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 정육점>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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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한번 요상하다. <이슬람 정육점>이라니! 콧수염 휘날리며 희번득한 칼 들고 폴짝폴짝 날 뛰는 노인의 익살스러움은 또 어떠한가. 표지만 봐도 절로 ‘재밌겠다!’란 말을 퍼뜩 떠올릴 만큼 대번에 마음을 사로잡은 책이었다. 

그건 정말 그랬다. 올해 읽은 소설 중에 단연 독보적으로 꼽아낼 만큼 수작이었으니까. 애초 예견했던 유쾌호쾌한 즐거움은 아니었지만 목젖까지 배어오른 무언가를 누르며, 읽는 내내 호젓해졌고 정말이지 행복했다. 
 

과거를 다 말하진 않지만 온몸의 상흔들이 역사를 말해주는 가여운 이들. 사람에게 나이테가 있다면 그건 아마 다 아물어진 상처의 희미함, 그것에 더해 다음 이야기로 새겨진 흔적들일 것이다. 애처롭게도 떠오르는 일이라야 지독한 시절뿐이라 자꾸 덧나고 아프다. 그렇더라도 이젠 옆사람에게 '네 상처는 내가 덮어줄 수 있어-'라는 위안이듯이 기꺼이 꺼내어 진다. 아픈 기억도 내 몸의 나이테로 남아 나를 말해주듯이 내 이야기가 너에게 위안이 된다면 기꺼이 공유할 수 있는 것. 이게 사랑인걸까.

읽는 내내 탄복하고 책을 덮게 만드는 순간이 많았다. 작가는 단 한줄도 빠른 눈놀림을 허락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모든 단어 하나 하나 오직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을 내뱉었다. 내 안에서 벌어지는 풍화작용 때문에 도저히 다음 문장을 이어 내달릴수 없게끔 긴 여운을 주는 시간이었다. 책을 덮고 찬찬히 그들의 역사를 돌아보고, 지금 이들이 만들어가는 역사 또한 가늠하려면 온몸의 촉각들이 다 살아나는 듯 했다. 머리가 지끈거릴만큼 멈춰지지 않는 현실의 고통까지. 지금 우리가 사는 어느 터전의 이야기기도 했기에, 그것을 생각하니 다시 마음을 멈출 수 없었다. 

말하자면 손홍규라는 작가를 알게 된 것은 큰 축복이다. 잊혀졌을지도 모를 오랜 전쟁의 상처와 명예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영원한 이방자의 삶은 얼마나 기막힌지. 고아로 여기 저기 떠밀리며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소년, 제각각 아픈 가정사를 안고 살아가는 친구들, 이웃들, 그리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 안나아줌마. 모든 캐릭터에서 이 시대 소외된 이들의 아픔으로 살아났다가 어느덧 단체로 예방접종이라도 맞은듯 사라져 버린다. 잠깐일지 몰라도 우리는 가끔 이렇게 웃을 수 있다. 우리가 진짜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이 가족에 이 집에 있었고 그러면 웃게 되는 것이었다. 

어떤 한 문장을 빌려와서 이 책을 대변할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그러나 그러지 않기로 한다. 솔직히 그건 불가능하다. <이슬람 정육점>에는 혼신의 언어들이 춤을 춘다. 새삼 어느 한 말을 끌어오다간 줄줄이 다 실어야 할 터다. 학교에 가지 않아도 이들과 함께 산다면 아름다운 말만 하고 살 수 있을 것 같다. 
 

도저히 책을 덮을 자신이 없다. 이 아름다운 가족들을 정말이지 오래오래 곁에 두고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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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리>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쓰리
나카무라 후미노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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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에 세 번째로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그 때를 떠올리면 분노할 의욕도 뭣도 없었고 그냥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또 나야? 두둑하지도 않은 내지갑은 왜 자꾸 사라져?’ 속절없이 마른하늘만 올려다보며 어이가 없군, 이랬었다. 다만 두가지 사실에 의아했는데 내가 쓰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있어 보이는 행색이 아니므로), 그리고 요즘도 소매치기가 명맥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어렸을 때 명절날 시골로 내려가는 만원 시외버스에서 가방 밑에 숨겨둔 여비를 칼로 그어 감쪽같이 쓰리해간 일. 당시는 카드 보다 현금을 많이 들고 다녔기에, 소매치기들이 도처에서 활개를 떨칠수 있던 시절이었다. 그것도 벌써 오래전 일이다.
    
