나가 힘빠진 두 팔로 후배를 꼬옥 안았다. 그들 위로 그날 가장 큰 박수가 쏟아졌다. 도전자는 흔들거리며 링에서 나와 바닥에 누웠다. 입술과 눈가를 수십 바늘 꿰맸다.

그러더니 퉁퉁 부은 눈으로 후배를 또 찾았다. “꼭 세계챔피언이 돼야 한다.” “형님 몫까지 짊어지고 챔피언이 될게요.” 두 주먹이 금방 하나로 섞였다.


정재광은 말했다. “그러고도 왜 행복하냐고요? 내 꿈을 좇아 다시 도전을 해봤잖아요. 후회 없어요. 이렇게 최선을 다했는데 깨끗이 받아들여야죠. 그것도 좋은 후배한테 졌으니까.” 링의 승자가 답했다. “형한테 배운 게 많아요. 지고도 형이 날 끌어안는데 정말 가슴이 찡했죠.” 삶에서 승부는 그저 상대를 밟고 일어서는 냉혹한 세계일 뿐인가? 이날의 명승부는 그렇지 않다고 고개를 흔든다.

송호진/스포츠부문 기자dmz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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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울 2007-07-12 15: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음이 짠하군요. 스포츠기자이리 마음에 아리게 기사를 쓰는군요. 눈여겨보고싶군요.
 


[목요세평]시내버스 준공영제 탓하기 (중도일보)
 

올해 초 수업교재로 쓰려고 집어든 책에서 접한 유머다. 어떤 사람(갑)이 가로등 아래에서 뭔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을)이 “무엇을 잃어버렸느냐”고 하자, 갑은 “열쇠를 잃어버려 찾는 중”이라고 답했다. 을이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둘이서 한참을 찾아도 열쇠는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을이 “당신이 열쇠를 잃어버린 곳이 여기 맞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러자 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아니오. 내가 열쇠를 잃어버린 곳은 이 가로등 밑이 아니라 저쪽 캄캄한 곳이오.” 을이 다시 물었다. “아니, 열쇠를 잃어버린 데가 저 캄캄한 곳이면 거기서 열쇠를 찾아야지 왜 이 가로등 아래에서 찾습니까?” 갑이 대답했다. “여기가 밝으니까요.”

저자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발생한 근원을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 유머를 끌어들였다. 지극히 평범한 사실이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종종 있다. 이른바 쥐가 들끓는 곳에 고양이가 나타나니 고양이를 없애자고 나서는 식의 ‘본말전도`다.

최근 대전에서 벌어진 시내버스 파업을 보자. 시민들의 ‘발`이 운행을 중지했기에 이들이 겪어야 할 불편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때마침 장맛비도 내리기 시작해 시민들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여느 경우처럼 사용자와 노동조합 간의 임금 인상 폭을 둘러싼 힘겨루기에 시민들이 볼모로 잡힌 형국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시행 2년도 채 되지 않은 ‘준공영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마치 문제의 핵심이 이 제도인 것처럼 거론되고 있다. 그럼 시내버스 준공영제에서 다시 과거로 돌아가면 시민의 발을 붙들어 매는 파업이 사라진다는 말인가?

준공영제는 정상적 운영으로 적정한 수익을 거두기 힘든 시내버스 사업을 시민의 세금, 즉 공적 자금으로 보전해주는 것이다. 이는 운송비용 절감 식의 효율성을 추구하기보다 경제적 약자의 교통권 보호를 위한 서비스 공급의 안정성에 무게를 둔 제도다. 이 제도가 당초 취지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그 차원에서 개선이나 폐기를 논해야지 파업 시점에 준공영제를 타깃으로 삼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심지어 준공영제 실시 이후 사실상 사용자가 된 대전시가 파업의 책임을 제도의 문제로 돌리고 노동조합을 압박해 협상에서 유리한 입지를 점하려는 불순한 의도마저 읽힌다.

언론도 준공영제가 사태의 원흉인양 여론을 한쪽 방향으로 몰고 나갔다. 누가 보면 대전시와 담합이라도 한 것처럼 준공영제의 폐단에 대해 서로 주거니 받거니 했다. 현상에 얽매이지 않고 문제의 본질을 놓치지 않는 사회의 ‘목탁` 구실도, 사회적 약자의 ‘대변자` 역할도 포기했다.

