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교육
로맹 가리 지음, 한선예 옮김 / 책세상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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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주말에 문득 스스로의 무지에 놀라 '나만 모르는 소설가들, 나만 안읽은 소설들'이라는 페이퍼(http://blog.aladin.co.kr/tiel93/6463792)를 쓴 적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한 2년 전쯤까지만 해도 로맹 가리 또한 그런 소설가들 중에 하나였고, 그의 소설이라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의 제목만 들어본 때였다. 그러다 우연히 소식(아주 오래된 소식이지만 내게는 새로운 소식)을 들었다. 콩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 작가가 바로 로맹 가리이며 그의 다른 이름은 에밀 아자르라는 것이다. '다 아는데 또 나만 모르는건가?'싶은 마음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지만 최소한 로맹 가리를 알고, 로맹 가리의 소설을 세권째 읽는다는 사실만은 다행스럽다. 에밀 아자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생>은 메시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사랑스러웠다. 사랑이라는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린 아이의 시각으로 서술한 덕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흰 개>의 로맹 가리는 냉소적이고 직설적이었다. '도대체 이 작가의 정체가 무엇이지?'라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자기 앞의 생>이 술술 잘 읽혔다면 <흰 개>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에밀 아자르의 책보다 로맹 가리의 책이 더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그의 책을 내가 즐겨 읽을 수 있을까 하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유럽의 교육>은 그의 첫 장편 소설이었고 당시 베스트셀러가 된 소설이라고 한다. 이 책의 개정판이 올해 초에 나왔을 무렵 로맹 가리를 좋아하는 독자들에게 큰 관심을 끌기도 했지만 정작 유명해진 것은 도서전에서 대통령이 구매했기 때문이었다. 대통령이 이 책을 고를 때 이 책이 교육정책과 관련된 줄 알고 골랐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는 한 개인으로서 무턱대고 이 책을 산 사람들이 로맹 가리의 이 소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심히 궁금해진다. 하지만 그들은 최소한 이 책을 흥미롭게 읽었을 것이라고는 생각한다. 내 염려와 달리 이 책은 <흰 개>보다는 훨씬 흡입력이 있었고,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야네크와 함께 했다.

 

최근 몇 년간 세계대전과 관련된 여러 편의 책을 읽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내 배경 지식은 '히틀러 나쁜 놈'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는데 이 달에 그 당시의 책 두 편을 읽자하니 스스로에게 꿀밤을 먹이고 싶어졌다. 어쩌면 생각이 이리 단순한지, 다각도에서 그 당시를 알고 싶어졌다. 독일과 유대인의 문제를 넘어 유럽 전반의 문제로 더 넓혀 세계적인 시각에서 당시를 이해하고 싶었다. 당시에 살았던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었고, 더 깊이 안타까워하고 더 따뜻하게 이해하고 싶었다. '유럽의 교육'을 바라보는 야네크와 도브란스키의 반대되는 입장 모두를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고 싶어졌다. 도대체 히틀러는 왜 그런 전쟁을 벌였고, 독일 사람들은 어떻게 하다가 그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며, 유럽은 어쩌자고 그를 그대로 두었단 말인가? 의문스러웠다. 독일군의 아버지이였지만 그런 독일을 마음 아파하는 아우구스투스 슈뢰더의 모습, 순수하다고 착각하는 아내를 위해 목숨을 희생한 변호사 스타니슬라브 스타히에비치의 행동을 이해하는 척하기 보다는 진짜로 공감하고 이해하고 싶었다. 야네크의 입장과 도브란스키의 입장을 공평하게 받아들이기 보다는 야네크의 입장에서 좀더 화를 내고 싶어졌다. 그의 말처럼 그 유명한 유럽의 교육이 가르치는 것은 결국, 자기한테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사람을 죽이는 데 소용이 될 만한 그럴싸한 이유들과 용기를 찾아내는 법일 뿐(328쪽)이라는 것에 동조하고 싶어졌다. 지금 대한민국에서도 유효한 그 말에.

