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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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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어려운 순간을 만날 때 그 시기를 잘 견뎌냈건, 어거지로든 겨우 방어만 해냈건 낮은 한숨을 돌리고 나서 드는 생각들이 있다. 힘든 순간은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찾아오는구나 싶은 생의 부림이다. 그러니 예감치 못할 일이 찾아오지 않으리란 순진한 기대보다는 공포의 순간이라도 기꺼이 맞이할 줄 아는 능수함이 필요하다. 현실의 중력에 매번 매복당하면서 다시 올라올 만큼의 불행을 가늠하는 경험치가 쌓여가는 것이 인생이다. 열심히 살아온 사람에게 마치 보은인 것처럼 좋은 일만 깃드는 삶이라면 얼마든지 노력만 하며 살겠지만 인생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보니, 그저 자신의 방편대로 긴장과 이완을 꾸리며 삶을 엮여 가야 하는구나 싶어진다. 매일매일이 눈앞에 닥친 현실을 잘 풀어 나가는 여정이면서도 장기적으로는 고랑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일이 없도록 터를 잘 다져나가는 자신만의 근육을 다져내는 일이다.  

 

 

 

정유정 작가의 첫 에세이 <히말라야 환상 방황>을 읽으면서 ‘히말라야’라는 공간이 주는 압도적인 인상과 더불어 산을 오르는 일이 인간에게는 인생을 비유하는 일과 같아서 자주 그 상징의 의미들이 중첩되곤 했다. 작가가 놓인 상황은 그가 만든 일이긴 해도 일단 짚고 넘어가야 하는 첫번째 관문처럼 여겨진다. 왜 하필이면 그곳인가 하는 물음은 느닷없기 보다 이미 작가 안에 잠복하던 명징한 것들을 눈 앞의 경험으로 재현하는 과정처럼 보인다. 마치 그녀가 큰 벽에 부딪힐 때마다 느꼈던 막막함이나 동시에 솟아오르던 투지들이 혼재되면서 그 너머의 상상을 확대 시켜주는 것이다. 그래서 여행 안에서 그녀가 보여주는 방황에는 자신의 과거와 만나는 조용한 만남이 있고, 소설 속 주인공과의 해후, 또 미지한 세계로의 탐험 등 여러 의미들이 맞닿아 있다.

 

 

작가는 고백하건데 맏이로 자라 어머니로부터 아주 엄격한 역할을 부여받으며 성장했고, 막 성인이 되자마자는 덜컥 가족을 부양하는 가장으로서 생업전선에 뛰어 든 그리 순탄치 못한 시절을 감내 했다. 이런 인생을 예견한 것도 아닐 텐데 어머니의 가르침은 마치 그동안의 키워진 방어력을 실전에 맞설 ‘기회’(짓궂지만)인 듯이 그 필요를 절감하게 하였다. 이후 가정도 꾸리고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어 전업 작가로 소설가라는 명성을 쌓기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인생을 살았던 듯싶다.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선이 굵은 이미지들이 떠오르곤 했는데 살아온 경험치들과 삶의 보편성들이 그녀로 하여금 유난히 단단하고 응집력이 강한 이야기로의 잉태를 가능하게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어진 현실에 잘 맞설 줄 알고 충실히 배워나간 덕에 작가의 소설에는 세상에 당당히 마주하는 다부진 용기들이 선연하다.

 

 

그러한 식으로 매번 작품을 써오고, 온 것을 쏟아 부어버리기를 반복하면서도 별 갈증을 느껴본 일 없는 삶이다가, 그녀에게도 고갈의 한계점이 오게 되었다. 일상으로부터 소진되어 버린 감정의 균열로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어버리는 일도 생겨버린 것이다. 이는 아마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버린 또다른 세계로의 앎에 대한 열망이면서 생존의 출구를 찾던 몸의 반응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녀는 저 먼 히말라야로 떠났고 그 세계를 만났다.

 

 

 

열병처럼 앓고 순수한 호기심만으로 떠나온 셈이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여정인 턱에 이 책을 보고 있으면 초보자가 겪어낼 좌충우돌 에피소드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무엇들이 있다. 일단 여느 여행기처럼 웃을 일이 별로 없고, 자주 포기하고 싶어진다거나, 그녀 안의 의문과 숙제들이 정말 잘 정리되고 풀어졌으면 하는 바람의 응원을 하게 된다는 점이다. 길지 않은 일정이긴 했지만 그녀가 당장 닥친 거대한 삶의 질문들에 잘 버텨낸 강한 모습을 보여 와서 이번 여행 역시 기꺼이 완주를 하게 되리라는 믿음들이 있었다.

