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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칠 수 있겠니
김인숙 지음 / 한겨레출판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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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읽고 나면 이후에 내가 노트에 풀어내야 할 이야기를 방대하게 선사해 주는 가 하면, 어떤 책은 읽은 후에도 도대체 어떤 말로 책을 정의내려야 할 지 막막하게 만든다. 김인숙의 소설을 읽은지 벌써 1주일이 흘렀다. 그동안 1권의 문예지를 읽었고, 1권의 교양서적을 읽었다. 그 와중에도 김인숙의 소설은 정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었다. 이젠 그 내용마저 가물하다. 다시 한 번 읽어볼까 생각하다가도, 그럴 여력이 없어서 그만둬 버리고 말았다. 감성적인 사랑이야기가 구미에 맞지 않는 독자여서 그랬을 것이다.

이 소설은 사랑 이야기이다. 진과 이야나의 사랑이야기를 전경으로, 진과 유진의, 이야나와 수니의 사랑 이야기가 후경으로 흐른다. 진과 진은 같은 이름의 연인이다. 남자인 진에게 성까지 붙여 유진이라 명명함으로, 둘은 구분된다. 저 멀리 존재하는 섬에 매료되어 버린 유진은 그곳에서 젊은 여자 아이를 하인으로 두고 살아간다. 유진을 만나러 먼 길을 날아간 진은 유진과 하녀가 예삿관계가 아님을 알아챈다. 그리고 그 하녀의 배에 유진의 아이가 잉태되어 있다는 사실도. 사랑에 대한 배신과 좌절, 그리고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살의는 평화로운 섬에 갑작스럽게 나타난 지진과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진의 손에 묻은 피와 함께 모든 것이 뒤흔들렸다.

7년 뒤, 섬에선 7년 전의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진이 일어난다. 7년 전의 지진이 진의 내부에서 발원한 것이었다면, 이번엔 외부의 것이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쓰나미가 밀려와 도시를 집어삼켰다. 사실 그 장면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진과 진의 하나이지만 둘일 수 밖에 없는 남녀의 사랑이야기가 소소히 흐르던 와중에, 때아닌 지진과 쓰나미라니. 잔잔한 멜로물에 끼얹어진 블록버스터의 향기는 감성적 어조에 푹 절여저 지쳐가던 나에겐 청량제 역할을 했지만, 마냥 반갑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그 끔찍한 폐허와 살육의 공간이, 이야나와 진, 두 남녀가 원초적인 인간상을 끄집어 낼 수 있도록 도와준 것은 분명했다. 원초적이라는 것은, 성욕과 같은 본능적인 것이라기 보단 자의에 의해서든 타의에 의해서든 숨겨왔던 좀 더 인간적인 성질의 것이었다.

나는 만이라는 케릭터에 주목했다. 만은 의붓어머니와 함께 살아간다. 그는 섬에서 부유한 여자를 만나 섬 밖으로 나가길, 그녀에게 구원받아 자신도 부유해지길 꿈꾼다. 하지만 섬에서 그의 발림에 넘어가 함께 시간을 보내던 여자들도,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면 만을 잊어버렸다. 만에게 남겨진 유일한 희망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는 그의 의붓어머니였다. 하지만 그녀는 유산 상속에 부가조항을 달았다. 자신이 자연사로 죽을 경우에만 만이 유산을 상속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혹시라도 만이 자신을 죽일 수 있었으므로.

폐허가 된 도시에서 만은 자신의 어머니를 찾아 헤메인다. 시체를 찾지 못하면 실종으로 처리되어 상속이 물건너갈 것이었다. 그는 울부짖으며 어머니가 호송된 병원을 찾아 돌아다닌다. 그런 그의 모습은 언뜻 보면 어머니의 죽음 그 자체보다, 어머니가 실종으로 처리되어 유산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의붓어머니를 사랑했다. 그 사랑은 비로소 어머니가 죽음 앞에 놓였을 때에야 발견되었다.

