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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
윤대녕 지음 / 현대문학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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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여정을 꿈꾸게 되고 건너편 능선 너머를 바라보게 되는 고요하고도 벅찬 울림의 시간이 내내 함께 하였다. 윤대녕의 신작 <사라진 공간들, 되살아나는 꿈들>을 읽으며 들었던 함의들을 상기해보면 작가가 전하는 바가 어쩌면 생각의 활에 관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늘 자발적 혼자이기를 원했고 은둔의 초라함을 들키는 데에 부끄러움 없었으며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다른 공간에 대한 방랑자 신세를 즐기는 사람이라, 그는 대체 어떤 사람인가. 작가의 이 상반되는 기질의 아이러니가 소설가라는 사람들의 나이테에는 자연스럽게 새겨진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였다. 처음에는 너무 함몰된 외로움에 빠진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였지만 이제 그를 많이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작가가 생각하는 상상의 활은 언제나 때가 되면 유연하게 휘어져 기필코 발끝이 닿는 그 어딘가를 향하게 만들고 그것은 또다른 능선으로 이어지곤 한다. 그리고 책을 읽어가면서 알게 된 것은 그 방랑벽이 내키는대로 마구 행해졌던 것이 아니라 나름으로는 매우 규칙적인 삶으로부터 비롯되는 인과의 결과인 듯이 행해진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뭐 막무가내여도 상관은 없었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는 짐을 꾸려 어디론가 향하는 충동적인 일련의 행위조차 일정한 패턴이 있음을 말해 주었다. 어려서부터 시작된 가출의 기억, 청년 시절 본격적이며 주기적으로 ‘떠남’의 행위가 마음으로 수시로 들락거렸고 일정한 때가 오면 다급한 신호로 자신만의 체계와 질서를 허물고 다시 짓게 되는 수많은 만남들로 이어졌다. 이제 그의 인생에서 여행이란 당연하고도 아주 중요한 주름처럼 집요하게 잡혀져 있다.




이 책은 작가가 고백하는 유년기로부터 시작되는 외로움과 공간에 대한 남다른 인식에 대한 진실의 고백서이다. 덧붙여 나는 이제 더 이상 윤대녕과 같은 ‘문어체와 같은 구어체’를 실제로 구사하는 사람이 별로 남지 않았음을 새삼 아쉬워 하면서 들려오는 이 독백과 대화를 특유의 정취로서 기억하고 싶었다. 그의 소설들이나 에세이를 보면 그의 담백한 어조와 느린 여유로움의 정서가 느껴지곤 한다. 허구의 풍경과 실제 그의 삶이 들려주는 추억 저편에서의 말들은 그가 배운 이전 세대들의 유교적 예의와 성찰이 그의 말 끝 손 끝에 매달려서 그 맥이 다하였음도 알게 된다. 이와 더불어 그의 소설이나 에세이에서 공간을 기억하고 묘사하는 데에는 과연 능가할 작가가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섬세한 구축이 아주 그럴 듯 하게 비춰진다. 그래서일까, 읽는 내내 다음 공간을 기대하게 하고 그래서 책을 손에서 내려놓지 못하게 하는 문학의 진수가 펼쳐지는 것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




가끔씩 등장하는 묘령의 여인들과의 인연이 시작되고 끝난 곳, 할머니와 어머니의 자궁을 연상케하는 부엌의 품, 눈과 마음을 씻던 수많은 공간과 특별한 추억들이 도사리는 곳, 그에게 이러한 공간들은 얼마든지 있어 보인다. 세상 어느 곳에라도 그의 마음이 머물면 특별해지는 마법이라도 전수되는 일처럼 보이기도 하고, 죽는 날까지 이어질 인연들을 생각하면 무척 부러워진다.