얼마 전 한 주간지에서 읽은 칼럼니스트 김규항의 글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아무개는 오랫동안 부잣집 아이들만 다닌다는 사립초등학교 교사였다. 그는 지난해 거길 그만두고 어떤 가난한 동네의 초등학교로 옮겼다. 그런데 그곳으로 옮기고는 퇴근만 하면 우울해하고 술이라도 걸치면 어김없이 눈물을 보였다. 연유를 물으니 그러더란다. “아이들이 격차가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여기 학교 아이들은 한 반에서 다섯 명 정도를 빼곤 지난번 학교에서 가장 공부 못하는 축에 껴. 거기에다 왜 여기 아이들은 키도 덩치도 작고, 또 왜 이리 아픈 아이들도 많은지….”

이 아이들과 파업에 참여한 시내버스 조합원들의 처지가 자꾸 겹쳐서 머리에 떠오른다. 이들을 감싸주지는 못할망정 이들이 손가락질 받도록 하지는 마라. 게다가 준공영제 운운은 열쇠를 잃어버린 곳이 아니라 그저 밝기만 한 가로등 아래일 뿐이다.   (충남대 신문방송학과 김재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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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7-07-02 13: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전은 시내버스 파업으로 열흘 넘게 시내버스가 파업중이다...매번 무슨 파업이든 파업이 일어났다 하면 노동자 이기주의로 몰아세우는 언론의 행태가 이번에도 점입가경을 보이고 있다. 비록 외부 필진이지만 김재영교수의 문제제기가 구구절절히 옳아 보이기에 남겨둔다...
 


강한 남자 류택현, 이 선수가 사는 법
'새가슴'에서 '좌타자 전문 스페셜리스트'로
    이정래(golg94) 기자   
 

1994년을 앞두고 서울을 연고지 두고 있는 LG 트윈스와 OB 베어스는 각각 한양대의 유지현과 동국대의 류택현을 1차 지명 선수로 지명을 했다. LG가 지명한 유지현은 이종범의 뒤를 이를 재목으로 상당히 주목을 받던 내야수였고 두산이 지명한 류택현 역시 좌완 투수 기근에 시달리던 OB 마운드에 힘을 불어넣어 줄 것으로 기대를 모은 선수다.

바로 전 해 1차 지명자였던 이상훈에게 계약금만 1억 8800만원을 안겨준 LG가 어깨 부상 의혹 등을 이유로 유지현과 8000만원에 계약을 한 것이 논란을 낳기도 했지만 같은 서울지역 1차 지명자 류택현의 계약금 4000만원은 기삿거리도 안됐을 만큼 그는 이른바 스타급 신인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속 140㎞를 웃도는 직구,1m85cm, 80㎏의 당당한 체격에 좌완이라는 이점을 가진 류택현. 그러나 류택현은 기대만큼 성장하지 못했다. 전지훈련에서는 위력적인 투구를 선보였지만 막상 시즌이 시작되고 경기에만 나가면 컨트롤이 흔들리며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워낙 담력이 약해 루상에 타자만 나가면 컨트롤이 잡히지 않았다. 류택현은 흔히들 이야기하는 '새가슴' 투수였다.

결국 자연스럽게 선발 투수에서 밀려나 중간계투로 대부분의 시즌을 소화했고 승리를 따낼 기회도 그만큼 사라져갔다. 결국 프로 5년 동안 승리 없이 6패 2세이브라는 초라한 성적만을 기록한 채 1999년 1월 22일 류택현은 같은 팀 외야수 김상호와 함께 1억원에 현금 트레이드 돼 OB를 떠나 LG 유니폼으로 갈아입게 된다. LG에서 OB로 그리고 다시 LG 유니폼을 입은 김상호가 중심이 된 트레이드였다.