폐허가 된 도시. 물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생명이 존재했던 흔적. 그 사라진 터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소설이 안겨준 쓰나미나, 지진의 강렬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생을 포기했던 사람들이, 정말로 죽음 앞에 당도했을 때에야 알아챌 수 있는 진귀한 감정을 소설은 담담히 풀어놓고 있다. 여전히 정리되지 않는 소설이다. 등장인물들의 아픔이, 혹은 그로 인한 사랑의 감정이 고스란히 내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나에겐 이들과 공감할 경험이 없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직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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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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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K는 토요일7시 자명종 소리에 눈을 뜬다. 토요일은 일을 나가지 않는 날이고, 그러므로 자명종도 울릴 리가 없을 터인데, 누구도 맞춰놓지 않는 자명종 소리는 평소와 다를 주말을 암시하듯 K를 요란스럽게 깨웠다.

K는 이상함을 느낀다. 잘 때 항상 잠옷을 입고 자는 그는 벌거벗은 채였고, 씻고난 뒤에 바른 스킨은 평소 자신이 쓰던 것이 아니었다. 잠옷은 이상하게도 아내가 입고 있고, 딸은 자신의 자식이 아닌 것 같다. 개는 으르렁거리며 주인을 못 알아보다가 기어이 그의 발목을 물어 뜯고 만다. 분명히 자신의 가족이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익숙지 않은 느낌은 표현해내지 못할 낯설음이었다.

때문에 K는 누군가가 자신을 모형의 세계에 가둬 두었다고 생각한다. 마치 트루먼쇼 처럼. 그의 가족은 몽땅 누군가에 의해 바꿔치기당한 배우이다.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의 비밀은, 어젯 밤 술을 마신 후 날아가버린 몇 시간 사이에 존재할거라 확신한다. 이 의심은 처재의 결혼식에 참석하고, 친구 H를 만나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갈수록 더욱 짙어진다.

추론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 진행. 그러니까 사건의 근원을 찾아가는 방식의 서사 구조는 흡사 스릴러나, 추리소설 같다. 소설의 대부분을 할애하여 평소에 익숙했던 것들이 다르게 보이는 증상들을 늘어놓듯 서술하고 있음에도 이야기가 지루해지지 않고 흡입력을 가지는 까닭이다. 때문에 리뷰를 쓰면서도 말하는 것이 조심스럽다. 뭐, 그렇다고 해서 어마어마한 반전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 종교를 드나들며 긴 호흡의 대중소설을 써오던 최인호의 신작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그의 현대문학 복귀작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이 시작되었던 ‘타인의 방’으로 회귀하는 소설이기도 하다. 그는 복귀작으로 다시 ‘도시’라는 주제를 꺼내들었다. 그의 도시 안에서 K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던 반복되는 일상의 이지러짐을 체험한다. 5일간의 회사 업무와, 주말을 앞둔 아내와의 ‘전야제’ 그리고 다시 맞는 월요일, 이 반복되는 삶을 계속해서 누려온 남자다. 하지만 이 삶은 어느 순간 그의 눈에 낯설게 비쳐진다.

