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기 문학 B조 마지막 도서 <사랑, 마음을 내려놓다>
사랑, 마음을 내려놓다
설미현(미스트랄) 지음 / 베가북스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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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스트랄의 <사랑, 마음을 내려놓다>를 읽다보니 가까운 것, 소소한 것, 일상인 내 주위를 살피게 된다. 꼭 수필이라서가 아니라 읽기가 쉽고 마음을 쏟는 방향이 단순한 것 상식적인 것을 가리키고 있어서 모난 데가 없다. 십여년이 넘도록 써온 오랜 일기의 흔적이 <사랑, 마음을 내려놓다> 한권의 책으로 담아졌는데 곧은 성품이 향기롭게 느껴진다.  

  아쉬운 것은 에필로그에서 언급한 수필에 대한 글이다. 요즘 쏟아지게 나오는 수필 에세이집들 가운데 유명작가나 명사들이 쉬어가는 정도의 차원에 쓴다는 말은 여러번 생각해봐도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수필을 쉬어가는 정도로 생각한다는 어감이 그 진의를 알겠으면서도 오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내는 수필은 쉬어가는 차원이라고 쉽게 치부하는 태도는 너무 앞선 생각이다. 그보다 작품세계의 연장 확장의 차원에서 보는 것이 나을 것이다. 또한 소설이 허구이기 때문에 수필이 품은 진실의 위력을 따라올 수 없다는 부분도 진의를 알 수 없는 부분이다. 소설과 수필을 왜 이런 식으로 엉뚱한 곳에서 비교하는지도 모르겠고, 진실의 위력이니 뭐니 상하개념을 따져 묻는 태도가 자격지심으로밖에 비춰지지 않는다. 블로그에 올려진 글이라지만 문단간의 띄어쓰기가 너무 많은 채로 그대로 실린 게 수필의 단필의 맛을 떨어 뜨린다. 그리고 거의 모든 글에서 읽는 이도 금새 연상될만한 진리를 말하거나 상상할 수 있는 영역에서 머무른 글쓰기는 좀 개성이 없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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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의황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불안의 황홀 - 김도언 문학일기
김도언 지음 / 멜론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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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불안의 황홀>을 읽으면서 호흡이 긴 일기를 써봐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김도언작가처럼 풍부한 물음을 던지는 글은 못되겠지만 적어도 마음 하나 다스리는데는 더할 나위없이 좋을 것 같다. 제 안의 운율을 모은 악보처럼 좋은 소리가 들리고 곧 황홀한 습관에 자진해서 중독되고 싶어진다.  

 
여기 일기들이 작가에게 일어난 재연인 채였다면 고인물을 들이키는 것처럼 탁할 뿐 다른 맛을 즐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불안의 황홀>은 일기라 한들 긍지를 품지 않을 수 없는 그런 글이었다. 그가 사랑하는 '시'처럼 고민의 흔적이 응축된 글, 그래서 그의 일기는 잡념이라도 근사하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겠거니와 문학작품을 읽고 그때 그때 제 몸이 그려낸 감수성의 곡선을 제대로 표현해 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나역시 이 고유의 시간을 좋아하고, 될 수 있으면 날 더 괴롭히는 물음일수록 기꺼이 사랑하고 싶어진다. 이 사유의 시간은 오래 유지될수록 깊어지므로 곡선의 놀이를 즐기는자가 되고 싶다. 그러니 내가 가진 여운들을 온전히 체득하고 써낸 글쓰기는 작가가 의도한 미완에 대한 완성일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자만이 아니라 문학이 결국 독자의 몫으로 넘겨지는 자연스런 생산이리라.  


<불안의 황홀>을 읽고서야 비로소 발현하고픈 욕망에 대한 형체에 살이 보태지게 되었다. 일기도 훌륭한 문학일 수 있는 것, 이는 좀 더 내밀한 상상의 무게를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 책의 출발도 이런 차분한 의문과 고민의 흔들림에서 시작된 모양이다. 온 무게를 덜어낸듯 군더더기 없는 솜씨, 그러나 결코 가볍지 않은 진중함이 은은히 배어난다. 책을 읽고 느낀 바든, 사람들과의 관계든, 혼자만의 사유든 이런 자신을 끊임없이 수상하다고 여기며 온전히 솔직하지 못했다 말하는 것은 당혹스러우면서 가벼운 배신을 느끼게한다. 그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정체에 의심이 솟고 끊임없이 유랑하는 유목민처럼 떠돈다. 그런 그를 보면 <불안의 황홀>이 만들어 낸 무늬가 왜 불확실과 역설의 물음표를 찍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제목이 말해주는 것처럼 단정짓고 표상화하는 말대신 언어의 그림자를 응시하도록 살아온 불안의 자취 때문이다. 당연하게 생각해온 것을 거부하고 옆과 뒤를 의심해보라 말하는 작가의 설득이 고마워진다.   
문득 예술이 바로 이런 태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파괴해도 좋은 의심의 산물일 것, 작가가 혐오하는 것에 대해 잊지 않으려한다는 말은 어쩌면 예술의 이면을 주시하고 눈에 보이는 것에 대한 의심을 멈추지 않고 싶어서일 것이다. 증오의 마음을 잊지않겠다는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이 역설의 이뇨작용을 잘 여과해 낸 고뇌의 산물이기에 가능하다.  