나카무라후미노리의 <쓰리>를 읽고 나서야 그동안 잊혀진 소매치기의 존재가 눈에 들어왔다. 행위를 드러내거나 그렇지 않거나 범죄자라면 대부분 극명한 존재감을 갖는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소매치기란 자들의 존재감이란 마치 '손'만 붕붕 떠있는 느낌이다. 분명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유령처럼 보이지 않는, 마치 다른 거미가 쳐놓은 거미줄에 갇힌 불행한 거미 한마리의 느낌. 꼼짝없이 그 구역에서 다른 거미들을 끌어 들이는 것으로 존재를 확인하려는. 서서히 그 더러운 관계망 속을 허우적 거리며 오랫동안 어쩌다가 그렇게 됐는가를 묵묵히 지켜 보았다. 

독자는 이내 주인공이 보이는 '손'의 유려함에 아찔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될지 모른다. 오랜 세월 연마되어온 기술이 그렇거니와, 사람들의 습관마저 한눈에 파악할만큼 노련한 눈썰미 또한 놀랍다. 그것은 마치 오십년간 한 일만 해온 장인의 훌륭한 솜씨로도 견줄 수 있을 만큼 예리한 것이고, 빛과 같은 속도감에는 박수까지 쳐댈 심경이다.

다시 소매치기란 존재를 떠올려보지 않을 수 없다. 세상에는 남의 것을 빼앗는 일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실천하는 자들이 사는데, 소매치기에게 드는 생각은 어떤가. 폭격 수준으로 날려버리고픈 악당이 있는가 하면, 시궁창의 쥐처럼 덫이나 놓고 결코 더러운 손 묻혀가며 쳐단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 같잖은 악당도 존재하는 법이다. 소매치기가 바로 이런 류는 아닐까. 재물을 훔친다는 건 목숨을 빼앗는 일에 비해 비교적 가벼워 보이니까. 작가가 말하려는 것도 어쩌면 우리 안에 이 작은 불편한 존재, 악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의 주머니 작은 구멍 하나쯤 넘나들며 야금야금 갉아먹는 쥐같은 존재. 이 하찮은 구멍을 들여다 보라고 덫을 놓은 것이다. 거기에 우리가 소위 말하는 밑바닥 생의 인간류들이 허덕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새삼 발견한다. 아무리 아등바등 살아봐야 작은 구멍 하나만을 파괴할 뿐인, 그래서 그 몸부림마저 안타깝고 처연하게 느껴지는 삶. 결국 이들이 하는 노력이란 것도 그렇게 뿌리 내려준 누군가에게만 가능한 단어일지 모른다. 애초에 제거된 환경에서는 노력이란 것 마저도 선택일 뿐인 것. 빼앗기는데 너무도 익숙한 그들에게 최소한의 인간적인 도리와 윤리는 사치에 불과한 것. 그러니 힘들게 노력하는 삶이란 하면 손해인 영역 그런 셈이다. 그래 서로 속이고 죽이고 이용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 밖엔 모르는 거고, 벗어나고 싶은 작은 구멍에서조차 허덕이며 여기까지 온 거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에게 온몸으로 항변하는 작은 구멍의 그들이 산다.