그녀는 이곳을 다녀오고 나서 곧바로 여행을 떠났다고 한다. 단단히 여행의 맛을 알아버린 모양이다. ‘네팔병’을 언급할 때부터 그러한 기대가 들었으니까. 정유정의 방랑기라면 세상 어디로든 얼마든지 따라가서 듣고 싶어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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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3:2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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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 - 마스다 미리 산문집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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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스무 살이 되더니, 어른이라는 명사를 감당할 준비나 비전도 없이 어영부영 어린 시절과는 안녕을 고하게 되었다. 책임질 일이 많아진다는 건 조금 안 채였지만 갖고 있는 막연한 두려움만으로 앞으로 누리게 될 자유에 대한 기대감이 감해 지는 일은 결코 없었다. 그간 인생의 목표나 다름없었던 대입을 이루고 나니 더한 기쁨도 없는 것 같았고, 명찰을 달지 않는다고 얻어맞거나 머리가 금발에 허리길이까지 온들 가위로 잘리는 일 없는 (당연한)일상은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매우 달콤한, 인내의 선물 같았다. 과연 성인이 되고 느낀 해방감은 불합리와 단절된 아름다운 세상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의 나는 어른이라는 사람들은 모두 현명한 생각을 갖고 도덕적인 완벽체인 줄로만 알았던 것 같다. 물론 커가면서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별 깊은 인식까진 해본 적이 없고 다만 살아지면서 졸업장을 받는 일처럼 저절로 터득이 되며 얻어지는 일처럼 보였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간 알고 느끼는 게 얼만데. 일면 어른이란 말의 근사함을 훼손하고 싶지 않았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시절 내가 생각한 어른의 삶이란 지금의 내가 한심하게 생각하는 딱 그 정도의 수준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말하자면 겨우 ‘별 생각 없이 나이든 사람’인 것을 말한다. 나이가 들어도 꾸준하게 배울 의사가 있어야 하지만 그걸 귀찮아 하고, 사회와 융화해 가는 진통도 겪어야 진짜 어른으로 거듭날 수 있지만 망각해 버린 사람 말이다. 

이 단순한 생각조차 당연시 못한채 제 고집만으로 우기고 차단해 버리는 사람이 많아도 너무 많은 '이상한 어른들의 세상'을 황망히 알아버린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혀 성장하지 않은 아이 때의 모습으로 평생을 살아가면 노인이 된 들 한심한 소리를 멈추지 못하는 듯 하다. 그러니 성장은 평생 동안 지속돼야 할 인간의 과업이구나 싶어지는 것이다.

      

   

   

 

십대의 어느 날 갑자기 우리는 몸의 변화를 겪게 되면서 ‘나는 어디서부터 온 걸까?’ ‘왜 태어났을까?’하는 정신적 혼란에 직면한다. 마치 어느 행성으로부터 날아온 메시지를 해석하는 일처럼 시도 때도 없이 궁금해지고 무기력해지며 그 낯선 느낌들의 통로가 궁금해서 끙끙 앓는다. 이 성장의 격변 속에서 뭔가 아리송한 답이라도 찾는듯 시절을 보내고 나면 어느새 몸의 어른으로 완성되고 부쩍 성장한 정신도 갖추게 된다. 

 


스무 살이 넘어도 성장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울타리의 안위에 벗어난 동시 삶에 대한 고단함이  밀려오고 각박과 불신, 불필요한 타협에 이르는 순수와의 이별을 호되게 겪기 때문이다. 만약 이러한 시련으로부터 계속 일어서려는 내안의 의지와 추진이 없다면 안타깝게도 그저 그런 어른으로밖에 남지 못하는 것 같다. 세상이 다 그런 법이기 때문에 나의 이기도 당연한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가 몸 안 깊숙히 자리 잡는 사람을 너무 많이 봐왔다. 