언제라도 길의 잠을 깨워 그곳의 소리를 전해 듣고 자신이 꼭 가야할 곳을 찾아 몸을 눕히고 또다시 은둔의 시간을 맞이하는 모습은 또 어떤가. 비록 주변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려 소통 하는 데에는 서툴지 몰라도 어려서부터 내내 익숙한 자연과의 소통에는 능통한 것 같다. 작가의 ‘떠남’에는 어떤 특정한 환경에 매료되었다거나 특별한 애착으로 공간을 기억하여 수반되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는 다만 어디론가 떠나있다는 행위 자체만으로도 그 공간의 별날 것 없는 것들도 으례 승화되기 마련이다. 수반되는 공간에 대한 애착 정도로만 그의 ‘떠남’에 대한 근원을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더구나 이 공간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즉 그것은 대게 그의 외롭고 한적한 정서와도 맞물려 전해진다. 그래서 늘 그가 머문 공간은 서늘한 그늘로 탈바꿈되고 만다. 아홉 살 때 떠나온 고향집의 부엌이나 우물의 상징, 견디기 힘든 단칸방에서의 생활, 그의 유년시절을 꽉 채운 결핍과 외로움의 결정체로 기억되는 정서의 바탕에는 가족사가 있었고 공간과 개인의 역사가 맞물린 인과가 틀림없이 일고 있다. 그곳을 추억하며 어떠한 서늘한 이미지로 각인될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추억을 더듬다 보면 연관이 있다. 작가는 아직도 때가되면 어디론가 집필의 목적으로 일정기간 머물 곳을 찾아 떠나며 그곳에서의 이질적 체험과 상상력을 바탕으로 더욱 그의 소설이 윤택해졌음은 말할 것도 없는 것이다. 





그가 달렸던 수많은 국도와 길들이 이어지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발길 닿은 어느 곳에서의 특별한 만남들에 깃이 세워지고 그것들을 따라가다 보니 절로 운율과 리듬이 생긴다. 그의 인생은 어쩌면 좋아하는 교향곡의 악보를 닮았는지도 모르겠다. 사라진 그곳들을 상기하면서 다시 복원하는 글쓰기를 하는 것은 그의 귓가를 맴도는 노래에 대한 당연한 기술인 것이고 계속 이어질 웅장하고도 슬픈 어떤 선율을 만들어 내는 중이다. 작가의 길을 따라 그가 잃어버린 수많은 공간에 대한 아주 깊고 슬픈 애도를 전하고 싶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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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알고 싶은 유럽 TOP10 -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두 번째 이야기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2
정여울 지음 / 홍익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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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만으로는 매력적인 책일거라고는 생각들지 않은 어딘가 석연찮은 만남이었다. 더구나 그게 정여울 작가라는 데에 의아한 아쉬움같은 마음이 들었다. 여행을 통해 얻은 크게 아우를 만한 은유라거나 아무튼 좀 더 근사한 제목으로 다가왔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으로 이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러나 작가가 주는 믿음 같은 것이 워낙 강했던 탓인지 이왕 ‘top10’과 같은 말이 붙고 말았다면 평범한 여행서 가운데 가장 선두에 서서 기억되면 좋으리란 생각도 드는 것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든 생각은 만약 내가 유럽 여행을 가게 된다면 정말 이 단 한권의 책만으로도 되지 않겠나싶었기 때문이다.

더 말해 뭣하지만 요즘 여행관련 책이라는 것에 대한 정도의 편견과 오해들이 쌓일 대로 쌓인 탓이다. 일단 표지만 그럴싸하지 표제부터 거기서 거기인데다 추천하는 여행지나 코스의 내용면에서도 부실하기 짝이 없고 출처 불분명한 대충의 묶음일 따름인 것이다. 그만큼 여행을 좋아하는 독자들이 많아졌고 어떻게든 팔아볼 요량으로 서둘러 엮어낸 책들일텐데(물론 이러한 오해를 받는게 억울할 책들도 많긴 하다) 기껏 선정하고 읽는 사람 입장에서도 난처하긴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진정 여행을 사랑하고 남들과는 다른 눈으로 같은 세상을 다르게 볼 줄 아는 여행기를 보게 된다는 것은 특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겠다. 작가는 여행의 기쁨만을 위한 들뜬 감정에 휩싸이기 보다는 여행의 윤리를 언급할 만큼 진지하다. 자신과 세상과의 만남을 여행으로서 탐구하고자 함이고 그 열정의 바탕에는 특정한 장소마다의 아름다움에 대한 뿌리를 찾고 이해하는 일이 숨어져 있다. 이 부지런함이 바로 열정의 주체였던 것이다. 이러한 애착의 마음에서 매년 여행을 계획하게 하는 용기가 얻어지고 그만큼 자신에게 쌓인 여행이라는 진면모를 알아가는 과정의 결실을 맺어간 듯하다.




