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위터를 통해 이상북을 알게 되었고 호기심이 생겼다. 하지만 호기심만으로 대상에게 접근하는 것은 일종의 폭력이 될 수 있기에 알아보기로 하고 도서관에서 주인장 윤성근의 책 두 권을 빌렸다.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과 [심야책방]. 이 두 권이면 이상북에 대한 기본 지식(?)은 알게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결론은, 용기있는 분이라는 생각 그리고 그 용기에 대한 인정과 이해를 하는 이가 많으니 행복한 분이라는 생각이다. 책을 좋아하기에 비슷한 점이 많지만 아마 걷는 삶이 다르다는 점이 그와 나의 가장 큰 차이를 만드는 것 같다. 그 차이를 좁혀가고 싶기에 한 번은 꼭 들르고 싶고, 가까이 산다면 수시로 들르고 싶어지는 곳이 바로 이상북이다.

 

어릴 때는 책이 그냥 옆에 있으면 좋았다. 그것뿐이었다. 나는 책에게 욕심을 부리지 않았고 책도 나한테 무얼 바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나와 책은 친구였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그런데 지금은 책을 보면서 버릇없이 욕심이나 부리고 있었다. 문제는 누구도 아닌 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고 참 부끄러웠다. 책을 보면 책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그걸 못 했던 거다.  (32-33쪽)

 

--> 문득 책 초판일을 기준으로 언니, 친구, 동생으로 불러야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든다. 동생으로 보면 내가 너무 만만하게 보려나??^^ 어쨌든, 책은 책이다.

 

 

더 많이 가지려고 하지 말고 더 좋은 거 가지려고 하지 말고, 그저 여기 있는 내 앞에 있는 사과 한 쪽이면 충분하다는 말. 그게 바로 생명이고 평화다. (77쪽)

 

--> 도법 스님 즉문즉설 시간에 윤성근씨가 느낀 점인데 문장은 매끄럽지 못하지만(^^) 이상북의 철학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나 역시도 새겨들을 말이다.

 

아이가 편식을 하면 엄마가 혼낸다.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라 골고루 먹어야 건강해지기 때문이다. 책도 편식하는 사람이 있다. 로맨스 소설만 읽는 사람, 무협지만 읽는 사람, 돈 버는 책만 읽는 사람, 처세 책만 읽는 사람, 증권 투자 책만 읽는 사람. 이런 사람들에게 책이란 그냥 맛 좋은 사탕일 뿐이다. 입맛에 맞는 달콤한 사탕을 매일 입에 달고 살면 이가 상한다. 건강도 나빠진다. 자기가 좋아하지도 않는 책을 몇 시간씩 투자해서 읽으라고 강요하는 건 아니지만 자기만의 책 세상에 빠져 다른 책들을 무시하는 마음이 문제가 된다. 그런 사람들은 무조건 어떤 분야 책이 좋다고 하고 다른 책은 멸시한다. 고전은 고전 나름대로 좋고 가벼운 에세이는 에세이 나름대로 다 좋은 건데, 책에 귀천을 따지는 건 좋지 않다. (151-152쪽)

 

--> 책에 귀천을 보인도 따지시는 것 같은데 ㅎㅎ 좋은 책과 좋지 않은 책은 분명 있는 것 같다. 아마 좋은 책 내에서의 귀천을 따지지 말자는 뜻 같다. 책 읽은 사람들 중 교만한 사람 적지 않다는 것도 인정한다. 경계해야 할 점이다.

