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수수와 나 - 2012년 제36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김영하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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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면 김영하만큼 두터운 팬층을 거느린 작가도 드물지 않나 싶다. 등단 초기부터 작품들이 죄다 주목을 받으며, 나오는 작품마다 이슈를 불러일으켰으니. 주위에 글 좀 쓴다는 사람들이나, 책 좀 읽는다는 사람들에게 좋아하는 작가를 물어보면 열이면 열, 리스트 안에 박민규나 김영하는 꼭 들어가 있더라. 그가 보여준 소설적 파격성이나 기존 문학판의 관습을 뛰어넘은 소설적 재미는 문학 연구자와 대중의 바운더리를 넘어선 경지에 놓여 있다. 9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항상 손꼽히는 그가, 문학계의 트랜드와 굉장히 밀접한 연관이 있는 이상문학상을 여지껏 수상하지 못했다는 건 조금 놀라운 일이기도 하다.


작품집에 수록된 작품을 읽으며, 이번에도 논란이 불거지겠다는 예상을 했다. 어쩌면 김영하는 그가 미친 현대문학에의 영향에 비하면 어쩌면, 조금 평가절하되고 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도 해본다. 김영하의 이상문학상 수상을 공지영의 수상과 같은 파격으로 인지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 것을 보면 그렇다. 그것은 아마 이상문학상이 취하고 있는 ‘권위’의 문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김영하의 소설은 여지껏 읽은 어떤 이상문학상 수상 소설보다도 가볍다. 재미로 치자면 김영하에 밀릴 것도 없는 2010년도 수상작인 박민규의 ‘아침의 문’이 무겁고 현학적인 소설로 느껴질 정도다. 묘사는 극도로 지양되며, 대부분의 문장들은 대사처리 되어 있다. 1인칭 시점을 사용하여 그나마의 서술문에서도 문어체 문장을 찾아보기 힘들게 만들어 버렸다. 다른 단편들의 2배 가까운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굉장히 빠르게 읽힌다. 그리고 재미있게 읽힌다. 독자들의 당혹감은 소설이 끝난 뒤, 몰아친 정서적 쾌감 뒤의 허무함 속에서 나타나는 것일 게다. 너무나도 재미있는 이 소설과, 권위의 이상문학상이 합집합을 이루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소설적 권위란 무엇인가, 훌륭한 소설이란 무엇인가. 김영하의 소설을 받아들이기 위해선 그 부분부터 먼저 숙고해 봐야 할 것이다. 문학성을 문장에서 찾던 시절이 있었다. 이태준을 위시하여 수많은 문장론이 쏟아져 나왔다. 사진을 모사하듯 치밀하게 묘사한 문장들이 각광받던 시절도 있었다. 꿈과 현실을 아우르는 현학적인 소설들이 문학적으로 뛰어나다는 평을 받던 때도 있었다. 영상 시대에 들어서 영상으론 표현되지 못할 소설만의 영역을 구축하려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위 중 어떤 것도 훌륭한 소설의 정답이 될 순 없다. 소설은 말하기의 한 방법일 뿐이며, 그 방식은 다양하게 존재한다. 결국 소설쓰기란 포장의 방식일 뿐이며, 그 포장법은 트렌드에 따라 조금씩 변화한다.


김영하의 소설에서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그 트렌드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당당하게 표현하는가 하는 부분이다. 우리나라 문학판에서 먹히는 소설들이란 김영하의 소설들과는 거리가 있다. 이를테면 김연수의 시적 감수성, 권여선의 문장, 전경린의 추억, 김애란의 젊음, 편혜영의 기괴함이나 김숨의 환상성과 같은 것들. 문학이란 모름지기 진지해야 하며, 대중과는 다소 유리된 영역에 속해야만 하는 것이다. 심지어는 콤마의 갯수까지 틀에 박으려 드는 문학판의 경직 속에서 김영하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혀 눈치보지 않고 늘어놓는다.