 

나는 참 어정쩡하다. 절망과 희망의 그 정가운데에서 어느 쪽을 봐야할 지 언제나 모르는 상태인 듯 하다. 그 둘이 함께 한 폴란드의 한 숲속의 묘한 아름다움이 쉬이 잊힐 것 같지는 않다. 아마 나처럼 불완전한 채 어정쩡한,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희망을 품는 묘한 상태라는 것이 인간이 세상에 자리하는 좌표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해 보지만 그래도 늘 어정쩡한 스스로에게 조금은 답답함이 느껴진다. 지금 '대한민국의 교육'은 무엇을 가르치고 있으며, 나는 야네크와 도브란스키 중 누구의 마음인지 조금 더 생각해 보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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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래빗 시리즈 10종 세트 - 전10권 베아트릭스 포터 베스트 콜렉션
베아트릭스 포터 글.그림, 김동근 옮김 / 소와다리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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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권 세트로 나왔기에 소장가치 있구요. 참고로 EBS영미문학관 2013년 2월에 방송한 피터래빗 읽어주기와 함께하면 더 좋아요. 전 요즘 목아파서 그걸로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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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 여동생 중국 아동문학 100년 대표선 1
펑슈에쥔 지음, 펑팅 그림, 유소영 옮김 / 보림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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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가 주는 아련함이 있다. 복숭아꽃이 만발하던 때에 태어난 아타오의 막내 여동생, 책에서 표현한 것처럼 딱히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맑은 아기 냄새가 풍기던 그리고 그 냄새를 맡을 때마다 마음이 몽글몽글 흐물흐물해지던 그 막내 여동생을 보는 것 같다. 이 말은 비유이기도 하고, 사실이기도 하다. 그 여동생은 아들을 바라던 아타오 아빠의 여섯번째 딸이고 이름도 우리말로 하면 육순이쯤 되는 류타오이다.(언니들은 아타오, 얼타오, 싼타오, 쓰타오, 우타오로 우리말로하면 일순이, 이순이, 삼순이, 사순이, 오순이 쯤 된다.) 이번에도 딸이면 복숭아나무를 벤다고 했던 아빠의 대단한 기대에 부응하지못한 류타오, 이야기는 그런 류타오에게서 시작한다.

 

책을 읽으면서 오래 전 나도 어릴 적에 방영되었던 드라마 <아들과 딸>이 떠올랐다. 그땐 귀남이와 귀남이 부모를 욕하면서 봤지만 그런 사람은 주변에 늘 있었다. 아마 요즘에 태어난 아이들은 생각치도 못할 일이지만 나만 해도 '남아선호사상'을 어른이 될 때까지 인식하며 살았다. 한동안 잊었던 그것이 생각나서 류타오는 태어나면서부터 내게 연민의 대상이 되었다. 아마, 이야기 속의 모든 인물에게 그렇게 다가왔을 것이다. 하지만 류타오가 여동생으로 태어났기에 이 책의 모든 형제애는 더 애틋해진다. 그런 점에서 훌륭한 구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는 도시에서 온 간부의 딸인 '나'의 아홉살부터 2년 간의 묘족 마을 생활을 다룬다. 한족이고 도시 사람인 '나'의 가족들은 분명 이질적인 구성원이지만 2년간의 기억은 분명 따뜻하게 느껴진다. 그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아타오의 가족이고 그 애정의 시작은 류타오였다. 딸이 여섯이 된 가난한 집은 그럭저럭 화목하지만 여느 형제많은 집들이 그러하듯 모두가 사이가 좋을 수는 없다. 싼타오와 쓰타오처럼 한 뱃속에서 나와도 정반대인 아이들은 여느 집에든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결국 피를 나눈 자매이기에 결정적인 계기를 함께 견디다보면 세상 둘도 없는 짝이 된다.