1월 23일 스포츠 신문은 '홈런왕 김상호의 찢겨진 자존심'이라는 제목으로 트레이드 사실을 보도했다. 나중에 "어, 류택현이 왜 LG에서 던지지?" 라고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정도로 류택현이 트레이드 됐는지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원 포인트 투수' 류택현 ... 눈물의 첫 승


 
▲ 류택현은 14년 동안 마운드를 지켜왔다.
 
ⓒ LG 트윈스
LG에서 류택현의 보직은 '원 포인트 릴리프'였다. 말 그대로 경기 중간에 좌타자가 나오면 그 타자 한 명만 상대하기 위해 마운드에 올라야 했다. 좌완 투수라는 것 이외에는 딱히 특별한 장점이 없었던 류택현은 좌완 투수가 좌타자에게 강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매경기 좌타자들과의 승부를 위해 긴장을 하고 몸을 풀어야 했다.

최근 프로야구에서 상당히 전문화 된 보직 중 하나지만 당시 '원 포인트 릴리프'는 낯선 보직이었다. 당연히 그 중요성 또한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류택현이 나와서 달랑 한 타자만을 상대하고 강판되는 모습은 왠지 서글퍼 보였다. 누구 못지않게 청운의 꿈을 꾸고 프로에 들어왔을 텐데 겨우 한 타자 상대하자고 마운드에 올라오는 투수가 된 것이 안타까워 보였다.

그렇게 1999년 프로야구도 중반을 넘어 종반을 향해 치닫던 어느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이미 한 차례 어깨 이상으로 2군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1군으로 복귀한 류택현은 복귀 당일이었던 8월 9일 잠실에서 벌어진 현대 유니콘스와의 경기 5회말에 마운드에 올라왔다.

3-3 동점, 무사 1루 상황에서 마운드에 오른 류택현은 5회 위기를 무안타 무실점으로 잘 막아내고 마운드에서 내려갔다. 그리고 맞은 6회초에서 LG 타자들이 역전 점수를 뽑아냈다. 경기는 6-3 LG의 승리로 끝이 났고 5회 등판해 1.1이닝을 던진 류택현이 승리 투수가 됐다.

행운의 승리였다. 어찌 보면 쑥스러운 승리였다. 그러나 프로 생활 6년, 무려 181경기만에 거둔 첫 승은 류택현에게는 눈물 날만큼 감격적인 승리였다. 그리고 지난 6년간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2군을 오르내리며 그나마 1군에서는 달랑 한 타자만을 상대하고 마운드에 내려가는 아들의 늘어진 뒷모습에 몰래 눈물을 훔치곤 했던 어머니 박영자씨에게는 노히트노런 보다 더 값진 그런 승리였다.

첫승을 행운의 승리로 따낸 류택현은 2000년 5월 3일 SK를 상대로 선발 등판해 7이닝 1실점 호투를 하며 당당한 승리를 따냈다. 류택현의 프로데뷔 첫 선발 승이었다.

강한 남자 류택현


 
▲ 좌타자 전문 투수 류택현.
 
ⓒ LG 트윈스
올 시즌 프로야구는 전반기도 지나지 않았지만 류택현은 벌써 38경기에 등판을 했다. 평균 자책점 2.08을 기록할 만큼 투구내용도 훌륭하다. LG에서만 무려 475경기를 뛰었고 2004년에는 당시 한 시즌 최다 기록인 85게임에 등판했을 만큼 이제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투수로 자리 잡았다.

더 이상 신인 시절처럼 빠른 볼을 던지지는 못하지만 빠른 볼을 버리는 대신 류택현은 살아남는 법을 택했다. '새가슴'이 아니라 철저한 승부사로 거듭난 류택현은 이제 '원 포인트 릴리프'라는 말 대신에 '좌타자 전문 스페셜리스트'라는 제법 세련된 이름으로 불린다.

어느덧 은퇴를 준비해야 하는 나이인 프로 14년차, 우리 나이로 38살이 된 류택현은 여전히 좌완 전문 구원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류택현은 마운드에 오를 것이다.

프로 14년 동안 469이닝을 던졌다. 이 기록은 올해 20살로 지난해에만 201 이닝을 던진 류현진이 21살이 된다면 가볍게 넘길 수 있는 그런 기록이다. 그러나 철저한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냉정한 프로의 세계에서 낙오되지 않고 자신만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며 14년을 살아왔다는 데 의미가 있다.

