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 - 김이설 소설집
김이설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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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설의 소설은 지독하다. 요즘의 소설들에선 개인적인 것, 관념적인 것들이 주된 소재가 된다. 그 소설들은 현실을 직시하기보다는 환상의 영역으로 넘어가버리기 일쑤다. 그 소설들에선 문학적이고 재치 있는 문장들, 상황들을 만들어내는 능력, 문학적 상상력의 범위가 주된 평가의 대상이 된다. 그런 와중에 김이설의 소설은 돋보인다. 그녀의 소설은 치밀하게 현실을 파고들었고, 문학적 언어로 감춰놓았던 감성들을 해체하고 현실의 알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때문에 그녀의 소설들은 외설적인 소설을 보듯이 낯설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이 과거 리얼리즘 소설과 닮았냐면 그렇지도 않다. 이제 가난에 불행하고 자본에 좌절하며 끝끝내 자살하고 마는 인물들의 상은 지루하고 개성 없는 것들이 되었다. 김이설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흔히 볼 수 있는 현실의 인물들이 아니다. 그녀는 현실의 지독함을 극단까지 이끌어 환상의 영역으로 들이밀었다. 그녀의 소설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갓 태어난 아이의 섬뜩한 울음소리가 가득하다. 모유의 비린내와 비틀린 모성애가 드글거린다.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생에 대한 몸부림은 끔찍하기까지 하다.


김이설의 소설집 『아무도 말하지 않는 것들』은 사실 ‘누구나 알지만 말하지 않는 것들’이라고 한다. 다들 알고는 있지만 무의식적으로 외면하고 마는 삶의 심층들을, 작가는 건드리고 있는 듯하다. 그녀의 발언과 덧붙여, 그녀의 소설 속에 드러나는 표면적 줄거리만을 살펴보면 그녀는 그저 현실의 재현에 치중하고 있는 듯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소설이 현실 재현의 논리로만은 읽히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소설은 다른 의미로 판타지적이다.


치열한 리얼리즘의 끝엔 무엇이 있을까. 그 끝엔 다시 환상의 영역이 있다. 그녀의 소설은 지독하다 못해 꿈결같은 소설들이다. 그녀의 소설을 읽고 있으면 삶에 대한 환멸이나, 잊고 있던 생의 진실을 맞딱뜨린 씁쓸함이 느껴지기보다는 악몽을 꾼 듯한 묘한 불쾌감만이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꿈에서 깬 자에게 삶의 허무함보다는 현재에 대한 안도를 심어주게 마련이다. 꿈에서 깨어나는 행위는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행위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악몽이었을 경우엔, 나의 삶이 그 지독한 악몽보다는 행복함을 자각하는 행위다. 그런 의미에서 김이설의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제발로 악몽의 소굴에 발을 들이미는 몰취미적인 행위다. 그것은 피와 살점이 튀는 고어무비나, 유령의 집에 발을 들이미는 것과 같은데 그것은 결국 허구일 뿐이므로 관객들은 언젠간 그곳에서 벗어나리라는 확신이 있기에 그 상황을 즐기게 된다. 김이설의 소설을 즐기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독자들은 이 소설에서 삶의 이면을, 감춰야 할 비밀을 알게 되기에 즐기는 것이 아니라 상상 속에 존재하는 밑바닥의 끝을 들여다볼 수 있기에 감상하게 된다. 김이설의 소설을 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엔, 나의 삶이 결코 이것과 같지 않음을 확신하는 자신감이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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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워
배명훈 지음 / 오멜라스(웅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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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르문학적 요소를 본격문학에 도입하려고 했던 작가들은 많았다. 대표적으론 다방면의 장르를 넘나들면서 전방위적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박민규가 있다. 박민규는 SF뿐 아니라 무협지, 일본만화, 심지어 근래에는 서부극까지 자신의 소설에 차용해왔다. 근래에 김중혁은 장편 『좀비들』에서 서양의 좀비물을 활용해 이야기를 전개해 눈길을 끌었다. 기성작가들이 장르문학을 순수문학에 적용하는 사례들은 좀 더 신선한 소설 세계를 보여줄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했지만 아직까지 그 이종간 결합의 모범적 사례를 보여준 작가는 많지 않은 것 같다.