 
작은 구멍새라도 얇게 비치는 빛을 느낄 수 있다면 이들에게도 ‘희망’은 있는 것이다. 따뜻한 것을 따뜻하다고 느끼는 것, 그 느낌을 다른 이에게 체온으로 전달할 수 있는 손길. 그거면 되는 것이다. 마지막에 스스로 버려질 것을 원하는 ‘아이’의 선택은 그래서 참 아름답다. 어둠의 세계와 단절하는 손. 선택을 제안한 주인공은 진짜 어른이 된 셈이고, 아이는 다시 태어날 용기를 얻는다. 아이에게 품어진 온기를 목도했으므로, 우리는 이들을 보면서 ‘용서’라는 단어를 품어 본다. 그리고 비로소 아이에게 두 팔 벌려 진짜 세계에 온 걸 환영한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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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 대역본> 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 - 영한대역 (영문판 + 한글판 + MP3 CD)
포리스트 카터 지음, 조경숙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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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낡은 영사기 너머의 활동사진을 추억하고 쓰윽- 미소를 지어낼, 당신에게 그런 유년이 있는가? 별스런 얘기꺼리 없이 그저 어릴 때 먹던 과자나 아이스크림 상표 따위를 추억하는 이들에게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이 보이는 세상은 그야말로 '유년은 이렇게 보내는 것' 정석 시리즈를 펼쳐내 보이는 것 같다. 마치 추억의 요람인듯이. 어느새 온전히 내 이야기이기를 바라는 욕심으로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그들의 삶에 퐁당 뛰어들면 된다. 더구나 이 책은 원어가 실려 있어서 작가 본연의 의도나 느낌들을 여유있게 찾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기 ‘작은나무’라 불리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가 있다. 자연의 향기를 잔뜩 머금고 풍요로운 인심의 마을이란 정취를 내뿜으며 작지만 위대한 삶을 살아가는 단촐한 사람들. 어슴푸레하고 희미한 요동으로 시작된 이 여정은 아주 소소한 일상의 반복이다.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의 일화들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사는 ‘작은나무’이게 한다. 기꺼이 이 작은 소년의 시점으로 돌아가 어른들이 들려주는 오랜 전통, 문화와 진리같은 것을 체득하고 싶어진다. 아이가 성장하는 만큼 내 안에 켜켜이 쌓인 먼지들을 예전처럼 다 녹여 없앨 수 있을 것 같은 좋은 기분이 든다.   
  특히 자연을 훼손하지 않고 상생의 길을 걸어가라는 가르침은 새삼 인상적이다. 백인사회의 건설적이고 이성적인 원칙들과 충돌하면서 파괴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웠다. 언제나 든든한 강자의 편에 서서 소외된 자들의 최소한의 요구라는 것도 들어주지 못한, 방관만 하던 우리의 자화상 이런것들이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스스로 망가진 것이었을까. 과연 다수가 원하는 세상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일일지. 소수의 권리를 존중하고 최소한 침범하지 않은 한도를 지켜내는 게 왜 여전히 지금의 문제이기도 한건지. 우리는 여전히 융화하는데 서투르다. '작은나무'가 겪어내는 굴곡진 삶은 우리네 삶의 축소판과도 같고, 역사의 반영이기도 하다. 시련을 맞닥드리고 좌절하다가 다시 무릎을 털고 일어나게 되더라도 일단 이 과정을 피해갈 수 없다면 그러면, 그래 그렇게 걸어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말아야 한다. 이들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준다.    
   

  ‘작은나무’에게 남겨진건 외로움이다. 이를 지켜보는 것은 너무나 가혹하다. 그러나 유일하게도 이 어린 아이에게 '진짜 삶'이 기다린다는 기대감만은 참 다행스럽다. 체로키족의 고결한 피가 소년의 가슴에 남아서 오랫동안 이 땅에 흐를 것임을. 자라서 땅을 일구게 되고 소년의 땀을 받은 열매들이 많은 사람들의 입과 마음을 풍요롭게 할 것을 믿어 본다. 전통은 그렇게 안으로 흐르는 것이기에.  

