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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너로 살고 있니 마음산책 짧은 소설
김숨 지음, 임수진 그림 / 마음산책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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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말 김숨 작가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당신의 신. http://blog.aladin.co.kr/tiel93/9800904 ) 읽고 나서 그 소설이 무척 마음에 들었고 작가의 다른 소설이 궁금하던 차에 지인이 생일을 축하한다며 책 선물을 해 준다기에 이 책을 골랐다.

 

작가의 결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서울에서 경주로 식물 인간이 된 한 여자의 간병인으로 나서게 된 주인공(한선희)이 환자를 바라보는 시선에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포개어 자꾸만 내면으로 깊이 깊이 들어가는 소설이라 작가의 결은 [당신의 신]에서와 같이 섬세했다. 하지만 내면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 터라 소설적인 느낌 보다는 자서전이나 에세이를 읽는 느낌이 강한 소설이다.

 

이 소설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은 '그 문장을 나는 어디서 읽었을까요?'이다. 그 글들을 모으면 어떤 하나의 글이 되지 않을까 싶어 일단 모아서 옮겨 적어보기도 했다.  아직은 어떤 통일성을 찾은 건 아니다. 기시감. 자꾸만 불쑥 떠오르는 출처를 알 수 없는 문장들처럼 선희는 환자를 보며 자꾸만 불쑥 까닭을 알 수 없이 자신이 떠오른다. 불안하고 외로운 자신을 그녀에게라도 기대고 싶었던 걸까?

 

 

 

육체와 정신의 영역에서 간병인과 환자의 역할이 교차하는 곳 병원. 그 안에서 그녀는 자꾸만 자신의 안으로 들어가는 질문과 답을 하지만 그녀가 종래에는 그녀로 살게 되었는가 하는 답은 어쩌면 중요하지 않다. 이토록 질문과 답을 혼자 주거니받거니 하면 그녀는 아마 그녀로 살게 되는 것에 가깝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을 수가 없다. 공부도 그렇게 하면 학자가 될 정도니까. 하지만 그 여부보다  중요한 것은 나로 태어나 나로 살아가고 싶다는 욕망과 그 욕망을 지속한다는 사실이 아닐까? 다 고만고만하게 살고 있으니 고만고만하게 사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암묵적 폭력에 저항하여 나로 살고 싶다고 발버둥치는 그 태도가 중요한 게 아닐까? 그렇다면 난 그 부분에선 잘 살고 있는 것 같다. 애쓰고 있다.

 

이 소설에 기대하는 것은 독자인 나를 어루만져주고 독자인 내가 내 안에 깊이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점이었다. 아쉽게도 그 부분은 작가가 작가의 안에 깊이 들어가려고 애쓴 나머지 다소 분리되는 지점이 있었다. 아마 이 소설을 통해 작가가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내게 더 가까이 가닿지 못해 못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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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명의 여자 - 문학사를 바꾼 불꽃의 작가들
리디 살베르 지음, 백선희 옮김 / 뮤진트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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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말에 이 책을 구입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버지니아 울프를 좋아하는 나로선 그녀의 이름과 그녀의 모습이 담긴 이 책을 지나치기 어려웠다. 책에는 아름다운 작가 7명의 이름이 있다. 모두 여자들이다. 19세와 20세기 초반에 나고 자란 그녀들의 세상은 지금 여성들의 삶 보다도 훨씬 벽이 많았을 것이다. 이들 중 내가 아는 이름은 에밀리 브론테, 실비아 플라스, 버지니아 울프 밖에 없었고 다행히 이 세 사람의 책은 집에도 있었다(물론 이건 다 읽었다는 말과는 무관하다.).

 

책을 받고 보니 2015년에 나온 책이 아직도 1쇄였다. 이토록 아름다운 표지와 작가들의 이름들이 담긴 이 책이 왜 1쇄일까? 출판사가 유명하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그저 그들의 이름을 갖다붙인 그저그런 책이기 때문일까? 염려 반 기대 반으로 이 책을 올해 들어 읽는 첫 책으로 골라 읽기 시작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도 모르겠다. 이렇게 괜찮은 책이 왜 아직 1쇄냔 말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에서 에밀리 브론테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사실 에밀리와 샬럿에 대한 부분이 매번 헷갈렸다만 이 책 덕분에 더이상은 헷갈리지 않을 것 같다.) 샬럿에 대해선 다소 비판적이었지만 에밀리에 대해선 찬사를 하던 내용을. 에밀리 브론테가 독자들에게 좋게 인식되기 시작한 데에는 버지니아 울프의 역할이 크다고 하니 역시 멋진사람은 멋진 사람을 알아보는 건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에밀리 브론테는 내가 아는 것 이상 고집이 센 멋진 사람이었다.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우리가 아는 그 개츠비도 에밀리가 만든 히스클리프를 빼다박았으니 현대의 많은 작가들도 그녀에게 빚이 있을 것이다. 캐서린이 아닌 히스클리프를 더 닮은 그녀를 더 알고 싶은데 우리에겐 그저 [폭풍의 언덕]만 있을 뿐이니 몹시 안타깝다. 그 마저도 우리 집에선 행적이 묘연하다. 한때 여러 판본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왜 하나도 없는가?