 

살면서 건방을 떨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알았다. 어떤 작가는 책 하나를 쓰려고 자기 지식을 모두 담아내고, 또 어떤 번역가는 그걸 번역하는 데 자기 인생의 많은 부분을 쏟는다. 누가 더 대단한 일을 한 건지는 따질 수 없다. 문제는 그런 책 한 권을 아무렇지도 않게 서점에서 만 얼마에 사서 읽다가 책장 어딘가에 처박아 두는 내 모습이다. 눈 없고, 귀 없고, 입 없고, 손도 발도 없는 책이지만 그 앞에서 더욱 겸손해야겠다. 책은 내게 밥, 살면서 없어서는 안 되는 귀중한 밥이다. (229쪽)

 

--> 가끔 너무나 고마운 책들이 있다. 저자의 노고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책들. 이 자릴 빌어 고마움을 전한다. 연탄재라는 시가 떠오른다. 뜨거움으로 만들어진 책들이다.

 

 

오늘부터 한 5일간 가족 여행을 떠난다. 남편이 내게 육아 면제 쿠폰을 주었다. 여행동안 숙소에만 있어도 좋단다. 책 잔뜩 가져가서 읽어보고 싶다. [심야 책방]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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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구효서 작가의 소설을 몇 편 연달아 읽었고, 그 깊고 넓은 이야기에 푹 빠져들었었다. 하지만 내가 정작 제일 먼저 작가의 소설을 읽게 된 것은 바로 [별명의 달인]을 비롯한 그의 단편들이었다. 그리고 드디어 [별명의 달인]이란 이름을 걸고 이번에 신간 소설집이 출간되었다. 나온다 나온다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알리미 문자를 받고 보니 설렌다.

 

<목차>

 

바소 콘티누오 ‥‥‥‥‥‥『현대문학』 2011년 2월호
별명의 달인 ‥‥‥‥‥‥『세계의 문학』 2010년 겨울호
모란꽃 ‥‥‥‥‥‥『문학동네』 2008년 가을호
6431-워딩.hwp ‥‥‥‥‥‥『학산문학』 2012년 봄호
산딸나무가 있는 풍경 ‥‥‥‥‥‥『대산문화』 2012년 봄호
화양연화 ‥‥‥‥‥‥『문학나무』2011년 겨울호
저 좀 봐줘요 ‥‥‥‥‥‥『현대문학』 2012년 7월호
나뭇가지에 앉은 새 ‥‥‥‥‥‥『현대문학』 2009년 12월호

 

 

우와 이 센스 있는 목차 좀 보게! 목차에 이렇게 발표지면이 실려있다니!

 

구효서 작가의 소설을 읽으면서 가장 놀랐던 것은 깊이와 넓이(이것은 오래 글을 쓰신 소설의 달인들의 소설을 읽다보면 대부분 느끼게 된다.)보다 글에서 느껴지는 세련되고 젊은 감각이었다.  다른 소설들을 읽어보아도 토속과 고귀함을 넘나들고 안정과 실험을 동시에 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런 다양한 시도들이 작가의 글을 늙지 않게 하는 힘이겠구나 싶다.  마치 이 소설 속에 멋스러움과 가당찮음의 경계([6431.hwp])라는 말이 나오는데 구효서의 소설이 그 둘을 동시에 오간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일단, 읽은 바 각각의 작품에 대한 짧은 후감과 밑줄 친 것들을 올려본다. 더불어 한 번 더 읽게 될텐데 그후 리뷰를 남겨보길 스스로에게 바라본다. 막연한 듯 선명하고, 길을 보여주는 듯 슬쩍 감추는 통에 사실 재주없는 글로서 정리를 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 다만, 그 단단한 느낌을 품고 있을 뿐이다.

 

<바소 콘티누오>를 읽다보면 마주본다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꼭 마주보아야 마주보는 것인가 하는 생각, 같이 하고 있다면 그것이 마주본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하는 생각. 이를테면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과 같은.

두 사람에게 오랫동안 익숙한 것이다. 그렇게, 함께하는 응시의 순간들이 모여 세월이라는 시간의 숲을 이루었다. 숲은 길어지고 우거지고 깊어졌으나 등뒤 풍경으로만 저물어갈 뿐, 그들은 그것을 뒤돌아보지 않는다. 나란히 앞을 바라보는 사이 배경의 숲은 저 홀로 그윽해질 뿐이다.