  기억이란 광활한 우주에 무덤처럼 동그랗고 화석처럼 온전히 숨죽여있던 일화들이 소년의 순수한 미소를 타고 유영한다. 한참이나 걷다보면 어느새 생각지 않던 보다 근원적인 물음들이 튀어 오른다. 이 낯선 생각들에 답을 할 필요는 없다. 그저 같이 한바탕 돌고 돌다보면 어느새 자양분이 되어 건강하게 자라 있을 것이다. 
  블루보이가 따라간 언덕의 길을 소년도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 오른다. 반갑게 맞아줄 그들을 위해서라도 가르쳐준 소중한 유산을 가꿔나가야 한다. 그 날 서로 미소지을 수 있다면, 그런 삶이라면 아마 한세상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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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치는 밤 읽기책 단행본 9
미셸 르미유 글 그림, 고영아 옮김 / 비룡소 / 200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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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치는 밤」은 무수한 빛의 입자들이 물방울처럼 떠다니는 상상력의 진수를 보여주는 책이다. 먼 훗날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한 소녀를 만났노라 기억함직한 우리들의 평범한 사유를 들추어 내준다. 천둥이 치고, 잠이 오지 않는, 그것도 무서운 밤에 ‘내가 사는 세계는 어떤 곳일까’라는 결코 만만찮은 의문을 가지게 된 소녀의 물음상자 안이 궁금해진다.
  끝도 없는 의문의 바다에 사방으로 튀어 오르는 철없는 물고기들이 파닥거리는 듯 신선한 내음을 풍긴다. 이 물음들을 한 장 한 장 펴내갈 때마다 내가 느꼈었던 미지의 나락 속으로 자꾸만 빠져들어 가고 그것은 마치 돌아오기 아쉬운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흥미진진하다. 미셸 르미유의 이 짧고도 강렬한 물음들은 무릎을 탁 치게 되는 동감을 자극하고, 사려 깊은 구성력으로 상상의 세계를 정신없이 맛보게 해준다. 이 책을 돋보이게 하는 다른 한 가지는 시각적 퀄리티에 얼마나 심혈을 기울였는가 이다. 붓선이 적고 채색도 생략하였지만 기괴한 동선과 여백을 많이 둔 특징들이 막연한 의문들에 대한 물음표를 지우고 아릿한 순간을 맛보게 도와준다. 내적 열망의 수평이 한쪽으로만 걷잡을 수 없이 기우는 순간, 이런 상상을 하는 시간들이 모여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신비롭고 진정한 세계속의 나를 만나는 낯설음을 느끼게 해준다. 「천둥치는 밤」은 의식적이지 않으면서도 의지적이지 않은 그저 누구나 도달하게 되는 계단의 어느 지점에서 쉬어가는 여유를 그리고 있다. 지금의 내가 사는 세상을 돌아보고 우리의 의식에 묻혀있던 의문들을 과감히 꺼내어서 그 답을 향해 떠나도록 우주선을 태워주는 것이다. 이는 어린이들에게 ‘자아’와 ‘세상’에 대한 집요한 고민에 다다랐을 때 외롭고 지치게 하지 않을 의지와 이미지를 심어줄 것이다. 
   때때로 어린이들에게 사상이나 철학, 예술의 이론과 경험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란 의문이 들 때가 있다. 미술관에 데려간다거나, 클래식 음악을 억지로 들려주고, ‘철학이란 무엇이다’라고 친절히 써놓은 책을 읽히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나 유효할지 의심스럽다. 배운다는 것은 거창한 경험을 통한 것보다는 일상적인 환경 속에서 체득한 것이어야 자연스럽고 진실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림책은 아이들이 평상시에 접할 수 있는 가장 친숙한 매체일 것이고 이 안에 담겨질 내용들에 대해 어른들의 고민은 끝이 없다. 작가는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어떠한 방법으로 다가가야 하는지에 대한 충실한 해답을 그려놓은 것 같다. 이 세상 누구도 정답을 알 수 없는 엉뚱하고도 미지의 물음들만을 담고 있지만 오히려 이 점이 주목해야 하는 부분이다. 작가는 ‘다만 자신의 상상 속에서만 맴돌 수 있는 그것’ 일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철학과 예술의 진정한 면모는 아닐까.
  영혼의 허기는 어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천둥이 치는 그런 밤에는 어린이의 마음속에 어김없이 노크를 할 것이다. 내면의 그윽한 숲길 위에 서 있다면 맨발이어도 좋을 그 어느 순간에, 아이들이 이 책의 소녀처럼 진정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푸른 꿈이었노라 기억할만한 성장통을 유쾌히 즐겨야 하지 않을까. 