『타워』는 분명히 훌륭한 SF물이다. 박민규의 SF처럼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으며, 일반 장르문학서를 읽듯이 쉽게 읽힌다. SF소설을 쓰는 작가들이 곤혹스럽게 느끼는 것은 세계관의 창조일 것이다. 어께에 힘을 넣고 무리해서 설정에 몰입하다보면 독자들은 이야기보다 세계관을 파악하느라 더 진이 빠지는 경우도 있고, 그렇다고 세계관을 창조하지 않으면 기존의 SF물과 다를 바 없는 느낌에 왜 굳이 현대물로 이야기를 풀어내지 않고 SF에 손을 댄 것인지 의아함을 품게 된다. 배명훈은 그런 점에서 모범적이다. 그는 짧은 문장으로 간략하게 설명 가능하면서도 독창적인 세계관을 창조해냈다. 그것은 ‘빈스토크’. 높이 2,408m, 674층에 인구 50만이 거주하는 이 거대한 타워는 끝없이 하늘을 향해 뻗어나가는 바벨탑을 닮았다. 그는 이 기본적인 설정을 중심으로 세부적인 가지를 쳐 나간다. 소설집은 연작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이 전혀 다른 이야기들을 하나씩 읽어나가면 ‘빈스토크’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이 소설의 매력은 이 전혀 새로운 세계를 읽어나가면 읽어나갈 수록, 그곳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닮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것이다. 시장선거를 앞둔 세력들의 권력관계라던가 그들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취하는 행동들은 우리의 정치판과 흡사하다. 심지어는 ‘안 해본 것이 없는 시장’은 소설이 출간되었을 당시 서울의 시장이었던 모 정치인을 보는 듯한 착각도 든다.


배명훈은 이 세계의 주요 교통수단인 엘리베이터를 아이디어로 삼아, 이 세계의 이데올로기를 수직주의와 수평주의로 나눴다. 수직주의는 엘리베이터와 관련된 직종을 하는, 고소득업자들의 삶을 대변하고 수평주의는 저소득업자들의 삶을 대변한다. 이는 현 세계의 가치체계와 비슷하면서도 작가 자신의 창조한 세계에 자연스럽게 융화되어 있다.


이처럼 배명훈은 SF의 색으로 우리가 사는 곳과는 전혀 다른 환경을 만들어냈지만 그 안에서 지금의 현실세계를 비판하고 조소한다. 풍자적 요소는 이 소설의 주요한 포인트가 된다. 이것은 일종의 블랙코미디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인데. 독자들은 빈스토크에서 보이는 인물들 간의 권력에 대한 우스운 행동에 조소하면서도, 그게 자신의 세계와 다를 바 없다는 사실에 쓴웃음을 짓게 되고 만다.


한편 이 소설에서 정치 문제와 함께 주요하게 다루는 요소는 바로 인간성이다. 이것이 잘 드러나는 단편은 「타클라마티칸 배달 사고」와 「샤리아에 부합하는」이 있다. 이 단편들엔 ‘파란우편함’과 같은 빈스토크에서 볼 수 있는 유대적 행위들을 기술해 놓았다. 빈스토크의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빈스토크를 ‘바벨탑’이라고 부르지만 정작 그 타워에 사는 인물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곳을 바벨탑이라 여기지 않는다. 전쟁의 위기가 감돌고, 빈부격차로 고통에 허덕이는 사람들도 있지만 여전히 그곳도 사람이 사는, 삶의 터전이란 점에서 빈스토크의 밖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자연을 그리워하는 한 편, 지상에 대한 공포증을 가진 채 살아간다. 그것은 생명체로서 자연을 향하려 하는 기본적인 욕구의 발현이기도 하면서, 태어날 적부터 누구보다도 높은 곳에서 살아온 그들이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이기도 하다. 또 한편으론 언제나 타워 밖으로 나갈 수 있음에도 그들이 그곳에서 머무는 것은 결국 그곳도 인간들이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며 그들이 그곳에서 편안함을 느끼기 때문이다.