내가 나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나 스스로 증명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내가 나임을 알기 위해선 주위를 먼저 둘러봐야 한다. 나는 누군가의 남편으로서 증명되고, 아빠로서 증명되고, 혹은 선생이나 학생으로서 증명되며, 혹은 자식으로서 증명된다. 주변의 것들이 모두 낯설게 느껴지던 K는 결국엔 자신이 진정 자신인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종교적 색채 또한 강하게 느껴지는 소설이다. 급기야는 K가 자신의 다른 모습인 K를 만나게 되는 과정에선, 원죄에 대한 성찰마저 느껴진다. 선악과를 먹었으므로 선과 악이 구분되어 완전체인 K가 아닌 K1과 K2, 두 인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는 발상이다. 이야기의 전반부 부터 흐르는 논조와, 중심을 흐르는 발상은 현대인이 맞닥뜨린 익숙함의 낯섦에 닿아 있지만, 이야기가 흐를 수록 가톨릭적 색이 묻어나오는 경향을 띈다.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자신의 몸을 팔아 낯선 남자와 키스하고 포옹하던 ‘세일러 문’이 사마리아 여인으로 현신하며, 그를 돕기 위해 나선 K1과 또 갑자기 나타난 K2의 결합으로 완전한 합일에 이르른다.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결말이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낯선 이들의 사이에 껴 있는 것인지 찾기 위해 낯익은 도시를 방황하는 도시인 K의 모습이 훌륭히 묘사되어 환상적 색체의 소설임에도 흥미롭게 읽힐 수 있었던 것은 강점이었지만, 분명한 논조를 지니지 못한채 결국 종교에로 귀의한 듯한 모습에 과연 이 글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난감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종교적 접근으로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현대문학으로 귀의한다는 작가의 서문, 그리고 최인호의 초기작 ‘타인의 방’의 도시성과 연결해서 보는 김연수 작가가 쓴 발문, 오정희 작가가 쓴 추천사에 기댄 해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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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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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편혜영의 소설집 '사육장쪽으로'등을 살펴보면 도시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이 기괴하게 표현된다. 무시로 마주치는 평범한 삶의 장면이 편혜영의 손길을 거치면 그로테스크한 형태로 일그러진다. 하지만 그것은 작가의 작위적인 표현에 의해서라기 보다는 현상 그 자체를 날것 그대로 둠에 의한 것이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스쳐지나가던 것들을 수사와 묘사가 증발된 객관화된 문장으로 늘어놓았을 뿐인데 소름이 오소소 돋는 끔찍한 형태로 확인되는 것이다.

이번 소설집에서 편혜영의 문장은 더욱 건조해졌다. 이젠 이전 그녀의 소설을 수놓던 많은 단어들, 이를테면 끈적이고, 더럽고, 불쾌한, 찐득찐득한 것들이 사라졌다. 등장인물들의 행보는 더욱 평범해졌고, 이전 작품들에서 보이던 (이를테면 '밤의 공사'에서 주인공이 보여주는) 광적인 집착도 사라졌다. 하지만 이번 소설집의 소설들은 편혜영의 전작들보다 더욱 무섭다. 이전 그녀의 작품에서의 공포가 일상을 비틀어 보는 것에 대한 것이었다면, 이번 그녀의 작품에서 나타나는 공포는 '벗어날 수 없음'에 대한 공포이기에 그렇다.

'토끼의 묘'에서 주인공은 파견을 나간다. 그리고 공원에 유기된 토끼를 집으로 데려와 키운다. 자신을 소개한 선배는 어느날 갑자기 종적을 감추고, 그의 집 문을 두드려봐도 대답이 없다. 업무는 단조롭고 반복된다. 자신이 실수를 하더라도 어떠한 조치도 내려지지 않는다. 그저 자리에 앉아있음으로 충족되는 업무일 뿐이다. 모두가 파견자인 회사. 개인이 존재하는 공간이 아닌 직책만이 존재하는 공간. 얼마든지 대체 가능하고 수정가능한 공간 속에 주인공이 서 있다. 주인공은 자신의 후배에게 파견을 권유하고, 자신은 자신의 집에 잠적한다. 그 절차는 마치 주인공과 선배와의 모습과 꼭 닮아 있다.

이러한 반복되는 굴레는 '통조림 공장'에서도 나타난다. 실종된 공장장을 대신해 박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공장장과 똑같은 '수위'라는 별명을 얻는다. 통조림을 먹지 않던 박은, 실종된 공장장처럼 통조림으로 끼니를 처리하고 누구보다 빨리 공장에 출근해 누구보다도 늦게 퇴근한다.

 '동일한 점심'에서의 주인공은 이 굴레에 익숙해진 인물의 삶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주인공은 복사실에서 일하는 남성으로, 항상 같은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는다. 언제나 정식 A세트였다.