이 책은 철저하게 자신만을 위한 여정이 책을 읽는 사람들을 위한 섬세하고 친절한 안내서로서 어떻게 전이되는지 즐거운 비명을 지르게 되는 마법을 선사한다. 예를 들면 여행자라면 흔히 겪을 과오에 대한 것들도 그녀를 통해서라면 그러한 실수쯤은 그냥 넘어가게 될 수도 있게 해준다. 좀 더 많은 곳을 보기 위해 시간을 절약하고자 했던 루트가 알고 보면 아주 작은 골목의 여유로운 삶의 자리를 잃게 만드는 행동이었다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초라하지만 간과해서는 안 될 여행지에서의 더 깊은 모습들을 경험을 통해 적립되는 여행의 방법으로 익혀지는 것이다. 기필코 혼자 이곳을 다녀오리라는 다짐이 들게 되는 곳이 최소 다섯 손가락을 넘어섰으니 당장에 큰일이다 싶으면서도 반가운 마음이 든다.

책의 제목에서와 같이 나만 알고 싶은 곳에 대한 그래서 반드시 다시 찾고 싶고 또는 다시 오게 돼서야 참 얼굴을 알게 된 곳들이 정말 많다. 그곳들은 마치 비밀의 정원과도 같은 이야기가 담겼다.





작가도 중요하게 언급하는 바이지만 여행이란 결국 나 자신에게 닥친 태도의 변화에 대한 생경함을 사랑하게 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단순히 장소를 바라보는 여행이 아니라 오히려 그곳으로부터 나를 바라보게 된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여행을 할 때면 평소보다 다정해지고 얼마간의 일탈, 느긋해지는 여유를 갖게 된다라는 것은 여행의 낯섦과 익숙함의 양면이 주는 여운이다. 이럴 때에 우리는 몸의 반응이 일어나고 평소의 나와는 다른 태도가 자연스럽게 이끌어지게 된다. 진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인지 아니면 얼마간의 가면을 쓰게 된 나를 사랑하게 되는지 아직은 아리송 하지만 어쨌든 작가의 경우라면 무조건 전자일 것 같은 확신이 든다. 




<나만 알고 싶은 유럽TOP10>은 철저하게 탐구하고 그 뿌리까지 더듬은 섬세한 작가의 정보력과 그만이 알고 느낀 감성의 축이 아주 자연스럽고 유연하게 똘똘 뭉쳐진 참으로 알찬 구성의 책이다. 총 열 가지 테마로 펼쳐지는 온 세계의 다채로움 속에 온 감각이 일깨워지고 여느 책에서 볼 수 없던 장소 특유의 정취가 남다르다. 역사와, 작가만의 시각과 에피소드로 채워진 진짜 ‘그 곳’이 있다는 느낌이다. 



여행이 일상일 수 있을 시간을 넘어서면 그런 사람만이 알게 되는 풍경과 진면모들이 생기게 되는 것도 여행자의 특권이다. 작가는 한 곳에서 오랜 기간 체류한 적도 많고 주지하듯이 오래 느긋하게 바라보고 즐기는 사람이 될 수 있었기에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이러한 점들이 다른 사람과 분명히 구별되는 것을 정확히 진단하여 알려주는 지점들이며 정여울 작가의 특기이다. 또한 적확한 감정을 이끌어 내는데 인용구의 활용 역시 여운을 증폭해주는 배려란 생각이 들었다.




제 감정이 흔들리고 그 원인을 알 수 없어 힘이 들 때 나만의 여행을 떠나고 싶다면, 주저 없이 이 책을 꺼내 들 것이다. 그리고 당장이라도 떠날 용기를 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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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팻 캐바나 지음, 최세희 옮김 / 다산책방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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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때가 되면 이별도 찾아오게 마련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우리 모두는 그것이 당장 오늘이나 내일에 있을 일은 아니라는 듯 살아간다. 외면해야 사는 태도는 그렇게 살아가는 수밖에 다른 도리를 찾지 못해서일수도 있단 생각을 들게 한다.

