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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예쁜 여자입니다
김희아 지음 / 김영사on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사실,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직감적으로 눈물 바람 좀 일겠구나 싶어 사실 망설였었다. 단순히 반어적 제목이라고만 생각했던 <내 이름은 예쁜 여자입니다>는 제목도 신파를 더하는 요소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초반만 읽어도 그녀는 나를 웃게 했다. 후에 그녀의 큰딸인 예은이가 인정해 준 '자신감'은 그녀가 태어나면서 갖고 나온 그녀의 반점이나 허물어진 얼굴보다도 더 강력한 그녀의 본질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지금까지도 찾지 못한 엄마에 대한 감사를 또 한 번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하고 있는 지도.
기본적으로 김희아 씨는 유머가 많은 사람이다. 긍정적이고, 자신감이 있고, 남 앞에 나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안면 장애로 인해 자신의 본성을 억눌러야했으니 그 심정이 얼마나 깊이 슬펐을지는 겪어보지 않아도 짐작되고도 남는다. 그런데 그녀는 그 슬픔 대신 긍정의 힘인 감사의 마음을 가지기로 했다. 그것은 누군가의 교육이나 어쩔 수 없는 선택이 아니라 그 역시도 그녀의 본성이었으니 사람은 누구나 가질 수 없는 것과 가지고 있는 것을 스스로 맞춰가며 살아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 그녀를 통해 증명되었다. 그녀에게 가질 수 없는 것은 부모, 예쁜 얼굴, 건강한 몸이었고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긍정적 성격, 자신감, 사랑받을 자격이었다. 그녀는 가질 수 없는 것은 과감히 포기하고 가지고 있는 것을 극대화시켜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만들었다. 그것은 그녀가 가질 수 없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그것보다 훨씬 더 불가능했기에 더 가능했을 지도 모를 어쩌면 아이러니한 결과물이었으리라. 가질 수 없는 것이 너무도 명확하였기에 포기가 더 빨랐고 그로인해 가지고 있는 것에 집중할 수 있었던 점은 보통 사람들에게도 느끼게 해 주는 바가 크다고 본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미련을 두고 가지고 있는 것을 소홀히 대하는 우리들의 모습, 돌아보게 된다.
오늘 나에게 없는 걸 찾으면 불행합니다. 그 대신 나에게 있는 걸 찾아가면 감사합니다. (292쪽)
그녀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강점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손 치더라도 그 삶의 운용은 존경스럽다. 왜 울지 않았겠으며, 왜 아프지 않았겠으며, 왜 죽고 싶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행복하게 웃고, 건강하게 자신의 모두를 드러내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아이가 자신을 부끄러워하면 어쩌나 걱정하는 부분은 엄마라면 누구나 함께 염려하는 부분인데, 그때 나쁘거나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아주어 내가 더 고맙다. 그런 엄마의 의지를 알기에 예은이 예지도 감사하며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이 어릴 때 느꼈던 '허기'의 감정을 자식들에게는 물려주지 않으려 더 힘을 내어 건강한 정신으로 살아가는 김희아 씨의 모습에 강한 모성애를 느낀다. 자신은 받아본 적 없는 엄마의 사랑이지만 그 사랑을 마음껏 주고 자식을 통해 치유하는 모습은 보통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사실 일반 사람들도 어릴 적부터 언제나 화목한 가정은 생각보다는 많지 않다. 어릴 적 유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가정집 사람들도 다 고민이 있는 것이니까. 그런 경험이 김희아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우리는 자식을 낳으면서 안다. 그 아이로 인해 내 삶이 치유받는 바로 그 느낌을. 예은이가 "엄마! 엄마는 엄마가 없어서 불쌍하다."(262쪽)라던가 역할 놀이를 하면서 "아이고, 우리 아기, 배고파? 조금만 기다려. 엄마가 맘마 해줄게."(260쪽)라고 말했던 것에서 김희아씨가 큰 치유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제 그녀에게 허기의 감정 대신 감사의 마음이 들어 섰다. 내 마음 속의 허기를 짚어본다. 아직 남아있는 것도 같다.
나는 김희아 씨의 강연을 보지 못했다. 어쩌면 보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녀가 풀어놓은 300여 쪽의 그녀의 이야기에서 그녀가 하고자 하는 말을 다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녀를 별스럽게 찾아 보고 싶은 마음이 달리 생기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신 내 안의 허기를 짚어보고 그것을 채울 다른 것을 생각해보고 싶어진다. 사랑을 받는 느낌, 사랑을 주는 느낌이 아주 소중하다는 것을 새삼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