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시대 - 문보영 에세이 매일과 영원 1
문보영 지음 / 민음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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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시대라는 기록집.



4차원이라 공감하기 어려웠다고 해서 살짝 걱정되었는데 이게 재밌었던 걸 보면 나도 좀 4차원인건가 싶은....

일기라기엔 매우 길고 정교하여 에세이를 넘어 소설같기도 하다. 작가가 시인이라는 걸 중간에 알았는데 꽤나 이해가 된다. 어릴때부터 꾸준히 일기를 썼다고 하던데 그래서 이 책에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다 들어있다. 어릴때 쓴 건 아니고 그때의 일기를 보거나 떠올리며 썼으리라.

읽으면서 정확한 표현력과 재밌는 에피소드들에 눈도 맘도 즐거웠지만 이 책은 일기라기 보단 제목이 일기시대인 에세이라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물론 에세이도 일기라면 일기지만. 시인의 일기는 보통 사람의 일기의 수준으로 보자면 넘사벽이다. 이 정도가 일기라면 내 일기는 장롱 속에 평생 쳐박혀야 할지도 모른다 ㅠㅠ

재밌는 남의 기록을 보고자한다면 더없이 재밌는 책이다. 그래도 좀 피로하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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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분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3
윌리엄 포크너 지음, 공진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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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말에 독서모임에 참여했다. 1년만의 오프라인 모임이었다. 코로나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프라인 모임에, 그것도 1시간도 넘게 걸리는 지역에서 하는 모임에 참여하는 데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책이 바로 [소리와 분노]였다. 도대체 몇 년간 세계문학책장에 꽂혀만 있었던 것일까? 이 책이 울부짖는 소리와 분노가 드디어 내 귀에 닿은 듯 나는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이 책의 첫번째 섹션인 1부 벤지 섹션에서부터 난관은 시작된다. 많은 사람들이 1부를 넘어가면 그래도 쉽게 읽을 수 있다고들 하였으나 개인적으로는 2부 퀜틴 섹션이 훨씬 힘들었다. 버지니아울프의 의식의 흐름에 조금은 익숙한 탓인지 벤지섹션의 변주는 긴장되면서 흥미로웠다. 어떤 이들처럼 집요하게 읽지는 않았다. 그저, 시간의 변화를 벤지처럼 감각적으로 느끼고 싶었고 그렇게 읽으려고 했다. 그러니 오히려 더 내 이야기인듯 다가왔다.  1-2-3-4-1-2의 순으로 읽으라는 충고들이 많았다. 그 충고는 새겨들을 만 했다. 두번째 읽은 벤지 섹션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사건을 명명하는 대신 감각(특히 후각)으로 두서없이 표현하는 벤지의 표현력은 관념과 감정에 치우친 퀜틴과 제이슨에 비해 훨씬 객관적이었으며 그 객관성이 주는 아름다움이 내겐 어마어마했다. 이 소설을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색깔 하나로 변주를 드러내는 것이 불친절하다고도 느낄 수 있겠지만 나는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었다. 


두번째 읽은 퀜틴(퀜틴 섹션 = 퀜틴 자신)은 처음 읽은 퀜틴보다는 공감하기 쉬웠으나 그래도 내겐 너무나 벅찬 캐릭터였다. 몰락하는 집안의 기대주로서 집안을 일으켜 세워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을 법도 한데 그는 오직 캐디만을 생각했다. 캐디의 타락과 결혼과 불행을 받아들일 수 없는 퀜틴은 그녀를 구해내지 못한 자신의 과거를 용서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 집안의 문제는 언제나 벤지로부터 시작하는데 퀜틴에게 벤지는 그다지 중요한 의미는 아닌 걸로 봐서 가족으로서의 소속감은 가장 적은 인물이다. 인두 두개를 준비할 정도로 치밀하면서 삶을 나아갈 치밀함을 갖지는 못한 퀜틴에게 공감하기는 여전히 어렵다. 시간과 과거와 인간의 삶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들이 가득찬 퀜틴 섹션을 읽으며 그 관념적인 생각들이 모조리 똥처럼 느껴지는 건 내가 너무 현실화되었기 때문일까? 소싯적 멜랑꼴리와 친했고 오늘 아침에도 감성적이라는 말을 들은 사람으로서 100% 현실적 인물은 아닌데 퀜틴을 이해하기는 두번 모두 어려웠다. 차라리 제이슨을 이해하는 것이 쉬웠다. 