항상 지금을 생각하는 시점의 기록, 그래서 생각은 앞에서 뒤로가는 여정을 밟도록 기획되어 있다. 줄기를 타고 뿌리로 내려가는 좀 더 날 것의 기록을 따라가도록 한다. 시간을 거스르는 순이니 작가의 섬세한 의도를 눈치챘다면 독자는 충분한 피드백을 나눠 갖을 것이다. 편안하고 아름다운 광경보다는 낯설고 의심하는 것들에 대한 수상한 기록을 자극하며 권장하는 셈이다.   

일기는 생각을 증폭시키고 실험과 전복을 일삼는 상상의 놀이터와 같다. 마음껏 뛰어놀고 온몸을 어지럽히는것을 독려하고픈 아이의 천진한 투정이다. 자유자재로 뛰놀수록에 건강함이 키워지듯 일기는 문학의 터전을 일구는 일처럼 자양분을 생산하는 유연의 샘이다. 그래서 이 책의 기록은 김도언의 다음 소설이 더욱 단단하고 풍요로울 것임을 기대하게 한다. 상상 속 운율을 기록하도록 권장하는 그 수상한 자극에 호흡을 가다듬고 조용히 그를 따르고 싶다. 
 

이 가을 날에 일기를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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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
데이비드 뱃스톤 지음, 나현영 옮김 / 알마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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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를 읽고 난 후유증을 일일이 고백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일지 모르겠다. 하나의 텍스트로써 엄정히 읽어내고 진단하며 별 몇개를 얹고 말고 하는 일이 대단히 무례하고 부질없이 느껴지는, 그 어떤 여력이 생기지 않는 책이다. 다만 읽어 내는 일, 이것이 끝나면 오랜 시간 막막의 길에 덩그러니 놓이는 편이 나을 것 같은 그런 소설이다. 모두의 문제이기 이전에 내 문제임을 여실히 반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에 몇 자 적어내는 글은 리뷰라기 보다 후유증에 대한 고백 정도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누가 꽃들의 입을 틀어막는가>는 아주 간곡한 어조로 우리의 무관심에 의표를 찌른다. 아프면, 당연히 손을 내밀라고 말이다. 나도 모르게 전등을 끄고 컴퓨터 화면 빛으로만 비춰지는 내 방의 아무데나를 가만히 바라본다. 이 어둠은 사뭇 제목이 말하는 떨궈진 꽃잎들, 그들이 사라진 나락의 끝일 것만 같다. 주위가 결코 밝아질 수 없는 앞날을 보는 것처럼 몸서리 쳐지는 암울의 땅. 그곳에 아직도 노예라는 이름의 그들이 산다. 온 빛을 제거하고 나서야 보이지 않던 그들의 젖은 눈과 아우성이 들리는 듯 하다.    


향긋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실 때, 모양이 예쁜 핸드폰을 사고 좋아할 때 나는 이럴 때, 여기 이 꽃들을 한번쯤 상기했어야 했다. 편안함과 즐거움을 위해 어느 한편에서 일어난 강제 노역과 인권 유린 등 처참한 광경을 한번쯤 의심해 봤어야 했다. 분명 모르지는 않던 일이다. 
월드컵의 축구공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공정무역 커피라는 문구를 보면서 역으로 어떤 생각을 했었는지, 기억을 하고 있다. 고사리같은 손으로 축구공을 만들어내고 정작 공을 차본일이 없다는 아프리카의 아이들을 불쌍해 하거나, 하루종일 커피콩을 따내면서도 하루벌이가 그들 한 잔 값이 안된다는 것을 딱하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우리 일상을 점령하다시피 한 값싼 물품들의 생산자가 막연히 제3국의 어느 노동자에 의한것이란 걸 굳이 생각할 필요는 없이 살던 내가 있었다. 그저 가난한 나라의 그만한 일자리로도 살아가는게 다행아닌가 하는 어리석은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들은 정당한 대가를 받는 노동자가 아닌 '노예'였다는 것은 알아주지 못했다. 그곳은 제3국이 아닌 노예의 땅이었는데도.