 

'나'에게도 라오볜이라는 여동생이 있지만 아주 각별한 것도, 그렇다고 자주 싸우는 것도 아닌 그런 여동생이다. 우리가 문득 여동생을 떠올릴 때의 바로 그런 느낌이다. 하지만 여섯 자매인 아타오의 형제애, 가령 류타오를 향한 아타오의 극진한 사랑이나 싼타오와 쓰타오의 끈끈해진 사랑을 통해 '내 여동생'인 라오볜을 생각하는 마음이 달라지는 것이다. 라오볜에게 새 샌들을 사주기 위해 돌을 깨는 일을 하며 돈을 모으던 '나'의 모습을 보면서 내 여동생을 떠올렸다. 진짜 내 여동생. 새 샌들을 자랑하는 라오볜을 보면서 내 동생에게 잘해주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내'가 아타오를 통해 라오볜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생겼듯이 나 역시 '나'를 통해 내 동생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생긴 것이다.

 

그 후 며칠 동안 라오볜은 기분이 들떠 있었다. 집에 붙어 있지 않고 걸핏하면 밖으로 뛰쳐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군가 살짝 신발에 눈길만 주어도 바로 '언니가 돌 깨는 일을 해서 사줬어요!'라고 떠들어 댔다. 그렇지 않으면 좀이 쑤시는 듯 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 때마다 나는 행복하면서도 가슴이 조금 아릿했다. (105-106쪽)

 

미안했고, 저런 기분을 동생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행복하면서도 가슴이 조금 아릿한 그 감정을 느끼고 싶었다. 오래 떨어져 살면서 남보다도 더 대화를 적게 하고 남보다도 사정을 더 모르고 남에게 준 만큼도 해주지 못한 것이 내내 미안해졌다. 뭔가 동생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는데 현실은 지금 내가 동생을 좀 힘들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거워졌다. '빨리 보고 싶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데?' 하던 어제의 메시지가 떠올라 더 미안해졌다. 내가 그렇게 무뚝뚝한 언니였구나 싶었다. 작게나마 기쁘게 해 줄 궁리를 해 봐야겠다. 라오볜의 웃음처럼 밝고 맑은 웃음을 터뜨릴 것을 상상하니 내 마음이 꼭 '나'의 마음 같다. 그 마음이 아타오의 마음이고 싼타오의 마음이고 우리 모든 언니들의 마음일 것이다.

 

중국 소설을 몇 편 읽었지만 그들은 너무 무거웠다. 잘 알지 못하는 문화대혁명 시기를 이야기하는 통에 인물이나 그들의 인간적인 삶을 잘 들여다보지 못했다. 중국 동화로는 두번째 읽는 이 이야기가 나는 소설들보다 더 좋았다. 어쩌면 지나간 우리의 시절을 돌아보는 듯도 했지만 현재의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기도 했다. 제목이 '너는 내 동생'이 아니라 '너는 내 여동생'이라 더 애틋했는지도 모르겠다. '女'라는 말이 이렇게 끈끈하게 다가오다니, 세상의 모든 자매들에게 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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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을 두드리다
장은진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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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가슴 한 켠 허전하고 생각이 많아진다. 예전엔 사랑을 하면 그외 모든 관심사는 ZERO에 가까웠는데 요즘은 사랑의 한 켠에 쓸쓸함이 자리한다. 서른이 넘은 결혼 7년차의 여자의 가슴을 수다나 가족과의 일상으로 채우기엔 부족함이 많다. 오히려 기계적인 수다나 반복적인 일상은 빈 가슴을 더욱 비게 만들 뿐 외로움과 쓸쓸함, 허전함을 시간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 같다.