   
  기억 속에 떠오른 반찬이 오늘 먹은 것인지 어제 먹은 것인지 헛갈렸다. 어쩌면 구내식당 게시판에 적혀 있는, 내일의 반찬일지도 몰랐다. p.65

그렇게 늘 똑같은 한 끼 밥을 먹는 것으로 그는 어제의 낮과 오늘의 낮이 같음을 실감하고 오늘 밤과 내일 밤이 다르지 않을 것을 확신했다. 그런 실감과 확신을 통해 자신이 지하 복사실에 있는 동안 매일 낮과 매일 밤이 각각 다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을 잊었다. p.66
 
   

이 남성은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었다. 8시 38분에 역에 도착하는 열차를 타서, 9시 30분에 복사실 문을 여는 삶. 어떤 사내와 2번 차량 3번 칸에 나란히 서서 지하철을 기다리며 제본된 책을 읽는 삶이다. 어느날 그 사내가 지하철에 뛰어들어 죽는 사고가 일어났음에도, 남자는 그 사내가 죽었다고 인지하지 못한다. 남자는 그 사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선로에 뛰어들어 죽었다는 환상을 본다. 매일 같은 삶을 사는 것에 길들여져서 스스로 그 제약에 속박되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의 숨이 허망하게 끊어졌고 몸이 잘게 바스러져 한낱 얼룩으로 스몄고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남은 빛이 허공을 맴돌았다. 그럼에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열 시간 이십 분 이전과 결코 같을 수 없음에도. p.84
 
   

'산책'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심지어 전원의 삶에 두려움마저 느낀다.

   
  등골이 서늘할 정도로 나무로 가득 찬 숲과 그 숲을 품은 소도시가 싫어졌다. 모든 길을 감추는 숲에 비하면 한눈에 모든 길이 훤하게 들어오는 도시는 그야말로  천국에 가까웠다. p.147
 
   

인공에 길들여진 주인공에게 자연은 너무도 두려운 공간이었다. 그에게 달려드는 하루살이들은 자연의 포식자와 다를바 없다.

그렇다면 그 굴레에서 벗어나려 하는 자들에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정글짐'에서 주인공은 해외로 출장을 나간다. 처음에는 상사인 백의 그림자를 쫓았다. 그가 추천한 곳에서 밥을 먹고, 그가 샀던 물건을 샀다. 그가 준 가이드북을 따라서 행동했다. 그는 소설의 말미에서 백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혼자 도시를 걷는다. 그리고 길을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럼에도 도시는 모든 현대인들에게 이상향과 같은 곳이다. '크림색 소파의 방'에서 주인공은 서울로 이사를 가는 길이었다. 이삿짐 트럭을 앞질러 가기 위해 국도로 들어선 그는 국도변에서 원치않은 일들에 휘말리게 된다. 이를테면, 와이퍼가 고장나고 와이퍼를 고쳐준 청년은 그에게 돈을 요구한다. 그에게 돈을 뜯긴 주인공은 청년이 대마를 피웠다고 확신하곤 경찰에 신고하고, 국도를 달리다 차가 멈춰서 보험회사에 연락해 조치를 기다린다. 하지만 그를 찾아온 것은 보험회사 직원이 아니라 그에게 돈을 뜯은 청년이었다. 그에게 폭력을 당해 피를 흘리면서도, 주인공은 저 멀리 보이는 서울의 아파트 불빛을 바라본다.