 

이후 등장한 주나 반스를 읽으며 이 사람이 분명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 찾아보았다.

바로 저 여인, 주인공과 신나게 춤을 추는 저 여인이다. 이 책에서와 달리 영화는 그녀 보단 거트루트 스타인에 더 비중을 두었었지. 아무튼 역사의 한 자락에서도 멋진 여성이었던 주나 반스, 당시 인정받았던 사람들의 그 잣대를 인정하지 않았던 여인, 그러나 우리나라에 아직 번역본이 없는 모양이다. 근 백년을 장수했다는 대목에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마음 속에 불을 어떻게 90년이나 끌어안고 살았을까? 격렬한 생이다. 

 

실비아 플라스는 유별난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었다. 재능이 아니라 그녀가 삶을 대하는 태도가 말이다. 모든 여성은 아이를 낳고 집안일을 하다 보면 도대체 나란 어디에 있는 존재인가,를 고민하고 괴로워한다. 물론 경중의 차이는 있겠고 작가적 감수성이 있는 그녀로선 좀더 중했기에 삶이 쉽지 않았을 테지만 그녀를 유별나다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이 더 내 삶에 가깝게 느껴져 안타까웠다. 비교적 최근의 인물이라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이들과 시, 사랑과 지저분한 냄비 사이에서 어떻게 균형을 찾아야 할까? (111쪽)

이 균형의 결과물이 [벨자]라고 하니 꼭 읽어봐야겠다. 

 

지난 주엔 까페꼼마에 들러 차를 마시다 문학동네 세계문학 중에 콜레트의 작품이 있다는 것을 떠올려 [여명]을 구입했다. 사실 당장 사려고 했던 것은 아닌데 첫문장을 읽는데 내가 이 책에서 느꼈던 콜레트가 고스란히 느껴져서 살 수 밖에 없었다. 일곱 명의 여자들 모두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애썼다는 점이 무척 마음이 아프다. 나 역시도 늘 자기 자신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데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싸움을 통해 얻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금도 그런데 그녀들이 살았던 시대엔 얼마나 별종으로 보였을 것인가.

 

어느 한 편을 들지 않고 늘 내적 자유를 지키기 위해 애쓴 사람으로는 마리나 츠베타예바만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쪽이다 싶으면 저쪽으로, 저쪽이다 싶으면 이쪽으로 좀 억지스럽더라도 바깥에 있으려 애썼던 사람이었는데 그녀의 책은 겨우 단편집 속에 한 작품 실려 번역되어 있으니 참 속상하다.(참고하시라 쯔베따예바로 검색해야 나온다. 창비세계문학이므로.) 바깥에 있다는 건, 아무래도 내겐 도통 용기가 나지 않는 일이다. 그녀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서간집이 있다면 읽어보고 싶어진다. 편지 만큼 개인을 속속들이 알려주는 것도 없을 것이다. 일기도 그렇겠지만.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선 사실 나머지 사람들보다 많이 알려져 있기에 새로운 내용을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그녀에게 인정의 욕구가 강하게 있었다는 것은 새로웠고 그녀가 죽음에 반응하는 속도가 나와 닮아 놀랐다. 리디 살베르가 몇번이고 읽었다던 [올랜도]를 사서 읽어봐야겠다.

 

파울 첼란의 이름보다 덜 유명한 건지 아니면 나만 그녀를 몰랐던 건지 잉에보르크 바흐만은 그래도 국내 번역본이 적지 않은 작가였다. 상반된 두 배경을 품고 살아야했던 그녀에겐 일종의 균형감각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그러지 않곤 죄의식 혹은 반항심으로 폭발했을 테니까.

 