시대는 변하고 있다. 독자들은 점점 긴 글을 읽기 힘들어 하며 복잡한 문장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한다. 문어체 문장보다는 구어체 문장을, 치밀한 묘사보다는 몰아치는 서사를 원한다. 라틴아메리카를 주축으로 미니픽션이 붐을 이루는 것도 그러한 흐름의 한 반향이다. 진지하고 형이상학적으로 스스로에게 침잠해 들어가는 복잡한 소설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다. 김영하는 그런 시대적 흐름을 정확하게 캐치해 내고, 거기에 자신만의 주제의식을 굳건히 박아 넣었다. 옥수수와 닭으로 상징되는 현대 사회의 역할구도를 이토록 재치있고 흥미진진하고, 다소 야하게 써낼 수 있는 작가가, 과연 얼마나 있단 말인가.


이상문학상 40주년 기념으로 새로 바뀐 표지는 마치 시대적 변화를 몸소 증명하는 듯하다. 밝은 색 표지와 둥글둥글하고 알록달록한 글꼴들은 문학이 더 이상 과거처럼 경직되어 있어선 안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인다. 새로 바뀐 이상문학상 작품집의 첫 작품집에 김영하가 수상자로 꼽힌 것은 그러므로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새로 바뀐 표지가 이상문학상 40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 아닌, 김영하의 수상을 기리는 것 처럼 느껴지는 것도 그런 탓일 것이다. 김영하와 관련된 부분이 - 자선대표작, 수상소감, 문학적자서전, 작가론, 작품론을 포함해서 - 전체 분량의 1/3이상을 차지한다는 것도 그렇다. 그래서 이번 작품집은 이전 작품집들에 비해 우수상수상작들의 비중이 많이 적게 느껴지지 않았나 싶다.


우수상 수상작 중에 눈길을 끌었던 단편은 김경욱의 스프레이와 김숨의 국수가 있다. 정말 극과 극의 작품이지만 두 작품 모두 너무나도 훌륭했다. 김경욱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서사의 이어가기가 놀라울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이렇게 상상해 낼 수 있는 작가의 능력이 감탄스럽다. 김숨은 문학적 글쓰기의 교과서적인 방법론을 보여줬다. 그저 국수를 뽑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생애를 함축해낼 수 있는 작가의 감수성과 비유능력이 탁월했던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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낚시하는 소녀 - 2012년 제57회 현대문학상 수상소설집
전성태 외 지음 / 현대문학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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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현대문학상은 전성태의 ‘낚시하는 소녀’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 소설은 월간지 『현대문학』 8월호에 실렸던 단편이다. 우연찮게도 나는 잡지를 통해 이 소설을 먼저 접하게 되었는데, 그때의 이미지가 여전히 선명하다. 서정적이면서도 화사하며 동화같은. 작가는 한 모녀의 이야기를 아름다운 필치로 그려냈다. 소설의 첫 단락만 읽어도 이 소설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다.


여자아이가 침대를 딛고 이 층 창밖으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푸른 오동나무가 창을 가득 메웠다. 붉은 플라스틱 컵이 창턱에 놓여 있다. 비 끝에 난 햇살이 낚싯대에 날 서게 앉아 휘었다. p.11


세심하고 감각적인 문장이다. 하지만 이런 유려한 문장으로 가득한 소설이 담고 있는 내용은 결코 아름답지만은 않다. 작가가 설치한 카메라는 아직 때묻지 않은 순수한 소녀를 향한다. 아이의 시선은 매사 건강하고 따뜻하다. 그 시야에 비친 세상은 오동나무 숲으로 이어진 낚싯대를 타는 햇살처럼 따스하다. 하지만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재우고 자신의 몸을 팔기 위해 집을 나선다. 아이가 머무는 집 바로 앞엔 ‘샹그릴라’라는 모텔이 서 있다. ‘샹그릴라’에선 아이의 엄마가 몸을 팔며, 모텔의 주인 딸 또한 돈을 벌기 위해 제 몸을 남자들에게 허락한다. 그러한 세상의 진실 바로 앞에서, 아이는 무지하다. 무지한 아이가 그녀의 ‘낚시질’을 통해 진실을 깨우쳐가는 과정은 은은하게 사무친다.