 

<별명의 달인>을 읽으면서는 타인에 대한 내 마음대로의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가 만들어버린 타인의 이미지에 대한 강박,,,없을까? 분명 있을 것이다.

와이프 별명이 베아트리체였어.

라즈니시가 말했다.

애칭이었지. 물론 내가 지어준. 와이프도 나름 그걸 소중하게 여기며 지금껏 살아왔다고 믿었는데 어느 날 나한테 말하더군.

라즈니시 입술에 옅은 미소 같은 게 스쳤다. 그렇게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뭐랬는데?

그가 물었다.

웃기지 마셔. 나, 베아트리체 아니거덩!

 

<모란꽃>은 내가 여자라 그런지 삶을 살수록 공허한 느낌이 드는 탓인지 다음 문장에 공감하며 몰입했다.

 어쩌면 어떤 실체와 맞닥뜨리고 싶었을 것이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은 지금껏, 나와 동떨어져 있었으니까. 무엇 하나 나와 착 붙어 있질 않았다. 늘 거리감이 있었고, 비켜났고, 부유하는 듯했고, 비위가 상했고, 불명확했다. 애착을 못 느꼈다. 그랬으면서, 그랬기 때문에, 바로 이거다! 라는 기분을 언제나 목말라 했다. 어딘가에 내 진짜 삶이 준비돼 있는데 길을 잘못 들어 그곳을 못 찾고 있을 뿐이라 생각하면 애가 탔다. ------집이 점점 가까워졌다. 뒤돌아, 왔던 길로 가버리고 싶었다. 어딘가에 있을 내 별로.

 

<6431-워딩.hwp>은 왠지 구효서 소설가가 소설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느낌을 받았다.

나에겐 말과 글이 따로일 수 없다. 허공 중에 흩어지되 무시로 부메랑처럼 되돌아와 거듭 뜻을 일깨우는 게 형의 말이라면, 내 말은 언제든 다시 들춰볼 수 있는 글이된다. 그렇게 지금껏 적은 글이 6430개의 파일로 남았다.

말의 궤적이었다. 지나온 자국으로서의 궤적이 아니라, 내 삶이 나아가고자 했던 이정표로서의 궤적.

 

<산딸나무가 있는 풍경>은 좁은 사회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혈연 뿐이겠는가 우리가 누군가를 배제하는 일이. 그들은 그자리에서 튀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하는 만큼의 삶을 그대로 살아가고 있다.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그 모호한 거리를 두면서 말이다.

말이 될 수 없는 많은 것들을 품고 산딸나무는 새 자리에, 있을 수 있을 만큼 서 있을 것이다. 당신은 새집에서 살 만큼 살 것이다. 나는 마을을 오르내리며 기념관의 지붕과 마당과 산딸나무를 바라볼 것이다. 개울은 원래 그랬다는 듯 흐를 것이고, 은백양 잎은 바람에 하얗게 뒤집힐 것이다. 정화백의 그림처럼.

 

사랑에 대한 기억으로는 <화양연화>에 나오는 '넌 정말 나와 너무 똑같아서 슬프다'라는 구절이 추억에 젖게 한하다. 그런 사랑,,,

 

<저 좀 봐줘요>는 다른 작품들과 사뭇 다른 느낌이 들기도 했다. 몽환적이기도 하고, 은비라는 존재가 신비롭기도 하다. 이국적이기도 하고 토속적이기도 한 느낌이 공존하는 단편이었다. 소설이지만 어떤 영상이 펼쳐지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나뭇가지에 앉은 새>는 삶의 피로감이랄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했다.

재주와 웃음은 의도된 분망 뒤의 허약함까지 다 감추진 못했다. 마침내 태평양 끝까지 다다르고야 만 고단함. 더이상 오갈 수 없는 교착. 누나는 사이판 동북단 반자이 절벽 위에 표표히 옷자락 나부끼며 홀로 서 있는 거였다.