작가가 이들 일곱 명의 작가들에게는 그들만의 리듬이 있다고 했다. 그들만의 리듬이 사회적 배경과 어울리지 않았기에 힘들었던 삶을 살았지만 그들의 리듬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알고 있다. 한때는 아마 그녀들을 불안의 덩어리로 폄하하고 연약하고 가련한 이미지를 심어주려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이 여자들을 만나고 나면 그들의 강인함에 감동하게 된다. 그렇게까지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애썼구나, 손쉽게 타협하지 않느라 애썼구나 싶은 생각이 들면 내가 쌈닭이 되는 것쯤이야 해볼 만한 일이 아닌가 싶어 웃음이 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생각을 갖게 되는 데에는 저자 리디 살베르의 필력도 큰 몫을 한다. 특히 툭툭 튀어나오는 유머가 정말 끝내준다. 이제 내가 할 일은 이 책의 저자들의 책을 골라 모아두고 하나씩 읽는 일이다. 올해 안에 해 보고 싶다. 이 책을 곁에 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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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신
김숨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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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읽지 않았었을까 했는데 이번에 처음 김숨 작가의 소설을 읽는다. 책 뒷 표지에 붉은 글씨로 쓰인 책 속 한 구절 때문에.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신'이라고 하니 좀 과하게 보일까? 그럼 '엄마'는 어떨까? '가사도우미'는 너무 적나라한가? 어릴 적부터 가족 제도에 회의적이었던 터라 결혼을 하는 것 자체도 많이 망설였다. 그러나 여느 사람들처럼 여차저차해서 결혼을 하게 되고 무려 10년을 가정을 꾸리며 살고 있다. 회의적이었던 탓일까, 나는 부부라는 관계가 너무나 얇은 유리판 같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서로 다른, 아주 많이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일반적으로 우리 사회의 남녀는 아주 많은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 그 가치관의 차이가 어떤 충돌을 할 때 그 유리판은 마치 금방이라도 깨질 것만 같다. 결혼 초부터 나는 적지 않게 그 말을 해왔었다. "난 당신 엄마가 아니야. 그런 건 당신 엄마한테 해달라고 했었어야지 그것도 아주 어릴 때." 너무 자존심을 건드렸을까? 에둘러 표현하는 법을 몰라 늘 같은 곳에서 충돌을 하곤 한다. 비록 내가 '가사 도우미'라고 여겨지게까지는 하지 않는 남편이지만 그것이 그렇게 칭찬받을 일은 아니라고 한다면 내가 너무 야박한걸까? 자글자글 유리에 금이 간 것은 아내들의 눈에만 보이는 것일까?

 

 

시대가 변하고 분명 나아지기도 했지만, 그 나아진 것으로 만족하며 살기엔 이 시대의 여자들은 이미 알게 되었다. 남편도 아내도 서로의 '도우미'도, '엄마'도, '신'도 되어선 안된다는 것을. 그것을 누누이 표현하지만 이 시대의 남편들은 아직 느끼지 못한다. "내가 이만하면 괜찮은 남편이지."라고 자위한다.

 

폭력은 소설 <이혼> 속의 민정의 아버지처럼 물리적 폭력만을 말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은 그저 부부 사이의 폭력성을 알기 쉽게 드러내줄 뿐 생각 보다 많은 폭력들이 가정 내에 존재하지 않겠는가. 상처나면 복구되지 않는 감정을 품고 경험을 수 십년간 공유해야 한다는 사실이 숨막히다. 민정이 남편에게 한 말이 무척 담백하면서도 와닿았다.

 

"이혼이 나는 통과의례 같아. 나도, 당신도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 시속 백이십 킬로로 고속도로 위를 달리다 만난 터널처럼......."

 

"나는 이혼이라는 통과의례가 내게 불행이 아니기를 바라......"

 

농당 반 진담 반으로 결혼 생활 20주년엔 모두 이혼을 하게 법으로 정해놓자는 말을 했었다. 그래서인지 이 '통과의례'라는 말이 무척 마음에 든다.

 

<읍산 요금소>나 <새의 장례식>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폭력성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본다. 나는 요금소 안이 그저 답답할 것이라 막연하게 생각할 뿐 그녀들의 삶에 대해 무관심했다. 매 맞는 아내와 매 맞는 아이의 삶도 나완 별개니 안타깝되 적극적으로 감정을 개입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아주 미미하게 더 신경이 쓰이겠지만 행동의 변화를 가져올 정도로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때문에 이 소설들을 읽으며 소설가라는 직업이 무척 힘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들의 삶으로 발을 꾸욱 집어넣고 살아가는 동안 작가는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그저 '신'이라는 말 속에 담긴 결혼 생활의 부담감과 억압을 온몸으로 느낄 뿐이다. 내겐 그것만으로도 벅차다. 김숨 작가라면 펼처놓은 이야기에 더 나를 집어넣어도 좋겠다는 그런 생각을 하며 새로운 그녀의 소설책을 읽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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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의 도서관 - 호메로스에서 케인스까지 99권으로 읽는 3,000년 세계사
올리버 티얼 지음, 정유선 옮김 / 생각정거장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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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알베르토 망구엘을 좋아하고 책에 관한 글이라면 단연 그의 글을 꼽았다. 그 생각이 바뀐 정도는 아니지만 이번에 이 책을 선택하면서 그보다 좀더 부드럽게 다가온 또다른 망구엘을 만나게 되었다.  올리버 티얼.  https://interestingliterature.com/

 

망구엘이 쓴 [독서의 역사]는 학술서적의 느낌이 강한 반면 (나한테만 그랬을까?)올리버 티얼이 쓴 [비밀의 도서관]은 제목만 보더라도 에세이적이다. 고대 시대에서부터 현대시대에 이르기까지 꼭 기억해야 할 99권(세어보진 않았지만 작가가 마지막 책을 소개하면서 99라는 말을 했으므로 그렇게 믿고)을 소개하고 독자를 책의 역사속으로 이끌고 있다. 