우리들의 소중한 사유들이 바로 이 숲길 위에서 잉태되고 배가 또 다시 불러오는 순환의 풍요와 정신의 성장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 달콤한 감각에 감염되고 푸르른 꿈을 간직하게 되는 「천둥치는 밤」과 같은 작품들이 우리 어린이들의 주변을 가득 채울 날이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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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티멘털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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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맡아본 냄새, 언젠가 와본 것 같은 낯익음. 책을 읽는 내내 이 알 수 없는 존재의 발현은 확실성의 구도가 일그러져있는 그저 ‘낯익다’라는 감각으로 시작된 여행처럼 어지럽고 막막하다. 체험된 유기적인 삶의 언어들이 뒤엉키고, 맞물리고 시간에 의해 제 모양이 만들어진 하나의 기억처럼 《센티멘털》에 나오는 각기 다르지만 낯익은 풍경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묻어져 사라진 줄 만 알았던 감각들을 이끌어 내준다. 이 이미지들은 작위적으로 발생된 것이 아닌 잠재의식이나 내적인 힘에 의해 촉발되느라 조금은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수고를 감내해야 한다. 어떤 반복되는 꿈을 꾸는 일처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면서 무의식을 지배하는 실체 없는 그림자만이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똑 똑 떨어지는 물처럼 아스라이 걸어오는 것이다. 환상에 질서와 언어라는 형태가 부여되면서 막연했던 느낌들은 그 진실을 드러내거나 혹은 왜곡된다. <청수>는 바로 이러한 은밀히 무의식속에 지배되는 기억의 흐름을 이야기 하고 있다. 막연하게나마 포착하고 그것을 현실로 의식해 내는 순간 그것은 태양으로부터 셀 수 없이 산발되어온 빛의 파편 조각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만다. 주인공은 되풀이 되는 이 일상을 괴로워하면서도 ‘통제받지 않은 꿈’에 이끌려 맞추지 못할 퍼즐을 가지고 노는 마조히스트이다. 깊은 내면의 강에서 헤엄을 치며 은근한 즐거움을 누리는지도 모르겠다. 끝없이 맞물리고 순간이 죽음과 영원성으로 변하는 이미지의 환상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청수>가 몽환적인 이미지의 꼬리를 따라 존재의 본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했다면  <다카세가와>는 성적 본성에 의한 집요하리만치 정밀한 묘사로 짙은 인상을 풍기는 작품이다. 작가인 주인공과 잡지사 기자와의 정사 장면이 주를 이루는 이 소설은 남자의 자유로운 행위들을 통해 아픈 기억을 안고 사는 여자의 기억을 보듬어 준다. 결국 다카세가와 강에 던져지는 ‘팬티’는 여자의 낙태의 기억을 최고조로 이끌어 냄과 동시에, 끝을 알 수 없는 포용력과 정화력의 상징인 ‘물’에 버려짐으로써 죄를 씻어내고 상흔을 치유해주는 행위로 볼 수 있다. <청수>에서 죽은 비둘기가 손수건에 의해 덮여지는 이미지와, <다카세가와>의 플라스틱 병에 담아진 팬티를 버리는 행위는 이미지의 전복적인 전환이라는 점에서 닮아있다. <추억>은 낱낱이 흩어진 언어들이 형식의 일탈을 통해 깨어지고 원자화된 시적 느낌을 전해준다. 이 소설의 미학적인 반영은 내용에서처럼 형식의 파괴나 연못가의 차가운 침묵을 깨는 은빛의 가는 핀과 같은 예리함과 날카로움을 지녔다. 내실을 갖지 않은 형식으로 공허해 보이는 자율성은 비로소 예술이라는 형태에 한계를 확장시킨 셈이다. 연장선상 위에서 <얼음 덩어리>역시 같은 시간에 각기 다른 아픔을 가지고 사는 두 주인공이 나란히 서서 걸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형식이 꽤 재미있는 단편이다. 친어머니라는 근원적인 이끌림에 의해 매주 목요일 카페의 여자를 찾는 소년과, 불륜이라는 가책과 연민 사이에서 고민하는 여자가 서로 착각이라는 고리를 반씩 베어 물고 걸어가는 시선처리가 매우 독특하다. 딱딱한 덩어리로 차갑고 강렬하게 찾아와서는 한순간에 물이 되어 녹아 없어지고 마는 착각의 덩어리 바로 ‘물’이라는 정체를 이들 역시 체험한다.
  《센티멘털》은 네 편의 단편을 통해 서로 다르지만 낯익은 느낌들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놓고 독자로 하여금 제 각각의 기억을 응시하게 해준다. ‘물’이라는 형상화를 통해서 삶의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자아의 모습을 거울처럼 들여다보게 해주는 것이다. 눈앞에 강이 되어 흐르거나, 내면에 흐르거나 네 작품 안에서 각기 다른 색깔을 지니며 기이한 적요함과 헤어 나오지 못하게 하는 매혹적인 외침을 들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읽는 내내 독자들은 문장과 문장 사이에 가로막히게 되고, 침묵과 기억이 만들어낸 생의 편린들이 물의 자국처럼 남게 될 것임을 목도한다. 우리의 의식 속에 보편적으로 흐르는 슬픔이나 즐거움, 죽음, 사랑 이 외롭고 애처로운 강 위에 작가가 만들어 둔 나룻배를 타고 유유히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신비롭고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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