캄보디아와 태국 등 아시아 국가에서의 아동 및 여성들의 인권 유린은 말도 못하게 심각한 수준이라는 걸 이 책을 보고 알게됐다. 그들의 부모와 친지가 나서서 제 자식을 팔고, 성적 노예로 전락하게 만드는 행태는 입이 다물어 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이다. 결국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부모도 경찰도 나라도 신도 아니고, 오로지 그들 자신 밖에 없던 것이다. 극소수의 인원만이 이 책에 나오는 구원자를 만나 새로운 삶을 꾸릴 뿐이다. 대다수의 노예들은 끝모를 막막의 땅에서 피와 땀을 착취당하며 산다. 
새삼 현대판 노예라는 말을 들먹이는 것은 잘못된 말이었다. 그 언제고 노예가 사라진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전 세계 곳곳에 다양한 방법으로 발목이 묶여 고통의 나날을 버텨내는 노예들이 최소한의 인권도 없이 살아간다. 많이 알려졌고 개선되고 있지만 아직도 미비한 수준이다.   

이 책은 우리를 향해 노골적인 손가락질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결국 우리의 이중성, 무관심에 대해 말하려는 책이다. 그래서 보는내내 불편하고 끔찍하지만 무엇보다도 감내하여 같이 손을 뻗어주길 기대한다. 결코 우리의 관심과 도움의 손길없이 노예가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자유를 우리가 우리의 손으로, 바로 당신이 내밀라고 말한다. 어둠의 장막을 열고 노예들이 모두가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 양석일작가의 <어둠의 아이들>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 성적 노예문제를 적시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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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고준>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독고준
고종석 지음 / 새움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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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다해 탄복하는 소설을 만나면 도저히 그 책과 이별할 자신이 없어진다. 일방적인 결별통보를 받은 순간처럼 믿을 수 없는 '끝'이라는 단어에 털썩 주저앉아 좀 더 함께 해줄수 없냐고 애원하고 싶어진다.
이윽고 그간의 감정들을 정리하여 어렵게 책이 덮어지는 순간에, 알게되는 깨달음이 있다. 그건 끝이라기보다 시작점에 다시 놓이는 일이라는 것, 그러니 기꺼이 떠나 보내는 용기를 얻고 또다른 세계의 문에 설 수 있는 거라는 걸 말이다. 시간이 지나 가끔 떠올린다면 지금은 어떻게 지내느냐고 조그맣게 물어보는 일, 영락없이 소설은 안부의 안내자인 것이다. 

 
<독고준>은 최인훈의 소설 <회색인>과 <서유기>의 주인공을 생각하며 그 이후를 상상해본 소설이다. 원작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성과를 긍정적으로 기대할 기준치가 높아짐을 의미한다. 비교 당하기 일쑤고 그것을 뛰어넘기란 장벽을 오르는 일과 같아서, 그저 누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보여도 다행일 것이다. <독고준>은 그 이후의 삶이란 점에서 원작과 비교될 일은 적지만 읽고 난 소감을 말하면, 참 단정한 소설이란 인상이었다. 말하자면 최인훈선생의 이름에 큰 누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단 소리다. 이러저러한 고민이 있었을 것임에도 오히려 이런 독특한 실험을 해준 작가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 아직 두 작품을 읽기 전이긴하지만 적어도 아류작이라거나 글러먹은 오마주란 말을 앞세우지는 않게 될 것 같다. 고민의 흔적이 책을 읽는 내내 향기처럼 생각밑을 맴돌았다.  