 

도서관 서가에서 이 책을 골라 읽게 된 지라 책에 표시를 할 수 없어 목차를 여러 번 복사하여 앞뒤 한 장으로 만든 후에  읽은 책, 읽고 싶어진 책, 메모를 표시하며 책을 읽어나갔다. 이런 때가 있다. 빌린 책인데 읽고 있는 도중 소유하고 싶어질 때. 굳이 그런 경우 구입하는 예는 잘 없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고 안타까웠지만 그럴 때의 재미도 있다. 더 애틋하게 읽는다고나 할까?

 

지난 주말 [리어 왕]을 연극으로 보고 세익스피어에 대한 부분을 다시 읽어보기도 했다. 아마 이 책에 실린 책들을 읽게 된다면 이 책이 또 뒤적거려 보고 싶을 것이다. 그만큼 이 책에는 각 책에 대한 내용이 짧지만 흥미롭게, 흥미롭지만 가볍지 않게 다뤄져 책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은 길잡이 된다.

 

간혹 마침표가 사라지고 100년의 세월이 오류가 나곤 했지만 그건 그저 안타까울 뿐이지 책의 가치를 크게 훼손하지 않는다.  그가  만든 '비블리오즈미아bibliosmia'라는 말처럼 책의 오래된 향기를 전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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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빌 백작의 범죄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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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신기하게도 늘 밝은 이야기는 아닌데도 무거운 느낌이 들진 않는다. 이번 소설 [느빌 백작의 범죄]도 마찬가지인데, 사실 이전에 읽은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의 내용이 기억이 나지 않다가 이 책을 통해 '아! 아멜리 노통브를 내가 이래서 좋아했구나!'하며 다시금 서가의 아멜리 노통브 책들을 보며 웃었더랬다. 다만 오스카와일드의 <아서 새빌경의 범죄>를 읽으려고 단편집을 챙겼는데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버려 결국 그 작품은 읽어보지 못한 채 리뷰를 쓰는 점이 무척 아쉽다.

 

한때 골프클럽 라벤스타인을 화려하게 운영했으나 현재는 쇠락한 느빌 백작의 플뤼비에성에서의 마지막 파티를 준비하던 중 막내딸 세리외즈를 보호하던 점쟁이 포르탕뒤에르 부인은 느빌 백작에게 어마무시한 예언을 한다. "그 잔치에서 백작님은 초대된 손님 하나를 죽이게 될 겁니다." 이런 예언을 듣고 마음 편할 강심장이 어디 있을까? 여느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느빌 백작 역시 그말을 믿지 않으려 애쓰면서도 믿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인데 세리외즈마저 그 대상을 자기로 해달라는 요청을 하니 정말이지 미치고 팔딱 뛸 노릇이다. 마지막에 느빌 백작이 세리외즈에게 말하듯이 그는 정말 잘 준비하고 싶었던 파티를 그 생각으로 인해 심적으로 무척 괴로운 나날들을 보낸다. 비록 잔치는 여느 때보다 성대하고 손님들 역시 기쁘게 보낼 지라도.

 

결국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 아무 일도 없다면 소설에서 점쟁이는 필요조차 없는 인물이 될 테니 초대받은 손님들 중 한 사람은 느빌에 의해 죽게 된다. 그런데 말이라는 게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한 말은 점쟁이의 예언을 두고 한 말이 아닐까? 하긴 그 말의 꼬투리를 세리외즈도 잡아 자기를 죽여달라고 한 것이니만치 아멜리노통브는 말의 예민함을 잘 아는 작가이다. 과연 느빌은 손님을 어떻게 죽이게 될까?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답게 이 작품의 결말 역시 유머로 마무리된다. 어찌 보면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녀의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만족할 만한 결론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무척이나 약한 것이라 누군가가 조금만 흔들어도 쉽게 무너지곤 한다. 느빌 백작의 입장이 되면 누구나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 흔들리는 과정, 그리고 그것을 자꾸만 세차게 흔들어대는 세리외즈라는 속삭임에 반응하는 느빌 백작의 심리 상태를 통해 내 마음의 두께도 그리 견고하지 못함을 깨닫는다. 느빌이 그렇게까지 몸부림치지 않았어도 일어날 일은 다 일어나고 그것에 대하여 그가 할 수 있는 결국 아무 것도 없음을 부정하고 싶으면서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수없이 흔들린다. 매일 매일 그렇게 흔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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