 

이미 많은 팬들이 있는 구효서 작가이지만 만약 작가의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 소설집으로 시작해도 좋을 것 같다. <바소 콘티누오>가 재밌다면 <랩소디 인 베를린>을 읽어보면 좋겠고,  <산딸나무가 있는 풍경>이나 <저 좀 바줘요>가 재밌다면 <라디오 라디오>도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다. 나도 작가의 모든 작품을 읽어본 것은 아니라 권할 수 있는 것은 이 정도이지만 시작은 [별명의 달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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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거침없이 말하던 사람이었던가, 싶었다. 오래 전 읽었던 문장에서 힘과 명쾌함을 느꼈던 기억이 아련히 남아있기는 한데 이번엔 이렇게 거침이 없었던가 하는 놀라움으로 다가왔다. 그 거침없음이 역시 명쾌했다.

  <동의보감>을 의학서라는 한정적 개념에서 벗어나 철학서로까지 확장한 책이다. 몸과 몸, 여성, 사랑, 가족, 교육, 정치사회, 경제, 운명을 특유의 문체로 쉽게 <동의 보감> 혹은 동양철학 속에서 잘 버무렸다만 뒤로 갈수록 거침없음이 조금은 완화된 듯 느껴졌다. 몸, 여성, 사랑, 가족을 이야기할 때가 좀더 좋았다.

 

1장 몸 VS 몸

 

스마트폰의 진군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물은 바 있다. 그럼 몸은 대체 어디에 쓰란 말인가? 그 답이 여기 있다. 몸은 오직 장식용이었던 것이다. 몸을 어떻게 장식하느냐가 경쟁이고 스펙이다. 하여, 성형은 아름다움에 대한 원초적 발로가 아니다. 이 욕망에는 명백하게 척도와 목표가 있다. 작은 얼굴, 8등신에 S라인, 식스팩은 기본이고 허벅지는 일자로 쭉 뻗어야 한다. 쉽게 말하면 쇼윈도의 마네킹이 기준이다. 모두가 이 몸을 향해 달려간다.  (19쪽)

 

진정으로 타인들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기운의 배치를 바꾸어야 한다. 활발하면서도 여유있게. 그래서 성형은 미친 짓이다. 보톡스만 맞아도 표정이 사라지는데 전신을 다 헤집어 놓으면 대체 무엇으로 소통을 한단 말인가? 결국 성형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우월감이다. 타인과의 교감이 아니라 인정욕망이다. 전자는 충만감을 생산하지만, 후자는 결핍을 생산한다. 그리고 그 공간에선 상처와 번뇌만이 숙성된다. 성형천국, 마음지옥! (21쪽) 

 

 

2장에서도 성형에 대한 고미숙의 발언은 거침이 없다. 모든 성형에 대해 강경하게 맞서는 그녀의 비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지만 물건을 사듯 얼굴과 몸을 고치는 현대 사회의 성형 문화를 생각하면 누군가는 그녀처럼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야하지 않은가 싶기도 한데 요즘은 그것을 일종의 문화로 인식하여 성형을 하고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을 문화인으로 인식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허용적이다. 내 얼굴과 몸을 사랑할지어다! 그리고 활발하고 여유있게 표정을 지어볼지어다!!

 

 

2장 몸과 여성

 

폐경기 이후 여성성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아주 다른 방식으로 훨씬 더 넓고 깊게 고양된다. 무엇보다 가족과 혈연의 틀을 벗어나 공동체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다. 원시문화에서 폐경기의 여성들은 '지혜의 피'를 보유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다. 따라서 월경을 하는 여성들보다 훨씬 강력한 힘을 지닌다고 여겨졌다. 부족의 모든 결정에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운명과 미래에 대한 예지력이 생기는 것도 바로 이때다.(64쪽) 

폐경기에 대한 그녀의 해석과 응원은 아름답다.