나는 이러한 무치함들로 부터 벗어나는 의지가 세상을 더 많이 이해하고자 하는 힘으로부터 생긴다고 믿는다. 사춘기 시절 세상을 더 알지 못해 명쾌하게 내리지 못했던 것에 대한 답은 살아가는 내내 배워야 할 것들에 대한 빈공간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어른이란 사람들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된 계기는 내게 어떤 책을 만나고 부터 일어났다. 우리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관심이 없었고 그만큼 무지했던 시절, 이 책으로 진일보 할 수 있었다. 참으로 근사한 생각을 하는 이 사람을, 무작정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책에서 언급되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싶어졌다. 나와 내 부모, 곁의 친구나 동료 정도로의 소통과 앎만이었던 삶에, 내가 사는 세상으로까지 인식을 확대하게 해준 말들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된 전이의 경험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알던 세상이 전혀 다르게 보였고 부끄러워지고 무조건 다 알아야겠다 싶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내가 가진 생각들은 그에 반하는 말의 타당과 끊임없는 의심들로 둘러 싸여 있다. 그러니 배우고 바꿔나가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은 진리와도 같은 것이다. 매번 또 다른 삶의 앓이를 경험하지 않고서는 타인에 대한 이해가 힘든 세상이다. 그것은 각자 어떤 특별한 계기로 이루어야할 어른이 되는 통과의례인 모양이다. 

지금에 와서 내가 생각해 보는 어른이란 더불어 살아갈 줄 아는 사람, 계속해서 주위를 환기하고 성장해 나가는 사람이다. 그 때 날 일깨워 준 소중한 만남이 있었기에 조금은 염치 있는 사람이게 되었고, 계속해서 내 주변의 사람들과 연대해가는 삶을 꿈꾸게 하는 닻이 내려 진 셈이다. 여전히 나는 책을 읽거나 소중한 개개인의 삶을 들여다보고 싶어진다. 모든 곳에 내 모자란 배움의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스다 미리의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를 읽으면서 과연 서른이 되고 마흔이 되어도 비슷한 고민들을 해 나가야 하는 구나 싶어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어른이 있어 참 다행이고 고맙고 그래서 무척 사랑스럽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 작품의 묘미는 역시 공감일진대 한 시기를 지나오거나 맞이할 사람들 모두에게 위안과 격려를 준다는 점은 언제나 그녀의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중요한 정점이 된다. 

 

사십대를 맞이한 작가의 낯선 중년기가 어떤 일상과 맞물려 유쾌하게 엮여 가는지 지켜보는 것 만으로도 귀엽고 활력이 넘쳐 보인다. 염려하는 주름투성이 볼품없는 사십대로 보이기는커녕 여전히 사랑스러운 소녀가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젊음과 결별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내면을 가꿔야 하는 타당이라는 걸 그녀에게서 배우는 듯 하다.

 

 

이 책은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에세이긴하지만 결코 그녀의 하루하루가 가볍게 비춰지지 않는다. 그간 국내에 소개된 만화와 크게 다르지 않은 스타일로, 만화책이 몇 컷으로만 전해지는 짧은 말과 생각들로 상상되는 묘미의 것이라면, 이 책은 오롯이 그녀의 사생활과 주변의 이야기들로 픽션이 아닌 현실감으로 크게 다가오는 매력의 책이다. 그녀는 역시 하루하루 세상과 만나고 자신의 지혜를 베풀며 곁의 사람들에게 행복을 줄줄 아는 어른이다.

 

      

 

 

 

우리는 누구나 처음 살아보는 나이를 경험해야 하고 젊음과는 멀어지면서 괜한 쓸쓸함, 기대감으로 또 앞으로의 나이에 맞서는 낯섦을 겪는다.  

마스다 미리의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는 나이가 들어서도 역시 변하지 않을 소중한 가치에 대한 견고함, 안일함엔 소심한 복수라도 할 줄 아는 용기, 세상에 좀 더 나은 ‘나’일 수 있는 의지가 돋보이는 책이다.  