이처럼 편혜영의 소설에 나타난 주인공들은 도시의 삶에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고, 그 삶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며 영위하고 있다. 이제는 자연의 삶을 두려워할 정도다. 누구나 도시에서의 이탈을 꿈꾸며, 자연으로 돌아가 살고 싶다고 이야기한다. 기계의 부품과 같은 대체가능한 삶, 객채는 사라지고 존재만이 남은 삶. 모두가 그것을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 그들은 도시에 막연한 꿈을 품고 있다. 이미 너무도 깊이 소속되어 벗어날 수 없는 도시에서의 삶. 그 벗어날수 없음은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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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쓸개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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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환상성이나 상징성이 두드러지는 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문학 작품을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깊이가 얕기 때문일 것이다. 당장 읽어서 머리로 이해되지 않고, 가슴을 울리지 않으면 그 먹먹함이 남아서 숨통을 죈다. 그렇다고 다시 소설의 첫장을 펴서 꼼꼼히 숙독할 의지가 나에겐 조금 부족하다. 내가 남성 작가의 소설을 주로 읽는 것도 그런 맥락일 텐데, 김숨의 소설은 자꾸 나의 그런 치부를 건드렸다. '내가 과연 무슨 이야길 하고 싶어하는 걸까! 말해봐!' 국문학과적 본능으로 그 밑바닥을 파해쳐 보고 싶지만, 역시 나는 무지하기에 노트에 점 몇 개를 찍곤 넘어가곤 했다.


김숨의 소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마구 뛰논다. 그 구분은 어렵다. 소설은 익숙한 일상의 한 장면을 제시하면서 시작해, 어느 한 부분에서 갑자기 비논리성의 세계로 뛰어든다. 그 방법은 굉장히 자연스럽고, 주도면밀해서 독자는 자신이 홀린지도 모르고 계속해서 작품을 따라 읽게 된다. 그러다보면 소설이 언제 이런 안개 속에 휩싸인 건지, 애초에 그랬던 것은 아닌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술을 사러 나간다며 집을 나서서는 돌아오지 않는 아버지와,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붙들고 놓지 않는 어머니. 결국 전화선을 몸에 둘둘 감은 채 잠이 든 어머니를 뒤로하고 홀로 식사를 하는 나. 그런 내 앞에 홀연히 서 있는 노망난 노인(모일, 저녁). 사막여우를 보기 위해 동물원에 가, 직접 우리에 들어가서 구경꾼들이 던져주는 음식물을 받는 나. 혹은 홍학의 사이에 서서 핏물로 얼룩진 듯한 얼굴을 물에 비춰보는 나(사막여우 우리 앞으로). 퇴직한 날로 유통기한이 끝나 버린 아버지의 머리에 새겨진 유통기한을 어머니와 함께 지우고 다시 새기는 작업을 하는 나(럭키슈퍼). 이러한 이야기들은 문학적 효용을 넘어가지 않으며 이야기에 기묘한 매력을 덧붙인다.


이 소설집에서 자주 나타나는 키워드 죽음, 혹은 질서의 유지이다. '간과 쓸개'에서 주인공은 간암 환자이다. 그의 누님은 담석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다. 그는 누님을 한 번 만나보려고 하지만, 계속되는 정기검진과 치료로 날짜를 잡지 못한다. 계속해서 병원을 전전하면서 생의 끈을 놓지 않는 그의 모습은 수도 계량기통 안에 가득한 귀뚜라미들과 닮았다.



유독 등이 미끈한 귀뚜라미를 나무 젓가락으로 집어 올리는데, 그 귀뚜라미의 다리들이 가늘게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귀뚜라미의 더듬이가 내 손가락에 스치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그 귀뚜라미를 놓칠 뻔했다. 설마 했는데, 그 귀뚜라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죽은 귀뚜라미들 속에서 저 홀로 악착같이 살아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기특하기도 하고 불쌍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끔찍하다는 생각이 더 컸다. 살아 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구차스럽고 징글징글하기만 하였다. pp. 20~21  


필사에 대한 저항은 기존의 질서에 반하는 행위이기에 처절하고 비참하기만 하다. 그에 대비하여 '북쪽 방(房)'의 곽노는 그 질서에 순응한다. 그는 폐에 문제가 생겨 위도 반절을 잘라내야 했다. 그는 아내에 의해 북쪽 방에 격리된다. 아내는 자신의 삶의 공간에서 그를 떨쳐내 듯이 그를 방에 가두었다. 방에서 점점  육탈하며 죽음에 다가서는 그는 자신의 자리를 받아들인다. '인간이건 짐승이건 식물이건 광물이건, 종국에는 수축을 거듭해 필멸에 이르게 되어 있다.'(p. 134)는 그의 말은 그의 생각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의 그러한 초연함은 결코 위대해 보이진 않는다.