작품집에서 인상적이었던 소설이라면 김성중의 ‘머리에 꽃을’, 박민규의 ‘로드킬’ 정도가 있다. 김성중은 뻔뻔한 상상력을 천연덕스럽게 전개시킨다. 사람들의 머리칼이 모두 빠지고 그 자리에 저마다 다른 꽃이 피었다는 설정은 조금 비약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작가는 거기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끄집어낸다. 박민규의 ‘로드킬’ 또한 SF라는 장르적 특성을 빌려, 거기에서 문학적 성과를 일궈낸 작품이다. 로봇이 육체노동자의 모든 자리를 빼앗아버린 시대에, 인간들이 상실한 인간성을 통찰하는 로봇의 모습은 아이러니하면서도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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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레빌라 연애소동]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구레빌라 연애소동
미우라 시온 지음, 김주영 옮김 / 은행나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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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소재로 하는 소설들은 자연스럽게 연애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고 그러다보면 크게 다르지 않은 이야기 전개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 소재가 ‘섹스’라면 어떨까?
우리나라에서는 무겁게 다루기도, 가볍게 다루기도 어려운 ‘섹스’라는 소재는 더러 연애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혹은 불륜의 일부에서 표현되어왔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성을 주제로 하는 소설들은 존재했다. 영화 ‘거짓말’의 원작인 장정일의 「내게 거짓말을 해봐」와 성을 주제로 한 여러 편의 소설, 그리고 ‘「마광수의 뇌구조」를 통해 자신의 성에 대한 관점을 파격적으로 드러낸 작가 마광수까지 다양한 성에 대한 파헤침이 있었다. 하지만 섹스에 대한 예술적인 영역에서의 파헤침은 평범한 삶에 흡수되기에는 다소 벅차게만 다루어졌다. 
과연 섹스라는 소재가 무겁고 조심스럽게만 다뤄질 수밖에 없는 그런 것일까? 

「고구레 연애소동」은 섹스를 주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 불쾌하게 파헤치거나 퇴폐적이지 않다. 또한 연애의 과정에서 섹스를 표현하기 위해 구구절절 사랑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는다.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특별하지 않은 나날 속에 이루어지는 다양한 섹스에 대한 관점들을 고구레빌라에 사는 사람들을 통해 이야기할 뿐이다. 갈색 벽, 살짝 뒤틀린 창문틀. 제멋대로 자란 마당의 풀과 나무. 지금은 잎이 앙상한 나무들이 많은, 그리고 귀여운 강아지 존이 있는 고구레빌라에는 평범하지만 성적인 부분에 있어 사소한 사정을 가진 사람들이 산다. ‘고구레빌라 연애소동’은 다양하지만 결코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의 섹스 단막극인 셈이다.

 사랑하던 여자를 다시 찾아 온 옛 남자와 현재 그녀 곁에 있는 또 다른 남자. 그들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하는 여자. 이들의 삼각관계는 다소 특이하다. 누가 더 사랑하느냐를 두고 다투지도 의심이나 질투도 난무하지 않는다. 이 셋의 관계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평범하다. 특별함은 묻어나지 않지만 서로 다른 사랑관을 가진 세 사람이 이상하게도 조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은 텔레비전 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막장스토리와는 다른 담백함이 있다. 한편 고구레빌라의 주인인 고구레씨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눈앞에 둔 친구의 문병을 다녀온 이후 섹스에 대한 욕구에 불타오른다. 섹스를 하고 싶은 본능을 주책없다고 생각하는 고구레씨는 시간이 지날수록 섹스에 대한 욕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적극적으로 섹스를 하기 위해 시동을 건다. 그 밖에도 섹스를 즐기는 여대생의 비밀스러운 섹스에 담긴 슬픈 비밀과 이를 지켜보는 변태 이웃까지 특이하면서도 가감 없는 섹스이야기를 통해 진솔한 삶의 모습들을 보여준다. 
「고구레 연애소동」에 담긴 모든 이야기들은 고구레 빌라와 그곳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 모든 인간관계를 연결고리로 엮어져나간다.