줄리언 반스의 <사랑은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를 꼬박 읽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여기에 실린 죽음과 그것을 맞이한 살아 남은 사람에 대한 감정을 온전히 다 느꼈다고는 말할 수가 없는 이유가 바로 이 외면이라는 감정에 휘둘리기 때문인 것 같다




사랑하는 존재의 죽음에 대한 충격과 슬픈 감정의 수치를 연구한 기사를 본 일이 떠오른다. 거기에는 기르던 애완, 부모, 형제, 자식의 죽음에 이은 가장 큰 수치로 배우자의 죽음을 꼽고 있다. 이는 역시 자기와 일생을 가장 많이 공유한 사람에 대한 부재의 고통이 얼마나 크고 아픈 것인가에 대한 생각을 들게 한다.



줄리언 반스 역시 문학적 동지이면서 열렬히 사랑해마지 않던 아내의 죽음을 갑작스레 맞이한 비극을 겪었고 그래서 참으로 오랜 시간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했던 감정의 맥이 느껴진다. 본인의 고백에 따르면 심장과도 같았던 아내의 죽음이었기에, 이별이라는 거대한 슬픔의 늪을 경험하는 것은 역시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깊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을만큼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나는 다만 잘 알지 못하는 경험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경험한 남겨진 사람들이 어떤 슬픔에 당면하고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애도하는 법을 만들어 나가는 지 눈여겨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기대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로 의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다시, 그가 소설가라는 점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작가가 하는 애도의 방식이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비행자의 집요한 추적의 보고다. 비행이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 놓게 되는 것도 의아한데, 기구를 탔던 실존인물이 최초의 기록을 세우는 역사적 정황이 설명되다가 이내 2장에서는 역시 실제 인물 둘을 놓고 사랑과 이별이라는 픽션을 상상하게 한다

의아하지만 어쩌면 작가 자신이 가장 이상적으로 상상하는 이야기의 시작과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한다. 분명 그의 아내가 이 책의 컨셉을 듣는다면 미소를 지어줬을 멋진 시작과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학이라 함은 인간의 삶과 죽음 이별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그리고 특히 문학적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가장 최적화된 요람과 같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그의 아내를 위한 문학적 애도의 가장 깊은 층위를 걷는 이야기들이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에 대한 절절한 감정이 들끓는 방식은 아니다. 공중비행을 하는 행위처럼 삶은 중력과 무관한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싶어지는 일이지만 때가 되면 다시 지상으로 내려와야 하는 숙명을 역시 받아 들이는 일이기도 하다. 그렇게 삶은 어김없이 맞이해야 할 아쉬움과 아픔, 이별을 반복적으로 견뎌내는 일인 것이다. 하늘을 나는 순간은 정말이지 짧았고 지상 즉 현실에서의 사랑과 이별 역시 돌아보면 지리멸렬한 듯하지만 순식간 이다. 특히 2장에 나오는 인물들이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지에 대한 역사적 이야기와 허구의 짜임은 흥미롭지만 나열에 가깝다는 인상을 준다. 두 인물로 함축되는 인간의 사랑과 긴 이별의 뒤안길에서 너도나도 이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진열품과같은 인간의 똑같은 허무를 느끼게 만든다

이러한 수순으로 3장에 오면 줄리언 반스의 가장 침잠해 있는 죽음이라는 개인 체험들이 깊은 지하세계에서도 마구 튀어 오르며 그 여러 층위들을 마치 비행하듯 표현하고 있다. 엄중하지만 마치 모든 슬픔을 경험한 신의 위치에서 지하세계의 여러 계단들을 탐험하고 조용히 문을 닫아 버리는 사제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실이라는 극심한 상태에 이르렀어도 어김없이 시간이 흐르고, 때가 되면 그것들이 불가해한 것이라 믿게 되는 진정효과도 생긴다. 심하게 뚫렸을 삶의 구멍이 곧 메워지리라 믿으면 곧 그런 일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작가의 고백을 따라 아주 솔직한 감정 선을 따라가다 보니 이러한 자연스러운 감정선이라는 것도 과연 그런가라는 의문만 낳는다. 결과론적으로 그 과정의 섬세함은 제대로 느껴본 일이 없는 사람들의 얕은 위로였나 싶어지는 것이다

작가에게 사람들이 하는 수많은 조언과 충고들,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대리인으로 부재가 어느 정도 메워진다거나 하는 따위의 이야기들이 과연 당사자에게 어떤 즉효로서 처방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배려가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거의 에 가까운 말이라는 것을 목도했다. 사람들이 불편해 하는 눈치가 보이자 일부러 고인의 이름을 반복적으로 거론한 일화라던가 하는 일은 그를 더욱 외롭게 만든 사람들의 얕은 배려로 보이는 것이다.