결국 죽음이라 함은 생의 질서인 셈인데,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이 질서 유지에 강박적이다. '룸미러'의 남편은 자신의 아이들이 잠에서 깨는 것을 두려워한다. 두 아이들은 깨어 있으면 서로 싸우기 바빠 정신을 빼놓기 때문이다. 그 아이들로 인하여 평온이 훼손되는 셈이다. 그는 직장에서 돌아올 때도 집에 전화를 하여 아이들이 잠든 것을 확인한다. 소설 속에서 남편과 나는 장례식장에 가는 길인데, 남편은 뒷 좌석에서 잠이 든 아이들을 백미러로 연신 확인한다. 교통이 마비되고, 소실점까지 차들이 가득하여 움직이지 못하는 가운데, 검은 새들이 하늘을 날고, 어떤 새는 차 유리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는 끔찍한 상황에서도 남편은 아이들이 깰까 노심초사한다. 그리고 내가 결국 참지 못하고 사고의 현장을 확인하는 장면에서도, 결국 작가는 어떤 사고가 났는지 가르쳐 주지 않는다. 다만, 내가 아이가 깨어났을 까봐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만 알려준다. 사고의 경중은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거다. '흑문조'에서는 보일러 배관에서 물이 새, 배관공이 구멍난 배관을 찾기 위해 부엌의 바닥을 온통 뚫어 놓는다. 그 상황에서 내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이 쉬고 있는 안방마저 그들이 침범해 바닥에 구멍을 낼까 하는 것이다. '육의 시간'에서도 남편이 살아 있는 시체와 같은 기이한 여자를 집에 데려와 같이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가정의 평온함이 유지되었기에 그것에 신경쓰지 않는다. 발굴단들이 찾아와 집에서 함께 기거할 때도, 그들이 평화를 깨지 않았기에 화자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소설에선 '깨우지 않는 남편'도 등장한다. '내 비밀스런 이웃들'에서 화자는 오른 전셋값을 빌리기 위해 아버지에게 전화를 한다. 전화를 받은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는 중이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깨우지 않으려 한다. 제발 깨워달라는 말에 어머니는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구나.'라고 대답한다. '럭키 슈퍼'에서도 비슷한 장면이 등장하는데, 나는 잠들어서 깨어나지 않는 아버지가 걱정되어 오빠에게 말한다. 오빠의 대답은 이렇다. '깨운다고 뭐가 달라지냐?' 직장을 잃은 남편은 가정에서 평화를 깨뜨리는 요인이다. '북쪽 방'의 곽노인도 마찬가지이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은 이렇게 질서를 지켜나가지만, 그것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다. '럭키슈퍼'에서 어머니는 새벽6시에 슈퍼 문을 열어 저녁 11시에 닫는 생활을 끝까지 지키지만, 새로 들어선 서울슈퍼 때문에 그나마 있던 손님까지 발길을 끊어버린 상태다. 오히려 어머니는 근처 식당에서 일을 하고, 가게엔 새로 물건을 들여오지 않아 있는 물건보다 없는 물건이 많다. 그렇지만 저 규칙은 그대로다.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에서도 화자의 어머니는 매표소에서 일평생을 살다가 매표소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그녀는 다리를 쓰지 않아 다리가 홍학처럼 가늘어졌다. 자식들이 아무리 매표소에서 끌어내려해도 버텨내었던 그녀의 질서는, 그녀가 원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화자가 들른 동물원의 유리 부스 안의 직원은 울고 있다. 그녀는 말한다 '내가 우는 건 울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우는 거에요.' 하지만 사람의 눈물이란게 그런 것인가. 눈물은 울 시간이 되었기에 흐르는 것이 아니다. 슬프고 고통스럽기에 흐르는 것이다. 그녀의 말은,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애써 감추기 위해, 자신의 고통을 무디게 만들기 위해 하는 말인 것이다. 그들이 지키고자 하는 질서도 그러한 것일 게다. 질서가 좋기에 그에 대한 강박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삶을 위해 없는 질서를 만들고 그것을 신봉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라며 애써 스스로를 감추는 것일 게다. 그 슬픔을 알고 나면, 그들의 속에 감춰진 진짜 눈물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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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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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정이란 작가에 대해서 알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TV에서 엄청나게 광고를 때렸던 '내 인생의 스프링 캠프'는 읽어본 적이 없었고, 서점 서가의 목 좋은 자리에 항상 꽂혀있던 '내 심장을 쏴라'도 읽어본 적이 없었다. 표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다지 관심은 끌지 않는 작가였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세계문학상'이라는 것에 흥미가 동하지 않기도 했다. 이번에 고를 책을 선택하면서도 7년의 밤은 논외에 있었다. 내 선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던 것은 표지였다. 외국 서적의 표지를 보는 듯한 촌스러운 표지는, 이 책을 그저 그런 가십류 소설중 하나로 여기게 했다. 내 마음이 약간이나마 움직인 것은, 바로 이 광고 영상 때문이었다.