 

3장 몸과 사랑

 

문명이 발달하면 삶이 더 여유로워져야 하지 않나? 혼인 적령기가 늦어지는 건 그렇다 치자. 청춘의 목표가 단지 결혼은 아니니까. 대신 청춘의 에로스를 발산할 수 있는 다양한 길들이 있어야 한다. 그렇기는커녕 보다시피 더더욱 협소해졌다. 그렇다고 생체주기가 달라진 건 아니다. 오히려 영양 과잉으로 '성적 조숙증'이 늘어나는 추세다. 결국 생리적으로는 조숙해지는데, 정신적 사회적 연령은 한없이 느려지고 있는 셈이다. 문명과 자연 사이의 엄청난 간극과 소외! 여기가 바로 번뇌와 망상이 발생하는 원천이다. (74쪽)

 

문명과 자연의 간극, 어떻게 해소해야 할까? 성에 대한 지나친 엄숙함, 우리가 언제쯤 벗어날 수 있을까? 한쪽에선 완전히 벗어나고 한쪽은 여전히 조선시대 사대부집안인데 그 간극부터 어찌 없애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어떻게? 그걸 모른다는 게 문제다 ㅠㅠ

 

4장 몸과 가족

 

아기를 업으면 엄마는 아기한테 집중하기보다 어느 정도는 자신의 일을 할 수 있다. 청소를 하고, 책을 보고, 음악을 듣고. 아기가 등 위에서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는 것처럼 엄마 또한 자신의 일상을 확보할 수 있는 것이다. 요컨대, 서로가 서로에게 배경이 되는 관계, 엄마와 아기가 각자 자신의 삶을 확충해 갈 수 있는 관계, 엄마의 등은 그것을 훈련할 수 있는 최고의 현장이다. 그러니 부디 안지 말고 업어라! (118쪽) 

양기 덩어리인 아기는 음기 덩어리인 할머니가 업고 있는 게 가장 좋단다. 친정엄마에게 고마워해야 할 시간^^

 

5장 몸과 교육

 

"3세에서 10세까지의 소아는 그 성품이나 기질을 보면 수명을 알 수 있다. ------어릴 때 식견과 지혜가 뛰어나면 장수하기 어렵다. ------일찍 앉거나 일찍 걷거나, 치아가 일찍 나거나, 말을 일찍 하는 것은 모두 성품이 나쁘니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한다." [동의보감] '소아'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요컨대, 빨리 뭔가를 터득하는 것은 성품이나 기질, 수명 등에서 아주 불리하다는 것. (152쪽)

비단 아이 뿐이랴, 어른들 중에도 뭔가 지나치게 자신을 달구어 빨리 하는 사람들이 성품, 기질, 수명에서 아주 불리하다는 것을 적잖이 봐왔다. 인간을 인간의 속도에 맞춰야지 문명의 속도에 맞추면 불리하다는 말!

 

6장 몸과 정치 사회

 

스펙터클의 정치는 언제나 쇼로, 쇼는 또 노래와 춤 같은 공연예술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것만이 원초적 본능이라고 착각하지 마시라. 그에 못지않게 아니 더 강렬한 것이 '서사 본능'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언어를 떠나서는 살 수 없는 '호모 로퀜스'이기 때문이다. "스스로 말하는 것을 언이라고 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답하는 것을 어라고 한다."([동의보감]) 다시 말해서 언어는 자신과의 소통이자 타자와의 능동적 교감행위이다. 이 소통과 교감의 욕망이 서사를 구성한다. (168쪽)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우주에 살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개별 인생에도 얼마나 많은 변수들이 존재하겠는가. 인간이 원초적으로 프리랜서라는 건 이런 이치에서다. 프리랜서는 말 그대로 '길 위의 인생'이다. 어떠한 조직과 지위 보장도 없지만 그렇기에 매 순간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표현할 수 있다. 욕망과 능력의 일치! 그래서 자유롭다. 하여, 나는 늘 궁금하다. 정규직은 과연 자신 안에 이런 열망이 들끓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182쪽)

 미스 김 언니가 생각나는군. 앞으로의 사회는 비정규직 사회라고 한다. 수명이 엄청 늘어나니까, 나의 노년은 멋진 프리랜서였으면 좋겠다.