반스는 아주 천천히 그 자신의 솔직한 감정에 충실하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사람들에게서 오히려 그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보여졌을 지언정 그 나름의 방식을 찾던 중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그 틈이 시간이 흘러 자연히 메워진대도 그만큼 또 다른 타인에 대한 실망이나 공허의 틈으로 벌어지고 말 사단을 예단했을지도 모르겠다. 앞으로의 삶이 영속되고 죽은 아내로부터 이미 잃어진 공간에 대해서는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걸 그의 체험으로서 말하고 있다.




애도의 행위는 온전히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만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슬픔에 빠졌어도 우리는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와 윤리적 환멸이라는 양극단에서 속수무책으로 자신의 무능력을 자책하면서 괴로운 나날만 더 길어지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래서 그의 우울과 슬픔의 감정에 이미 각인되고 내재화된 애도를 통해서 사람들이 정상이라고 말하는 애도의 차원 밖에 대기한 낯선 애도를 보게 한다. 작가가 체험한 죽음에 대한 인식은 보다 깊은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게 해서 체험에 동질감을 느낀 사람을 진정으로 이끌어 올려 주고, 애도의 여러 층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만의 사랑을 헌정한 셈이다.



아내가 죽고 난 이후 이 책이 나오기까지 그의 긴 침묵은 결코 타인들이 말하던 대로의 옳고 그르고의 애도에 관한 보편성을 긍정 혹은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그녀와 함께하는 일상은 어떤 를 만들어 가는 과정이었고 그 사랑이 어떻게 또 이어졌는지, 지극히 자연스러운 애도의 한 방식을 이 책으로 고스란히 전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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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술 라디오 - 오래 걸을 때 나누고 싶은 이야기
정혜윤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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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의 <마술 라디오>를 읽고 나니 과연 귓가가 촉촉해진 것 같다. 종종 작가의 말을 들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면, 언제나 준비된 사람 같다는 인상이었다. 물으면 곧바로 그 말에 대한 답변은 물론 얽힌 일화들이 줄줄이 이어지고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일화들도 엮어서 언제나 근사한 이야기를 펼쳐 보이곤 했다. 어떻게 저런 섬세한 일들까지 다 기억나는 것일까, 그녀의 입과 뇌는 마치 라디오와 전파처럼 대등한 관계의 선으로 강하게 남았다. 남이 자신에게 준 시간에 대한 최선을 다하는 사람, 그 열의와 열정이 점점 견고해져서 너무나도 근사해 보이곤 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라디오 프로그램의 PD로서 유명하기도 한 그녀이지만 에세이스트라거나 강연자 혹은 소외되고 자신이 발언할 자리가 생기면 목소리를 내는 아주 활동 반경이 넓은 사람으로도 그녀를 기억한다. 나는 근 십년이 조금 못되는 기간 동안 부지런히 책을 낸 작가로서 그녀를 알고 기대해왔다.

특히 이번 <마술 라디오>를 읽으면서 작가가 가장 많이 해온 일, 또 독자들이 그녀에게 가장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전하는 것 같아 무척 반가웠다. 작가의 가슴 속 아주 볕 잘 드는 곳에 모아둔 일들에 대한 라디오 전파 대신 종이버전의 작업물인 것이다. 

또한 이 책은 이야기를 구전하듯 구어체의 문장으로 우화나 제3세계의 이야기인 것처럼 들리는 것도 대단한 특색이다. '이 이야기는 바로 너에게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야' 라는 듯, 밀어처럼 들리기도 하고 쉽게 풀릴 것 같지 않은 암호처럼 묘하게 들리기도 한다. 또 격의 없는 말투에서 허물어지던 경계가 어떨 때는 화자에게서가 아닌 바로 당사자에게서 직접 듣는 시공간의 만남이 함께 하기도 한다. 과연 작가가 내내 그립지 않고서는 다른 도리가 없을 그런 사람들이 정말 거기에 있었다.