광고를 보는 순간, 서스펜스에 대한 갈증이 일었다. 오래 전부터 접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엉겁결에 깨닫고나니 갑작스런 갈증이 치고 올라왔다. 스릴러와 추리물 장르는 이미 일본에게 자리를 내준 탓에 국내 본격 문학으로서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서스펜스에 대한 갈증이라기 보다는 '이야기다운 이야기'에 대한 갈증이었는지도 모르겠다. '7년의 밤'을 읽을 목록으로 선택하면서의 나는 굉장히 반가운 마음이었다.

작품을 접하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작가의 준비성이었다. 소설에선 잠수부와 야구, 그리고 댐 관리가 가장 중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작가는 그 직업군에 대해서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관련 용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소설의 초반부서부터 작가에 대한 맹목적의 신뢰가 생겨났다. 이렇게 열심히 준비한 작가의 글이라면 뒷 이야기에 보통의 것이 숨어 있진 않겠구나. 하는 기대심리마저 피어났다. 정유정 작가의 글은 오래 묵은지 같았다. 장독에 꼭꼭 숨겨둔채 기다리다가, 보란듯이 내놓은 그녀의 작품은 깊고 진했다. 싸한 맛이 코를 뚫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세령호는 가상의 공간이다. 가상의 마을이지만 이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엔 마치 그곳이 실재했던 것 처럼 느껴지곤 한다. 댐으로 물막이를 해서 생겨난 커다란 호수. 그 아래 잠들어있는 과거의 마을. 그 마을 이주민들과 외부인들 사이에 나눠진 커다란 단절과, 그들 사이에 황제처럼 서 있는 세령목장의 주인이자 치과의사인 영제. 이 매력적인 마을의 지도가 책머리에 실려 있다는 사실은 책을 2/3쯤 읽은 뒤에 알게 되었지만, 굳이 지도가 없더라도 마을전체를 머릿속에 그리고 몰입하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 마을의 외부인으로 승환이 들어오고 그 뒤를 따라 현수와 그의 가족이 들어온다. 이들은 경비업체에서 파견된 수문 경비원들이었다. 때마침 마을에선 사건이 일어난다. 영제의 딸이 실종된 것이다. 영제는 자신의 딸과 아내를 물건처럼 부리고 싶어한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인형처럼 만들길 원한다. 하지만 그들은 인형이 아니었기에 영제는 자신의 뜻대로 그것을 이루지 못했고 폭력이라는 수단을 통해 그들을 '교정'하려고 한다. 그 부분별한 폭력에 희생된 모녀는 결국 가출과 실종이라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머지 않아 영제의 딸 세령은 호수에서 익사체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부검 후에, 그녀가 차에 치인 뒤에 강한 힘으로 목이 꺾이고 호수에 버려졌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야기는 얽히고 섥힌다.