 

7장과 8장은 통독. 다만, 브리콜라주의 경제학이라는 용어가 맘에 든다. 주어진 재료를 가지고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내는 인디언의 기술. 너 맘에 든다. 좋다 좋아, 딱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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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터뷰] 자타공인 고전평론가 고미숙, 근대성을 말하다
    from 책으로 여는 지혜의 인드라망, 북드라망 출판사 2014-05-12 14:09 
    우리의 신체와 무의식에 새겨진 '근대성'에 대한 탐사! 1. 선생님께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고전평론가’이시고, 그간의 저작활동에 비춰봤을 때, 이번에 출간하신 책들이 이라는 데에 놀라는 독자들도 적지 않을 듯합니다. 독자들의 머릿속에는 ‘고미숙=고전’이라는 등식이 자리하고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일단은 ‘근대성이 뭐지? 왜 고전평론가가 저런 문제를 다뤘지?’라는 의문이 먼저 들 것 같은데요. “근대, 그러면 지금 우리 시대도..
 
 
 

 

이 그림이 가장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어린 왕자의 몸을 지워버린 가장 완성된 환유의 표현이기 때무이다. 이 풍경이 좀더 '분명한' 것은 보이는 풍경 속에 보이지 않는 '어린' 왕자를 감추어 놓았기 때문이다. (72-73쪽)

 

어린 왕자 속 '환유'에 대한 설명이다. 이 문장을 설명하기 위해 한 페이지 가량의 각주를 달아 덧붙였다. 이 앞에 어린 왕자의 주제에 관한 이해를 돕는 설명 역시 독자로서 번역자의 해석을 신뢰하게 하는 부분이었지만 중요한 내용 같아 올리지 않는다. 이 책은 '어린 왕자'를 다시 읽고 싶게 한다.

 

"---나를 괴롭히는 것은 그 울퉁불퉁한 몸뚱이도 그 누추함도 아니고 다만 그 한 사람, 한 사람 안에서 모차르트가 살해당한다는 사실이다. '정신'의 바람이 진흙 위로 불어야만 비로소 '인간'은 창조된다." [인간의 대지]

 「어린 왕자」는 바로 우리들 각자의 내면 깊은 곳에 잠재하는 모차르트를 살려내고 진흙에 정신의 바람을 불어넣기 위하여 쓰여진 한 편의 단순하고 위대한 우화이다. (84-85쪽)

 

이 책에서는 [어린 왕자]뿐만 아니라 생텍쥐페리 전 작품을 아울러 생텍쥐페리의 문학에 대해 설명한다. 이 책을 통해 [인간의 대지]라는 책 역시 읽고 싶어졌다. 내 마음 속 모차르트는 대체 얼마나 깊이 잠들어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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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나온 계간지를 보러 간만에 오전에 도서관 정기간행물실을 갔다. <문학동네 여름호>와 <문학사상 여름호>가 새로 꽂혀 있었다. 주어진 시간에 비해(점심 때 가족들에게 비빔 국수를 만들어주기로 약속했던 터라^^;) 야심차게도 두 권을 발췌독 하마 벼르고 있었지만 결국 오늘은 <문학동네 여름호>만 보고 왔다. <문학사상 여름호>도 슬쩍 봤는데 사실 확 끌리는 꼭지가 없어서....ㅎㅎ

 

도서관 책이니 밑줄을 긋지는 못하고 관심있는 텍스트를 읽고 좋은 부분은 트윗으로 기록하고, 좋은 시는 옮겨적어보았다.