소위 한국은 역동적인 사람들의 나라라고들 하지만 그만큼 한이 많은 나라라고도 한다. 이러한 이중적 태도는 그 이면과 본연의 삶의 그림자를 응시하게 하는 독특함이 있다. 삶의 단조로움을 못견뎌하듯 역동성을 가졌지만 그러한 태도의 이면에 슬픔과 한이라는 외부적 영향의 그림자를 낳게 된 것이다. 이 책의 거의 모든 면들에는 이러한 한국적인 슬픔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느 날 이런 일이 벌어졌다. 어때 정말 재밌지 않니?’ 와 같은 단순한 우화라고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지혜, 놀라운 우연, 애꿎은 일과 그것을 극복해나가는 투지 등 수많은 방편들이 도처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끝없이 펼쳐질 것 같은 이야기들을 들으면서 개인들의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언젠가 친가 외가 양쪽 할머니들께 들었던 이야기들이 불현 듯 생각나기도 했다. 어릴 때 자란 고향의 풍경, 전쟁 체험에 얽힌 비극, 본인들이 들은 더 이전 시간들에 관한 이야기, 함께 보낸 이웃들의 기막힌 이야기 등, 들으면서 정말이지 내 귀로 금방 날아갈 개인의 역사가 아까워 울었다. 곧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완전히 압도 당했었달까. 역사의 한자락을 목도하고 경험한 사람들의 생날의 이야기 때문 이어서기도 했지만 모두가 귀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면, 삶의 일부분 세상 그 어딘가에 남겨지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한 황망함이 앞선다. 그야말로 인생역경을 지나 파란만장한 인생의 굴곡을 다 이야기 할 수는 없을지라도 인간으로 살아간 역사의 증거는 최소한만큼이라도 허용되지 않는 걸까? 우리는 고작 참으로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적인 인생이라는 덧없는 말로 그 격정을 표현할 도리밖에 없다




여기 나오는 거의 모든 이야기는 격렬한 삶의 뛰어듦과 내제된 고독들이 배여 있다. 당연하게도 일상은 반복적이며 끊임없이 우리의 기대를 배반하면서 지속되는 일이다.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제기되는 삶의 의미와 공허에 대한 자각을 들게 만든다. 그래서 바라건대 모두의 삶에 잔잔한 평온함이 깃들기를 바라고 또 염원하게 된다. 삶은 자꾸만 평형을 움직이게 해서 스스로의 삶에 지고 말 일상의 훼방을 놓는일 투성이지만 그 중심점을 결국은 스스로 찾게 되는 일련의 반복의 순환이다. 용케도 여기 나오는 사람들의 심지에는 저절로 터득한 알 수 없는 힘이 있다는 것, 평범하지만 위대한 사람들의 용기가 있다.



보잘 것 없이 돈도 없고 재능이나 지식이 부족한 모든 미완의 삶을 사랑하고, 애도하며, 그들의 그 작은 역사를 응원하고 또 배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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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 - 길 위에서 배운 말
변종모 지음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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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치했던 기억에 아무리 자학을 해보더라도 시원찮은 마음이 들 때는 머리가 과연 제대로 작동하는 사람인가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당연히 매순간 생각을 하며 살아간다지만 당장 꾸려낼 일상이나 일에 대한 생각이외에 지속적으로 세상이라거나 나 자신에 대한 질문을 품으며 살아가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종종 이런 돌발 상황을 만들어내는 장본인이 내가 될 수 있기도 하다는 게 마냥 자뻑하며 살 수 없는 주요인이다. 세상과 자신에 대한 성찰이나 진단 없이 현실의 나이만 먹다보면 이러한 실수는 얼마든지 튀어 나온다. 타인에 대한 배려보다 이기심이 발휘되기 십상이며 약자에 대해 관대함을 베풀기보다 은근히 밟고 올라가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속물이 될 가능성도 있다. 비약인지는 몰라도 세상에 물들고 어른이 되어간다는 말의 일정치에는 이러한 부정적인 조소가 없지 않다. 얼마가 되었든 나를 돌아보지 않고 세상에 대한 관심을 멀리해 나가면, 부조리나 불합리에 무뎌짐과 관망, 노예근성만 남게 된다.