퀜틴의 머릿속을 빠져나오니 3부 제이슨이 기다리고 있었다. 화자가 말하는 시점으로 보자면 1910년 퀜틴을 제외하곤 제이슨은 가장 빠른 날짜인 1928년 4월 6일을 살고 있다. 미스퀜틴(캐디의 딸)을 드잡이하고 빨강 넥타이와 일거에 잡으려는 제이슨의 하루. 그의 하루 동안 내뱉은 말들을 보면 '폭력적'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그래, 엄마의 삐뚤어지고 부담스러운 기대에 진절머리가 날 만도 하지. 아버지도 장남도 아닌데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가족을 부양할 책임을 몽땅 짊어지는 데다가 고용된 흑인 가정까지도 책임을 져야하는 삶의 무게가 내게도 가혹하게 느껴졌다. 오히려 강물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제이슨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살아남을 것이다. 캐디의 돈을 꿍쳐놓으며 엄마와 미스퀜틴을 속이면서도 눈 하나 깜짝 하지 않고 뻔뻔하게 그들 위에 군림하는 제이슨이 옳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기 어려웠을 제이슨이 가엾기도 했다. 


딜지의 시선도 아닌데 딜지 섹션이라 이름붙은 4부.  마지막 장면에서 평소와 다른 방향으로 마차를 모는 것을 못 견딘 벤지가 그간의 끙끙댐이 아니라 울부짖음을 토했다. 그런 벤지와 러스티를 집으로 돌려보내던 제이슨의 말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거칠었지만 왠지 거기에서 나는 이별을 느꼈다. 4부에 딜지를 내세운 것은 교회에서 "제이슨은 집에 집에 오지 않을 거야. 나는 처음과 마지막을 봤어."라는 복선을 드러내기 위함은 아니었을까? 어찌 보면 작가의 생각이 직접적으로 드러난 듯도 하지만 윌리엄 포크너는 대답할 수 없으니 그냥 그렇게 짐작한다. 물론 딜지는 실재적 부모가 없는 콤슨가에서 실질적 모성을 담당하는 인물이니 충분히 하나의 섹션을 차지하는 것이 부당하지 않지만 캐디를 능가할 정도의 존재감은 아니니 딜지의 섹션 그것도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서술되는 4부는 결국 제이슨의 떠남을 말하고자 함이 아닐까? 벤지만 남겨두고 모두가 떠나는 그 마지막을 위해서 말이다. 


천치의 감각에 의존한 문체, 수재의 관념으로 가득찬 문체, 감정을 그대로 대사로 드러낸 문체,  사건의 처음과 끝을 아우르는 듯한 문체.  이처럼 [소리와 분노]는 그 내용적인 면에서는 인간 몰락의 향연같았지만 다양한 문체의 향연이라는 매력도 있다. 내용적인 면은 내가 당시 상황에 대한 배경 지식이 전무하여 복잡한 해석은 할 수 없지만 남북 전쟁이 끝난 후에 몰락된 가정이 어디 콤슨가 뿐이랴? 싶은 생각은 든다. 콤슨가는 당시 몰락할 수 있는 한 가정의 끝판왕으로서 의미가 있으리라. 형식적인 면에서 한 섹션도 차지하지 못했지만 네 개의 섹션에 고르게 존재하는 사랑스러운 캐디에 대해서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다. 벤지에게 친절했던 캐디, 퀜틴을 불안하게 했던 캐디, 제이슨의 도구였던 캐디, 미스 퀜틴의 원천인 캐디. 콤슨 가에 가면 캐디가 사랑스럽고 다정한 미소로 반겨줄 것만 같은데 캐디도 미스퀜틴도 그집에선 살아가기 어려웠을 것이다. 요상한 자존심과 집착으로 사람을 질리게 하는 이 집의 엄마같은 사람이나 있을 수 있는.  그런면에서 타락을 선택한 두 여성을 더 지지하고 싶다. 타락이란 무엇인가? 캐디와 미스퀜틴을 타락이라고 할 수 있나? 그때는 몰라도 지금의 관점에서 그들을 타락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도리어 무너져버린(몰락) 아버지, 퀜틴, 제이슨에 비해 캐디와 미스퀜틴에게선 생명력마저 느낄 수 있었다. 