 

 

 

 표지에 있는 두 분의 시인과 두 분의 소설가, 중 나는 시인들만 안다. 내가 특히 약한 것이 여자 소설가(잉?)인데 두 분은 이름이나마 아는 분도 있고 그렇지도 못한 분도 있다. 그래서 두 분 시인에 대한 글을 찾아 읽었다. 먼저, 이성복 시인과 신형철 평론가의 대담.

 

 읽으면서 이성복 시인의 카리스마에 매료되었다. 신형철 평론가의 글담도 아주 사람을 쥐락펴락 한다고 느꼈었는데 이번만큼 신형철 평론가가 기에 눌린듯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성복 시인의 모든 말들이 마치 어떤 경지에 도달한 사람의 말씀을 듣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굳이 골라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을 트윗에 남겼는데 현재 자그마치 리트윗이 25회에, 관심글이 18회이다.

 

쓴 나도 왜 썼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첫 행을 썼기 때문에 두번째 행을 썼고, 두번째 행을 썼으므로 세번째 행을 썼습니다.
-이성복, 문학동네 계간지 2013여름.

 

 

  트위터 시작하고 이렇게 폭풍 리트윗되기는 처음이라 이성복 시인의 이 말씀이 모두에게 통하는 역시나 어떤 말씀에 가까운 진리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지금 읽고 있는 <우울할 땐 니체>라는 책에 보면 인간은 신도 믿고 진리도 믿는다던데, 과장을 좀 하자면 시인은 지금 신적이기도 하고 진리적이기도 한 말씀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두번째로 읽은 텍스트는 <시인론 윤경희 거미집과 마블링―오은의 시쓰기>이었는데 비록 내가 <<호텔 타셸의 돼지들>>도 읽고 좋아하기는 하지만 독자로서 그의 최근 시집에 대한 이해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우리는 분위기를 사랑해>>를 읽은 것이 더 최근이기도 하여 시들도 아직 머릿속에 비교적 좋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거론된 시들이 <<호텔 타셸의 돼지들>>이 많아 굳이 오래 전 기억을 더듬었어야하는 불편함이 있어 기대와 달라 아쉬웠다. 이럴 줄 알았으면 <<호텔 타셸의 돼지들>>을 다시 한 번 읽고 오는 건데, 하는 아쉬움마저 들게 했다. 오은 시인의 신작 시 세 편은 여전히 좋았다. <절반이라는 짠한 말>이라는 시가 마지막으로 갈수록 좋았고, <아저씨>라는 시의 제목이 참 맘에 들었다. 끝행도.

 

시선을 거두는 자들은
반만큼
절반만큼
딱 절반만큼만 짠해졌다

나머지 말은 가슴 어디께 있었다.

- 오은<절반이라는 짠한 말>

 

문학동네 계간지는 책이 두꺼워 그런지 시도 비교적 많이 실려 있어서 참 좋다. 이번 호에서 새롭게 좋은 시인을 만나게되어 또 기뻤다. 시인 장승리. 사실 나는 그분의 시를 처음 만나는 듯 하다.(기억력에 자신은 없다만.) 두 편의 시가 살짝 시크한 느낌도 들고 사물들간의 입장을 바꿔보는 느낌이 들어 좋았다. 사실 시가 좋을 때에는 이유를 대기가 어렵다. 그냥 좋은 거다. 그래서 긴 시 한 편을 옮겨 적어 보았다. 특히 2연을 읽으면서 이 시에 빠지게 되어 2연이 지금도 참 좋다.

 

 

계간지를 구독하고 또 도서관에서 읽다보면 단시일내에 정독하기가 난 어렵다. 사실 시간을 길게 두고도 계간지 전체를 정독한 경험이 없는 듯 하다(아마 이건 기억력의 상태와 무관하게 확실할 거다.). 계간지가 주는 고마움을 알면서도 모든 계간지를 구독하지 못하는 독자의 마음, 이해해주시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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