작가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해 놓고 그곳에 우리들의 이야기를 심었다. 그것은 결국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든 그 소설의 주체는 어느 시대의 인간이기에 가질 수밖에 없는 지점이다. 배명훈은 그 접점을 노골적으로 합치시켜 전혀 다른 세계를 통해 독자가 꿈을 꾸고 대리 만족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다시 돌아보아 성찰하도록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런 점에서 그의 소설은 장르문학을 본격 문학에 도입해 그 효과를 훌륭히 이끌어낸 모범적인 작품이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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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를 부탁해
신경숙 지음 / 창비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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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의 강력한 소설적 특성은 2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2인칭 시점의 사용, 그리고 시점의 변화이다. 2인칭 시점은 흔히 사용되는 서술방식이 아니다. ‘너’라고 하는 화자는 ‘나’보단 화자와 독자 사이의 거리가 멀고 ‘그’보단 장면을 객관적으로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독자는 화자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강요하는 듯한 느낌에 묘한 거부감까지 느끼게 된다. 하지만 신경숙은 과감히 2인칭 시점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작가의 선택은 소설의 목적에 부합하여 훌륭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작가는 ‘너’라는 주어로 독자를 직접 지칭하여, 독자가 화자의 뒤에 숨는 것을 금지한다. 독자는 어떠한 보호구 없이 작가 앞에 맨몸으로 서서 그녀의 비난을 오롯이 맞이하게 된다. 그것은 세상에 태어난 모든 누군가의 자식이라면 피해갈 수 없을 원죄이다.


작가는 거기에서 더 나아가 장마다 시점을 변화한다. 1장은 큰 딸인 ‘너’가 화자가 되며, 2장은 큰 아들인 ‘그’가 화자가 된다. 그리고 3장에선 엄마의 남편인 ‘당신’이 화자가 되고, 4장에선 엄마 그 자신이 화자가 된다. 마지막으로 에필로그에선 다시 ‘나’의 화자로 돌아와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이러한 시점의 변화는 독자에게 던지는 그물망을 더욱 촘촘하게 만드는 효과를 지닌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의 아들이나 딸일 것이다. 독자는 어떻게든 작가가 쏜 화살에서 피해가려 발버둥 치지만 끝내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1,2장에서 독자의 심장을 뒤흔든 작가는 3,4장을 통해 아내로서의 엄마, 여자로서의 엄마에 대해 조명한다.


엄마는 내가 태어났을 때 부터 엄마로 존재했다. 엄마를 여자로 인식하는 것은 우리에게 익숙치 않다. 엄마는 우리가 태어난 그 순간부터 여자이길 포기하며 엄마라는 새로운 성별을 얻는다. 우리들은 엄마를 나 자신이 좀 더 안전하고 편안한 삶을 살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며, 엄마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언젠가는 누군가의 딸이었고, 꿈 많은 여성이었으며 사랑스러운 아내였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쏟아지게 될 죄책감 때문이다. 소설은 우리가 그렇게 피해가려 했던 엄마의 진실을 들춰내었다. 그렇게 희생적이고, 인간이기보다는 우리를 키워내는 기계에 가까웠던 어머니가 언젠가의 나였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닿게 되는 것이다.


2인칭 시점의 사용, 변화하는 시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엄마를 추억시키며 인간이라면 가질 수밖에 없는 본능적인 먹먹함을 주기 위해 씌어졌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려지는 엄마라는 존재는 현재의 20대라면 공감하기 힘든 부분이 대부분이다. 소설 속의 엄마는 과하게 헌신적이다. 그리고 가족에게 병의 사실을 알리지 않은 채 끔찍한 고통을 혼자 감내하는 부분도 젊은 독자들은 받아들이기 힘든 대목일 것이다. 요즘의 엄마는 소설 속의 엄마보다는 좀 더 인간같고 친구같다. 소설의 평가를 요구했던 많은 동기 후배들이 이 소설은 엄청난 히트와 호평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는 평을 한 것이 그것을 반증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을 읽는 내내 엄마에 대한 묘한 가슴 떨림이 이는 것은 분명했다. 그것은 소설 속의 엄마와 우리들이 알고 있는 현재의 엄마가 조금 다르다 할 지라도, ‘엄마’라는 단어가 주는 아련함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이 소설이 해외에 수출되어 좋은 평가를 받은 점 에서도 알 수 있다. 비록 엄마와 내가 가졌던 경험은 보편적인 것이 아닐지라도, 엄마에 대한 기억은 누구나 공유하고 있는, 찌르면 언제나 흘러나오는 눈물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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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 - 김훈 장편소설
김훈 지음 / 학고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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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소설 흑산에는 이야기가 없다. 물론 그의 소설엔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며 그 인물들은 제각기 사연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가 소설적 이야기로 읽히지 않는 것은 거대한 맥을 따라 서사를 추동해 나가는 대부분의 소설들과 김훈의 소설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저마다 이야기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그마다의 이야기일 뿐 소설의 이야기가 아니다. 흑산에 유배당하는 정약전도, 조선 천주교회의 지도자로 성장한 황사영도, 황사영의 뜻에 따라 먼 길을 오고 가는 마부 마노리도, 육손이도 박차돌도 아리도 자신의 이야기는 간직하고 있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아니다. 때문에 이 소설은 소설로서 읽히기 보다는 거대한 이미지로 읽힌다. 그것은 이 소설이 제목으로 삼고 있는 흑산과 같다. 김훈은 인물들이 살았던 시대에 대해 어떠한 주관적 견해도 넣으려 하지 않았다. 그의 시각은 흑산에 머무는 정약전이나 흑산을 오가는 사공 문풍새나 정약전을 돌보는 순매에 머물지 않으며 흑산 전체를 조망한다. 그들의 삶이 곤궁하고 피폐한 것은 흑산이 검기 때문이다.