어려운 소설임은 분명하다만 흥미로운 소설이고 읽고나면 이름 붙이기 어려운 충만한 마음이 드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가지고 다양한 방면으로 해석이 가능한 모양이다. 윌리엄 포크너는 말이 없으니 그 다양한 해석이 모두 신기하다.  내가 둔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제목대로 <소리>와 <분노>는 잘 느끼지 못했다. 소리라곤 벤지의 끙끙거림이요, 분노라곤 제이슨과 미스퀜틴의 폭발이다. 제목이 은유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서 아마 나는 퀜틴을 가장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너무 아픈 은유는 은유가 아니었음을......백치가 된 기분으로 끙끙대다 리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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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의 자리 아니 에르노 컬렉션
아니 에르노 지음, 신유진 옮김 / 1984Books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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얇은 책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단숨에 다 읽어버릴 줄은 몰랐다. 더구나 아버지의 이야기를. 내게 아버지는 아킬레스건과 같은 되도록이면 건드리고 싶지 않은 주제인데 아니에르노의 냉담한 듯 무덤덤한 듯 쓰여진 아버지 이야기에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리고 말았다. 요즘 말로 이 무슨 129?


나의 아버지도 그녀의 아버지도 가난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그 시대 많은 아버지들이 그러했듯 못 배웠지만 가족을 건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삶을 살았고 나의 아버지는 당시 흔치 않게 대학 교육까지 받아 그 시대에 쓰임이 많았음에도 무엇 한 가지 끝을 보지 못한 삶을 살고 있다는 점이리라. 사춘기 소녀 시절엔 못 배운 아버지에게 느끼는 부끄러움이 무책임한 아버지에게 느끼는 부끄러움보다 크겠지만 어른이 되고 나면 전자의 경우 부끄러워한 자신이 더 부끄러워지게 된다. 다음 세대에겐 천하게 느껴지는 삶이어도 그 세대의 삶에서 그것은 어떤 대표성을 띨 만한 삶이므로 그에 대한 명예회복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러하기에 아니 에르노는 이 소설을 쓸 수 있었고 나는 나의 아버지에 대해 아무 것도 쓸 수 없다. 


가진 것이 없는 집안에 태어나 갈수록 머리는 굵어져 눈에 보이는 것도 많아진 딸에게 아버지의 천박함이란 얼마나 멸시하고픈 대상이었을까? 그 멸시는 실제로 아버지에게 닿았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때로는 모르는 척, 때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버티어가며 끝까지 아버지와 딸로서 남았고, 한 세대가 저물고 나서야 다음 세대로서 앞 세대를 위해 '당신 잘 살았구려!'하는 마음의 헌사를 바치고 싶어진 것이리라. 어쩌면 자신의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 내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 기억 하나가 있는데 사춘기 시절 파란 슬리퍼를 신고 마주오는 엄마를 못 본 척 한 것으로 그 죄책감이 지금껏 나를 누르고 있다. 그런데 정작 엄마는 먹고 살기 바빠 그런 것은 예민하게 느끼지 못했다. 아마 아니에르노의 아버지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 시대의 아버지들은 자녀들이 자신들을 부끄러워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 자체가 어려웠을지도 모르겠다. '나 이렇게 열심히 사는데?'이런 마음으로. 그저 예민함은 다음 세대로 넘어가야 하는 자녀들의 몫일 뿐.  그래서 참 다행이기도 하다. 상처를 준 사람은 있는데 상처를 준 사람만 상처를 받는 거니까. 그러니 이 소설은 아버지에 대한 헌사이지만 아버지를 위한 것은 아니다. 그래도 만약 이 소설을 읽는다면 그녀의 아버지는 무척 기쁠 것이다. 