<독고준>은 독고원이 아버지가 선택한 자살의 의문을 안고 어머니께 건네받은 수십년간의 일기를 읽으며 생각을 덧붙이는 플롯이다. 아버지의 진짜 생각, 죽음의 까닭을 찾고자 한 부채의 기록이다. 일기라는게 감상적이고 사변적인 글이 대부분인데 그게 또 매력이라면 매력이겠다. 어쩌면 소설을 읽는 독자 중에는 인물을(실재하는) 비판하는 말이라거나, 정치적 이견 따위로 불편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러나 이런 반응 또한 재미있는 일이다. 독고준의 생각이 오만하거나 아집으로 보일 수도, 어떤 부분에선 솔직한 진실임에 동조하기도 하는게 당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입으로는 결점없는 말을 할 수는 있어도 마음으로는 흔들림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속마음끼리 서로 부딪히고 튕겨져 나가는 일이 격렬할 수록 즐길 수 있는 장이 커지지 않나 싶다. 일기란 원체 대중적인 시각과 보편적 가치, 시류에 염두하기 보다는 제 안에 쌓인 탑의 시각에 근거하는 것이다. 일기이므로, 일기이기 때문에 수십 편의 그의 생각을 읽어 내면서 다양한 생각들이 부딪히고 때로 따뜻하게 맞닿은 느낌에 감동하는 일, 우리는 그를 따라 깊이 성찰하는 시간을 누리면 되는 것이다. 
독고준의 공식적인 글은 아마 이런 단정적인 투의 언어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그의 유난스런 생각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갚지고 재미있게 느껴진다. 개인적으로 사회적 정치적인 사안이 있을 때 좋아하는 작가나 명사들의 개인 소견은 어떨까 종종 궁금했었는데 이 소설을 읽고 어느 정도 해갈이 된 느낌이 들었다. 그들도 역시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던거로구나 하는 새삼 놀란 부분도 많았으니 우스운 일이다. 당연하지 않은가. 작가란 원체 가장 민감한 사람들인데 그들이 침묵하는 방식을 의심했다니 반성할 일이다. 그들은 그들의 도구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상기해본다.
주로 어느 쪽인지를 묻는 정치적 질문에 대해 문인들이 단도직입적으로 이야기하는 경우는 드물어서(질문의 경박성을 경멸하므로 그럴 것이다) 특히 소설가의 노골적인 생각을 엿보는 것은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살아있는 증거라는 느낌, 매일 무릎을 꿇고 '어른'을 만나는 기분이 들었다. 때때로 가족에 대한 애틋한 감정들이나 일상의 언급을 읽을 때는 고종석이란 작가의 창작이라는 걸 알면서도 정말 어딘가 존재했던 독고준이란 작가를 찾아보고 싶어졌다. 특히 실재 인물들을 거론하는 게 현실감 있어선지 퍽 재밌게 느껴진 것이다. 문학의 계보를 읊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부분에선 현대사의 크고 작은 일들을 되새겨보는 시간을 누리게 된다. 또한 시간의 순차적 흐름이 아닌 사계에 맞춰 과거에서 현재, 현재에서 다시 과거를 넘나드는 구성이 퍽 흥미로웠다.

독고준이란 인물은 어느 한 곳에 머물기를 거부한 사람이다. 결국 양쪽에서 볼 때는 '자기네 사람은 아닌' 이방인으로 비춰졌을테고 때로 오명을 쓰기도 했다. 그러나 독고원은 아버지의 이런 성향이 오히려 수용하는 삶이었다고 본다. 실제로 고종석이란 작가의 성향을 생각해봤을때 독고준의 보수와 진보 또는 경계의 선을 넘나드는 다양한 체득된 삶을 말한다는게 무척이나 의아했다. 깊이있는 고민없이 자기와 다른 성향의 사람인 전 생애를 설계하고 소소한 일상을 들여다 보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때문에 독고준의 시각을 두고 고종석작가의 정치적 소양에 비교한다거나 의심하는 일은 어리석은 짓일테다. 작가가 인물의 속깊은 내면을 창조하고 평생에 걸친 일상의 기록을 설계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소설임에 충실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다름을 상상해보는 일은 소설가의 기본 중 기본이리라.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의 기복없이 담담한 역사의 기록을 말한다. 이는 어쩌면 무수히 많았던 현대사의 잔인한 일화들을 독고준이 살아온 발자취처럼 담담히 기록하려 한 일일지 모른다. 독고준의 글쓰기는 일기라해도 모든 생각을 다 엿볼 수 있는 글은 아니다. 특히 정치인의 죽음을 다룰 때 단 한줄의 사실적 기록 외에 개인 감정은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마치 누군가 읽을 수도 있는 전제를 둔게 아닌가하는 의심이 들게 한다. 죽기 전에 태워 버리거나 하지 않은 게 '원'이 말한 것처럼 공개를 염두해 두어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그렇다면, 평생 외곬수같던 인생을 대중에게 최소한의 이해라도 구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 그보다 아내와 딸들에게만이라도 그것이 탄로나기를 기대하면서 용서를 구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일기는 유언인 동시에 일종의 해명의 수단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현실은 어떤 삶이었을까. 언제나 변두리에서 이방자의 삶을 원칙했던 독고준. 최후 마저도 그는 여태껏 살아온 삶의 발자취처럼 요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살면서 해보지 못한 가장 크고 격렬한 외침이었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그는 뜻한 바를 조용히 옮기는, 그리고 자신이 좌초한 선택의 대가를 치르는 자유인이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죽음은 마치 수순의 흐름이듯이 느껴진다. 결코 마지막일 것 같지 않은 곳에서 일기가 끝나버리지만 이상하게도 격정적이거나 감내하기 어려운 감정이 들지는 않는다. 그와 닮은 고요하고도 외로운 슬픔 정도로 인식된다. 이 황당한 무덤덤함이 그의 실체일까. 독고원은 아버지와 본인의 삶을 되돌아보며 까닭을 찾고자 했으나 역시 다 알수는 없는 것 같다. 세상은 계속 반복되는 역사를 살아내는 것이라고, 그의 일기만이 유언처럼 남겨졌다.   