김훈은 특유의 담백하고 정결한, 때로는 차갑고 날카로운 필체로 민초들의 이야기를 적어나갔다. 그들이 천주교에 빠져드는 이유는 단순하고 명료했다. 그것이 이미 자신들이 태어날 적부터 알고 있던 것들이기 때문이었다. 자연스럽고 당연한 이치에 백성들은 물들어간다. 물들었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그 이치들은 그들이 날적부터 뼛속에 가지고 태어난 말들이었다. 슬픈 사실은 백성들이 그 자연한 사실들을 마땅하다 여기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착취당하고 희롱당하는 삶을 제 것으로 여기고 묵묵히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여기의 삶을 넘어선 저기의 삶은 무척이나 매력적인 것이었다. 마부 마노리는 황사영으로 부터 배운 놀랍도록 단순하고 당연한 이치가 왜 잘못된 것인지 끝내 알지 못했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도가 아니었다. 북경의 구베아 주교나 황사영은 그에게 마부의 길을 버리지 말 것을 요구하지만 그는 그 말을 애써 담지 않는다. 그는 구베아 주교에게서 받은 은전을 자기 몫으로 하여 주막을 차리겠다는 세속적 꿈을 가진다. 그는 그러한 평범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도 마땅한 것이라 여기고 그릇된 것이라 생각지 못했던 천주교의 가르침이 그릇된 것이라 매도되고 부정당하는 것은 당시 시대의 진실성이 얼마나 어긋난 것이었나 알 수 있게 한다.