사실 소설은 가장 중요한 모든 것은 밝히고 시작한다. 소설의 사실상 주인공인 서원의 아버지가 살인자로 잡히면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영제의 딸 세령을 죽이고,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뒤 댐 문을 열어 한 마을을 수장시킨 살인마. 그렇기에 소설은 더이상 살인범을 찾는 게임이 아니다. 사실이 전부는 아니라고(p.25) 말하는 승환의 대사처럼, 소설은 사실 속에 숨어있는 진실을 찾는데 힘을 쏟는다. 사실은 문맥상의 의미를 배재하기 때문이다. 이미 7년 동안 여러 매채를 통해 밝혀지고, 재생산된 한 끔찍한 사건 뒤에 숨어 있는 진실을 찾는 것. 그것이 소설이 우리에게 말하는 방식이다.

   
  나는 내 아버지의 사형 집행인이었다. p.6  
   

소설은 이 강렬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서원은 상상 속에서 수 없이 자신의 아버지를 목매단다. 살인자의 아들이라는 명찰을 달고 한 곳에 안주하지 못한 채 온 세상을 떠돌아다닌 그로서는, 아버지의 저주가 자신에게 들러붙어 있는 느낌일 것이었다. 가는 학교마다 아이들이 그를 따돌리고, 취직을 해도 곧 해고된다. 집을 얻으면 집에서 쫓겨난다. 그렇기에 서원은 가장 사실에 강하게 매여 있는 인물일 것이다. 아버지가 살인범이라는 사실 때문에 세상에서 버려져 생의 근처를 떠돌고 있으니 말이다. 그런 서원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 가정을 시작으로 세령호에 숨겨져 있던 비밀이 봇물이 터지듯 밀고 들어온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다들 자신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현수는 항상 술을 마시며, 자신을 폭행하던 '최상사'로서 아버지를 기억한다. 그리고 어떻게든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 노력한다. 하지만 그는 결국 아버지에게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사형장에서 생을 마감한다. 승환은 강에서 시체를 건저올리는 역할을 했던 아버지로부터 벗어나려 한다. 그는 철도 업체에 취직하지만 한 여성이 그의 열차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그 시체의 사라진 신체부위를 찾으며, 결국 아버지의 그림자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을 한다. 도망치듯 세령호라는 외지로 흘러나오지만, 그곳에서 그는 물질을 하던 중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세령의 시체를 보게 된다. 서원도 마찬가지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가슴에 붙인 채로 그는 어떻게든 도망치려한다. 마지막에 쏟아지는 기자들의 쏟아지는 플레쉬 세례에 당당히 서는 그의 모습은 그런 아버지의 그림자에 대항하는 꿋꿋한 자세였을 것이다.

살인사건과 그 범인, 그리고 살해자 아버지의 치열한 복수를 다룬 작품이지만 그렇게만 볼 수는 없었다. 이미 살인자를 밝혀졌기에 치밀한 반전 따위는 있을 수 없었고, 스릴이 강조되기엔 그들이 안고 있는 과거의 무게, 죄의 무게에 많은 분량이 할애됐다. 단순히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으로 읽기에는 아들을 위해 한 마을을 수장시키는 아버지의 비뚤어진 부정이 너무 도드라졌다. 그보다는 어딘가 어긋난 인간들의 초상이 확대경을 쓴 듯 자세히 읽혔던 것 같다. 자신의 세계를 건설하려는 야망을 가진 영제. 최상사로부터 도망치며 자신의 아들에게 모든 것을 쏟아붇는 현수. 쪽방에서 살아가며 '내 집'에 대한 부푼 꿈을 안고 거기에 집착하는 은주 등. 이 소설에 나타나는 인물들이 한 군데씩 괴이한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인간 본성의 약점 하나 씩을 드러내어 그것으로 케릭터를 형상화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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