일본 소설은 많지는 읽어보진 않았지만 너무 가볍게만 느껴져서 소설이라기보다는 한 편의 만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 적이 많았다. 뭔가를 더 의미 있고 삶의 노하우 같은 얻을 지식이 있는 것을 원했다. 그래서 그런지 소장하지 보다는 한 번 보고도 충분할 것만 같은 일본소설은 책을 사서 읽는 것을 아깝게 하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고구레빌라 연애소동’도 그와 다른 부류라고 하긴 어렵다. 하지만 단편 하나하나에 담긴 섹스에 대한 다양한 그리고 자유로운 이야기를 경험해보고 싶다면 추천해볼 만한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남의 이야기일지 모르는 소설 속의 이야기들은 허무맹랑한 내용이 아닌 어쩌면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고민일 수도 있으며 숨기고 싶은 비밀일 수도 있지 않을까. 
그만큼 「고구레빌라 연애소동」에서의 섹스는 우리와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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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잔혹극]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활자 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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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매력은 첫 문장에 있다. ‘유니스 파치먼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에 커버데일 일가를 죽였다.’ 이 문장은 많은 추리/스릴러 문학에 대한 파격이다. 이를 통해 이 소설은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했다. 범인이 누구인지 감추는 방식으로 기존 추리문학에서 주요한 호기심의 대상으로 삼았던 살인범의 정체를 버리고, 대신 왜 글을 읽고 쓸 줄 몰랐기에 사람을 죽일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동기를 흥미의 중심으로 잡아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동기 자체가 독자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독자가 의문을 품는 것은 ‘어떻게 문맹이 살인의 동기가 될 수 있는가’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사실은, 그렇지 않음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글을 모른다는 것이 당사자에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일지 우리는 판단할 수가 없다. 작품 내에서도 말하듯 우리는 말하는 순간순간 모든 사람들이 글을 읽을 줄 앎을 전제한다.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은 흔히 가정되는 상황이 아니다. 소경이라면 글을 읽을 수 없겠지만 정상적인 시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이 가당한 일인가. 우리는 쉽게 생각한다. 그럼 배우면 될 일 아닌가. 시력이 없는 사람도 점자를 배워 그들만의 문자를 습득하지 않는가. 하지만 이 마땅한 사고가 커버데일 일가를 죽음으로 몰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루스 렌들은 등장인물들의 심리 변화를 따라가는 데 능란한 작가다. 등장인물이 겪는 고통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고 느낄 수 있는 성질이 아니기에 작가는 유니스 파치먼이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개연성을 마련하기 위해 고생했을 것이다. 이는 유니스와 동조하여 함께 범죄를 저지른 조앤 스미스가 어떻게 폭력적인 광기를 띠게 되었는가를 서술하면서도 드러난다. 그들이 점차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리며 난폭해지는 과정을 적절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순차적으로 보여줄 줄 아는 작가의 능력이 없었다면 전혀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을 것이다.


문맹이기에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작가는 문장을 읽고 쓸 수 없으면 타인과 소통이 불가해지고 점차 스스로에게 고립되어가며 감정에 무감각해진다고 서술하고 있다. 이 부분이 개인적으로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이긴 했다. 글자를 모르기에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조금 비약이 아닐까. 이러한 무신경함을 작가는 등장인물의 태생적 성격이 아닌 글자를 배우지 못했기에 나타난 후천적인 기질로 표현하고 있다. 글자를 모른다는 사실을 병적으로 숨기는 주인공의 행동 또한 분명하게 심리적 근거를 밝히고 있지 않아 아쉽다. 이 부분들이 커버데일 일가를 살해하게 된 근본적인 이유인데도, 나는 이것을 논의의 여지 없이 당연한 사실로 서술하는 작가의 어투가 조금 거슬렸다.


흥미로운 것은 글을 읽지 못하는 유니스 파치먼의 대치점에 항상 책을 끼고 사는 자일즈 몬트를 두었다는 것이다. 그는 항상 책을 읽으며, 활자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덕분에 남들과 말을 섞는데 관심이 없고 스스로의 꿈과 가치에 탐닉한다. 이는 글을 전혀 읽지 못하는 유니스와 비슷한 부분이다.