흔히들 말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라고. 프로 14년 동안 겨우 8승을 거두었고 6500만원의 연봉을 받지만 류택현은 지난 14년 동안 마운드에 있었고 앞으로도 마운드에 오를 것이다. 그래서 류택현은 아주 강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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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6-21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류택현" 이란 이름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정말 강한 사람이군요. 홧팅~. 소리가 절로나네요. ^^.
 

"이 그림은 '비매품', 희귀하거든요"
그림 기증하는 '바보 화상'... 부산시립미술관, '신옥진 기증작품전' 열어
    이충렬(yigura) 기자   
지난 몇년에 걸쳐 여러 공공미술관과 박물관에 330점의 그림을 기증한 화상이 있습니다.

자신의 화랑 벽에 걸면 계산하기 힘들 정도의 돈이 되는 귀한 그림들이지만,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했습니다. "좋은 그림일수록 영구히 보존될 수 있는 공공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야한다"는 그림에 대한 깊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외국에서는 화상들의 작품 기증이 흔한 일이고, 우리나라에도 그런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러나 이토록 많은 작품을 체계적으로 선별해서 기증한 화상은, 부산 공간화랑 신옥진 대표가 유일합니다.

바보같은 기증, 모두 330점

▲ 부산시립미술관에 기증한 120점 중 일부
ⓒ 김창열, 권진규, 전혁림, 김종식, 안창홍, 우메하라
▲ 경남도립미술관에 기증한 100점 중 일부
ⓒ 이우환, 문신, 전혁림, 송혜수, 유강열, 이상욱
그가 그림 기증을 시작한 것은 IMF의 한파로 화랑경영이 어렵던 1999년부터였고, 첫 기증지는 부산시립미술관으로 53점이었습니다.

그 때 사람들은 여러 면으로 그를 평가했습니다. 지인들은 '저 좋은 작품들을 다 기증하면 화랑 운영을 어떻게 하려느냐'며 그의 앞날을 걱정했고, 어떤 이들은 '화상이 자기 밑천을 기증한다면 그건 화랑을 그만두겠다는 것'이라고 단정했으며, 또 어떤 이는 '바보같은 짓'이라며 기증을 폄하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가진 자들의 사회환원'이라는 미덕이 뿌리내리지 못한 우리 사회에선, 그의 기증이 '바보의 행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화랑은 지금껏 건재하며, 그는 기증을 계속 실천하고 있습니다.

그는 첫 기증 이후 경남도립미술관에도 100점, 부산시립박물관에는 고서화와 유물 30점 그리고 밀양박물관에 고서화 100점을 기증했습니다. 부산시립미술관에는 67점을 추가로 기증함으로써 120점을 채웠습니다.

그래서 부산시립미술관에서는 그 작품들을 시민과 학생들에게 소개하기 위해 7월 17일까지 '신옥진 기증작품 전시회'를 열고 있습니다.

그는 앞으로 부산시립미술관에 30점을 더 기증할 계획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화랑에 전시하고 있는 작품들 중에서 희귀성이 있는 작품은 '비매품'이라며 팔지 않습니다. 작품값이 수천만원 호가하고 애호가들이 돈을 들고와도 "이 작품은 훗날 미술관으로 보낼 작품이니, 감상만 하시라"고 말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모은 작품이기에, 그의 기증 작품에는 국내외 작가들의 수준작이 많습니다. 세계적 화가가 된 이우환 화백의 '조응', 권진규 화백의 흔치 않은 목탄화, 장욱진·김창열 화백의 초기 작품, 김종식·안창홍 등과 같은 부산 출신 화가들의 작품 등 작품성과 희귀성 그리고 향토성을 갖춘 수작들입니다.

▲ '기증전'이 열리고 있는 부산시립미술관 전시장
ⓒ 부산시립미술관
▲ 밀양시립박물관에 100점의 작품을 기증한 후 명예시민증을 받았습니다. 왼쪽이 이상조 밀양시장, 오른쪽이 신옥진 사장입니다.
ⓒ 밀양시
그는 밀양 박물관에 들렀을 때 전시품이 빈약한 걸 보고 기증을 결심했고, 박수근미술관을 열 때 당자의 작품이 없다는 소식에 소장했던 박수근의 작품을 기꺼이 내놓았습니다. 화단의 원로 전혁림 화백이 미술관을 열면서 초기작이 없다고 하자, 자신이 30여년 전부터 소장하고 있던 작품들을 흔쾌히 돌려드렸습니다.