여전히 세상을 배우고, 어제의 나보다 오늘이 나은 사람이기를 희망해 보는, 누가 뭐래도 지속가능해야 할 '어른'인 삶을 참 근사하게 살아보고 싶어지는, 용기가 전해지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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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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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들의 우상이라는 호기심으로 알게 되어 몇몇 작품을 읽어본 바는 있지만 거장다운 아우라와 품위와 온화함이 넘칠 거라는 예상을 깨고, 어딘가 독립적이고 괴짜 같은 면모로 소설가 챈들러를 알게 되었다. 그의 작품이 하드보일드 소설의 역사를 만들어 낸 장본인이었는가에 대한 알려진 사실들은 다만 감정이 배재된 글이라는 게 가능한 것인가 하는 의문으로 내내 장애물처럼 함께했던 것 같다. 제법 독창적이고 유능하달 수 있는 유명 작가들이 챈들러에게서 영감을 받았다느니, 영향을 미친 작가로 손꼽히는 매력이란 과연 어떤 면이었을까 하는 포커스에만 너무 시선을 둔 탓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작품을 제대로 감상하지도 못한 채 단순한 인상만으로 그를 알고 있었단 착각만 남았다. 선입견만 지속될 뿐이어서 그 어떤 타이틀도 의식하지 않고 작품을 대해보리라는 다짐이 필요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비로소 알게 된 챈들러의 매력이란 그만의 ‘꿋꿋함’과 같은 사적인 태도에 대한 면이었다. 상당히 매료될만한 강단이 느껴지는 사람이라는 인상이 가장 먼저 든다. 더불어 지인들에게 호소하는 목소리에서 자주 그의 '화'와 '변'이 느껴지는 것이 오히려 인간적인 순수를 느끼게 해주었달까, 그는 다만 정말 글을 잘 쓰고 싶었던 사람이었을 뿐이란 생각이 들었다.

 

 

편지들의 주 내용은 어쩔 수 없는 일들에 대한 타협이 자기 안에 전혀 고려되지 않다는 고집의 관철, 작품이 늘어지거나 변형되는 것들로부터 무던히도 지키려 노력했던 것처럼 보인다. 자주 언성이 높아지고 더러는 절연되는 싸움의 나날이지만 그에게 관계의 모색이란 가장 먼저 고려되지 않아도 좋을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그에겐 오로지 작품에 대해서만 고집할 수밖에 없는 이유들로 그럴싸하게 챈들러 스타일이 만들어졌다. 이는 자연히 작가로서의 독립적인 개성을 무한히 내뿜는 면모로 비춰지고 이러한 강단이 작품 속에서 잘 녹아들게 되었다.

     

     

 

 

챈들러의 냉철하고 고집스러운 성격은 인생을 외롭게 살게 한 원인이 아니었을까 하는 물음은 정작 다른 이유였음을 알게 된 대목도 중요하다. 말하자면 예술가로의 삶에서 본인이 믿고 추진한 작품에 대한 면면의 기술은 언제나 옳은 것이었고 그것은 다음 세대들의 귀감이 되는데 손색이 없다. 마침내 그만의 역사로 남게 된 것이다.

 

 

다만 작품에 대한 철저한 독립성과는 무관하게 그는 자신의 심장박동과도 같았던 아내의 죽음으로 자해를 하는 등 외로운 삶으로 귀결된 증거들은 어쩐지 쓸쓸해 보인다. 그를 외롭게 했던 삶의 경로들이 작품을 위한 담보로 맞바꾼 게 아니라는 건 다행스럽지만, 내내 발휘되던 냉철하고 독립적인 고집이 왜 자신의 삶에는 발휘되지 못했던 것인지 아쉬움이 남는다.

 

 

 

      

살아가다 보면 한 치 앞의 상황에 대한 판단의 잣대가 매번 신중하게 지휘되지는 않겠지만 상황의 경중을 떠나 기본적으로 발휘되는 기질은 분명히 있어 보인다. 개인이 어떠한 삶을 살아왔고, 어떤 가치관으로 걸어가느냐에 대한 릴레이 경주 같은 실시간적 판단과 유보치들이 누적되기 때문이다. 지금 한 생각이 결론적으로 옳았던지 짧은 생각이었던지 간에 시간이 흐르지 않고도 순간에 알아지는 정도의 판단 같은 것들은, 그래서 거의 적당하게 발휘된다. 이는 삶의 마디마디에 놓인 지혜와 경험치로 살아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차곡이 쌓아지는 생각과 판단들, 그것들이 결국 그 사람을 규정하는 어떤 이미지로 남게 되는 것 같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의 편지글들을 보면서 그야말로 어떤 삶을 꾸리며 살아온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묘미는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전해지곤 했다.