여러모로 읽기 어려운 소설이었다. 첫째론 중심 스토리가 없고 인물에 따라 장면도 시간도 뒤죽박죽으로 흘러가 파악이 힘들었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에 얽매이기 보다는 현재를 읽는 것에 치중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모든 등장인물들이 한데 모여 이곳을 만들어내었다. 소설의 이야기는 시작이 없고 끝이 없으며 한 지점만 존재했다. 그 속에서 인물들은 저마다 자연히 숨쉬었고, 갈망했으며, 살아갔다. 그 이미지 속에 빠져버리면 이곳이 그곳인 듯, 저곳이 이곳인 듯 생경해져 헤어나오기 어려웠다. 둘째론 민초들에게 행해진 끔찍한 살육이, 짐짝으로 취급받는 인간의 슬픈 존재들이, 물건처럼 사고팔리는 민초의 가엾은 행보가 소설의 전체를 아우르고 있었다. 그 인간의 것 같지 않은 삶이 언젠가의 인간의 것이었다는 자각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무엇이라 정의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읽고 난 뒤 할 말을 찾기 위해 한참을 망설여야 했다. 짚어나갈 이야기도 없으며, 두드러지는 사건도 없다. 다만 존재하는 것은 막막하고 적적한 누군가들의 삶의 흔적 뿐이다. 그 무겁고 어두운 소설의 무게를 직접 짊어져 보지 않으면 이 소설에 대한 여러 말도 무용할 거란 생각이 든다. 정약전이 흑산의 게와 고향의 게가 모양이 같아 그리움을 느끼듯이, 그곳의 게와 우리네의 게가 모양이 같으므로 그곳과 이곳은 그리 다른 곳이 아닐 것이다. 흑산은 사방이 막힌 섬이고, 유배지이다. 흑산과 육지는 다르지 않고, 흑산과 우리의 현재는 다르지 않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둡고 두려운 흑산을 흑산黑山이 아니라 빛을 맞이할 이곳, 자산玆山으로 인지하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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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노 구라파식 이층집 사계절 1318 문고 68
박선희 지음 / 사계절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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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라파식의 이층집이 처음 생겨났을 때, 그 건물은 동네에서 손꼽히도록 아름다웠다. 화사한 정원과 코발트 빛깔의 베란다. 그것들은 화자의 할아버지가 정성들여 하나하나 만들어낸 것이었고, 가족들은 그 집을 중심으로 화목했다. 하지만 그 단란한 가정의 모습은 이제 할머니가 가진 사진 속에서만 존재한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가족의 모습은 특이하다. 아빠는 PC방에서 폐인이 되어가고, 엄마는 그와 대조적으로 에스프레소 향에 취해 우아하게 살아간다. 언니는 흑인 이슬람교도를 남자친구로 뒀고, 오빠와 새언니는 아이 입양을 준비중이다. 가사로부터 해방되어 취미생활에 빠진 여성의 모습이라던가, 소외되어가는 가장의 모습, 다른 국적의 남자와의 연애라던가, 혈연이 아닌 다른 아이를 가족의 울타리로 편입시키는 모습은 이제는 익숙해져야 할 현대적 가족의 모습이다. 하지만 화자의 가족 사이에선 이러한 요소들이 갈등의 축이 된다.


엄마와 할머니는 같은 추억을 공유한다. 하지만 그것을 대하는 방식에선 차이를 보인다. 할머니가 과거의 추억을 지키고 싶어한다면, 엄마는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한다. 그 차이는 베란다의 부서진 타일을 보는 시선에서 나타난다. 때문에 엄마는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가길 원하고, 할머니는 그대로 머물길 원한다.


아빠와 엄마는 이미 부부간의 관계를 상실했다. 엄마는 남편이 하는 일에 관심이 없고 아빠는 그저 가족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는 생각만으로 폐인이 되어간다. 아빠는 심지어 아내가 카페에서 남 주인과 함께 하는 것을 봤음에도 말이 없다. 아빠는 그저 아빠의 자리만 지킬 뿐이다.


오빠는 새언니와 입양을 결정했다. 모든 가족들이 그것에 대해 반대했지만, 둘은 자신의 고집을 지킨다.


그리고 언니는 흑인 남자친구와 함께 살기 위해 해외 연수를 한다고 속이고 가족을 떠난다.


이것들은 모두 현대화의 맥락에서 이해된다. 오빠와 새언니가 역설하는 것도 그것이다. 언제까지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만이 가족일 수 있느냐는. 그렇게 말하는 둘은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을 가족의 범위에서 제외시키며, 그들만의 새로운 가족을 형성한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들의 그러한 주장은, 굳건했던 할머니마저도 마음을 돌리게 만든다. 집을 나가 다른 할머니와 함께 살겠다는 그녀의 결심은 전근대적인 가족의 모습에서 벗어나겠다는 각오였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양상이 옳기만 한 것인가. 그들이 자신의 주장을 펼칠수록 화목함의 상징이었던 구라파식 이층집은 점점 무너져갔다. 베란다의 타일이 깨지고, 화단의 수도에서 녹물이 나오고, 바닥이 주저앉고, 계단은 삐그덕거리고, 변기도 말썽이다. 결국엔 담까지 무너져 버린다.


결국 화자인 몽주가 마지막에 행한 집 수리는 단순히 무너진 집을 복원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해체된 가족을 결합하는 작업이었다. 성적 소수자인 꽁지머리가 가족의 결합에 땀을 뻘뻘 흘리며 참여하는 것은 묘한 부조화를 이루면서도, 기존에 보여지던 가족의 모습이 현대적 풍토에 반하는 무너져 버려야 할 과거의 모습이 아니라, 그것 나름대로 지켜내야 할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마법의 완성보다, 마법을 이루어나가는 과정과 마법을 부리는 자들의 만족감이 더욱더 중요함을 상징적으로 그려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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