"신옥진 선생의 미술품 기증은 보다 많은 미술동호인이나 애호가들에게 작품감상의 기회를 넓히고, 나아가 작품의 영구보존을 소망하고 준비했다는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어야 마땅하리라 생각합니다." - 김상훈 부산일보 사장 <공간 30년> 13쪽

지금껏 그가 기증한 작품들은 근현대 그림뿐만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수집했던 고미술들도 많습니다. 발품을 팔아 고미술 경매장엘 가고 그곳에서 경합을 벌여 소장한 고서화와 유물들도 '마음을 비우고' 기증한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그를 '신옥진 사장'이 아니라 '신옥진 선생'이라고 부릅니다.

그가 '사장'이 아닌 '선생'으로 불리는 까닭

▲ 부산시립박물관에 기증한 고서화와 유물 30점 중 일부. 호생관 최북의 '난'과 추사 김정희의 간찰 그리고 부산출신의 서예가 운여 김광업의 희귀 전각등이 포함되어있습니다.
ⓒ 부산시립박물관
▲ 부산청년미술상 수상식에서 축사하는 모습
ⓒ 청년미술상 운영위원회
그는 기증 외에도 원로 향토화가들을 위해 주기적으로 '향토전'을 개최하고, 젊은 청년화가들을 위해서는 '부산 청년 미술상'을 만들어 창작 의욕을 고취시키고 있습니다.

1989년부터 계속되어온 이 상을 통해 부산 지역의 많은 청년화가들의 작품 세계가 전국적으로 알려졌고, 이제 그들의 대부분은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화단의 중진 혹은 유망작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산지역의 작가들만 배려한 게 아닙니다. 서울이나 해외 거주 화가 중에서도 작품은 좋은데 형편이 어려워 전시회를 하지 못함을 알게 되면, 흔쾌히 전시회를 열어줬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 오윤 화백의 전시회입니다.

▲ 1986년 6월 20일, '오윤 전시회' 오픈행사. 오윤 화백은 이 전시회 2달 후 세상을 떠났습니다.
ⓒ 공간화랑
오윤 화백 생전에 개인전을 열어준 상업화랑은 부산 공간화랑 뿐입니다. 80년대 당시 오윤 화백은 민중미술의 전위그룹인 '현실과 발언'을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그의 전시회는 대부분 민중미술 전시장이었던 '그림마당 민'에서 열렸을 뿐, 상업화랑에서 개인전을 연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윤 화백의 작품성을 알아보고 또 그의 어려운 형편을 감안해 초대전을 열어줬습니다. 또한 간경화로 투병 중인 화가의 건강을 고려해 왕복 비행기표값도 보내줬습니다.

"그러나 화가 본인은 그 돈을 아껴 기차를 타고 왔다. 병세가 완연해 얼굴은 핼쓱하고 혈색은 좋지 않았으나 가끔씩 미소를 띠며 상대를 편하게 해 주었으며, 마호병에 미음을 넣어와 중간중간 마시기도 했다. 거의 별 말이 없었던 작가는 오픈 때 직접 케익에 초를 꼽고 호주머니에서 라이타를 꺼내 몇 개의 초에 일일이 불을 붙인 다음 입으로 정성스럽게 불어 끄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 신옥진 <공간 30년> 98쪽

당시 오윤 화백의 작품값은 7~25만원 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작품은 1/3 밖에 팔리지 않았습니다. 화랑의 수익은 고사하고 화가에게 보낸 비행기 값도 건지지 못했음에도, 그는 오윤 화백의 맑은 영혼에 도취되어 오랫동안 행복했다고 합니다.

▲ 이인영 유고시집 <어느 소명> 표지
ⓒ 공간화랑
그는 화가들뿐만 아니라 지역 원로 문인들에게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습니다. 생전에 다 하지 못한 것은 사후에도 챙겼습니다.