 

 

    

 

그는 어떤 것에도 쉽게 찬사하지 않으며, 냉철한 눈으로 주변의 가장 후미진 곳을 들여다보려는 작가적 시선을 둔다. 시시한 것들의 교묘한 술수에 권위를 내려놓거나 쉽게 수긍하는 태도를 가장 경계했던 삶이었던지 친화적인 것과는 거리가 있었고 원망을 사는 일이 잦았지만 이러한 모습들마저도 꿋꿋한 예술가의 고집으로 보인다.

 

 

대신 그는 대중이라는 가장 위대한 대상들과 타협하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그 바탕의 본연에는 늘 ‘재미’를 두어 소설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늘 해온 성실한 작가였다. 진정 매일 눈을 뜨면 작품에 대해 생각하는 지독한 소설가적인 삶을 살았던, 단지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이면 그만인 그런 독립적인 삶을 꾸려냈다. 둥글둥글한 삶만이 능사가 아니라는 생각을 오늘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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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처 다 하지 못한 - 김광석 에세이
김광석 지음 / 예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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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보급되기 전 문화를 영유하는 통로라면 단연 텔레비전과 책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나마 텔레비전이 마을에 한두 대 있을까말까 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들 세대의 비전이 왕왕 문학도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는 것으로 일치하곤 한다. 추억하는 시절의 자신들을 모두 소설가나 시인이었노라고 문학에 심취했던 건실한 순수함에 견주는 모습들이다. 사보기도 귀해서 단 몇 권의 책만을 돌려 읽은 세대의 언어구사가 지금의 정보 홍수 속을 사는 세대와 비교해도 오히려 더 풍성한 언어를 구사하는 까닭은 많은 생각을 하게 해준다. 어쩌면 그들에게 단지 그것뿐이기에 가능했나 싶게 깊은 애정이 깃들어 보인다.

 

 

 

과거시험을 치르던 조선시대의 관문은 시를 짓는 것, 새삼 우리 민족이 얼마나 정적인 능력을 높이 사왔는지 생각하게 만드는 사실이다. 시적 품위를 자신의 학식에 비유하고 제 시를 공유하며 서로의 능력을 높이 사는 문화는 참으로 고귀했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성찰과 자연의 섭리를 항상 곁에 두어 생각하고, 삶의 진정한 모습을 어려서부터 탐구하고 영유해온 세대의 산물이란 ‘책의 세대’가 풍기는 언어의 몸체에 고스란히 그들만의 멋으로 살아있다.

 

 

 

김광석의 글을 읽으면서 아마 이 세대 정도까지가 고유한 글맛이 정적 유산으로 내려온 게 아닌가 싶었다. 세련돼 보이지는 않지만 결코 고루함이 없고, 고요한 생각이 머무는 점잖은 단어들과 정서들이 느껴지는 글이다.

그의 나이를 미루어 짐작해볼 때 자칫 치기어림이나 어려운 말들이 뒤엉킨 겉멋이나 든 글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았을 텐데, 오히려 일부러 잘 쓰려고 노력한 글이 아니라 그때그때 생각들을 자연스럽게 말처럼 풀어쓴 글이라 자연스러워 보여서 좋았다. 물론 엮은이가 글 정돈을 어느 정도 해주었겠지만 메모 수준의 글이라도 그의 현재 감성과 생각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책이었다. 그가 글 쓰는 사람을 꿈꾸었다는 정보가 없었다 해도 아마 얼마 안 읽어서 그의 숨은 기질을 눈치 챘을 것 같다.

 

 

 

그의 글 대부분은 마음을 토로하는 글쓰기다. 남에게 어떤 메시지를 주려는 것도 아니고 다만 내 주변을 바라보며 주로 낮은 감성들을 내뿜는다. 침착하고 때로는 너무 푹 가라앉아 보이는 우울도 느껴지지만 거의 희망을 바라보는 글들이다. 결국 이러한 단서들을 아무리 염두에 두더라도 그의 죽음이 염려되는 절망의 글은 찾을 수 없었다. 글에 다 담지 못한 어떤 절망들이 더 깊은 곳의 마음 안에서 영영 나오지 못했던가 안타깝다. 그가 더 세상을 살아냈더라면 더 근사한 가사를 읊는 노래하는 시인이었을 것이다. 앞으로 김광석의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의 젖은 생각들이 떠오르는 가사를 더 신경 써서 들어 보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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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 최인호 유고집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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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연필하나 움직여 쓸 힘없는 병마와 대적하면서 과연 이런 결과물을 낼 수 있는 일일까. 이 한 권의 책은 제목 ‘눈물’처럼의 집약적이고 은유적이고 슬픈 아름다움이 내내 함께 하는 언어의 춤이다. 집요하게도 제 존재의 의문을 멈추는 법 없이 만날 회개하고 까닭을 묻는 구도자의 사위처럼 결코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절실함의 고백이다.