사실 그래서 초기의 독서 방향과는 다르게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문맹이 일으킬 수 있는 불행보다는 유니스 파치먼에게 가하는 커버데일 일가의 선의의 폭력에 시선이 집중된다. 책을 읽지 못하는 유니스나 책을 탐닉하는 자일즈나 대외적으로 무능하기고 스스로의 일-이를테면 유니스는 가사업무, 자일즈는 학문적 연구-에 뛰어난 기형적인 모양일 띠는건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커버데일 일가는 유니스가 책을 읽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동정하며 글을 가르치려 한다. 40년이 넘도록 정상적인 생활을 영유해온 유니스의 삶을 불행한 것으로, 그릇된 것으로 치부하며 자신들의 잣대를 최선으로 여기고 그것을 선의의 이름으로 강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상류층 인물들의 자기애적인 동정심이 유니스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때문에 이 소설이 아쉬웠던 것이다. 추리/스릴러 장르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흔히 작가들이 빠지기 쉬운 트릭의 신선함과 수수께끼의 참신성에의 집착을 버리고 사회적인 문제를 전면에 부각시키는 작가의 당당함이 마음에 들었지만, 문맹이 가지는 사회적 트라우마를 좀 더 치열하게 밀어붙이지 못하고 추리소설에서 흔하게 등장하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의 대치구조로 이야기 구조를 완결시킨 것 같아 안타까웠다. 소설 자체보단 장정일이 붙인 발문이 더 흥미로웠으니, 덕분에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를 꼭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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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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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의 소설은 지독하다. 요즘의 소설들에선 개인적인 것, 관념적인 것들이 주된 소재가 된다. 그 소설들은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환상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기 일쑤다. 그 소설들에선 문학적이고 재치 있는 문장들, 상황들을 만들어내는 능력, 문학적 상상력의 범위가 주된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런 와중에 김이설의 소설은 돋보인다. 그녀의 소설은 치밀하게 현실을 파고들었고, 문학적 언어로 감춰놓았던 감성들을 해체하고 현실의 알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때문에 그녀의 소설들은 외설적인 소설을 보듯이 낯설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이 과거 리얼리즘 소설과 닮았냐면 그렇지도 않다. 이제 가난에 불행하고 자본에 좌절하며 끝끝내 자살하고 마는 인물들의 상은 지루하고 개성 없는 것들이 되었다. 김이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의 인물들이 아니다. 그녀는 현실의 지독함을 극단까지 이끌어 환상의 영역으로 들이밀었다. 그녀의 소설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갓 태어난 아이의 섬뜩한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모유의 비린내와 비틀린 모성애가 드글거린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생에 대한 몸부림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김이설의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은 사실 ‘누구나 알지만 말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한다. 다들 알고는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마는 삶의 심층들을, 작가는 건드리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발언과 덧붙여, 그녀의 소설 속에 드러나는 표면적 줄거리만을 살펴보면 그녀는 그저 현실의 재현에 치중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소설이 현실 재현의 논리로만은 읽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소설은 다른 의미로 판타지적이다.


치열한 리얼리즘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그 끝엔 다시 환상의 영역이 있다. 그녀의 소설은 지독하다 못해 꿈결같은 소설들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삶에 대한 환멸이나, 잊고 있던 생의 진실을 맞딱뜨린 씁쓸함이 느껴지기보다는 악몽을 꾼 듯한 묘한 불쾌감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꿈에서 깬 자에게 삶의 허무함보다는 현재에 대한 안도를 심어주게 마련이다. 꿈에서 깨어나는 행위는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악몽이었을 경우엔, 나의 삶이 그 지독한 악몽보다는 행복함을 자각하는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김이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제발로 악몽의 소굴에 발을 들이미는 몰취미적인 행위다. 그것은 피와 살점이 튀는 고어무비나, 유령의 집에 발을 들이미는 것과 같은데 그것은 결국 허구일 뿐이므로 관객들은 언젠간 그곳에서 벗어나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그 상황을 즐기게 된다. 김이설의 소설을 즐기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삶의 이면을, 감춰야 할 비밀을 알게 되기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상상 속에 존재하는 밑바닥의 끝을 들여다볼 수 있기에 감상하게 된다. 김이설의 소설을 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엔, 나의 삶이 결코 이것과 같지 않음을 확신하는 자신감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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