가난과 술과 시로 한 생을 산 '불운의 천재시인' 이인영 시인, 그분에게는 남몰래 생활비를 보탰습니다. 시인이 치매 걸린 어머니 옆에서 숨진 지 닷새 만에야 발견될 정도로 허망하게 생을 마치자, 그가 교유하던 부산지역 화가들의 그림과 함께 '유고 시화집'를 만들어 시인의 무덤 앞에 바쳤습니다. 생전에 시집을 내드리지 못했기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 그였기에, 시인의 유고시 중에서는 이런 시도 발견되었습니다.

나에게는 빽이 세 분이 계시다./ 한 분은 '공간화랑' 신옥진백작이시고/ 한 분은 어머님/ 또 한 분은 하느님이시다/
대낮에 한 밤에/ 길을 잊어버리고/ 투 아웃/ 투 쓰리 절대절명의 위기에/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은 저기다./저기가 끝이다라고/ 가르치는 이 분들/
교과서로 삶을 살기 보단/
퇴학으로, 사람으로 있고 싶은/ 나에게/ 빽이 세 분이나 계시다./
- 이인영 <어느 소명 5> 전문


그림에 대한 깊은 사랑이 느껴지는 작품들

▲ 전시회 참석차 부산에 온 장욱진 화백을 모시고 충무에 갔을 때. 쪼그리고 앉아 스케치를 하는 장화백의 모습과 왼쪽에서 구경하는 시민들의 표정이 재미있습니다.
ⓒ 공간화랑
▲ 공간화랑에서 여러 번 전시회를 한 이우환 화백과 신옥진 사장이(오른쪽) 함께 화랑 입구 계단을 올라갑니다.
ⓒ 김홍희
이런 자세로 삶을 살아온 그였기에, '문화의 소외지역'으로 불리던 부산에서도 국내외 유명작가들의 전시회를 개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가 부유한 환경 속에서 화랑을 운영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30여년 전 폐를 절단한 허약한 몸으로, 광복동 외국서점 거리의 허름한 찻집에 '공간화랑'이라는 작은 간판을 걸었습니다. 그리고는 열심히 화가들을 찾아다녔습니다. 한 번 찾아가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 찾아갔고, 장욱진 화백에게는 3년을 찾아가 명함이 든 과자봉지를 문 앞에 놓고 왔습니다.

"아직도 화랑을 하느냐" "아직도 부산에서 하느냐"는 질문을 수없이 받으면서도, 부산을 떠나지 않고 열심히 화랑을 꾸려갔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면서 '공간화랑'은 서울의 어느 메이저 화랑과 비교해도 부끄럽지 않은 화랑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렇게 '자수성가'하며 모았던 그림이기에, 그의 기증은 더욱 아름답습니다. 그 그림들 속에는, 그가 어려움을 헤쳐오면서 흘렸던 땀과 눈물이 고스란히 스며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부산시립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신옥진 기증전'에 가면, '기증을 통한 사회환원'의 의미뿐 아니라, 그림 한 점 한 점에 담겨있는 그의 깊은 '그림 사랑'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부산시립미술관 가는 길

지하철 2호선 시립미술관 역 (⑤번 출구) 하차, 부산시립미술관까지 약 100m 거리
부산광역시 해운대구 우동 1413
전화 051)744-2602

관람시간 : 10:00 ~ 18:00
매주 월요일은 휴관(단,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을 휴관일로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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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7-06-06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세상이 확실히 각박해졌어요...
저런 아름다운 기증을 액면그대로 봐주질 않고...바보같은..이란 수식어가
붙어있으니 말입니다..^^
 