 

빈집을 두드릴 때마다 공허한 소리가 메아리처럼 흘러나와 내 가슴을 두드린다. 그 가슴도 텅 비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빈집을 두드리는 이유> 중

 

장은진 작가의 소설 속 인물들은 매우 독특하다. 전기를 먹는 여자([그녀의 집은 누구인가])도 있고, 만나는 사람에게 번호를 부여하며 편지를 쓰며 떠도는 남자([아무도 편지하지 않다])도 있다. [빈집을 두드리다]에 나오는 인물들도 모두 나름 독특하다. 남의 집에서 혼자 개를 돌보는 일을 하는 여자, 잠을 자기 위해 수면실을 찾는 남자, 티슈를 뿌리는 남자, 책을 찢고 연락처를 남기는 남자 등등 어떤 벽癖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일곱 편의 소설 속 인물들이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나처럼 외롭다. 딱 나처럼. 내가 '그녀'처럼 생판 모르는 사람의 짐을 보관하거나 그에 대해 궁금해하는 성격도 아니고, '그'처럼 함께 보는 책을 찢어놓을만큼 과감한 성격도 아니지만 소설 속 '그녀'와 '그' 들의 마음이 꼭 나 같다.

 

그들이 나 같다고 느끼는 데에는 그들의 어떤 벽이 실제로 나의 행동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꿈이나 잠으로서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 것(<나는 나를 가둔다>)이나 티슈는 아니지만 SNS를 날리는 의도가 다분히 외로움과 답답함 한 자락을 보여주려는 것(<티슈, 지붕, 그리고 하얀 구두 신은 고양이>), 누군가 말을 걸어오는 게 귀찮아서 책을 읽으면서도 마음 한켠으로는 외롭지 않기 위해 책을 읽는 태도(<나무인형>)는 소설 속 주인공들과 내가 매우 흡사하다.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반항 혹은 일탈로 보이는 책을 찢는 행위(<페이지들>)나 어디든 찾아가지만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어정쩡한 거리감에 대한 혼란으로 관계를 맺는 행위(<찾아가는 도서관>)는 어쩐지 내가 꿈에서라도 한 번쯤 했을 것만 같은 행동들이다. 그만큼 그들은 모두 나를 닮아 허전하다. 텅빈 가슴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쁜 이웃>의 그녀 역시 우리 사회에서 스스럼없이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게는 영웅과 같다. 어쩜, 저렇게 행동할 수가 있담!  

 

마음 속 깊이 외로우면서 독특한 벽을 지닌 일곱 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향이 다분함에도 불구하고 모두 한결같이 착하다. 순하다. 어쩌면 이 인물들이 모두 작가 속에서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이 미칠 때쯤 한없이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작가는 이 소설 속의 인물들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다. 나를 닮은 그 인물들을 말이다. 나 역시 이 인물들을 사랑하게 되고, 이 소설을 쓴 작가마저 사랑하게 된다. 또 자연스레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내가 사는 삶이 안쓰럽기도하고 애틋하기도 해진다. 그리 착하고 순한 사람이 아닌데 스스로를 착하고 순한 사람대하듯 애처롭게 그리고 사랑스럽게 바라보게 된다. 누군가 안아주면 좋겠는데.....소설 속 인물들이 책에 안겼듯이 나도 그저 책에 안기는 것이다.

 

책에 안기면서 생각해본다. 나는 무엇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지, 나를 외롭게 만들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어떤 사람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물을 때 쯤이면 사실 눈시울이 붉어진다. 나는 무엇이 두려워서 잠으로 도피하고자 하고 삶을 꿈에 의지하는지, 누군가의 빈집을 두드려서라도 나의 빈 가슴을 채우고 싶어하는 이 마음은 도대체 외로움인지 답답함인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그래서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인물들을 통해 묻고 들여다본다. 그것만으로도 사실은 나로선 큰 용기를 낸 것이고, 그 용기만으로도 사실 치유가 된다. 물론 얼마나 오래갈 지는 늘 어정쩡하고 비겁한 나는 잘 모른다. 