책을 덮지만, 일기에도 차마 담아내지 못한 독고준이 본 현실의 실체 감정의 막다름들을 좀 더 생각해 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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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뒤에 쓰는 반성문>을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삼십 년 뒤에 쓰는 반성문 문지 푸른 문학
김도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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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학교를 찾아 운동장의 마른 흙을 밟고, 몇 안되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가만히 듣고, 교실 안을 들여다 보는 그런 아득한 느낌을 상상해보라. <삼십년뒤에쓰는반성문>은 그 창문 안의 고즈넉한 얼굴을 한 소설이다. 독자에게 오랜 추억의 물건이 있는 다락방으로 안내하는 계단이 되어주는 미담같다. 폴폴 날리는 먼지 마저도 그 시절을 담은 유물인냥 싫지 않은 나만의 장소, 기꺼이 시절을 들추어선 오늘의 나를 있게해줌에 고마운 미소를 짓게 된다.  

제목에서처럼 주인공은 병환으로 누워계신 은사를 찾았다 까까머리 중학 시절의 잘못을 듣고 삼십년만에 반성문을 제출한다는 내용이다. 사실 기본적인 플롯으로야 소설이나 수필 등에서도 숱하게 봐온 것이어서 은사의 죽음이나, 소소한 감동 등의 예상을 품게 한다. 물론 보기 좋게 빗나간다면더 좋았겠지만 이는 소설의 그리 큰 걸림돌은 아니다. 분명 들어서 알거나 뻔한 스토리라는 걸 예측하면서도 몰랐다던마냥 연신 재밌다란 말을 품게 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소설이 '어떻게'를 충실히 행함으로도 충분히 좋은 전달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삼십년뒤에쓰는반성문>이 잔잔한 스토리를 가지고도 보편적이고도 대중적인 동감을 유발하는 것은 분명한 매력이다.    

작가의 말에도 밝혔듯이 작가는 학창시절 글을 훔쳐와 상을 받은 일이 있었고 몇십년이 흐른 뒤에 그 감정들이 사그라지지 않았다는 얘기를 한다. 소설 속 인물처럼 작가 본인도 칭찬을 계기로 소설가가 된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회고하며 소설로써 그 여남은 감정들을 털궈 내는 게 분명 소중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만한 일(사소한)로 시작되었지만 어린 소년에게는 말하자면 최초의 양심의 씨앗이 생긴 '사건'이다. 
남의 글을 도둑질한 소년도, 굴욕의 상처를 안고 자기만의 방에 갇힌 선생도 일을 계기로 뭔가 자극점이 됐었을 것이다. 그럴듯하게 보일 욕심으로 남의 생각을 흉내내는 일이라는 건 의도했건 본인도 알지 못한 새에 벌어졌건 충분히 벌어질만한 일이다. 그렇지만 이를 크게 마음에 두거나 하는 일은 별로 없다. 누구나 자극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저마다 풀리지 않는 트라우마가 있을 것이다. 소설에서처럼 조력자는 구하기 힘들더라도 그걸 푸는 일은 오래도록 계속되거나 혹은 영영 힘들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삼십년을 기다려준 선생의 존재와, 그의 글을 자랑스러워 하고 고마워 하는 모습은 정겹고 아름다워 보인다.  

단편 <진부의 송어낚시>를 읽으면서도 같은 맥락의 소소한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삼십년뒤에쓰는반성문>의 소년이 소심하고 오랜 시간을 밟으며 성장하게 된 면모를 보인 소설이라면, <진부의 송어낚시>의 소녀는 당당하고 솔직한 매력으로 즉흥적인 맛을 느끼게 해준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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