 

 

만약 더 이상의 문학적인 생각이 들지 않는대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병상에서, 그를 아는 누구든 작가 최인호란 이름을 쉬이 잊힐 리 없는데 어째서 그는 극심한 고통을 감내하며 써내는 사랑을 베풀었을까. 강한 의지와 영원할 것 같은 사랑의 힘을 좀 더 느끼고 싶어서 책을 넘기는 동안 힘든 마음이었다.

 

 

고단했을 ‘쓰기’의 나날은 눈을 감는 날까지 추진하며 내일 하루를 또 지탱해준 작가의 거의 유일한 삶의 원동력처럼 보인다. 물론 그 안에는 평생 함께해 온 문학의 애정과 더불어 마음 속 함께 하시는 주님이 그의 손을 잡아주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비로소 자신이 물어왔던 숱한 ‘나’의 대답을 주님의 품 안에서 들을 수 있게 된 고요한 마지막 뒷모습, 증거로 보인다.

 

 

 

종교가 없는 나로서도 작가가 귀의한 천주교의 교리나 예수 이야기가 전혀 생소하게 들리는 건 아니지만 이러한 유고집의 형태로 알게 되는 성경은 또 다른 예수를 바라보게 하고 그 말씀을 따르는 존경의 깊이가 얼마까지 인지 신비롭게 바라보게 하는 이해가 생겼다. 무엇보다 작가는 독자를 의식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이제는 사랑하는 친구에게, 그것은 궁극적으로 주님에게 들릴 이야기를 전하는 글쓰기인 것이다. 전도를 하려는 셈도 아니고, 단지 오래된 깊은 지혜나 진리의 면을 알아가는 삶의 과정 그 속의 참을 취하는 겸손함이 있어 좋다. 그것은 읽는 이로 하여금 종교를 떠난 삶의 마지막 풍경을 어떤 의지와 함께 하는 것인지 조심히 펼쳐보게 하는 조심스러움 그것이었다. 이 책은 전혀 짐작이라고는 할 수 없는 고통의 옆면을 겨우 한쪽 눈으로만 보고 벽을 의지하면서, 죽음과 가까운 시간의 경험을 자주 눈을 질끈 감으며 응시하게 만든다.

 

 

 

 

 

사람은 누구나 죽지만 직간접으로 대면하게 되는 시기가 직접 찾아오지 않고서는 죽음과 전혀 무관한 인식만을 하며 살 뿐이다. 더군다나 가까운 누구도 보내본 적 없는 나 같은 사람은 작가의 숨결 하나하나 느껴지는 사이마다 자주 발을 헛딛고 숨을 자주 몰아쉬어야 했다. 육체적으로 고통을 감당하는 상상도 어려운 일이지만, 본능을 뛰어 넘어선 삶에 대한 초연함을 항상성으로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한 살갗 닿는 느낌들은 상상 이상이었다. 한장 한장 넘길 마다 그의 미미해지는 맥박을 두 손가락으로 짚는 일처럼 매우 조심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무엇보다 그의 글이 더욱 격동하고 의지로 빛나는 나날로 이어질 수 있어서 존경스러웠다. 이는 마치 지지 않을 촛불처럼 타오르는 광경처럼 보였다.

 

 

 

 

 

작가는 등단했을 파릇한 십대시절부터 줄곧 ‘청년 최인호’로 불리곤 했는데, 역시 그다운 면모는 한 번도 지지 않았다. 靑 푸름을 언제라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그의 글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님에 대한 영원함처럼 ‘늘’이라는 말과 동의어 같다.

 

 

 

 

좋은 사람들의 여러 마음에 각자 추억하는 그는 한결같이 ‘웃음’이 많던 호방한 사람으로 기억된다. 좋음을 마음껏 표현하며 사는 것이 얼마나 훌륭한 삶의 자세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그의 인생이었다. 책을 덮으면서 최인호 작가의 안식을 다시 한 번 빌어 보았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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