아니 에르노는 가난하고 천박했던 세계에서 부유하고 교양있는 세계로 넘어가는 자신이 그 문턱에 내려놓을 유산으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소설로 썼다. 어쩌면 다음 세대에게 똑같이 멸시의 대상이 될 세계로 들어간 것 뿐일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개인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 넘어가는 그 문턱에 내려놓을 유산이 있는 아니 에르노가 부러웠을까 나는 왜 이 책을 그토록 빨리 읽었나? 내 아버지의 유산은 그 흔한 '아버지처럼 살긴 싫었어!' 뿐인데 그것을 내려놓고 그렇게 문턱을 넘어갈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를 멸시한 세계에 내가 속하게 되었다는 것, 이것이야말로 그의 가장 큰 자부심이요, 심지어는 그의 삶의 이유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 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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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1-06-07 02: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책은 너무 쓰기 힘들 것 같아요. 이걸 썼다는 그 자체로 작가는 정신적으로 어느 지점을 넘어선 성장을 이루지 않았을까 싶네요. 저도 찾아봐야겠습니다.

그렇게혜윰 2021-06-07 07:04   좋아요 1 | URL
심지어 글이 아름답기까지하니 대단한 작가입니다!!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 남성작가 편 - 세계문학의 흐름으로 읽는 한국소설 12 로쟈의 한국문학 수업
이현우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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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 몇 년 한국 근대 소설에 흥미가 생긴 참인데, 이 책은 나의 관심 그 이후인 1960년대에서 2000년대의 소설을 다룬다. 


 학창 시절, 원작은 읽지도 못한 채 달달 외기만 했던 작품이 얼마나 많았을까? 집에 전집이 버젓이 있었음에도  이 책의 첫 소설가 최인훈의 [광장]을 나는 읽어는 봤을까? 이명준의 이름이 낯익은 것은 읽었기 때문일까 외웠기 때문일까? 로쟈의 글을 읽으며 내가 느낀 것은 내가 그 소설을 '모른다'는 것이다. 뒤이어 나오는 이병주는 이름도 처음 듣는데 한 시대의 대표성을 띤다니 놀랐고, 조세희가 남성 작가라는 점에는 무안함을 느꼈다. 

 그나마 읽은 작가는 황석영과 김승옥 뿐이라 이 책을 좀더 풍성하게 읽고 싶어 부랴부랴 시작만 했던 이승우의 [생의 이면]을 마저 읽고 김훈의 [칼의 노래]까지 내리 읽었으니 이 책이, 소개한 책을 읽게 하는 힘은 분명 있다 하겠다. 

 읽지 못한 소설에 대한 내용을 읽는 것과 읽은 소설에 대한 내용을 읽는 것은 천지차이였다. 읽을 땐 고개가 갸웃했던 소설의 어떤 부분이 로쟈의 해석을 통해 명확해지기도 하고 나만의 해석이 생기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이 안의 소설들을 다 읽고 난 후에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명색이 '수업'이니 교과서는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걸 체험했기에 이 책을 모두 제대로 읽기까지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나에게 한국 문학은 여전히 '수업 중'이란 뜻이다. 종강은 내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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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부터 올초까지 역사서를 좀 읽다보니 기분 전환이 필요했다. 머리를 쓰되 안 써도 상관없는, 그런 책을 읽고 싶었다. 추리 소설 말이다. 그래서 오래 전에 읽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할로윈 파티]를 읽었는데 다행히 책을 읽으면 결말을 기억 못하는 능력(?)이 있어 다시 읽어도 단편적인 기억만 날 뿐 범인이 누군지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어 마치 처음 읽는 것처럼 읽을 수 있었다.