동아일보 5월 31일자 사설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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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그제 부산 시민사회연구원 초청 특강에서 “참여정부는 정치·언론자유를 1등으로 유지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달 초 미국의 프리덤하우스가 발표한 2007년 국가별 언론자유 순위를 보면 한국은 ‘자유’ 항목에서 최하위점인 30점으로 파푸아뉴기니, 솔로몬제도 등과 함께 세계 66위를 기록했다. 국제언론인협회(IPI)가 지난달 내놓은 ‘2006년 언론자유 보고서’도 한국 정부는 민주주의 후진국에서나 볼 수 있는 언론규제를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런데도 이 전 총리는 현 정부의 언론자유가 1등이라고 한다. 명백한 대(對)국민 허위선전이라고 우리는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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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설을 읽고, 약간 스턴 상태에 빠졌습니다. 과연 우리 언론 자유가 이정도 수준일까?
하루가 멀다하고 대통령 까대는 사설과 만화와 왜곡된 기사들을 내뱉고 있는 언론이 있는데,
이렇게 자유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었나?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혹시 이것도 잡스런 사설이 아닐까 하여 디벼봤습니다.
디벼본 사람은 오늘의 유머 키다리아찌입니다.

뭐, "정치,언론자유를 1등으로 유지했다" 라는 말은 사실이 아님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미있는 점은 그 뒤에 따라 나온 분석이지요.

우선 프리덤하우스에 올라온 해당 리포트를 보면
(http://www.freedomhouse.org/uploads/fop/2007/pfscharts.pdf
http://www.freedomhouse.org/uploads/fop/2007/fopdraftreport.pdf)

1. '자유'항목이라는 것은 특별히 없으며 전반적인 언론자유 순위를 매긴 것에 불과하고,
굳이 세부 항목이 따로 있는 것 처럼 언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한국의 상태가 '자유' 상태이긴 하지요.
STATUS: Free    아래에 30 이라는 수가 있다고 그게 30점은 아닌 것이지요. 상태가 자유라는 뜻이지.
스테이터스 잘 모르는 것 보니 주필께서 게임 잘 안해보신 분 같습니다.

2. '30'점이라는 것은 '등급' 내지는 '순위'에 불과하다.
언론 자유가 가장 뒤쳐지는 북한은 '97'점'으로 우수학생인가요?
100점만점 형식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 30점이라는 의도적인 오역은 많은 오해를 부를 수 있지요.
'30' 이내의 국가, 즉 한국을 포함한 국가들은 '언론자유국가'로 분류되고,
'30' 초과의 국가는 '부분적 언론자유국가'로 분류됩니다.
숫자 높다고 좋은 것이 아닐걸요.
법적 환경 9위, 정치적 환경 11위, 경제적 환경 10위를 합산한 것이 30위인 것이지요.


3. 파푸아뉴기니, 솔로몬제도 등과 같은 레벨인 것은 맞으나,
굳이 이렇게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나라와 비교할 것이 있을까요?
같은 등급에는 칠레, 홍콩, 우루과이가 들어 있습니다. 아주 의도적인 국가 선택이라고 할 수 있지요.

4. IPI....국제 언론인협회....
그냥 용어만 들어 보면 상당히 공정한 기구인 듯 보이지만,
실상은 이것은 국가 자격으로 가입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 자격의 회원들이 가입하는 것이고,
주축은 각국의 주요 언론사 경영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언론의 독립' 보다는 '언론 경영의 독립'측에 비중이 더 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요.
조중동 우리나라 대표 보수 언론사들이 이사나 부위원장, 한국 위원장 등을 맡아온 단체입니다.
유신 시절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었을 때에 우리의 언론 수준을 미국, 스위스와 비슷하게 '평가해주었고'
전두환 시절에는 '우리나라의 언론 자유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자유롭다'고 한 단체입니다.
뭐, '자유롭게 아부'할 수 있었다고 말하면 할 말 없습니다만.

이렇게 각주를 달아놓지 않고, 위의 사설 일부분만 읽어본다면,
과연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요?
저렇게 써 놓고도 '그래 너처럼 찾아보면 다 알 수 있잖아' 한다면 할 말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어떻게 언론이 왜곡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신문, 정신 바짝 차리고 읽읍시다.
사설 문단 끝의 부분을 그대로 다시 복사해 넣습니다.
"명백한 대(對)국민 허위선전이라고 우리는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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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맘 2007-06-01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걱! 정말 저도 미처 몰랐습니다.
"명백한 대(對)국민 허위선전이라고 우리는 규정한다" 가 정답이네요. ^ ^.

2007-06-01 17:4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