 

물론 ‘지속적’이란 말을 떼내면 누구에게나 왜 진지한 성찰의 시기가 없었겠느냐는 항변을 들을 여지가 충분하다. 특정한 어느 시기를 돌아보면 그 한정된 시간 안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진지함과 진정성을 발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소중한 경험들을 느껴보면 마치 광활한 우주라도 만난 듯 감격스러운 데가 있다. 후일 자신이 얼마나 진지한 사람이었는가를 떠올릴 때 자주 등장하는 레퍼토리의 전설로 남겨질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순간이 내일도 다음 주에도 계속 이어질리는 없는 것이다. 물론 이런 시간을 갖지 않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반드시 무지하고 단순해지라라는 인과관계를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일상에 파묻혀 살다보면 고유의 시간들이 점점 귀찮아지고, 때로 진지함을 우습게 여기게 될 수도 있으며 더러는 밀려나가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문제들이 수순처럼 등장한다는 점이다. 세상에 대한 염치를 알고 나를 곧추세우며 추진하는 동력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나를 끊임없이 돌아볼 줄 아는 최소한의 시간을 가질 때 나온다.

 

 

 

좋아하는 사람들로부터 지적인 또는 감성적인 자극을 받고 싶어 하는 이유를 사람들은 책이나 명사의 말로서 그 의미를 되짚곤 한다. 나는 주로 책이나 영화를 보게 되는 편이지만, 특히 자주 그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의 작품에 많은 눈길이 가는 편이다. 그중에서 변종모작가의 작품들이 주로 그런 사람에 속한다.

 

 

 

이번 신간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에서는 길 위, 내 안, 두고 온 말이라는 세 가지 테마를 특정한 단어와 엮어서 깊은 사유를 경험하게 해준다. 여행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낯선 환경에 놓여 이질적인 기운을 느끼게 되는 일일이 떠오른다. 보고 듣는 것에 대한 체화를 몸소 내안의 에너지로 써먹을 수 있는 나만의 시간이 선사되는 일이다. 다시 말해 낯선 공간이 주는 긍정의 스트레스가 마법처럼 변환되는 일과 같달까. 변종모 작가는 이러한 공간과 시간의 마법을 사랑해서 자꾸 떠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그러나 그에게는 떠난다는 말의 의미가 모호해서 우리와는 좀 다를 것이 분명하다. 그는 여행가이고 그러니 그에게 여행이 곧 일상이고 삶이기 때문이다. 그에게 여행은 익숙함과 낯선 의미들이 혼재되어 더 이상 다른 이원의 세계인냥 분리될 수 없을 것 같다.

 

 

여행자는 여행지에서 처음에는 우리와 다른 세계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다가, 거듭되고 오래될수록 대게 비슷하고 같은 점을 보게 된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오랜 시간 여행을 경험한 작가에게 눈앞의 세상은 어떤 감정을 선사할까. 모르긴 몰라도 분명한 것은 어딜 가든 작가에게 이런 같고 다름의 세계만이 펼쳐지진 않는다는 것이다. 항상 떠남을 주저하지 않고 그곳에서 보고 듣는 모든 것들이 그저 ‘차이’로 존재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이제 좀 내밀하고도 자신만이 들여다보고 드나들 길이 열린 것이다.

 

 

언제나 작가의 글을 보면 그곳의 정취나 향기가 참 고유한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끔 해준다. 일상이 곧 여행지이고 얼마든지 자신만의 시선으로 만상을 들여다본다면 참 근사한 인생이라는 부러움이 인다. 그는 여행의 아름다운면만 부각하거나 낭만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종종 고단하기도 하겠지만 그마저도 인생의 쓴맛과 달콤한 양면을 말해주는 듯해 솔직해 보인다.

 

 

다른 세상을 탐험하고 동시에 나를 들여다보며 남기고 온 혹은 버린 수많은 언어들이 그의 글에서 빛난다. 그것은 부지런히 생각하고 깊이 탐험하는 자에게서 풍겨 나오는 특유의 향기이고 그래서 떠나지 못하는 자에게 여행을 종용한다. <나는 걸었고 세상은 말했다>에는 세상과 나에 대한 낱낱의 이해의 일, 그리고 책을 읽고 그 낯선 체험을 기꺼이 해보겠다고 마음먹은 독자에게 심장을 뛰게 할 작가의 세심한 한걸음이 있다. 그곳이 특정한 여행지여도 좋고 여의치 않은 사람에겐 내 안의 어느 쉼터에서도 상관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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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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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6-24 19:0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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