 

 

 파티 당일날 한 소녀가 양동이 물에 머리가 빠진 채 죽는다. 파티에 참석했던 모두가 용의자.  단서는 허풍쟁이 소녀 조이스가 "살인을 목격한 적이 있다"고 한 말 뿐. 포와로의 탐문과 고민이 당연히 범인을 찾아내겠지만 도대체 조이스가 봤다는 그 살인 사건은 누가 저지른 것일까? 그 말의 진위를 찾아가는 재미로 읽었다.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사연이 숨겨졌다. 재산, 치정 그리고 약간 비현실적이랄까 신화적인 느낌도 들어 있다. 




추리 소설은 추리 소설을 부른달까? 내가 추리 소설을 읽는 동안 아들은 <명탐정 코난>에 빠져버렸다. 특히 검은 조직과의 관련성이 궁금한 모양이다. 애니메이션 시리즈부터 극장판까지 섭렵하더니 요샌 만화책도 읽는다. 
















난 미미여사의 스기무라탐정 시리즈를 시작해보았다. 미미여사의 소설은 에도 시대물만 재밌게 읽었고 [화차]가 유명하대서 읽으려다 초반에 넘 잔인해서 포기한 경험이 있었는데 스기무라 탐정은 따뜻한(?) 느낌이 들어 읽기에 나쁘지 않았다. 


 재벌가 딸과 이혼 후 다케나카 가에서 방 하나를 얻어 탐정 사무소를 연 스기무라. 이 책에는 요양원에 갇힌 딸을 못 만나게 된 어머니의 의뢰로 시작하는 [절대 영도],  조카의 결혼식에 딸을 보내며 스기무라를 동행인으로 요청한 고사키 여사 자매의 사연으르 담은 [화촉],  아들을 볼모로 돈을 뜯어내고자 하는 구치다 미코의 의뢰를 해결하는 [어제가 없으면 내일도 없다.]가 실려있다. 


첫번째 이야기는 불쾌했고, 두번째 이야기는 깔끔했고, 세번째 이야기는 안타까웠다.  스기무라를 더 읽어봐야겠다. 


오랜만에 가가 형사도 읽었다. 가가 교이치로가 형사가 되기 전, 진로를 교사로 정한 대학 4학년 때의 이야기. 친한 친구 셋이 죽은 대학 졸업반의 사연이 그를 형사로 만든 거겠지? 


 히가시노게이고의 추리 소설은 때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나뉘지만 가가 형사 이야기만큼은 믿을 수 있다. 제목이 [졸업]이라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의 학원물 추리 소설인가 했는데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 그런데 셋이나 죽다니, 그런 일은 현실에서 가능할까? 


이 책을 읽으며 자살은 어쩌면 도덕적인 사람이 하는 것이겠지만 자신의 양심을 견디지 못해 그 죗값을 주변 인물들에게 지우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미나미사와 선생님은 그런 의미에서 참 어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실을 피하는 법만 가르쳤다. 


한편으로 고민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목숨을 끊게 되는 일을 스스로 경계하기 위해서는 고민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지기 전에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한 사람의 목숨은 한 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아이를 키우면서 추리 소설을 마냥 재미로만은 읽을 수 없다. 내가 누군가를 책임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가 한니발 같은 류의 범죄 소설은 피하게 된다. 그런 면에서 애거서 크리스티, 미야베 미유키, 히가시노 게이고는 안전하다.  물론 명탐정 코난도. 근데 왜 코난은 우리말이 더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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