 

작가의 세 번 째 작품을 읽었기에 모든 작품을 읽은 사람처럼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빈집을 두드리다]는 내게 장은진이라는 작가의 색깔을 더 깊게 만들어준 책이다. 일곱 편 모두가 다른 인물, 다른 상황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은 그것이 장은진이라는 사람의 색깔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도 매일 매일 살아가는 모든 삶의 모습이 결국은 나의 색깔이듯이 말이다. 오늘은 어떤 색깔로 살게 될까, 장은진 소설가의 다음 색깔은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하루를 시작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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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예쁜 여자입니다
김희아 지음 / 김영사on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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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직감적으로 눈물 바람 좀 일겠구나 싶어 사실 망설였었다. 단순히 반어적 제목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이름은 예쁜 여자입니다>는 제목도 신파를 더하는 요소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초반만 읽어도 그녀는 나를 웃게 했다. 후에 그녀의 큰딸인 예은이가 인정해 준 '자신감'은 그녀가 태어나면서 갖고 나온 그녀의 반점이나 허물어진 얼굴보다도 더 강력한 그녀의 본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한 엄마에 대한 감사를 또 한 번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하고 있는 지도.

 

 기본적으로 김희아 씨는 유머가 많은 사람이다.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있고,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안면 장애로 인해 자신의 본성을 억눌러야했으니 그 심정이 얼마나 깊이 슬펐을지는 겪어보지 않아도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런데 그녀는 그 슬픔 대신 긍정의 힘인 감사의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교육이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그 역시도 그녀의 본성이었으니 사람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것과 가지고 있는 것을 스스로 맞춰가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그녀를 통해 증명되었다. 그녀에게 가질 수 없는 것은 부모, 예쁜 얼굴, 건강한 몸이었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긍정적 성격, 자신감, 사랑받을 자격이었다. 그녀는 가질 수 없는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극대화시켜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가질 수 없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불가능했기에 더 가능했을 지도 모를 어쩌면 아이러니한 결과물이었으리라. 가질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명확하였기에 포기가 더 빨랐고 그로인해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던 점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해 주는 바가 크다고 본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미련을 두고 가지고 있는 것을 소홀히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 돌아보게 된다.

 

오늘 나에게 없는 걸 찾으면 불행합니다. 그 대신 나에게 있는 걸 찾아가면 감사합니다. (292쪽)

 

  그녀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강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손 치더라도 그 삶의 운용은 존경스럽다. 왜 울지 않았겠으며, 왜 아프지 않았겠으며, 왜 죽고 싶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행복하게 웃고,  건강하게 자신의 모두를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아이가 자신을 부끄러워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부분은 엄마라면 누구나 함께 염려하는 부분인데, 그때 나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아주어 내가 더 고맙다. 그런 엄마의 의지를 알기에 예은이 예지도 감사하며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이 어릴 때 느꼈던 '허기'의 감정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 더 힘을 내어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김희아 씨의 모습에 강한 모성애를 느낀다. 자신은 받아본 적 없는 엄마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마음껏 주고 자식을 통해 치유하는 모습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사실 일반 사람들도 어릴 적부터 언제나 화목한 가정은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 어릴 적 유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가정집 사람들도 다 고민이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경험이 김희아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는 자식을 낳으면서 안다. 그 아이로 인해 내 삶이 치유받는 바로 그 느낌을. 예은이가 "엄마! 엄마는 엄마가 없어서 불쌍하다."(262쪽)라던가 역할 놀이를 하면서 "아이고, 우리 아기, 배고파?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맘마 해줄게."(260쪽)라고 말했던 것에서 김희아씨가 큰 치유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제 그녀에게 허기의 감정 대신 감사의 마음이 들어 섰다. 내 마음 속의 허기를 짚어본다. 아직 남아있는 것도 같다.

 

 나는 김희아 씨의 강연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보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풀어놓은 300여 쪽의 그녀의 이야기에서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녀를 별스럽게 찾아 보고 싶은 마음이 달리 생기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신 내 안의 허기를 짚어보고 그것을 채울 다른 것을 생각해보고 싶어진다. 사랑을 받는 느낌, 사랑을 주는 느낌이 아주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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